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도 직전에 경제팀 경질, 후임자들은 우왕좌왕

IMF 사태의 내막(2) / IMF行 결정적 책임은 YS... "YS가 1993년부터 경제를 개혁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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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외환(外換)위기는 IMF 관리체제를 불렀고, 한국은 사실상 ‘경제식민지’ 신세로 전락했다. IMF 사태가 발생한 지 정확히 21년이 지난 2018년 11월,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6·25이래 최대의 국난(國難)’이라 불렸던 IMF 외환위기를 소재로 한 이 영화는 벌써부터 관객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1998년 3월호 <월간조선>은 외환위기 당시 김영삼 정부가 어떤 과정을 통해 IMF의 문을 두드리게 됐는지, 이를 심층취재한 기사를 보도했었다. 기사의 제목은 ‘IMF 사태의 내막: 대통령은 없었다!’이며, 부제는 ‘다큐멘터리·운명의 15일간: 김영삼, 강경식, 김인호, 이경식의 막후 행적 정밀추적’이다.

기사를 쓴 조갑제(趙甲濟), 부지영(夫址榮) 기자는 김영삼(YS) 대통령을 비롯해 강경식 재정경제원 장관 겸 경제 부총리,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 등 정부 주요 당국자들의 ‘긴박했던 15일’간의 행적을 날짜별로 면밀히 추적했다.

이 기사를, 20년이 지난 지금 독자 여러분께 다시 소개한다. 원고지 300매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기에 읽기 쉽도록 요약해 두 번으로 나눠 게재한다. <> 안에 있는 날짜 및 주가지수, 환율 현황 등 각종 지표는 원(源) 기사에 있는 그대로이며, 중간 제목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임의로 붙인 것이다.
임창렬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가운데)과 미셸 캉드쉬 IMF 총재(오른쪽)가 1997년 12월 3일 오후 세종로 정부청사에서 내외신 보도진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국제통화기금(IMF) 긴급자금지원 최종 협상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왼쪽 끝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
<11월 18일(화), 외환보유고 252억(가용 158억) 달러, 환율 1012.8원, 종합주가 494로 하락> (1편에서 이어짐)
 
강경식 경제팀에 있어 IMF 구제금융 신청안은 기본적으로 금융권 구조조정계획과 금융개혁법안을 뒷받침하는 성격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금융개혁법안의 국회 처리가 끝나고 IMF에 가는 것을 발표하는 모양새가 좋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의 전제는 IMF 구제금융 지원요청과 ‘동시에’ 환율변동폭 제한을 푼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외환보유고를 소비해가면서 외환시장에 개입하지 않고 IMF로부터의 지원금을 뒷심으로 잡고 “우리는 IMF로부터 충분한 외환보유고를 확보했다. 환율변동폭도 없앴으니 이젠 더 환율이 오를 것이라고 기대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메시지를 시장에 띄우기 위한 의도였던 것이다. 
  
이날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청와대를 나오기 전에 김인호 수석은 김용태(金瑢泰) 비서실장에게 사표를 맡겨놓았다. 경제가 안 좋을 때면 경제팀은 항상 사표를 품에 지니고 다닌다. 김 수석은 국회에서 금융개혁 법안의 통과가 무산된 직후이고 다음 날은 중요한 종합대책 발표도 있어 또 한 번 대통령의 신임을 확인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강 부총리, 김 수석 사표 제출
 
김인호 수석은 심야회의에서 만난 강 부총리에게도 “저는 사표를 냈습니다”고 했다. 이미 두 사람은 10월 29일 경제 종합 대책 보고시에도 경제 상황이 나빠서 대통령이 몹시 언짢아하는 것을 보고 사표를 낸 적이 있다. 강 부총리도 이날 보고 후 “사표를 비서실장에게 맡겨 놓겠다”고 말하고, 김용태 실장에게 맡겼었다. 다만 경제팀장인 부총리가 예산 국회 중 경질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사직 일자(日字)만은 국회가 끝나는 ‘11월 20일자’로 적었다. 이 두 장의 사표는 이틀 만에 “힘내서 열심히 해보라”는 전언(傳言)과 함께 돌아왔었다.
  
