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九는 9월 3일에 “國內外同胞에게 告함”이라는 성명과 함께 「臨時政府當面政策 14개 項」을 발표했다. 歸國하면 臨時政府주도로 過渡政府를 수립하겠고, 그 전에 中國 각지에 산재해 있는 僑胞들의 安全과 歸國문제, 日本軍으로 끌려나온 韓人靑年들을 光復軍으로 편입하는 문제 등을 해결하겠다는 것이었다.
자국의 전략적 위치상 韓國獨立의 필요성을 중시하는 中國은 美國政府에 대하여 臨時政府의 승인문제를 거듭 타진하는 한편 金九를 비롯한 임시정부요인들의 早期歸國조치를 종용했다.
蔣介石 총통은 9월 26일과 10월 29일에 金九와 면담하고 임시정부 駐華代表團의 설치, 韓國光復軍의 확대 개편 등에 동의하고, 臨時政府要人들의 귀국비용과 귀국한 뒤의 金九의 活動費로 中國法貨 1億元과 美貨 20만달러를 지원했다. 주화대표단은 11월 1일부터 사무를 시작했다.
金九일행은 11월 5일에야 重慶을 떠나 上海에 도착했다. 그러나 상해에서도 ‘個人資格’의 귀국임을 인정하는 문제로 美軍政府와 실랑이가 벌어져 3주일이나 출발이 지연되었고, 그나마 1진, 2진으로 나누어 귀국해야 했다.
金九를 비롯한 1진 15명은 11월 23일 오후에 金浦비행장에 도착했다. 李承晩보다 5주일이나 늦은 귀국이었다.
1. “國內外同胞에게 告함”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요인 제1진이 귀국한 것은 제국주의 일본이 패망하고도 3개월이나 더 지나고 이승만의 귀국보다 5주일이나 늦은 1945년 11월 23일이었다. 국가건설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두고 “모두가 흥분하여 모두의 참여아래 새로운 질서의 창출을 위해 나서서 마치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라는 정의가 실감나는 ‘광기의 순간(moment of madness)’1)에 3개월이라는 시간은 너무나 중요했다. 그러한 시간을 김구는 중국 땅에서 글자 그대로 노심초사하면서 보내야 했다.
民族革命黨의 타협안 거부해
조선민족혁명당, 신한민주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인사들이 국무위원의 총사직을 고집함에 따라 8월 22일에 파행으로 끝난 임시의정원회의는 귀국할 때까지 끝내 다시 열리지 못했다.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 파행이 계속되자 민족혁명당은 한국독립당에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것은 첫째로 1945년 5월의 제38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논란되었던 해외독립운동자 대표대회를 소집할 것과 둘째로 한국독립당이 8석을 차지하고 있는 국무위원 자리를 5석으로 줄여 국무위원회를 개조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혁당의 요구는 한독당으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중국은 물론 러시아와 하와이, 미주 등지에 산재한 모든 해외독립운동단체들이 귀국을 서두르고 있는 상황에서 해외독립운동자 대표대회를 소집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고,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임시정부의 권력 투쟁은 더욱 치열해져 있었으므로 한독당이 국무위원회의 과반수를 확보하지 않으면 임시정부의 기능이 마비될 위험이 없지 않았다. 게다가 중국국민당정부의 한국독립운동자들에 대한 지원은 김구와 한독당이 주축인 임시정부를 통하여 시행되고 있는 지 오래였다. 한독당이 자신들의 요구를 거부하자 민혁당은 8월 23일에 국무위원회 탈퇴를 선언했고, 조선민족해방동맹도 민혁당에 동조했다.2) 그러나 이들의 탈퇴문제는 이내 없었던 일이 되었다.
이 무렵의 일이었던 것 같다. 김구는 판공처장 민필호(閔弼鎬)로 하여금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 “임시정부 영수 자격으로 미군을 따라 먼저 입국하면 나는 이곳에서 임시의정원을 소집하여 주석위(主席位)를 사직하는 한편 당신을 임시대통령으로 추선(推選)하여 본국으로 통보하겠소이다”라는 내용의 전보를 치게 했다. 민필호는 바로 전보국에 가서 타전했으나 이승만은 이미 미국을 떠나서 귀국도중에 있었다고 한다. 민필호는 “이 일로 나는 김주석의 깊은 뜻에 다시 한번 깊은 감명을 받았다”라고 적어 놓았다.3) 여러가지를 미루어 생각해보게 하는 증언이다.
日本降服조인식 이튿날 「當面政策 14個項」발표
김구는 귀국준비를 서둘렀다. 미주리(Missouri)호 함상에서 일본의 항복조인식이 있은 이튿날인 9월 3일에 김구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명의로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것은 8·15해방 이후에 처음으로 국내외 동포에게 임시정부의 정세인식과 앞으로의 행동방침을 천명한 것이었다.
성명서는 먼저 조국의 해방이 “허다한 우리 선열의 보귀한 열혈의 대가와 중국, 미국, 소련, 영국 등 동맹군의 영용한 전공(戰功)”에 힘입은 것이라면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우리가 처한 현 계단은 「건국강령」에 명시한 바와 같이 건국의 시기로 들어가려 하는 과도적 계단”이라고 언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복국(復國)의 임무를 아직 완전히 끝내지 못하고” “건국의 초기가 개시되려는” 매우 번다하고 복잡한 시기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임시정부 당면정책」14개항을 발표했는데, 그것은 임시정부의 귀국한 뒤의 역할에 대한 포부와 귀국 이전에 실행해야 할 중요한 과제들을 열거한 것이었다. 주요 항목은 다음과 같았다.
(1) 본 임시정부는 최단기간 내에 곧 입국할 것.
(3) 중국,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5강과 먼저 우호협정을 체결하고 외교통로를 개설할 것.
(5) 평화회의 및 각종 국제회의에 참가하여 발언권을 행사할 것.
(6) 전국적 보통선거에 의한 정식정권이 수립되기까지의 국내 과도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국내외 각 계층, 각 혁명당파, 각 종교단체, 각 지방대표와 저명한 각 민주영수회의를 소집하도록 적극 노력할 것.
(7) 국내 과도정권이 수립된 즉시 본 정부의 임무는 완료된 것으로 인정하고 본 정부의 일체의 직능 및 소유물은 과도정권에 인계할 것.
(8) 국내에서 건립된 정식정권은 반드시 독립국가, 민주정부, 균등사회를 원칙으로 한 신 헌장에 의하여 조직할 것.
(9) 국내의 과도정권이 성립되기 전에는 국내 일체 질서와 대외 일체 관계를 본 정부가 책임지고 유지할 것.
(10) 교포의 안전 및 귀국과 국내외에 거주하는 동포의 구제를 신속 처리할 것.
(13) 적군의 강압으로 출전한 (일본군내) 한적(韓籍) 군인을 국군으로 편입하되, 동맹군과 협의하여 진행할 것.
(14)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매국적에 대하여는 공개적으로 엄중히 처분할 것.
臨時政府주도로 過渡政府 수립하기로
이 「당면정책」은 기본적으로 1941년 11월에 발표한 「건국강령」의 이념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5) 다만 (6)항에서 전국적 보통선거에 의한 정식정부 수립이전에 각계각층의 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과도정부를 수립한다는 주장은 임시정부가 곧 정식정부 수립의 주체로 자임했던 「건국강령」의 입장에서는 다소 후퇴한 듯한 인상을 주나, 그것은 이미 제38회 임시의정원회에서 논란되었던 해외독립운동자 대표대회를 귀국한 뒤에 국내인사들까지 확대하여 소집한다는 뜻이었다(『月刊朝鮮』2008년 1월호, 「「독수리作戰」과 「냅코作戰」」참조). 국내 과도정권이 수립되는 즉시로 임시정부의 일체 직능과 소유물을 과도정권에 인계하겠다는 (7)항도 한독당 중심의 임시정부가 사실상 과도정권의 중심세력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8)항에서 국내에서 수립될 정식정권도 반드시 “독립국가, 민주정부, 균등사회를 원칙으로 한 신 헌장”에 의하여 조직되어야 한다고 하여 국민의 보통선거로 구성될 국회에서 제정할 헌법까지 「건국강령」의 이념을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그것을 입증해 준다. 「당면정책」으로 표명된 임시정부의 이러한 정권창출 방안은,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인사들의 귀국도 이승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개인자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46년 초까지 그들의 행동지침이 되었다.6)
김구의 이 “국내외동포에게 고함”은 10월말에 하지의 특사로 상해에 다녀온 오광선(吳光鮮)에 의하여 국내에 전달되었고,7) 국내 신문에 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 관계 기사가 연일 폭주하는 상황 속에서 그 전문이 크게 보도됨으로써8) 일반국민들로 하여금 임시정부의 권위를 더욱 실감하게 했다.
重慶에 있는 550명을 우선 上海로 옮겨 놓아야
임시정부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당면정책」제10항, 곧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동포들의 안전과 귀국 문제였다. 그 가운데서도 임시정부를 따라 중경까지 와서 갖은 고생살이를 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의 이런저런 의무를 다해 온 동포들을 우선 상해까지라도 옮겨 놓아야 했다. 중경에는 임시정부 직원 가족 등 동포 550여명이 살고 있었다. 양자강(揚子江)의 기선운행이 재개된다는 소식을 들은 김구는 9월 12일에 오철성(吳鐵城) 비서장과 군사위원회 주임 하국광(賀國光)에게 이들에게 귀국여비를 지급해주고 선박관리처에 기선의 좌석 550인분을 발급하도록 주선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김구는 두 사람에게 보낸 이날의 편지에서 또 장개석(蔣介石)과의 면담을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다.9)
김구는 상해 교민대표로 9월 10일에 중경을 방문한 구익균(具益均)과 박용철(朴容喆)로부터 상해의 상황을 자세히 들었다.10) 이들은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임시정부가 빨리 상해로 나와서 교민들을 도와주기를 요청했다. 임시정부의 발상지인 상해의 소식은 기가 찼다. 중국인들이 일본인보다도 한국인을 더 좋지 않게 생각하여 동포들의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현상은 상해에서만 일어나고 있지 않았다. 중-일 전쟁 이후에 중국에 진출한 한국인들은 거의가 일본군 군인 및 군속이거나 일본군과 관련된 사업으로 이득을 취하던 사람들이었다. 개중에는 아편밀매꾼들도 적지 않았다.11) 그 때문에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을 일본의 앞잡이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일본이 패망하자 많은 한국인들이 이른바 한간(韓奸·한국인 간첩)으로 몰려 포로취급을 당하기도 하고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중국관내 각 지역에 대표를 파견하여 교민회 또는 한인회의 조직을 주선하고 현지 중국 관공서와 교섭하여 동포 보호에 나섰다.12) 상해에는 선전부장 엄항섭(嚴恒燮)을 안우생(安偶生), 선우진(鮮于鎭) 두 수행원을 딸려 파견했다.13) 1945년 10월 현재 중국 관내에는 7만7,600명의 한국 교포들이 거류하고 있었다.14)
교포문제와 함께 「당면정책」(13)항에서 언명한 일본군 안에 있는 한적병사문제도 임시정부가 해결해야 할 큰 과제였다. 당(黨)-군(軍)-정(政)이라는 국민당정부의 권력구조 아래서 활동해 온 임시정부인사들이 광복군의 육성에 특별한 열성을 가졌던 것도 대일전쟁을 위한 무력 양성이라는 의미에 더하여 군대가 권력장악의 직접적인 힘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고 중국정부에 항복한 일본군의 총 병력은 128만3,200명이었는데, 그 안에는 한적 장병이 2만8,200명쯤 있었다.15) 임시정부는 이들을 중국정부의 협조를 얻어 광복군으로 편입하고자 한 것이다.
宋鎭禹 등의 편지에 고무돼
국민당정부와의 귀국교섭에 부심하던 김구에게 『대공보(大公報)』의 특파원이 전한 송진우(宋鎭禹) 등 한국민주당 인사들의 편지는 큰 용기를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9월 7일에 국민대회준비회결성대회를 마친 송진우는 한국을 취재하러 온 기자에게 부탁하여 국내 사정을 “정확 치밀하게” 적은 편지를 김구에게 보냈었다(『月刊朝鮮』 2010년 6월호, 「美軍進駐와 兩分되는 政局」참조). 잇달아 9월 14일자로 조병옥(趙炳玉)과 원세훈(元世勳)이 김구, 김규식(金奎植), 신익희(申翼熙) 앞으로 미군을 통하여 보낸 편지는 “여운형(呂運亨) 등이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여 국민을 기만하고 있고”, 자신들은 국민대표대회를 계획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심각합니다. 그러므로 임시정부는 조속히 귀국하여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임시정부가 빨리 귀국할 것을 촉구했다.16)
이러한 국내인사들의 편지에 고무된 김구는 우선 국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대표 몇 사람을 입국시키기로 하고, 9월 18일에 장개석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먼저 “국내의 명망 있는 지사들이 국민대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가 우선하여 귀국할 것을 독촉하고 있다”고 말하고, 조소앙(趙素昻: 대표), 엄항섭, 김영갑(金英甲)을 귀국시켜 연락을 취하게 하고 나머지 중요직임자 19명을 한꺼번에 또는 두 차례에 나누어 입국시켜 국내외와 연계하게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마치지 못한 사무나 교민들의 수송과 귀국문제를 처리하기 위하여 박찬익(朴贊翊·대표)과 민필호(閔弼鎬)를 중경에 주재시키겠다면서 지원을 부탁했다. 그러고는 8월 24일의 비망록에서 요청한 5,000만원(元) 차관 문제는 사용할 곳이 많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면서, 속히 처리해줄 것을 요청했다. 김구는 이 편지에도 “임시정부가 입국한 뒤에 진행할 정책”이라면서 「임시정부 당면정책」의 (6)항에서 (9)항까지를 그대로 첨부했다.17)
2. 中國法貨 1億元과 20万달러 支援
김구가 사흘이 멀다 하고 국민당정부 관계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조소앙이 부지런히 중국외교부와 미국대사관을 찾아다녀도 임시정부의 귀국교섭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활동비를 정기적으로 지원하는 등으로 사실상 승인하다시피 하며 지지해온 국민당정부도 2차대전 후반기부터 국제적 위상이 약화됨으로써 미국에 대해 한국처리문제를 강력하게 주장할 수 없었다. 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문제도 마찬가지였다.
