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코리아게이트' 의 핵심으로 잘 알려진 박동선씨가 19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코리아게이트는 1970년대 한미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친 정치 스캔들이다.
박씨는 19일 오후 6시35분께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에서 사망했다. 박씨는 평소 앓던 지병이 최근 악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코리아게이트는 1976년 10월24일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박동선씨와 중앙정보부 등이 미국 국회의원과 공직자들에게 뇌물을 뿌렸다"고 보도하면서 이슈가 됐다. . 박씨는 1970년대에 미국 내 친한(親韓) 분위기 조성을 위해 매년 50만~100만 달러의 뇌물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보도 이후 미국 정부는 코리아게이트 관련자들을 수사했고, 미국 하원에서는 이른바 '프레이저 위원회'가 구성돼서 청문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가 뇌물을 살포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박정희 정부는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고, 박정희 정부와 카터 행정부 간 관계 역시 악화해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정책 촉진에도 영향을 미쳤다.
<월간조선>은 2006년 11월호에서 박씨와 가진 옥중인터뷰를 소개했다. 자신은 평생 조국을 위해 봉사했고 미국 FBI가 자신을 불법 납치해 누명을 씌웠다는 주장이다. 아래에 당시 인터뷰 전문을 소개한다.
박씨는 19일 오후 6시35분께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에서 사망했다. 박씨는 평소 앓던 지병이 최근 악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코리아게이트는 1976년 10월24일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박동선씨와 중앙정보부 등이 미국 국회의원과 공직자들에게 뇌물을 뿌렸다"고 보도하면서 이슈가 됐다. . 박씨는 1970년대에 미국 내 친한(親韓) 분위기 조성을 위해 매년 50만~100만 달러의 뇌물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보도 이후 미국 정부는 코리아게이트 관련자들을 수사했고, 미국 하원에서는 이른바 '프레이저 위원회'가 구성돼서 청문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가 뇌물을 살포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박정희 정부는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고, 박정희 정부와 카터 행정부 간 관계 역시 악화해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정책 촉진에도 영향을 미쳤다.
<월간조선>은 2006년 11월호에서 박씨와 가진 옥중인터뷰를 소개했다. 자신은 평생 조국을 위해 봉사했고 미국 FBI가 자신을 불법 납치해 누명을 씌웠다는 주장이다. 아래에 당시 인터뷰 전문을 소개한다.
11 2006 MAGAZINE
『내 칠십 평생의 대부분은 조국을 위한 봉사였다. 나는 미국 영주권도 신청해 본 적 없는 한국인이다. 대한민국은 왜 나를 외면하는가?』
지난 1월6일 경유지 멕시코에서 체포
지난 1월5일 오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소재 파킹턴社(사) 사무실로 캐나다 밴쿠버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전날 일본 나리타공항을 출발, 밴쿠버 공항에 도착한 이 회사 朴東宣(박동선·71) 회장으로부터의 전화였다.
캐나다와 멕시코를 중간 경유지로 삼은 朴회장의 최종 목적지는 南美(남미)의 파나마였다. 朴회장은 이 여행에서 미국 땅을 밟을 계획이 없었다. 朴회장은 미국 비자가 붙어 있는 여권을 지참하지 않았다. 미국 정부가 그의 체포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검찰은 2005년 4월 중순,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정부를 위해 유엔 고위 관리들을 상대로 불법 로비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朴東宣씨를 기소했고, 이 사실은 워싱턴 포스트, 뉴욕 타임스, CNN 등 미국 주요 언론들의 톱기사로 보도됐다. 美 검찰 관계자는 이 사실을 발표하면서 『朴씨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라고 밝혔다.
美 검찰 관계자가 밝힌 혐의는, 朴회장이 이라크 정부로부터 최소한 200만 달러를 받았고 유엔 관리들을 상대로 「석유·식량 프로그램」이 채택되도록 불법 로비활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불법 로비」와 「박동선」이라는 두 단어의 결합은, 1970년대 중반 韓·美 언론계뿐만 아니라 全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이른바 「코리아게이트」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대한민국 출신의 젊은 실업가가 한국 정부를 위해 미국 의회 의원들을 상대로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韓·美 간에 외교 마찰을 부른 사건이 「코리아게이트」였고, 그 젊은 실업가가 朴東宣 회장이었다.
「석유·식량 프로그램」이란, 1991년 쿠웨이트 침공 후 미국의 경제제재(원유 수출 금지)를 받고 있던 이라크가 유엔 관리下에 16억 달러의 석유를 수출해 그 대금으로 식량과 의약품 등의 인도적 물자를 구입할 수 있게 한 정책이다. 그 이후 유엔은 이라크의 석유 수출 총액을 늘려 주었다. 유엔이 이 프로그램을 채택하도록 朴회장이 유엔 관리들을 상대로 불법 로비를 벌였다는 것이 미국 검찰의 주장이다.
