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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우리나라엔 金씨가 왜 그렇게 많을까

글 : 김정현  姓氏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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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系-가락국系 金씨 외에 일본·중국系 金씨도 있어
⊙ 조선시대에는 여진족 귀순자들에게 김씨 성 많이 하사

金丁鉉
⊙ 76세. 한양대 사학과 졸업.
⊙ 저서: 《흥하는 성씨 사라진 성씨》 《우리 겨레 성씨 이야기》 《상상 밖의 한국사》.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으로 참전했다가 귀순해 사성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된 김충선(사야가).
  오늘날 한국의 270여개 성씨(姓氏)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은 것은 단연 김(金)씨다. 지난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 집계결과’에 의하면 김씨는 모두 992만6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21.6%에 달했다.
 
  김씨가 왜 이렇게 많을까. 혹자는 이에 대해 “김씨가 역사에 등장한 지 오래되어서”라고 답한다. 하지만 이것은 답이 되지 못한다. 김씨보다 먼저 등장한 박(朴)씨는 위의 통계에 의하면 389만5000명(3위)에 불과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한국인의 오래된 성씨로는 신라의 왕성(王姓)인 박(朴)·석(昔)·김(金)씨, 신라의 여섯 고을 촌장에서 비롯되었다는 이(李)·최(崔)·손(孫)·정(鄭)·배(裵)·설(薛)씨, 가락국 수로왕과 왕비에게서 비롯된 김씨와 허(許)씨 등을 꼽을 수 있다.
 
  물론 고구려·백제의 왕족과 귀족들도 성을 사용했다. 그런데 고구려와 백제에 있었다는 성은 오늘날 한국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는 각 문중(門中)의 족보(族譜)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왕실은 고(高)씨였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고씨는 제주도의 삼성혈(三姓穴) 설화에 나오는 제주 고씨가 대부분이다. 백제에는 여덟 개의 대성(大姓)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대까지 이어져 오지는 못했다. 백제의 성씨 가운데 보이는 국(國)씨가 오늘날에도 있기는 하지만, 족보에 의하면 그 기원은 백제가 아니다.
 
  근래 고구려나 백제에 뿌리를 두었다는 성씨가 나타나기는 하나, 조선시대의 성씨 자료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위보(僞譜)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金씨는 東夷系
 
사성 김해 김씨(우록 김씨)의 시조 김충선을 기리는 녹동서원.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있다.
  사서(史書)나 족보에 의하면 앞에서 언급한 신라-가락국(가야) 계열의 성씨와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다는 성씨는 여럿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들의 인구 수는 신라-가락국계 김씨보다 인구가 훨씬 적다. 몇천 명에 불과한 성씨도 있다.
 
  인구가 13억명이 넘는 중국에서 가장 많은 성씨는 왕(王)씨다. 지난 4월 14일 중국 신화통신 보도에 의하면, 왕씨는 9500여만명, 이씨는 9300여만명, 장(張)씨는 9000여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 3개 성이 중국 인구의 21%를 차지하는 것이다. 꼭 한족(漢族)이 아니더라도 이씨나 왕씨·장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이 때문에 이들 인구가 많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김씨를 찾기 힘들다. 중국의 김씨는 신화에 나오는 소호(少昊)라는 동이족(東夷族) 수령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한족이 아닌 동이족의 성씨이기 때문에 김씨가 오늘날 중국 내에서 소수(少數)인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성씨와 관련된 중국의 현대 자료들도 김씨에 대해 ‘조선족(朝鮮族)이 많이 갖고 있는 성씨’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국의 김씨는 김알지에서 비롯된 신라계 김씨(경주 김씨, 안동 김씨 등)와 가락국계 김씨(김해 김씨, 금녕 김씨 등)로 이루어진다. 김씨 인구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일 수도 있다. 또 이들보다 먼저 등장한 박씨가 김씨보다 숫자가 적은 것은 생물학적으로 후손을 적게 두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고려와 조선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김씨 성이 유독 많은 이유를 알 수 있다. 즉 적잖은 수의 귀화인(歸化人)이 김씨 성을 취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인들 중에는 귀화인의 후예가 적지 않다. 예컨대 김해 김씨 중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귀순(歸順)한 일본군 장수 김충선(金忠善)을 시조(始祖)로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을 사성(賜姓) 김해 김씨 혹은 우록(友鹿) 김씨라고 한다.
 
