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군 이래 첫 학군 육참총장 취임… “현 정부의 시대적 요구 반영한 인사”
◎베트남전 때 군수장교로 참전…부친상 당했으나 가족들 알리지 않아
◎DJ 햇볕정책 하에 북의 대남도발… 합참의장으로 제1연평해전 승리 이끌어
◎“북한이 원하는 건 오로지 ‘돈’… 그 카드 잘 활용하면 남북관계 풀린다”
◎한·미 동맹 강화를 위한 국민운동을 전국적 확산 계획
- 2020년 9월 <월간조선> 과 인터뷰중인 김진호 전 합참의장. 사진=조준우
【편집자 주】 제1연평해전 승리 주역, 김진호 전 합참의장이 지난 9월 30일 향년 81세로 별세했습니다. 학군사관(ROTC) 2기로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 ROTC 출신 첫 합참의장에 임명된 고인은 합참의장 재직 시절 제1연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퇴역 후에는 2001년 한국토지공사 사장을 맡아 개성공단 사업에 참여했고, 2017년부터 올 초까지 재향군인회 36대 회장을 지냈습니다. 2020년 9월 22일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대준씨가 서해 북단 소연평도 해상에서 북한 측의 총격을 받아 피살된 직후인 9월 28일, 월간조선은 김진호 대장을 만나 향군의 입장을 들었습니다. 김진호 장군의 생애 마지막 인터뷰가 된 미공개 인터뷰를 소개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2020년) 9월 28일 김진호(金辰浩‧79) 대한민국 재향군인회장(예비역 육군 대장)을 서울 서초구 재향군인회 집무실에서 만나고 있을 때, 문재인 대통령의 대국민 ‘유감’이 방송을 타고 있었다. 지난 9월 22일 북한군이 해양수산부 서해어업관리단 소속 공무원 이모(47)씨를 총격살해한 지 거의 일주일만이다.
문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아무리 분단 상황에서도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희생자가 어떻게 북에 가게 됐는지 경위와 상관없이 유가족이 받았을 상심과 비탄에 대해 깊은 애도와 위로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김진호 회장은 “대통령의 유감표명은 늦었지만 그나마 지금이라도 하시니 다행”이라고 했다.
김진호 회장은 이번 공무원 총격 살해 사건에 대해 “군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은 당연하다”고 했다. 북한 해역에 공무원 이모씨가 표류할 동안 북한군이 구조할 것으로 여긴 군 당국의 판단이, 결과적으로 최악의 참사를 빚은 데 대해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는 “남북 핫라인을 가동하지 않아 구조의 ‘골든타임’을 놓친 점도 두고두고 아쉽다”고 했다.
2020년 1월 20일 김진호 재향군인회장이 한미연합사를 방문, 에이브람스 한미연합사령관과 9‧19 남북군사합의 등 안보현안에 대해 논의했다. 사진=재향군인회
김진호 전 합참의장은 2017년 8월 11일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제36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김 회장은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학군사관(ROTC) 2기생으로 임관해 GOP 소대장, 베트남전 참전을 거쳐 37사단장, 11군단장, 2군사령관을 역임한 후 합참의장을 끝으로 1999년 10월 전역했다. 특히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 ROTC 출신 첫 합참의장에 임명된 뒤 이듬해 6월 15일 발발한 제1연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북한이 상식 밖 행동 했다”
―우리 군이 9월 22일 오후 4시40분 북측 해역의 해수부 공무원의 소재를 파악하고도 사살당하기까지 5시간 이상 방치했다는 것에 국민들은 분개하고 있습니다.
“북한군 총격에 우리 국민이 희생됐기 때문에 우리 국민의 충격은 큽니다. 특히 우리 군이 북측에 구조요청조차 하지 않은 것은 정말 아쉬운 대목이에요. 하지만 이번 사건은 북방한계선(NLL) 이북에서 벌어진 일이고, 작전을 펴기엔 정보 측면에서도 작전 환경 측면에서도 한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 표류자를 군인이 사살해 불태우는 것은 유례가 없습니다. 북한이 상식 밖 행동을 했습니다.”