“中國은 咸鏡北道 鐵道經營權 요구해야”
국민당정부의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와 성원은 물론 한국의 독립이 중국의 전략적 위치상 중요하다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한 보기로 국민당정부가 1945년 초에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한국독립계획강요초안(韓國獨立計劃綱要草案)」이라는 정책문서를 들 수 있다. 이 정책문서는 미국, 소련, 영국이 한국을 일정한 기간의 신탁통치를 거쳐 독립시키면서 한국의 전략상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육-해-공군기지를 요구할 때에는 중국도 같은 권리를 요구해야 하며, 나아가 중국의 지리적 관계의 특수성에 비추어 함경북도 회령(會寧)에서 웅기(雄基), 나진(羅津), 청진(淸津)에 이르는 철도경영권을 요구할 수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18) 그러한 판단에서 국민당정부는 임시정부가 독립한국정부의 중심세력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국민당정부는 2차대전이 끝난 뒤에 업무보고를 위하여 귀국하는 주중미국대사 헐리(Petric J. Hurley)에게 다음 세 가지의 요망사항을 전했다. 첫째는 한국의 국가건설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밝혀주고, 둘째로 미국은 신속히 항공기를 파견하여 중국에 있는 한국독립운동 영수들을 그들의 고국으로 보내기를 희망하며, 셋째로 남한의 미국군정부 하지(John R. Hodge) 장군은 중국에 있는 한국임시정부 인사들에게 그 군정부의 행정 직무를 맡기도록 최대한 힘쓸 것을 희망한다는 것이었다. 국민당정부의 이러한 요구는 임시정부로 하여금 귀국하여 과도정권이 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었고 국민당정부 자신이 어떤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수도 없었으므로 “미국의 정책에 배합하는 형식아래”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미래의 진로를 찾게 하겠다는 것이었다.19) 그러면서 군사위원회 시종실의 비서겸 외교부 정보사(情報司)의 사장 등으로 한국문제를 담당해온 소육린(邵毓麟)을 중장계급의 군사위원장 대표로 서울에 주재시키기로 했다.20) 소육린은 1944년 3월에 김구의 고문으로 위촉되어 각 정파의 의견조정 등 임시정부의 내부 문제에도 깊이 관여해 온 인물이었다.21)
蔣介石이 美國에 對韓政策 물어
장개석 총통은 9월 15일에 주미대사 위도명(魏道明)에게 국민당정부의 대한정책을 설명하면서 미국정부의 궁극적인 대한정책이 어떤 것인지를 트루먼 대통령이 명시할 것을 요청하라고 훈령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4개국이 공동으로 한국인들의 훈정정부(訓政政府) 조직을 원조하고 그런 연후에 완전 독립국이 되게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럴 경우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를 기반으로 하여 확충시키는 것이 타당하며 그렇지 않고 별도의 신정부를 수립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공산당을 배제해야 된다는 점을 미국정부와 속히 협상하라는 것이었다.22)
위도명은 9월 25일에 애치슨(Dean Acheson) 국무장관대리를 만났다. 이 자리에는 빈센트(John C. Vincent) 극동국장이 배석했다. 트루먼 대통령의 대한정책이 루스벨트 대통령의 정책과 달라진 것이 있느냐는 위도명의 질문에 애치슨은 한국에 관한 미국의 정책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고 말했다. 애치슨은 위도명에게 4개국 신탁통치협정에 대한 미국정부의 구상을 설명하고, 가까운 시일안에 협정체결을 위한 협상을 개시할 수 있게 되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임시정부가 궁극적인 한국정부의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위도명의 주장에 대해 애치슨은 미국은 중경에 있는 한국인들의 귀국교통편을 제공할 것을 계획하고 있고, 귀국하면 그들은 개인자격으로 한국의 행정부 구성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정부의 최종적인 구성은 신탁통치협정에 참가하는 4대국 사이에서 논의될 문제라고 말했다. 애치슨은 미국은 되도록 빨리 현재의 북위38도선에 의한 미-소의 분할점령을 전 한국에 걸친 단일행정으로 대체하게 되기를 열망하고 있고, 되도록 빠른 시일 안에 신탁통치 아래서 단일의 민간정부가 군정을 대신하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23)
임시정부의 귀국문제에 관한 국민당정부의 대미교섭은 중경에서도 진행되었다. 중국국민당 선전부장 오국정(吳國楨)은 9월 25일에 주중미국대사관을 방문했다. 오국정은 미국대리대사 로버트슨(Walter Robertson)에게 소련이 한국의 소련군점령지역에 공산주의 정부그룹을 조직 또는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면서 “이 사실에 비추어 총통은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사들을 가능한 대로 정부의 행정직에 임명하여 귀국시키도록 제안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만일 미국이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한다면 중국정부도 기꺼이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24) 이날은 장개석이 김구와 면담하기 하루 전날이었다.
駐中美軍司令部가 國務部 태도에 반발해
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문제에 대한 미국정부의 방침은 9월 21일에 주중미국대사에게 통달되었다. 그것은 현지 미군사령부와 협의를 거치고 그들이 거부하지 않는다면 국무부는 반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국무부는 그러면서 주중미군당국은 (1) 한국인들이 어떤 ‘임시정부’의 관리로서가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가고, (2) 모든 한국인 그룹에게 동등한 자격과 편의가 제공되며, (3) 군당국의 중요한 작전에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교통편을 제공할 수 있을 경우에만 이들 한국인들의 교통편의를 제공해야 한다고 못박았다.25) 이에 대해 중국주둔미군사령부는 국무부가 한국인들의 귀국을 제의하거나 후원한다면 가능한 대로 그 목적을 위해 기꺼이 항공편을 마련하겠지만, 단지 반대하지 않는다는 국무부의 성명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반발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치적 결정의 책임을 군에 전가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26) 그리하여 국무부는 9월 27일에 “한국내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감안하여 건설적인 능력을 가졌고 군정부의 틀 안에서 활동하고자 하는 인사들의 입국은 장려되어야 하고, 자리가 있다면 육군통제하의 항공편을 제공해도 좋을 것”이라고 주중미국대사관에 통보했다. 그리고 입국희망자들에 대한 입국 허가는 맥아더(Douglas MacArthur) 사령부의 육군채널을 이용하고 있는 한국현지사령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27) 이렇게 하여 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 문제는 하지 사령관의 소관사항으로 확정되었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면서 한국은 중국전구에서 태평양전구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국민당정부 외교부장 왕세걸(王世杰)은 10월 28일에 한국임시정부 인사들의 신속한 귀국을 허락해 줄 것을 요망하는 편지를 주중미국대사관을 통하여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냈다.28)
1年만에 만난 金九와 蔣介石
김구와 장개석의 면담이 이루어진 것은 9월 26일이었다. 이날 장개석은 김구와 단독으로 만나기에 앞서 오전 8시에 김구를 비롯하여 부주석 김규식, 외교부장 조소앙, 군무부장 김원봉(金元鳳), 의정원 의장 홍진(洪震), 독립군 총사령 이청천(李靑天) 6명을 군사위원회로 초치했다. 회담내용은 알려진 것이 없으나, 장개석은 이들에게 무엇보다도 단합과 행동통일을 강조했을 것이다.
김구는 이날 오후 4시에 관저로 장개석을 방문했다. 김구는 박찬익을 통역으로 대동했고, 장개석은 중국국민당 비서장 오철성을 배석시켰다. 1944년 9월 5일에 만난 뒤로 1년 만의 만남이었다. 전쟁이 종결되고도 두 사람의 면담이 이렇게 늦어진 것은 한국처리문제를 두고 미국과 국민당정부의 정책조정이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29)
비록 귀국문제로 노심초사하고 있기는 했으나, 1년 전에 처절한 상황에서 장개석을 만났을 때에 비하면 김구는 한결 마음에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국가건설의 희망으로 가슴이 벅차 있었다.
김구는 면담에 앞서 비망록 형식의 정중한 문서를 작성하여 장개석에게 제출했다. 이 문서에서 김구는 7개항의 요구사항을 제시했는데, 장개석을 만난 자리에서는 그 가운데에서 중요한 것 다섯 가지를 거론했다. 그는 먼저 미국과 교섭하여 한국임시정부 인원이 항공편으로 속히 귀국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대해 장개석은 이미 주관기관에 지시하여 미국과 교섭을 진행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다음으로 김구는 「임시정부 당면정책」에서 밝힌 귀국 후의 과도정부 조직문제를 설명했다.
“우리 인원들이 한국임시정부 명의로 귀국할 수 없는 사정을 잘 압니다. 그렇지만 중국이 미국과 협의하여 우리가 귀국한 뒤에 각 당파 합작으로 임시정부를 건립하고 임시정부의 관리아래 전국적인 선거를 실시하여 정식정부를 성립시키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해 장개석은 앞으로 영-미와 협상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신중하게 답변했다.
세 번째로 김구는 한국독립당과 중국국민당이 협력을 보장하는 비밀협약을 체결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그것은 장개석이 선뜻 수용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장개석은 “앞으로도 당연히 한국독립당을 계속 원조할 것이지만 굳이 형식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라는 말로 완곡히 거절했다.
네 번째는 차관문제였다. 김구는 “목전의 긴급한 수요에 충당할 수 있도록 차관을 제공해주시면 장래에 상환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김구는 8월 24일에 제출한 비망록에서도 중국화폐 3억원(元)의 차관을 요구해 놓고 있었다. 장개석은 차관문제에 대해서는 고려해 보겠다고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장개석의 이러한 대답에 김구는 적이 마음이 놓였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구는 “각 수복지구 민-정장관에게 명령하시어 한교 가운데 불법분자는 엄하게 다스리되 선량한 사람들은 보호받을 수 있도록 조치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장개석은 요청대로 시행하도록 하겠다고 응낙했다.30) 그러면서 장개석은 김구일행이 귀국할 때에 저명인사 한 사람을 동행시키겠다고 말했다. 소육린을 파견할 계획을 하고 있음을 내비친 것이었다. 면담을 마치면서 장개석은 김구에게 떠나기 전에 한번 더 만나자고 말했다.31)
歸國후의 活動費로 50万달러 要請
장개석과의 면담으로 고무된 김구는 귀국준비를 꼼꼼히 챙겼다. 10월 7일에 오철성 비서장에게 보낸 편지는 이때에 김구가 며칠 안에 중경을 떠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귀국하고자 하는 부장이상 인원과 수행원 및 비서는 모두 29명이고, 중요 공문서를 담은 가죽 트렁크가 10여개이며, 그밖에도 휴대품이 조금 있다면서 모든 인원과 물품을 한꺼번에 싣고 귀국할 수 있도록 대형 수송기 한 대 또는 두 대를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구는 또 임시정부요인들이 귀국할 때에 동행시키겠다고 장개석이 말한 인사의 이름을 빨리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중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무전기 1대를 가지고 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가장 절실한 것은 역시 자금문제였다. 김구는 귀국인원의 사전준비와 여비에 충당할 5,000만원과 귀국한 뒤의 활동비로 50만달러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32) 김구는 이미 요청해 놓고 있는 3억원의 차관에 더하여, 귀국한 뒤의 활동비로 50만달러를 새로 요청한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장래와 임시정부의 역할에 대한 국민당정부의 기대를 그 나름으로 짐작하여 요청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정도면 당장 경비부족으로 일을 그르치는 일은 없을 듯합니다”라고 쓰고 있어서 흥미롭다.
마지막으로 김구는 귀국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장개석이 약속한 대로 속히 다시 만날 날짜를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김구의 3억원 차관요청에 대해 국민당정부는 1억원을 지원하기로 하고, 5,000만원을 먼저 지급했다.33) 그리고 귀국한 뒤의 활동자금으로 요청한 50만달러에 대해서는 20만달러를 지원하기로 하고 10월 30일에 장개석의 최종 결재가 났다34)(1945년의 20만달러는 2008년의 물가지수로 환산하면 239만달러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때의 달러와 원(元)화의 공정환율은 1 : 20이었으므로 1억원은 500만달러에 해당했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의 경제규모의 차이를 감안하면 실제로는 그보다 더 큰 값어치의 자금이었다). 김구일행이 귀국한 뒤에 국민당정부는 중경 거주 교포들의 월동과 귀국비용으로 3,000만원을 별도로 지급했다.35)
김구는 귀국할 때에 미화 20만달러를 휴대할 합법적인 방법이 없었으므로 이 돈을 뉴욕의 주미중국대사관에 보낸 뒤에 다시 서울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미국과 한국 사이에는 외환결제제도가 없었고 게다가 미국 은행의 인출금액에 한도가 있었기 때문에 20만 달러를 서울로 송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이 20만달러는 중국은행에 예치하여 두었다. 그랬다가 1946년 겨울에 주한중국총영사 유어만(劉馭萬)과 협의하여 그중 10만달러를 주화대표단에 지급했고, 나머지 10만달러는 그 뒤에 김구의 차남 김신(金信)이 중국에 가서 찾아왔다.36)
김구는 조소앙을 먼저 상해로 보낸 다음, 10월 중순에 이르러 화북, 화중, 화남 세 지역으로 한교선무단(韓僑宣撫團)을 조직하여 파견했다. 교포들의 실태를 조사하고 구호를 위한 선무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화북한교선무단의 단장은 이광(李光), 화중한교선무단장은 이상만(李象萬), 화남한교선무단장은 지청천이 맡았다. 중국인들과의 마찰로 전전긍긍하던 교포들은 한교선무단을 환영했으나, 지역에 따라서는 현지 행정당국의 비협조로 선무활동이 난관에 봉착하기도 했다. 한교선무단은 뒤이어 창설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에 편입되었다.
安重根의 아들 安俊生을 엄벌하도록 부탁
김구와 장개석의 마지막 면담은 10월 29일 4시에 장개석의 관저에서 이루어졌다. 김구는 먼저 고별인사를 하면서 중국법폐 1억원과 미화 20만달러를 지원해준 데 대해 깊은 감사의 뜻을 표했다.37)
이 면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김구가 상해에 있는 안중근(安重根)의 아들 안준생(安俊生)을 처벌할 것을 강력히 요청한 사실이다.
“한국 혁명선열인 안중근의사의 아들이 변절하여 일본에 투항한 뒤에 상해에서 아편을 밀매하는 등 많은 불법행위를 저지른 사실은 실로 불행한 일입니다. 또한 원래 독립당원이던 최아무개가 공산당에 투항하여 상해에 한국청년연합회를 조직한 것도 한국임시정부를 위해하려는 의도에서입니다. 이들의 활동을 단속해야 합니다. 위원장께서 상해경비사령부에 하명하시어 이들을 체포해주시기 바랍니다.”
장개석은 자세한 내용을 조사하여 서면으로 알려주면 조치하겠다고 대답했다.
김구는 일생동안 안중근 집안과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했고, 특히 안중근에 대해서는 숭모의 정이 각별했다. 중-일전쟁이 터지고 남경(南京)을 떠나 호남성(湖南省)의 장사(長沙)로 이동할 때에는 안공근(安恭根)으로 하여금 상해에 가서 안중근의 부인을 모셔오게 했으나 안공근이 자기 식구들만 데리고 오자 크게 질책했었다. 안중근의 부인은 둘째 아들 안준생과 같이 상해에 살고 있었다. 항주(杭州)의 지강대학(智江大學)을 졸업한 안준생은 윤봉길의 투탄사건 이후에 일본경찰의 협박과 회유로 변절해 있었다. 안준생은 1939년 10월에 상해재류조선인실업가 만선시찰단(滿鮮視察團)의 한 사람으로 난생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는데, 이때에 일본경찰은 안준생의 특별 일정을 준비했다. 안준생은 총독도 방문했고, 특히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30주기를 맞아 서울에 온 이토의 아들 이토 후미키치(伊藤文吉) 일본 참의원을 만나게 한 것이다.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每日新報)』는 안준생이 이토에게 “지금 생각해도 가슴아프리만큼 그때의 일[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 부끄럽습니다”라고 말했다고 대서특필했다.38) 면담 이튿날에는 두 사람이 같이 박문사(博文寺)를 참배했다.39) 박문사는 일본사람들이 가증스럽게도 남산기슭에 있는 장충단(奬忠壇)을 헐고 그 자리에 이토 히로부미의 위령사찰로 지은 절이었다. 안준생은 서른세 살이었고 이토는 쉰여섯이었다.
안준생은 상해에서 악기상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1939년 현재의 자본금은 30만원이었다.40) 안준생이 아편 밀매에 관여하고 있었는지 확인할 만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으나, 상해주재 일본총영사관이 상해에 있는 한인 3,000명이 직접 간접으로 아편밀매에 개입했다고 기록하고 있을 만큼 이 시기에는 한인들의 아편밀매가 성했으므로,41) 김구의 말이 근거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귀국한 뒤에 김구는 경교장(京橋莊)으로 찾아온 안준생을 보지 않았다.
“韓國의 獨立은 中國의 責任이라고 생각해”
다음으로 김구가 장개석에게 강조해서 부탁한 것은 광복군 확충문제였다. 한국광복군이 상해, 북경, 광동 등지에 거점을 확보하고 활동하고 있는 실상을 설명하면서 현지의 군-정장관에게 명하여 광복군활동을 보호하고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장개석은 그러겠노라고 확답했다.
장개석은 임시정부인원들이 귀국한 뒤에도 중경에 대표단을 상주시켜 중국정부와 계속 연락을 취하도록 하겠다는 김구의 제의에도 쾌히 동의했다. 장개석의 이러한 태도는 정부 승인을 하지 않은 국가의 외교대표부의 설치를 공식으로 인정한 것이어서 매우 의의있는 결정이었다.
이어 만주지역의 한국인 공산주의자문제와 한간처리문제 등을 협의하고 나서, 김구는 마지막으로 장개석에게 지시할 일이나 바라는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장개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동지들이 서로 일치단결하여 함께 난관을 극복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비록 중국의 역량이 충분하지는 않지만, 힘닿는 데까지 한국이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있도록 적극 원조하겠습니다. 이는 중국의 일관된 정책이기도 합니다. … 우리는 한국의 독립은 중국의 책임이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
김구는 기념으로 간직하겠다면서 장개석의 사진을 몇 장 달라고 말했다. 장개석은 얼마든지 좋다면서 사진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보내달라고 말했다.42) 김구 자신도 중경을 떠나면서 그동안 신세졌던 국민당정부 중간간부들에게 만년필 등 간단한 선물과 함께 기념으로 자신의 사진을 보냈다.43)
大韓民國臨時政府駐華代表團 설치
장개석과의 면담에서 합의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화대표단의 설치 문제는 바로 실행되었다. 10월 31일의 주비회의(籌備會議)를 거쳐 11월 1일부터 정식으로 사무를 개시한 주화대표단의 편제는 김구가 주화대표단의 활동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각 지역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던 한교선무단과 광복군총사령부는 주화대표단의 산하기구로 편입되었다. 단장에는 예정대로 박찬익이 임명되고 민필호와 이청천 두 사람이 대표로 임명되었다. 그 산하에 행정부서로 비서처, 교무처(僑務處), 군무처, 총무처의 4개처와 전원실(專員室), 경위대가 설치되었다. 그 가운데에서 교포업무를 주관하는 교무처와 광복군 업무를 주관하는 군무처가 주요부서였다. 교무처장에는 박영요(朴永堯)가 임명되었다가 뒤에 민필호가 겸임했고, 군무처장은 이청천이 처음부터 겸임했다. 비서처장에는 김은충(金恩忠), 총무처장에는 민영구(閔泳玖)가 임명되었다.