캐나다 밴쿠버에 있던 朴회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사람은 파킹턴社 비서실에 근무하는 李侑眞(이유진) 보좌관이었다. 朴회장은 李보좌관에게 『갑자기 혈압이 올라가서 몸이 안 좋아 병원으로 가는 중인데, 다음 행선지인 멕시코로 가는 비행기편을 새롭게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李보좌관이 다른 비행기편을 알아보고 있는 동안 朴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건강에 큰 이상이 없어서 스케줄대로 멕시코行 비행기를 타러 간다』는 내용이었다.
캐나다와 멕시코를 중간 경유지로 삼은 朴회장의 최종 목적지는 南美(남미)의 파나마였다. 朴회장은 이 여행에서 미국 땅을 밟을 계획이 없었다. 朴회장은 미국 비자가 붙어 있는 여권을 지참하지 않았다. 미국 정부가 그의 체포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검찰은 2005년 4월 중순,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정부를 위해 유엔 고위 관리들을 상대로 불법 로비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朴東宣씨를 기소했고, 이 사실은 워싱턴 포스트, 뉴욕 타임스, CNN 등 미국 주요 언론들의 톱기사로 보도됐다. 美 검찰 관계자는 이 사실을 발표하면서 『朴씨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라고 밝혔다.
美 검찰 관계자가 밝힌 혐의는, 朴회장이 이라크 정부로부터 최소한 200만 달러를 받았고 유엔 관리들을 상대로 「석유·식량 프로그램」이 채택되도록 불법 로비활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불법 로비」와 「박동선」이라는 두 단어의 결합은, 1970년대 중반 韓·美 언론계뿐만 아니라 全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이른바 「코리아게이트」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대한민국 출신의 젊은 실업가가 한국 정부를 위해 미국 의회 의원들을 상대로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韓·美 간에 외교 마찰을 부른 사건이 「코리아게이트」였고, 그 젊은 실업가가 朴東宣 회장이었다.
「석유·식량 프로그램」이란, 1991년 쿠웨이트 침공 후 미국의 경제제재(원유 수출 금지)를 받고 있던 이라크가 유엔 관리下에 16억 달러의 석유를 수출해 그 대금으로 식량과 의약품 등의 인도적 물자를 구입할 수 있게 한 정책이다. 그 이후 유엔은 이라크의 석유 수출 총액을 늘려 주었다. 유엔이 이 프로그램을 채택하도록 朴회장이 유엔 관리들을 상대로 불법 로비를 벌였다는 것이 미국 검찰의 주장이다.
캐나다 밴쿠버에 있던 朴회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사람은 파킹턴社 비서실에 근무하는 李侑眞(이유진) 보좌관이었다. 朴회장은 李보좌관에게 『갑자기 혈압이 올라가서 몸이 안 좋아 병원으로 가는 중인데, 다음 행선지인 멕시코로 가는 비행기편을 새롭게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李보좌관이 다른 비행기편을 알아보고 있는 동안 朴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건강에 큰 이상이 없어서 스케줄대로 멕시코行 비행기를 타러 간다』는 내용이었다.
다음날인 1월6일 오후, 朴회장은 멕시코공항에서 『무사히 도착했다』는 전화를 걸었다. 「잘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은 지 두 시간 후, 李보좌관은 멕시코에 사는 朴회장의 친구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朴회장을 데려갔다는 수사관 두 명이 멕시코인인지 미국인인지 한국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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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2월「코리아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朴東宣 회장이 증언을 위해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기자들을 만나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
『FBI는 나를 납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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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회장은 감옥에서 자신의 심경을 담은 편지를 주변 친지들에게 수차례 보냈다. |
1월12일 뉴욕 타임스는 미국 법무부 당국자의 말을 인용해 「멕시코 이민국 직원들이 인터폴 통보를 근거로 朴씨를 억류했다가 미국 휴스턴行 항공기에 태웠으며, FBI 요원들이 동행했다」고 보도했다.
FBI의 朴東宣씨 체포 과정에서 두 가지 이례적인 일이 발생했다. 인터폴에서 범죄 용의자로 통보했다고 해도, 제3국에 입국한 용의자를 곧바로 추방해 수배 국가로 보내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또한 FBI 요원들이 다른 나라의 공항까지 찾아가 용의자를 연행하는 경우는 드문 경우라고 한다.
미국 사법 당국의 朴회장 체포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朴회장을 휴스턴으로 연행한 후 미국 검찰은 이민국과 갈등을 빚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민국 측은 『미국 비자를 소지하지 않은 朴회장은 불법 입국이기 때문에 추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검찰 측은 『유엔 비리 사건의 주역인 만큼 뉴욕으로 이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朴회장은 휴스턴 근교 해리스 카운티 구치소에 일주일가량 억류돼 있다가 뉴욕으로 이송됐다.
