낡은 빌라의 위층과 아래층은 바닥 두께만큼 가깝다. 삼십 센티미터 남짓. 그러나 그 얇은 틈새를 사이에 두고 두 여자가 마주 설 때, 거리는 갑자기 우주가 된다. “삼백조 킬로미터.” 심아진 소설집 《신의 한 수》(도서출판 강)의 표제작은, 가까울수록 더 멀어지는 관계의 역설을 가장 일상적인 풍경에서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 일상에, 어떤 날은 보이지 않는 손돌바람이 불어와 문 하나를 밀어젖힌다. 이 소설은 2022년 김용익소설문학상 수상작이다.
《신의 한 수》에는 7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그중 표제작 <신의 한 수>는 ‘해결’이란 단어가 번번이 무력해지는 시대의 체감, 그러니까 제도가 둔하고 관계가 날카로운 현실을 차갑고도 유머 있게 붙잡는다. 무대는 서울 언덕 위, “죽여주는 전망”을 가진 낡은 빌라다. 위층에는 임신 중인 젊은 여자 예지가 살고, 아래층에는 순남 여사가 산다. 예지는 이사 온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지쳐 있다. 들뜬 마루, 곰팡이 핀 벽장, 자주 막히는 변기, 닦아도 사라지지 않는 냄새. 싱크대 경첩 주변에 쌓인 붉은 쇳가루는 그의 일상에 산재한 가난의 그림자처럼 끈질기게 남는다.
예지가 매일같이 베란다를 보게 되는 이유는 전망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전망의 일부를 차지한 존재 때문이기도 하다. 맞은편 옥상에 줄에 묶인 개가 있다. 폭염에도 땡볕 아래에, 혹한에도 낡은 나무집 하나에 의지한 채 살아가는 개. 예지는 그 개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불쌍해한다. 개가 축 늘어진 채 울부짖는 날, 예지는 구청에 신고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절차의 언어다. 때렸는지, 증거가 있는지, 학대 정황이 확실한지. 공무원의 목소리는 시종 담담하다.
예지는 포기하지 않는다. 수시로 사진을 찍고 전화를 걸고 싸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예지의 분노는 개 한 마리를 넘어 다른 것들까지 끌어안는다. 낡은 집에 대한 불만, 이사할 수 없는 현실, 남편의 무심함, 임신으로 인한 불안. 결국 구청 사무실에서 예지는 “21세기 대한민국”을 외치다가 욕설을 내뱉고, 그 자리에서 출혈을 일으켜 119에 실려 간다.
이 지점에서 아래층 순남 여사는 단순한 조연이 아니라 흥미로운 존재로 커진다. 예지의 눈에 순남 여사는 ‘그저 착한 이웃’이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선량함”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을 산다. 자기 몫의 유산을 가로챈 동생에게도 선물을 보내고, 딸로 대해준 적 없는 팔순 노모에게도 헌신한다. 가족만이 아니라 친구, 이웃, 손님까지 순남 여사에게서 뜯어갈 수 있는 것을 뜯어가지만 그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작중 화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밭도 갈고 짐도 나르다 고기와 가죽까지 내줄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과묵한 울음을 토하는 ‘소 같은 사람’의 계열이다. 인정을 헤프게 써서 한 동네에 ‘시아비’가 아홉이 되는 부류—그런 사람들 가운데서도 순남 여사는 단연 으뜸으로 그려진다.
이쯤에서 소설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해진다. 이런 선량함은 미덕인가, 아니면 파멸을 부르는 허영인가. 예지는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순남 여사의 실체를 파악한다. “너무 착해서 그렇다”는 동정이나 “딱하다”는 연민으로 정리할 수 없다고 여긴다. 예지에게 순남의 선량함은 때때로 비난받아 마땅한 ‘허영’이다.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는 원숭이처럼, 현실 감각을 잃은 미련함에 가깝다.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인상적인 이유는, 순남 여사의 선량함을 단지 우스운 것으로만 만들지 않는 데 있다. 모두가 계산기를 두드리며 손익을 따지는 순간에도, 끝끝내 손을 거두지 못하는 사람. 다치고 손해 보면서도 누군가를 챙기는 사람. 세상이 쉽게 냉각될 때, 그 냉각을 막는 마지막 체온 같은 사람. 순남 여사는 바로 그 역할을 한다. 우리가 ‘그래도’ 살아갈 이유를 찾는다면, 그 이유의 일부는 순남 여사 같은 사람들 덕분이 아닐까.
이쯤 되면 독자는 이 소설을 ‘민원과 제도의 둔감함’ 혹은 ‘동물 학대 의심’, ‘선량한 이웃’에 관한 이야기로 이해하기 쉽다. 위층의 임산부와 아래층의 노년 여성은 그저 불편한 이웃처럼 보이고, 둘 사이의 “삼백조 킬로미터”는 세대 차이의 과장된 은유처럼 읽힌다. 그런데 소설은 그 독자의 안심을 겨냥해 관계의 이름을 한 겹 벗겨낸다. 병원 침대 곁에서 구청 담당자가 전하는 한 문장 때문이다.
“그간 선생님 시어머니께서….”