주화대표단이 추진한 주요업무는 첫째로 임시정부의 귀국이후의 잔무처리, 둘째로 임시정부 직원들과 그 가족들의 귀국주선 및 생활보장과 중국에 거주하는 한인교포들의 안전과 재산보호, 셋째로 한국광복군의 훈련과 중국군에 포로로 수용되어 있는 일본군내 한적사병들을 광복군으로 편입하고 귀국시키는 일, 넷째로 중국정부와의 외교교섭과 연락업무를 처리하는 것이었다.44) 김구는 11월 1일에 중국국민당 비서처로 주화대표단이 성립된 사실을 통보하면서 협조를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45)
中國共産黨까지 환송회 열어
임시정부의 귀국이 가까워지자 중국인사들은 여러 기관에서 송별회를 열었다. 먼저 10월 24일 저녁에 중국국민당이 상청화원(上淸花園)에서 성대한 환송만찬회를 베풀었다. 한국쪽에서는 김구를 비롯한 김규식, 조완구(趙琬九), 박찬익, 김원봉, 신익희(申翼熙), 최동오(崔東旿), 유동열(柳東說), 홍진 등 각 정파의 대표 대부분과 중국쪽에서 손과(孫科), 빙옥상(憑玉祥), 진과부(陳果夫) 진림부(陳立夫) 형제, 오철성, 하국광 등 중국국민당의 핵심간부들이 나와 참석자들은 100여명에 이르렀다.46) 이어 10월 29일에는 한중문화협회 창립 3주년 축하를 겸한 송별회가 열렸다. 이 송별회에도 양국 인사 100여명이 참석했다.47) 또 11월 3일에는 중국외교협회, 중경시참의회, 중한문화협회 등 32개 단체가 합동으로 한국혁명영수 귀국환송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400여명의 인사들이 참석했다.48) 11월 5일에 중국국민당 대강당에서 열린 환송다회(茶會)는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宋美齡)의 주최로 열린 것이었으나, 사실상 국민당정부의 공식 환송회나 마찬가지였다. 정면 양쪽 벽에는 태극기와 청천백일기가 걸리고 헤드테이블에는 장개석 내외와 김구가 나란히 앉았다. 이날의 즉석연설에서 장개석이 “전 동아시아민족의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 우리는 먼저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성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한국에 대한 국민당의 유일한 원칙이다”라고 한 말이 국내신문에도 크게 보도되고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의 사설에까지 이용되었던 것은 앞에서 본 대로이다(『月刊朝鮮』2010년 11월호, 「美軍政府의 國家非常事態宣言을 지원하다」참조).
국민당정부와의 합작교섭을 위하여 중경에 와 있던 중국공산당의 중경주재판사처장 주은래(周恩來)와 중앙의장 동필무(董必武) 등도 임시정부 국무위원 전부를 초청하여 송별연을 베풀었다.49) 송별연에서 모택동(毛澤東)과 주덕(朱德)이 격려의 연설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50)
3. 26년만에 ‘個人資格’으로 歸國
마침내 11월 5일 오후에 김구를 비롯한 국무위원과 경위대원 등 모두 29명이 장개석이 내어준 수송기 두대에 나뉘어 타고 중경을 떠나 상해로 향했다. 군사위원회대표로 서울에 파견하기로 되어있는 소육린과 비서처의 장수현(張壽賢) 비서, 거기에 중국국민당에서 파견한 무전기사 3명이 무전기 한 대를 가지고 동행했다. 김구로부터 무전기 한 대를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오철성은 무전기사들까지 같이 보낸 것이었다.51) 비행장에는 중국정계의 원로들과 각계 명사들, 그리고 교포 등 많은 환송인파가 나와 일행을 배웅했다.
비행기는 다섯 시간 뒤인 오후 6시에 상해에 착륙했다. 윤봉길(尹奉吉)의 홍구공원(虹口公) 투탄사건으로 황급히 상해를 떠난 지 13년 만에 돌아온 것이었다. 비행기가 착륙한 곳이 바로 홍구공원이었다. 13년 동안 상해에 살면서도 프랑스조계 밖을 한발자국도 나가보지 못한 김구는 홍구공원이 난생 처음이었다. 6,000여명의 교포들이 아침 6시부터 김구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고 했다. 바로 임시정부 환영식이 열렸다.52)
김구는 상해에 도착했을 때의 소회를 간략하게 적어 놓았다.
“상해 전 동포들의 대성황리에 환영회를 개최하였다. 13년 전에 본 어린아이들은 벌써 장성하였고, 장정들은 이미 노쇠하여 옛 얼굴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
세상 만사가 어찌 모두 무심하고 우연이라 하리오. 상해에 거주하는 동포수가 13년전보다 몇십배나 증가되었으나, 왜적과의 전쟁으로 인한 생활난의 고통으로 인하여 각종 공장과 사업방면에서 부정한 업자가 속출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전 독립정신을 굳게 지키며 왜놈의 앞잡이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선우혁(鮮于爀), 장덕로(張德櫓), 서병호(徐炳浩), 한진교(韓鎭敎), 조봉길(曹奉吉), 이용환(李龍煥), 하상린(河相麟), 한백원(韓栢源), 원우관(元宇觀) 등 불과 10여인에 불과하였다. 그들의 굳은 지조를 가상히 여겨 서병호 자택에서 만찬회를 개최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그러면서 대표적인 ‘왜놈의 앞잡이’인 안준생에 대해서는 특별히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 중국관헌에게 부탁하였으나, 관원들이 실행치 않았다”고 적어 놓았다.53)
김구는 먼저 아내 최준례(崔遵禮)의 무덤을 찾았다. 김구는 일본조계의 한 자선병원에서 가련하게 세상을 떠난 아내의 임종마저 지켜보지 못한 것이 평생 한이었다. 열여덟 살의 활달한 처녀였던 최준례는 열세 살 위인 김구와 결혼하여 여장부인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험난한 독립운동자 아내의 삶을 꿋꿋이 살았다. 김구는 프랑스조계 공동묘지로 최준례의 묘지를 찾아갔으나, 분묘는 흔적도 없이 되어 있었다. 의아해하는 김구에게 따라온 묘지기가 10년 전에 이장한 사실을 알려주면서 그곳으로 안내해 주었다.54)
邵毓麟과 같이 歸國하게 해달라고 蔣介石에게 打電
임시정부 요인들이 도착하기 전에 그동안 상해에는 하지 장군이 보낸 특사 두 사람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다녀왔다. 한 사람은 하지의 비서관 로건(Logan) 대령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8·15해방 직후에 만주에서 귀국한 독립군장교 오광선이었다.
로건은 미시간대학교 동창생인 김형민(金炯敏)과 함께 상해를 두 번 다녀왔다. 10월말에 처음 갔을 때에는 김구는 만나지 못한 채 먼저 상해에 와있던 조소앙만 만나고 왔다. 11월초에 두 사람이 다시 간 것은 김구도 상해에 도착한 뒤였다. 국내동포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김형민의 말에 김구는 “구태여 내가 필요하다면 돌아가서 신주노릇이나 할까요”하고 말했다. 로건 대령은 김구를 따로 만났다.55)
오광선은 이기붕(李起鵬)과 함께 하지를 만나 임시정부 및 광복군 관계자들과 귀국문제를 협의하고 오겠다고 제안하여 하지의 동의를 얻고 군용기를 제공받았다. 오광선은 상해에서 광복군확대재편 활동을 벌이고 있던 이청천과 감격적인 해후를 하고, 광복군 국내지대장으로 임명되어 귀국했다.56) 앞에서 본 대로, 9월 3일에 발표한 김구의 “국내외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과 「임시정부 당면정책」이 국내신문에 뒤늦게 크게 보도된 것은 이때에 오광선이 가지고 온 것이었다.
그런데 로건 대령과 오광선이 상해에 간 이유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것이 없다. 하지가 11월 13일에 중국주둔 미군사령부로 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이 개인자격임을 확인시키기 위한 전문을 보낸 것을 보면,57) 이들의 상해행도 같은 취지에서 취해진 조치였을 개연성이 크다.58)
11월 10일까지는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던 김구일행의 귀국은 3주일 가까이나 지체되었다.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김구는 11월 7일에 한국을 방문하는 중국 『중앙통신(中央通訊)』특파원 증은파(曾恩波) 기자를 통하여 한국민주당 정치부장 장덕수(張德秀)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내용은 8월의 제5차 임시전당대회에서 개정한 한국독립당의 「선언」 「정당」 「정책」에 천명되어 있는 정치노선을 지켜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59) 또 11월 17일에는 이시영과 조소앙이 국민당의 안재홍(安在鴻)에게 편지를 보냈다.60)
상해까지 동행한 중국군사위원회의 소육린은 바로 중경으로 돌아갔는데, 11월 8일에 김구가 장개석에게 소육린을 상해로 돌려보내어 같이 귀국하게 해달라고 타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때에 김구가 얼마나 국민당정부에 의지하고 있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61)
이 무렵 한 국내신문에 실린 ‘시사만평’은 김구일행의 귀국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정당통일”이라는 올망졸망한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이승만이 “대연합국우호관계”, “민주정권”, “인민선거” 등의 보따리를 들고 들어오는 김구에게 “어서 와서 좀 거들어 주시오” 하면서 손을 내밀고 있는 만화이다.62)
“美軍政이 철수한 뒤에 들어가도 늦지 않아”
임시정부요인들의 상해 출발이 늦어진 것은 임시정부 인사들의 귀국이 개인자격임을 확인하는 서약서에 서명하라는 미군사령부의 요구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국무위원의 한 사람이었던 조경한의 술회는 이때의 논란이 얼마나 명분에 집착한 비현실적인 것이었는가를 실감나게 한다.
“국무회의가 열렸다. 분하고 기막힌 정서는 누구나 일반이었다. ‘모욕적인 싸인을 말고 이대로 귀국하지 않고 있다가 미군정이 철수한 뒤에 들어가도 늦지 않다’고 주장하는 일부인사도 있었으나, ‘싸인은 물론 모욕이나 우리의 정세가 어서 들어가서 국가의 일대 혼란을 만분지일이라도 바로잡아줄 의무가 있는 것이다. 형식은 기관이 아닌 개인이라고 싸인을 해줄지라도 어디까지나 들어가기 위한 임기응변의 권변(權變)과 방편에 불과한 것인데 기관을 운영한 전원이 들어가는 마당에 어찌 기관이 아니라고 보며 기관의 권력 발동에 있어서도 이미 정권을 국민에게 봉환키로 결정한 바 있으니 기회 보아서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봉환에 대한 절차를 준비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권변으로 싸인을 해주고 보자’는 이론이 압도적이어서 싸인해 주기로 가결하였다.”63)
김구는 11월 19일에 중국전구미군사령관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 장군에게 서약서를 제출했고, 맥아더는 그날로 김구일행의 귀국을 승인하고 이를 주중미국대사관을 통하여 국민당정부에 통보했다. 그리고 오철성은 그 사실을 21일에 김구에게 타전했다.64)
웨드마이어 將軍에게 誓約書 제출하고
하지 장군은 11월 20일에 G-47 프로펠러 수송기 한 대를 상해로 보냈다. G-47기는 15명밖에 탑승할 수 없었으므로 임시정부요인들은 1, 2진으로 나뉘어 귀국해야만 했다. 모두가 먼저 떠나고 싶어하는 상황에서 1진의 명단을 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결국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을 비롯하여 가장 연장의 국무위원 이시영, 문화부장 김상덕(金尙德), 참모총장 유동열, 선전부장 엄항섭이 1진으로 귀국하기로 하고, 수행원으로 주석 주치의인 유진동(劉振東), 김구의 며느리 안미생(安美生), 김규식의 아들로서 영어에 능통한 김진동(金鎭東), 비서 장준하(張俊河)와 민영완(閔泳琬), 그리고 윤경빈(尹慶彬), 선우진(鮮于鎭) 등 경위대원 4명이 선정되었다. 모두 15명이었다.65)
11월 23일 오후 1시 조금 지나 상해 강만(江灣) 비행장을 출발한 G-47기는 중국 동북해 연안을 거쳐 청도(靑島)에서 서울까지는 직선으로 비행했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구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인솔자는 미군 대령이었다. 그는 경위대원들에게 호신용 권총을 신고하라고 했다. 국내에서 무기를 휴대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경위대원들은 가지고 있던 모젤3호 권총 4정과 콜트 3정을 신고했다.
침통한 분위기가 두어 시간 남짓 흘렀을 쯤에 누군가가 “보인다” 하고 소리쳤다. 손바닥만한 기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바닷속으로 올막졸막한 섬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26년동안 마음속으로 아스라이 그리던 고국은 그렇게 가까이 있었다. 누군가가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애국가는 곧 합창이 되었다가 울음으로 흐려졌다. 오후 4시가 조금 지나서 비행기는 김포비행장에 착륙했다. 미군장교 몇 사람이 비행기에 올라와서 일행을 안내했다. 미군장교를 따라 비행기에서 내린 김구는 땅바닥의 흙을 한줌 움켜쥐고 흙냄새를 맡았다. 그러고는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꿈에서도 잊지 못하던 고국의 하늘이며 땅이었다.
비행장은 황량했다. 미군 병사 몇 사람만 눈에 뜨일 뿐 한국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었다. 환영 나온 인파와 함께 흔들 요량으로 준비해 온 태극기는 꺼낼 필요도 없었다.66) 이승만의 귀국때와 마찬가지로 미군정부당국은 김구일행의 귀국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이 내어준 차를 타고 숙소인 죽첨장(竹添莊)으로 가면서 느낀 소감을 김구는 이렇게 적었다.
“착륙 즉시 눈앞에 보이는 두 가지 감격이 있으니, 기쁨이 그 하나요 슬픔도 그 하나이다. 내가 해외에 있을 때에 우리 후손들이 왜적의 악정에 주름을 펴지 못하리라 우려하였던 바와는 딴판으로, 책보를 메고 길에 줄지어 돌아가는 학생의 활발 명랑한 기상을 보니 우리 민족 장래가 유망시되었다. 이것이 기쁨의 하나이다. 반면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동포들의 사는 가옥을 보니, 빈틈없이 이어져 집이 땅같이 낮게 붙어 있었다. 동포들의 생활수준이 저만치 저열하다는 것을 짐작한 것이 유감의 하나였다.67)
26년 만에 다시 보는 동포들의 모습에서 느끼는 김구의 감회는 이처럼 희망과 연민이 교차하는 것이었다.
김구 일행이 한강 인도교를 건널 때에 갑자기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는 金九의 ‘個人資格’ 강조
하지는 오후 6시에 중앙방송국의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오늘 오후에 김구선생 일행 15명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오랫동안 망명하였던 애국자 김구선생은 개인의 자격으로 서울에 돌아온 것이다”라는 짤막한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68)
김구일행의 귀국을 가장 먼저 안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군정부당국은 하지의 성명을 발표하기에 앞서 이승만에게 먼저 알린 것이었다. 이승만은 6시 조금 지나서 죽첨장에 나타났다. 이승만과 김구는 1920말부터 이듬해 6월까지 임시대통령과 경무국장으로 상해에 같이 있은 이래 25년 만의 재회였다. 이승만은 30분쯤 있다가 일어났다. 뒤이어 중앙방송국의 문제안(文濟安) 기자가 황급히 다녀가서 김구일행의 도착 사실을 보도했다. 김구일행의 귀국뉴스를 들은 많은 시민들과 기자들이 한꺼번에 죽첨장으로 몰려들어 서대문길을 메웠다.
기자들의 성화로 김구는 저녁 8시쯤에 잠깐 기자들을 만났다. 기자들의 첫 질문은 역시 38도선 문제였다. 김구의 대답은 신중했다.
“나는 조선이 남북의 두 점령지대로 분열되어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차 이 구분은 철폐되리라고 믿는다. 미국과 소련은 우리나라를 위하여 반드시 옳은 일을 하여 줄 것이다.”
