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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成東의 인간탐험 - 大腸癌·肝癌 수술받고도 재기한 만화가 高羽榮

『하늘이 준 목숨 어떻게든 끝까지 지켜야죠』

김성동    ksd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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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린 大腸 40cm… 의사에게 잘린 大腸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다
●『만화가협회장, 시사 만평가, 영화감독한 것은 내 인생의 3대 실수』
●『우리가 漢字문화권에 살면서 漢字를 배격하면 안 된다. 젊은이들이 웃으며 배울 수 있는 漢字 교재 집필 중』
●『만화가는 모든 사물을 정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좀스러워지더라도』
●『李賢世씨의 만화를 음란물 판정했던 것은 만화를 우습게 봤다는 것』
●『만화는 糖衣錠 같은 존재가 돼야』
●『가끔은 내 만화를 몽땅 불질러 버리고 싶다』


高 羽 榮
1938년 만주 출생. 부산 동항초등학교·숭실中·동성高 졸업. 한국만화가협회장. 한국여행인클럽 회장.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 작품집으로 「쥐돌이」, 「임꺽정」, 「삼국지」, 「수호지」, 「십팔사략」, 「가루지기」 등이 있음.
대장 40cm를 자르다
  만화가 高羽榮(고우영·65)씨를 만나기 1주일 전쯤 그와 전화 통화를 했다. 화요일이었는데 병원이라고 했다. 高羽榮 화백은 지난해 8월 大腸癌(대장암) 수술을 받았는데 癌세포가 肝(간)으로 轉移(전이)됐다고 했다.
 
  『지난번에는 腸을 잘랐는데 肝으로 전이가 됐대요. 그래서 초전박살 차원에서 수술을 받으려고 병원에 왔어요. 주변에서는 가족 외에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데… 하여튼 주말에 통화해서 약속을 정합시다』
 
  그러면서 그는 『나 같은 암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라도 月刊朝鮮 취재에 응할게요』라고 덧붙였다.
 
  癌세포가 大腸에서 肝으로 전이된 癌환자의 목소리 같지 않았다. 감기몸살 정도 때문에 병원을 잠시 찾은 환자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초전박살」이란 표현에서는 피식 웃음이 나왔을 정도다. 간암 수술을 받은 환자와 곧바로 장시간의 인터뷰가 가능할까, 하는 의문을 접게 해주는 목소리였다.
 
  약속대로 우리는 토요일에 통화했고 다음 주 월요일 오후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지난 10월27일 오후 2시 경기도 일산 그의 집 근처에 있는 한 오피스텔에서 그를 만났다. 작은 체구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童顔(동안)이었고 밝았다. 불과 수일 전 간암 수술을 받은 환자의 모습, 病色(병색)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얼굴에는 예의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는 『전이되지 말라고 腸을 넉넉하게 잘랐는데 그놈들이 탈출을 했어요』라고 말했다.
 
  그의 어법은 그런 식이었다. 그의 작품속 만화 주인공들의 말투는 아무래도 그를 닮아 있는 것 같았다. 혹 나이에 걸맞은 진중함이 결여돼 있다고 비판할 사람도 있겠으나 인터뷰는 그래서 즐거웠다.
 
 
 
 수술 전 終傅聖事 부탁
 
   실평수가 13평 정도라는 오피스텔에서 高羽榮씨는 그를 쏙 빼닮은 둘째 아들 成彦(성언)과 함께 있었다.
 
  ―간암 수술은 잘된 겁니까.
 
  『암세포가 전이되지 않게 하려고 6개월 동안 항암 치료를 했어요. 그 항암 치료라는 게 몹시 고달파요. 토하고 설사 나고 머리칼, 눈썹 다 빠지고…. 지난번 수술에서 腸을 아래위로 20cm씩 넉넉하게 잘랐 거든요. 전이될까 봐. 그래도 요놈들이 탈출했어요. 제일 먼저 전이되는 부위가 肝이래요. 암세포가 혈액을 따라가니까.
 
  아, 난 다 나은 줄 알았는데 검사할 때마다 의사들이 「아직까지는 전이된 흔적이 없습니다」 그러는 거예요. 언젠가는 전이될 거라는 말로 들렸죠. 그래서 나는 그 말이 기분 나쁘다 했는데 아니나 달라요(웃음)』
 
  ―정기검진 과정에서 전이된 게 밝혀진 겁니까.
 
  『네, 먼저 대장암 수술을 한 일산병원에서 또 복개 수술을 한다고 그랬어요. 마침 알음알음으로 다른 병원의 친구들이 소개해 줘서 복개 안 하고 高주파로 지지는 방법으로 했어요. 그런데 암세포가 생길 때마다 지져야 한다는군요. 많이 한 사람은 다섯 번까지 지졌다는군요. 아이고, 그래도 하늘이 준 목숨 어떻게든 끝까지 지키고 나가 봐야지요. 하다하다 안 되면 할 수 없는 거지 뭐(웃음). 하여튼 끝까지 노력을 하다가 안 되면, 절대전능자가 부른다면 가야지』
 
  ―대장암이라는 걸 어떻게 발견했습니까.
 
  『작년 여름에 막내아들 成逸(성일)네 부부와 함께 집 부근 횟집에서 저녁을 먹었어요. 술도 마셨고요. 그런데 복통이 오더라고요. 집에 왔는데 혈변도 나오고요. 당시 출혈성 대장염이 유행을 했어요. 그 병이려니 생각하면서도 약간 감이 달랐죠. 참다가 결국 병원으로 갔는데 대장암이라는 진단이 나온 거죠. 내시경 처음에 넣을 때 농담으로 그랬어요. 「악성종양이오? 」하고 의사한테 농담을 했죠. 「아닙니다」는 답이 돌아올 것으로 기대를 했는데 「예」 하더라고요』
 
  ―평소 자각 증세는 없었습니까.
 