미국 사법 당국은 朴회장을 두 가지 죄목으로 기소했다. 하나는 朴회장이 로비스트 등록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라크 정부를 위해 로비를 했다는 로비스트 등록법 위반이다. 다른 하나는 이라크계 미국인(사미르 빈센트)과 공모해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원유 禁輸(금수) 조처를 풀기 위한 음모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현재 당뇨병을 앓고 있고, 2002년 신장이식 수술까지 받은 적이 있는 朴회장은 구속 후 노령과 건강상의 이유로 보석을 신청했지만 미국 사법 당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엔의 석유·식량 프로그램과 관련, 기소된 유엔 관리 등 10여 명 가운데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은 朴회장이 유일하다.
구속된 지 7개월이 지난 7월13일, 뉴욕연방법원 배심원단은 朴회장에 대해 유죄 평결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뉴욕의 교도소에 수감 중인 朴회장은 주변 친지들에게 『나는 불법적으로 체포됐고, 재판 자체가 무효』라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朴회장의 변호인인 마이클 김 변호사는 지난 8월14일 뉴욕 연방법원에 제출한 제정신청서에서 『로비스트라면 로비를 부탁한 곳을 위해 일하는 것인데, 유엔이 추진한 석유ㆍ식량 프로그램은 이라크 정부가 반대한 사안이다. 朴회장이 이라크 정부를 위해 로비했다는 미국 검찰의 주장은 억지에 불과하고 혐의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음모에 공모했다」는 기소 내용도 백보를 양보해 朴회장이 음모에 가담했다 치더라도 공소시효가 소멸되었기 때문에 무죄』라고 주장했다.
마이클 김 변호사는 하버드 법대를 졸업한 재미교포로서 미국 뉴욕연방검찰청에서 검사를 지냈다.
기자는 朴회장 주변 인사들을 통해 朴회장과의 인터뷰 의사를 전했지만 『아직 언론에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는 회신만 받았다.
결국 朴회장과 月刊朝鮮의 인터뷰는 朴회장 주변의 친지들에게 묻고 싶은 내용을 보낸 후, 친지들을 통해 감옥에 있는 朴회장의 생각을 전달받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기자는 朴회장이 감옥에서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를 입수했다.
『부모같이 믿었던 우리 정부까지 외면…』

다음은 朴東宣 회장의 친지들을 통한 朴회장과의 問一答(일문일답)이다.
―미국 사법 당국이 2005년 4월 유엔의 석유·식량 프로그램과 관련된 유엔 간부들의 비리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朴회장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사실과 다르다. 뉴욕 검찰청이 미국의 저명 보도진을 모두 초청해, 유엔 석유·식량 관련 프로그램 비리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여러 석유 관계 회사와 저명인사들을 기소했지만, 나에 대해서는 진정에 의한 조사(FBI Complain) 형식으로 다루었다. 미국 검찰은 내가 파나마로 간다는 정보를 얻은 후, 2005년 12월22일에 정식으로 체포영장을 발급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플리바겐 제의에 응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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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게이트」당시 韓·美 검찰 공동신문에서 마지막 조사를 받고 검찰청사를 떠나는 朴회장. |
『조사 과정에서 여러 차례 제의가 있었다. 그러려면 유엔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고백해야 하는데, 유엔 관리들에게 뇌물을 건넨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본인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허위사실을 고백하여 친구들을 죽이는 일은 할 수 없다.
유엔이 석유·식량 프로그램을 추진할 당시 나는 부트로스 갈리 前 유엔 사무총장(6代)의 개인 고문으로서 충분히 외교 활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죄가 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플리바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에 대한 선고가 본래 10월26일로 정해졌다가 내년 1월로 연기됐다』
―무죄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데, 무죄라면 미국 사법 당국이 朴회장에 대해 왜 이런다고 생각하나.
『미국의 보수진영은 역사적으로 유엔이란 존재 자체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목적 달성 과정에 항상 유엔이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해 왔다.
특히 이라크 전쟁 결과가 실패작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하자,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까지 「이라크 공격은 국제법 위반이고 부도덕한 행위」라고 비난하는 일도 있었다. 미국은 「유엔 길들이기」 차원에서 나를 희생양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유엔 개혁은 미국 정부의 오랜 숙제였다. 부시 美 대통령은 2001년 취임 이후부터 유엔 개혁을 외쳐 왔다. 유엔의 석유·식량 프로그램 비리와 관련한 미국 검찰의 발표가 있던 지난해 4월14일, 콘돌리자 라이스 美 국무장관은 미국신문편집인협회 연설에서 『유엔이 조직 개혁, 지도부 개편, 관행의 개혁 없이는 살아남기 힘들다. 이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유엔 개혁과 朴회장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무슨 관련이 있나.