어떤 자격으로 입국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나는 지금 연합국에 대하여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지는 않겠으나, 장차에는 승인을 요구할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나의 동지는 개인자격으로 환국한 것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정당의 난립 상태에 대한 의견을 묻자, 정당수를 줄일 필요는 있으나 정당은 하나로서는 안되고 유력한 정당 몇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체에 대해서는 “조선을 위하여 민주주의 정체가 좋다고 믿는다”고 말하고, 공산주의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조선이 공산주의국이 될 가능성에 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고 확답을 피했다.69)
同盟의 ‘敎訓’ 강조한 도착성명
엄항섭이 김구를 대신하여 기자들 앞에 나섰다. 엄항섭은 먼저 배포된 김구의 도착성명을 읽어 내려갔다. 그것은 김포비행장에 나와있을 환영군중 앞에서 읽을 예정으로 준비해온 것이었다.
“27년간 꿈에도 잊지 못하고 조국강산을 다시 밟을 때에 나의 흥분되는 정서는 형용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도착성명은 9월 3일에 발표한 “국내외동포에게 고함”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김구의 도착성명은 이승만이 귀국 제1성에서부터 미국정부와 미국국민들의 여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자신이 직접 작성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결의문도 “연합국과 아메리카 민중에게 보내는” 것이었던 데서 볼 수 있는 것과는 연합국 인식에도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나와 나의 동사(同事)들은 과거 20, 30년간을 중국의 원조하에서 생명을 부지하고 우리의 공작을 전개해 왔습니다. 더욱이 이번 귀국에는 장개석 장군 이하 각계각층의 덕택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국에 있는 미군당국의 융숭한 성의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및 나의 동료는 중-미 양국에 대하여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또 우리는 우리 조국의 북부를 해방해준 소련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의 경의를 표합니다.…”
성명은 이어 이번 전쟁의 승리의 유일한 원인은 동맹을 통한 단결이었다고 말하고 그 ‘교훈’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러므로 금번 전쟁을 영도하였으며 따라서 큰 전공을 세운 미국으로서는 승리의 공로를 독점하려 하지 않고 전체에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맹국 미국의 겸허한 미덕을 찬양하거니와 동심육력(同心戮力)한 동맹국에 대하여도 일치하게 사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작풍은 또 우리에게 주는 큰 교훈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어 김구는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음을 언명하고 나서, 38선 이북의 동포와도 머지않아 만나게 될 것을 확신한다는 말로 도착성명을 마무리했다.70)
인쇄해온 「임시정부 당면정책」 14개항도 다시 발표되었다. 이날부터 죽첨장에는 미군헌병이 배치되고 요인들의 경호는 오광선 휘하의 광복군 국내지대가 맡았다. 그리고 죽첨장은 12월부터 동명이 죽첨정(竹添町)에서 경교동(京橋洞)으로 바뀌면서 경교장으로 개칭되었다.
“내가 李博士보다 더 나은 생각 가졌다고 기대함은 잘못”
이튿날이 되자 아침 8시도 되기 전부터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줄을 지어 경교장을 방문했다. 맨 먼저 도착한 사람은 한민당의 송진우였다. 뒤이어 국학자 정인보(鄭寅普), 한민당의 김병로(金炳魯), 임시정부환영회의 김석황(金錫璜), 국민당의 안재홍, 인민당의 여운형, 광복군국내지대의 오광선, 3·1운동때의 33인의 한 사람인 권동진(權東鎭), 김구와 같이 나석주(羅錫疇)사건을 도모했던 성균관의 김창숙(金昌淑), 인민공화국의 허헌(許憲) 등이 인사차 다녀갔다. 신문에는 각 정당지도자들의 환영담화가 실렸다.
여운형은 김구가 외출한 사이에 죽첨장을 방문했던 것 같다. 이만규(李萬珪)의 기술에 따르면, 여운형은 자동차를 탄 채 대문 안 뜰까지 달려갔다. 김구는 외출하여 만나지 못하고 이시영, 김규식, 유동열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경비대가 나타나 ‘불법침입’이니 나오라고 하여 밖으로 나왔다. 여운형은 문밖까지 가서 몸 검색을 당하고 나서 다시 들어갔다. 이때에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 일을 말리지 않았다.71) 과잉경호와 동시에 임시정부 인사들의 여운형에 대한 인식을 짐작하게 하는 에피소드이다.
김구는 9시30분에 엄항섭을 대동하고 돈암장으로 이승만을 답방했다. 그리고 이승만과 함께 반도호텔로 하지 장군을 예방하고 이어 군정청으로 아널드 장군을 예방했다.
김구는 오후 1시 반부터 경교장에서 군정청 출입기자단과 첫 공식 회견을 가졌다. 이날 기자들과 나눈 일문일답은 김구의 돌부처같은 인품을 그대로 느끼게 하는 매우 신중하면서도 솔직한 것이었다.
기자들의 초미의 관심사는 논란이 되고 있는 이른바 민족통일전선 결성과 관련된 문제였다.
“그동안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민족통일전선 결성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점도 있었다. 그런 만큼 김구선생을 맞이한 전 민족의 기대는 실로 크다. 민족통일에서 이 박사는 우선 뭉치자고 하고 국내 여론은 무조건 통일이 아니고 먼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처벌하자는 것인데, 이에 대한 포부는?”
“오늘은 대답할 수 없다. 여러분이 내가 이 박사보다도 더 나은 생각을 가졌다고 기대함은 잘못일 것이다. 또 나는 해외생활 30년으로 국내정세를 잘 알지 못하므로 이 같은 중대문제에 대하야 조급히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魂이 왔는지, 肉體도 왔는지…”
그러자 기자들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처단문제는 「임시정부 당면정책」에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러한 반문에도 김구는 숭굴숭굴하게 대답했다.
“악질분자가 섞이는 통일을 누가 원할 것인가. 그러나 사정을 잘 모르니 어떻게 하나. 통일한 뒤에 처치하는 것과 처치한 뒤에 통일하자는 두 가지인데 두 가지 방법은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실정을 잘 모르니 말하기 곤란하다. … 시간을 주기 바란다.”
그러자 기자들은 국내정국의 실정을 파악하는 데 어떤 방법으로 하겠느냐고 물었다. 김구의 대답은 간단했다.
“눈과 귀가 있으매 듣고 보아서 잘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기자들이 다시 국내에는 주의주장이 상이한 정당이 있는데, 어떤 정당만이 선생의 주위를 둘러싼다면 선생의 총명한 판단을 그르치게 할 염려가 있다고 말하자 김구는 “이 문제도 대답하기 어렵다”하고 얼버무렸다.
고국에 돌아온 감상이 어떠냐는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감동어린 한마디로 대답했다.
“내가 혼이 왔는지 육체까지 왔는지 모를 지경이다.”
기자들은 잠시 멈칫했다.
“상해 체류중에 도쿄의 맥아더 대장과 정부로 환국하느냐 개인자격으로 들어오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교섭이 있었다는데…”
“그들의 말은 한국에 군정부가 있는데 완전한 정부로 들어오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 말을 이해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연장되었을 뿐이요 우리정부 자체는 사실상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그러자 기자들은 다시 국내의 인민공화국과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물었다. 김구는 “아직 이것도 말할 수 없다. 좀 더 듣고 보고 구체적으로 말하겠다”하고 대답을 회피했고, 이승만 중심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그것 역시 말할 수 없다. 정확한 실체를 안 다음에 결정해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肉聲放送은 2分동안만
마지막 질문에 대한 김구의 대답은 그가 어떤 마음가짐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그토록 신중하게 대답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선생이하 요인이 개인자격으로 입국했으니 임시정부는 언제 환국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김구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군정이 실시되고 있는 관계로 대외적으로는 개인자격이 될 것이나, 우리 한국사람으로 보면 내가 왔으므로 정부도 돌아온 것이다.”72)
이처럼 김구의 의식에는 자기자신이 곧 정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태도는 “연기하는 것은 해결이 아니다”라는 신조를 가지고 모든 일을 단정적으로 판단하고 그러한 판단에 입각한 분명한 비전을 제시하면서 대중을 휘어잡는 이승만의 태도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김구는 이날 저녁에 중앙방송국의 라디오방송으로 다음과 같은 간단한 귀국인사를 했다. 그의 귀국방송 원고는 미리 준비되어 있었으나, 주어진 방송 시간이 2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울분을 삭이며 원고를 새로 작성했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27년간이나 꿈에도 잊지 못하고 있던 조국강산에 발을 들여놓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나는 지난 5일에 중경을 떠나 상해로 와서 22일까지 머물다가 23일에 상해를 떠나 당일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나와 각원 일동은 한갓 평민의 자격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앞으로는 여러분과 같이 우리의 독립완성을 위해 전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전국 동포가 하나가 되어 우리의 국가독립의 시간을 최소한도로 단축시킵시다.
앞으로 여러분과 접촉할 기회도 많을 것이고 말할 기회도 많겠기에 오늘은 다만 나와 나의 동사일동이 무사히 이곳에 도착되었다는 소식만을 전합니다.”73)
이렇듯 짧은 인사말에서도 ‘평민의 자격’을 강조한 것은 미군정부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이 인사말은 김구의 육성방송 뒤에도 아나운서가 되풀이하여 읽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74)⊙
1) Ariside R. Zolberg, “Moment of Madness”, Politics and Society, vol. 2, No. 2(Winter, 1972), 박명림, 「한국의 국가 형성 1945-48 : 시각과 해석」, 『韓國政治學會報』제29집 제1호, 韓國政治學會, 1994, p. 198에서 재인용.
2) 「照抄韓情近報」, 「韓國臨時政府各黨派最近活動?光復軍動態情形」, 白凡金九先生全集編纂委員會 編, 『白凡金九全集(5)』, 대한매일신보사, 1999, p. 673, pp. 680~683. 3) 閔弼鎬, 「大韓民國臨時政府와 나」, 金俊燁 編, 『石麟閔弼鎬傳』, 나남출판, 1995, p. 118. 4) “國內外同胞에게 告함”, 『白凡金九全集(5)』, pp. 670~671. 5) 「建國綱領」에 대해서는 韓詩俊, 「大韓民國臨時政府의 光復後民族國家建設論 ─ 大韓民國建國綱領을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제3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참조.
6) 이승억, 「임시정부의 귀국과 대미군정관계(1945. 8~1946. 2)」, 『역사와 현실』제24호, 역사비평사, 1997, p. 93. 7) 위의 글, p. 100. 8) 『自由新聞』 1945년 11월 8일자, 「臨時政府金九主席聲明」;『每日新報』1945년 11월 9일자, 「金九臨時政府主席聲明發表」;『新朝鮮報』 1945년 11월 11일자, 「金九主席 內外에 聲明」. 9) 「金九가 吳鐵城에게」(1945. 9. 1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대중국 외교활동』, 국사편찬위원회, 2008, p. 274 ;「金九가 賀國光에게」(1945. 9. 12), 『韓國獨立運動史資料(27) 臨政篇ⅩⅡ』, 國史編纂委員會, 1994, p. 39. 10) 「照抄韓情近報」, 『白凡金九全集(5)』, p. 673 ; 선우진 지음, 최기영 엮음,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 백범 김구 비서 선우진 회고록』, 푸른역사, 2009, pp. 37~38. 11) 孫科志, 『上海韓人社會史: 1910~1945』, 한울, 2001, p. 135. 12) 김정인, 「임정주화대표단의 조직과 활동」, 『역사와 현실』 제24호, 역사비평사, 1997, pp. 133~134. 13) 선우진 지음, 최기영 엮음, 앞의 책, p. 38. 14) 秋憲樹 編, 『資料 韓國獨立運動(1)』, 延世大學校出版部, 1971, pp. 489~490. 15) 염인호, 「해방후 韓國獨立黨의 中國關內地方에서의 光復軍擴軍運動」, 『역사문제연구』 창간호, 역사문제연구소, 1996, p. 16) Bruce Co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Ⅰ, Liberation and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1, p. 449.
17) 「金九가 蔣介石에게」(1945. 9. 1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pp. 273~274. 18) 「韓國獨立計劃綱要草案」, 『大韓民國臨時政府와 韓國光復軍 : 海外의 韓國獨立運動史料(ⅩⅧ) 臺灣篇①』, 國家報勳處, 1996, p. 94. 19) 胡春惠 著, 辛勝夏 譯, 『中國안의 韓國獨立運動』, 檀國大學校出版部, 1978, pp. 290~291. 20) 「蔣介石이 吳鐵城에게」(1945. 12. 5),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5) 중국의 인식』, 국사편찬위원회, 2008, pp. 138~139. 21) 邵毓麟, 「중국에서의 한국독립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5)』, p. 219. 22) 『大韓民國臨時政府와 韓國光復軍』, 國家報勳處, p. 155.
23) “Memorandum by Vincent, Sept.26, 1945”,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5, vol. Ⅵ,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9, p. 1058. 24) Robertson to Byrnes, Sept.25, 1945, FRUS 1945, vol. Ⅵ, p. 1057. 25) Acheson to Hurley, Sept.21, 1945, FRUS 1945, vol. Ⅵ, p. 1054. 26) Robertson to Byrnes, Sept.25, 1945, FRUS 1945, vol. Ⅵ, p. 1057. 27) Acheson to Robertson, Sept.27, 1945, FRUS 1945, vol. Ⅵ, p. 1060. 28) 胡春惠 著, 辛勝夏 譯, 앞의 책, p. 292. 29) 閔弼鎬, 「大韓民國臨時政府와 나」, 『石麟閔弼鎬傳』, p. 119.
30) 「蔣介石과 金九의 면담기록」(1945. 9. 26),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pp. 279~280. 31) 「金九가 吳鐵城에게」(1945. 10. 7),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p. 282. 32) 위와 같음. 33) 「蔣介石이 吳鐵城에게」(1945. 10. 23), 崔鍾健 編譯, 『大韓民國臨時政府文書輯覽』, 知人社, 1976, p. 169. 34) 「蔣介石이 吳鐵城에게」(1945. 10. 30), 위의 책, p. 170. 35) 「吳鐵城이 朴贊翊에게」(1945. 12. 31),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p. 303. 36) 「二十萬弗의 處理方法」, 秋憲樹 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p. 453 ;「臨政活動費美貨二十万弗支給方法에 關한 件」, 『資料 韓國獨立運動(1)』, p. 518 ; 鄭秉峻,「1945~47년 우익진영의 ‘愛國金’과 李承晩의 정치 자금 운용」, 『韓國史硏究』제109호, 韓國史硏究會, 2000. 6, p. 217.
37) 『大韓民國臨時政府와 韓國光復軍』, 國家報勳處, p. 156. 38) 『每日新報』1939년 10월 17일자, 「그 아버지들에 이 아들들 잇다」. 39) 安俊生의 서울방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일본외무성 문서번호SP205-4 『外務省警察史 : 滿洲ノ部』, 「視察團員安俊生ノ博文寺參拜及伊藤文吉男トノ邂逅」참조. 40) 玄圭煥, 『韓國流移民史(上)』, 語文閣, 1967, p. 685. 41) 孫科志, 앞의 책, p. 135.
42) 「蔣介石과 金九의 면담기록」(1945. 10. 30),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pp. 288~290. 43) 『韓國獨立運動史資料(27) 臨政篇ⅩⅡ』, pp. 43~45. 44) 김정인, 앞의 글, pp. 127~138 ; 南坡朴贊翊傳記刊行委員會, 『南坡朴贊翊傳記』, 乙酉文化社, 1989, pp. 293~296. 45) 「金九가 中國國民黨秘書處에」(1945. 11. 1),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pp. 293~294. 46) 秋憲樹 編, 『資料 韓國獨立運動(1)』, p. 477. 47) 秋憲樹 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p. 344. 48) 石源華 編, 『韓國獨立運動與中國』, 上海人民出版社, 1995, p. 587.
49)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1997, p. 401 ; 趙擎韓, 『白岡回顧錄 國外篇』, 韓國宗敎協議會, 1979, p. 369. 50) 『東亞日報』 1945년 12월 19일자, 「中國共産黨領袖 臨政에 絶對好意」. 51) 「金九가 吳鐵城에게」(1945. 11. 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p. 295. 52)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pp. 406~407 ; 張俊河, 『돌베개』, 禾多出版社, 1971, pp. 399~400. 53) 『백범일지』, p. 408. 54) 위와 같음. 55) 金炯敏, 『訥丁 김형민회고록』, 범우사, 1987, pp. 213~218.
