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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논객 임명묵의 ‘역사로 세계 읽기’ ⑥ 제3세계 냉전과 ‘글로벌 사우스’

‘新냉전’ 시대에 되살아나는 ‘제3세계 냉전’

글 : 임명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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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틴·시진핑, ‘신식민주의·패권주의’가 시대적 흐름에 어긋난다며 서구 비판
⊙ 서아프리카 국가 신정부들, 프랑스 몰아내며 친러, 친중으로 기울고 있어
⊙ 독자적인 발전 모델 가진 한국, ‘글로벌 사우스’에 접근 가능
⊙ 냉전 시대, 미소 냉전뿐 아니라, 제3세계에서의 냉전, 중소 냉전도 진행
⊙ 중국과 소련, 서구로부터 독립한 아시아·아프리카 제3세계 국가들 경쟁적으로 지원
⊙ 소련의 제3세계 혁명 지원은 1980년대 ‘제2차 냉전’ 촉발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 저서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K를 생각한다》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공산당 서기장은 지난 5월 16일 정상회담에서 서구를 겨냥해 신식민주의·패권주의라고 비난했다. 사진=AP/뉴시스
  1989년, 동베를린의 시민들이 그들을 가두고 있던 장벽을 무너뜨리면서 미국과 소련이 40년 이상 쟁투해온 냉전(冷戰)이 끝났다. 미소(美蘇) 양대 초강대국이 수만 발의 핵무기를 쌓아놓고 대치하며, 세계 각지에서 패권(覇權)을 둘러싸고 쟁패를 벌인 공포의 시대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자유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에 환호하며 사람들은 앞으로 분쟁이 없는 평화의 시대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탈(脫)냉전 시대의 서막이었다.
 
  하지만 탈냉전의 시대는 근 몇 년 사이에 이미 저문 듯하다. 러시아가 서방을 적대하고, 중국은 미국과 경쟁을 시작하며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거대한 두 제국이 힘을 합쳤다. 이 협력체에 중동의 대국 이란까지 합류했다. 중국·러시아·이란과 서방 세계가 맞닿는 단층선(斷層線)에는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유럽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중동에서는 이란과 이스라엘이 공격을 주고받았다. 동아시아에서 현재 미국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중국은 대만을 압박하고 있다. 미국의 마이크 폼페이오 전 국무부 장관이 우크라이나·이스라엘·대만을 ‘자유의 등대’로 간주하며 수호해야 한다고 발언한 일은 다시금 위협받고 있는 미국의 패권과 서방 세계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상징과도 같았다. 이에 혹자들은 이제 탈냉전이 끝나고, 서방 세계와 대륙 권위주의 세계 간의 ‘신(新)냉전’이 도래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새로운 냉전사’
 
  하지만 현재의 지정학적 국면을 신냉전이라고 부르기는 아직은 어렵다. 미소 냉전에서 나타났던 여러 요소가 지금의 지정학적 대립에서는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소 냉전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념에 따른 진영의 결속’이다. 미국은 자유주의를, 소련은 공산주의를 내걸고 자신들의 이념이 인류의 정의롭고 올바른 발전 방향임을 역설했으며, 각자의 사회 모델을 채택한 진영끼리 뭉치며 대치를 이어갔다. 반면 현재의 서방 진영과 유라시아 진영 사이에서는 명시적인 이념 대립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물론 서방 세계는 자유주의 이념을 여전히 강력하게 내세우고 있고, 서방 진영의 국가들도 이념에 따라 결속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중국·이란은 자국의 문명적·민족적 사명감을 내세운다는 점을 빼면 동질적인 이념을 공유하고 있지 않고, 이념의 언어로 자신들이 인류의 발전 방향을 대표한다고 말하지도 않고 있다.
 
  그렇다면 탈냉전이 끝난 지금의 시대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에 대해서는 오히려 지나간 시대인 ‘냉전’을 다른 각도로 보는 것이 실마리를 제공할 것 같다.
 