2011년 5월 30일 김진호 전 합참의장이 학군사관후보생(ROTC) 창립 50주년을 맞아 숙명여대 51기 학군사관후보생(ROTC)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김정은이 이번 사건에 대해 이례적으로 ‘미안하다’는 말로 얼버무리는 ‘사과 전통문’을 보냈습니다.
“군사적 사안과 관련한 북한 최고 지도자 사과가 처음은 아니에요. 푸에블로호 납치사건(1968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1976년),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1996년) 때도 사과를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시 남측은 북측의 잘못을 추궁해 사과를 받아냈다는 점입니다. 이명박 정부는 ‘천안함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2010년 ‘5‧24 대북 경제제재’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번엔 청와대나 정부가 북한에 사과나 재발방지 요구 등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일부 정치권 인사들이 김정은이 ‘미안하다’고 하기가 무섭게, 무슨 은혜라도 입은 것처럼 황송하게 구는 것은 위험한 태도입니다. 북한이 도발하더라도 아무런 대응카드가 없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북한이 9월 27일 해수부 공무원의 시신을 수색하는 해군과 해경 함정을 지목하며 “영해 침범을 중단하라”면서 NLL 문제를 제기하고 나왔습니다.
“영토문제를 들고 나와서 자신들의 비인도적 만행을 희석시키려는 의도입니다. NLL은 북한도 사실상 인정하고 있는 해상경계선입니다. 그런데 새삼 이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서해가 분쟁수역임을 다시 강조해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1968년 베트남전 당시 백마부대 군수 장교 시절의 김진호 대위. 사진=재향군인회
지난 9월 25일 재향군인회는 북한 총격살해 사건에 대해 규탄성명을 냈다. 향군은 성명을 통해 “북한의 반인륜적 만행은 대한민국에 대한 중대한 무력도발”이라며 “북한은 이번 사건의 모든 책임을 지고 그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밝히는 한편, 책임자를 엄중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김진호 회장은 “정부와 군은 북한이 우리 군을 얕잡아보지 못하도록 철저한 대응전략을 강구해야 한다”며 “밥 우드워드의 신간 《격노(Rage)》에서 보듯, 핵을 가진 김정은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를 보내 ‘현재든 미래든 남한 군대는 나의 적이 될 수 없다’고 오만방자한 태도를 취했는데, 그 결과가 공무원을 총격으로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했다.
ROTC 출신 총장 배출 자부심 느껴
―남영신 육군 지상작전사령관(대장)이 신임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했습니다. 육‧해‧공 3군을 통틀어 학군 출신 장교가 참모총장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지난 9월 23일 계룡대에서 열린 취임식에 다녀왔어요. 전임 총장들의 훌륭한 전통을 잘 이어달라고 덕담했습니다. 언론에서도 창군 이래 첫 학군 출신 육참총장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ROTC 출신 박한기(학군 21기) 합참의장에 이어 남영신(학군 23기) 신임 총장이 탄생한 것에 대해 ROTC 선배로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하지만 육군총장은 우리 군의 가장 핵심적 중요보직이기 때문에 신임 남 총장은 출신과 상관없이 그러한 관문을 통과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육군 일각에는 그간 육사 출신이 사실상 ‘독식’해 온 총장 자리가 학군 출신한테 간 것을 두고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입니다.
“내가 합참의장 됐을 때도 ‘고작 국방부 경력이 인사과장(대령)인 사람이 무슨 합참의장이냐’고 했어요(웃음). 아직 우리사회가 학연과 지연에 얽매이는 것은, 그만큼 ‘프로의식’이 부족하다는 반증입니다. 미군은 웨스트포인트 독식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미 육군에서는 웨스트포인트 출신보다도 ROTC 출신 명장(名將)이 많아요.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설계자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샬 장군은 버지니아 군사학교(VMI) 출신이고, 합참의장을 지낸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도 시티 칼리지 오브 뉴욕을 졸업한 ROTC 출신입니다. 주한 미군 고급장교 가운데 웨스트포인트 출신은 절반 수준에 불과합니다.”