  원래 이름이 사야가(沙也可)인 김충선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부장(副將)으로 참전했다. 주자학적(朱子學的) 소양을 갖고 있던 그는 조선의 문물을 흠모해 휘하 병졸 3000명을 데리고 조선에 투항했다. 이후 그는 조총(鳥銃) 제조법을 전수하고 동래·울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경주전투에서 공을 세운 후 그는 선조로부터 김해를 본관으로 하는 김씨 성과 ‘충선(忠善)’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자헌대부(資憲大夫·정2품 하) 품계를 받았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북방 수비에 종사하면서 1613년 정헌대부(正憲大夫·정2품 상)로 승진했고, 인조 때에는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降倭村 출신들
 
  임진왜란 때 귀순한 일본인으로는 김상의(金尙義)라는 사람도 있다(일본 성명은 전해지지 않음). 조선시대의 문헌인 《일월록(日月錄)》은 김상의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계사(癸巳·1593)~갑오(甲午·1594)년 사이에 영남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들 중 오랫동안 머무는 데 염증이 나서 항복해 오는 자가 많았다. 그때 김응서(金應瑞)가 불러들인 자만 해도 거의 100여명이 되었다. 그 항복한 왜인들 중 우두머리는 김상의라고 하는데, 그는 항복한 무리들과 함께 왜군 격파에 전공(戰功)을 많이 세워서 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까지 올랐다. 그 뒤로 30년 동안에 항복한 왜인들이 밀양(密陽) 근처에 살면서 자손을 기르고 농사에 힘쓰니 그 마을을 두고 항왜촌(降倭村)이라고 하였다.>
 
  김충선이나 김상의에 앞서 귀화한 일본계 김씨들도 있다. 조선 세종 때 귀화한 김호심파(金好心波), 성종 때 귀화한 김삼보라사야문(金三甫羅沙也文)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이름을 보면 일본에서 쓰던 이름에 김씨 성을 붙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후손도 적지 않겠지만, 일본계 귀화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은 김충선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뿐이다.
 
 
  金나라와 金씨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귀화한 김씨 중 가장 많은 것은 여진족에 뿌리를 둔 김씨다. 육진(六鎭) 개척 당시 세종은 귀화한 여진족 수백 명에게 김씨 성을 하사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세조 때 기록에 나타난 귀화 여진족의 이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종 때- 김거파(金巨波) 김고도개(金古道介) 김구음파(金仇音波) 김권로(金權老) 김대두마(金大豆麻) 김도을온(金道乙溫) 김생아(金生阿) 김소응거(金所應巨) 김속응합(金速應哈) 김시구(金時具) 김아을사(金阿乙沙) 김오광아(金吾光阿) 김자환(金自還) 김파보하(金波寶下) 김파을대(金波乙大) 김희주(金希主) 등.
 
  •세조 때- 김걸도혁(金乞都革) 김공소(金公疎) 김교합(金咬哈) 김다롱합(金多弄哈) 김마상개(金麻尙介) 김우리개(金于里介) 김상미(金尙美) 김아도을치(金阿都乙赤) 김아라(金阿喇) 김아랑합(金阿郞哈) 김아을가(金阿乙加) 김역류(金易留) 김우두(金于豆) 김우허내(金右虛乃) 김유리가(金留里加) 김윤적(金允績) 김이랑합(金伊郞哈) 김인을개(金引乙介) 김입성(金入成) 김주창개(金主昌介) 김지하리(金之下里) 김차독(金箚禿) 김지칭가(金只稱哥) 김자라노(金者羅老).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때 이전에도 김씨 성을 하사받은 여진족들이 있다. 김고시가물(金高時加勿) 김광수(金光秀) 김대첩목아(金大帖木兒) 김동개(金同介) 등이 그들이다.
 