『석유·식량 프로그램은 유엔이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이라크 이재민들을 돕기 위한 조처였다. 이 결의안이 통과되면 이라크의 원유 수출을 금지시킨 미국의 경제제재 조치는 효과가 감소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되니까 미국 정부는 이 유엔 결의안 통과에 유엔 고위층과 이라크 정부, 미국의 석유회사 간에 금전 거래가 있은 것으로 추정하고 유엔 간부들을 상대로 조사를 시작했다.
이렇다 할 증거가 포착되지 않자 이 결의안을 성사시킨 부트로스 갈리 前 유엔 사무총장과 그의 고문이던 나를 얽어 넣으려고 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나와의 플리바겐을 통해 유엔 고위직 인사들을 잡아넣으려는 계산이다』
―사건의 본질이 미국의 「유엔 길들이기」라고 보는 것인가.
『그렇다. 유엔 고위층의 비리를 드러냄으로써 美 국민들에게 유엔의 부패를 알리려고 애쓰는 것이 나를 강제로 납치한 사건의 본질이다』
―유엔에서 석유·식량 프로그램이 채택되도록 朴회장이 이라크 정부를 위해 로비를 한 적이 정말 없는가.
『이라크 정부는 유엔이 추진한 이 프로그램에 반대했다. 이라크 정부가 진정 원한 것은 부분적인 원유 禁輸조치 해제가 아니고 전면적인 해제였다. 나는 유엔 사무총장의 개인 고문으로서 그를 도와 유엔이 원하는 석유·식량 프로그램을 이라크가 받아들이도록 하는 설득작업을 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라크 정부의 이익을 위해 미국 정부 고위층에 로비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이라크의 에이전트 역할을 했다」고 하는 미국 검찰의 주장은 사실무근이며, 그야말로 엉터리다.
특히 유엔 사무총장의 개인 고문으로서 석유·식량 프로그램을 성사시키기 위한 활동은 부트로스 갈리 사무총장의 임기가 끝난 1996년 말에 전부 끝났다. 나를 밀고한 이라크계 미국人 사미르 빈센트도 법정 증언에서 「1997년 이후에는 朴東宣 회장과 전화통화를 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사미르 빈센트는 이라크 원유의 채굴권을 갖고 있는 미국 석유회사의 부탁을 받고 1997년부터 미국의 이라크 禁輸조치 해제를 위해 로비스트로 활동했는데, 이 음모에 나는 전혀 관련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그렇기 때문에 공모죄 부분도 무죄이며, 결과적으로 재판 자체가 무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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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6월 유엔세계평화국센터 건립위원회 사무국 개소식 장면. (오른쪽부터) 박동선 회장, 강영훈 前 총리, 최태영 서울법대 초대학장 등 60여 명이 참석했다. |
朴東宣과 빈센트의 만남
1991년 9월 쿠웨이트를 침공했던 이라크軍이 쿠웨이트에서 철수한 후, 유엔은 인도적 차원에서 이라크에 16억 달러어치의 석유를 팔 수 있도록 유엔 결의안 712호를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라크 정부는 주권 침해라며 이 결의안에 반대했다. 朴東宣씨의 설명에 따르면, 이라크 정부의 거부 후 텍사스 석유업자인 오스카 와이어트의 컨설턴트로 일하던 이라크계 미국人 사미르 빈센트氏가 朴회장에게 유엔의 제안을 이라크가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에 협조를 요청했다.
그 당시 부트로스 갈리 유엔 사무총장의 고문이던 朴회장은 1993년 제네바에서 갈리 사무총장과 아지즈 이라크 총리의 만남을 주선했다. 이 만남에서도 이라크는 유엔의 제의를 거절했다. 「禁輸조처로 40만 명의 인구가 사망했다」고 이라크 정부가 주장한 1994년에도 이라크 정부는 16억 달러의 원유 판매를 허용한 유엔 결의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95년에는 6개월간 20억 달러의 원유를 팔 수 있도록 허용하는 유엔 결의안 986호가 통과됐지만 이라크 정부는 이 제안도 거절했다. 이같은 이라크 정부의 입장은 1995년 말까지 지속됐다. 1996년에 들어서 세 차례에 걸친 협상을 거쳐 그해 5월20일에 합의에 도달했다. 1996년 말 석유·식량 프로그램이 시행되면서 朴회장과 빈센트氏 간의 교류는 끝났다.
이런 상황은 朴회장이 유엔 사무총장의 고문으로서 유엔이 추진한 석유·식량 프로그램을 이라크가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을 했다는 정황을 보여 준다.
『기소장에 「200만 달러 수수」 없어』
이어지는 朴회장과의 일문일답이다.
―미국 사법 당국은 朴회장에 대한 체포를 발표하면서 朴회장이 이라크 정부로부터 외교 행낭을 통해 200만 달러를 받았다고 발표했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미국 검찰이 언론을 통해서, 또 재판을 통해서 그런 주장을 했지만 나에 대한 기소 내용을 보라. 기소장 어디에도 200만 달러를 수수했다는 혐의는 나와 있지 않다. 나를 도덕적으로 흠집 내기 위한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朴회장의 주장대로 기소장에는 그가 이라크 정부로부터 200만 달러를 수수했다는 혐의 내용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언론은 물론이고 국내 언론은 朴회장이 석유·식량 프로그램과 관련, 이라크 정부를 위해 일하는 代價(대가)로 200만 달러를 받았다는 미국 검찰 당국자의 말을 인용해 크게 보도한 바 있다.