1999년 6월 15일 존 틸렐리 주한미군사령관과 제1연평해전 작전상황에 논의하고 있다. 사진=재향군인회
―이번 총장 인사에서 학군 출신도 중용(重用)하려는 문 대통령의 군 인사 스타일이 확연히 드러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육사 출신의 가치는 대한민국 군사문화(軍事文化)의 정통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육사 출신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능력을 부정하면 대한민국의 군대는 무너집니다. 육사가 ROTC, 학사, 3사를 이끌고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만, 과거 정부에서 사조직인 하나회 출신 육사 장교들이 주요 진급보직을 장악하고 정치에 참여하면서 부정적 여론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다면 나, 김진호는 합참의장이 될 수 없었을 겁니다.”
김진호 회장은 “과거에도 현재도 자기 출신들만의 눈으로 보면 인사에 100% 동의할 수 없을 것이지만, 당시 정부가 판단한 인사에 객관성이 있다고 보아주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육사 홀대론’을 이야기하기보다 현 정부가 시대적 요구를 잘 반영해 군 인사에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고 보면 될 듯하다”고 했다.
DMZ 담당하는 전방 소대장의 70% 차지
학생군사교육단, ROTC(Reserve Officers’ Training Corps)는 우리나라 육·해·공군 및 해병대의 모든 장교를 양성하는 ‘최대의 종합사관학교’로 발돋움했다. 해군이 1959년 제도를 도입했고, 육군에서도 1961년 ROTC 제도를 도입했다. 공군은 10년 후인 1971년 처음 시작했다. ROTC는 지금까지 20만 명이 넘는 장교를 배출했다. 해마다 4000여 명을 웃도는 초급장교 배출하면서 한 해 임관하는 소위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거기다 비무장지대(DMZ)를 담당하는 전방 소대장 가운데 ROTC 출신이 70%를 차지한다고 하니 대한민국 국토방위의 대부분을 ROTC 출신 장교들이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ROTC 출신 장교들이 국방을 맡은 지도 이제 6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ROTC 장교들은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그동안 4성 장군인 대장까지 오른 사람이 7명(박세환·김진호·홍순호·조재토·이철휘·박한기‧남영신)이나 되고, 그중 대한민국 군 서열 1위인 합동참모의장에 오른 장군은 2기생 김진호 대장과 21기생 박한기 대장, 육군의 최고 총수에는 23기생 남영신 육군참모총장이 재임하고 있다.
2020년 8월 13일 육군 제37사단 수재복구 현장을 방문해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격려금을 전달했다. 사진=재향군인회
―백선엽(白善燁) 장군이 육군의 ROTC 제도를 처음 도입하려 했다고 하던데요?
“1959년 백선엽 장군께서 육군참모총장을 마치고 제4대 합동참모의장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미국 ROTC 제도를 우리나라 육군에 도입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육군의 초급장교가 절대 부족했던 시기였고, 특히 소대장 요원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을 총장 재임시에 느끼셨던 겁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합참의장에서 물러나 1960년 5월 전역하시는 바람에 ROTC 출범을 시키지는 못했지만, 백 장군님이 결정했던 ROTC 제도는 1961년 드디어 도입돼 1963년 ROTC 1기생들을 처음으로 소위로 배출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 학군장교들이 임관했을 때만 해도 “고려대 출신 아니면 별 달 생각하지 마라”는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만.
“고려대 출신 ROTC 보병장교들이 1~4기까지 연속해서 1차 진급에다 별까지 달자 그런 이야기가 나왔던 걸로 기억해요. 학군 출신의 최초의 대장 1기생 박세환(朴世煥) 장군(2군사령관 역임)을 비롯해 베트남전 참전경험을 토대로 《전투 감각》이라는 책을 펴낸 3기생 서경석(徐慶錫·예비역 중장) 전 6군단장, 4기생 이영대(李永大·육본 감찰감) 소장(1995년 12월 순직) 등이 그 분들입니다. 고려대 ROTC 출신 보병장교들이 연속 두 번 나오고 서울대 학군단 출신 4기생 홍순호(洪淳昊) 장군(전 2군사령관)이 대장으로 진급했습니다.”
김진호 회장은 “이번 총장 취임식장에서 남영신 육군총장(부산 동아대 출신)이 ‘어떻게 육군의 일원이 되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육군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이 시간부터 우리는 모두가 육군 출신이다’라는 말을 했다”며 “그 말이 내빈들에게 상당한 메시지를 주었다”고 했다.