56) 建國靑年運動協議會, 『大韓民國建國靑年運動史』, 1989, pp. 881~882 ; 金斗燦, 「吳光鮮將軍」, 『新東亞』 1971년 2월호, pp. 257~258. 57) 『駐韓美軍史(2)』(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ed Forces in Korea), (이하 HUSAFIK 2), 돌베개影印版, pp. 43~44. 58) 韓詩俊,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환국」, 『한국근현대사연구』 제25집, 한울, 2003, p. 73. 59) 『新朝鮮報』 1945년 11월 10일자, 「金九先生, 張德秀氏에게 親書」및 1945년 11월 11일자, 「國內同胞에 感謝」. 60) 이승억, 앞의 글, p. 104. 61) 「金九가 蔣介石에게」(1945. 11. 8),『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pp. 298~299. 62) 『中央新聞』 1945년 11월 9일자, 「時事漫評」. 63) 趙擎韓, 앞의 책, pp. 367~368.
64) 「吳鐵城이 金九에게」(1945. 11. 21),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p. 300. 65) 선우진 지음, 최기영 엮음, 앞의 책, pp. 45~46. 66) 張俊河, 앞의 책, pp. 407~412 ; 선우진 지음, 최기영 엮음, 위의 책, pp. 47~50. 67)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p. 409. 68) 張俊河, 앞의 책, p. 415.
69) 『中央新聞』 1945년 11월 24일자, 「金九主席과 一問一答」. 70) 『自由新聞』 1945년 11월 24일자, 「金九主席의 스테-트멘트」. 71) 李萬珪, 『呂運亨先生鬪爭史』, 民主文化社, 1946, pp. 256~257 ;『駐韓美軍史(2)』(HUSAFIK 2), p. 70.
72) 『中央新聞』 1945년 11월 25일자, 「내가 오니 政府도 왓다」;『新朝鮮報』 1945년 11월 25일자, 「個人資格은 對外關係」;『自由新聞』 1945년 11월 25일자, 「判斷은 實情 안 然後」. 73) 『自由新聞』 1945년 11월 26일자, 「金九主席還國第一?放送」. 74) 張俊河, 앞의 책, pp. 441~442.
자국의 전략적 위치상 韓國獨立의 필요성을 중시하는 中國은 美國政府에 대하여 臨時政府의 승인문제를 거듭 타진하는 한편 金九를 비롯한 임시정부요인들의 早期歸國조치를 종용했다.
蔣介石 총통은 9월 26일과 10월 29일에 金九와 면담하고 임시정부 駐華代表團의 설치, 韓國光復軍의 확대 개편 등에 동의하고, 臨時政府要人들의 귀국비용과 귀국한 뒤의 金九의 活動費로 中國法貨 1億元과 美貨 20만달러를 지원했다. 주화대표단은 11월 1일부터 사무를 시작했다.
金九일행은 11월 5일에야 重慶을 떠나 上海에 도착했다. 그러나 상해에서도 ‘個人資格’의 귀국임을 인정하는 문제로 美軍政府와 실랑이가 벌어져 3주일이나 출발이 지연되었고, 그나마 1진, 2진으로 나누어 귀국해야 했다.
金九를 비롯한 1진 15명은 11월 23일 오후에 金浦비행장에 도착했다. 李承晩보다 5주일이나 늦은 귀국이었다.
1. “國內外同胞에게 告함”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요인 제1진이 귀국한 것은 제국주의 일본이 패망하고도 3개월이나 더 지나고 이승만의 귀국보다 5주일이나 늦은 1945년 11월 23일이었다. 국가건설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두고 “모두가 흥분하여 모두의 참여아래 새로운 질서의 창출을 위해 나서서 마치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라는 정의가 실감나는 ‘광기의 순간(moment of madness)’1)에 3개월이라는 시간은 너무나 중요했다. 그러한 시간을 김구는 중국 땅에서 글자 그대로 노심초사하면서 보내야 했다.
民族革命黨의 타협안 거부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 파행이 계속되자 민족혁명당은 한국독립당에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것은 첫째로 1945년 5월의 제38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논란되었던 해외독립운동자 대표대회를 소집할 것과 둘째로 한국독립당이 8석을 차지하고 있는 국무위원 자리를 5석으로 줄여 국무위원회를 개조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혁당의 요구는 한독당으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중국은 물론 러시아와 하와이, 미주 등지에 산재한 모든 해외독립운동단체들이 귀국을 서두르고 있는 상황에서 해외독립운동자 대표대회를 소집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고,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임시정부의 권력 투쟁은 더욱 치열해져 있었으므로 한독당이 국무위원회의 과반수를 확보하지 않으면 임시정부의 기능이 마비될 위험이 없지 않았다. 게다가 중국국민당정부의 한국독립운동자들에 대한 지원은 김구와 한독당이 주축인 임시정부를 통하여 시행되고 있는 지 오래였다. 한독당이 자신들의 요구를 거부하자 민혁당은 8월 23일에 국무위원회 탈퇴를 선언했고, 조선민족해방동맹도 민혁당에 동조했다.2) 그러나 이들의 탈퇴문제는 이내 없었던 일이 되었다.
이 무렵의 일이었던 것 같다. 김구는 판공처장 민필호(閔弼鎬)로 하여금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 “임시정부 영수 자격으로 미군을 따라 먼저 입국하면 나는 이곳에서 임시의정원을 소집하여 주석위(主席位)를 사직하는 한편 당신을 임시대통령으로 추선(推選)하여 본국으로 통보하겠소이다”라는 내용의 전보를 치게 했다. 민필호는 바로 전보국에 가서 타전했으나 이승만은 이미 미국을 떠나서 귀국도중에 있었다고 한다. 민필호는 “이 일로 나는 김주석의 깊은 뜻에 다시 한번 깊은 감명을 받았다”라고 적어 놓았다.3) 여러가지를 미루어 생각해보게 하는 증언이다.
日本降服조인식 이튿날 「當面政策 14個項」발표
김구는 귀국준비를 서둘렀다. 미주리(Missouri)호 함상에서 일본의 항복조인식이 있은 이튿날인 9월 3일에 김구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명의로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것은 8·15해방 이후에 처음으로 국내외 동포에게 임시정부의 정세인식과 앞으로의 행동방침을 천명한 것이었다.
성명서는 먼저 조국의 해방이 “허다한 우리 선열의 보귀한 열혈의 대가와 중국, 미국, 소련, 영국 등 동맹군의 영용한 전공(戰功)”에 힘입은 것이라면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우리가 처한 현 계단은 「건국강령」에 명시한 바와 같이 건국의 시기로 들어가려 하는 과도적 계단”이라고 언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복국(復國)의 임무를 아직 완전히 끝내지 못하고” “건국의 초기가 개시되려는” 매우 번다하고 복잡한 시기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임시정부 당면정책」14개항을 발표했는데, 그것은 임시정부의 귀국한 뒤의 역할에 대한 포부와 귀국 이전에 실행해야 할 중요한 과제들을 열거한 것이었다. 주요 항목은 다음과 같았다.
(1) 본 임시정부는 최단기간 내에 곧 입국할 것.
(3) 중국,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5강과 먼저 우호협정을 체결하고 외교통로를 개설할 것.
(5) 평화회의 및 각종 국제회의에 참가하여 발언권을 행사할 것.
(6) 전국적 보통선거에 의한 정식정권이 수립되기까지의 국내 과도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국내외 각 계층, 각 혁명당파, 각 종교단체, 각 지방대표와 저명한 각 민주영수회의를 소집하도록 적극 노력할 것.
(7) 국내 과도정권이 수립된 즉시 본 정부의 임무는 완료된 것으로 인정하고 본 정부의 일체의 직능 및 소유물은 과도정권에 인계할 것.
(8) 국내에서 건립된 정식정권은 반드시 독립국가, 민주정부, 균등사회를 원칙으로 한 신 헌장에 의하여 조직할 것.
(9) 국내의 과도정권이 성립되기 전에는 국내 일체 질서와 대외 일체 관계를 본 정부가 책임지고 유지할 것.
(10) 교포의 안전 및 귀국과 국내외에 거주하는 동포의 구제를 신속 처리할 것.
(13) 적군의 강압으로 출전한 (일본군내) 한적(韓籍) 군인을 국군으로 편입하되, 동맹군과 협의하여 진행할 것.
(14)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매국적에 대하여는 공개적으로 엄중히 처분할 것.
이 「당면정책」은 기본적으로 1941년 11월에 발표한 「건국강령」의 이념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5) 다만 (6)항에서 전국적 보통선거에 의한 정식정부 수립이전에 각계각층의 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과도정부를 수립한다는 주장은 임시정부가 곧 정식정부 수립의 주체로 자임했던 「건국강령」의 입장에서는 다소 후퇴한 듯한 인상을 주나, 그것은 이미 제38회 임시의정원회에서 논란되었던 해외독립운동자 대표대회를 귀국한 뒤에 국내인사들까지 확대하여 소집한다는 뜻이었다(『月刊朝鮮』2008년 1월호, 「「독수리作戰」과 「냅코作戰」」참조). 국내 과도정권이 수립되는 즉시로 임시정부의 일체 직능과 소유물을 과도정권에 인계하겠다는 (7)항도 한독당 중심의 임시정부가 사실상 과도정권의 중심세력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8)항에서 국내에서 수립될 정식정권도 반드시 “독립국가, 민주정부, 균등사회를 원칙으로 한 신 헌장”에 의하여 조직되어야 한다고 하여 국민의 보통선거로 구성될 국회에서 제정할 헌법까지 「건국강령」의 이념을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그것을 입증해 준다. 「당면정책」으로 표명된 임시정부의 이러한 정권창출 방안은,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인사들의 귀국도 이승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개인자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46년 초까지 그들의 행동지침이 되었다.6)
김구의 이 “국내외동포에게 고함”은 10월말에 하지의 특사로 상해에 다녀온 오광선(吳光鮮)에 의하여 국내에 전달되었고,7) 국내 신문에 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 관계 기사가 연일 폭주하는 상황 속에서 그 전문이 크게 보도됨으로써8) 일반국민들로 하여금 임시정부의 권위를 더욱 실감하게 했다.
重慶에 있는 550명을 우선 上海로 옮겨 놓아야
임시정부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당면정책」제10항, 곧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동포들의 안전과 귀국 문제였다. 그 가운데서도 임시정부를 따라 중경까지 와서 갖은 고생살이를 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의 이런저런 의무를 다해 온 동포들을 우선 상해까지라도 옮겨 놓아야 했다. 중경에는 임시정부 직원 가족 등 동포 550여명이 살고 있었다. 양자강(揚子江)의 기선운행이 재개된다는 소식을 들은 김구는 9월 12일에 오철성(吳鐵城) 비서장과 군사위원회 주임 하국광(賀國光)에게 이들에게 귀국여비를 지급해주고 선박관리처에 기선의 좌석 550인분을 발급하도록 주선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김구는 두 사람에게 보낸 이날의 편지에서 또 장개석(蔣介石)과의 면담을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다.9)
김구는 상해 교민대표로 9월 10일에 중경을 방문한 구익균(具益均)과 박용철(朴容喆)로부터 상해의 상황을 자세히 들었다.10) 이들은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임시정부가 빨리 상해로 나와서 교민들을 도와주기를 요청했다. 임시정부의 발상지인 상해의 소식은 기가 찼다. 중국인들이 일본인보다도 한국인을 더 좋지 않게 생각하여 동포들의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현상은 상해에서만 일어나고 있지 않았다. 중-일 전쟁 이후에 중국에 진출한 한국인들은 거의가 일본군 군인 및 군속이거나 일본군과 관련된 사업으로 이득을 취하던 사람들이었다. 개중에는 아편밀매꾼들도 적지 않았다.11) 그 때문에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을 일본의 앞잡이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일본이 패망하자 많은 한국인들이 이른바 한간(韓奸·한국인 간첩)으로 몰려 포로취급을 당하기도 하고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중국관내 각 지역에 대표를 파견하여 교민회 또는 한인회의 조직을 주선하고 현지 중국 관공서와 교섭하여 동포 보호에 나섰다.12) 상해에는 선전부장 엄항섭(嚴恒燮)을 안우생(安偶生), 선우진(鮮于鎭) 두 수행원을 딸려 파견했다.13) 1945년 10월 현재 중국 관내에는 7만7,600명의 한국 교포들이 거류하고 있었다.14)
교포문제와 함께 「당면정책」(13)항에서 언명한 일본군 안에 있는 한적병사문제도 임시정부가 해결해야 할 큰 과제였다. 당(黨)-군(軍)-정(政)이라는 국민당정부의 권력구조 아래서 활동해 온 임시정부인사들이 광복군의 육성에 특별한 열성을 가졌던 것도 대일전쟁을 위한 무력 양성이라는 의미에 더하여 군대가 권력장악의 직접적인 힘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고 중국정부에 항복한 일본군의 총 병력은 128만3,200명이었는데, 그 안에는 한적 장병이 2만8,200명쯤 있었다.15) 임시정부는 이들을 중국정부의 협조를 얻어 광복군으로 편입하고자 한 것이다.
국민당정부와의 귀국교섭에 부심하던 김구에게 『대공보(大公報)』의 특파원이 전한 송진우(宋鎭禹) 등 한국민주당 인사들의 편지는 큰 용기를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9월 7일에 국민대회준비회결성대회를 마친 송진우는 한국을 취재하러 온 기자에게 부탁하여 국내 사정을 “정확 치밀하게” 적은 편지를 김구에게 보냈었다(『月刊朝鮮』 2010년 6월호, 「美軍進駐와 兩分되는 政局」참조). 잇달아 9월 14일자로 조병옥(趙炳玉)과 원세훈(元世勳)이 김구, 김규식(金奎植), 신익희(申翼熙) 앞으로 미군을 통하여 보낸 편지는 “여운형(呂運亨) 등이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여 국민을 기만하고 있고”, 자신들은 국민대표대회를 계획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심각합니다. 그러므로 임시정부는 조속히 귀국하여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임시정부가 빨리 귀국할 것을 촉구했다.16)
이러한 국내인사들의 편지에 고무된 김구는 우선 국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대표 몇 사람을 입국시키기로 하고, 9월 18일에 장개석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먼저 “국내의 명망 있는 지사들이 국민대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가 우선하여 귀국할 것을 독촉하고 있다”고 말하고, 조소앙(趙素昻: 대표), 엄항섭, 김영갑(金英甲)을 귀국시켜 연락을 취하게 하고 나머지 중요직임자 19명을 한꺼번에 또는 두 차례에 나누어 입국시켜 국내외와 연계하게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마치지 못한 사무나 교민들의 수송과 귀국문제를 처리하기 위하여 박찬익(朴贊翊·대표)과 민필호(閔弼鎬)를 중경에 주재시키겠다면서 지원을 부탁했다. 그러고는 8월 24일의 비망록에서 요청한 5,000만원(元) 차관 문제는 사용할 곳이 많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면서, 속히 처리해줄 것을 요청했다. 김구는 이 편지에도 “임시정부가 입국한 뒤에 진행할 정책”이라면서 「임시정부 당면정책」의 (6)항에서 (9)항까지를 그대로 첨부했다.17)
2. 中國法貨 1億元과 20万달러 支援
김구가 사흘이 멀다 하고 국민당정부 관계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조소앙이 부지런히 중국외교부와 미국대사관을 찾아다녀도 임시정부의 귀국교섭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활동비를 정기적으로 지원하는 등으로 사실상 승인하다시피 하며 지지해온 국민당정부도 2차대전 후반기부터 국제적 위상이 약화됨으로써 미국에 대해 한국처리문제를 강력하게 주장할 수 없었다. 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문제도 마찬가지였다.
