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慶男
⊙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캐나다 토론토 거주.
⊙ 저서: 《부부의 십계명》 《노년학을 배웁시다》 《성지의 향기》.
⊙ 역서: 《고독》 《꿈꾸는 어른》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 역술서: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 《윤치호 일기 제4권에 나타난 역사의 흐름》.
⊙ 現 국제펜클럽본부 회원, 한국번역가협회 회원, 좌옹 윤치호 문화사업회 이사.
⊙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캐나다 토론토 거주.
⊙ 저서: 《부부의 십계명》 《노년학을 배웁시다》 《성지의 향기》.
⊙ 역서: 《고독》 《꿈꾸는 어른》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 역술서: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 《윤치호 일기 제4권에 나타난 역사의 흐름》.
⊙ 現 국제펜클럽본부 회원, 한국번역가협회 회원, 좌옹 윤치호 문화사업회 이사.

- 윤치호가 고종의 아관파천을 기록한 1896년 2월 11일자 육필일기.
| 1896년 1월에 일어난 일들 ● 민비는 시해당했고, 친일세력들은 임금과 세자를 경복궁에 감금하고 있다. ● 친일내각은 어윤중과 유길준이 주도하고 있으며 단발령을 강행하다. ● 임금을 구출하려다 실패한 춘생문 사건으로 윤웅렬이 상해로 피신하다. ● 친미 각료(이완용, 이윤용, 이하영, 현흥택, 민상호)들은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해 있다. ● 민비시해에 가담했던 일본 군인들에게 조선 임금의 이름으로 포상금을 주다. ● 윤치호가 연금해제(軟禁解除)를 받다. 윤치호를 친일 진영에 끌어들이려 한다. ● 서재필이 11년 만에 특별사면을 받고 미국 시민이 되어 귀국하다. 법무대신이 되기를 원했으나 외국인 신분이어서 중추원 고문직을 맡았다. ● 필립 제이손(서재필) 박사가 윤치호에게 국영문 신문 발행을 도와달라는 와중에 유길준은 신문 발행을 방해하고 있다. ● 유길준이 도피 중인 이규완과 신응희를 불러들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 1896년 1월에 등장하는 주요인물 ● 김홍집(53세): 친일내각의 총리대신. 아관파천 직후 군중에게 타살됨. ● 어윤중(47세): 탁지부 대신, 친일내각의 수장. 아관파천 후 고향에서 피살됨. ● 유길준(39세): 친일내각의 실세. 아관파천 직후 일본으로 도피. ● 박영효(35세): 개화파의 수장이었으나 역모의 혐의를 받게 되자 일본으로 도피. ● 이윤용(41세): 이완용의 서형(庶兄). 대원군의 사위. 경무사(경찰청장), 미국 공사관에 피신 중. ● 이재순(44세): 철종의 조카. 주일 공사 역임. 춘생문 사건을 주도했던 왕족. ● 언더우드 박사(36세): 장로교 선교사. 임금을 구출하려고 함. 윤치호를 보호하고 있음. ● 릴리아스 언더우드(44세): 언더우드보다 8세 연상의 부인. 의료 선교사. 자상한 여인. ● 웨베르(54세): 러시아 공사. 고종 임금이 의지하는 외교관. |
1월 1일. 수요일.
서울. 연금 상태로 피신해 있는 언더우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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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9년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는 조선땅에서 결혼해 신혼여행을 겸한 서북지방 일대 답사에 나섰다. 사진은 선교여행을 떠나는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왼쪽 세 번째와 다섯 번째)와 짐꾼들. |
낮에는 손님들의 방문으로 소일했다. 온통 흥분의 도가니다. 모두 눈물을 흘리며 이를 갈고 있다. 서울 전역에 단발령(斷髮令)을 내린 것이다. 조정에서도 상투와 망건 쓰는 것을 금지했다. 이번 일로 인해 폭동이 일어날까 봐 공포에 떠는 사람도 있다. 일본 군대가 출동해 그 폭동을 막아주라지.
국모가 일본놈들에게 시해당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비굴하게 냉담하고 무관심하게 굴던 백성들이 지금 와서 뭔가 행동을 일으키려 하는구나. 명령에 잘 따르도록 길든 조선 사람을 위해서 혹은 그들과 더불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게 확실해진다. 조선 사람들의 그런 씨알머리 없는 소리에는 한 푼어치도 동조하지 않을 테다.
조정에서 상투를 자르는 개혁을 단행하기 전에 마음과 정신 개혁을 먼저 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넋두리나 해야겠다. 백성들을 개화시키기 위해 상투 자르기를 시행하려면, 조선 사람의 경우 많은 시간을 공들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조정이 왜 백성들을 쓸데없이 서둘러 상투를 풀게 강요했는지 알 수 없다.
언더우드 박사 부인은 우리 조선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는 분이다. 그렇게 생각해 주는 사람도 많지 않기에, 나는 그 아름답고 작은 체구의 부인이 친 조선파의 감정을 간직한 것을 존중하고 진심으로 고맙게 여기고 있다. 오늘 아침 내가 유길준에게 보낸 쪽지에 대한 답장이 왔다. 외국으로 나갈 생각 말고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1월 3일. 금요일.
상쾌한 날씨. 서울
어젯밤 한 달 만에 집에 갔다. 한 달에 한두 번 들를까 말까 한다. 집에 가서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아내를 만난다는 것은 이 와중에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오늘 아침에 사랑하는 아내가 내 머리를 깎아주었다.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내가 숨어 지내는 언더우드 박사 댁으로 다시 돌아왔다.
1월 5일. 일요일.
구름이 끼고 추운 날씨. 서울
유길준과 어윤중이 지난해 11월 28일의 춘생문(春生門) 사건 이후 그 사건에 연루되어 연금 상태에 있는 나를 도와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와주기는커녕 도와주려는 기색도 없다. 저들은 일이 잘되면 생색이나 내려는지 현재 나의 연금 상태를 풀어주는 일을 질질 끌고 있는 것 같다. 여하간 친절한 언더우드 박사님 내외에게 오랫동안 폐를 끼치는 일이 가장 불편하다.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지금은 박영효의 권력이 판치는 세상이다. 그래서 궁중파의 힘이 막강하다. 유길준과 어윤중의 기반이란 일본의 협조에 강하게 기대고 있어, 반대파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현 조정은 지난번의 내각보다는 오래 지탱할 것 같다.
상해의 맥킨토시 가족사진을 받았다. 엊그제 그레잇 하우스 장군의 부하인 존이 다른 건달패의 무리처럼 경찰복을 입고 나타났다. 강제로 상투를 자른 사람의 상투 수효는 40개나 된다고 한다.
1월 6일. 월요일.
푸근하고 맑은 날씨.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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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년 8월 31일 《하와이안 가제트》는 1면에 고종 삽화를 게재했다. ‘리 한국의 왕(Li, The King of Korea)’이라는 톱 제목과 함께 ‘중국과 일본 여전히 싸움’ ‘한국의 왕 스스로 황제 독립 선포’ 등 조선의 어지러운 정세를 분석하는 장문기사였다. |
어윤적(魚允迪)이 내 어머님께 말하기를, 유길준과 어윤중이 지난해 11월 28일 춘생문 사건 이후에 내가 외국으로 도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의 보호하에 두려고 한다는 것이다. 중전마마와 대원군은 모두 조선에 대한 정치적 음모를 꾸미는 두 축이었다. 이제 한 분은 세상을 떠나셨고, 다른 한 분은 쇠퇴했다. 현재 조정은 지난번 내각보다는 좀 더 낫고 오래 유지될 것 같다.