이어 “ROTC 장교들은 자유분방한 대학생활을 통해 다양한 교양을 체득해 문무겸전(文武兼全)한 융통성 있는 사고를 할 수 있는 강점이 있다”며 “4년 동안 엄격한 규율 속에서 군사지식을 습득한 사관생도들에 비해 정신적, 육체적으로는 열세에 있으나, ROTC 출신 장교들 스스로 군대가 요구하는 다양한 상황들에 대해 잘 적응해 나갈 수 있는 잠재력이 풍부한 인재들”이라고 했다.
2019년 2월 20일 일본을 방문해 사토 외무부대신(왼쪽)과 모리모토 사토시 전 방위상(오른쪽)을 만나 한일 군사갈등해소 방안에 대한 상호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사진=재향군인회
―현재 숙명여대와 성신여대, 그리고 이화여대에서 학군단을 창설해 여성 ROTC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2010년 창설한 숙명여대를 비롯해 2011년 성신여대, 2016년 이화여대에서 각 30명씩, 그리고 학군단이 설치된 108개 대학에서 190명 등 매년 총 250명 가량의 여성 ROTC 후보생을 선발하고 있다.)
“2011년 5월 31일 ROTC 창설 50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두고 숙명여대 ROTC 후보생들을 만나 ‘1일 멘토’ 행사를 했습니다. 1991년 딸아이 졸업식 이후 20년 만에 다시 찾았던 겁니다. 시원한 반소매 셔츠에 군청색 바지 차림으로 검은색 베레모를 눌러 쓴 손녀뻘 후보생들의 눈빛이 매서웠어요. 훌륭한 장교가 되기 위해 한국 현대사에 대해 올바로 이해할 것, 머리로 하지 말고 몸으로 배우라고 충고했던 기억이 납니다.”
2017년 9월 12일 재향군인회는 서울역 광장에서 북한 핵 미사일 도발 규탄 국민대회를 개최했다. 사진=재향군인회
연대장의 애견을 먹어버린 초급장교
김진호 회장은 2014년 출간한 회고록 《군인 김진호》(초록문)을 꺼내들더니 ROTC 27기로 까마득한 후배인 기자에게 ‘ROTC 동문!’이라고 붓펜으로 큼직하게 사인을 해주었다. 그가 건넨 회고록을 추석 연휴 기간 동안 펼쳐보았더니 평범한 회고록이 아니었다. 배재고 재학 시절 권투에 빠져 학업을 소홀히 하다 ‘열반생’이 됐지만, 부단한 노력 끝에 고려대 사학과에 입학한 후 군인의 길에 들어서 마침내 합참의장에 오른 김진호 전 합참의장의 인생 역정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에서 태어난 김진호는 밋밋한 군 생활을 거부하고 ROTC 장교모집에 지원한다. 연대장의 애견인 줄 모르고 동기생들과 보신탕으로 먹는 바람에 문책을 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김진호의 패기와 부대대항 체육대회에서의 눈부신 활약으로 모면하는 등 그의 초급장교 시절은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임관 후 2사단 31연대 소대장 시절, 남의 휴가가증을 빌려 서울로 나오다 검문에 걸렸다.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권투, 스케이트, 럭비로 단련된 그는 징계를 면하기 위해 연대 권투선수로 나섰다. 얼마 후 2사단 스케이트팀 감독(소위)으로 3군단 스케이트 대회에서 2사단이 싹쓸이 우승을 하게 하자, 연대 인사주임 김장선 소령(육사 13기)은 군단대회 3연패를 위해 1년간 복무연장을 강권했다. 그게 김진호 장군을 직업군인의 길로 들어서게 할 줄이야.
김진호 대위는 1968년 베트남전에 백마사단 도깨비부대(9사단 28연대 3대대) 군수장교로 참전한다. 그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지 두 달만에 부친 김삼봉(金三奉) 선생이 별세하자 모든 가족이 ‘흔들림 없이 복무하라’는 의미에서 이를 알리지 않았고, 나중에 귀국해서 이 사실을 안 김진호는 아버지께 드리려고 서울로 보냈던 지포(Zippo) 라이터를 보며 통곡한다.
