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뭔가 아련하게 다가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단어입니다. 저는 지금은 폐교가 된 시골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시골을 떠났으니, 태어나서 청년기를 맞을 때까지 저는 늘 저녁노을 보며 자란 셈입니다.
제가 학교를 다닌 면소재지에는 독서실도, 당구장도, 만화방도, 전자오락실도, 비디오 가게도 없었습니다.
저도 취재차 전국을 많이 다녀보았지만, 아직까지 제가 학교를 다닌 면 보다 작은 면소재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행정 전략상 면사무소 자체를 그 면에서 중심 되는 큰 동네에 두지 않고, 그 옆에 좀 떨어진 자그마한 동네에 둔 곳은 본 적이 있다.) 심지어 제가 군 생활을 했던 ‘육지의 섬’이라고 불리는 양구의 면 소재지도 제가 자란 면보다는 더 크더군요.
시골 아이들의 초등학교 생활은 무척 단조로웠습니다. 학교 갔다오면 방이나 마루에 책가방 휙 던져놓고는, 해가 어둑할 때까지 동네를 휘저으며 뛰어 노는 것이 가장 일상적인 하루 일과입니다.
딱지치기를 하던가, 구슬치기, 땅따먹기, 술래잡기, 말타기, 공기놀이, TV 보기를 합니다. 또 칼싸움, 연날리기, 고기잡기, 화약총 쏘아대기, 활 만들기, 흙장난, 볏짚 속에 본부(아지트)만들기, 얼음지치기, 썰매타기, 눈싸움, 자전거타기, 포도서리, 복숭아서리, 손야구, 축구도 합니다. 하루가 긴 방학 때면 이런 놀이들이 아침부터 밤새 이어질 때도 많습니다.
여름 방학이면 매일 소뜯기로 가는 것도 꼬맹이들에게 맡겨진 큰 일 중에 하나였습니다. 오후 4시 정도가 되면 집집마다 한 마리씩 있는 소를 끌고 나와 줄을 지어 동네를 벗어나 나즈막한 야산으로 우르르 몰고 갑니다. 그러나 막상 소는 고삐 가는 대로 내팽겨 두고, 개구리와 메뚜기를 쫒거나, 어울려서 씨름을 하다가 오기가 일쑤였습니다.
중학교 생활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역시 위에 열거된 놀이가 거의 연장된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아이들이라고 해서 마냥 놀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님들이 뙤약볕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일도 많이 도와드려야 합니다. 어떤 날은 학교 갔다 와서는 부모님이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괜히 효심이 발동하여 주섬주섬 들로 나갈 때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부모님을 도와 하는 일은 철에 따라 달라집니다. 봄에는 모내기를 하고, 고추를 심고, 깨도 심고, 밭고랑에 비닐도 씌웁니다. 여름에는 밭에 풀을 매고, 고추를 따고, 농약도 치고, 가을에는 벼를 베고, 감자와 고구마도 캡니다. 실제로는 코딱지만한 밭인데도, 일을 할 때 밭고랑이 한 없이 길어 보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가장 싫었던 일이 뽕 따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집은 봄 가을에 누에를 쳤는데, 비료 포대에 뽕잎을 한 포대 두 포대 채워 넣어도, 따야할 비료 포대는 논두렁에 아직도 수북하기만 합니다.
낮에는 논일과 들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해그름 할 무렵에 주로 뽕을 많이 땁니다. 혹은 부모님들은 낮에 다른 들일로 바쁘니까, 집에 있는 꼬맹이들에게 뽕 따는 일을 많이 시킵니다.
어쨌든 저녁 무렵 뽕을 따다보면 어느 새 하늘에 별은 반짝이고, 보름달도 휘영청 합니다. 어떤 날은 이슬이 눅눅하고, 안개도 자욱 내립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도 있습니다. 어머니는 새벽이 으슥할 때까지 뽕잎을 줍니다. 뽕잎을 주다가 말고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어머니를 보면 안쓰러워 보입니다. 그렇게 산더미처럼 딴 뽕잎도 당일이면 다 없어지고, 다음날 또 뽕을 따야 합니다.