  『암이 발견되기 1년 전 건강검진을 받을 때도 이상이 없는 걸로 나왔어요. 또 제가 그전까지는 술을 많이 먹으니까 늘 변이 묽었죠. 병원에 갔더니 내시경 검사를 하는데 의사가 「이거 막혀서 안 들어가요, 그동안 어떻게 변을 봤습니까. 장이 완전히 막혔어요」라는 거예요. 설사로만 변이 나왔던 모양이죠. 하여튼 암이 독해요. 그때까지 자각증상이 없던 거예요. 그 자리에서 옷 갈아 입고 입원해서 다음날 곧바로 대장을 잘랐어요. 완치 성공률이 50대 50이라고 해요』
 
  ―암 진단을 받았을 때 하늘이 노래지고 그랬습니까.
 
  『뭔가 띵 하는 느낌이었죠. 이 사람이 오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저는 뭔가 어떤 믿음 같은 게 있고 죽음에 대해 겁이 안 나니까 근심은 없더라고요』
 
  ―수술 들어가기 전에 終傅聖事(종부성사: 가톨릭에서 병이 들거나 늙어서 죽을 위험이 있는 신자를 천주에게 맡겨 구원을 비는 성사)도 부탁했다면서요.
 
  『종부성사를 하고 수술을 할까 하다가, 막내한테 「내가 의식을 찾지 못하고 실패할 경우 숨이 있을 때 신부님 모셔다가 마지막 성사해 줘」 그러고 나서 수술실에 들어갔는데 이렇게 깼어요. 그런데 공포감 같은 것은 없었어요』
 
  ―깨어나셨을 때 기분은 어땠습니까.
 
  『마취를 할 때 제 스스로 몇 초나 버티나 보자고 생각하고 버텨봤는데 2∼3초도 못 버텼어요(웃음). 여덟 시간 수술을 했다는데 깨어나니까 통증 때문에, 그 통증 때문에 죽을 것 같기만 했죠』
 
 
 
 『李朱一은 가고, 나는 살고』
 
   ―末期에 가까웠다면서요.
 
  『1, 2, 3, 4期가 있으면 3期 마지막이라고 하더군요. 말기 암이죠. 그때 일산병원 암센터에는 코미디언 李朱一씨도 누워 있을 때예요. 그 사람은 가고, 나는 살았죠』
 
  ―수술 성공 후 암을 발견하기 이전과 삶을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암 발견 이전에는 그야말로 체질이 좋으니까, 저는 움직이는 마이신이라 할 정도로 곪고 그러는 게 없거든요. 잔병치레도 안 하고 또 운동신경이 남보다 빨라서 병 이런 거는 제 생각 밖에 있었죠. 그런데 아버지, 어머니가 다 암으로 가셨단 말예요. 유전인자를 걱정했어야 했는데 내 일은 아니다, 이렇게 알고 있었어요.
 
  하루도 안 빠지고 만취하도록 술 마시고 또 그 다음날 일어나서 일하고 그랬으니까요. 옛날에는 철없이 살아왔던 것 같고, 이제는 내일 나는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는 자세로 살게 됐어요. 뭐든지 정리하면서 살고 싶고 對人관계 하나라도 깨끗이, 구질구질하게 안 하고 싶고. 작은 이권으로 얼굴 붉히지 않게 되고』
 
  ―잘라낸 大腸은 왜 달라고 했습니까.
 
  『별걸 다 조사했네(웃음). 그게 뭐랄까, 저는 뭐든 관찰하고 싶은 그런 욕심이 있어요. 호기심 때문에 그랬어요. 병에 넣어서 두고두고 보려고 그랬는데 안 주데요(웃음). 호기심 때문에 수술을 하기 전에 「대장 직경이 한쪽은 굵고 한쪽은 가는데 그걸 어떻게 잇느냐」는 질문도 했어요』
 
  ―답은 들었습니까.
 
  『참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야기는 해줍디다. 굵은 데는 수직으로 자르고, 가는 데는 사선으로 자른다는 거예요. 그렇게 자르면 원의 둘레가 굵은 부분이나 가는 부분이나 비슷하다는 거죠』
 
  ―수술대에 누워서도 각종 수술기구들을 다 관찰하셨다면서요.
 
  『만화에 수술실을 많이 그릴 수 있잖아요. 실제는 어떤가, 하고 수술 직전에 봤죠. 많은 도움이 됐어요』
 
  ―그 와중에도 만화를 생각합니까.
 
  『생리가 그렇게 변하나 봐요. 여행도 산천경계를 살피는 게 아니고 어떨 때는 못을 어떻게 박았나 살피고… 사람이 그렇게 좀스러워져요. 하여튼 견문을 밝히고 알아서 나쁜 건 하나도 없잖습니까』
 
 
 
 삼형제가 만화가로 활동
 
  高羽榮 화백은 1938년 중국의 만주 瀋陽(심양) 근처 본계호란 곳에서 태어났다. 광복 후 아버지(고종률·1961년 작고)와 어머니(김신숙·1958년 작고)의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왔지만 일제 시대 때 아버지가 경찰 고위직에 있었다는 이유로 더 이상 평양에서 살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6·25 전쟁이 나기 전인 1946년 초에 高화백의 부모님은 5남2녀의 자녀들을 이끌고 越南(월남)하게 된다. 빈손으로 서울에 정착한 후 살림은 어머니가 도맡아서 꾸려나가게 된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많으셨겠어요.
 
  『그렇지는 않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너무 고지식했던 분 같아요. 서울에 오니까 옛 동료들이 경찰 고위직에 많더래요. 그분들이 함께 일하자고 했는데 아버지는 「나는 민족의 죄인」이라면서 거부하셨대요. 아버지는 그때부터 은둔 생활을 하셨어요. 서울 워커힐호텔 근처 광나루에서 조그만 배 하나 띄워 놓고 낚시만 하셨어요. 저도 그때 낚시 많이 배웠습니다. 배 젓는 법도 아버지는 저에게만 전수해 주고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家長 노릇을 대신하셨어요』
 
  ―어머니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평양에 계실 때는 잠시 교편도 잡았어요. 서울로 와서는 출판업도 하시고 아동 신문도 하시고, 하여간 가족들을 위해 이리저리 뛰셨어요』
 
  ―집안의 종교가 원래부터 가톨릭인가요.
 