  냉전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은 앞서 언급했듯 미소 초강대국의 진영 대치를 강조하는 것이다. 자유 진영의 정통 서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동유럽을 공산화하고 세계를 적화(赤化)시키고자 했던 스탈린(1878~1953년)의 야욕에 미국이 대응하는 과정에서 냉전이 펼쳐졌음을 강조한다. 소련이 각국의 공산당과 혁명 세력을 움직이며 펼치는 공세를 미국은 꾸준한 억제를 통해 막아왔고, 그사이에 소련은 공산주의 자체의 모순으로 인하여 무너져 내렸다는 서사(敍事)다. 이 서사에서는 특히 미국과 소련의 주된 대치 장소였던 유럽이 강조된다. 실제로도 냉전은 스탈린이 동유럽을 적화하면서 시작되었고, 동유럽 인민들이 공산주의 독재와 경제적 무능에 반발하며 동구 혁명을 일으키며 끝났다.
 
  하지만 냉전 종식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며, 역사학자들은 냉전을 더 넓은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최근 학자들은 냉전이 사회·문화·일상의 영역에서 어떻게 사람들을 형성했는지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동시에 제3세계를 유럽 못지않은 냉전의 주된 무대로 보기 시작했다. 이러한 역사학계의 흐름을 일컬어 ‘새로운 냉전사(New Cold War history)’라고 하기도 한다. 새로운 냉전사에서 특히 중요한 진전은 동구권 내부의 실제 사정을 상세히 알 수 있게 된 데 있었다. 그 이전의 냉전 연구는 미국의 입장에서 공산 세력에 어떻게 맞설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냉전의 맞수였던 소련의 현실은 자료 접근이 어려운 관계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제 학자들이 확보할 수 있게 된 소련 내부 문서들은 공산권이 냉전에 어떻게 임했는지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미소는 동등한 초강대국이 아니었다
 
  냉전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미국과 소련이 결코 동등한 초강대국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냉전 시대의 지도만 놓고 보면, 소련·동유럽·중국이 거대하게 칠해져 있어 공산권이 마치 미국에 맞서는 ‘붉은 세계’ 같기는 하다. 하지만 소련의 경제 규모는 아무리 높게 쳐줘도 미국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영국·프랑스·서독·일본 같은 미국의 동맹국들은 그 이전 세계를 주름잡았던 핵심 강대국이었던 반면 소련의 동맹국들은 후발국과 중견국이 전부였다. 애당초 시작부터 ‘게임이 안 되는’ 싸움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소련 경제도 미국과 서방 세계에 의존적이었다. 소련은 민간 영역의 핵심 기술과 자본재를 발전한 선진 산업 세계에서 수입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수입 대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철광석·목재, 나중에는 석유와 천연가스를 판매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렇게 압도적인 초강대국인 미국과 동등한 수준으로 군비 경쟁까지 해야 했으니, 소련 입장에서는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그래서 냉전 시기 크렘린 내부의 셈법은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때가 많았다. 자신들이 세계 혁명을 이끌고 있다고 말은 하고 있고, 미국과 동등한 초강대국으로 인정을 받고 싶기도 했지만, 동시에 크렘린은 자신들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소련의 대(對)서방 유화책은 자신들 스스로가 약세임을 인식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스탈린 사후(死後) 소련의 최고 지도자가 된 흐루쇼프(1894~1971년)는 ‘평화공존’을 제시했고, 군비 지출을 줄이고 경제 개발에 자원을 집중하기를 원했다. 그 후임자인 브레즈네프(1906~1982년) 또한 미국의 닉슨 대통령(1913~1994년)과 적극적인 데탕트를 모색하면서, 소련의 에너지 자원을 판매하고 서방으로부터 기술과 식량을 사 오며 소련 경제의 안정을 꾀했다. 한편으로 소련은 KGB를 통해 치열한 첩보전을 펼치면서도, 서유럽의 공산당들에 선거를 통해 평화롭게 집권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라는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제3세계 냉전’의 시작
 
  그러나 정말로 소련이 대서방 유화책만을 펼쳤더라면 냉전은 그렇게까지 치열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럽 바깥에서 소련은 전혀 다른 기회를 보았다. 미국과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의 핵심 승전국으로 떠오르며,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한 유럽 제국주의 질서를 끝내기로 합의했다.
 