어머님으로부터 쪽지 하나를 받았다. 오늘 오후부터 우리 집을 형사들이 감시하고 있다면서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려는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혼란스러웠다. 요즘 몇 해 동안 오직 내가 바라는 것은 지금의 연금 상태에서 풀리고 만사여의(萬事如意)하게 되어 내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최근 일본 신문에 따르면, 왕비를 살해하는 데 동조한 관리들이 히로시마 교도소에 갇혀 있다고 한다. 그중의 한 관리가 그때 받은 포상금 내역을 밝혔는데, 그 포상금 1300달러를 조선 왕의 이름으로 받은 것으로 명백히 기재하고 있었다. 내역은 이시모리 대좌, 마야와라 소좌 각각 300달러, 무라이 대좌, 고히토 대좌 각각 200달러, 다카마쓰, 마키모토, 후지타 각각 100달러였다.
어느 날 이윤용과의 대화 중 그가 말하기를, 이윤용과 피신해 있는 일당(이완용 등 4명)이 얼마 전 개입하여 왕실 명의의 사업을 깨버렸단다. 그들이 하루 이틀 안에 조정을 그들 손아귀에 넣으려고 했단다. 그들은 장차 다시 세력을 회복한다는 보장이 없었으므로 단발령 시행에는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엉뚱한 소리나 하는 자들이여!
지금 미국 공사관에는 4명이 피신해 있다. 이윤용, 이완용, 이하영, 현흥택 등이다. 이들 중에 현흥택은 내가 제일 괜찮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지난해 왕비시해 사건 때 그가 일본군을 공격하면서 보여준 믿음직하고 용감한 행동으로 인해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사실 그에게는 이윤용이나 이완용과는 다른 성실한 인간미가 있었다.
현흥택은 한때 나를 왕비시해의 공모자로 의심했었고, 회의에서 만날 때마다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해 11월 28일에 일어난 춘생문 사건 때 오해를 풀었고, 우리가 악수를 나눈 다음부터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나는 이하영이라는 사람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는 상감께 특히 왕비 전하께 박영효가 도피한 뒤에라도 나를 보살펴 주시도록 부탁한 사람이다.
1월 9일. 목요일.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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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년 전인 1894년 12월 3일 뉴욕의 《이브닝 월드》가 ‘은둔의 왕국(Hermit Kingdom)’ 조선의 왕궁에서 고종(1852〜1919)을 알현하고 인터뷰했다. 2014년 10월 8일 뉴시스가 보도한 ‘조선의 왕이 말하다(Korea’s King Talks)’에서 제임스 크레블맨 특파원은 고종은 물론, 대원군(1820〜1898)과도 인터뷰했고, 고종의 뒤에서 병풍 너머로 바라보던 명성황후(1851〜1895)에 대해서도 상세한 묘사를 했다. 기사엔 고종과 왕세자, 명성황후, 대원군의 이미지와 고종을 알현한 근정전과 일본 공사관 그리고 자신의 모습 등 총 7개의 삽화를 함께 게재했다. |
이범진이 보자고 해서 그를 만났다. 그는 내게 상감 전하의 밀사로 가는 이학균과 함께 러시아에 갈 의향이 있는가를 물었다. 생각해 봐야겠다고 대답했다. 하긴 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가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 가는 건 싫다. 여느 곳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의 주권을 포기하는 따위의 불명예스런 사절단에는 끼고 싶지 않다.
나는 연금 상태의 언더우드 박사의 집에서 이윤용 일행이 피해 있는 미국 공사관 옆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방이 춥다. 나의 새로운 거처가 언더우드 박사의 환대받던 가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불편하다. 하지만 이곳이 내 집 안방이거니 마음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유길준의 말에 따르면, 김홍집 총리대신이 상감 전하에게 이규완(李圭完)과 신응희(申應熙)를 다시 부르시도록 진언했다는 것이다. 그 두 사람은 박영효와 함께 일본으로 도망간 사람들인데, 그들에게 벼슬을 주자고 했단다. 상감 전하는 이규완과 신응희가 역적이라고 하시면서, 앞으로 박영효와 마찬가지로 내 앞에서 그자들 이름을 거론하지 말라고 하셨단다.
나는 그런 유길준의 교묘한 연기는 믿지도 않는다. 최근에 와서 김홍집과 유길준과 그 일당은 전하가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지도 않는다. 진작 그랬더라면 왕비가 시해당하시는 일도 없었겠지만. 사실 김홍집과 유길준, 그리고 그 일당은 박영효를 독버섯처럼 싫어했다. 그러므로 이번 이야기는 자신의 속셈을 감추려고 조정과 연합한 것처럼 날조해 낸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1월 15일. 수요일.
아주 푸근한 날씨.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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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6년 4월 7일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 박사. |
한 가지 더 있다. 유길준이 내게 말하기를, 박영효가 도피하던 날 밤에 상감이 군인들을 시켜 박의 집을 포위하고 그 자리에서 죽이라는 명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길준 자신이 자기 재량으로 그 유혈을 막은 것처럼 말을 한다. 그런데 현흥택의 말은, 박영효의 집을 군인들이 포위하고 공격하자는 것을 현흥택이 말렸다는 것이다. 경찰과 법부에 문제가 생기므로 대궐 근위대를 동원할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유길준은 자신을 뽐내는 일에는 가장 뛰어난 모사꾼이다. 그는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원칙이나 예의나 자존심도 없는 사람이다. 거짓말을 자랑삼아 하면서 사실처럼 우겨댄다. 정직한 사람을 건드리는 것보다는 거짓말하는 일이 더 빨리 성공하는 지름길이라고 믿는 모양이다. 결국 그는 주사직으로 시작하여 1년에서 1년 반 사이에 대신(大臣) 반열까지 올라 세력이 커진 셈이다.
서재필 박사는 언더우드 박사에게 지금 도쿄에 있는 내 사촌 치오(致旿) 이야기를 했다. 치오는 친일파일 뿐만 아니라 현 내각에도 관심이 있더라고 말한다.
1월 16일. 목요일.
서울
감기가 들어 하루종일 고생이다. 어두워진 후에 가마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그 누구도 내 사랑스런 아내가 내게 해주듯 아름답고 부드러운 사랑의 천사 같은 고귀한 마음씨를 따라갈 이가 없으리라. 헤어졌다 다시 돌아오는 아들을 대하는 어머님의 안타까운 심정도.
유길준은 이윤용이 지방을 돌아다니며 소요를 부추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런데 유길준이 내게 하는 말은, 현흥택이 서울 밖으로 자주 왕래하면서 전하와 대화를 나누곤 한다는 것이다. 왕비 전하를 잃은 전하의 슬픔을 자꾸 일깨워드려서 전하를 더 슬프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도 전하의 슬픈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현흥택이 그렇게 못 하도록 하는 것이 전하의 심기를 편하게 해드리는 일이오”라면서. 그렇게도 다정하고 사려 깊게 전하의 건강과 기분을 걱정하는 유길준의 말에 나는 폭소가 터지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나는 아무래도 그들과 한 패거리가 될 재주는 없다. 그의 양면성을 보면서 의문이 커져 갈 뿐이다.
1월 21일. 화요일.