  귀순 여진족들에게 김씨 성을 내린 것은 12세기 여진족 아골타가 세운 금(金)나라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아골타의 조상은 고려에서 건너간 김함보라고 한다. 어쩌면 여진족들이 귀화하기 이전에 김씨 혹은 그에 해당하는 여진 성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중국系 金씨도 있어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귀화한 여진족으로 김씨 성을 가지고 관직에 나간 사람이 많이 있다. 광해군(光海君) 때는 귀화인들이 조선 어디서든 살 수가 있어서 곳곳에서 그들을 볼 수 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현재 여진족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하나도 없다. 김충선을 시조로 하는 사성 김해 김씨가 20만명에 달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여진족을 조상으로 하는 김씨가 적은 것은 모화사상(慕華思想) 때문일 것이다. 족보가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나오기 시작한 중기 이후는 모화사상이 팽배해 있을 때였다. 당시 오랑캐라고 하면 멸시의 대상이었다. 설사 여진족이나 거란족 귀화인을 조상으로 둔 귀화인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감추었을 것이다.
 
  그 밖에 중국에서 귀화한 김씨도 있다. 영양 김씨(英陽 金氏)와 태원 김씨(太原 金氏)는 당(唐)나라에서 귀화한 김씨다.
 
  조선 초기에 명(明)나라에서 귀화해 온 김씨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나오는 김완귀(金完貴) 김용(金龍) 김춘산(金春山) 김남길(金南吉) 김길장(金吉狀) 김성(金聲) 김융(金隆) 김준(金俊) 김귀(金貴) 등이 그들이다.
 
  여진족 귀화인들의 경우 그들의 발음에서 차음(借音)해 한문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그들이 여진족 출신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반면에 명나라에서 귀화한 한족계는 조선인과 유사한 이름을 갖고 있다.
 
  비록 명백히 여진족 출신임을 밝히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김씨 성을 가지고 조선에 뿌리를 내린 여진족들이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을 리는 없다. 아마 우리 주변의 김씨들 중에는 그들의 후예가 적지 않을 것이다. 김씨가 우리 인구의 5분의 1에 달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여진족이 잡거(雜居)하다가 점차 조선의 영토로 편입된 함경도와 평안도에 유난히 경주 김씨 집성촌(集姓村)이 많다는 사실이다.
 
 
  김일성은 전주 김씨?
 
  1960년대 어느 출판사에서 펴낸 《한국인의 족보》라는 책에는 일제(日帝)시대의 자료를 바탕으로 지역별 집성촌 호수(戶數) 기록이 나와 있다. 이에 의하면 함경도 지역에 100호가 넘는 경주 김씨 집성촌이 여러 곳 있었다. 집성촌은 대개 일개 면(面)에 특정 성씨가 수십 호인 것이 보통인데, 함남 영흥군 억기면(咸南 永興郡 憶岐面)의 경주 김씨 집성촌은 200호가 넘었다. 함경북도 명천군(明川郡) 일원에는 260여 호가 있었다. 평안북도 의주(義州)와 벽동(碧潼)에도 경주 김씨가 많이 거주했다.
 
  경주 김씨의 본관이 있는 영남권 못지않은 집성촌이 함경도와 평안도에 많은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혹시 이들 가운데는 귀화해서 김씨 성을 하사 받은 여진족의 후예들이 적잖게 섞여 있지는 않을까?
 
  북한에도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다. 김일성(金日成)의 본관은 전주(全州)라고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이 “나는 전주 김씨인데, 내 시조 묘소가 전라도에 있다 하니 남조선 방문하면 참배하겠다”고 해서 알려졌다.
 
  전주 김씨의 시조는 고려 고종 때 재상을 지낸 김태서(金台瑞)다. 그의 묘는 전북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 자락에 있다고 한다. 앞에서 말한 책에 의하면, 평안도와 함경도에 전주 김씨 집성촌이 몇 군데 있다고 한다.
 
  하지만 김일성 일가가 전주 김씨인지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사람도 있었다. 김일성 정권 초기부터 본관이니 종친이니 따지는 것은 봉건주의의 잔재라 하여 본관에 대한 기록을 없애서 북한 사람 대부분이 자기 성의 본관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김일성 일가의 본관이 어디든 간에, 평안도나 함경도에 거주하던 김씨 일족의 후예일 것이다. 하지만 지역적 특성을 볼 때, 그들이 신라 때부터 내려온 김씨가 아닐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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