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14년 11월 공연 〈김백봉, 춤의 아리랑〉에서 김백봉 선생이 커튼콜을 받고 무대에 올라 인사를 하고 있다.
〈부채춤〉과 〈화관무〉를 창시한 한국 근대 무용의 개척자 김백봉(金白峰·본명 忠實·1927년생) 선생이 지난 1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6세.
20세기 한국무용의 개척자가 최승희·조택원·한성준이라면 김백봉은 한국무용 르네상스의 정점이었다.
기자는 6년 전 경기도 고양에서 선생을 만나 인터뷰했다. 당시만 해도 건강해 보였고 아흔이란 나이가 무색할 만큼 기품이 있었다.
두 딸 경희대 무용학부 안병주(安秉珠) 교수와 안병헌(安秉憲) ‘김백봉춤보전회’ 상임이사도 어머니의 맥을 열심히 잇는 무용가다.
최승희(崔承喜·1911~1967)의 제자였던 김백봉 선생은 그녀의 ‘모던 댄스’를 정통으로 계승했다. “김백봉의 무용은 최승희의 영향을 받았지만 스승을 능가하는 완성미와 창의성이 빛난다”(서연호 고려대 명예교수)고 할 만큼 김백봉은 한국을 대표하는 예인(藝人) 중 한 명이었다.
김백봉 선생의 생전 말씀이다.
“연습실 열쇠구멍으로 훔쳐보며 기본기를 익혔어. 선생님(최승희)은 자기 작품을 전수하진 않으셨어요. 무용을 할 수 있는 예술적 역량을 가질 수 있게 가르쳤던 겁니다. 제가 처음 최승희 공연을 봤을 때 선생님의 눈동자가 소의 눈처럼 크게 느껴졌고 저만 쳐다본다고 생각했어요. 공연을 같이 본 사람들 모두가 똑같이 자신을 쳐다본다고 느꼈다는 겁니다. 그때 선생님의 눈길, 무용가와 객석의 교감이랄까, 시선 처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배우게 된 겁니다. 저는 미련했어요. 남의 생각을 한 일이 없어요. 제 생각대로 (작품을) 만들어 보려고 열심히 했어요. 요새 사람들은 그런 가르침을 참지 못할 겁니다.”
김백봉 선생이 2012년 〈부채춤〉 공연을 하고 있다. 그녀는 “우리 가락의 멋과 흥을 몸으로 표현하는 춤이 잘 추는 춤”이라고 말했다.
김백봉 선생은 15살 무렵인 1941년 6월 최승희를 처음 만나 도쿄의 최승희무용연구소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연습은 물론 청소, 빨래, 부엌일 등 궂은 허드렛일을 하며 무용을 배웠다.
1년6개월 뒤인 1942년 12월 도쿄 제국극장 공연에서 〈궁녀무〉를 추어 정식 데뷔했다.
고인은 1947년 평양 국립극장에서 제1회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최승희에게서 점점 독립해 자신만의 무용세계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작품 〈계월향〉 〈농촌풍경〉 〈지효〉 등과 함께 그녀의 대표작인 〈고전형식〉(이후 〈화관무〉로 명칭이 바뀐다)을 처음 발표했다. 김백봉 선생의 말이다.
“(평양에서 발표회를 갖던) 그날 최 선생님이 우셨어요. ‘네 공부가 무섭다’ 칭찬하시고 눈물을 닦고 가셨어. 평양서 군무 같은 건 제가 다 손댔지 선생님은 안 하셨어. 소도구는 대동강 물 떠다가 염색하고… 무용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어요.”
김백봉 선생은 1948년 소련과 동구권 여러 도시를 돌며 순회공연을 가졌고 그때 러시아에서 볼쇼이발레 공연을 보았다고 한다. 이듬해 북한의 방중(訪中) 예술단 안무자 겸 주역 무용수로 중국을 순회한 일도 있다.
김백봉의 남편 안제승(安濟承·1922~1998)과 최승희의 남편 안막(본명 安弼承·1910~미상)은 숙명의 대칭관계였다.
안제승의 형이 최승희의 남편 안막이다. 안막은 일제시대 프롤레타리아 시인이자 평론가로 문필을 날렸던 월북작가다. 그는 1931년 10월 조선공산당 재건공작 사건에 연루돼 작품활동을 못하게 되자 이후 최승희의 매니저로 활동했다.
안제승은 경성제1고보(현 경기중)를 중퇴하고 니혼대 영화과에 입학해 2년간 수학하며 형과 형수의 공연을 도왔다. 요즘으로 치면 공연 스태프로 일했다. 그 시절, 김백봉은 ‘하늘 같았던’ 최승희의 제자였으나 1944년 안제승과 결혼하며 최승희와 동서지간이 됐다.
안제승·김백봉은 1951년 1·4후퇴 당시 월남행을 택한다.
1953년 서울에 정착한 김백봉은 서울 낙원동에 무용연구소를 열고 최승희가 없는 혼자만의 무용세계를 열어 갔다. 이듬해 11월 26일 첫 작품발표회를 열었는데 이 공연은 한국 신무용 사상 중요한 분수령이 되는 공연이었다는 평이다. 안병주 교수의 말이다.
“아버지는 이 공연이 ‘전후 무용계 기성층의 괴멸과 공백에 서광을 비춘 명실상부한 재건의 날’이라고 평가하셨어요. 이 공연의 무용사적 의의는 〈부채춤〉과 〈화관무〉가 남상(濫觴) 됐다는 것입니다.”
두 작품은 김백봉 일생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독무로 또는 군무로 변주돼 많은 국내외 무대에서 공연됐다. 오늘날 한국 춤을 상징하는 대표작 반열에 올랐다. 안병헌 이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부채춤〉은 펴고 접는 죽선과 한지의 소박하고 운치 어린 지음(紙音)을 타고 마치 만개한 꽃이 춤추듯 움직이는 춤인데, 1954년 김백봉에 의해 예술적으로 새롭게 창출되어 발전한 작품입니다. 〈화관무〉는 1947년 10월 초연 당시 〈고전형식〉이란 독무로 추어졌어요. 이후 1988년 서울올림픽 식전행사에 남녀 2000명이 함께 춘 군무로 세계인에게 감동을 주었죠.”
선생은 자신의 무용단과 대학에서 무용을 가르치다 1964년 경희대 무용과 조교수로 자리를 옮겨 1992년 정년을 할 때까지 재직했다. 2007년 5월 서울시무용단 예술감독으로 현역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햇수로 따져 65년간 무용 현장을 지켰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