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頓悟)

-박종덕

앞뜰에 새 한 마리 놀러왔다

읽고 있는 책 한 페이지를 넘기자

놀고 있던 새 한 마리 날아갔다

다음 페이지에서 어린 아이는

불치의 병으로 세상을 뜬다

묘한 인연이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낯선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오늘은 내가 태어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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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독(愼獨)

눈 쌓인 지붕 위의

검은 고양이

멈춘 듯

한 발 또 한 발

폭설에 묻힌

벼랑 끝 암자

끊어질 길 앞의

수도승처럼

좋은 시인과 시집을 발견했다. 무엇보다 언어의 성(城)을 쌓을 줄 아는 시인이다. 화학을 공부한 후 관련 산업계의 일선에서 엔지니어 경영자로 생활했다는 사실도 놀랍다.

시작(詩作)이 궁극적으로 말놀이의 방법적 탐색이라 할지라도 시인의 상상력은 신인답지 않게 남다른 깊이가 있다.

서사시 같은 묵직한 부제를 단 연작시들도 흥미롭다. ‘저마다 꽃’, ‘짐 진 자들의 노래’, ‘빛나는 노을’, ‘언어와 세계’, ‘의식과 시공’ 등 습작기의 냄새가 나지만 진지하고 깊이 있게 언어 세계를 탐색한다.

여러 인상적인 시들도 있지만 ‘돈오(頓悟)’라는 시가 가장 와 닿았다. 8행 안에 연기법(緣起法) 같은 불교적 깨달음이 느껴졌다. 우주적 상상력이랄까. 표제시 ‘양털 깎는 남자가 우주를 사라지게 한 이유는 없다’는 시도 몇 번 읽었다. 뭘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어렴풋한 무엇이 느껴졌다.

이런 거대 담론의 시를 쓰는 시인을 근래에 만난 적이 없다.

이충재 시인은 시집 발문의 제목을 ‘창조적 세계를 관통하는 의식(意識)과 시(詩)의 힘’이라고 썼다. 가슴이 아닌 머리로 쓴, 지적인 시면서 통 큰 상상력의 힘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