언론은 이날 비로소 한국이 IMF 자금을 빌려야 할 위기에 처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금융위기의 실태 및 IMF 지원을 받는 경우와 받지 않는 경우의 득실을 따지는 특집도 대대적으로 다뤘다. 금융개혁관련 법안 통과가 무산됐다는 사실은 1면 국회 기사 중 한 줄 정도의 언급에 그쳤다. 한국의 외환위기가 시작된 ‘블랙 먼데이’ 11월 3일부터 따지면 15일, 7일의 청와대 비밀회의로부터는 11일 만에 우리 언론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11월19일(수), 외환보유고 248억(가용 142억) 달러. 환율 달러 당 1035.5원으로 사상 최고치 또 갱신. 종합주가 502.6>
  
11월 19일 아침 8시.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강 부총리와 김 수석은 전날 대통령께 보고하는 시간을 미리 잡아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예의 비서실장 시간을 또 빌릴 수밖에 없었다. 금융개혁법안은 무산되었지만 18일 밤에 짠 금융 및 외환시장 안정대책이 이날 IMF 구제금융 신청 사실과 함께 발표되면, 그래도 차선책(次善策)으로 ‘선방(善防)’은 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판단이었다. 실제로도 약 50억 달러의 시장개입 덕분으로 환율을 달러 당 1100원대 이하의 선에서 잡아 놓고 있던 때였다.
 
이 발표안을 보고하기 위해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간 강 부총리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보통 때 같으면 집무실에 들어서면 일어서서 인사를 받던 대통령이 이날만은 앉아서 인사를 받는 것이었다. 김인호 수석은 이 상황에 대해 별다른 기억이 없다. 강 부총리는 18일 밤 논의한 종합대책을 대통령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YS “분위기가 좀 나빠서…”
 
“오늘 그동안 준비했던 대로 금융기관 구조조정과 외환대책을 IMF에 가기로 한 것과 함께 동시에 발표합니다. 그러나 IMF에 가는 문제만은 예민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발표원안에는 넣지 않고 기자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공식 발표하겠습니다.”
 
대통령은 “좋다”고 말했다. 다시 강 부총리의 보고가 이어졌다. “어제 일본의 미츠즈카(일본 대장성 장관-기자 주)와도 통화했습니다. IMF로 간다는 것을 일본 측에도 설명을 했습니다. IMF로 가더라도 결국 IMF에 지원금을 많이 내고 있는 일본이 가장 큰 전주(錢主)가 되어야 하니까 일본의 적극적 협조와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오늘 각하에게 보고하고는 바로 미국 재무장관 루빈과 통화를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루빈에게도 이런 상황을 설명하겠습니다. 12월 초에 말레이시아에서 있을 아시아 재무장관 모임에 IMF 총재와 관련국 재무장관들이 다 오기 때문에, 여기서도 이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하겠습니다.”
  
이렇게 보고하는 중인데 대통령이 알 듯 말 듯 “분위기가 좀 나빠서…”라는 말을 불쑥 꺼냈다. 김인호 수석은 그때 이미 어느 정도는 감을 잡고 있었다. 그 전날 사표를 제출했을 때도 여느 때 같으면 한마디쯤 있었을 김용태 비서실장이 아무 말 없이 사표를 받아 책상 서랍 속에 넣었던 것이다. 김용태 비서실장은 그 동안 국회 일로 바빴고 고생했으니 약속 없는 수석들과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김 수석에게 제의했다. 이들은 ‘고생하는 경제수석 위로연’으로 늦게까지 술을 마신 터였다. 김 수석에게는 사실상의 송별연이었던 셈이다. 18일 밤 여의도 대책회의에 김 수석이 늦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불쑥 던진 “분위기가 좀 나빠서…”라는 말은 경질의사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도, 강 부총리도, 공식보고와 알 듯 말 듯 한 대화를 교환했을 뿐이다.
    
경제팀 경질… ‘IMF 구제금융 지원요청 발표’는 실종
 
집무실을 나온 뒤 대기실에서 김인호 수석이 물었다. “아니, 사표 안 내십니까.” 강 부총리는 김 수석에게 “사표는 여기 있으니 비서실장에게 전달해 주시오”라고 말했다. 마침 이때 김용태 비서실장이 들어왔다. 김 수석은 김용태 실장에게 “우리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실장은 김 수석의 이야기를 듣고 “분위기상 사표가 수리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했다.
  