―미국 검찰이 증거도 없이 그런 내용을 흘렸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
『나에 대한 도덕적인 흠집 내기다. 물론 궁극적인 목표는 유엔에 대한 흠집 내기라고 생각한다. 미국 검찰은 내가 이라크 정부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했지만 아무런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미국 검찰은 내가 마치 도덕적 결함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분명한 것은 그 문제로 나를 기소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지난 6월 말 시작된 朴회장의 재판을 미국 현지에서 지켜본 李侑眞 보좌관의 증언이다.
『미국에 한 달가량 체류하면서 배심원 평결이 있기 전까지의 재판을 지켜봤어요. 미국 검찰은 朴회장의 범죄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나 증인으로 언제나 빈센트氏의 증언을 내세웠죠. 그런데 문제는 미국 검찰이 증거에 대한 출처를 밝히지 않는 거예요. 9·11 테러 사건 이후 새로 생긴 것인데, CIA 수사 기록이라면 출처를 밝히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죠. 빈센트氏의 증언이나 그가 제시한 증거들이 거기에 해당된다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변호인들의 빈센트氏에 대한 반대 신문이 이루어졌죠. 검찰 측 증인으로 나온 빈센트氏가 朴회장에게 돈을 건네준 상황을 증언할 때, 처음에는 「현금 수십만 달러를 이라크에서 받아 내가 직접 미국까지 가져왔다」고 했어요.
미국에 입국할 때 1만 달러 이상의 현금은 반드시 신고하게끔 되어 있어요. 그런데 독일人 사업가 친구의 양복저고리에 숨겨 수십만 달러를 들여왔다는 거예요. 이라크·독일·미국 3개국의 공항을 통과하면서 말이죠.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니까 재판정에 참석한 사람들이 실소를 했죠. 나중에는 「외교 행낭을 통해 갖고 왔다」고 번복했어요.
어쨌든 거기까지는 좋은데, 「朴회장에게 돈을 어떻게 전달했는가」라는 질문에 빈센트氏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오픈된 「카페에서 서류 봉투에 넣어서 수십만 달러를 건네주었다」는 증언을 했습니다.
그래서 변호인단이 빈센트氏가 朴회장에게 돈을 줄 때 이용했다는, 같은 크기의 서류 봉투를 준비해서 법정에서 그 봉투에 그 액수가 들어가는지를 시험했어요. 3분의 1도 안 들어가더군요. 그래서 배심원들도 웃고 말았죠』
재판 과정을 증언하는 李보좌관에게 물었다.
『검사들, 배심원들의 감성에 호소』
―그래도 배심원들은 朴회장에 대해 유죄 평결을 내렸는데요.
『30代 젊은 검사들이 공소시효가 소멸되고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이 사안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어요. 재판 과정을 지켜본 저로서는 검찰 측이 배심원들의 정서에 호소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요』
―정서에 호소한다고 해서 불법행위가 아닌데 불법이라는 평결이 나올 수 있다고 봅니까.
『저로서는 다분히 감정에 치우친 결과라고 봅니다. 미국 검찰은 법리보다는 배심원들의 감정에 호소했습니다. 검찰은 배심원들 앞에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어요.
「이 사람(朴東宣)은 돈도 많고, 몇만 달러를 쓰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대변하는 로비스트다. 그런데 우리는(배심원을 지칭함) 하루하루 어렵게 벌어서 살아가고 있고, 세금을 내며 열심히 살아가는 일반 시민이다」
재판 과정 내내 검찰은 이 사건의 본질과 관계없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언급했어요. 朴회장이 만난 적도 없고,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인데 말이죠. 후세인을 언급하며, 동시에 미국인에게는 악몽인 9·11 테러를 연상시키면서 朴회장을 非도덕적인 사람으로 몰아간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죠』
유력한 증인 빈센트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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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이태원에 위치한 朴회장의 개인 사무실. 그는 茶와 蘭을 좋아한다. |
―미국 검찰의 수사과정에서 빈센트 氏의 증언 외에 다른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나.
