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태의 회고 〈下〉朴正熙 대통령과 나

“예산에서 격려금 1억 줘”

  • 글 : 허영섭 월간조선 객원기자·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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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마을운동에 대한 미국의 트집을 해결하고 나자 박 대통령이 태완선 부총리에게 격려금 주라고 지시
⊙ 중화학공업 업체, 실무자 의견 들었으나 일부는 청와대에서 정책적으로 결정
⊙ “박정희 체제의 최종 지향점은 복지주의적 민주주의 체제 등장이었을 것”
연두순시 첫날 오전 경제기획원에서 태완선 부총리로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올해 경제기본시책을 보고받고 있다. 오른쪽이 김종필 국무총리, 왼쪽은 백남억 공화당의장.
박정희 대통령 당시 추진됐던 경제개발 계획의 초창기 현장 사령탑은 장기영(張基榮) 부총리였다. 한국은행 부총재를 사임하고 나와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데 이어 《한국일보》를 창간해 운영하다가 1964년 정일권(丁一權) 총리 내각에서 경제 부총리로 발탁되어 경제개발 계획의 일익을 담당했다. ‘25시의 사나이’라는 별명답게 저돌적인 뚝심과 추진력을 발휘함으로써 박 대통령의 남다른 신임을 받았다.
 
  그가 박충훈(朴忠勳)씨에게 자리를 인계하고 물러난 것은 재임 3년5개월 만인 1967년 10월 3일 개각에서였다. 개천절 공휴일을 기해 이례적으로 개각이 발표됐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추석까지 겹친 날이었다. 이때 개각에서 장 부총리 외에도 상공·건설·교통·체신 및 무임소 등 5개 부처 장관이 경질됐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이뤄져 신문들마다 그 배경에 대해 제각각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었다.
 
  삼성재벌의 한비(韓肥) 밀수사건 처리와 관련해 주식헌납 문제를 놓고 마찰이 빚어지자 박 대통령이 책임을 물어 장 부총리를 해임한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는가 하면, 대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야기됐던 언론윤리위원회법 시행에 대한 논란으로 공화당에서 박 대통령에게 해임을 요구했다는 해석도 있었다. “행정쇄신과 경제건설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관계부처 장관들이 사표를 제출했다”는 청와대 신범식(申範植) 대변인의 발표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신문도 없지 않았다.
 
  부분적으로는 맞을지라도 그리 정확한 분석은 아니었다. 개각 바로 전날, 박 대통령이 장 부총리를 질책하던 현장을 지켜본 당시 경제기획원 황병태(黃秉泰) 경제협력국장의 목격담이 그것을 말해 준다.
 
 
  박 대통령, 장기영 부총리 불러 “당신이 대통령이야” 불호령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유신헌법개정안 확정을 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인상이 갑자기 험악해지는 듯했다. 보고를 들을 때부터도 그리 편한 기색은 아니었다. 말투도 뭔가 작심한 듯했다.
 
  ‘브리핑 내용에 앞서 장기영 부총리의 행동거지에 대해 말하겠다.’
 
  ‘행동거지’라는 말이 튀어나오면서 좌중은 일순간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쓰는 용어가 아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호명된 장 부총리의 입장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박 대통령의 얘기는 이어졌다. 이미 질책을 넘어 호통이었다. 그런 표정에 그 말투를 일찍이 겪어 본 적이 없었다. ….”
 
  그가 현재 한창 마무리 원고작업을 하고 있는 회고록의 한 부분이다. 포항제철소 사업과 관련하여 청와대에 올라가 박 대통령에게 브리핑을 했는데, 브리핑이 끝나자 그 내용과는 관계없이 다짜고짜 장 부총리를 질책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다. 장 부총리를 포함하여 상공부에서도 박충훈 장관과 오원철(吳源哲) 공업국장이 브리핑 자리에 있었다. 브리핑은 황 국장이 했고, 기획원 직원인 최수병(崔洙秉) 사무관이 브리핑 차트를 넘겼다.
 