두 사람은 “아 그래요. 그러면 수리하시죠. 각하께 여쭤주시죠”라고 부탁했다. 김용태 비서실장은 “잠깐 기다리고 계시지요. 제가 각하께 여쭙겠습니다”라며 사표를 받아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대통령실에서 나온 김용태 실장은 “수리입니다”라고 통고했다. 강부 총리는 “아, 그럼 루빈에게 뭐라고 이야기해야 하지?”라는 반응을 보였다.
  
IMF 지원을 위해 이날 오전으로 예약해 두었던 미국 루빈 재무장관과의 통화가 마음에 걸렸다. 김인호 수석은 “잘못하다가는 인사도 못하고 헤어지겠습니다. 들어가서 인사나 하지요”라며 강부 총리와 함께 다시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선 채로 “그 동안 잘 모시지 못해 죄송하다”며 작별인사를 했다. 강을 건너는 중에 말을 바꾸어 타는 형국이 된 경제팀 경질 과정에서 ‘IMF 구제금융 지원요청 발표’라는 중대 사안이 공중에 떠버리는 희한한 사태가 발생한다.
  
김인호씨와 강경식 의원은 짐을 쌌고, 신임 경제팀과는 어떤 형태의 직접적인 인수인계도 없었다. 그런데 취소되었던 금융종합대책 발표는 19일 오후 원래의 계획대로 증시(證市) 폐장 후인 5시30분쯤, 신임 임창렬(林昌烈) 부총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임창렬 부총리가 발표한 것은 전날 밤에 만든 금융안정대책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이날 아침 경제팀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안과 두 가지 점이 달랐다.
 
환율변동폭 제한이 당초 안이던 15%에서 10%로 축소된 점과, 기자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꼭’ 넣기로 한 ‘IMF에 가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빠져버린 것이다. 환율 변동폭 확대 정책은, 그 이후의 전개처럼 환율을 더 올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환율상승을 잡기 위한 것이었다. IMF 구제금융이라는 든든한 뒷받침을 받기로 했다고 발표하면서, 환율변동폭 제한을 풀어 외환거래상 자유를 준다고 해야 시장(市場)이 ‘이제는 더 이상 안 오르겠구나’하는 반응을 보이면서 제품에 안정이 되도록 유도하려는 그런 정책이었다.
  
임창렬 부총리는 ‘IMF 건’을 왜 뺐나?
 
이날 임창렬 부총리의 발표에서는 IMF 구제금융 신청이라는 밑천은 빠져버렸으니 오히려 시장을 자극할 만한 것이었다. 임창렬 부총리는 기자의 질문에 “IMF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고 딱 잘라 말해버린 것이었다. IMF 측에서도 의아하게 생각하여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어오기 시작했다.
  
임 부총리가 ‘IMF 건’을 발표에서 뺀 과정을 요약하면 이렇다. 임 부총리는 취임 첫날인 이날 오후 2시 경제장관회의에 IMF 안을 상정했다. 경제 장관들 간에도 IMF 건은 이견이 많아 40여 분간 격론이 벌어졌다. 찬반론이 팽팽해지자 임 부총리가 “잠시 유보해두자”고 제의, 이날 오후 5시30분 발표 후 기자 질문에 그런 대답을 한 것이었다. 임부총리는 이틀 후에 ‘IMF에 구제금융신청’을 발표하게 된다.
  
임 부총리는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왜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일까. 대통령 재가가 난 사안임에도 임 부총리는 왜 이 사안을 취임 첫날 경제장관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논의했을까. 이 과정에서 임 부총리는 과연 어떤 정보를 갖고 있었으며 어떤 판단을 했던 것일까.
 