매우 춥다.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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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집 내각의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 1896년 2월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내각이 붕괴되고 친러 정권이 수립되자 ‘왜대신(倭大臣)’으로 지목되어 광화문 앞에서 군중에 의해 타살당했다. |
홍천, 원주, 춘천 등의 지방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조정에서 경계령을 내리고, 말썽이 난 지방으로 군인들을 파병하고 있다. 이악스런 조선 사람들은 말하기를, 일본의 개화기에 영국이 강압적으로 일본 사람들의 상투를 자르게 했을 때 한 사람에게 1000냥 혹은 40달러와 양복 한 벌씩을 주었다고 한다.
나는 이완용이 정말 싫다. 그의 특권 의식과 저질스러운 교활함이. 족제비 같은 뒷거래를 좋아하는 그가 평범하거나 하류층에 속하는 사람을 대하는 노새 같은 완고함이 싫다. 그러면서도 그는 권력자 앞에서는 강아지처럼 알랑거리며 순종한다. 이런 온갖 행위가 나도 모르게 그에게 적대감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세우고 싶어 하는 사대부 혹은 선비학교는 그를 위해서라도 따로 세워 다니게 해야겠다.
그는 또 이런 사람이다. 박영효가 축출된 후에 내각에 알리기를, 상감 전하께서 칙임관(勅任官)의 반열에 따라 관리들의 권한을 부여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 대통령이 공화국의 하급 관리들에게 약속했던 내용이라며 이완용이 전하에게 여러 번 진언했던 내용이었다. 그는 소인배 인격자임에 틀림이 없다.
어느 날 경찰이 종각 옆에서 망건(網巾·상투를 튼 사람이 머리카락을 걷어올려 흘러내리지 않도록 머리에 두르는 그물처럼 생긴 물건-옮긴이) 290개를 불태웠다고 한다. 그 망건들은 시골 상인들이 이웃에 팔려고 사놓았던 것들이었다. 물론 왕비시해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궐 안에서 왕비의 정치적 영향력을 없애고 싶었던 무리들도 그런 목적을 세웠던 행위를 변명할 여지가 없다. 나는 이따금 나의 이모부인 이건혁(李建赫)에게 또 한 번 민씨 파벌들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해도 왕비는 피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씀드리곤 했다. 왕비 전하의 적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왕비 전하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하나같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비를 구제하는 방법은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그 당시 왕비는 절망적인 병폐를 안고 계셨기 때문이다.
내게 격의 없는 우정을 가진 김노완(金魯莞)이 찾아왔다. 그는 이 세상에서 오직 나의 출세와 행복에 관한 생각뿐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그가 누구의 사주를 받았다고 해도 그를 믿는다. 그는 확실히 현명한 사람이다. 어윤중이 그를 배후에서 사주하고 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일 테니까.
1월 23일. 목요일.
춥고 맑은 날씨. 서울
오늘 아침에 김노완이 나를 찾아와서 유길준이 어제 그에게 써준 편지를 보여주었다. 나의 지명 수배 해제와 연금 해제를 문서로 보장한 것과 같은 내용을 외부대신에게도 보냈다고 한다.
캔들러 박사와 리이드 박사, 상해의 알렌 박사에게 답장을 쓰고, 아직도 춘생문 사건으로 인해 상해에 피신해 계신 아버님께도 상서했다.
1월 24일. 금요일.
푸근하고 맑은 날씨. 서울
오늘 오후 1시에 세관의 브라운 씨가 내게 나의 연금 해제령을 전해주었다.
〈윤치호 귀하! 그대가 연금 상태에 있음을 유감스럽게 여기노라. 그러나 이제 그대의 과거지사를 묻지 않고 특별 사면하겠노라. 그러므로 조정은 연금 상태를 해제하여 가정으로 안전하게 돌아가기를 바라노라. 건양 원년 21일 음력 1월 21일 관인.〉
두 달 동안의 피신생활을 마치고, 오늘 오후 밝은 대낮에 처음으로 집에 걸어 들어왔다. 붙잡히면 어쩌나 하는 공포심과 조바심을 가질 필요 없이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지난봄 아버지와 나는 시라가와마루호의 갑판 위에 함께 서 있었다. 아버지는 중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마자 일본의 제물이 되고 만 조선의 최악의 상태를 비통해하며 내게 이야기하셨다.
“네가 아무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네 장래 일을 걱정하지 마라. 조선이 정권을 잡을 날도 머지않았다. 뱀 같은 일본이 희생양인 불쌍한 우리 조선의 목을 매일같이 조이고 있다 해도 말이다. 요즘 조선의 나라 꼴이나 사람들 꼴을 봐도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구나. 그저 가능하면 직장에서 빨리 출세하는 길로 오르는 데 만족하고 있으면, 그때 너도 좋은 봉급을 받게 될 거다….”
나는 아버님이 놀라운 세계관을 가진 안목으로 충고하시는 말씀에 충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난해 내 직무기간 중에 한 푼어치의 일을 안 하고도 연금 상태에서 134달러를 받았다.
집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 사람 100명 중 한 명이 그나마 빈약한 봉급이라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계공이나 손님을 상대하는 상점 주인이나 다를 게 없다. 분명한 한 가지 이유와 결론은 조선이 너무도 가난한 나라라는 점이다. 어떤 여자 손님이 비단 옷가게에 들어섰다. 상점 주인은 아주 무심하게 그 여인을 쳐다본다. 여인이 주인에게 물건 좀 보여달라고 말하면, “아, 그 물건들은 볼 필요도 없어요. 분명 좋아하지 않으실 텐데요, 뭘!” 이런다.
오늘 오후 3시에 나는 하인을 시켜 목공소에 가서 책장을 맞춰오라고 일렀다. 그런데 목공이 안 나왔다고 한다. 그 목수가 일하러 나오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더 참담하고 실감나는 예가 있다. 목유신(睦裕信)씨가 언젠가 말해준 이야기이다. 조선 사람을 개혁시키려면 여러 해 굶겨야 한다고. 사람들이 그런 끔찍한 재난, 즉 밥 한술 벌지 못하는 것을 나라 탓으로 돌리는 사람은 그 재난에서 구해달라고, 마음에도 없는 기도라도 하느님께 드릴 것이다. 그러다가 생계를 위한 투쟁을 여러 해 동안 하고 나면, 그 사람은 현재 하고 있는 일보다 더 열심히 일하려고 분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1월 25일. 토요일.
따뜻한 날씨. 서울
오후에 김홍집 총리를 방문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자상하고 부드럽게 나를 맞아주었다. 그는 내게 왜 좀 더 일찍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때 나는 왕비 전하께서 내게 하문하시던 일이 떠올랐다. 지난가을에 십 년 만에 귀국해서 왕비 전하를 알현했을 때, “너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조선을 떠나 있었느냐”고 물으셨다.
평상시엔 친밀하고 착한 얼굴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괴롭히던 유길준을 만나러 갔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 만한 적당한 인물을 찾아낼 수 없다고 푸념이다. 좋은 일이다. 유길준이 머지않아 그의 자리와 권력을 내어놓게 되면 돌아가신 중전마마께서 기쁘게 환궁하시리라.
1월 26일. 일요일.
푸근하고 맑은 날씨. 서울
점심을 간단히 들고, 외부대신 김윤식을 방문했다. 그의 말은 언더우드 박사가 자신의 개혁안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분 나쁜 생각을 달래기 위해서 그는 평온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한다.