  문제는 이 과정이 마냥 순탄치는 않았다는 데 있었다. 프랑스나 네덜란드는 식민지를 해방하기를 거부했으며, 영국도 갑작스러운 해체보다는 질서 있는 후퇴를 원했다. 이 과정에서 식민지 독립 세력이 급진화되자, 미국은 이들이 공산주의에 경도(傾倒)되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며 영국과 보조를 맞추고 식민지들의 질서 있는 독립을 지지했다. 반대로 소련은 즉각적인 식민지 해방을 이야기하며 식민지의 좌익 세력을 지원했다. 탈식민 세계의 많은 민족주의자들은 이 모습을 보며 소련에 호감을 갖게 된다.
 
  소련 또한 독립해나가는 식민지들이 소련에 우호적 제스처를 취하는 것을 보며 희망을 가졌다. 막대한 잠재력을 지닌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들과 연합할 수 있다면, 소련 블록을 더욱 키워 서방 세력에 맞설 수 있다는 전망이 부상했다. 게다가, 소련 자신부터가 낙후한 국가의 현대화를 이룩한 살아 있는 사례였다. 소련 경제가 아직은 서방에 뒤떨어져 있지만, 소련식 개발 모델은 탈식민 국가들에서 더욱 큰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기대도 생겼다.
 
  1955년,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아시아·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들이 모여 ‘제3세계’를 논하면서, 서구 제국주의에 핍박받던 ‘나머지 세계’가 새롭게 떠오른다는 장밋빛 전망이 더욱 밝아왔다. 미국도 이에 질세라 신생 독립국에 대규모 경제 원조를 쏟아붓고 반공 지도자를 육성하는 현대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제3세계 냉전이 시작된 것이다.
 
 
  중소 냉전
 
1957년 베이징에서 만난 마오쩌둥과 소련의 흐루쇼프. 이 무렵부터 중소이념 분쟁이 시작됐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그러나 소련의 셈법은 아시아에서 새로운 플레이어가 등장하면서 단단히 꼬이고 말았다. 1949년 혁명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년)이었다.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를 둘러싸고 소련과 마찰을 빚기 시작한 마오쩌둥은 곧이어 소련을 수정주의 세력이라고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세계정세를 바라보는 모스크바와 베이징의 인식 차이도 크게 작용했다. 정통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한 소련은 서방과의 긴장을 낮추고 군비를 축소하고, 대신에 사회주의적 경제 발전을 계속 실험하고자 했다. 하지만 제국주의 세력의 일소를 얘기하며 중국을 통일한 마오쩌둥은 세계적인 반제국주의 혁명에 중단이란 있을 수 없다며 소련의 온건 정책을 비판했다. 마오쩌둥은 소련을 미국과 다를 바 없는 패권국이며, 구호만 사회주의지 행동은 제국주의나 다름없는 ‘사회제국주의’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이제 세계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서 진정한 지도국은 소련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선언이었다. 중국은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 등 소련에 우호적이지 않은 다른 공산 국가들에 접근하였고, 제3세계 혁명 세력에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고, 농촌이 다수인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게릴라 위주의 마오주의 전술이 가장 적합하다고 조언했다.
 
  이로 인하여 공산권 내부에서 소련과 중국 간의 또 다른 냉전이 펼쳐졌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었고, 스탈린 시기 거대한 산업 국가로 도약한 소련이 마오쩌둥의 도발을 묵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소련을 바라보는 다른 국가들의 공산당이나 제3세계의 혁명 세력들이 소련 대신에 더 세계 혁명에 매진하는 것 같은 중국을 향한다면, 소련의 위신은 그야말로 바닥에 떨어질 수 있었다. 소련은 대체로 제3세계 국가들의 사회주의 경제 건설을 지도하며, 서방과 긴장을 높이지 않는 외교 방침을 취하고자 했다. 하지만 중국에 맞서기 위해서는 더 적극적으로 사회주의 무장 세력을 지원하고 그들을 계속해서 소련의 우산 아래에 두어야 했다.
 