  『아니에요. 월남했을 때 서울 중부 경찰서 근처에 살았어요. 고 바로 옆이 명동성당 아니에요? 그냥 그런 이유로 열한 살, 열두 살 때 가톨릭이 뭔지도 모르고 인연을 맺게 된 거예요. 지금은 교인이 됐지만』
 
  高羽榮 화백은 힘겨운 가족사를 이야기할 때도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즐거워하는 것은 그의 천성인 듯싶다. 高화백의 형들인 상영·일영씨도 만화가이다.
 
  ―형님들의 영향을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받았겠습니다.
 
  『그렇죠. 형들이 고등학교 때부터 만화를 그렸어요. 저는 초등학교 때였는데 한참 만화를 좋아할 나이 아닙니까.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겠죠』
 
  형들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만화를 그린 高화백은 중학교 2학년 때인 1952년에 「쥐돌이」로 데뷔한다. 피란지 부산에서의 일이다.
 
  ―어린 나이에 데뷔를 하셨는데 당시 「쥐돌이」에 대한 반응은 어땠습니까.
 
  『좋았어요(웃음). 농담만은 아니고 정말 반응이 괜찮았어요. 그런데 그때 그게 출판돼 나왔다는 게 그 시기가 얼마나 혼란한 시기였던지를 가늠할 수 있지요(웃음)』
 
  ―천재적이었던 거는 아니고요.
 
  『아니에요. 제 생각에는 그래요. 부산이 임시 수도였다가 환도하면서 만화 출판계도 공황기를 맞아서 중학생이 그린 원고도 출간이 됐지 않나 그렇게 생각해요』
 
  ―「쥐돌이」는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미키 마우스를 보고 한국 쥐돌이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쥐를 의인화해서 그 활약을 그렸어요』
 
  高羽榮 화백의 최종 학력은 高卒(고졸)이다. 만화가인 두 형은 서울大 미대를 졸업했다. 국문학과나 美大를 꿈꾸던 그가 진학을 못 한 이유는 힘겨운 가족사와 무관치 않다. 高화백이 동성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58년에 高화백네 집안의 실질적인 家長이었던 어머니가 위암으로 돌아가신 데 이어 6개월 뒤에는 형님들도 심장마비로 거의 동시에 세상을 떠났다.
 
  ―왜 대학을 안 갔느냐는 질문 많이 받으시지요.
 
  『어디에 이력서 쓸 때가 제일 싫죠(웃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어서 형님들마저 갑자기 돌아가시니까 자연히 제가 家長 승계를 받게 됐잖아요. 아버지가 계셨지만 은둔하다시피 하셨고 제가 아우들을 보살펴야 할 처지가 됐어요. 대학은 1, 2년 미루자 했다가 이렇게 못 가게 된 거죠』
 
  ―그 뒤로 다시 대학에 진학할 생각은 안 하셨습니까.
 
  『몇 번 했었어요. 결혼 이후에도 했었죠. 제 결혼식 주례를 서준 분이 옛날 서라벌 예술대의 金東里 선생이에요. 그분이 그때 문예창작학과 학과장을 하고 계실 때인데 입학을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로 갈까도 생각했는데 당시 애를 둘씩이나 키우는 가난한 만화쟁이가 대학 입학금이나 등록금을 마련하는 게 힘들더라고요. 그 이후에도 몇 번 그런 기회가 있었는데 가지 못했어요. 지금 또 입학할 생각을 하니까 이제는 기력이 달리네요(웃음)』
 
 
 
 
형님이 그리던 만화를 이어받은 「짱구박사」

 
  ―형님인 일영씨가 생전에 만화잡지에 연재하던 「짱구박사」를 형님이 돌아가신 후 이어서 그렸는데 그때의 필명 「추동성」은 누가 지어 준 이름입니까.
 
  『형도 「추동식」이란 가명을 가끔 썼어요. 저는 그냥 동성高를 다녔으니까 그렇게 붙인 거예요』
 
  ―「짱구박사」를 이어서 그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형이 갑자기 죽었거든요. 형님이 연재하던 「짱구박사」가 당시 굉장히 인기 있었어요. 많은 분들이 아쉬워하고 아까워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제가 그리게 된 거죠. 사실 캐릭터라는 것은 자기가 생각하고 만들어야 하는 건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요. 희귀한 일이지만 그때는 별 의미 없이 그냥 했어요. 나쁘게 말하면 제가 이용해 먹은 거죠』
 
  어머니와 두 형의 갑작스런 죽음은 高화백을 軍기피자로 만들었다.
 
  ―軍기피를 하셨는데 몇 년 동안 도망다니셨습니까.
 
  『한 3년 도망다니다가 잡혔죠. 군대 징집될 나이에 저 없으면 집이 붕괴될 게 분명하고 중학교 다니는 애만 동생이 3명이에요. 아버지는 그때 회갑 나이였는데 50代부터 룸펜으로 지내셨고, 제가 만화 그리고 이렇게 해서 집안을 끌어갔는데 그야말로 제가 빠지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도망다니면서도 도화지를 끼고 다녔어요. 그런데 범법자 생활을 오래 하면 사람 성격이 변해요. 그때 저는 목숨이 걸린 도망이었단 말이에요. 집이 어떻게 되나, 그런 생각밖에 없어요. 젊은 나이에 누구하고 티격태격할 수도 있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티격태격하다 보면 내가 지게 돼요.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러고 말게 돼요. 혹시 고발할까 봐(웃음)』
 
 
 
 「水滸誌」 完刊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高羽榮 화백은 암치료를 받는 한편으로 「水滸誌(수호지)」 完刊(완간)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1973년과 2000년 두 차례에 걸쳐 스포츠紙에 연재하다가 두 번 다 도중에 중단한 작품이다. 중국 4大 奇書(기서)의 하나인 「水滸誌」는 宋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108명의 호걸이 양산박에 모여 부패한 조정에 맞서 싸운다는 이야기다. 1973년에 일간스포츠에 연재하다가 중단된 이유는 이러한 내용과 무관치 않다. 일간스포츠 연재는 1974년에 271회 연재를 끝으로 중단됐는데, 당국에서 「체제를 전복하려는 불온한 내용」이라는 시비를 걸었기 때문이다.
 