군부에 있는 어윤중의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순수하고 기쁜 마음으로 친밀하게 맞아준다. 내가 그에게 나를 러시아로 보내달라고 청하자, 아직은 아무에게도 그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내가 해외로 나가려고 한다면 유길준 같은 사람이 내 의도를 의심할 게 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출세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워볼 터이니, 조용히 기다리라고 한다. 유니온교회에서 예배드렸다.
1월 27일. 월요일.
바람 불고 추운 날씨. 서울
한세진(韓世鎭)이 나를 찾아와, 격의 없는 우정을 나누며 기분전환을 했다. 그는 김노완이 나를 일본 주재 공사로 보내려 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김노완이 과연 그럴 능력이 있을까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다행히도 그 자리는 추호도 맡고 싶은 생각이 없다. “잘 지켜보게.” 한세진의 말이다.
“모든 국가가 걸어가는 길이 얼마나 다른가를. 자네는 국가마다 가지고 있는 특성을 잘 판단하리라 믿네. 일본은 급속도로 곤두박질할 것이고, 그렇게 될 날이 머지않다네. 일본은 그 왜놈 근성으로 일을 망치고 있네. 중국은 빈자리를 찾아내는 눈썰미가 있지. 그래서 중국은 대국이면서 허풍쟁이에다 과시형이 아닌가. 서양인들의 행보를 보게. 사물이나 사람의 얼굴을 쳐다볼 때도 앞을 똑바로 바라보며 걷는다네. 위엄 있고, 너그럽고도 힘이 넘쳐 보이지 않나. 그런데 조선 사람들은 사방으로 두리번거리며 걷지 뭔가. 그런 사람들한테 광범위한 교육으로 계몽하고 원대한 이상을 심어준다면, 세상에서 으스대고 있는 자기를 발견하게 될 걸세. 조선 사람은 자기 속에 위대한 인자를 갖추고 있다네. 아직 개발이 안 되었을 뿐이야.”
김하용(金夏容)이 밤중에 나를 방문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 부자(윤웅렬과 윤치호)가 좋은 평판을 얻었다네. 지난해 11월 28일의 춘생문 사건은 실패했지만, 새로운 내각이 들어선다 해도 지금보다 나아지기는 어려울 걸세.”
1월 28일. 화요일.
아주 춥다. 서울
중추원의 공보관인 서재필 박사를 만났다. 영어와 우리 말로 된 신문을 발간하려고 하는데 나에게 도와달라는 것이다. 나는 “기관차를 끄는 일만큼 신문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고 하였지만, 그는 “기관차를 움직이게 하는 일은 자기가 맡을 테니 걱정 말고 번역 분야를 도와달라”고 말한다. 그는 이 신문을 3월 1일 창간하기를 바랐다. 그는 우리가 하루라도 빨리 신문 발간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정말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월 30일.
춥고 맑은 날씨. 서울
오늘 아침의 《서울신문》을 유길준에게 보여줬다. 그는 나와 현흥택, 그리고 그 외의 몇 사람을 배신자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춘천부의 군수가 ‘상투파’ 폭도들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일본인들은 백성들이 상투를 자르게 한 조정에 대해 욕하는 것을 보면서, 그 잘못을 유길준에게 돌리고 있다. 일본 사람들은 함께 일하기가 아주 편리한 사람들이다.
1월 31일.
춥고 맑은 날씨. 서울
오늘 아침, 경찰이 우리 집을 다시 감시한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불편하다. 며칠 전에 조희연이 군부대신이 됐다. 오후 4시, 서재필 박사의 부탁으로 그를 방문했다. 그는 신문 계획이 무산되었음을 말하며 놀라워했다.
“일본이 신문 발행에 관대하지 않더군. 그들 말로는, 코리아 신문을 두 종류 낼 만큼 사회 기반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거야. 그래서 기존 신문과 경쟁이 되는 신문 계획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는 걸세. 일본인들은 나를 독벌레 보듯 싫어하지. 왜냐하면 어느 날 내가 조선의 기능공 몇 사람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네. 미국에서 등유를 직수입하면 수요자에게 싸게 공급할 수 있다고. 난 이제 외톨이가 되고 말았어. 미국 정부가 나를 지원하지도 않을 것이고, 조선 조정이나 사람들이 나를 일본인 자객들로부터 보호해 주지도 못할 텐데, 나는 외톨이가 되었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제 아무것도 없다네.”
나는 이 양반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주술(呪術) 같은 낱말에 아연할 뿐이다. 만약에 신문이 조정의 조언과 후원 아래 시작되었고, 일본인들이 그 계획을 방해한 것처럼 보인다면 적어도 언론은 반일사상이 있어야 하리라. 이번 일은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서 박사는 일본인들과 유길준이 가끔 다투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 유길준과 일본 사이의 말다툼은 마치 부부싸움 같은 것이라네”라고 말한다. 그 일본 패거리들 사이의 친밀감을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었다.
| 1896년 2월에 일어난 일들 ● 이범진이 주도하여 임금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거하다. ● 친일내각이 물러나고 친러세력(이완용, 이윤용, 이범진, 이재순)이 정권을 장악하다. ● 민비시해에 가담했던 각료들이 축출되고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은 군중에게 피살되다. ● 유길준이 민비시해의 배후 인물임이 차츰 드러나자 일본으로 도주하다. ● 윤치호가 학부협판으로 임명되다. ● 이완용은 학부대신 재임 시에 4000달러를 착복하고 가짜 영수증으로 은폐하려고 했으나 윤치호가 이를 저지하다. ● 웨베르 공사 후임으로 스페예르가 임명되었으나 고종의 요청으로 웨베르가 계속 머물러 있다. 2월에 등장하는 주요인물 ● 이범진(44세): 아관파천을 주도한 왕족. 주미 공사와 러시아 공사 역임. 합방 후 자결. ● 의화공(19세): 패기 넘치는 제2왕자. 일본의 견제를 받고 있음. ● 웨베르(55세): 러시아 공사.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문 동안 실권을 행사함. ● 김홍륙: 러시아 공사관 통역관. 매관매직, 권력남용. 외부협판으로 내정된 것을 윤치호가 저지시킴. 후에 독배사건의 주모자로 사형당함. ● 김가진(50세): 농부대신, 호화생활과 공금횡령죄로 잡혀감. ● 호레스 알렌 박사(38세): 제중원을 설립한 의사. 미국 공사관 보좌관. ● 그레잇 하우스: 미국 법률고문(검찰총장격). 주일 총영사 역임. |
2월 2일. 일요일.
아주 맑은 날씨. 서울
정동감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독일 영사 크라인을 방문했다. 트란스발 사건(1886년 옛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하나인 트란스발공화국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금광이 발견된 사건-옮긴이)과 관련한 독일과 영국 간의 전쟁에 대해 토론하는 중에 크라인이 말했다.
“영국은 어떤 국가의 안전에 대해서도 전혀 고민하지 않는답니다. 영국은 어떤 나라 땅에서 황금 냄새가 난다고 하면 곧장 그 땅이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려 들지요. 중국과 마찬가지로 영국은 대륙성 권력을 발휘하며 싸우려고 듭니다. 영국은 짖지만 결코 물지는 않습니다. 영국의 정책은 음모와 난폭한 힘을 발휘하여 약한 국가들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크라인은 영국을 아주 싫어하는 눈치였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레잇 하우스 장군을 만나러 갔다. 그는 집에 없었고, 그의 어머니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심부름하는 아이를 시켜 자신이 마실 조선 술 막걸리를 사오게 했다.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그레잇 하우스 장군 댁은 부자라고들 하는데. 아무튼 그 식구들은 막걸리를 마시며 외롭게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돈을 벌어서 모두 어디에다 쓰는 것일까? 노부인은 몸과 마음이 모두 쇠잔해 가고 있는데. 하지만 노부인은 말년에 미국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 아들로 하여금 저축을 많이 하도록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길준을 그의 사무실로 가서 만났다. 내가 서재필 박사의 신문사 계획 이야기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고 말하자, 유길준은 그 신문이 《서울신문》과 결합하면 효과적이리라는 제안을 한다. 나는 평소처럼 솔직한 마음으로 그에게 말했다. “그렇게 되면 일본이나 서재필이나 서로 종속관계를 승낙하지 않을 겁니다.”