『200만 달러 수수혐의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사를 하면서 미국 검사들은 「FBI를 통해 충분한 수사를 끝냈고 증거도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사법기관의 유일한 증인인 빈센트는 그가 범한 죄 때문에 이미 검사 측과 플리바겐이 끝난 상황이었다』
빈센트氏는 왜 미국 검찰 당국과 플리바겐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빈센트氏는 이라크에서 출생해 미국 보스턴 대학을 졸업했다. 朴회장은 1992년에 워싱턴의 이름난 로비스트인 빌 티몬스를 통해 빈센트를 소개받았다. 빈센트는 당시 駐유엔 이라크대사인 니자르 함둔의 친구였다. 1991년 1월 걸프戰 발발 직전에는 이라크에 억류된 미국인 인질들을 석방시키는 데 중간 역할을 해 미국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朴회장 변호인의 주장에 따르면, 富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빈센트氏는 미국의 조세법상 탈세를 포함한 여러 규정을 위반한 사실이 있고,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이런 범죄는 최고 28년형이 선고될 수 있다. 외국 정부의 불법 로비스트로 활동할 목적으로 공모한 혐의가 적용될 경우 최고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빈센트氏는 미국 검찰의 플리바겐에 응해 朴회장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는 것이 朴東宣씨 변호인의 주장이다.
―朴회장이 빈센트氏와 일을 했던 것은 사실 아닌가.
『이라크에 대한 인도적 원조를 제공하기 위한 과정에서 유엔의 非공식 채널을 통해 정보를 교환한 것은 사실이다. 이같은 非공식 채널은 정치에서 일상적으로 있는 일이고, 때로는 생산적인 일이기도 하다』
―공모죄의 경우, 공소시효가 5년인데, 그렇다면 설사 불법을 저질렀더라도 2000년 말로 공소시효가 끝났다. 미국 검찰이 어떻게 朴회장에 대한 기소가 가능했는가.
『두 사람 이상이 같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공모를 시작하다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이 있어도, 공모한 행위가 계속되면 그만둔 사람도 공모죄에 가담한 것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미국 검찰은 1996년 말 석유·식량 프로그램의 시행 이후에도 내가 빈센트와 함께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禁輸조치 완전 해제를 위해 미국 정부를 상대로 로비했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 빈센트는 1996년 말 이후 이라크에 대한 禁輸조치를 전면 해제하기 위한 노력을 했지만 나는 유엔 결의안 통과 이후, 즉 1997년부터는 빈센트와 접촉한 사실이 없다.
빈센트 역시 법정에서 1997년 이후에는 나와 전화 통화한 적도, 만난 적도 없다고 분명히 증언했다. 만난 적도 통화한 적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공모를 하겠는가. 빈센트의 그런 증언은 거꾸로 내가 무죄임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대한민국 위해 이라크에 갔다』
―미국 사법 당국은 朴회장이 이라크에 대한 禁輸조치 해제를 위한 로비 과정에서 1997년에 이라크를 방문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 사실 때문에 미국 사법 당국은 공모죄를 주장하는 것 같은데.
『사실과 다르다. 그 당시 나는 내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서 이라크에 갔다. 외환 위기로 한국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안정적인 원유도입 루트 확보가 필요했고, 그 일을 위해서 이라크에 갔다. 사업가로서 개인적인 사업을 위해서 갔다고 해도 좋다. 당시 석유공사·삼성물산·SK 등 4개 기업이 이라크産(산) 원유도입을 위한 컨소시엄까지 만들었다』
―1997년에 朴회장이 「조국인 대한민국을 위해서 이라크를 갔다」고 하지만, 한국 정부는 朴회장을 위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섭섭한 마음이 어찌 없겠는가. 부모처럼 믿었던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버림을 받고 고아가 된 느낌이다. 국가가 이래도 되는가, 하는 격분과 의아심까지 갖게 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대한민국 국적 외에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가져본 적이 없다. 미국에서 50년 이상을 살았으면서도 시민권은 물론 영주권조차 신청한 적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정말 대한민국 국적 외에 다른 국적을 가진 적이 없는가.
『대한민국 정부가 나를 잊었을지라도,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걸 잊은 적이 없다. 선진국일수록 自國民(자국민)이 외국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면 철저히 보호해 준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북한에 납치된 국민들을 수십 년이나 추적해 시신이라도 찾아오지 않는가. 미국도 自國民 보호를 위해 비행기에 군함까지 보내고 전쟁도 불사한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한국 정부가 나 같은 사람에게 관심만이라도 가져 주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朴회장을 보호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쓴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적이 있기는 하다. 꼭 30년 전이다. 이른바 코리아게이트 사건 때 지금과 흡사한 일로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의 압박을 받았다. 그 당시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은 총력을 다해 국민의 한 사람인 나를 自國民 보호정책의 일환으로 보호했다. 막강한 미국 정부와 외교적인 협상을 통해 내가 조국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로비」라는 말이 주는 어감이 부정적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박동선」 하면 「로비」라는 말이 떠오르고, 「코리아게이트」가 연상된다. 이런 연상 때문인지 朴회장이 감옥을 여러 차례 들락거렸을 거라는 선입견을 준다.
『감옥생활은 칠십 평생에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다. 그래서 더 억울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나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를 불신시키기 위해 한국과 미국, 양쪽에 홈페이지(tongsunpark.co.kr)를 개설했다』
―주변 친지들에게 미국 사법 당국의 행위는 불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이유가 뭔가.