  ―「수호지」 完刊 작업을 하고 계시더군요.
 
  『예, 지금까지 20권이 나왔어요. 앞으로 새로 두세 권 더 그려서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데 지금 병원에 들락날락거리다 보니까 아직 못 마치고 있어요. 내년 봄까지는 마무리할 생각이에요』
 
  ―1973년에 일간스포츠에 연재하다가 중단된 것과 차이가 많습니까.
 
  『그때의 작품과 이번의 것은 다른 거예요. 좀더 현대적인 감각을 넣었어요』
 
  ―연재가 중단될 당시의 기억이 아직도 불쾌하게 남아 있습니까.
 
  『다 지난 일인데요. 저도 젊었을 때니까 생각도 치졸했고 그래서 야기된 거죠』
 
  ―작가가 自意(자의)가 아닌 他意(타의)에 의해서 작품을 중단하게 되면 자존심이 상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불후의 명작이나 작품이라고 하기에 창피하고 부끄러운 거죠. 남이 보면 만화 쪼가리라고 볼 수도 있잖아요』
 
  ―1973년에 그 「수호지」는 30代에 그렸고 이번 단행본 「수호지」는 60代에 그렸는데 나이가 주는 차이는 어떤 게 있습니까.
 
  『어리고 젊었을 때는 내용이 박력 있었겠지요. 그때는 「돈으로 권력을 사서 이자를 붙여 먹는 놈들이 爲政者(위정자)다」 하는 데 포커스를 맞춰서 연재했어요.
 
  이번에는 밝고 재미있게 그렸어요. 환갑이 지난 나이가 되니까 그렇게 되더라고요. 저는 언제나 古典을 그릴 때 당시의 時事에 맞춰서 「장난」을 합니다. 예를 들면 이야기 안에 현상범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조세형이라든가, 신창원이라든가 그런 사람들을 얽어 넣는 거죠. 만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좀더 실감을 더해 줍니다. 時空(시공)을 무시해 버리는 수법을 쓰면 그게 더 재미있습니다. 전달도 빠르고요』
 
  ―「수호지」에서 주인공들을 캐릭터로 형상화하면서 제일 애착이 가는 주인공은 누구였습니까.
 
  『글쎄요. 주인공들이 다 개성이 있으니까, 누굴 찍으라면 할 수 없는데요. 굳이 찍으라면 「무송」이라든가 이런 사람이죠. 무송은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 때도 상당히 표현하기 좋은 인물이죠』
 
 
 
 
漢字 교육을 위한 만화책 작업 중

 
   高羽榮 화백이 「수호지」 완간 작업과 함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작업이 漢字 교육을 위한 만화책을 만드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도올 金容沃(김용옥) 등 漢字에 조예가 깊은 학자들을 만나 자문했다고 한다.
 
  ―漢字 교육 만화책은 어떻게 돼 가고 있습니까.
 
  『그게 우선 옛날 문교부에서 정한 1800字만이라도 소화시키려고 하는데, 일단 部首(부수) 214字만 샘플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다음 「가나다」순으로 하는데 「가」에서 國(나라 국)까지 또 한 권이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劉備(유비), 關羽(관우), 茂松(무송) 등 선생님이 그동안 만든 캐릭터들이 다 들어가는 건가요.
 
  『네, 제가 만든 수백 명의 캐릭터를 동원해 그리고 있어요. 웃으며 배우는 漢字가 되도록 만들고 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상당히 힘들군요』
 
  ―언제까지 완성할 계획입니까.
 
  『내년 신학기에 10권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건 이미 失機(실기)했습니다』
 
  ―漢字의 장점 중 하나가 造語(조어)능력이죠.
 
  『그렇죠. 우리의 문화형성 자체가 漢字에서 있었는데 漢字를 배격하고는 일이 안 되죠』
 
 
 
 『「高羽榮 三國志」의 「쪼다 유비」는 역설적 표현』
 
 
 
 
  高羽榮 화백은 올해 1월 「三國志」 無삭제 완전판을 내놓았다. 1979년에 첫 단행본이 나왔을 때 심의과정에서 폭력성과 선정성 등의 이유로 100여 페이지를 삭제당하기도 한 「高羽榮 三國志」를 無삭제로 복원한 것이다.
 
  ―「三國志」는 몇 번 읽으셨습니까.
 
  『7, 8회는 읽었다고 생각되는데. 어려서 읽은 것은 뭣 모르고 읽은 거고…』
 
  ―처음에 출간됐을 때 100페이지 정도 수정, 삭제되었는데 어떤 내용이 삭제된 겁니까.
 
  『그 당시 사회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유치했습니다. 지금 주간지나 스포츠지들 보면 좀 심하게 벗기기도 하고 그렇잖아요. 그 당시에는 상상도 못 했는데. 그때는 좀 세련되지 못한 부분이 있었죠. 「三國志」 소재가 전투장면이 많잖아요. 그래서 폭력 장면이 많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 장면들이 삭제된 거죠』
 
  高羽榮 화백은 금년 1월 출간한 「高羽榮 三國志」 머리말에서 「重傷(중상)을 입었던 자식이 치료를 받고 내 품으로 돌아온 기분」이라고 적고 있다.
 
  ―대장암 수술을 받은 후라서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드셨던 것 같은데요.
 