뒤죽박죽 엉킨 하루
  
이런 의문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임 부총리는 2월 12일 현재 “아무 할 말이 없다”는 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이 극비로 취급되어 서류상으로 남아 있지 않을 경우, 당사자간의 인수인계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한국 관료들의 풍토상 후임자는 이 극비사항을 파악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관례야 어떻든 이런 식의 허술한 직무 인수인계는 구멍가게를 사고 팔 때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도 당선자 시절에 노태우 대통령을 한 번도 만나지 않고서 정부를 인수받았다. 강경식 전 부총리나 김인호 전 수석 측에서는 임창렬 부총리가 IMF로 가기로 한 대통령과 경제팀의 결정을 몰랐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김인호씨는 확실한 시점은 기억에 없으나 청와대에서 개인적으로 임창렬 당시 통산부 장관에게 “IMF로 가기로 했다”고 귀띔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업무에 대한 인수인계 과정이 당사자 사이에서는 없었지만, 후임자는 하부 조직으로부터 당연히 업무보고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때 막후에서 진행 중이던 IMF 비밀협상 내용을 몰랐다는 것인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애매한 것이 있으면 후임자가 전임자에게 물어오는 것이 순서라는 것이다. 20일자 조간신문들은 19일 오후 신임 임창렬 경제팀이 발표한 금융안정대책과 경제팀 경질, 이날 전국적으로 실시된 대학 수능시험이 전해보다 쉬웠다는 뉴스를 중요하게 다뤘다. 국가부도 위기상황에 한 발짝씩 다가서고 있던 나라로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사건들이 뒤죽박죽 엉켜버린 그런 하루였다.
 
<11월 20일(목), 외환보유고 239.9억(가용 131억달러)로 급감. 환율 1139원 사상 최대치 갱신 3일째, 종합주가 488.4로 폭락>
 
11월 20일 오전 한은(韓銀) 총재실. 이경식 총재는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IMF 구제금융을 하루라도 빨리 받아야 한다고 주장해온 이경식 총재는 갑자기 이뤄진 19일 경제팀 수뇌 경질과, 이로 인한 ‘IMF 구제금융안 실종사건’으로 아찔하기까지 했다. 해외의 국내은행 차입금을 제외한 가용 외환보유고는 이날 131억 달러로서 선물환 등 다른 요소를 감안할 때, 마지막 위험수위를 넘고 있었다.
 
게다가 환율 폭등과 함께 외환보유고는 하루에 약 10억 달러 이상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루 환율 인상폭이 100원에 육박했다. 시장은 “한국 정부가 외환보유고가 바닥나는 것을 감추기 위해 더 강공책으로 나오고 있다”고 해석한 것 같았다.
   
이경식 총재는 이대로라면 열흘 전인 10일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약 한달 정도 버틸 수 있다”라고 한 것보다 더 빨리 국가부도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은 측과 금융 전문가들은 이 때 임창렬 부총리가 “외환사정을 잘 몰랐고 IMF에 가기로 한 것에 대해 제대로 밑으로부터 브리핑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하고 추측했다. 19일 이전에는 환율을 외환개입으로 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환율방어에 11월 1일부터 이날까지 약 50억 달러가 소요되었다. 가용외환 보유고 기준, 하루 평균 약 2∼3억 달러의 외환이 빠져나갔다. 특별한 상황변동이 없다면 가용 외환보유고 기준으로 이날로부터 12일∼13일 이내에 한국은 국가부도상황을 맞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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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2월 4일자 <조선일보> 1면. 우리 정부가 IMF와 550억 달러 지원에 합의했다는 내용이다.
  
  
“각하에게 물어봐”
  
이경식 총재는 속이 탔다. 총재로서는 대통령을 설득하고 강 부총리와 IMF까지 끌어들여 일을 만들어 놓은 것인데 신임 경제팀의 예상치 못한 발표로 다 해놓은 밥에 이상한 것이 빠져버린 격이었다. “이대로 라면 300억 달러를 IMF로부터 빌려와도 모자라는데…” 20일 오전 시장 상황을 보고 받은 이경식 총재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뒤집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경식 총재는 윤진식 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영섭 신임 경제수석이 들어오거든 ‘이 결정(IMF 건)에 대해서 각하에게 물어 보라’고 전하라.”
 
이 총재는 전화상이므로 상황만 간단히 설명하고 “꼭 이것(IMF로 가는 것)만은 각하에게 여쭈어보고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경식 총재는 윤 비서관 이외에도 다른 청와대의 모(某)인사에게 전화를 걸어 같은 뜻을 전했다.
  
이경식 총재의 입장에서 임창렬 신임 부총리는 같이 일해본 적도 없고 잘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야기하기가 껄끄러웠다. 이 총재는 이후 김영섭 신임 경제수석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직접 전달했다. 이외에도 이 총재는 19일부터 20일에 걸쳐 관계 요로에 ‘수없이’ 전화를 걸어 신임 부총리의 발표 내용을 뒤집기 위한 로비를 벌였다.
    