“中國은 咸鏡北道 鐵道經營權 요구해야”
국민당정부의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와 성원은 물론 한국의 독립이 중국의 전략적 위치상 중요하다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한 보기로 국민당정부가 1945년 초에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한국독립계획강요초안(韓國獨立計劃綱要草案)」이라는 정책문서를 들 수 있다. 이 정책문서는 미국, 소련, 영국이 한국을 일정한 기간의 신탁통치를 거쳐 독립시키면서 한국의 전략상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육-해-공군기지를 요구할 때에는 중국도 같은 권리를 요구해야 하며, 나아가 중국의 지리적 관계의 특수성에 비추어 함경북도 회령(會寧)에서 웅기(雄基), 나진(羅津), 청진(淸津)에 이르는 철도경영권을 요구할 수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18) 그러한 판단에서 국민당정부는 임시정부가 독립한국정부의 중심세력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국민당정부는 2차대전이 끝난 뒤에 업무보고를 위하여 귀국하는 주중미국대사 헐리(Petric J. Hurley)에게 다음 세 가지의 요망사항을 전했다. 첫째는 한국의 국가건설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밝혀주고, 둘째로 미국은 신속히 항공기를 파견하여 중국에 있는 한국독립운동 영수들을 그들의 고국으로 보내기를 희망하며, 셋째로 남한의 미국군정부 하지(John R. Hodge) 장군은 중국에 있는 한국임시정부 인사들에게 그 군정부의 행정 직무를 맡기도록 최대한 힘쓸 것을 희망한다는 것이었다. 국민당정부의 이러한 요구는 임시정부로 하여금 귀국하여 과도정권이 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었고 국민당정부 자신이 어떤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수도 없었으므로 “미국의 정책에 배합하는 형식아래”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미래의 진로를 찾게 하겠다는 것이었다.19) 그러면서 군사위원회 시종실의 비서겸 외교부 정보사(情報司)의 사장 등으로 한국문제를 담당해온 소육린(邵毓麟)을 중장계급의 군사위원장 대표로 서울에 주재시키기로 했다.20) 소육린은 1944년 3월에 김구의 고문으로 위촉되어 각 정파의 의견조정 등 임시정부의 내부 문제에도 깊이 관여해 온 인물이었다.21)
蔣介石이 美國에 對韓政策 물어
장개석 총통은 9월 15일에 주미대사 위도명(魏道明)에게 국민당정부의 대한정책을 설명하면서 미국정부의 궁극적인 대한정책이 어떤 것인지를 트루먼 대통령이 명시할 것을 요청하라고 훈령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4개국이 공동으로 한국인들의 훈정정부(訓政政府) 조직을 원조하고 그런 연후에 완전 독립국이 되게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럴 경우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를 기반으로 하여 확충시키는 것이 타당하며 그렇지 않고 별도의 신정부를 수립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공산당을 배제해야 된다는 점을 미국정부와 속히 협상하라는 것이었다.22)
위도명은 9월 25일에 애치슨(Dean Acheson) 국무장관대리를 만났다. 이 자리에는 빈센트(John C. Vincent) 극동국장이 배석했다. 트루먼 대통령의 대한정책이 루스벨트 대통령의 정책과 달라진 것이 있느냐는 위도명의 질문에 애치슨은 한국에 관한 미국의 정책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고 말했다. 애치슨은 위도명에게 4개국 신탁통치협정에 대한 미국정부의 구상을 설명하고, 가까운 시일안에 협정체결을 위한 협상을 개시할 수 있게 되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임시정부가 궁극적인 한국정부의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위도명의 주장에 대해 애치슨은 미국은 중경에 있는 한국인들의 귀국교통편을 제공할 것을 계획하고 있고, 귀국하면 그들은 개인자격으로 한국의 행정부 구성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정부의 최종적인 구성은 신탁통치협정에 참가하는 4대국 사이에서 논의될 문제라고 말했다. 애치슨은 미국은 되도록 빨리 현재의 북위38도선에 의한 미-소의 분할점령을 전 한국에 걸친 단일행정으로 대체하게 되기를 열망하고 있고, 되도록 빠른 시일 안에 신탁통치 아래서 단일의 민간정부가 군정을 대신하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23)
임시정부의 귀국문제에 관한 국민당정부의 대미교섭은 중경에서도 진행되었다. 중국국민당 선전부장 오국정(吳國楨)은 9월 25일에 주중미국대사관을 방문했다. 오국정은 미국대리대사 로버트슨(Walter Robertson)에게 소련이 한국의 소련군점령지역에 공산주의 정부그룹을 조직 또는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면서 “이 사실에 비추어 총통은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사들을 가능한 대로 정부의 행정직에 임명하여 귀국시키도록 제안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만일 미국이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한다면 중국정부도 기꺼이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24) 이날은 장개석이 김구와 면담하기 하루 전날이었다.
駐中美軍司令部가 國務部 태도에 반발해
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문제에 대한 미국정부의 방침은 9월 21일에 주중미국대사에게 통달되었다. 그것은 현지 미군사령부와 협의를 거치고 그들이 거부하지 않는다면 국무부는 반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국무부는 그러면서 주중미군당국은 (1) 한국인들이 어떤 ‘임시정부’의 관리로서가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가고, (2) 모든 한국인 그룹에게 동등한 자격과 편의가 제공되며, (3) 군당국의 중요한 작전에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교통편을 제공할 수 있을 경우에만 이들 한국인들의 교통편의를 제공해야 한다고 못박았다.25) 이에 대해 중국주둔미군사령부는 국무부가 한국인들의 귀국을 제의하거나 후원한다면 가능한 대로 그 목적을 위해 기꺼이 항공편을 마련하겠지만, 단지 반대하지 않는다는 국무부의 성명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반발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치적 결정의 책임을 군에 전가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26) 그리하여 국무부는 9월 27일에 “한국내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감안하여 건설적인 능력을 가졌고 군정부의 틀 안에서 활동하고자 하는 인사들의 입국은 장려되어야 하고, 자리가 있다면 육군통제하의 항공편을 제공해도 좋을 것”이라고 주중미국대사관에 통보했다. 그리고 입국희망자들에 대한 입국 허가는 맥아더(Douglas MacArthur) 사령부의 육군채널을 이용하고 있는 한국현지사령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27) 이렇게 하여 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 문제는 하지 사령관의 소관사항으로 확정되었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면서 한국은 중국전구에서 태평양전구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국민당정부 외교부장 왕세걸(王世杰)은 10월 28일에 한국임시정부 인사들의 신속한 귀국을 허락해 줄 것을 요망하는 편지를 주중미국대사관을 통하여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냈다.28)
1年만에 만난 金九와 蔣介石
김구와 장개석의 면담이 이루어진 것은 9월 26일이었다. 이날 장개석은 김구와 단독으로 만나기에 앞서 오전 8시에 김구를 비롯하여 부주석 김규식, 외교부장 조소앙, 군무부장 김원봉(金元鳳), 의정원 의장 홍진(洪震), 독립군 총사령 이청천(李靑天) 6명을 군사위원회로 초치했다. 회담내용은 알려진 것이 없으나, 장개석은 이들에게 무엇보다도 단합과 행동통일을 강조했을 것이다.
김구는 이날 오후 4시에 관저로 장개석을 방문했다. 김구는 박찬익을 통역으로 대동했고, 장개석은 중국국민당 비서장 오철성을 배석시켰다. 1944년 9월 5일에 만난 뒤로 1년 만의 만남이었다. 전쟁이 종결되고도 두 사람의 면담이 이렇게 늦어진 것은 한국처리문제를 두고 미국과 국민당정부의 정책조정이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29)
비록 귀국문제로 노심초사하고 있기는 했으나, 1년 전에 처절한 상황에서 장개석을 만났을 때에 비하면 김구는 한결 마음에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국가건설의 희망으로 가슴이 벅차 있었다.
김구는 면담에 앞서 비망록 형식의 정중한 문서를 작성하여 장개석에게 제출했다. 이 문서에서 김구는 7개항의 요구사항을 제시했는데, 장개석을 만난 자리에서는 그 가운데에서 중요한 것 다섯 가지를 거론했다. 그는 먼저 미국과 교섭하여 한국임시정부 인원이 항공편으로 속히 귀국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대해 장개석은 이미 주관기관에 지시하여 미국과 교섭을 진행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다음으로 김구는 「임시정부 당면정책」에서 밝힌 귀국 후의 과도정부 조직문제를 설명했다.
“우리 인원들이 한국임시정부 명의로 귀국할 수 없는 사정을 잘 압니다. 그렇지만 중국이 미국과 협의하여 우리가 귀국한 뒤에 각 당파 합작으로 임시정부를 건립하고 임시정부의 관리아래 전국적인 선거를 실시하여 정식정부를 성립시키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해 장개석은 앞으로 영-미와 협상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신중하게 답변했다.
세 번째로 김구는 한국독립당과 중국국민당이 협력을 보장하는 비밀협약을 체결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그것은 장개석이 선뜻 수용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장개석은 “앞으로도 당연히 한국독립당을 계속 원조할 것이지만 굳이 형식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라는 말로 완곡히 거절했다.
네 번째는 차관문제였다. 김구는 “목전의 긴급한 수요에 충당할 수 있도록 차관을 제공해주시면 장래에 상환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김구는 8월 24일에 제출한 비망록에서도 중국화폐 3억원(元)의 차관을 요구해 놓고 있었다. 장개석은 차관문제에 대해서는 고려해 보겠다고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장개석의 이러한 대답에 김구는 적이 마음이 놓였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구는 “각 수복지구 민-정장관에게 명령하시어 한교 가운데 불법분자는 엄하게 다스리되 선량한 사람들은 보호받을 수 있도록 조치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장개석은 요청대로 시행하도록 하겠다고 응낙했다.30) 그러면서 장개석은 김구일행이 귀국할 때에 저명인사 한 사람을 동행시키겠다고 말했다. 소육린을 파견할 계획을 하고 있음을 내비친 것이었다. 면담을 마치면서 장개석은 김구에게 떠나기 전에 한번 더 만나자고 말했다.31)
歸國후의 活動費로 50万달러 要請
장개석과의 면담으로 고무된 김구는 귀국준비를 꼼꼼히 챙겼다. 10월 7일에 오철성 비서장에게 보낸 편지는 이때에 김구가 며칠 안에 중경을 떠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귀국하고자 하는 부장이상 인원과 수행원 및 비서는 모두 29명이고, 중요 공문서를 담은 가죽 트렁크가 10여개이며, 그밖에도 휴대품이 조금 있다면서 모든 인원과 물품을 한꺼번에 싣고 귀국할 수 있도록 대형 수송기 한 대 또는 두 대를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구는 또 임시정부요인들이 귀국할 때에 동행시키겠다고 장개석이 말한 인사의 이름을 빨리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중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무전기 1대를 가지고 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가장 절실한 것은 역시 자금문제였다. 김구는 귀국인원의 사전준비와 여비에 충당할 5,000만원과 귀국한 뒤의 활동비로 50만달러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32) 김구는 이미 요청해 놓고 있는 3억원의 차관에 더하여, 귀국한 뒤의 활동비로 50만달러를 새로 요청한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장래와 임시정부의 역할에 대한 국민당정부의 기대를 그 나름으로 짐작하여 요청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정도면 당장 경비부족으로 일을 그르치는 일은 없을 듯합니다”라고 쓰고 있어서 흥미롭다.
마지막으로 김구는 귀국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장개석이 약속한 대로 속히 다시 만날 날짜를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김구의 3억원 차관요청에 대해 국민당정부는 1억원을 지원하기로 하고, 5,000만원을 먼저 지급했다.33) 그리고 귀국한 뒤의 활동자금으로 요청한 50만달러에 대해서는 20만달러를 지원하기로 하고 10월 30일에 장개석의 최종 결재가 났다34)(1945년의 20만달러는 2008년의 물가지수로 환산하면 239만달러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때의 달러와 원(元)화의 공정환율은 1 : 20이었으므로 1억원은 500만달러에 해당했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의 경제규모의 차이를 감안하면 실제로는 그보다 더 큰 값어치의 자금이었다). 김구일행이 귀국한 뒤에 국민당정부는 중경 거주 교포들의 월동과 귀국비용으로 3,000만원을 별도로 지급했다.35)
김구는 귀국할 때에 미화 20만달러를 휴대할 합법적인 방법이 없었으므로 이 돈을 뉴욕의 주미중국대사관에 보낸 뒤에 다시 서울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미국과 한국 사이에는 외환결제제도가 없었고 게다가 미국 은행의 인출금액에 한도가 있었기 때문에 20만 달러를 서울로 송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이 20만달러는 중국은행에 예치하여 두었다. 그랬다가 1946년 겨울에 주한중국총영사 유어만(劉馭萬)과 협의하여 그중 10만달러를 주화대표단에 지급했고, 나머지 10만달러는 그 뒤에 김구의 차남 김신(金信)이 중국에 가서 찾아왔다.36)
김구는 조소앙을 먼저 상해로 보낸 다음, 10월 중순에 이르러 화북, 화중, 화남 세 지역으로 한교선무단(韓僑宣撫團)을 조직하여 파견했다. 교포들의 실태를 조사하고 구호를 위한 선무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화북한교선무단의 단장은 이광(李光), 화중한교선무단장은 이상만(李象萬), 화남한교선무단장은 지청천이 맡았다. 중국인들과의 마찰로 전전긍긍하던 교포들은 한교선무단을 환영했으나, 지역에 따라서는 현지 행정당국의 비협조로 선무활동이 난관에 봉착하기도 했다. 한교선무단은 뒤이어 창설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에 편입되었다.
安重根의 아들 安俊生을 엄벌하도록 부탁
김구와 장개석의 마지막 면담은 10월 29일 4시에 장개석의 관저에서 이루어졌다. 김구는 먼저 고별인사를 하면서 중국법폐 1억원과 미화 20만달러를 지원해준 데 대해 깊은 감사의 뜻을 표했다.37)
이 면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김구가 상해에 있는 안중근(安重根)의 아들 안준생(安俊生)을 처벌할 것을 강력히 요청한 사실이다.
“한국 혁명선열인 안중근의사의 아들이 변절하여 일본에 투항한 뒤에 상해에서 아편을 밀매하는 등 많은 불법행위를 저지른 사실은 실로 불행한 일입니다. 또한 원래 독립당원이던 최아무개가 공산당에 투항하여 상해에 한국청년연합회를 조직한 것도 한국임시정부를 위해하려는 의도에서입니다. 이들의 활동을 단속해야 합니다. 위원장께서 상해경비사령부에 하명하시어 이들을 체포해주시기 바랍니다.”
장개석은 자세한 내용을 조사하여 서면으로 알려주면 조치하겠다고 대답했다.
김구는 일생동안 안중근 집안과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했고, 특히 안중근에 대해서는 숭모의 정이 각별했다. 중-일전쟁이 터지고 남경(南京)을 떠나 호남성(湖南省)의 장사(長沙)로 이동할 때에는 안공근(安恭根)으로 하여금 상해에 가서 안중근의 부인을 모셔오게 했으나 안공근이 자기 식구들만 데리고 오자 크게 질책했었다. 안중근의 부인은 둘째 아들 안준생과 같이 상해에 살고 있었다. 항주(杭州)의 지강대학(智江大學)을 졸업한 안준생은 윤봉길의 투탄사건 이후에 일본경찰의 협박과 회유로 변절해 있었다. 안준생은 1939년 10월에 상해재류조선인실업가 만선시찰단(滿鮮視察團)의 한 사람으로 난생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는데, 이때에 일본경찰은 안준생의 특별 일정을 준비했다. 안준생은 총독도 방문했고, 특히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30주기를 맞아 서울에 온 이토의 아들 이토 후미키치(伊藤文吉) 일본 참의원을 만나게 한 것이다.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每日新報)』는 안준생이 이토에게 “지금 생각해도 가슴아프리만큼 그때의 일[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 부끄럽습니다”라고 말했다고 대서특필했다.38) 면담 이튿날에는 두 사람이 같이 박문사(博文寺)를 참배했다.39) 박문사는 일본사람들이 가증스럽게도 남산기슭에 있는 장충단(奬忠壇)을 헐고 그 자리에 이토 히로부미의 위령사찰로 지은 절이었다. 안준생은 서른세 살이었고 이토는 쉰여섯이었다.
안준생은 상해에서 악기상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1939년 현재의 자본금은 30만원이었다.40) 안준생이 아편 밀매에 관여하고 있었는지 확인할 만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으나, 상해주재 일본총영사관이 상해에 있는 한인 3,000명이 직접 간접으로 아편밀매에 개입했다고 기록하고 있을 만큼 이 시기에는 한인들의 아편밀매가 성했으므로,41) 김구의 말이 근거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귀국한 뒤에 김구는 경교장(京橋莊)으로 찾아온 안준생을 보지 않았다.
“韓國의 獨立은 中國의 責任이라고 생각해”
다음으로 김구가 장개석에게 강조해서 부탁한 것은 광복군 확충문제였다. 한국광복군이 상해, 북경, 광동 등지에 거점을 확보하고 활동하고 있는 실상을 설명하면서 현지의 군-정장관에게 명하여 광복군활동을 보호하고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장개석은 그러겠노라고 확답했다.
장개석은 임시정부인원들이 귀국한 뒤에도 중경에 대표단을 상주시켜 중국정부와 계속 연락을 취하도록 하겠다는 김구의 제의에도 쾌히 동의했다. 장개석의 이러한 태도는 정부 승인을 하지 않은 국가의 외교대표부의 설치를 공식으로 인정한 것이어서 매우 의의있는 결정이었다.