2019년 11월 14일 역대 한미 연합사령관이 재향군인회를 방문해 김진호 향군회장과 한반도 안보정세와 상호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사진=재향군인회
김진호 소령은 육군대학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군인으로 거듭난다. 밤잠을 아껴가며 육군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육본 인사참모부 장세동(張世東) 중령(육사16기‧국가안전기획부장 역임)은 그를 진급방침장교로 선발했다. 김진호 소령은 진급 관련 청탁 때문에 ‘외부장교와 접촉금지 불문율’을 지켜야 하는 진급방침장료로 근무하면서 장세동 중령과 장기를 두면서 업무 추진력이 뛰어났던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8사단 인접연대 근무경험이 있는 노태우(盧泰愚) 당시 청와대 작전차장보(소장)는 5사단 35연대 대대장으로 부임하는 김진호를 위해 손위 처남인 김복동(金復東‧육사 11기, 육사교장 역임)에게 ‘아끼는 부하이니 잘 돌봐달라’는 손 편지까지 써주었다고 한다.
1979년 10‧26 사건 당일, 수경사 30단 부단장으로 근무하던 그는 일찍 귀가했다가 비상소집으로 밤 9시에 귀대해 궁정동 만찬 석상의 참상을 최초로 목격했다. 당시 현장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는 시신 가운데 고려대 60학번 동기생인 박상범(朴相範) 대통령 경호실 수행계장을 발견했다. 허벅지 관통상을 입은 그를 급히 지프에 태워 수도 국군병원으로 보냈고, 박 계장은 YS정부의 초대 경호실장이 됐다.
2019년 7월 27일 워싱턴D.C를 방문, 틸렐리 추모의 벽 재단 이사장에게 향군이 모은 성금 6억3000만원을 전달했다. 사진=재향군인회
1981년 김진호는 대령을 달고 3공수특전여단 부여단장으로 마흔살의 나이에 특전부대의 공수훈련 신병으로 ‘윙’에 도전해 마침내 관문을 통과했다. 3사단 22연대장(백골부대)와 국방부 인사과장, 51사단 부사단장을 거친 김진호는 임관 23년 만에 장군(준장)으로 진급했다. 그가 영천에 있는 제3사관학교 참모장으로 부임했더니 당시 교장은 육사 17기 선두주자인 김진영(金振永) 장군이었다.
김 장군은 수방사령관에서 훗날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기까지 김진호 장군을 각별히 아껴주었다. 이때 학교장을 보필하는 참모장 직위에서 어느 날 훈육관들의 독신자 숙소(BOQ)의 책상과 비품들을 점검하다가 책꽂이에 있는 진보성향의 《한국현대사》를 발견하고 ‘초급장교용 정신훈화 자료’를 만들어 현대사의 왜곡부분을 바로잡았다.
개성공단 건설비용 1200억원 달라는 북한 요구를 거절
―DJ정부의 햇볕정책에도 불구하고 합참의장 재임시절인 1998∼1999년 사이에 북한의 대남 침투와 무력 도발이 집중적으로 발생했지요?
“합참의장으로 있던 1년 6개월간 북한은 동·서·남해안에서 다섯 차례나 도발했습니다. 지하 벙커 합참 지휘통제실과 의장실을 오르내리며 작전을 지휘했던 기억이 납니다. 1998년에 속초 앞바다 잠수정 침투사건, 동해안 무장간첩 침투사건, 서해안 간첩선 침투사건이 잇따라 터졌어요. 당시 김대중 정부의 대북화해 정책을 시험하고, 더 많은 지원을 얻기 위한 북의 화전(和戰)양면 전술이었습니다.”
―합참의장 시절인 1998년 남해안 침투 반잠수정 격침사건은 국내 고정간첩단 일망타진의 계기가 됐지요?
“1998년 12월 10일 틸럴리 사령관이 북한이 남해안으로 해상침투할 것이라는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2주일 뒤 여수 앞바다 해안경계 레이더에서 북한 반잠수정을 발견했어요. 해군 3함대 산하의 고속정 2개 편대를 비롯한 초계함 2척과 P-3C 대잠초계기, 공군의 CN-235 등을 동원해 추적한 끝에 7시간 40분 만에 격침시켰습니다. 반잠수정에서 각종 장비와 문서가 노획되면서 민혁당 재건을 주도한 하영옥 일당과 이석기(전 통합진보당 의원) 등을 검거하는 등 고정간첩단을 일망타진하는 개가를 올렸습니다.”