  “그때의 브리핑은 그보다 이틀 전 청와대 한준석(韓準石) 경제비서관의 통보를 받고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브리핑을 통보할 때부터 박 대통령께서는 질책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황 전 국장은 “박 대통령이 그렇게 역정을 내는 모습을 그제서야 처음 보았다”며 당시의 기억을 되살렸다. 본인이 직접 질책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종합제철 사업의 추진과정과 앞으로 해결해야 하는 사안들을 중점 점검하면서 그날의 브리핑을 준비했는데 난데없이 불호령이 떨어지고 말았으니, 마음의 충격이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다. 직속상관이 질책을 당했다는 점에서 부하직원으로서 보필을 제대로 못했다는 책임감도 느꼈을 법하다.
 
1952년부터 1954년까지 조선일보사 10대 사장직을 역임한 장기영 부총리.
  박 대통령이 장 부총리를 향하여 질책을 퍼부은 것은 포항제철의 기공식 때문이었다. 기공식 날짜를 청와대나 상공부와 사전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통보한 뒤였다. 그 날짜가 바로 10월 3일 개천절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하루 앞서 청와대에서 브리핑을 하도록 갑자기 연락이 내려왔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기공식 하루 전날 브리핑을 하도록 하면서 기공식 얘기는 생략한 채 포항제철 사업과 관련한 전반적인 보고를 듣겠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부터 뭔가 조짐이 이상하기는 했다.
 
  그것은 박 대통령의 호통에서도 드러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장 부총리에게 “대통령도 모르는 기공식을 한다고 하는데, 이런 콩가루 집안이 어디 있는가”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집에 어른이 있는데 망나니 같은 나라가 되어 버렸다”라고도 했다. 그러고도 분이 덜 풀렸는지 “그것이 대통령을 모시는 태도인가. 당신이 대통령이냐”라며 거칠고 직설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황 전 국장은 “나는 그렇게 질책을 들으면서 오싹하니 소름이 끼쳤을 정도였다”며 당시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박 대통령의 호통에 나도 몰래 눈물이 흘러나왔다”고 했다. 그동안 박 대통령을 잘 모시다가 막판에 그토록 엄청난 망신을 당한다는 절망적인 생각이 없을 리 없었다. 공든 탑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듯한 아득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차트를 넘기려고 수행했던 최 사무관도 차트 옆에 붙어 선 채로 고개를 푹 떨구고는 숨도 못 쉬고 있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장 부총리가 기공식 날짜를 일방적으로 잡은 것은 문제가 있었지만 나름대로는 이유가 없지 않았다. 종합제철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국 측이 번번이 제동을 걸고 있었기에 일단 사업을 기정사실화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우리 내부적으로 업무추진 절차를 놓고 기획원과 상공부의 의견이 자주 부딪치던 상황에서 그런 식으로라도 먼저 일을 벌여 놓아야만 후속절차가 원활히 진행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없지 않았다. 박태준(朴泰俊)씨가 단장을 맡은 포항제철추진단도 기획원보다는 은근히 상공부 쪽으로 기울어져 있을 때였다.
 
 
  장기영 부총리, 대통령 질책받고도 포철 기공식 밀어붙여
 
1974년 12월 2일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버나드 벨 세계은행 부총재를 접견, 환담하고 있다.
  그때 미국이 우리 정부의 종합제철 사업에 대해 견제하고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미국 자금을 끌어다 써야 하는 처지에서 한국의 종합제철 사업으로 인해 미국의 금융기관이 곤경에 처하는 상황을 미연에 막아 보겠다는 뜻이었다. 당시 우리 정부는 미국 수출입은행으로부터 종합제철소 건립을 위해 1억 달러 규모의 자금조달을 추진하고 있었다. 미국의 카퍼스와 블로녹스 회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대한(對韓) 종합제철추진단(KISA=Korean Integrated Steel Associates)이 그 앞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국무성의 국제개발처(USAID)는 세계은행을 끌어들여 대한경제투자조정회의(IECOK=International Economic Consultative Organization for Korea)라는 기구를 만들어 이런 움직임을 가로막고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한국의 외환관리가 어려워지지 않도록 관제탑 구실을 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감시하겠다는 뜻이었다. 여기에는 일본과 서독, 영국, 프랑스를 비롯하여 캐나다, 호주,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까지 참여하고 있었다. 우리와 별로 상관이 없는 나라들도 두루 참여시켜 외환수지를 빌미로 삼아 한국을 꽁꽁 묶어 놓자는 의도였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유엔개발계획(UNDP)까지 옵서버로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 부총리가 나름대로는 포항제철 사업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 기공식을 서두르려 했던 것인데, 그만 날짜를 일방적으로 잡는 바람에 문제가 터진 것이었다. 기공식 날짜를 굳이 개천절과 추석이 겹친 날로 잡은 것도 관계자들이 많이 참석하지 않더라도 무방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사업의 기정사실화에만 주안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기공식 날짜가 발표되고 나서부터 주변에서 항의가 잇따랐다. 상공부와 포항제철추진단에서는 물론, 청와대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후락(李厚洛) 비서실장도 담당자인 황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기획원 혼자서 기공식을 치르려 하느냐”며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그때 우리의 경제개발계획 가운데서도 종합제철 사업은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경제개발 추진과정에서 시멘트와 비료, 석유화학 및 정유공장이 들어섰고 소양강댐과 경부고속도로 계획이 연이어 추진됐지만 그 종지부를 찍은 것은 역시 종합제철 사업이었다. 그만큼 추진과정이 어렵기도 했다. 박 대통령의 관심이 가장 컸던 사업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날, 장 부총리에 대한 박 대통령의 질책은 거의 한 시간 가까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끝내 더 이상 얘기를 하기도 싫다는 듯이 참석자들을 회의실에서 내쫓듯이 몰아냈다. “일어나. 다들 나가”라는 것이 마지막 호통이었다. 일언반구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았다. 설사 변명의 기회가 주어졌다 한들 무어라 얘기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었다.
 