피셔 부총재, “임 장관이 IMF에 안 간다는데, 무슨 이야기냐”
    
20일 오후, 이 총재가 우려한 대로 임창렬 부총리의 발표에 깜짝 놀라, IMF와 미국의 관계자들이 한은 총재실로 달려왔다. 오후 3시 한은 총재실. 가이드너 미(美) 재무부 차관보와 트루먼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국제금융국장이 이경식 총재를 방문했다. 
  
오후 4시에는 IMF의 수석부총재인 피셔가 방문했다. 이들의 관심사항은 간단했다. “한국의 외환보유고 사정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고 싶다. 임 부총리가 10일 IMF의 지원을 안 받는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것인가. 전임 강 부총리팀이 IMF와 그 동안 논의하던 것은 어떻게 되는가. 정말 IMF의 도움 없이 사태 해결이 가능한가.”
    
이 총재는 우선 외환보유고와 관련, “캉드쉬 총재와 논의했던 16일보다 더욱 상황이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따라서 지금은 캉드쉬 총재에게 이야기한 300억 달러보다 더 많은 400억 달러 정도까지 필요하다고 했다. 피셔 부총재는 “신임 임 장관이 IMF에 안 간다는데, 무슨 이야기냐”고 강한 불신감을 표명했다.
   
이경식 총재는 “한국은 반드시 IMF의 구제금융을 받을 것이다. IMF로 갈 수밖에 없으니까 가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하자”고 피셔를 설득했다. 이 총재는 다시 “대통령이 강하게 지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일까지는 신(新)경제팀의 정책이 바뀔 것이다. 그러니 바뀌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하자”고 설득했다.
 
4일이라는 아까운 시간 허비
   
20일 저녁 7시쯤(이 총재의 기억) 서울 롯데호텔. 이경식 총재는 김영섭 경제수석으로부터 만나자는 제의를 받고 나갔다. “이야기 들었나”하고 이 총재가 물었다. 김영섭 수석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이 총재는 이 자리에서 다시 IMF 안(案)을 강조했다. 그 동안 진행된 비밀협상의 과정과 대통령 재가를 받기까지의 상황, 이날의 외환보유고 등 IMF 구제금융을 하루빨리 받지 않으면 국가가 부도날 것이라는 것을 설명했다. “지금의 외환사정으로 볼 때 이것은 ‘말이 필요 없는 사안’이다.” 상황설명을 듣고 난 김 수석은 이렇게 입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재차) IMF와 의논하는 형태를 취해야 될까요?” 이경식 총재가 답했다. “물론이지.”
  
두 사람이 이런 대화를 논의하던 롯데호텔의 다른 방에서 저녁 7시쯤 임창렬 부총리와 피셔 IMF 수석부총재 간의 회담이 성사되어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대통령의 의사가 확인되어 긴급하게 만든 회담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그동안 강경식 경제팀이 IMF 측과 협의해 온 내용과, 피셔 부총재가 새롭게 제시하는 안건들을 비교해가면서 협상을 진행해야만 했다.
  
임 부총리는 이 때문에 한편으로는 피셔 부총재와 협상을 진행하면서 그 동안의 비밀협상 과정에 참석했던 이경식 한은 총재와 옆방에서 따로 만나 전후사정을 설명 듣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이 총재는 말했다. 피셔와 임 부총리는 한국이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것으로 재차 결론을 내렸으며, 양측은 구체적인 조건 협의에 들어갔다.
 
피셔와의 회담이 끝난 후인 이날 밤 9시, 같은 롯데호텔에서 정식으로 IMF로 가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임 부총리와 신임 김 수석, 이경식 총재 등 세 사람은 19일 인사 이후 처음으로 정식 상견례를 했다. 상황이 급하다 보니 협상을 우선한 결과였다. 갑작스런 인사(人事)로 인해 IMF 관련 업무가 전혀 인수인계 되지 않음으로써 캉드쉬 IMF 총재와 합의한 16일 밤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 4일이라는 아까운 시간이 허비된 것이다.
  