  『그렇죠.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번 重版(중판)이 돼서 나오는 동안에 제가 그것을 치료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마치 다친 자식을 앵벌이 시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진작 그걸 고쳐서 원상복귀할 생각을 못 했다는 것이 참 부끄러워요. 그래서 한때는 확 불을 질러 버릴까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요』
 
  ―劉備를 「쪼다(바보)」로 표현했던데 정말 劉備를 쪼다로 보십니까.
 
  『역설법이죠. 劉備는 무지하게 욕심꾸러기예요. 어디 가서도 고개를 팍팍 숙이는 놈이니깐』
 
  ―關羽를 가장 지혜롭고 용감하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것도 역설입니까.
 
  『그건 아니고요. 만화를 그리자면 中樞(중추)이야기를 놓치면 안 되죠. 眞骨(진골)은 언제나 박아 두어야 하죠. 아무리 우스개로 劉備를 쪼다로 그렸지만은. 裏面(이면)을 보면 劉備는 그야말로 집권욕으로 고개를 팍팍 숙였지만, 關羽는 진지한 사람이죠』
 
 
 
 만화는 糖衣錠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제 「삼국지」는 소주잔 기울이며 낄낄거리는 중에 나누는 대화 같은 내용』이라고 하셨는데 방대한 스케일의 역사를 너무 가볍게 다룬 것은 아니라고 보십니까.
 
  『예, 그런 면도 있죠. 헌데 심각하고 진지하게 다루자면 글을 써야죠. 제 「삼국지」의 主타깃은 젊은 청소년, 대학생들이 거든요. 거기에 맞추어야죠. 저는 糖衣錠(당의정)이란 말을 자주 해요. 만화는 그런 당의정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봐요』
 
  ―이번 「삼국지」 무삭제 완전판에는 만족하시나 보죠.
 
  『후회되는 부분도 있어요. 曹操(조조)가 赤壁大戰(적벽대전)에서 전투 이전의 어느 달밤에 굉장히 많은 名詩(명시)를 짓는 장면이 있어요. 제가 그 부분을 너무 간과하고 가볍게 넘겨 표현한 적이 있어요. 그 詩를 直譯(직역)을 하든 해석을 하든 다루어야 했었는데 안 했어요』
 
  ―어떤 면에서 후회가 되는 겁니까.
 
  『曹操란 사람의 인물을 나타내는 데 필요한 부분이죠. 曹操의 아버지를 비롯해 그 집안이 굉장한 문장가들이에요. 曹操의 집안과 개성을 잘 보여 줄 수 있는 건데 그걸 놓쳤어요』
 
  ―「三國志」를 일간스포츠에 연재할 때 「방통」의 죽음을 그린 날이 하필이면 朴正熙 대통령이 서거한 날이었다면서요.
 
  『1979년 10월26일자 신문인데 그림은 하루 전에 그렸죠. 봉황이 대통령 상징 그런 거잖아요. 봉황이 떨어지는 거 그리면서도 기분이 좀 그랬어요. 참 우연의 일치죠』
 
  ―작가들이 상상력의 한계에 도달했을 때 역사물을 쓴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역사물을 주로 많이 하시는데 특별한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처음에 일간스포츠에 만화를 연재할 때 「임꺽정」을 그렸어요. 1972년 1월2일부터 게재된 겁니다. 근데 그게 호응을 받았죠. 그러다 보니까 「水滸誌」로 이어지고 「三國志」로 이어지고 그렇게 된 거예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독자들이 좋아하니까 그렇게 된 측면이 강하죠』
 
  스포츠지 한 면 전체에 만화를 연재한 것은 高羽榮 화백이 최초였다.
 
  ―처음 연재할 때 반발이 심했다면서요.
 
  『스포츠지가 당시에는 천대를 받았죠. 구성원들도 종합지에 있다가 스포츠지로 발령이 나면 좌천됐다고 생각하는 풍토가 있었으니까요. 서자 같은 신문이었죠. 가뜩이나 그런 상황에서 극화를 한 면 전체에 넣는다고 하니까 편집국에서 막 싸움이 났었대요. 저는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안 그래도 멸시받는 신문에 만화까지 크게 넣어서 똥칠까지 하는구나 했다는 거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스포츠 신문은 그 덕을 많이 봤잖습니까.
 
  『효자 노릇을 했죠』
 
  ―발행 부수가 많이 늘었다죠.
 
  『그거 제가 제 입으로 이야기하기가 그렇네요. 분명한 것은 일간스포츠의 존재를 잘 몰랐는데 인지도가 많이 올라갔죠. 그 당시 제 체중이 꽤나 줄었습니다. 1973년 2월 말까지 1년2개월간 그렸어요』
 
  ―지금까지 집필한 만화가 몇 작품인지 기억하십니까.
 
  『기억 못 해요. 말하자면 10권으로 만든 「十八史略」이 있는가 하면 몇 페이지짜리 책도 있고, 그러니까 벽돌처럼 수를 셀 수가 없죠』
 
 
 
 「一枝梅」와 「十八史略」에 가장 애착이 간다
 
  ―그중에서 제일 애착이 가는 작품은 없습니까.
 
  『굳이 들자면 「一枝梅(일지매)」는 100% 제가 이야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애착이 가요. 연재를 한다고 약속은 했는데 관련자료가 없는 거예요. 문헌을 뒤지다가 「林慶業傳(임경업전)」에서 고작 찾아낸 것이 배경이 丙子胡亂(병자호란) 직전이라는 것뿐이었어요. 순전히 창작이었죠. 몇 년 뒤에 창작 고전으로 「흑두건」이라는 걸 그렸는데 안 되더라고요. 「一枝梅」에서 다 짜 먹어서(웃음).
 
