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캠퍼스에서 인문학이 퇴장한지 오래다. 학과 명칭은 사라지거나 통합됐고, 전공 강의는 ‘수요 부족’을 이유로 폐강된다.

인문대 건물의 강의실은 비어가고, 그 자리를 데이터·AI·반도체·바이오가 채운다. 철학과, 사학과, 국문과는 ‘취업과 무관한 학문’이 되었다. 학생들은 떠났고, 젊은 연구자는 설 자리를 잃었다. 인문학은 패배한 학문처럼 취급되고 있다.

그런 현실에서 국가가 ‘인문사회’를 다시 불러 세우려 한다. 국가교육위원회가 인문사회 특별위원회를 공식 출범시킨 것이다. 위기의 인문학을 국가 차원에서 다루겠다는 선언이다. 그 진심을 믿고 싶다.

대통령 소속 국가교육위원회는 최근(12월 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인문사회 특별위원회 위촉식과 제1차 회의를 열고, ▲김명환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를 위원장으로 위촉했다.

인문사회 특별위원회 위원으로는 ▲강창우(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김대건(강원대 행정·심리학부 교수) ▲김선욱(숭실대 철학과 명예교수) ▲김우정(단국대 한문교육과 교수) ▲김진희(한국교육개발원 선임연구위원) ▲김혜숙(한국교육과정평가원 선임연구위원) ▲옥현진(이화여대 초등교육과 교수) ▲이강재(서울대 중문학과 교수) ▲정병호(고려대 일어일문학과 교수)가 참여했다. 국교위는 앞서 지난 10월 제61차 회의에서 인문사회 분야의 학문적 재정립과 균형 발전을 위해 특별위원회 설치를 의결한 바 있다.

이번 위원회 출범이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하다. 인문학의 위기가 더 이상 ‘학과 하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 구조조정, 학문 후속세대 붕괴, 민주주의·역사 교육의 약화, 사회적 합의 능력의 퇴행이 한꺼번에 맞물려 있다.

AI 시대, 인문학은 왜 필요한가

특별위원회가 다룰 핵심 의제는 시대 인문사회학의 존재 이유>다. 기술이 인간의 노동과 판단을 대체하는 시대에, 인간을 이해하는 학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위원회는 학문 후속세대 지원, 지속 가능한 학술 생태계 구축, 교육의 본질 회복, 민주주의·역사 교육의 필수화, 학문 간 균형 발전을 주요 과제로 설정했다.

이는 ‘인문학을 살려야 한다’는 감성적 호소가 아니다. 인문사회학이 무너질 경우, 사회는 판단 능력과 공론의 언어를 잃는다. 기술은 발전해도 공동체는 분열되고, 민주주의는 형식만 남게 된다. 인문학의 위기는 곧 국가 정체성의 위기라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각 위원의 역할과 분담

▲김명환 위원장은 위원회 전체 운영과 학문적 재정립 방향을 총괄한다. ▲강창우 교수는 유럽 인문학 전통과의 비교 연구 및 국제 협력을 담당한다. ▲김대건 교수는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제도 설계와 교육 심리학적 접근을 맡는다. ▲김선욱 교수는 철학과 윤리 교육 강화를 통해 교육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김우정 교수는 한문·고전 등 전통 인문학의 현대적 활용 방안을 모색한다.

▲김진희 연구위원은 교육정책 연구와 학문 후속세대 지원 제도 설계를 담당하고, ▲김혜숙 연구위원은 교육과정 평가와 인문사회 교육 비중 확대를 맡는다. ▲옥현진 교수는 초등교육 단계에서 인문사회 교육을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이강재 교수는 동아시아 인문학 연구와 국제적 학문 균형을 모색한다. ▲정병호 교수는 일본학과 비교문화 연구를 통해 학문 간 균형 발전에 기여할 예정이다.

위원 구성만 놓고 보면, 학문 내부의 논쟁을 넘어 교육 제도 전반을 건드리겠다는 의도가 분명하다. 위원회는 대학 구조조정 국면에서도 인문사회 학과의 최소 기반을 유지할 제도적 장치를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젊은 연구자와 대학원생을 위한 장기 연구비 지원 체계, 인문사회 연구의 안정적 생태계 구축이 핵심 과제로 거론된다.

또한 초·중·고 교육과정에서 민주주의·윤리·역사 교육을 필수화하는 방안, 단기 성취 중심 교육에서 벗어나 시민적 판단 능력과 공동체 의식을 기르는 교육 방향도 논의 대상이다. 유럽과 동아시아 인문학의 비교 연구를 통해 국제적 학문 균형을 확보하겠다는 구상도 포함된다.

인문학의 재정립은 국가의 선택이다

인문사회 특별위원회는 인문학을 ‘보존’하기 위한 기구가 아니다. 어떤 사회를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국가의 선택을 묻는 자리다. 대학에서 인문학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지 학과 하나가 없어지는 문제가 아니다. 사고의 언어, 비판의 훈련, 공동체를 이해하는 능력이 함께 사라지는 일이다.

위원회가 마련한 정책 제안은 향후 국가교육위원회 본회의에 보고될 예정이다. 그 결과가 실제 제도 변화로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인문학의 위기를 더 이상 방치할 경우 그 대가는 사회 전체가 치르게 된다는 점이다.

인문학이 무너진 자리에 남는 것은 기술만 남은 사회다. 그 사회가 과연 인간다운 사회인지, 국가는 이제 그 질문 앞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