<11월21일(금), 외환보유고 237.8억(가용 127억)달러. 환율 1076원. 종합주가 506.1>
 
21일 오전 10시.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비상경제대책 자문회의에서도 이미 1주일 전인 14일 아침 대통령에게 보고된 ‘IMF 지원요청 필요’가 거의 유사한 형태로 재연됐다. 이날 IMF 신청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결론을 재확인한 임창렬 부총리는 피셔 부총재와의 면담내용을 포함해 청와대에 보고서를 만들도록 실무자들에게 지시했다.
 
임 부총리는 보안을 위해 오후 3시의 기자회견에서는 “2∼3일 후 정부의 방침을 결정하겠다”고 연막을 쳤다. 거의 같은 시각 김영섭 수석도 청와대 기자들에게 “정부 방침이 아직 결정된 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임부총리는 오후 6시쯤 “밤 10시에 1청사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갖겠다”고 예고했으며, 밤 10시 20분쯤 심야 기자회견을 가졌다.
  
IMF 측과의 협의를 거의 마무리하고도 심야 기자회견을 갖게 된 것은 국내에서 대선(大選) 후보들의 사전동의를 받는 ‘격식’을 갖추기 위해서였다. 말로는 ‘격식’이라고 기자들에게 설명했지만 실은 16일의 강 부총리-캉드쉬 회담 때부터 IMF가 계속 요구하고 나온 ‘중대 현안’이었다. 
  
대선 후보였던 DJ의 IMF 재협상 발언
    
한국 경제를 강타한 IMF 사태라는 악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이후 환율은 계속 치솟아 한달 뒤 1500원대에서 겨우 안정을 찾게 되었고, IMF의 구제금융에도 불구하고 외환보유고가 빠져나가는 상황은 중단되지 않았다. IMF 구제금융 지원요청이 발표된 후 공개적으로 IMF 협상이 진행되고 한국의 대표들이 외국으로 날아가 돈을 꾸러 다니던 11월 말과 12월 초 사이 IMF가 비밀 협상을 통해 줄곧 강조해오던 ‘대통령 당선자의 확고한 지지’라는 쟁점이, 당시 1위를 달리던 김대중 후보 진영의 재협상 발언으로 대선(大選) 쟁점으로까지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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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재협상을 둘러싸고 격론을 벌인 이회창, 김대중 대선 후보. 출처: 당시 일간지 광고 캡처
 
12월 4일 국민회의는 집권하면 12월 3일 타결된 IMF 구제협상안 중 경제성장률 등 일부 조항에 대해 ‘추가협상’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김원길(金元吉) 국민회의 정책위의장은 이날 “IMF 협상의 기본 틀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나 태국, 멕시코 등 다른 국가에 비해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며 “집권하면 경제주권 침해 요소가 있는 일부 조항에 대해 강력하게 추가 협상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동영(鄭東泳) 대변인도 성명을 통해 ‘경제성장률 3% 억제’와 ‘자본투자 자유화’ 등 2개 조항에 대한 재협상 의지를 밝혔다. 김대중 대통령 후보 자신도 12월 7일 TV 토론회에서 이회창 후보와 IMF 각서 논쟁을 벌이면서까지 ‘재협상론’을 펼쳤다. 김(金) 후보는 “나는 각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우리(후보)들에게 각서를 요구하는 자세가 무리”, “나는 서명 대신 대통령에게 책임 추궁하고 필요하면 재협상하겠다고 한 것이다. IMF 부총재도 재협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는 발언을 했다.
 
여기에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중요한 사실을 밝혀주는 또 하나의 자료가 있다. 국민회의에서 IMF 재협상론을 발표한 12월 4일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대체 어떤 상태였을까. 우리(조갑제, 부지영 기자)는 이 자료에서 이날의 한국의 외환보유고(가용 외환보유고 포함)를 확인할 수 있었다.
  