이제 확실히 알겠다. 그 신문사는 서재필 박사가 말한 것처럼 서 박사 개인의 기업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길준과 그 일당은 그 신문이 자신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 계획을 못 하게 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일본이 도사리고 있을 테고.
2월 4일.
온화하고 아름다운 날씨. 서울
그레잇 하우스 장군의 방문을 받다. 그는 일본이 유길준을 최근 일어난 왕비시해 사건의 주모자로 몰아 그를 희생양으로 삼을 모양이라고 말했다. 장군은 또 말하기를, 일본은 일본을 대표하는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주도한 인물-옮긴이)보다 신문사 계획을 꾸미는 조선 대신들을 더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2월 5일. 수요일.
온화하고 맑은 날씨.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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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치호의 사촌 윤치오(왼쪽)와 그의 부인 윤고라. 윤고라는 구한말의 외교관이었던 김윤정(金潤晶)의 딸로 아버지를 따라 미국 워싱턴에 가서 여학교 과정을 마치고 다시 일본에서 동경여자학원을 졸업한 뒤 귀국했다. |
1. 내 사촌 치오가 의화공의 돈을 조심성 없이 지출한다는 것. 그들이 일본에 입국한 후에 내 사촌은 야마사키라는 일본인에게 돈을 빌려 의화공이 한 달, 즉 31일 동안에 2000달러를 쓰게 했다는 것이다.
2. 내 사촌 치오는 의화공에게 그의 소실(小室)을 조선으로 다시 돌려보내도록 설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여자는 내 사촌 계수와 함께 의화공보다 몇 달 먼저 일본에 가 있었다. 그런데 치오는 외로운 의화공을 위로한답시고 데려간 젊은 여인과 하루종일 방안에 붙어 있게 했기 때문에 의화공이 짜증을 낸 것은 당연하다. 치오는 그 여인을 학교라도 보내서 바깥세상을 볼 수 있게 했어야 했다. 그런데 의화공이 불평을 하니까 적절한 방법으로 납득시키지 않고, 그 여인을 조선으로 돌려보내려고 한 모양이다.
3. 내 사촌이 의화공에게 지나치게 훈계를 해서 화나게 만든 일은 현명하지 못한 짓이다. 내 사촌처럼 젊고 미숙하고 경솔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지혜로운 길로 인도해 주는 일 같은 것은 떠맡아선 안 된다는 것이다.
4. 의화공의 용돈 지출을 맡은 내 사촌은 자신도 상감의 둘째 왕자처럼 허세를 부렸을 것이라는 것이다.
5. 내 사촌은 왕자의 신임과 기호(嗜好)를 독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왕자에게 가까이 오는 것을 방해했을 것이다. 더 나쁜 것은 의화공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주의를 주었고, 심지어 뭐라고 말하는가 염탐까지 하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도쿄에 있는 조선 학생들을 모두 의화공의 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위의 내용들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나도 모른다. 그러나 착실하고 솔직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다재다능하였던 치오가 했을 법한 행동으로 들리긴 했다. 그는 입을 너무 많이 놀리고 수단이 좋아, 바르게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내 사촌을 위해서나 의화공을 위해서도 좋지 않은 일이다.
전직 농부대신 김가진이 죄가 있어 직무 중에 잡혀갔다. 그가 구금된 이유는 다음 네 가지이다.
1. 공직에 있는 동안 그는 하루 400달러를 소비할 정도로 호사스런 생활을 하였다는 것이다. 한 달에 여러 차례 돈을 흥청망청 썼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그가 모종의 불법행위로 돈을 벌었으리라는 추측을 낳았다.
2. 이 사실에 대해 김가진은 조정에서 자신을 변론하려 하지 않았고, 친구도 없다.
3. 김가진이 근무하는 농부(農部)는 원래 착복의 유혹을 자주 받는 곳이다.
4. 정병하를 제외한 현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그의 적이다. 그는 ‘소인’으로 불리고 실제로 소인처럼 보였다. 그는 양쪽에 추파를 보내거나 이간질하는 소인이어서 김홍집과 그 일당이 박영효와 갈라서게 되었다는 말을 듣는다.
김노완이 우리 집에 왔다가 오후 5시가 되자 2시간 만에 일어섰다. 나에 대한 우정에서 우러난 황당한 말과 비판을 하고, 내 아버지에 대해 떠도는 이야기들(비난)을 서슴없이 해주고 갔다. 그는 나의 안전에 대해 그가 직장에서 엿들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김노완은 자신이 내각으로 하여금 김사준(金思濬·둘째 왕자의 장인)을 군부(軍部)의 협판으로 진출하는 데 동의하도록 조종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가 학부(學部)의 서광범(지금 학부는 공석이다)을 미국에 가도록 했으니 이 얼마나 굉장한 책략이냐고 말했다. 이도재(李道宰)는 유길준을 설득하라는 내 제안을 물리치고 조희연(趙羲淵) 무관에 가담하여 진령군(眞靈君·조선 후기 왕실의 무녀로 민비가 총애함-옮긴이)을 죽음에서 구출하는 데 연합전선을 폈다는 이야기이다.
김노완은 또한 내가 안전하게 조국을 떠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일본인들은 서재필 박사 또한 강제 출국시키려고 한다. 오! 하느님, 저를 그 미천하고 어리석은 친구와 교활한 악당들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저는 인간의 지혜와 관련된 일에서는 거리가 멀고, 보호받지도 못하며, 곧장 앞만 바라보고 전진하는 성실성밖에 내세울 게 없습니다.
김노완은 또 다른 정보를 줬다. 즉 유길준이 임최수(林最洙)를 대궐에 들여보내 대신들을 죽이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 집은 경찰이 늘 지키며 내가 드나드는 것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제쯤 나는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될까?
2월 9일.
춥고 바람 불지만 맑은 날씨. 서울
음력으로 치면 오늘이 내 생일이다. 적어도 11세 때까지 나도 부모님과 한 지붕 아래에서 생일을 즐겁게 보냈다. 다정한 어머님은 무척 행복해 보이셨고…. 아버님이 지금 피신해 계신 상해에서 집으로 돌아오신다면 더 원이 없겠다. 언제쯤 우리 식구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일 날이 올 것인가.
지난 목요일 밤에 현흥택이 서울을 떠나 즈푸(옌타이의 옛 이름-옮긴이)로 갔다. 그편에 아버님께 올리는 상서와 리이드 박사와 알렌 박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했다. 이범진이 내게 오늘 저녁에 편지를 보냈는데, 어디라고 밝히지는 않으면서 서울을 곧 떠날 것이라고 한다. 내일 오전이면 그는 내가 목적을 갖고 추적해도 찾아낼 수 없는 외딴 외국 항구에 가 있으리라.