  황 전 국장은 “밖으로 나오면서도 앞이 캄캄할 지경이었다”며 혼비백산했던 당시 상황을 떠올리는 듯했다. 박 대통령이 늘 나직한 목소리에 위엄을 갖추고 있었기에 상상도 못하던 모습이었다. 평소의 조용한 표정에 그토록 폭풍처럼 분출하는 감정의 휴화산이 감추어져 있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저러니까 혁명도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청와대에서 기획원으로 내려오면서도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일행이 장 부총리의 지프차에 함께 타고 있었는데 모두 꿀먹은 벙어리였지요. 그러나 질책을 받은 당사자인 장 부총리는 오히려 덤덤한 표정이었습니다. 역시 별명처럼 ‘왕초’다운 모습이고, 대인의 풍모였습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호통이 떨어진 이상 그렇게 끝날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포항제철 기공식으로 인한 문제였기에 일단 다음날로 예정된 기공식만큼은 연기하든지 취소하는 게 상식이었다. 그래도 장 부총리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황 국장이 그에게 그렇게 건의했으나 “아냐, 그대로 준비시키도록 하게나”라면서 다음날 아침 해운대로 내려가는 비행기 시간을 다시 확인하기도 했다. 해운대에서 내려 다시 헬리콥터 편으로 포항까지 간다는 계획이었다.
 
  결국 장 부총리가 전격 해임되고 후임 인선이 발표된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황 국장과 김기병(金基炳) 비서가 장 부총리를 수행하여 포항 기공식장에 도착했을 때 정오 시보와 함께 흘러나온 라디오 뉴스의 첫 대목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에 앞서 일행이 해운대 비행장 커피숍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총리실로부터 전화가 걸려 와 장 부총리가 전화를 받았는데, 본인에게는 정일권 총리로부터 그때 경질 사실이 통보됐던 것이다. 장 부총리 나름대로는 일을 잘 추진해 보려고 기공식을 생각해 낸 것이었는데, 결국 그 기공식이 부총리로서의 마지막 공식행사가 되어 버렸다.
 
 
  이후락, “여수 정유공장은 럭키화학과 교섭하라”고 통보
 
  사실은, 포항제철 기공식 말고도 장 부총리가 박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린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미국의 칼텍스와 공동투자로 제2 정유공장을 추진하면서 청와대가 구인회(具仁會) 회장의 럭키화학을 합작의 주최로 최종 결정한 상황에서도 장 부총리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발표를 미룬 일이 있었던 것이다.
 