―1999년 6월 15일 제1연평해전에서 우리가 대승을 거뒀던 요인은.
“함정 등 주요 무기의 성능이 우세한 측면도 있었지만 북한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도발에 대해 합참-해작사-함대사에 이르는 상하급부대가 철저히 대비했습니다. 당시 북한 경비정이 NLL에서 도발하면 ‘교전규칙’에 따라 강력하게 대응하라고 주문해 놓았습니다. 예하부대도 훈련과 지휘체제를 잘 갖춰 정신력 면에서 적을 압도했습니다. 교전 시 북한 측은 수류탄과 기관포로 선제공격을 했으나 이후 우리의 일제사격이 시작되자 14분 동안 단 한 차례도 응사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집중포화를 두들겨 맞았습니다.”
김진호 회장은 2014년 발간한 자서전에서 당시 북한군의 피해 규모를 처음으로 밝히기도 했다. 그는 “우리 통신정보기관에서 당시 북한의 교신내용을 파악한 것으로는 130여 명의 사상자가 확인됐다”며 “교전 피해를 본 북한 어뢰정 1척과 경비정 5척에는 200여 명이 타고 있었고, 침몰한 40t급 어뢰정 탑승자 16명은 모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됐다”고 했다.
―우리 해군의 보완해야 할 점도 나왔을 텐데요?
“NLL에서 남북 쌍방의 교전이 발생하면 북한은 가까운 등산곶에서 해안포나 실크웜(사거리 95~100km) 미사일 등으로 화력지원을 할 수 있었던 반면, 우리는 함정에 함대지 미사일도 없었고 가까운 육상의 지원화력도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우리 해상 전력이 북한의 지원화력에 노출되어 있는 취약점을 빠른 시간 내에 보완해야 한다고 평가했습니다. K-9 자주포를 배치하는 한편 함정에 함대지 미사일을 탑재하도록 전력화를 요구하고 합참의장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2000년 11월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 때 해군, 합참, 국방부 관계관의 잘못된 전력증강사업 및 전력배치로 이러한 도발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생각에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김 회장은 전역 후 한국토지공사 사장을 지내면서 2003년 개성공단 조성에도 간여했다. 그는 “애초 북측에 토지 임대료와 장애물 철거비용으로 80억원을 주기로 했었지만, 북측이 갑자기 그 15배인 1200억원의 보상비를 요구했다”며 “터무니없는 북측의 요구를 들어주자는 통일부 의견도 있었지만 ‘민간차원의 경협이 경제 외적인 논리에 휘둘리지 말고 원칙을 지켜야 북한을 끌고 갈 수 있다’며 노무현 대통령을 설득해, 결국 160억원을 지급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고 했다.
“2004년 6월 30일 개성공단 준공식이 열렸고, 준공식장에서 나는 북한과의 경제협력사업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뼈져리게 느꼈습니다. 북한의 막무가내식 ‘벼랑끝 전술’에 우리가 놀아나면 안 된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입니다. 현재 정부의 일관성 없는 대북정책 때문에 북한이 우리를 얕잡아 보고 공깃돌 갖고 놀 듯합니다. 나는 개성공단을 쉽사리 폐쇄할 수 없다는 북한의 약점을 간파하고 있었기에 북한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북한이 9‧19남북군사합의를 통해서 노리는 것은 오르지 ‘돈’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카드로 잘 활용하면 남북관계의 실마리가 풀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국민의 생존권 앞세우는 정책지지
올해는 6·25전쟁 70주년이자, 한·미동맹 67주년이다. 김진호 회장은 “미국은 대한민국 공산화를 막기 위해 연인원 179여 만 명을 참전시킨 피로 맺은 혈맹”이라며 “한·미동맹을 해치는 그 어떤 행위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향군은 한국전참전용사에 대해 잊지 않겠다는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미국 워싱턴에 ‘추모의 벽’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해 6억 3000만 원을 모금해 전달하기도 했다.