2월 11일. 화요일.
아관파천. 흐리고 추운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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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치호가 친필로 쓴 가훈, ‘믿음, 희망, 사랑’. 종교교회윤치호기념실에 있다. |
그곳에서 새 내각을 구성했는데, 박정양(朴定陽)이 총리로 임명되고, 이윤용은 경무사, 이완용은 군부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유길준과 조희연 등 실세 내각 대신들은 모두 달아났다.
서울에는 200명 정도의 러시아군이 몇 대의 대포를 갖추고 상주하고 있다. 뭔가 사달이 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오후 12시). 오후 12시30분, 언더우드 박사 부인을 방문했다. 전하께서 나인들이나 시녀들이 타는 가마에 앉으신 채 오늘 아침 7시 전에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하셨다고 알려줬다. 세자 전하도 함께 옮기셨다. 상감과 세자가 파천하신 경위이다.
1. 오후 2시경에 김홍집과 정병하가 아무런 재판 절차도 없이 처형당하고, 시체는 복수심에 가득 찬 난폭한 군중에게 짓밟혔다고 한다. 정말 나쁜 짓이다.
2. 오후 6시경, 이완용이 내게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오라고 호출해 방문했다. 러시아 공사관 안에 들어서자 중앙의 본관 큰 방에 조선 관리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웨베르 공사가 침실로 쓰던 방을 전하와 세자가 임시 거처로 쓰고 계셨다. 전하께서는 나를 아주 극진하게 대해주신다.
3. 외부대신에 이완용, 군부대신에 이윤용, 경무사에 안경수(安駉壽), 법무대신에 조병직(趙秉稷), 재무에 윤용구(尹用求), 학부와 농부 대행에 이완용을 임명했다. 나는 조정에 다음과 같은 선처를 건의했다. 선고받은 죄인들의 집과 가족을 보호해 줄 것, 일본인 주민들을 보호할 것, 김홍집과 정병하의 시신을 그들의 가족들에게 인계할 것, 왕비를 시해한 주모자로 알려진 자 외에는 모두 사면할 것, 백지에 먹글씨로 사면된 자의 이름을 인쇄해서 붙이고 그들의 이름이 감정에 치우쳐서 다시 거론되지 않도록 할 것을 건의했다.
4. 전하와 세자를 시중드는 4명의 여인이 있었다. 전하의 바로 옆방은 전하의 생모님(대원군의 부인)과 대원군의 소실이 지키고 있다. 전하의 내실도 바로 옆에 보인다. 전하의 형 이재면(李載冕)은 유길준 내각 덕분에 왕족으로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있었다. 앞서 말한 두 명의 노부인을 밤에 교대로 지켜드린다.
전하는 이미 대궐을 벗어나려고 시도하다가 탄로나서 실패하신 적이 있다. 그러나 지난 10일 초저녁에는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다. 두 노부인은 지나간 옛 이야기를 하느라 피곤해 졸음에 빠져드셨다. 그중의 한 분은 새벽 2시인 지금, 틀림없이 단잠에 빠져든 게 분명하다. 상감과 세자도 침전에 드셨다.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는 여인들의 방으로 나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각각 들어가셨다.
날이 밝자마자 일행은 가마에 올라탔다. 상감은 나인 뒤에 바짝 붙어 서고, 세자도 그렇게 했다. 나인 두 사람이 한 가마에 같이 탄다는 것은 수상쩍은 얘기가 된다. 가마가 밖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가마가 지나가는 곳의 보초들에게는 술과 특별한 맛이 나는 죽을 한적한 데로 데리고 가서 대접해야 했다. 보초들이 음식을 먹는 동안 가마는 다른 문을 지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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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 러시아 공사인 이범진(왼쪽)과 그의 아들 위종. 당시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던 사실상 유일한 조선인이었던 이위종은 아버지를 보좌해 외교관으로서 일했으며,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특사로 파견됐다. 1910년 국치를 당하자 러시아에서 자결한 부친의 장례를 치르고,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
〈아관파천(俄館播遷)은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간 고종과 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어가를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옮겨서 거처한 사건이다.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으로 대일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난다. 러시아 공사 웨베르는 공사관 보호 명목으로 수병 120명을 서울로 데려오고, 친러파 이범진과 함께 1896년 2월 11일에 국왕의 거처를 궁궐에서 정동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다.
이날 ‘단발령’으로 상감을 괴롭히던 김홍집, 정병하 등이 살해된다. 친일파들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이범진, 이완용 등의 친러내각이 들어선다. 1896년 니콜라이 2세 황제 대관식 이후 일본 제국과 가까워진 러시아는 로바노프-야마가타 협정을 맺는 한편, 조선의 각종 이권을 요구한다. 이어 1897년 2월에 고종은 덕수궁으로 환궁한다.
지난번 한국 방문 시에 한국교회사연구소 이원순(李元淳) 교수(국사편찬연구소장 역임)가 《뮈텔 주교 일기》(최석우 몬시뇰 옮김) 두 권을 선물로 주었다. 윤치호 선생이 뮈텔을 방문했을 때의 명함사진이 뮈텔 일기에 올라 있는 것도 보여주었다. 날짜를 잊어버려 찾을 수가 없지만, 윤치호 일기 2월 11일과 같은 날의 일기에 뮈텔 신부가 다음과 같이 적은 것이 흥미롭다. “… 왕과 왕세자가 알려주는 로페브르 씨의 편지를 10시경에 받았다. 거의 동시에 왕의 어머니가 사람을 보내 그의 아들의 거처를 물어왔다…. 이것이야말로 혁명이고 백성들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그들의 해방으로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제 오후, 100명의 러시아 해병이 제물포에서 왔다. 저녁 7시에 그들은 거의 아무도 모르게 서울에 들어왔다. 러시아 공사관은 그 사실을 극비에 부쳤으며, 일본 대표를 포함한 모든 외교사절은 어제 저녁 힐리어 씨가 베푼 만찬 자리에서 그 사실을 비로소 알았다.
… 어쨌든 오늘 새벽 러시아 군사들이 대문을 통해 대궐로 들어갔고, 얼마 뒤, 별다른 변화 없이 그들이 대궐에서 나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았다. … 그러고 7시에 왕과 왕세자는 러시아 공사관에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거기에 갔을까. … 그 즉시 스페예르(Speyer) 씨는 그의 동료들에게 왕과 왕세자가 그들의 목숨이 두려워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는 것을 알리고자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2월 13일 일기에 “로페브르 씨는 2월 11일의 사건이 스페예르 씨에 의해 일어났고, 요컨대 그의 책임하에 일어났다고 했다”고 적혀 있다.-옮긴이〉
2월 12일. 수요일.
맑은 날씨. 서울
오늘은 이완용의 주청(奏請)이 성공한 날이다. 적어도 얼마 동안이겠지만. 다시 말해 전하가 단발령을 일단 보류하시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백성에게 상투를 자르거나 자르지 않거나 그들 각자의 소신과 편의에 맡기기로 했다.
내가 전하께 상투를 다시 올리시도록 말씀드린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저의가 담겨 있다. 하나는 상투를 자르신 것은 유길준과 김홍집의 강요 때문이었으며, 또 하나는 상투를 자른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나를 갑자기 깨달으시도록 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자는 상감이 그로 인해 모욕감을 느끼시게 한 것이며, 후자는 단발령*을 포고했다 취소했다 번복하는 일이 얼마나 변덕스런 것인가를 암시한 것이다.