  이는 종종 미국과의 치명적인 갈등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미국의 ‘앞마당’인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1926~2016년)가 주도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1961년 미국이 이를 전복하려고 하자 카스트로는 믿을 수 있는 안전 보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당시 흐루쇼프는 이 요청에 응답하며 아예 소련의 핵무기를 배치하는 초강경한 수를 두었다. 몇몇 학자들은 갑작스러운 흐루쇼프의 핵 배치가 중국을 의식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추측한다. 마오쩌둥의 도전이 거세지고 있을 무렵, 쿠바 혁명을 지켜낸다는 의지를 확고히 보여줄 때 소련이 세계 혁명의 지도국이라는 위신이 바로 선다고 흐루쇼프가 판단했다는 것이다.
 
 
  쿠바 핵 위기와 베트남 전쟁
 
쿠바 위기 당시 소련 선박을 감시하는 미국 정찰기. 쿠바 위기는 냉전이 제3세계로 번지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그러나 그 결과는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 직전까지 갔던 초유의 핵 위기, 쿠바 미사일 위기였다. 흐루쇼프는 이 사태로 공산당 내에서 신임을 잃어 실각하게 된다. 중국 또한 쿠바에서 발을 뺀 소련을 겁쟁이라고 조롱했다.
 
  물론 그렇다고 소련이 제3세계 혁명가들을 지원하는 일을 멈추지는 않았다.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와 같은 깜짝 놀랄 만한 모험을 하지는 않았지만, 제3세계의 주도권 장악에 있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브레즈네프는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1901~1970년)가 중국에 다가가는 것을 막고자 수카르노의 말레이시아 비난을 내키지 않았음에도 지지했고, 갈수록 반서방 구호를 드높이는 이집트의 나세르에게 호감을 얻고자 그동안 자제하던 이스라엘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베트남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전장이었다. 중국과의 문화적 친연성과 지리적 인접성으로 본래 북베트남은 중국에 기울고 있었지만, 브레즈네프는 북베트남에 군사 및 경제 원조를 크게 확대하며 베트남을 모스크바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노력했다. 1968년의 학생 시위대를 포함하여 전 세계 좌파 진영에서 반제국주의의 상징으로 떠오른 베트남의 위상을 생각하면, 소련에 있어서 베트남은 놓칠 수 없는 국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때도 소련은 북베트남을 지원하면서도 동시에 미국과 우호적 관계를 어떻게든 확보하려는 모순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반둥 세대’의 실패
 
  그럼에도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중국·소련과 긴장을 완화하는 데탕트에 나섰다. 베트남 전쟁의 수렁 때문에 미국의 국내 경제도 큰 타격을 받았고, 사회적 저항도 거세지고 있었다. 닉슨의 책사(策士)인 헨리 키신저(1923~2013년)는 유럽에서 소련의 세력권을 인정하고, 철의 장막을 가로지르는 무역을 확대하는 등의 유화책을 펼치는 대신에, 그 이외 지역에서는 공산주의 확산을 철저히 틀어막는 전략을 취했다. 1973년 칠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를 축출하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정권의 수립을 지원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하지만 제3세계의 사건들은 데탕트를 지속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1970년대가 되었을 때, 이미 1950년대와 1960년대 등장한 신생 독립국의 지도자들(반둥 세대)은 대부분 곤경에 처해 있었다. 한국의 박정희(朴正熙·1917~1979년) 정부나 대만의 장제스(蔣介石·1887~1975년) 정부 같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신생 개발도상국들은 선진국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개발을 충분히 이뤄내지 못했고, 농촌 토지 문제나 도시 빈민 문제는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제3세계 노선을 천명한 지도자들은 쓰디쓴 맛을 보아야만 했다. 1965년에는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가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1967년에 이집트의 나세르는 이스라엘에 6일 만에 치욕적으로 패하면서 아랍 세계에서 모든 위신을 상실했다. 이렇게 극적으로 몰락하지는 않더라도, 미국과 소련이 지원하는 다양한 제3세계 국가들이 받아 든 성적표는 좋지 못했다.
 