  내 작품들은 대부분 신문 연재했던 건데요. 이것은 하루도 쉴 수가 없잖아요. 사람이라는 게 등산도 갈 수 있고, 낚시도 갔다가 그날 못 돌아올 수도 있고, 그걸 강판시간 맞추느라고 어떤 때는 개발새발 그린 적이 있어요. 급해서 그렇게 했지만 시간이 지나서도 책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때는 소름도 끼치고. 그야말로 독자에 대한 잘못이죠. 내 그림을 이렇게 마구잡이로 막 그린 게 후회가 되기도 하고, 하여튼 단 한 작품이라도 내가 기분 좋고 자랑스러운 게 없어요.
 
  그런데 「十八史略」이라는 거는 신문 연재도 안 했고, 처음부터 단행본으로 기획을 했어요. 그래서 그건 조금 낫죠. 시간에 쫓겨서 아무렇게나 그려서 넘기지는 않았으니까. 굳이 애착이 가는 작품을 꼽으라면 「一枝梅」 하고 「十八史略」이에요』
 
  「십팔사략」은 중국의 三皇五帝(삼황오제)부터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宋나라에 이르기까지 4000년간의 중국 역사를 만화로 그린 것이다. 온갖 인간군상들의 탐욕과 권력욕이 펼쳐지는 내용이다. 高羽榮 화백은 「십팔사략」을 그리기 위해서 1995년에 한 달 동안 중국 현지를 배낭여행했다. 『비행기 탑승거리를 포함해 3만 리는 다녔을 것』이라고 高화백은 기억한다. 그런 애착 때문일까. 高화백은 「十八史略」의 원판을 잃어버린 출판사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벌이고 있다.
 
  ―두산동아와의 소송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아직 진행 중이에요. 私的인 감정은 전혀 없어요. 이번에 아들 결혼할 때도 그쪽에 청첩장을 보냈어요. 누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감정이 있는 건 아니죠. 그리고 그걸 만드는 동안 편집부에 있는 사람들하고 얼마나 친해졌겠어요. 형님, 아우 했는데. 만나면 제가 사죄를 해요. 이런 일 야기시켜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만화라는 직종이 경시돼 온 것은 사실 아닙니까. 그 차원에서 소송을 하고 있는 거예요』
 
  ―원판 분실 사례가 많았습니까.
 
  『많지는 않지만 있었어요. 그런 경우 「아, 그까짓 것 다시 그리면 되지」 하는 선에서 해결이 됐어요. 저는 지금 살아 있는 만화가 가운데 나이 많은 사람 중 하나인데 뒤에 오는 後學(후학)들을 위해 뭔가 잣대를 하나 세워 놓고 가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에요. 두산동아 사람들이야 안됐죠. 내가 빌어 가면서 소송을 하고 있어요』
 
  ―顔面(안면)이 있다는 게 이 소송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군요.
 
  『네, 그래요』
 
 
 
 『술 못 마시니 사는 의미가 없어요』
 
   2시간30분 남짓 인터뷰가 이어지자 지루한 듯 高羽榮 화백이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인터뷰 시작 때의 잦았던 웃음이 뜸해질 무렵이었다. 간암 수술을 의식한 기자가 『피곤하시면 다음에 더 하자』고 하자, 그는 『괜찮다』면서 오피스텔 내에 있는 카페로 안내했다. 분위기를 바꾸고 싶은 눈치였다. 작지만 단단한 체구의 高화백이 먼저 카페로 들어섰다.
 
  잠시 어둑해지는 창 밖을 바라보던 高화백은 『이맘 때만 되면 술이 간절해진단 말야』라고 중얼거렸다. 기자가 『후배 화실에서 술 드시다가 난로에 데인 적도 있으시죠』라고 묻자, 『술 마시다가 데인 게 아니고 술에 취해서 자다가 난로에 데었지』라며 껄껄 웃었다.
 
  ―주량은 얼마나 됩니까.
 
  『대중 없죠. 소주로 하자면 3병은 먹어야 기분이 좋았죠. 1병은 반주로 먹었고』
 
  ―요즘은 술 안 드시죠.
 
  『肝 수술하기 전에는 좀 먹었어요. 맥주도 500cc 석 잔 정도 먹고, 청하도 한두 병 먹고 그랬어요. 의사가 먹지 말라고 했는데 먹다가 또 肝 수술을 받았잖아요. 물론 술 때문에 肝으로 전이된 건 아니에요. 암하고 술은 아무 관계가 없는데 아들이 정성으로 먹지 말라고 하니까, 그 정성에 내가 못 먹어요. 다음에 병원에 가면 의사한테 물어봐야겠어. 먹어도 되는지』
 
  ―정신적인 공포는 대장암 발견 때보다 이번이 더 심했겠습니다.
 
  그의 관심은 여전히 술에 가 있었다.
 
  『(웃음) 술을 못 먹으니까 사는 의미가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카페에서 술을 시키지 않았다.
 
  ―자주 만나는 친구들은 어떤 분들이십니까.
 
  『요즘 술을 안 먹으니까 친구가 와르르 떨어지는데요(웃음). 아무래도 만화가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 다음이 성당 친구들이 있고. 요즘 한 1년 동안은 거의 잘 안 보게 되네요. 그리고 친구들도 연락 안 하고 안 오는 게 물론 술을 나눌 수도 없지만은 「나 보면 술을 마시고 싶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도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감독으로의 外道
 
  高羽榮 화백은 변강쇠와 옹녀가 등장하는 자신의 만화 「가루지기전」을 영화로 만들 때 직접 메가폰을 잡기도 했다. 그는 만화가협회 회장, 시사만평가 등과 함께 영화감독을 했던 일을 자신의 인생에서 3大 실패로 규정한다.
 
  ―영화감독은 본인이 원해서 한 겁니까.
 
  『아니에요. 처음에는 영화 제작사에서 나한테 「가루지기전」 원작을 사러 왔어요. 「한국 고전문학 중에 하나니까 내가 원작을 팔 수 있는 게 아니다. 알아서 해도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내가 그린 만화를 원작으로 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동안 모아 놓은 「가루지기전」 스크랩을 빌려 주었는데 제작자가 저한테 직접 감독을 맡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온 거예요.
 