상감께 나를 어떤 관직에도 임명하지 않으시도록 간청을 드렸다. 그렇다고 나의 충성심이 절대 변하지 않을 것임을 다짐해 드렸다. 학부협판 김천휘는 어제 길에서 살해당한 김홍집과 사촌 간이므로, 그를 해임하면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므로 그를 해임해선 안 된다고 상신했다. 상감께서는 내 말을 기꺼이 들으시고, 내게 어떤 직책도 내리지 않을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나를 학부협판에 재임명하였다.
이완용 때문에 나는 기절초풍할 일이 생겼다. 그는 학부대신 재임 시에 알렌 박사가 학부에 위탁한 돈 4000달러를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자신이 착복했다. 그러고는 내게 알렌 박사에게 보낼 공식 영수증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돈은 자기가 다 써버리고 지금 와서 영수증이 무슨 소용이 있나. 나는 그에게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완용에게 그런 일이 생겼다는 건 뜻밖이다. 그의 봉급은 5개월치라고 해도 1500달러가 안 될 텐데, 한 달에 300달러씩 썼단 말인가! 단순한 함정이라고만 할 수 없는 4000달러는 그의 봉급과 상관없는 큰돈이다. 절대로 그에게 영수증을 써줄 수는 없다.**
| * “짐이 머리카락을 잘라 신민에게 모범을 보이니, 너희는 짐의 뜻을 잘 받들어 만국과 더불어 서는 대업을 이루게 하라.” 명성황후 시해의 참극이 벌어진 지 채 석 달이 되지 않은 1895년 12월 30일, 고종이 내린 단발을 명하는 이 조칙은 일본인 고문관의 손을 거쳤고 그 배후에는 일본 공사가 버티고 있었다. 당시 친일내각을 이끈 김홍집과 어윤중조차 단발령이 가져올 후폭풍, 민초들의 저항을 우려해 이에 반대했었다. 그런데 왜 일본은 단발령을 강요했을까. 을미사변이 터지기 며칠 전 주모자 이노우에가 주일 영국 공사 사토에게 “조선의 개혁은 불가능하다. 조만간 동학과 같은 사태가 또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곧 일본군을 동원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듯이, 상투 자르기도 국모시해와 매한가지로 이 땅 사람들의 자존심을 짓뭉개 저항을 유발하고 이를 구실삼아 병력을 증파해 조선을 군사적으로 장악하려는 일본의 비열한 술수에서 나왔다-허동현 경희대 교수 논문 〈A meaningful haircut〉에서 ** 1. 이완용의 봉급이 얼마였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2. 당시 외국인 고문관 초청 시, 파격적인 봉급액인 300달러로 계약했다. 3. 이완용의 학부대신 재직 기간은 도피 기간을 포함하여 채 5개월이 안 된다. 4. 이완용의 월급을 서재필과 러시아 교수의 봉급과 같은 수준인 300달러씩 계산하더라도 1500달러가 안 될 것이라고 빗댄 것이다. 5. 외부협판인 윤치호는 두 달 동안 134달러를 받았다. 그의 일기 1월 24일-옮긴이 |
2월 14일. 금요일.
춥고 햇살이 맑은 날씨. 서울
부하들은 문밖에서 추운 밤에 보초 서느라 덜덜 떨고 있는데, 군부대신 이윤용은 따뜻한 안락의자에서 코를 골고 있다. 참 꼴불견이로다! 나는 내 의견을 모아 전하와 조정 대신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제발 오두막이라도 전하께서 조선 가옥으로 거처를 옮기시도록 말이다. 물론 전하는 이렇게 경호를 잘 해주는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는 일을 마음 내켜하지 않으신다.
일본인들을 두려워하고 몹시 싫어하시는 건 이상할 게 없다. 일본 교관들이 조선 보병들을 훈련해 왔다. 그들은 자기네를 적대시하는 조선 국왕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돈을 받고 보병을 훈련시키는 일본 군사 교관들이다. 일본 군인들은 대궐을 공격했던(을미사변-옮긴이) 사람들을 지도한 일을 자랑삼아 얘기하려고 궁전 앞에 진을 치고 있다. 이렇게 상감의 신임을 받았던 일본 대표들이 음모를 꾸미고 우리 왕비를 살해한 것이다.
2월 25일. 월요일.
구름 끼다 비 온 후 갠 날씨.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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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발령 이후의 고종. |
1. 어윤중 전 재무대신이 2월 9일 용인 지방에서 자객들에게 암살당했다. 어떤 일본인과 친일파들은 어윤중이 서울에서 파견한 불한당들에게 살해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어떤 운명을 맞았든 간에 그는 국왕시해를 도모한 내각의 한 사람일 뿐이다.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한다.
2. 며칠 전, 이범진이 법부대신과 경무사로 겸직 임명됐다. 지난 10월 8일 발생한 왕비시해 혐의로 13명이 구속되어 문초를 받고 있다. 러시아 공사에게 품위를 떨어뜨리며 권력을 과시하는 이범진을 엄하게 제재하도록 건의했다. 공사관의 두 사람(웨베르와 스페예르 공사-옮긴이)은 이범진이 어떤 가혹한 방법을 써서라도 그들의 자백을 받아내겠다고 떠들고 다니는 것을 막아주겠다고 약속했다(을미사변과 춘생문 사건 때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응징한 행위-옮긴이).
3. 언더우드 부인이 불평하며 말하기를, 일본인들이 형편없이 우쭐거리고 다닌다며, 누군가 그 사람들이 정신 차리게 해주면 좋겠다고 한다. 부인은 형편없는 자기 아들의 버릇부터 고치는 것이 순서임을 모르는 모양이다.
4. 이범진, 이재순, 김홍육(金鴻陸)이 나라를 망쳐놓을 것이 분명하다. 아니면 조선을 먹어치울지도 모른다. 김홍육은 러시아 공사관의 한낱 통역관이다. 그는 교활한 정상배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그가 웨베르와 스페예르의 절대 신임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언젠가 웨베르 부인이 내게 말하기를 –말이나 안 하면 애쓴 보람이나 있겠다– 사도 바울도 김홍육보다 더 정직하진 못할 거란다. 스페예르는 김홍육이 너무 청렴결백해서 가난에 쪼들려 고생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악한은 아마도 조정 안에서 어느 대신보다도 더 축재했을 것이다. 그는 누구나 가리지 않고 어떤 당파에서나 뇌물을 받는 데 능란한 자다. 그는 전하에게도 이범진과 이재순을 이용할 목적으로 러시아 공사들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자다.
5. 전하께서는 대신들의 인품과 능력에 관계없이 전하의 기분 내키는 대로 높은 관직을 이미 하사하셨다. 어제 아침 전하는 나를 학부협판에, 주석면(朱錫冕)을 학부의 비서관으로 임명하셨다. 주석면이란 자는 러시아 공사관에서 아양 떠는 천박한 친구다. 그는 이범진의 비위를 맞추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이 세상에 없다는 식이다.
6. 어제 저녁에 퇴근했다가 러시아 공사관에 다시 들어서자, 청천벽력같이 놀라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 더럽고 천박한 러시아 공사관 통역관인 김홍육이 외부협판으로 임명되었단다. 외부협판이라! 조정 대신들이 그의 사령장을 쓰고, 그 사령장에 도장을 찍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김홍육이 아직은 러시아 공사관 직원인데, 내각의 협판으로 임명하는 일을 웨베르 공사와 사전에 의논했는지 이범진에게 물었다. 이범진은 애매하게 부정적인 태도로 대답해 그 일에 관해 알아보려고 같이 스페예르를 만나러 갔다. 스페예르는 상감이 원하시는 일이라 승진시킨 것이므로 특별히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암시적인 말을 던졌다. 충분한 연금이 그에게 지불될 터이고(더구나 공식적인 직함으로), 부자가 되는 게 당연한 정도로 매우 정직하다는 것이다.