이어 만주지역의 한국인 공산주의자문제와 한간처리문제 등을 협의하고 나서, 김구는 마지막으로 장개석에게 지시할 일이나 바라는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장개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동지들이 서로 일치단결하여 함께 난관을 극복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비록 중국의 역량이 충분하지는 않지만, 힘닿는 데까지 한국이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있도록 적극 원조하겠습니다. 이는 중국의 일관된 정책이기도 합니다. … 우리는 한국의 독립은 중국의 책임이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
김구는 기념으로 간직하겠다면서 장개석의 사진을 몇 장 달라고 말했다. 장개석은 얼마든지 좋다면서 사진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보내달라고 말했다.42) 김구 자신도 중경을 떠나면서 그동안 신세졌던 국민당정부 중간간부들에게 만년필 등 간단한 선물과 함께 기념으로 자신의 사진을 보냈다.43)
大韓民國臨時政府駐華代表團 설치
장개석과의 면담에서 합의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화대표단의 설치 문제는 바로 실행되었다. 10월 31일의 주비회의(籌備會議)를 거쳐 11월 1일부터 정식으로 사무를 개시한 주화대표단의 편제는 김구가 주화대표단의 활동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각 지역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던 한교선무단과 광복군총사령부는 주화대표단의 산하기구로 편입되었다. 단장에는 예정대로 박찬익이 임명되고 민필호와 이청천 두 사람이 대표로 임명되었다. 그 산하에 행정부서로 비서처, 교무처(僑務處), 군무처, 총무처의 4개처와 전원실(專員室), 경위대가 설치되었다. 그 가운데에서 교포업무를 주관하는 교무처와 광복군 업무를 주관하는 군무처가 주요부서였다. 교무처장에는 박영요(朴永堯)가 임명되었다가 뒤에 민필호가 겸임했고, 군무처장은 이청천이 처음부터 겸임했다. 비서처장에는 김은충(金恩忠), 총무처장에는 민영구(閔泳玖)가 임명되었다.
주화대표단이 추진한 주요업무는 첫째로 임시정부의 귀국이후의 잔무처리, 둘째로 임시정부 직원들과 그 가족들의 귀국주선 및 생활보장과 중국에 거주하는 한인교포들의 안전과 재산보호, 셋째로 한국광복군의 훈련과 중국군에 포로로 수용되어 있는 일본군내 한적사병들을 광복군으로 편입하고 귀국시키는 일, 넷째로 중국정부와의 외교교섭과 연락업무를 처리하는 것이었다.44) 김구는 11월 1일에 중국국민당 비서처로 주화대표단이 성립된 사실을 통보하면서 협조를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45)
中國共産黨까지 환송회 열어
![]() |
1945년 11월 4일에 中國國民黨舍에서 열린 臨時政府귀국환송회광경(上)과 메인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金九와 蔣介石 내외(下). |
국민당정부와의 합작교섭을 위하여 중경에 와 있던 중국공산당의 중경주재판사처장 주은래(周恩來)와 중앙의장 동필무(董必武) 등도 임시정부 국무위원 전부를 초청하여 송별연을 베풀었다.49) 송별연에서 모택동(毛澤東)과 주덕(朱德)이 격려의 연설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50)
3. 26년만에 ‘個人資格’으로 歸國
![]() |
13년 만에 上海에 돌아와 교포들의 환영을 받는 金九. |
비행기는 다섯 시간 뒤인 오후 6시에 상해에 착륙했다. 윤봉길(尹奉吉)의 홍구공원(虹口公) 투탄사건으로 황급히 상해를 떠난 지 13년 만에 돌아온 것이었다. 비행기가 착륙한 곳이 바로 홍구공원이었다. 13년 동안 상해에 살면서도 프랑스조계 밖을 한발자국도 나가보지 못한 김구는 홍구공원이 난생 처음이었다. 6,000여명의 교포들이 아침 6시부터 김구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고 했다. 바로 임시정부 환영식이 열렸다.52)
김구는 상해에 도착했을 때의 소회를 간략하게 적어 놓았다.
“상해 전 동포들의 대성황리에 환영회를 개최하였다. 13년 전에 본 어린아이들은 벌써 장성하였고, 장정들은 이미 노쇠하여 옛 얼굴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
세상 만사가 어찌 모두 무심하고 우연이라 하리오. 상해에 거주하는 동포수가 13년전보다 몇십배나 증가되었으나, 왜적과의 전쟁으로 인한 생활난의 고통으로 인하여 각종 공장과 사업방면에서 부정한 업자가 속출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전 독립정신을 굳게 지키며 왜놈의 앞잡이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선우혁(鮮于爀), 장덕로(張德櫓), 서병호(徐炳浩), 한진교(韓鎭敎), 조봉길(曹奉吉), 이용환(李龍煥), 하상린(河相麟), 한백원(韓栢源), 원우관(元宇觀) 등 불과 10여인에 불과하였다. 그들의 굳은 지조를 가상히 여겨 서병호 자택에서 만찬회를 개최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그러면서 대표적인 ‘왜놈의 앞잡이’인 안준생에 대해서는 특별히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 중국관헌에게 부탁하였으나, 관원들이 실행치 않았다”고 적어 놓았다.53)
김구는 먼저 아내 최준례(崔遵禮)의 무덤을 찾았다. 김구는 일본조계의 한 자선병원에서 가련하게 세상을 떠난 아내의 임종마저 지켜보지 못한 것이 평생 한이었다. 열여덟 살의 활달한 처녀였던 최준례는 열세 살 위인 김구와 결혼하여 여장부인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험난한 독립운동자 아내의 삶을 꿋꿋이 살았다. 김구는 프랑스조계 공동묘지로 최준례의 묘지를 찾아갔으나, 분묘는 흔적도 없이 되어 있었다. 의아해하는 김구에게 따라온 묘지기가 10년 전에 이장한 사실을 알려주면서 그곳으로 안내해 주었다.54)
邵毓麟과 같이 歸國하게 해달라고 蔣介石에게 打電
임시정부 요인들이 도착하기 전에 그동안 상해에는 하지 장군이 보낸 특사 두 사람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다녀왔다. 한 사람은 하지의 비서관 로건(Logan) 대령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8·15해방 직후에 만주에서 귀국한 독립군장교 오광선이었다.
로건은 미시간대학교 동창생인 김형민(金炯敏)과 함께 상해를 두 번 다녀왔다. 10월말에 처음 갔을 때에는 김구는 만나지 못한 채 먼저 상해에 와있던 조소앙만 만나고 왔다. 11월초에 두 사람이 다시 간 것은 김구도 상해에 도착한 뒤였다. 국내동포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김형민의 말에 김구는 “구태여 내가 필요하다면 돌아가서 신주노릇이나 할까요”하고 말했다. 로건 대령은 김구를 따로 만났다.55)
오광선은 이기붕(李起鵬)과 함께 하지를 만나 임시정부 및 광복군 관계자들과 귀국문제를 협의하고 오겠다고 제안하여 하지의 동의를 얻고 군용기를 제공받았다. 오광선은 상해에서 광복군확대재편 활동을 벌이고 있던 이청천과 감격적인 해후를 하고, 광복군 국내지대장으로 임명되어 귀국했다.56) 앞에서 본 대로, 9월 3일에 발표한 김구의 “국내외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과 「임시정부 당면정책」이 국내신문에 뒤늦게 크게 보도된 것은 이때에 오광선이 가지고 온 것이었다.
그런데 로건 대령과 오광선이 상해에 간 이유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것이 없다. 하지가 11월 13일에 중국주둔 미군사령부로 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이 개인자격임을 확인시키기 위한 전문을 보낸 것을 보면,57) 이들의 상해행도 같은 취지에서 취해진 조치였을 개연성이 크다.58)
11월 10일까지는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던 김구일행의 귀국은 3주일 가까이나 지체되었다.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김구는 11월 7일에 한국을 방문하는 중국 『중앙통신(中央通訊)』특파원 증은파(曾恩波) 기자를 통하여 한국민주당 정치부장 장덕수(張德秀)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내용은 8월의 제5차 임시전당대회에서 개정한 한국독립당의 「선언」 「정당」 「정책」에 천명되어 있는 정치노선을 지켜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59) 또 11월 17일에는 이시영과 조소앙이 국민당의 안재홍(安在鴻)에게 편지를 보냈다.60)
상해까지 동행한 중국군사위원회의 소육린은 바로 중경으로 돌아갔는데, 11월 8일에 김구가 장개석에게 소육린을 상해로 돌려보내어 같이 귀국하게 해달라고 타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때에 김구가 얼마나 국민당정부에 의지하고 있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61)
이 무렵 한 국내신문에 실린 ‘시사만평’은 김구일행의 귀국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정당통일”이라는 올망졸망한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이승만이 “대연합국우호관계”, “민주정권”, “인민선거” 등의 보따리를 들고 들어오는 김구에게 “어서 와서 좀 거들어 주시오” 하면서 손을 내밀고 있는 만화이다.62)
“美軍政이 철수한 뒤에 들어가도 늦지 않아”
임시정부요인들의 상해 출발이 늦어진 것은 임시정부 인사들의 귀국이 개인자격임을 확인하는 서약서에 서명하라는 미군사령부의 요구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국무위원의 한 사람이었던 조경한의 술회는 이때의 논란이 얼마나 명분에 집착한 비현실적인 것이었는가를 실감나게 한다.
“국무회의가 열렸다. 분하고 기막힌 정서는 누구나 일반이었다. ‘모욕적인 싸인을 말고 이대로 귀국하지 않고 있다가 미군정이 철수한 뒤에 들어가도 늦지 않다’고 주장하는 일부인사도 있었으나, ‘싸인은 물론 모욕이나 우리의 정세가 어서 들어가서 국가의 일대 혼란을 만분지일이라도 바로잡아줄 의무가 있는 것이다. 형식은 기관이 아닌 개인이라고 싸인을 해줄지라도 어디까지나 들어가기 위한 임기응변의 권변(權變)과 방편에 불과한 것인데 기관을 운영한 전원이 들어가는 마당에 어찌 기관이 아니라고 보며 기관의 권력 발동에 있어서도 이미 정권을 국민에게 봉환키로 결정한 바 있으니 기회 보아서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봉환에 대한 절차를 준비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권변으로 싸인을 해주고 보자’는 이론이 압도적이어서 싸인해 주기로 가결하였다.”63)
김구는 11월 19일에 중국전구미군사령관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 장군에게 서약서를 제출했고, 맥아더는 그날로 김구일행의 귀국을 승인하고 이를 주중미국대사관을 통하여 국민당정부에 통보했다. 그리고 오철성은 그 사실을 21일에 김구에게 타전했다.64)
![]() |
金九의 귀국에 대한 기대를 나타낸 時事漫評(『中央新聞』1945년 11월 9일자). |
웨드마이어 將軍에게 誓約書 제출하고
하지 장군은 11월 20일에 G-47 프로펠러 수송기 한 대를 상해로 보냈다. G-47기는 15명밖에 탑승할 수 없었으므로 임시정부요인들은 1, 2진으로 나뉘어 귀국해야만 했다. 모두가 먼저 떠나고 싶어하는 상황에서 1진의 명단을 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결국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을 비롯하여 가장 연장의 국무위원 이시영, 문화부장 김상덕(金尙德), 참모총장 유동열, 선전부장 엄항섭이 1진으로 귀국하기로 하고, 수행원으로 주석 주치의인 유진동(劉振東), 김구의 며느리 안미생(安美生), 김규식의 아들로서 영어에 능통한 김진동(金鎭東), 비서 장준하(張俊河)와 민영완(閔泳琬), 그리고 윤경빈(尹慶彬), 선우진(鮮于鎭) 등 경위대원 4명이 선정되었다. 모두 15명이었다.65)
11월 23일 오후 1시 조금 지나 상해 강만(江灣) 비행장을 출발한 G-47기는 중국 동북해 연안을 거쳐 청도(靑島)에서 서울까지는 직선으로 비행했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구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인솔자는 미군 대령이었다. 그는 경위대원들에게 호신용 권총을 신고하라고 했다. 국내에서 무기를 휴대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경위대원들은 가지고 있던 모젤3호 권총 4정과 콜트 3정을 신고했다.
침통한 분위기가 두어 시간 남짓 흘렀을 쯤에 누군가가 “보인다” 하고 소리쳤다. 손바닥만한 기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바닷속으로 올막졸막한 섬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26년동안 마음속으로 아스라이 그리던 고국은 그렇게 가까이 있었다. 누군가가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애국가는 곧 합창이 되었다가 울음으로 흐려졌다. 오후 4시가 조금 지나서 비행기는 김포비행장에 착륙했다. 미군장교 몇 사람이 비행기에 올라와서 일행을 안내했다. 미군장교를 따라 비행기에서 내린 김구는 땅바닥의 흙을 한줌 움켜쥐고 흙냄새를 맡았다. 그러고는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꿈에서도 잊지 못하던 고국의 하늘이며 땅이었다.
비행장은 황량했다. 미군 병사 몇 사람만 눈에 뜨일 뿐 한국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었다. 환영 나온 인파와 함께 흔들 요량으로 준비해 온 태극기는 꺼낼 필요도 없었다.66) 이승만의 귀국때와 마찬가지로 미군정부당국은 김구일행의 귀국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이 내어준 차를 타고 숙소인 죽첨장(竹添莊)으로 가면서 느낀 소감을 김구는 이렇게 적었다.
“착륙 즉시 눈앞에 보이는 두 가지 감격이 있으니, 기쁨이 그 하나요 슬픔도 그 하나이다. 내가 해외에 있을 때에 우리 후손들이 왜적의 악정에 주름을 펴지 못하리라 우려하였던 바와는 딴판으로, 책보를 메고 길에 줄지어 돌아가는 학생의 활발 명랑한 기상을 보니 우리 민족 장래가 유망시되었다. 이것이 기쁨의 하나이다. 반면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동포들의 사는 가옥을 보니, 빈틈없이 이어져 집이 땅같이 낮게 붙어 있었다. 동포들의 생활수준이 저만치 저열하다는 것을 짐작한 것이 유감의 하나였다.67)
26년 만에 다시 보는 동포들의 모습에서 느끼는 김구의 감회는 이처럼 희망과 연민이 교차하는 것이었다.
김구 일행이 한강 인도교를 건널 때에 갑자기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는 金九의 ‘個人資格’ 강조
하지는 오후 6시에 중앙방송국의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오늘 오후에 김구선생 일행 15명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오랫동안 망명하였던 애국자 김구선생은 개인의 자격으로 서울에 돌아온 것이다”라는 짤막한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68)
김구일행의 귀국을 가장 먼저 안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군정부당국은 하지의 성명을 발표하기에 앞서 이승만에게 먼저 알린 것이었다. 이승만은 6시 조금 지나서 죽첨장에 나타났다. 이승만과 김구는 1920말부터 이듬해 6월까지 임시대통령과 경무국장으로 상해에 같이 있은 이래 25년 만의 재회였다. 이승만은 30분쯤 있다가 일어났다. 뒤이어 중앙방송국의 문제안(文濟安) 기자가 황급히 다녀가서 김구일행의 도착 사실을 보도했다. 김구일행의 귀국뉴스를 들은 많은 시민들과 기자들이 한꺼번에 죽첨장으로 몰려들어 서대문길을 메웠다.
기자들의 성화로 김구는 저녁 8시쯤에 잠깐 기자들을 만났다. 기자들의 첫 질문은 역시 38도선 문제였다. 김구의 대답은 신중했다.
“나는 조선이 남북의 두 점령지대로 분열되어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차 이 구분은 철폐되리라고 믿는다. 미국과 소련은 우리나라를 위하여 반드시 옳은 일을 하여 줄 것이다.”
어떤 자격으로 입국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나는 지금 연합국에 대하여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지는 않겠으나, 장차에는 승인을 요구할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나의 동지는 개인자격으로 환국한 것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정당의 난립 상태에 대한 의견을 묻자, 정당수를 줄일 필요는 있으나 정당은 하나로서는 안되고 유력한 정당 몇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체에 대해서는 “조선을 위하여 민주주의 정체가 좋다고 믿는다”고 말하고, 공산주의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조선이 공산주의국이 될 가능성에 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고 확답을 피했다.69)
同盟의 ‘敎訓’ 강조한 도착성명
엄항섭이 김구를 대신하여 기자들 앞에 나섰다. 엄항섭은 먼저 배포된 김구의 도착성명을 읽어 내려갔다. 그것은 김포비행장에 나와있을 환영군중 앞에서 읽을 예정으로 준비해온 것이었다.