  당연히 못 한다고 했죠. 한 달 동안 제가 피해다녔어요. 영화는 영화대로 뚜렷한 장르가 있는 건데 영화 공부를 한 번도 안 한 사람이 어떻게 영화감독을 하느냐면서 거절을 했지요. 그런데 하도 끈질기게 맡아 달라고 하는 바람에 그만…』
 
  ―흥행에는 성공을 못 했죠.
 
  『만원사례도 몇 번 했었죠. 그쪽에서는 좋아했어요. 적자는 안 봤다고 좋아했죠. 그런데 만들어 놓고 보니까 제가 봐도 이거는 아니거든요(웃음)』
 
  ―그 이후로 영화감독할 생각은 안 하셨나요.
 
  『「일지매」를 한번 하려고 했는데 안 됐죠』
 
  ―영화가 만화를 그리는 데 어떤 도움을 준 것 같습니까.
 
  『큰 도움을 주었을걸요. 같은 소재를 풀어 나가는 데도 그야말로 흐름이란 건 똑같은데 제가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클로즈업 방법, 파노라마 방식 등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어요』
 
  高羽榮 화백은 한국여행인클럽 회장을 지냈다. 여행 외에도 그는 다양한 취미활동을 즐겼다. 암벽 등반, 스킨스쿠버, 권투, 낚시 등 그의 취미는 다양하다. 골프 실력도 「싱글 수준」이다.
 
  ―여행인클럽 회장도 하셨는데 몇 개국을 다니셨습니까.
 
  『글쎄요. 아직 못 가본 데가 너무 많아서… 몇 나라에 갔다는 것보다 저는 일단 관광상품에 없는 루트를 찾아가는 걸 좋아했어요. 사하라 사막도 종단해 보고, 알래스카 꼭대기도 가 보고… 힘든 곳을 많이 찾아다녔어요. 여행을 다니면 인생에 기름기가 돌죠』
 
  ―여행이 만화를 그리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見聞(견문)을 넓히고 오면 만화 그리고 줄거리 만드는 데 그렇게 좋을 수 없죠. 하여튼 축적을 시켜 놔야잖아요. 저는 만화가로선 縱(종)으로 깊은 學識(학식)보다는 橫(횡)으로 퍼져 있는 雜學(잡학)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高화백은 한 인터뷰에서 꼭 해보고 싶은 일로 번지점프를 꼽은 적이 있다.
 
  ―번지점프는 해보셨습니까.
 
  『(웃음) 아직 못 했어요(웃음). 한번 꼭 해야지요』
 
  ―고등학교 때 권투를 하셨죠.
 
  『네, 플라이급으로 뛰었죠. 그때는 죽자사자 왜 했는지 잘 모르겠는데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더 열심히 했어요. 그냥 좋습디다』
 
  ―만화를 동시에 7개 매체에 연재한 적도 있으시죠.
 
  『그보다 더 한 적도 있었을 겁니다. 기억이 안 나서 그렇지』
 
  ―체력적으로 그게 가능했습니까. 대부분 마감이 비슷한 시간에 몰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때는 됐어요. 하루에 4시간 정도 자고 나머지 시간에는 작업만 했으니까요. 그런데 그게 오래는 못 가죠』
 
  ―몇 년 동안 그렇게 일했습니까.
 
  『한 2∼3년 했더니, 그때는 담배를 앉은 자리에서 꽁초까지 서너 갑을 피웠거든요. 폐에 구멍이 뻥 뚫렸어요. 다행히 남에게 옮기는 그런 병은 아니었지만 폐를 한 1년 고친 적이 있죠. 각혈도 하고. 그전까지는 몸이 지칠 줄 모르고 그랬었는데…. 지금도 폐를 찍으면 응고된 자국이 있어요』
 
  ―결핵을 앓았다는 얘기가 그 얘기군요.
 
  『그렇죠. 급성결핵이었죠』
 
  高羽榮 화백과 기자는 그날 끝내 술을 마시지 못했다. 우리는 다음날 또 만나기로 했다.
 
 
 
 제자를 두지 않는다
 
  다음날인 10월27일 오후 다시 高羽榮화백의 오피스텔에서 만났다. 전날과 달리 많이 피곤한 모습이었다. 전날의 4시간여에 걸친 긴 인터뷰가 무리를 준 모양이었다. 그래도 얼굴에는 여전히 장난기가 가득했고 예의 웃음도 여전했다.
 
  ―만화계에는 徒弟(도제)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런 길을 안 밟았는데 활동하는 데 문제는 없었습니까.
 
  『좋게 이야기하면 스승 밑에서 사사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만화계에서는 그런 측면보다는 만화를 빨리빨리 다량 생산하고 싶은데 손이 모자라니까 문하생처럼 조수를 쓰는 거죠. 그러다 보면 똑같이 그리게 되니까 닮아 가죠. 저 같은 경우는 어떤 분 밑에서 작업을 하지 않고 처음부터 혼자 했으니까 스승이 없는 셈이지요』
 
  ―우리 만화들이 일본 만화와 비슷한 게 많았잖습니까. 그런 徒弟 제도가 그렇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까.
 
  『徒弟 제도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에요. 아무래도 우리가 일본보다 뒤졌잖아요. 트레이싱 페이퍼(tracing paper)라고 비치는 종이가 있어요. 과거에 그것을 이용해서 일본 만화를 복사해서 출판한 사람이 한두 분이 아니에요. 일본 만화에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해적질들을 했어요. 풍토가 그랬어요』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안 되죠. 로열티 주고 해야죠』
 
  ―徒弟 제도는 지금도 유지가 되고 있죠.
 
  『아, 있죠. 만화 제작이라는 게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저처럼 手製品(수제품) 깎듯이 혼자서 줄거리도 쓰고 그림도 혼자 하는 방법이 있고, 글과 원작 따로, 연필 데생 따로 이렇게 기업화해서 하는 방법이 있어요.
 