이범진과 나는 웨베르 공사를 찾아가 김홍육이 외부협판으로 발탁될 것이라는 정보를 귀띔해 주었다. 웨베르는 그 인사 과정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 표시를 하더니, 그 서류가 이미 제출 준비가 되어 있음을 말하면서 묵인할 수밖에 없다는 눈치였다. 나는 웨베르에게 한 눈을 찡긋 윙크하면서 말했다. “그거 잘된 일이네요. 난 아직 그 기안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으니까요.” 웨베르는 단박에 그 뜻을 알아차리고 그 임명장에 반대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렇게 해서 그 위험한 일, 그가 외부협판이 되는 일을 모면했다(김홍육은 이듬해 독직사건으로 유배형을 받았고, 상감과 세자 독살 혐의로 사형을 받는다-옮긴이).
7. 아니, 절대 그렇게 되면 안 된다. 모든 일이 개판이 되어간다. 전하에게는 외국인으로서 모든 관리들이 존경하며 그의 말이라면 무서워할 만큼 위엄이 있는 외국인 고문관이 필요하다. 군은 조직과 편제를 잘 운영할 수 있는 사람과 재정 관리는 유능한 감독관이 있어야 한다.
8. 구금된 일당이 오늘 심문을 받는다. 웨베르의 추천으로 외국 법률 고문관인 그레잇 하우스 장군이 취조를 담당하기로 했다.
9. 오늘 리처드슨 선생이 2월 11일 부친 반가운 편지를 받다. 마텔 씨에게 하루 한 시간씩 불어 공부를 시작했다.
10. 현명치 못한 일본인들보다는 러시아 사절들이 일을 더 지혜롭게 처리한다. 일본 사람들, 예를 들어 이노우에 같은 사람은 오만했으나 러시아 사람은 공손하다. 일본 사람들은 쌀쌀해서 접근하기 어려우나, 러시아인들은 붙임성이 있다. 일본 사람들은 무엇이든 가지고 싶어 하나 러시아인들은 소유하는 것이 없다.
11. 십중팔구, 이완용이 학부대신이 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다. 그 4000달러 착복이 해결이 되면 부당하게 취득한 부와 재산으로 께름했던 일도 말끔히 털어버릴 수 있게 될 테니까.
12. 김천휘 전임 학부협판 밑에서 일하던 관리가 말하기를, 김천휘는 참 어리석고 정직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는 가장 쉬운 한문 한 줄도 읽을 줄 모르는 산수 선생을 명색이 보통학교인 그 학교에 채용했다. 그는 대학까지 세울 모양이다. 100여 명이 넘는 그의 친구들에게 6달러씩이나 봉급을 주었으니! 수강할 학생도 없고 교실도 없는데 그는 600달러씩이나 낭비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어 선생을 모셔온 것이다. 김천휘 학부협판은 러시아어 선생에게 매달 300달러와 벽돌집까지 주고 유럽에서처럼 가장 안락한 생활을 안겨주려고 했다.
그런데 학부협판은 정작 러시아어 선생이 오자, 그 선생에게 개집같이 누추한 집을 내주었다. 대학에 초청할 교수에게 이미 40달러씩 월급을 주기로 약속해 놓고 말이다. 차관업무를 담당하다가 일본으로 귀국하는 다가미에게 김천휘는 전별금으로 공금에서 311달러나 주었다.
2월 26일. 수요일.
맑은 날씨. 따뜻하다.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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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에서 바라본 러시아 공사관. 러시아 토목기사 사바틴이 설계해 고종 27년(1890년) 8월 제정러시아 르네상스식으로 건축했다. 사적 제253호. |
김옥균 일당은 그들이 요인 6~7명만 제거하면 일이 성공할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그들은 이 나라를 최악의 파국으로 몰아넣었다. 또한 왕비께서는 김옥균과 그 일당을 죽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까지 말씀하셨다. 왕비의 옥좌(玉座)는 영원히 안전하다고 볼 수 없었다. 왕비는 100여 명의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그래서 모든 백성에게 미움을 산 것이다.
머리가 잘 돌아가 새로운 말을 잘 만들어내는 유길준은 박영효를 퇴출시키는 비극적인 음모를 꾸몄고, 왕비를 파멸에 이르게 만들었다. 스기무라와 유길준은 왕비 한 사람만 없애버리면, 조선에서 알게 모르게 악을 제거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왕비를 시해한 것이다. 그들의 비열한 범죄는 조선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더러운 책략임이 증명되었다.
2월 28일. 금요일.
추운 편이고 흐린 날씨.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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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관파천 당시 고종의 침실 내부 전경. |
오늘 아침 이윤용 군부대신이 군인들을 훈련시킬 목적이라며 공사관에 연결된 도로를 고르게 포장하도록 지시했다. 브라운 씨를 방문해서 그에게 웨베르 공사를 만나보라고 요청했다. 존경하는 브라운이 상감의 명을 받아 국고를 감독하며 재무를 관장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사무실에서 평상시처럼 근무했다. 버스티즈 박사 부처(夫妻)가 상해로 갈 예정이다. 나는 아내를 편안하게 해주려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원한다면 중국의 친정에 가 있어도 좋다고 말했다.
아내와 떨어져 있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났지만, 아름답고 귀여운 내 아내는 상해에 가는 것보다는 나를 위해서도 차라리 이곳에 남아 있고 싶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하느님, 이렇게 귀한 아내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러시아 공사관에 돌아오자, 이완용이 민상호(閔商鎬)도 있는 자리에서 내게 화를 내며 말했다. “그 영수증을 내놓으시지? 윤 협판이 그런다고 그 돈이 당신 손에 들어갈 것 같소?” 나는 놀라면서도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글쎄요. 학부에서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 4000달러를 어디에다 썼는지 보여주시기만 한다면 영수증을 써드리지요. 대감께서 그 돈에 대한 영수증을 직접 쓰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러자 이 외부대신 각하는 얕잡아보는 말투로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했다.
“내 영수증이라니! 뭐 하려고? 당신이 그 돈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어디 그렇게 맘대로 할 수 있나 두고 봅시다.” 그렇게 말하더니 휙 나가버렸다. 저녁 7시경에 그 일로 알렌 박사를 방문했다. 나는 알렌 박사가 맡긴 돈의 영수증 때문에 이완용과 티격태격한 경위를 얘기했다. 내 말에 놀란 알렌 박사는 편지 한 장을 보여주었다. 이완용이 ‘알렌이 학부에 준 그 돈은 내 돈이다’라고 주장한 내용이다. 알렌 박사는 방금 증명이 된 이완용의 뻔뻔스럽게 ‘명예로운 말’을 듣게 된 것을 유감스러워했다.
만일 이완용이 혼란스런 과도기를 이용하여 그럴싸한 구실로 상감으로부터 4000달러를 타내든지, 아니면 새로 부임할 학부대신에게 처리하게 한다면, 그는 영수증이 없어도 착복한 것을 덮어버리고 말 위인이다. 그럴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어찌되었든 내가 간여할 문제는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