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나의 소설 <공>. 사진=조선DB
김유나의 단편소설 〈공〉은 평범하지만 규칙에 충실한 인생을 살아온 남자의 하루를 통해, 한국 사회 중년 남성의 윤리적 무감각과 내면의 붕괴를 관찰한 작품이다. 주인공 병석은 제강회사의 철강영업 팀장으로, ‘실수 없는 삶’을 자부해온 인물이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그는 자신도 모르게 구입한 새끼 시츄 한 마리와 마주한다.
이름도, 이유도 모르는 생명.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의 삶은 아주 작고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이상문학상 수상작(1984년)인 이균영의 <어두운 기억의 저편>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추리적 요소를 지닌 작품이다.
울고 싶을 때면 주먹을 쥐는 사람
병석의 삶은 철저히 통제된 질서의 연속이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규율 속에서 자라며 세수할 때 귀 뒤를 닦는 습관을 들였고, 성인이 된 뒤에도 단정과 효율을 미덕으로 삼았다. 밥을 먹어도 반찬 하나에 밥 한 숟가락이었다.
그의 신혼은 무너졌다. 어머니가 고른 가구들로 신혼집을 채웠고, 신혼여행 후 처음 맞은 주말엔 신혼집에 어머니가 계셨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을 받고, 어머니가 깎아주신 과일을 먹으면서도 과일을 먹었다. 아내는 내내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결혼은 결국 파탄에 이르렀다. 전처가 이혼을 요구했을 때 병석은 어머니를 못 오시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전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더 큰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자신이 견딜 수 없는 사람도 병석이라고 했다. 병석은 돌을 삼킨 것처럼 목울대가 아파 주먹을 꽉 쥐었다. 병석은 울고 싶을 때면 주먹을 쥐는 사람이었다.
이후의 인생도 다르지 않았다. 회사에서 그는 ‘관리자’의 언어로, 사람보다 성과를 신뢰하는 방식으로 버텨왔다. 그의 유일한 재능은 자기 절제였다.
그 절제가 술 한 잔과 블랙아웃 한 번으로 무너진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엔 시츄 한 마리가 있었던 것이다.
자본의 세계 언어를 내면화한 사람, 진짜 생명을 만나다
병석은 재킷 안쪽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지갑 옆에 옆으로 바스락거리는 종이의 질감이 느껴졌다. 애완동물 매매 계약서였다.
병석은 자신이 펫숍에 방문한 시간이 밤 10시 50분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었을까.
애완동물 매매 소비자 피해 보상 규정 항목을 여러 차례 읽었다.
<반려동물은 살아있는 생명체입니다.
변심 또는 개인 사정으로 인한 교환이나 파양은 절대 불가합니다.
교환 환불 요구 시 강력한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음을 고지합니다.>
그 문장은 계약의 조항이 아니라, 인간됨의 최후 통첩처럼 읽혔다.
병석은 강아지를 펫숍에 되돌려 보내려 하지만, 직원은 냉정하게 말한다.
“우린 판매업이지 관리업이 아닙니다.”
그 한마디는 자본의 논리이자, 병석 자신이 평생 살아온 세계의 언어였다.
그는 그 세계의 언어를 내면화한 사람이었고, 이제 그 언어에 의해 되갚음을 당한다.
우보의 죽음 이후에 만난 내면의 파탄
병석은 강아지를 ‘우보(牛步)’라 부른다.
“좋은 주인을 향해 천리라도 가라.”
그 이름은, 늦은 후회의 기도이자 유일한 다정이었는지 모른다.
우보는 사자성어 우보천리(牛步千里)에서 영감을 얻었다.
하늘나라에는 소처럼 느리게 가거라.
병석은 그런 염원을 담아 시츄의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하루 치 입원비와 처치비 59만 원을 결제했다.
가슴 스린 금액이었지만 어째서 그런 금액이 나온 건지 따져 묻지 않았다.
생명을 맡겨도 그는 여전히 결제의 언어로 세계를 이해한다.
새벽 2시, 병원에서 전화가 온다.
“호흡은 남았지만 위중합니다.”
그는 말한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차단한다.
그 차단은 우보의 죽음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책임의 회로를 끊는 행위다.
이 작품의 진정한 공포는 바로 그 ‘무표정한 단절’에 있다.
알바트로스의 역설 — 완벽의 순간, 죄의 맑음
다음 날 병석은 홋카이도로 예정된 골프 여행을 간다.
환한 미소, 계산된 농담, 명함 교환, 선물 타이밍. 그는 다시 완벽한 영업인의 얼굴로 돌아간다.
아홉 번째 홀, 고객이 부탁한 세컨샷. 그는 유틸리티를 들어 백스윙, 다시 가벼운 리듬으로 다운스윙을 내려친다.
공을 쫓으려 고개를 든 순간, 빼곡히 심어진 나무 사이를 뚫고 나온 뾰족한 빛이 병석의 눈을 찌른다. 바로 그때였다.
어두운 밤 주택가 골목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던 펫숍이 떠올랐다.
그리고 펫숍 유리창에 가만히 손을 대던 자신과 자신을 따라 정확히 한 손을 유리창에 올리던 우보의 모습. 꿈틀대는 시츄를 품에 안고 도로의 경계석에 앉아 목이 터져라 울던 자신.
그는 문득 깨달았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 시츄, 아니 우보를 샀다는 것을.
역설적이게도 골프공은 홀 안으로 들어갔다.
손뼉을 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병석은 얼빠진 표정으로 깃발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알바트로스였다. 그런 우연을 감히 꿈꾼 적도 없었다.
그러나 홀컵에서 공을 꺼내는 순간 얼굴이 참을 수 없이 일그러졌다.
공은 홀컵 속에 있지만, 그의 내면은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설 〈공〉의 제목은 바로 그 이중의 공(空)을 가리키는 것인지 모른다.
완벽한 ‘공(ball)’을 날린 자, 그러나 내면은 텅 빈 ‘공(空)’.
또 윤리의식의 ‘0점(ZERO)’일수도 있다.
사물의 언어, 감정의 부재
김유나는 이 작품에서 인간의 감정을 직접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사물의 나열로 인간을 정의한다.
계약서, 영수증, 진단서, 알림창, 전화.
그 차가운 오브제들이 인물의 내면을 대신한다.
병석의 ‘도덕적 파산’은 울음이 아니라, 기계적 절차로 증명된다.
그 세계에선 죄조차 정산된다.
김유나 작가의 말이다.
“병석은 공 같은 인물이라 생각했습니다. 다만 축구나 농구처럼 부딪히는 공이 아니라, 혼자 굴러가는 골프공이 어울렸죠. 골프는 자기 공만 책임지면 되는 게임이고, 병석의 삶도 그랬습니다. 그는 타인과 부딪히지 않으며 살아왔지만, 반려동물을 통해 처음으로 피할 수 없는 책임과 윤리의 균열을 맞이하게 됩니다. 시츄는 그의 공허를 비추는 거울이자, 끝내 지켜내지 못한 생명이었죠. 그 순간 병석은 세상에 내던져진 공임을 깨닫습니다.”
김 작가는 2020년 〈이름 없는 마음〉으로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내일의 엔딩》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