  반둥 세대의 실패는 1970년대 제3세계의 급진화를 초래했다. 많은 민족주의 세력이 친소(親蘇) 혹은 친중(親中)으로 경도되게 되었다. 제3세계를 둘러싼 미국·소련·중국 간의 경쟁이 갈수록 격렬해진다는 의미였다.
 
  이 시기 아프리카의 두 국가에서 정치적 격변이 발생하면서 소련이 다시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의 권위주의 정부가 시민 혁명으로 무너지면서, 아직도 유지되고 있던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앙골라가 독립했다. 하지만 앙골라의 독립은 친소, 친미, 친중 게릴라들이 경쟁하는 내전으로 이어졌고, 여기에 인접국까지 개입하면서 국제전의 양상까지 띠기 시작했다.
 
  대륙 반대편의 에티오피아에서는 공산주의 군부인 데르그가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를 폐위하고 에티오피아를 공산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인접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의 분쟁이 격해지자 양국은 전쟁에 돌입했다. 소련은 혁명을 지키고자 대규모 군사 장비를 지원하고 쿠바군까지 투입해 앙골라와 에티오피아의 적화를 성공시켰다.
 
 
  ‘제2차 냉전’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제2차 냉전과 냉전 종말로 이어졌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안 그래도 데탕트에 호의적이지 않던 카터(1924~) 행정부가 들어서 있던 상태에서, 소련의 제3세계 공세는 남아 있던 미국의 인내심을 바닥냈다. 키신저의 후임은 인권 원칙의 보편적 적용을 근거로 소련을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였다.
 
  하지만 제3세계에서 주도권을 잃으면 안 된다는 소련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의 공산 정권을 지키고자 대대적 군사 개입을 또 시작했다. 이로써 데탕트의 마지막 조각마저 사라졌다. 소련과 중국 사이의 관계도 이미 최악으로 치달은 지 오래라, 미국과 중국이 오히려 군사적 협력을 하면서 반소 세력에 무장 지원을 해주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1980년대 초반은 ‘2차 냉전’이라 불릴 정도로 미소 양국 긴장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이 손을 잡은 것처럼,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냉전의 기본적 구도는 이 시기부터 빠르게 무너져갔다.
 
  가장 큰 원인은 공산주의 경제의 실패에 있었다. 제3세계를 근대화하겠다는 소련의 야심은 오히려 에티오피아의 사례처럼 내전과 파괴만 남길 때가 많았고, 심지어 소련과 동구권 경제 자체도 침체를 면치 못했다.
 
  반면 중국은 마오쩌둥에서 덩샤오핑(1904~1997년)으로 지도자가 교체되면서, 외부 혁명 지원을 멈추고 중국 자체의 경제 발전에 매진하는 개혁·개방에 들어갔다. 이 개혁·개방에 필수적이었던 것이 바로 미국·일본과의 경제 교류였다.
 
  한편 소련도 중국을 지켜보며 경제를 개선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기울였으나,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에서 고르바초프(1931~2022년)가 공산주의를 포기하려 하자 제국 전체가 무너졌다. 그렇게 냉전은 끝이 났고, 사회주의는 말 그대로 ‘유령’이 되었다.
 
 
  ‘글로벌 사우스’
 
  이미 서두에서 과거의 냉전과 비교했을 때, 오늘날의 국제정세는 이념에 따른 진영이 부재(不在)하기 때문에 신냉전이라 부르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냉전, 특히 제3세계 냉전이 지금의 지정학적 격변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선 제3세계 냉전을 통해 사회주의의 한계를 인식한 비서구, 혹은 반서구 국가들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국제무역에 참여하면서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오늘날 중국은 과거 소련을 능가하는 경제적 힘을 자랑하고 있고, 거대한 중국 시장은 중국이 다른 나라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을 크게 늘렸다. 에너지와 식량을 바탕으로 경제 제재에도 불구하고 국제무역에서 존재감을 여전히 발휘하는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중국과 러시아는 대외관계에 있어서 이전에 비해 훨씬 이념을 덜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고 대신 무역의 심화를 최우선으로 추구하고 있다. 사회주의의 한계와 신생 독립국의 낙후함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대응이 어렵지 않았던 냉전 시대에 비해 게임의 규칙이 훨씬 더 복잡해진 것이다.
 