‘12월4일 외환보유고 149억 달러. 가용외환보유고 60.2억 달러’ 그 일주일 전부터 한국의 가용 외환보유고는 50억 달러선까지 떨어지면서 사실상 국가 부도 상태와 다를 바 없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11월 26일 외환보유고 242.2억 달러, 가용 외환보유고 93.7억 달러
   11월 27일 외환보유고 242.1억 달러, 가용 외환보유고 93.6억 달러
   11월 29일 외환보유고 244억 달러, 가용 외환보유고 72.6억 달러
   12월 1일 외환보유고 245.1억 달러, 가용 외환보유고 66.9억 달러
   12월 2일 외환보유고 239.5억 달러, 가용 외환보유고 63.3억 달러
   12월 3일 외환보유고 146.3억 달러, 가용 외환보유고 56.9억 달러
   12월 4일 외환보유고 149.7억 달러, 가용 외환보유고 60.2억 달러
  
  
강경식의 차중(車中)토로
  
강경식 전 부총리는 지난(1998년) 2월 2일 재경원 변양균(卞良均) 국장 상가와 그의 차안에서 한 기자에게 “부임 때부터 한국은 국가부도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고 3개월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뉘앙스 차이를 줄이기 위해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
   
“1997년 3월에 취임했을 때 외환보유고가 얼마였는지 아는가. 280억 달러였다. 그때 국가가 부도나는 줄 알았다. 이후 부도를 내지 않으려고 환율인하를 비롯해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1996년 경상수지적자가 이미 237억 달러에 달한 경제는 정상적인 경제가 아니었다.”
“언제 누가 IMF에 가자고 보고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정책판단의 문제이고 그 판단의 책임은 모두 내가 진다.”
“나는 IMF에 가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는데 이제 와서 IMF에 가게 한 장본인이고 일도 안하고 게으르다고 하니 답답하다.”
 
-작년 11월 금융개혁법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외국의 시선이 모두 한국에 집중되어 있었다. 말만 하고 행동은 없다고 하는 상황에서 행동과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 애를 썼고 의원들에게 그렇게 설명했다. 원내총무들에게도 ‘표에 얽매이지 말라. 이것이 되지 않으면 나는 사표를 쓰겠다’고 했다. 당시에는 상황이 워낙 좋지 않았고 캉드쉬와 협의가 끝난 상태이기 때문에 금융개혁법이 통과됐다고 하더라도 IMF에 안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가장 어리석었다고 생각하는 점은 IMF에 간 뒤에도 해결되지 않는 것을 IMF에 가지 않고 해결해 보려고 했던 점이다. 경제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가 IMF에 가려고 하겠는가. 한국 경제는 IMF 자금 570억 달러가 들어오기로 한 뒤에 신인도가 더욱 나빠졌다. 이 점을 잘 알아야 한다.”
  
-대통령이 기아 부도를 내지 말라고 했다고 하는데.
 
“부도 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한보 때 이미 부도 위기로 몰려
  
강경식 전 부총리가 침묵을 깨고 이런 말을 한 것은, 책임회피를 위한 변명처럼 들릴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당히 중립적인 관계자들조차 이 같은 강 전 부총리의 말이 자기변명만은 아니며, ‘많은 일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강만수(姜萬洙) 재경원 차관의 증언.
“외환위기를 부른 가장 큰 문제점은 투명성 결여와 정치적 리더십의 결여였다. 20여 개 관련법이 국회를 통과하지 않았으며, 노동법 개정과 한보철강 뇌물사건도 그것이었다. 금융개혁법안을 올렸으나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다. 내가 통산부 차관으로 부임하니(부임일 1996년 12월 24일) 우리 경제는 이미 거덜난 상태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일본에 대한 수출은 9.1% 절하가 됐다. 그래서 김 대통령이 나보고 국제수지 적자 해결을 위해 한번 일 해보라고 했다(재경원 차관 부임일 1997년 3월 7일).”
  
김석동(金錫東) 재경원 외화자금과장의 증언.
“한보부도 사태 이후 한국의 은행들은 모두 부도가 날 상황이었다. 부도가 나는 것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부도사태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부도나려는 것을 억지로 막아온 것이다. 11월 들어서 외환보유고가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 매일 10억 달러씩 빠져나갔다. IMF 구제금융신청이 발표되자 20억 달러씩 빠져나가는데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나는 끝까지 IMF 구제금융을 신청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일본도 만약 구제금융을 신청한다고 하면 하루에 100억 달러씩 빠져나가 금세 외환보유고가 바닥 날 것이다.”
 
강 부총리의 한 측근은 ‘강 부총리 자신의 말’이라며 다시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일체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는 강 부총리의 ‘육성’라는 점에서 이 또한 가감 없이 그대로 옮긴다.
  