  1964년에 준공된 울산정유공장에 이어 여수를 입지로 정하고 추진하던 제2 정유공장, 즉 호남정유 사업은 여러 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공장 입지가 여수로 정해진 것부터가 국토의 균형발전을 이루려는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휘발유 수요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어느 지역에 편중되게 정유공장을 배치하는 것은 소비자들의 선택을 위해서도 효율적이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외국의 합작 파트너를 칼텍스로 정한 것도 기존의 울산정유공장이 미국의 걸프사와 원유공급 계약을 맺고 있었으므로 제2 정유공장에는 걸프사와 맞먹는 다른 메이저 석유회사를 끌어들여 서로 경쟁체제를 갖추도록 한다는 방안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공공차관 업무를 관장하던 황 국장이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워싱턴으로 날아가 벌써 칼텍스와의 합의를 이끌어 낸 터였다. 캘리포니아의 스탠더드 오일과 텍사스의 텍사코 정유회사가 해외진출을 위해 동일한 지분으로 만든 합자회사가 칼텍스였다.
 
  “더구나 제2 정유공장은 처음부터 석유 나프타 분해시설을 갖춘다는 계획으로 추진되고 있었습니다. 울산정유공장은 아직 이 시설을 갖추지 못했었지요.” 그는 이 나프타 분해과정에서 얻어지는 에틸렌이 나일론이나 플라스틱 등 고분자 합성물질의 원료가 되는 만큼 제2 정유공장 사업이 박 대통령을 비롯한 정책 담당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강조했다.
 
  이 사업을 놓고 럭키화학과 신격호(辛格浩) 회장의 롯데, 김종희(金鍾喜) 회장의 한국화약, 그리고 한양대의 김연준(金連俊) 총장 등이 치열하게 유치 경쟁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대한석유공사가 울산정유공장 운영을 통해 막대한 독점수익을 내고 있다는 소문이 일찌감치 퍼지면서부터 제2 정유공장 사업에 달려들려는 사업자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처럼 당당한 실력자들 사이의 한판 힘겨루기가 시작되자 다른 중견기업들은 제풀에 꺾여 중도 포기하고 말았다.
 
  이런 힘겨루기는 청와대의 결정으로 마침내 승자가 가려지게 된다. 청와대 이후락 실장이 황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럭키화학과 교섭을 시작하도록 하라”며 통보를 해 준 것이었다. 사실상의 결정 통보였다. 그때만 해도 중요한 국책사업은 공개심사를 하는 게 아니라 대체로 통치권 차원에서 결정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결정된 상황에서도 장 부총리가 승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아마 다른 판단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이후락 실장의 전화 얘기를 보고했지만 ‘나는 아직 모르는 일’이라며 시치미를 떼는 모습이었지요.”
 
  그는 “그것은 청와대의 결정 통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며 “나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고위층 내부에서 뭔가 복잡한 내막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고 당시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렇다고 속사정을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청와대에 의해 사업자 결정은 내려졌어도 이렇게 발표가 미뤄진 채 계속 줄다리기를 벌이게 됐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후락 실장이 황 국장을 거듭 다그치게 되고 황 국장은 그때마다 장 부총리에게 이 실장의 전화내용을 전달했지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는 가만히 있으라”는 답변만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 사정은 아니었다. 결국 청와대의 결정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청와대의 결정에는 박 대통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후락 실장이 황 국장에게 통보를 했을 때는 자기 혼자만의 뜻을 전달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드디어 며칠 지나서 장 부총리가 그에게 “요전에 이 실장이 얘기한 대로 처리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는 “그날 장 부총리가 청와대를 다녀오자마자 내린 지시였기에 박 대통령으로부터 무슨 꾸지람을 듣고 내려온 게 아닌가 막연히 짐작했을 뿐”이라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앞서 포항제철 기공식 문제로 인해 박 대통령이 장 부총리를 호통치면서 제2 정유공장 당시의 얘기를 포함시킨 것도 그런 때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가 럭키화학 결정을 통보했는데도 기획원에서는 다른 기업인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발표를 질질 끌었다”며 질책을 퍼부었던 것이다. 이후락 실장으로부터 낙점을 알리는 통보를 받고도 발표를 미루었던 일을 들춰낸 것이었다.
 