  한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사회주의와 달리, 제3세계 냉전을 특징지었던 반제국주의 수사는 최근 국제무대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다. ‘제3세계’라는 말은 이제 새로 부상하는 개도국을 일컫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라는 용어로 대체되었다.
 
  푸틴과 시진핑(習近平)은 5월 16일 발표한 공동 성명에서 서구를 겨냥해 ‘신식민주의와 패권주의’가 시대적 흐름에 어긋난다며 비판했다. 최근 서아프리카에서 프랑스를 몰아내며 친러, 친중으로 기울고 있는 신정권들 역시 ‘신식민주의’에 반대하는 공동 대응을 하겠다는 움직임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 역시 소련과 중국이 아프리카 혁명 세력을 지원한 제3세계 냉전의 역사와 맞닿아 있는 흐름이다.
 
  서구 세계는 자신들을 자유 진영으로, 중국·러시아·이란을 인권에 반하는 독재 체제로 규정한다면, 반서방 세계는 반대로 서구를 인권을 앞세우는 신식민주의 세력으로, 자신들은 국가 주권을 최대한 존중하는 반제국주의 세력으로 정의하며 맞서는 모양새다. 그리고 현재 구도는 서구 세계에 마냥 유리한 것은 아니다. 서구 내부에서는 좌파의 급진적 자유와 우파의 고전적 자유를 둘러싼 이념 갈등이 극심해진 상황이고, 자유와 인권 가치는 서구 바깥에서 점차 호소력을 잃고 있다. 아랍의 봄 당시 성급히 민주주의를 도입한 나라들이 혼란을 겪은 반면, 인도·인도네시아·방글라데시에서는 경제성장과 안정을 중시하는 ‘스트롱맨’이 큰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한국 모델
 
6월 4~5일 한–아프리카정상회의가 열렸다. 한국의 발전 경험은 ‘글로벌 사우스’와 협력하는 데 좋은 자산이다. 사진=대통령실
  따라서 서구는 앞으로 내부에서는 자신들의 핵심 정체성(正體性)인 ‘자유’가 무엇인지 새로운 합의를 보아야 하고, 외부에서는 어떻게 글로벌 사우스에서 실제 작동 가능한 개발 모델을 만들어내는지, 무역 관계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어떻게 압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특히 후자와 관련해서 한국의 역할은 매우 크다. 한국은 구 식민지 중에서 기록적인 발전을 이룬 나라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한국의 현실에 입각한 자주적인 발전을 추구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한국이 독자적인 개발 모델을 보유한 것은 물론이고 제국주의의 원죄 없이 글로벌 사우스에 다가갈 수 있다는 뜻이다. 성장하는 개도국에서는 여전히 한국의 발전 모델에 대한 관심이 매우 크다. 실제로 1980년대 냉전 종식에 기여한 것 중 하나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국의 눈부신 발전상이기도 했다. 이런 차원에서 5개년 계획과 새마을운동을 비롯한 한국 경제 개발의 역사를 오늘의 실정에 맞게 다시 브랜드화하여 세계에 다가가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한국이 글로벌 사우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제3세계 냉전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그 역사를 다시 발굴해야만 한다. 중국과 러시아가 제3세계 냉전의 역사를 새롭게 되살려 오늘날 글로벌 사우스에 접근하듯이 말이다.
 
  국군이 참전했던 베트남은 물론이고, 아프리카의 가봉과 같은 먼 나라에서도 남북한은 제3세계 국가들에 다가가 어느 쪽이 더 우수하고 정의로운 체제인지를 홍보하는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그 당시 한국이 반공과 자주적 발전을 매개로 제3세계와 쌓은 우정의 역사를 다시 되살린다면, 오늘날 한국과 글로벌 사우스 사이에 새로운 우애 협력의 다리를 놓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북한의 제3세계 개입을 다룬 연구서인 《총, 게릴라, 위대한 지도자》라는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대한민국과 제3세계 냉전을 다룬 훌륭한 연구서들도 출간되어 한국 외교의 지적(知的) 인프라가 되어주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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