  그거는 기업이죠. 많이 해서 수익을 분산시켜서 나누어 먹어야 하니까. 그냥 기계적으로 많이 만들어야죠. 쉽게 말해서 이현세, 박봉성, 허영만 이런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스타일이고요. 박수동, 신문수, 저 같은 경우는 혼자 하는 경우죠. 서로가 一長一短(일장일단)이 있죠』
 
  ―徒弟 시스템도 바람직한 측면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아, 그럼요』
 
  ―그러면 그런 시스템으로 일하는 분들은 자연스럽게 후계자가 양성이 되는데, 선생님 같은 경우는 후계자 양성을 어떻게 합니까.
 
  『저는 그 대목이 걸려요. 만화는 후계자를 두어서 계속한다는 게 불가능한 것 같아요. 만화는 그림만 그려서 되는 게 절대 아니거든요. 그림 표현은 50%고 50%는 창의성이에요. 生來的(생래적)인 자질이 있어야 되고, 그것을 대장간 불 달궈서 쇠 두들기듯 가르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후계자를 양성한다는 말이 싫습니다. 그럴 생각도 없고 그걸 바람직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내 만화를 불지르고 싶은 생각이 가끔 든다』
 
  ―자기 흔적을 세상에 남기고 싶은 게 보통 사람들 마음 아닌가요.
 
  『저는 제 만화를 다 불질러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껴요.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는데 이게 무슨 가죽의 가치나 있나, 하는 생각도 자꾸 나고, 부끄럽기만 하고 그래요』
 
  ―만화가 高羽榮에게 만화는 대체 뭡니까.
 
  『「이것이 진리이다」를 전해 주는 예술 장르는 다양합니다. 소설가에겐 소설이고, 음악가에는 음악이고, 詩人에게는 詩죠. 저에게는 만화죠. 「만화는 다른 장르와 달라서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겉에 糖分(당분)을 바른 재미난 그런 이야기다」라고 늘 그렇게 생각합니다』
 
  ―高羽榮 만화를 평가하는 데 빠지지 않는 말이 풍자와 해학입니다. 생활 속에서도 이런 풍자와 해학을 즐기십니까.
 
  『아니에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저는 작업할 때 외에는 진지하고 착하게 평범하게 산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떤 분은 만화의 장점으로 그림과 글을 동시에 봄으로 해서 이해 속도가 빠르다는 점을 드는 분이 있습니다. 만화라는 게 인간을 교양시킬 때 어떤 장점이 있다고 보십니까.
 
  『제 경험을 말씀드리죠.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일본 교육을 받다가 귀국했고, 2학년 때는 교통사고를 당해 오랫동안 누워 있었습니다. 3학년 2학기부터 우리나라 교육을 받은 셈이라 언어와 문자에 한참 뒤졌어요. 그때 뒤진 것을 만화로 쫓아갔거든요.
 
  그래서 저는 만화의 위력을 압니다. 제일 빨리 언어와 문자를 배우는 것이 만화라고 생각합니다. 교과서를 만화로 하면 다소 품위는 없지만 교육상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아닌 게 아니라 미국 교과서 보면 그림이 참 많아요. 전달 방법이 제일 빠르죠. 만화는 연속 동작까지 표현할 수 있잖아요』
 
 
 
 『만화로 자서전을 쓰고 싶다』
 
  ―李賢世(이현세)씨의 만화 「천국의 신화」가 음란물판정을 받고 5년 동안 법정 공방을 벌이다가 금년 1월에야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같은 만화가로서 어떻게 지켜보셨습니까.
 
  『그게 남의 일이 아니죠. 가장 큰 이유는 만화가 아직 우습게 보였던 거죠. 그런데 그렇게 이슈를 일으킨 것이 의미가 있다고 봐요. 그런 사건이 없었으면 그대로 답보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했겠지요. 당사자는 억울해서 발을 동동 굴렀겠지만 그게 전부 만화가 발전해 나가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李賢世씨가 애를 썼어요』
 
  ―한동안 문화 예술에 대한 정치권의 관심이 높지 않았습니까. 정치 입문 권유를 받은 적은 없습니까.
 
  『그런 것도 없었지만 저는 정말 정치에 관심이 없어요. 저는 지금 만화가협회 회장을 했던 것도 후회하고 있는걸요』
 
  ―만화가협회 회장과 정치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협회를 잘 이끌어 가려면 정치력이 있어야 돼요. 만화쟁이라면 친구끼리 중앙청 앞에서 술 먹고 낄낄거리는 게 좋은데, 누구는 정회원이고 아니고 기수가 어떻고 따져야 하는 게 체질에 안 맞았어요』
 
  ―정치를 싫어해도 정치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게 현실 아닙니까.
 
  『안 보는 게 좋겠어요. 그런데 자꾸 갈등을 느끼죠. 여기 이 나라에 몸담고 살면서 나도 국가의 일원인데. 막 모른다고만 하는 것도 비겁하고 그래요. 그래도 저는 정치는 체질상 싫어요』
 
  마지막으로 高羽榮 화백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서양 쪽의 민화나 전설들이 아름다운 게 많잖아요. 그걸 제 나름대로 그린 게 있어요. 그런 여러 작품들을 복원하고 싶고, 또 「수호지」 한 세 권 더 그려서 끝내야 될 거고, 그리고 사람이 훌륭하든 훌륭하지 않든, 성공했든 안 했든 自敍傳(자서전)을 만들면 좋지 않습니까.
 
  저는 그것을 劇畵(극화)로 해보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해보지 않았다는 매력도 있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뒤에 오는 만화가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다고 봐요. 글로 쓴 自敍傳보다 결코 품위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한번 보여 주고 싶습니다』
 
  인터뷰가 끝난 후 악수를 나누며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다음에는 꼭 술 한잔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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