『나에 대한 수사기관의 체포 행위는 고도의 납치극이라고 말할 수 있다. 파나마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바꿔 타기 위해 멕시코 국제공항에 도착한 한국 국민을 미국 FBI 요원들이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강제로 미국行 비행기에 태웠다. 그것이 납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신장이식 후 필요한 약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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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회장의 한남동 사무실에는 우리 전통차를 담는 각종 자기들이 가지런하게 전시돼 있다. |
『휴스턴에 끌려간 후 미국에서도 환경이 열악한 교도소 알려진 해리스 카운티 구치소에 열흘간 갇혀 있었다. 그것도 최초 사흘간은 잠자리조차 주지 않아 시멘트 바닥에서 지내야 했다. 지병인 당뇨병·고혈압과 신장이식 후에 필요한 약과 주사도 주지 않는 非인도적인 대우를 받아야 했다. 그때 처음으로 너무나 억울해서 울고, 나중에는 너무 서글퍼서 가슴으로 울었다』
―현재 수감돼 있는 뉴욕의 웨스터체스터 디텐션 센터에서의 생활은 어떤가.
『시설이 제일 오래됐고 견디기 힘들다는 사이키에트릭棟(동)에서 생활하고 있다. 마약중독자·정신이상자·살인죄 등을 저지른 사람들이 수용돼 있는 곳이다. 하루 18시간 이상 갇혀 있어야 된다. 지난 8월 여름에는 통풍시설이 제대로 되지 않은 교도소가 너무 더워서 젊은 죄수들이 쓰러져 실려 나갈 정도였다. 반대로 겨울에는 난방시설이 제대로 안 돼 추위를 견디기 어렵다. 신장이식까지 했는데 벌써부터 다가올 추위가 걱정되고 있다』
朴회장의 주장대로라면 미국은 우리 국민에게 엄청난 인권유린을 자행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 정부는 물론이고 정치권도 朴회장 사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정치권의 반응이 있었다면 지난 5월10일 한나라당 대변인이 당시 현안이었던 피랍 동원호 선원 구출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하면서 잠깐 언급한 『미국에 억류돼 고초를 겪고 있는 한국 국적의 朴東宣씨에 대해서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다』는 지적 정도였다.
朴회장의 조카 朴大植(박대식·55) 고려진삼 상무는 『미국은 한국인인 朴회장을 불법 납치한 후 대한민국 정부는 물론 가족들에게도 그 사실을 정식으로 통보하지 않았다』며 『미국 정부의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인권유린 행위를 우리 정부가 방조하고 있다』고 흥분했다.
아베 총리와 朴東宣
朴회장의 외국 지도자들과의 친분 때문인지 일본의 의원 33명이 연명으로 朴회장 사건을 맡은 미국 법원 판사 앞으로 진정서를 냈다.
「韓·日관계의 친선과 동맹 관계를 증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고, 일본과 미국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도 큰 업적을 올린 朴東宣씨를 위해 진정서를 제출한다」는 내용이었다.
朴회장은 日本 아베 총리와 친분이 두텁다고 한다. 朴大植씨의 말이다.
『일본 정부의 非공식적인 해외활동에 도움을 준 일이 있다. 아베는 그런 일이 있을 때면 朴회장에게 자문을 했다. 아베 총리의 아버지가 통산성 장관으로 있을 때 일본 자동차의 미국 과잉 수출로 美·日 간 무역분쟁이 발생했다. 朴회장은 그 문제 해결을 위한 일원으로 참여했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朴회장은 아베 총리와 긴밀하게 연락하며 함께 벌어지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처했다』
한 달 여 동안 朴회장을 취재하면서 「朴東宣 회장이 왜 파나마로 가려고 했고, 미국은 왜 중간 기착지인 멕시코공항에 FBI 요원을 보내면서까지 그를 체포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현지에서 朴회장의 구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강철은 前 워싱턴한인회 회장으로부터 상세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朴회장은 최근까지 「시베리아 가스관 사업」, 「파나마 운하 확장사업」, 「체르노빌 원전 정화사업」 등에 관여하는 등 여러 나라 정부와 다국적 회사들의 초청으로 세계적 프로젝트에 참여해 왔습니다.
이 가운데 朴회장이 관심을 기울였던 프로젝트가 세계 교역량의 5%를 차지하는 파나마 운하 확장공사였어요. 약 400억 달러의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되는 공사죠. 朴회장은 파나마에 조지타운大 동문 등 정계에 아는 실력자들이 많아요. 이 사업에 여러 나라 사업체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국내 건설업체들의 진출을 도와주고 있었죠.
이 운하 확장 건을 놓고 10월 하순에 파나마 국민투표가 열리는데, 확장이 결정될 경우 내년 봄부터는 서서히 사업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1999년에 운영권을 파나마 정부에 넘겨준 미국은 확장공사에서 당연히 미국 업체들이 주도권을 가질 것으로 보고 있죠.