“27년간 꿈에도 잊지 못하고 조국강산을 다시 밟을 때에 나의 흥분되는 정서는 형용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도착성명은 9월 3일에 발표한 “국내외동포에게 고함”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김구의 도착성명은 이승만이 귀국 제1성에서부터 미국정부와 미국국민들의 여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자신이 직접 작성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결의문도 “연합국과 아메리카 민중에게 보내는” 것이었던 데서 볼 수 있는 것과는 연합국 인식에도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나와 나의 동사(同事)들은 과거 20, 30년간을 중국의 원조하에서 생명을 부지하고 우리의 공작을 전개해 왔습니다. 더욱이 이번 귀국에는 장개석 장군 이하 각계각층의 덕택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국에 있는 미군당국의 융숭한 성의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및 나의 동료는 중-미 양국에 대하여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또 우리는 우리 조국의 북부를 해방해준 소련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의 경의를 표합니다.…”
성명은 이어 이번 전쟁의 승리의 유일한 원인은 동맹을 통한 단결이었다고 말하고 그 ‘교훈’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러므로 금번 전쟁을 영도하였으며 따라서 큰 전공을 세운 미국으로서는 승리의 공로를 독점하려 하지 않고 전체에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맹국 미국의 겸허한 미덕을 찬양하거니와 동심육력(同心戮力)한 동맹국에 대하여도 일치하게 사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작풍은 또 우리에게 주는 큰 교훈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어 김구는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음을 언명하고 나서, 38선 이북의 동포와도 머지않아 만나게 될 것을 확신한다는 말로 도착성명을 마무리했다.70)
인쇄해온 「임시정부 당면정책」 14개항도 다시 발표되었다. 이날부터 죽첨장에는 미군헌병이 배치되고 요인들의 경호는 오광선 휘하의 광복군 국내지대가 맡았다. 그리고 죽첨장은 12월부터 동명이 죽첨정(竹添町)에서 경교동(京橋洞)으로 바뀌면서 경교장으로 개칭되었다.
“내가 李博士보다 더 나은 생각 가졌다고 기대함은 잘못”
![]() |
1945년 11월 24일에 李承晩의 안내로 하지 장군을 예방한 金九. |
여운형은 김구가 외출한 사이에 죽첨장을 방문했던 것 같다. 이만규(李萬珪)의 기술에 따르면, 여운형은 자동차를 탄 채 대문 안 뜰까지 달려갔다. 김구는 외출하여 만나지 못하고 이시영, 김규식, 유동열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경비대가 나타나 ‘불법침입’이니 나오라고 하여 밖으로 나왔다. 여운형은 문밖까지 가서 몸 검색을 당하고 나서 다시 들어갔다. 이때에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 일을 말리지 않았다.71) 과잉경호와 동시에 임시정부 인사들의 여운형에 대한 인식을 짐작하게 하는 에피소드이다.
김구는 9시30분에 엄항섭을 대동하고 돈암장으로 이승만을 답방했다. 그리고 이승만과 함께 반도호텔로 하지 장군을 예방하고 이어 군정청으로 아널드 장군을 예방했다.
김구는 오후 1시 반부터 경교장에서 군정청 출입기자단과 첫 공식 회견을 가졌다. 이날 기자들과 나눈 일문일답은 김구의 돌부처같은 인품을 그대로 느끼게 하는 매우 신중하면서도 솔직한 것이었다.
기자들의 초미의 관심사는 논란이 되고 있는 이른바 민족통일전선 결성과 관련된 문제였다.
“그동안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민족통일전선 결성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점도 있었다. 그런 만큼 김구선생을 맞이한 전 민족의 기대는 실로 크다. 민족통일에서 이 박사는 우선 뭉치자고 하고 국내 여론은 무조건 통일이 아니고 먼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처벌하자는 것인데, 이에 대한 포부는?”
“오늘은 대답할 수 없다. 여러분이 내가 이 박사보다도 더 나은 생각을 가졌다고 기대함은 잘못일 것이다. 또 나는 해외생활 30년으로 국내정세를 잘 알지 못하므로 이 같은 중대문제에 대하야 조급히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魂이 왔는지, 肉體도 왔는지…”
그러자 기자들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처단문제는 「임시정부 당면정책」에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러한 반문에도 김구는 숭굴숭굴하게 대답했다.
“악질분자가 섞이는 통일을 누가 원할 것인가. 그러나 사정을 잘 모르니 어떻게 하나. 통일한 뒤에 처치하는 것과 처치한 뒤에 통일하자는 두 가지인데 두 가지 방법은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실정을 잘 모르니 말하기 곤란하다. … 시간을 주기 바란다.”
그러자 기자들은 국내정국의 실정을 파악하는 데 어떤 방법으로 하겠느냐고 물었다. 김구의 대답은 간단했다.
“눈과 귀가 있으매 듣고 보아서 잘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기자들이 다시 국내에는 주의주장이 상이한 정당이 있는데, 어떤 정당만이 선생의 주위를 둘러싼다면 선생의 총명한 판단을 그르치게 할 염려가 있다고 말하자 김구는 “이 문제도 대답하기 어렵다”하고 얼버무렸다.
고국에 돌아온 감상이 어떠냐는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감동어린 한마디로 대답했다.
“내가 혼이 왔는지 육체까지 왔는지 모를 지경이다.”
기자들은 잠시 멈칫했다.
“상해 체류중에 도쿄의 맥아더 대장과 정부로 환국하느냐 개인자격으로 들어오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교섭이 있었다는데…”
“그들의 말은 한국에 군정부가 있는데 완전한 정부로 들어오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 말을 이해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연장되었을 뿐이요 우리정부 자체는 사실상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그러자 기자들은 다시 국내의 인민공화국과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물었다. 김구는 “아직 이것도 말할 수 없다. 좀 더 듣고 보고 구체적으로 말하겠다”하고 대답을 회피했고, 이승만 중심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그것 역시 말할 수 없다. 정확한 실체를 안 다음에 결정해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肉聲放送은 2分동안만
마지막 질문에 대한 김구의 대답은 그가 어떤 마음가짐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그토록 신중하게 대답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선생이하 요인이 개인자격으로 입국했으니 임시정부는 언제 환국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김구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군정이 실시되고 있는 관계로 대외적으로는 개인자격이 될 것이나, 우리 한국사람으로 보면 내가 왔으므로 정부도 돌아온 것이다.”72)
이처럼 김구의 의식에는 자기자신이 곧 정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태도는 “연기하는 것은 해결이 아니다”라는 신조를 가지고 모든 일을 단정적으로 판단하고 그러한 판단에 입각한 분명한 비전을 제시하면서 대중을 휘어잡는 이승만의 태도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김구는 이날 저녁에 중앙방송국의 라디오방송으로 다음과 같은 간단한 귀국인사를 했다. 그의 귀국방송 원고는 미리 준비되어 있었으나, 주어진 방송 시간이 2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울분을 삭이며 원고를 새로 작성했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27년간이나 꿈에도 잊지 못하고 있던 조국강산에 발을 들여놓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나는 지난 5일에 중경을 떠나 상해로 와서 22일까지 머물다가 23일에 상해를 떠나 당일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나와 각원 일동은 한갓 평민의 자격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앞으로는 여러분과 같이 우리의 독립완성을 위해 전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전국 동포가 하나가 되어 우리의 국가독립의 시간을 최소한도로 단축시킵시다.
앞으로 여러분과 접촉할 기회도 많을 것이고 말할 기회도 많겠기에 오늘은 다만 나와 나의 동사일동이 무사히 이곳에 도착되었다는 소식만을 전합니다.”73)
이렇듯 짧은 인사말에서도 ‘평민의 자격’을 강조한 것은 미군정부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이 인사말은 김구의 육성방송 뒤에도 아나운서가 되풀이하여 읽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74)⊙
1) Ariside R. Zolberg, “Moment of Madness”, Politics and Society, vol. 2, No. 2(Winter, 1972), 박명림, 「한국의 국가 형성 1945-48 : 시각과 해석」, 『韓國政治學會報』제29집 제1호, 韓國政治學會, 1994, p. 198에서 재인용.
2) 「照抄韓情近報」, 「韓國臨時政府各黨派最近活動?光復軍動態情形」, 白凡金九先生全集編纂委員會 編, 『白凡金九全集(5)』, 대한매일신보사, 1999, p. 673, pp. 680~683. 3) 閔弼鎬, 「大韓民國臨時政府와 나」, 金俊燁 編, 『石麟閔弼鎬傳』, 나남출판, 1995, p. 118. 4) “國內外同胞에게 告함”, 『白凡金九全集(5)』, pp. 670~671. 5) 「建國綱領」에 대해서는 韓詩俊, 「大韓民國臨時政府의 光復後民族國家建設論 ─ 大韓民國建國綱領을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제3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참조.
6) 이승억, 「임시정부의 귀국과 대미군정관계(1945. 8~1946. 2)」, 『역사와 현실』제24호, 역사비평사, 1997, p. 93. 7) 위의 글, p. 100. 8) 『自由新聞』 1945년 11월 8일자, 「臨時政府金九主席聲明」;『每日新報』1945년 11월 9일자, 「金九臨時政府主席聲明發表」;『新朝鮮報』 1945년 11월 11일자, 「金九主席 內外에 聲明」. 9) 「金九가 吳鐵城에게」(1945. 9. 1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대중국 외교활동』, 국사편찬위원회, 2008, p. 274 ;「金九가 賀國光에게」(1945. 9. 12), 『韓國獨立運動史資料(27) 臨政篇ⅩⅡ』, 國史編纂委員會, 1994, p. 39. 10) 「照抄韓情近報」, 『白凡金九全集(5)』, p. 673 ; 선우진 지음, 최기영 엮음,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 백범 김구 비서 선우진 회고록』, 푸른역사, 2009, pp. 37~38. 11) 孫科志, 『上海韓人社會史: 1910~1945』, 한울, 2001, p. 135. 12) 김정인, 「임정주화대표단의 조직과 활동」, 『역사와 현실』 제24호, 역사비평사, 1997, pp. 133~134. 13) 선우진 지음, 최기영 엮음, 앞의 책, p. 38. 14) 秋憲樹 編, 『資料 韓國獨立運動(1)』, 延世大學校出版部, 1971, pp. 489~490. 15) 염인호, 「해방후 韓國獨立黨의 中國關內地方에서의 光復軍擴軍運動」, 『역사문제연구』 창간호, 역사문제연구소, 1996, p. 16) Bruce Co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Ⅰ, Liberation and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1, p. 449.
17) 「金九가 蔣介石에게」(1945. 9. 1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pp. 273~274. 18) 「韓國獨立計劃綱要草案」, 『大韓民國臨時政府와 韓國光復軍 : 海外의 韓國獨立運動史料(ⅩⅧ) 臺灣篇①』, 國家報勳處, 1996, p. 94. 19) 胡春惠 著, 辛勝夏 譯, 『中國안의 韓國獨立運動』, 檀國大學校出版部, 1978, pp. 290~291. 20) 「蔣介石이 吳鐵城에게」(1945. 12. 5),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5) 중국의 인식』, 국사편찬위원회, 2008, pp. 138~139. 21) 邵毓麟, 「중국에서의 한국독립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5)』, p. 219. 22) 『大韓民國臨時政府와 韓國光復軍』, 國家報勳處, p. 155.
23) “Memorandum by Vincent, Sept.26, 1945”,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5, vol. Ⅵ,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9, p. 1058. 24) Robertson to Byrnes, Sept.25, 1945, FRUS 1945, vol. Ⅵ, p. 1057. 25) Acheson to Hurley, Sept.21, 1945, FRUS 1945, vol. Ⅵ, p. 1054. 26) Robertson to Byrnes, Sept.25, 1945, FRUS 1945, vol. Ⅵ, p. 1057. 27) Acheson to Robertson, Sept.27, 1945, FRUS 1945, vol. Ⅵ, p. 1060. 28) 胡春惠 著, 辛勝夏 譯, 앞의 책, p. 292. 29) 閔弼鎬, 「大韓民國臨時政府와 나」, 『石麟閔弼鎬傳』, p. 119.
30) 「蔣介石과 金九의 면담기록」(1945. 9. 26),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pp. 279~280. 31) 「金九가 吳鐵城에게」(1945. 10. 7),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p. 282. 32) 위와 같음. 33) 「蔣介石이 吳鐵城에게」(1945. 10. 23), 崔鍾健 編譯, 『大韓民國臨時政府文書輯覽』, 知人社, 1976, p. 169. 34) 「蔣介石이 吳鐵城에게」(1945. 10. 30), 위의 책, p. 170. 35) 「吳鐵城이 朴贊翊에게」(1945. 12. 31),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p. 303. 36) 「二十萬弗의 處理方法」, 秋憲樹 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p. 453 ;「臨政活動費美貨二十万弗支給方法에 關한 件」, 『資料 韓國獨立運動(1)』, p. 518 ; 鄭秉峻,「1945~47년 우익진영의 ‘愛國金’과 李承晩의 정치 자금 운용」, 『韓國史硏究』제109호, 韓國史硏究會, 2000. 6, p. 217.
37) 『大韓民國臨時政府와 韓國光復軍』, 國家報勳處, p. 156. 38) 『每日新報』1939년 10월 17일자, 「그 아버지들에 이 아들들 잇다」. 39) 安俊生의 서울방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일본외무성 문서번호SP205-4 『外務省警察史 : 滿洲ノ部』, 「視察團員安俊生ノ博文寺參拜及伊藤文吉男トノ邂逅」참조. 40) 玄圭煥, 『韓國流移民史(上)』, 語文閣, 1967, p. 685. 41) 孫科志, 앞의 책, p. 135.
42) 「蔣介石과 金九의 면담기록」(1945. 10. 30),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pp. 288~290. 43) 『韓國獨立運動史資料(27) 臨政篇ⅩⅡ』, pp. 43~45. 44) 김정인, 앞의 글, pp. 127~138 ; 南坡朴贊翊傳記刊行委員會, 『南坡朴贊翊傳記』, 乙酉文化社, 1989, pp. 293~296. 45) 「金九가 中國國民黨秘書處에」(1945. 11. 1),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pp. 293~294. 46) 秋憲樹 編, 『資料 韓國獨立運動(1)』, p. 477. 47) 秋憲樹 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p. 344. 48) 石源華 編, 『韓國獨立運動與中國』, 上海人民出版社, 1995, p. 587.
49)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1997, p. 401 ; 趙擎韓, 『白岡回顧錄 國外篇』, 韓國宗敎協議會, 1979, p. 369. 50) 『東亞日報』 1945년 12월 19일자, 「中國共産黨領袖 臨政에 絶對好意」. 51) 「金九가 吳鐵城에게」(1945. 11. 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p. 295. 52)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pp. 406~407 ; 張俊河, 『돌베개』, 禾多出版社, 1971, pp. 399~400. 53) 『백범일지』, p. 408. 54) 위와 같음. 55) 金炯敏, 『訥丁 김형민회고록』, 범우사, 1987, pp. 213~218.
56) 建國靑年運動協議會, 『大韓民國建國靑年運動史』, 1989, pp. 881~882 ; 金斗燦, 「吳光鮮將軍」, 『新東亞』 1971년 2월호, pp. 257~258. 57) 『駐韓美軍史(2)』(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ed Forces in Korea), (이하 HUSAFIK 2), 돌베개影印版, pp. 43~44. 58) 韓詩俊,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환국」, 『한국근현대사연구』 제25집, 한울, 2003, p. 73. 59) 『新朝鮮報』 1945년 11월 10일자, 「金九先生, 張德秀氏에게 親書」및 1945년 11월 11일자, 「國內同胞에 感謝」. 60) 이승억, 앞의 글, p. 104. 61) 「金九가 蔣介石에게」(1945. 11. 8),『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pp. 298~299. 62) 『中央新聞』 1945년 11월 9일자, 「時事漫評」. 63) 趙擎韓, 앞의 책, pp. 367~368.
64) 「吳鐵城이 金九에게」(1945. 11. 21),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p. 300. 65) 선우진 지음, 최기영 엮음, 앞의 책, pp. 45~46. 66) 張俊河, 앞의 책, pp. 407~412 ; 선우진 지음, 최기영 엮음, 위의 책, pp. 47~50. 67)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p. 409. 68) 張俊河, 앞의 책, p. 415.
69) 『中央新聞』 1945년 11월 24일자, 「金九主席과 一問一答」. 70) 『自由新聞』 1945년 11월 24일자, 「金九主席의 스테-트멘트」. 71) 李萬珪, 『呂運亨先生鬪爭史』, 民主文化社, 1946, pp. 256~257 ;『駐韓美軍史(2)』(HUSAFIK 2), p. 70.
72) 『中央新聞』 1945년 11월 25일자, 「내가 오니 政府도 왓다」;『新朝鮮報』 1945년 11월 25일자, 「個人資格은 對外關係」;『自由新聞』 1945년 11월 25일자, 「判斷은 實情 안 然後」. 73) 『自由新聞』 1945년 11월 26일자, 「金九主席還國第一?放送」. 74) 張俊河, 앞의 책, pp. 441~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