순남 여사가 예지의 ‘시어머니’라는 사실은 소설의 클라이맥스에 가서야 드러난다. 이 반전은 놀라움의 장치라기보다, 지금까지의 모든 장면을 소급해 다시 읽게 만드는 칼날이다. 아래층을 숨 막혀 하던 이유, 선의를 “오지랖”으로 받아들이던 태도, 분리배출을 둘러싼 신경전, 지나치게 많은 음식을 건네는 순간마다 느꼈던 불편함이 한꺼번에 의미를 바꾼다. 이웃 간 갈등이라면 거리두기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고부 관계는 거리두기로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가까운 만큼 멀고, 애초에 말로 정리되기 어려운 감정이 일상에 축적된다. 작가가 고부라는 이름을 늦게 밝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갈등은 사건이 아니라 구조이며, 고부는 등장인물의 성격이 아니라 관계 자체가 만들어내는 틈이라는 것.
그럼에도 이 단편이 끝까지 절망으로만 흐르지 않는 건, 누군가의 서툰 노력 위로 전혀 다른 차원의 개입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후반부에서 ‘나’라는 화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인간을 가까이 관찰하면서도 인간 바깥에서 말한다. “자, 이제 내 차례다.” 그는 예지의 정의로도, 순남 여사의 선의로도 완결되지 못한 세계에 아주 작고 우연한 ‘한 수’를 둔다. 순남이 챙겨 준 족발, 술에 취한 노인, 문틈에 걸린 족발 한 점, 유압 댐퍼 없는 문. 작은 조건들이 맞물리며 개는 밤새 배불리 먹는다. 누구도 울지 않고, 누구도 성내지 않는 시간이 흐른다. 그것은 정의의 승리도 아니고 제도의 성취도 아니다. 다만 한 존재의 굶주림이 그 밤만큼은 풀린다.
소설 속 손돌바람은 그 장면을 마지막까지 감싼다. 바람은 따뜻한 위로가 아니다. 차갑고 무심하다. 그러나 그 차가움 덕분에 오히려 현실과 닮은 희망이 된다. 우리가 기대하는 구원은 대개 거창하지만, 실제 삶을 하루 더 견디게 하는 것은 거창한 결말이 아니라 우연 같은 작은 완화일 때가 많다. 심아진의 단편 <신의 한 수>는 바로 그 크기의 희망을 보여준다. 서툰 인간들이 부딪히고, 규정이 사람을 외롭게 만들고, 관계가 멀어질수록 삶이 더 막막해질 때에도, 어쩌다 한 번 문틈은 열린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 문틈을 “완전한 안심”으로 봉합하지 않는다. 작가는 마지막을 해결이 아니라 기류로 끝낸다. 다음 날, 평년보다 10도나 기온이 뚝 떨어져 상수도관이 터지고 각종 사고가 잇달았다는 뉴스가 흘러나올 무렵, 노인의 옥탑방도 ‘공평한 아침’을 맞는다. 재난과 사고와 죽음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올 수 있다는 냉정한 선언이, ‘공평’이라는 단어 안에 숨어 있다. 그날 아침, 문이 활짝 열린 옥탑방은 예지와 순남 여사의 눈에 그다지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노인이 가끔 문을 열어 환기나 청소를 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독자가 알고 있는 맥락은 다르다. 전날 밤 문틈에 걸린 족발, 개가 문을 열고 들락날락한 흔적, 술에 취해 쓰러져 잠든 노인의 모습, 그리고 손돌바람이 옥상 문을 쿵 치던 소리까지. 그 모든 사정이 쌓이면 ‘열린 문’은 단순한 환기가 아니라, 사고와 불행과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균열로 읽힌다. 개에게는 천국의 문이고, 노인에게는 재앙의 문이며, 독자에게는 불안의 문이다.
작가는 그 불길함을 확정된 사건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누가 무사한지, 무엇이 벌어졌는지 끝내 단정하지 않은 채, 가능성으로 남겨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판단을 유예하고, 독자가 불안을 한 줌쯤 들고 작품 밖으로 나가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결말은 비극으로 기울지 않는다. 마지막 단락에서 세계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개는 거의 절뚝이지도 않고 목줄도 매지 않은 채 즐겁게 뛰어다닌다. 예지는 오늘내일 나올 조짐인 아가에게 순정한 말을 건넨다. 순남 여사는 소설(小雪)에 담그는 김치가 최고라며 김장 준비에 여념이 없다. 삶은 계속되고, 생은 다음 계절을 향해 준비된다.
다만 이 ‘회복’은 환호로 마감되지 않는다.
‘내가 둔, 신의 한 수는 아직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는다.’
구원은 있었지만, 인정도 기록도 감사도 없이 지나간다. 그래서 이 소설이 남기는 정서는 ‘해피엔딩’이 아니라 ‘서늘한 안도’에 가깝다. 해결되지 않는 세계에서 우리가 끝까지 붙드는 건 거대한 기적이 아니라, 문틈 하나만큼의 변화다. 그 틈으로 불어오는 손돌바람을, 우리는 희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바람은 마지막까지 두 얼굴로 남는다. 한쪽은 구원을 완성하는 손길이고, 다른 한쪽은 “쿵” 하고 문을 두드리는 불안의 잔향이다. 삶은 대개 해결되지 않지만, 가끔 아무도 모르게 조금 나아진다. 우리가 오늘을 버티는 이유는, 어쩌면 그 ‘조금’을 믿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