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NewsRoom Exclusive

[시집 리뷰] 유현아의 시집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

바닥에 미세한 금들이 소용돌이 치는 것을 보았다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하기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출근길에, 어딘가로 버스를 타고 가며, 시간이 어정쩡할 때 시집을 펴 들었다.

 

기자는 시인이 어떻게 시를 썼는지 알 것만 같았다. 출근을 하며 어쩌다’, 인파 속에서 어쩌다’, 길을 걷다가, 버스를 기다리며, 혹은 아프다는 핑계로 결근을 하고 어쩌다시를 썼을 것만 같았다. 일부러 몸부림을 치는 시를 쓰지는 않았으리라.

 

여러 시편들은 무슨 큰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도 위대한 분노를 선언하는 것도 아니다. 슬픔을 이야기하는데 무슨 실루엣 같은 희망이 느껴졌다. 살아가는 일이 잘은 몰라도 그의 시처럼 지긋지긋한 나날들의 행복은 통증과 함께 찾아오거나 망할 통증 속에 행복이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9788936424916.jpg

 

시어를 좀 더 압축하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시 <오늘의 달력>이란 시를 자꾸 읽게 되고, ‘바닥에 미세한 금들이 소용돌이치는’,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이란 문장에 자꾸 마음이 쓰였다. ‘어쨌거나 버티는 게 중요했다는 문장에 나도 그랬다고 혼잣말을 했다.

 

어제의 꿈을 오늘도 꾸었다

 

아무도 위로할 수 없는 절망의 바닥을 보았다

바닥 밑에 희망이 우글우글 숨어 있을 거라고 거짓말했다

 

한장을 넘겨보아도 똑같은 달의 연속이었다

못하는 게 없는 것보다 어쨌거나 버티는 게 중요했다

바닥 밑에 바닥, 바닥 밑에 바닥이 있을 뿐이라고

 

그럼에도 우리는

바닥에 미세한 금들이 소용돌이 치는 것을 보았다

 

바닥의 목소리가 뛰어올라 공중에서 사라질 때까지

당신의 박수소리가 하늘 끝에서 별처럼 빛날 때까지

오늘도 달력을 넘기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

 

당신의 애인에게서 내일의 꿈을 들었다

 

-<오늘의 달력> 전문

 

<반쪼가리 태양>이라는 시 속 부부의 유일한 리어카그을린 태양이 상상력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어쩌다 버스 정류장> 공가 딱지가 붙은 가게의 벽들날개를 펼치거나, ‘유리문에 x를 끊임없이 긋는 모습이 머릿속에 자꾸 떠올랐다. ‘익숙한 손을 기다리던 고양이터덜터덜 어둠을 횡단하는 모습 뒤 긴 그림자가 보일 듯 말 듯 했다.

 

시인은 수첩 하나 들고 일상을 기록하는 섬세한 관찰자와 같다. 날선 관찰자가 아니어도 좋다. 때로 무덤덤한 기록이어도 감정의 씨앗을 얕게 심어 가볍게 읽히지 않았다. 읽을수록 맛이 달랐다.

 

간판을 수시로 바꿔 달던 상가의 지붕들은 불빛 대신 달빛을 머금고

꼬리가 뭉툭한 단골 고양이는 일정한 시간에 만나던 손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머리카락 휘날리며 달리던 오토바이 배달 소년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조는 날이 더 많던 갈빗집 사장님은 유리문에 x를 끊임없이 긋고 있는

 

아파트 그림자는 거대한 괴물의 식탐처럼 낮은 지붕의 가게들을 집어삼키고

공가 딱지가 붙은 가게의 벽들은 날개를 펼치며 기하급수적으로 복제되고 있다

 

나의 단골 가게들이 하나둘 서서히 땅속으로 꺼지고 있다

어둠이 각질처럼 켜켜이 쌓여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낯선 동네의 이방인처럼 버스를 기다린다

 

사라진 동네의 버스 정류장은 어정쩡하게 흔들리고

익숙한 손을 기다리던 고양이는 터덜터덜 어둠을 횡단하고 있다

 

오랫동안 다정했던 동네가 그곳에 있었다

 

- 시 <어쩌다 버스 정류장> 전문

 

유현아 시인은 2006년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 청소년시집 주눅이 사라지는 방법, 미술에세이 여기에 있었지등이 있다.

입력 : 2023.10.04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사진

김태완 ‘Stand Up Daddy’

kimchi@chosun.com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