강경식(姜慶植)의 독백(獨白).
“지난 10월(1997년) 말 11월초에 단기외채의 만기 갱신이 되지 않으면서 시작된 외환위기의 조짐을 취임 초부터 감지하고 있었다면 거짓말이라는 소리밖에 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취임할 당시는 한참 국제수지와 환율 문제가 쟁점이 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1993년에 4억 달러 정도의 흑자를 보이던 경상수지가 1994년 45억 달러, 1995년 89억 달러, 그리고 1996년에는 237억 달러라는 폭발적인 기세로 늘어나고, 그로 인해 외채가 1993년의 439억 달러에서 1996년 1047억 달러로 2배 이상 늘어나는 상황은 도저히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1997년 3월 6일 오전 10시 내(강 부총리)가 임명장을 받고 과천으로 가서 첫 1급 간부회의를 할 때부터 환율문제가 거론되었다. 국제수지 적자가 계속 급격히 늘어나는 상황에서는 환율이 올라가는 것이 당연한데, 1996년 말 달러 당 844원 수준에서 올라가기 시작한 환율을 1997년 1~2월 중에는 보유외환을 투입하면서 860원 선에서 막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우리는 한국의 형편없는 정치권을 믿는 잘못을 범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필요한 개혁을 위해서 일부 인사들이 내게 권해 검토했던 대통령 긴급명령권을 동원하는 등 정말 강경한 수단도 불사했을 것이다. 그런 강수(强手)를 쓰지 않고 설득에 의해 개혁의 필요성을 납득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보다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웬만큼 정치를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대선을 앞두고 표 앞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진다는 정치인들의 속성을 전혀 간파하지 못했다고나 할까.”
 
김영삼(金泳三)의 결정적 책임
  

그러나 이들 ‘3인의 당사자’ 이외에도 IMF의 ‘당사자’ 명단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더 있다. 11월7일 보고서에 나온 위기상황들을 알고도 신속히 대응 못한 경제관료들.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IMF 협상발표의 시기를 잃어버리고 협상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 신임 부총리와 그 경제팀. 국가부도 촌전(寸前)의 상황에서 나라가 부도가 나든 말든 표 몰이에만 열중한 정치권과 대선 후보들.
 
부도를 내놓고도 ‘국민기업’이란 위장망 속에서 은행과 정부를 상대로 투쟁을 계속한 김선홍(金善弘) 회장 등 기아 경영진과 노조. 대안 없는 비판과 양시론 양비론에 익숙해져 있었던 언론 등.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의 책임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할 김영삼 대통령의 허세, 오만, 선동, 무능. 그 5년간의 축적.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경제부총리 8개월에 불과한 강경식 팀에 모든 책임을 지우고 “우리는 이제부터 깨끗해졌다”고 홀가분해하는 태도는 “우리가 일제 식민지가 된 것은 이완용 때문이었다”고 결정해버리는 수준일 것이다. 그런 자세로는 ‘제2의 갑오경장’인 IMF 사태는 모양만 다르게 되풀이될 것이다.
 
갑오경장과 이번 IMF 사태의 공통점은 ‘국가 지도층이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힘으로 해결하는 능력이 없다’는 바로 이 점이다. 조선은 그리하여 일본의 힘을 빌어 갑오경장이란 근대화 개혁을 시도했으나 역사에는 공짜가 없어 그 대가로 식민지로 전락했다. 개혁이란 말을 그토록 사랑했던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부터 경제를 개혁했더라면 IMF 사태는 예방되었을 것이다.
   
국제화, 세계화를 부르짖고 OECD에 가입하기 전에 그런 시장원리를 받아들일 만한 내부개혁과 체질을 강화했어야 했다. 그런 준비 없이, 그리고 철학도 없이 외친 세계화는 결국 일류국가의 논리에 이 나라를 알몸으로 내맡기는 일이었다. 이 나라는 경제부총리 중심제의 나라가 아니라 대통령 중심제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자기 몫의 책임을 지고 청문회에 나와서 진실을 밝히지 않는 한 작은 속죄양들만 많이 만들어내는 것으로 되어 6·25 동란 이후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재산상의 손실을 끼친 이번 사태는 아무런 교훈 없이 끝나고 말 것이다. (끝)
   
정리=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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