합참의장 시절 1차 연평해전을 치렀고, 북한의 핵실험에 맞서 독자적 핵무장을 주장하고, 전작권 전환의 신중함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강경보수주의자’ 김진호 회장은 최근 곤욕을 치렀다. 그는 남북군사합의 직후인 2018년 8월엔 북한 비핵화를 위해 미 트럼프 대통령을 적극 지지해 달라는 미주지역 특강을 했다가 “빨갱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는 “향군은 국가와 국민의 생존권을 앞세우는 정책에는 정권에 관계없이 지지할 것”이라며 “안보는 절대로 진영논리로 바라볼 대상이 아니다”라고 했다.
―9‧19 남북군사합의를 지지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나요.
“나는 1964년 소위로 임관하자마자 대간첩작전에 투입됐고, 평생 군생활을 통해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시달려온 사람입니다. ‘9‧19 남북군사합의서’의 핵심은 쌍방은 상대방 지역으로 공격‧침투‧점령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합의문을 뒤집어 보면, 군사도발를 포기하는 ‘포기각서’를 북한이 써준 겁니다. 북한은 1953년 휴전 이래 3000여 회의 군사도발을 해 왔음에도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9‧19군사합의는 분명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려는 북한의 전략적 변화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전략변화를 간파하고, 우리의 압도적 경제력을 바탕으로 대응전략을 갖춰나가면서 비핵화를 추진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여권을 중심으로 친일 인사를 현충원에서 ‘파묘(破墓)’하는 ‘국립묘지법 개정안’을 추진 중입니다.
“일제의 강압적 체제 아래서 일본군 경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파묘 대상이라는 주장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이분들은 창군 2년 만에 발발한 6‧25전쟁에서 목숨 바쳐 한반도 공산화를 막아낸 전쟁 영웅들입니다. 이분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파묘를 주장하는 것은 ‘국군의 뿌리를 흔드는 행위’입니다.”
―한일 군사관계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2018년 말 일본 해상초계기의 우리 해군함정 위협비행으로 촉발된 한일 간 군사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향군 차원에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요?
“일본 모리모토 사토시(森本敏) 전 방위상, 가와노 가츠토시(河野克俊) 통합막료장, 모리 쓰토무(森勉) 전 육상막료장 등을 만나 양국 간 군 원로 차원에서 회동을 통해 한·일 군사 갈등 문제를 해결하자고 머리를 맞댔습니다. 특히 ‘2019 서울안보대화’ 참석차 지난해 9월 방한한 모리모토 사토시 전 방위상과 만나 초계기 사건 해결에 양국 예비역들이 나서기로 했습니다.”
김진호 회장은 최근 미국·인도·일본·호주 등 4개국 외교장관이 도쿄에서 만나 4개국 안보회의체인 쿼드(Quad)회의를 개최하는 것과 관련, “현 정부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입장을 정리하기가 매우 힘들 것”이라며 “합참의장 시절,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참석해 우리의 안보 기조를 한‧미‧일 3각 군사동맹을 기본 축으로 하되, 중국과는 경제협력국으로서의 위상관리를 해나간다는 입장을 천명했는데, 우리 정부는 이러한 스탠스를 대외적으로 확실하게 천명해야 한다고 본다”고 했다.
대한민국 정통성 부정 세력에 단호하게 대처
재향군인회는 2017년 8월 11일 제 36대 향군회장으로 김진호 예비역 육군대장이 취임하면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 조직을 안정시켜 향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 중이다. 2017년 10월 8일 창설 65주년을 맞아 ‘향군 정체성선포식’을 갖고, ‘향군은 안보단체’란 정체성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향군 창설 68주년을 맞은 감회는?
“10월 8일 창설 68주년을 맞아 대한민국과 5000만 국민의 생존권 수호를 위해 안보단체로서의 역할과 사명을 충실히 수행해나갈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합니다. 특히 최근 일부 정치권과 사회일각에서 이승만(李承晩) 초대대통령과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을 친일로 몰아가며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고 호국영령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데 대해 강력하게 대응할 것입니다.”
―앞으로 재향군인회를 어떻게 끌고 가실 계획이신지요?
“장기적으로 발전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직의 기반이 되는 정회원의 확대, 향군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자립기반의 구축, 국민 속의 향군으로 거듭나기 위한 국가 발전과 사회공익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설 것입니다. 이와 함께 대한민국 국군의 위상을 높이며, 대한민국 안보의 핵심인 한·미 동맹 강화를 위한 국민운동을 전국 조직을 통해 확산시켜 나갈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