그런 상황에서 파나마 정부에 知人이 많은 朴회장의 존재가 미국으로서는 달갑지 않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는 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파나마 운하 확장사업에는 戰後(전후) 이라크 복구 사업 건설업체로 선정된 미국의 벡텔社 등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는 한국인이다』
朴회장에 대한 마지막 질문은 현재의 소회였다. 기독교 신자인 朴회장은 이렇게 답했다.
『예기치 않은 옥고를 치르게 되니 처음에는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고독감에 어찌할 줄 몰랐다. 그런데 최고로 고독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치지 않는 것 같다. 그분의 사랑을 생각하면 그분이 내 생명을 거둬 가지 않는 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다.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내게 격려의 편지를 보내 준다면 그처럼 기쁜 일이 없을 것이고, 나머지 내 인생은 그들을 위한 生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 온 내 칠십 평생의 대부분은 조국을 위한 봉사였다. 「코리아게이트」가 터진 후 증언대에 섰을 때 美 국회의원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조국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인이다』●
▣ 朴東宣은 누구인가
1935년 3월16일 평안남도 순천군에서 부친 박미수씨와 모친 김순식 여사의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46년 월남했다. 6·25 전쟁 중이던 1952년 張勉(장면) 국무총리의 비서로 근무하던 형(박건석·前 범양상선 회장)의 주선으로 만 17세 나이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서 세계 각국의 왕족 및 귀족, 실권자의 자녀들과 워싱턴 주재 외교관의 자녀들이 다니는 조지타운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1학년 때 1학년 학생회장에 당선됐고, 3학년 때는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 그가 국제적 로비스트로서 미국 政官界(정관계)에 두터운 인맥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워싱턴 지역 한국학생회장과 전국유학생연합회 회장직을 역임했다.
사회에 진출해서는 사업가(미륭그룹 회장)로서, 교육자(숭의학원 이사장)로, 문화인(한국茶人연합회 창설 주역·現 이사장, 한국 蘭협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유엔 사무총장 고문, 유엔 세계협회 고문, 니콰라과 대통령 국제문제 담당 고문 등의 이력이 있다.
워싱턴 시내 고급 사교클럽인 「조지타운 클럽」의 공동 창설자이며, 현재는 회원으로만 등록돼 있다. 이 클럽에는 전현직 고위 관리·정치인·법조인·로비스트들이 회원으로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朴東宣과 코리아게이트
朴東宣 회장을 국내외적인 뉴스메이커로 만든 사건은 「코리아게이트」다. 이 사건이 터지자 朴회장은 1978년 美 하원 윤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32명의 前現職(전현직) 의원에게 85만 달러를 선거자금으로 제공했다』고 증언했다.
사건의 출발은 1976년 10월24일, 워싱턴 포스트지가 「한국 정부, 미국 관리들에게 수백만 달러를 뇌물로 제공」이란 제하의 폭로기사를 보도하면서부터다. 美 하원윤리위원회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수사한 특별검사 출신의 변호사 재워스키를 조사관에 임명하고 진상 파악에 착수했다.
朴회장은 사면을 조건으로 미국의 상·하원 윤리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60시간에 걸쳐 공개 증언했다. 이 사건은 1978년 8월16일 워싱턴 연방지방법원이 「朴회장에 대한 36개 항목에 걸친 기소를 취소한다」고 발표하고, 美 법무성도 같은 내용을 발표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종결됐다.
이 사건으로 상·하 양원의 현직 의원은 단 한 사람도 기소되지 않았고, 하원의원 4명만 견책을 받았다. 朴회장으로부터 27만 달러를 받은 혐의로 기소됐던 오토 패스맨 의원은 무죄판결을 받았고, 1만 달러를 받은 사실을 위증했다는 이유로 기소됐던 니크 갈리피 나키스 전직 하원의원도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요란했던 이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사람은 리처드 해너 前 하원의원뿐으로 그는 30개월의 실형을 받았다.
朴회장은 코리아게이트 사건의 교훈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 사건으로 원인이야 어찌됐든 주한미군 철수가 취소되었고, 많은 미국인들이 한국의 안보에 대해서 널리 인식하게 됐다고 나는 보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에 한국이 만만치 않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는 동양인으로서는 아무도 뛰어들지 못하는 미국의 심장부 워싱턴 사교계를 주름잡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백악관과 미국의 실력자들 사이에서 오고 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국회나 행정부에서도 한국 이야기가 나오면 나에게 전해주고 의논도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계속적으로 미국과 일을 해 나아가는 데 커다란 교훈이 되지 않았겠느냐고 지금도 나름대로 생각합니다. 미국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한국을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운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미국을 더욱 잘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무엇이 미국인가?」에 대한 굳건한 자세로 韓美관계를 대등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