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 수 없다> 포스터
박찬욱 감독은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냉소적 원작소설(《The Ax》, 1997)을 한국적 비극으로 치환한다.
그 중심엔 소설 속 버크 데보레의 그림자를 닮은 만수(이병헌 분)가 있다. 만수는 25년을 종이회사에서 버틴 기술 관리자다. 그는 아내 미리(손예진), 아들 시원(김우승), 딸 리원(최소율), 두 마리의 반려견과 함께 “나는 다 가졌어”라고 말할 만큼 충만한 일상을 누렸다. 그러나 구조조정의 파도는 예고 없이 들이닥치고, 남는 말은 단 하나 — “어쩔 수가 없다.”
해고 통보 앞에서 그의 안정과 자존은 균열을 드러낸다.
이후 가계는 빠르게 조여 온다. 주택담보대출, 생활비, 아이들 교육비, 그리고 끊을 수 없는 작은 사치들까지. 미리는 치위생사로 복귀해 수입을 메우고, 반려견들은 처가로 보내진다. ‘다시 일자리’만이 해답이지만, 재취업 시장은 냉혹하다. 서류로, 나이로, 네트워크로 계속 밀려나는 사이, 만수의 마음속엔 수치와 분노가 뒤엉킨다.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냉소적 원작소설 《The Ax》(1997)
치명적 전환점은 경쟁사 간부 최선출(박희순)과의 면접에서 찾아온다. 그는 모욕에 가까운 평가를 받는다.
“경험은 충분하지만, 지금 시대엔 맞지 않는다.”
화장실 문 앞에서 무릎을 꿇던 순간, 체면은 찢겼고 그 자리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이 들어섰다.
원작의 버크 데보레가 잡지에 가짜 구인광고를 내듯, 만수는 허위 채용 공고를 올려 이력서를 모은다. 서류 더미 속에서 그보다 젊고 유능한 경쟁자들이 쏟아져 나온다.
“채용담당자라면, 나 대신 저들을 뽑겠지.”
그 결론에 다다른 순간, 만수의 계획은 어떤 윤리적 망설임도 남기지 않는다.
첫 타깃은 해고 이후 몰락해 술에 쩔어 사는 전직 기술자 구범모(이성민)다. 만수는 그에게서 동류(同流) 의식을 느끼면서도, 결국 “나 아니면 너”의 계산으로 그를 제거한다. 두 번째 타깃은 구두 매장에서 조용히 가족을 먹여 살리는 고시조(차승원). 그는 겉으로는 온화하지만, 마음속 깊이에 ‘종이쟁이’의 자존을 품은 사람이다.
영화 시나리오(박찬욱, 이경미, 이자혜, 돈 맥켈라 공동집필)는 종이의 세계를 은유적으로 풀어낸다. 종이로 만드는 은행권, 복권, 생리대 흡수 시트까지 종이의 세계는 노동과 소비, 착취와 폐기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만수의 범행은 번번이 삐걱대고 우연과 돌발로 얼룩지지만, 바로 그 서투름이 이 세계의 잔혹한 현실감을 더한다. 냉혈한 같으면서도 (배다른) 자식들을 사랑하는 따스한 가장, 생계를 꾸리려 동분서주하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교차하면서 하나의 단면으로 인간의 모든 면을 설명할 수 없다는 역설을 드러낸다.
영화 <어쩔 수가 없다>에 나온 산울림의 <그래 걷자>
모든 길은 결국 최선출로 수렴한다. 만수는 자신을 모욕했던 그가 사라져야 비로소 자신의 자리가 생긴다고 믿는다. 원작이 풍자한 냉소를 박찬욱은 한국적 맥락—가부장적 책임, 체면, 실패의 수치심—으로 증폭시킨다. 만수는 세상에 내몰린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희생을 만들어내는 공범이 된다. 그의 행동에는 살인의 쾌락도, 복수의 통쾌함도 없다.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만이 있다.
가정은 균열을 감추지 못한다. 리원의 첼로는 집안의 마지막 온기였지만 점차 불협화음을 유발하고, 시원은 사소한 일탈의 경계에서 흔들린다. 미리는 남편의 이상 징후를 감지하지만, 이해와 체념 사이에서 고립돼 간다. 집이라는 공간도 안식처가 아닌 내부가 부패하는 구조로 그려진다. 유리 온실, 좁은 옥상, 깊은 초점의 복도—미술과 촬영은 인물의 심리를 건축적 이미지로 드러낸다.
마침내 만수의 계획은 최선출 제거로 매듭지어지고, 그는 바랐던 ‘복귀’를 손에 넣는다. 그러나 원작의 버크가 그랬듯, 공허가 먼저 찾아온다. 책상 위엔 가족의 사진 대신 찢긴 종이 한 장이 남아 있고, 그의 눈동자엔 승리도 안도도 없다. 이기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는 깨닫는다. 자신이 톱날을 휘두른 줄 알았지만, 사실은 베이는 쪽이었음을.
영화의 마지막은 어떤 ‘깨달음’의 순간으로 수렴한다. 그것은 한 남자의 몰락이자, 동시에 한 사회의 초상으로도 읽힌다. 종이의 세계처럼, 인간의 존엄도 얼마나 쉽게 찢기고 소비되는가를 보여준다.
박찬욱의 〈어쩔 수가 없다〉는 웨스트레이크 원작의 냉소를 한국 사회의 질감으로 치환한다. 만수는 피해자이자 가해자, 톱날이자 나무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괴물이 되었고, 그의 말—“어쩔 수가 없다”—는 개인의 도덕적 일탈에 대한 구차한 변명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향한 냉담한 읊조림으로 들린다. 결국 영화가 묻는 질문은 동일하다. 정말, 우리는 어쩔 수가 없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