남자 아이들은 중학교 2학년만 되면, 경운기는 손이 아니라 발로 몰고 다닐 정도로 익숙하게 됩니다. 경운기를 모는 순간만큼은 어린 나이지만 어른 몫의 일을 합니다. 아버지를 도와 짚을 실어 나르고, 거름도 쳐내야 합니다.
고등학생이 되면 하는 일이 거의 어른들 수준에 도달합니다. 나락 가마니와 쌀 가마니도 너끈너끈 져다 날라야 합니다. 하루는 탈곡을 끝낸 나락 가마니를 종일 져 날랐는데, 저녁 무렵에는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비틀 팔자걸음을 했더니 아버지께서 “70난 노인도 번쩍번쩍 져 나르는 데, 쇠도 잘라먹을 젊은 놈이 그렇게 빌빌 거리면 어따가 써 먹겠냐”며 혀를 차셨습니다.
저만 이렇게 집안 일을 도우며 학교를 다닌 것이 아니라, 당시 시골에서 학교를 나온 제 친구들 누구나 예외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우리 집은 손이 많이 가는 비닐하우스 농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일을 덜 하고 자란 편입니다.
이렇게 부모님과 들에서 일을 하다보면 해가 넘어가기 시작하고, 노을이 물듭니다. 이내 주변은 어둠속으로 빨려들고, 어두운 밤길을 헤치며 터벅터벅 집으로 향합니다.
우리 밭 중에 몇 떼기가 동네 동산마루에 있습니다. 집 마당에서 바로 올려다 보이는 가까운 위치입니다.
이 밭은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 등에 업혀 와서 밭고랑에 앉아 흙장난을 할 때부터 기억이 납니다. 그 후 초등학생, 중학생을 거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늘 봄이면 부모님과 같이 이 밭에서 씨를 뿌렸고, 가을이면 곡식을 거두었습니다. 어느 해는 고추, 어느 해는 깨, 어느 해는 땅콩을 심었습니다.
이곳 우리 밭이 있는 동산마루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세상을 바라보던 가장 높은 위치였습니다. 북쪽을 보면 익숙한 학교 가는 길이 보이고, 그 뒤로는 산에 산이 첩첩으로 보입니다. 저는 늘 ‘저 산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남쪽으로는 작은 누나가 명절 때 버스에서 내려 걸어 오던 길이 보입니다. 동네 아래쪽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개 짖는 소리, 아이들 떠드는 소리도 들려옵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해질 무렵의 서쪽 하늘 노을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부모님과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 갈 때쯤이면 저는 밭둑에 앉아 한참이고 아름다운 노을을 지켜보곤 했습니다.
밭을 갈고, 골을 타고, 고추를 심고, 풀을 메고, 아버지 지게에 삽과 호미를 챙겨 넣고, 소를 몰고 집에 왔던 수 없이 많은 날에도 저녁 무렵이면 어김없이 서산 너머에는 아름다운 저녁 노을이 있었습니다. 붉은 노을, 잿빛 노을, 귀신 노을, 처녀 노을···. 노을은 모양도 색깔도 가지각색입니다.
아름다운 저녁 노을을 바라보던 동산마루 우리 밭에 8년 전 하늘나라에 먼저 간 동생의 유골을 뿌렸습니다. 1년 뒤, 어느 봄날 저는 아무도 몰래 그곳에 올랐다가, 부모님이 심어 놓은 곡식이 파릇하게 올라오는 것을 보고 그 모습이 너무 서러워 몇 시간동안 울다가 내려왔습니다. 봄 기운 속에 동생의 슬픈 영혼이 곡식의 새싹으로 태어난 것 같았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저는 단 한 번도 그곳에 가보지 않았습니다. 동생도 저와 똑 같이 어머니 등에 처음으로 업혀와서 흙장난을 쳤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부모님을 도와 일을 했고, 저녁이면 노을을 바라보았을 겁니다.
집 마당에서 달음질치면 그저 5분도 안 걸리는 그곳을 저는 지난 7년간 한 번도 가 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 밭에 깨를 심었는지, 고추를 심었는지 어머니에게 물어 본 적도 없습니다. 시골에 갈 때마다 이번에는 꼭 찾아 가야지하고 다짐하지만, 막상 집 마당에만 들어서면 동산마루 쪽을 향해 눈길을 주기가 힘이 듭니다.
이번 추석 때는 꼭 한번 가보고자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이 글을 썼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