 
  유찬우 풍산금속 회장, 탄피 제조 요구에 시큰둥
 
박정희 대통령이 방위산업 현장을 시찰하는 중이다.
  결국 장기영 부총리는 통치권자의 절대 신임하에서 무섭게 질주하며 경제개발 계획을 이끌다가 끝내는 불명예 제대를 감수해야 했다. 자신감이 지나친 나머지 빚어진 실수의 결과였다. 박 대통령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그를 완전히 내친 것은 아니었다. 1969년 일본과의 현안 타결을 위한 특사로 그를 일본에 파견하였으며, 1972년에는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런 과정을 거쳐 럭키화학과 칼텍스는 호남정유라는 이름으로 50대50의 지분으로 공동투자해 1967년 5월 정식 출범했다. 호남정유가 하루 6만 배럴의 원유를 처리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준공된 것은 1969년의 일이다. 지금의 GS칼텍스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울산정유공장도 당초 하루 3만5000배럴의 처리 능력을 차츰 늘려 가고 있었다. 울산정유공장이 나프타 분해시설을 추가로 갖추고 가동에 들어간 것은 1973년의 일이다.
 
  그러나 제2 정유공장 사업에서처럼 청와대가 직접 사업자를 낙점한 경우는 드물었다. 그 밖에는 실무진의 의견이 거의 받아들여졌다. 막대한 이권이 걸려 있는 분야의 사업자를 선정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박 대통령 본인의 생각이 없지야 않았겠지만 실무진의 판단을 더 믿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한 리더십이 당시 경제개발 계획이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의 하나로 꼽힌다.
 
  그렇게 선정된 사업 참여자들이 일약 재벌의 반열에 오른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그 가운데 하나의 사례가 바로 풍산금속이다. 정부가 1971년 방위산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점개발 사업의 하나로 분류된 총포분야의 사업자로 풍산금속을 선정했던 것이다. 당시 방위산업 계획은 김학렬(金鶴烈) 부총리의 주재하에 구성된 태스크포스가 관할했는데, 팀장은 기획원의 황병태 운영차관보가 맡고 있었다. 그가 공공차관 과장에서 경제협력국장을 거쳐 차관보로 승진했다. 장기영씨의 뒤를 이어받은 박충훈 부총리가 종합제철 사업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김 부총리로 바뀌어 있을 때였다.
 
  상공부의 오원철(吳源哲) 차관보와 국방부의 신원식(申元植) 군수차관보, 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심원택(沈遠澤) 부소장이 태스크포스의 참여 멤버였다. 국방부와 KIST의 핵심 관계자들이 회의에 참석했다는 자체만으로도 방위산업에 임하는 긴장감의 분위기는 일단 충분했다. 그때 거듭된 논의를 거쳐 중점추진 분야로 선정된 조선소와 자동차, 주물, 그리고 총포 등이 이른바 ‘4대 핵심공장 사업’이었다.
 
  “당시 풍산금속은 경기도 부평에서 가정용 구리제품을 만들어 내는 소규모 업체에 불과했습니다.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겨우 찾아냈지요. 우리가 기준으로 삼고 있던 수준보다 다소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생판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보다는 비슷한 일이라도 해 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풍산금속을 운영하던 기업인이 바로 유찬우(柳纘佑) 회장이다. 화약은 벌써부터 국내에서 제조되고 있었는데도 총알 탄피는 아직 손대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총알 탄피가 구리와 비철금속의 합금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구리 제품을 제작하는 풍산금속이 방산업체로 선정됐던 것이다.
 
  이와 함께 다른 분야에서도 계획대로 사업자 선정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조선소 사업자로는 정주영(鄭周永) 회장이 울산에서 추진하던 현대조선소가 선정되었고, 자동차 분야는 김창원(金昌源) 회장의 신진자동차가 대상으로 올랐다. 현대자동차도 있었지만 아직은 포드사를 인수받아 조립단계의 작업을 하는 초창기에 불과했다. 조선소 사업을 현대 측에 맡기기로 했으므로 현대자동차를 중복 선정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따른다는 판단도 없지 않았다. 주물공장은 서울 청파동에 있던 대한주철공업사가 거의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총포사업자로 선정된 유 회장은 정작 이런 제안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황 차관보가 유 회장에게 기획원을 방문하도록 연락하여 태스크포스의 선정 경위를 설명하고 정부가 앞으로 전폭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그는 “지금 매달리고 있는 제품 공장에 만족하고 있다”면서 총포 공장에 대해서는 능력도 없고, 흥미도 없다는 답변이었다. 그러고는 별다른 논의도 이뤄지지 못한 상태에서 그냥 가 버리고 말았다. 그는 “유 회장은 넥타이를 맵시있게 맨 멋쟁이였는데, 눈치로 보아서는 설득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라며 40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1976년 5월 31일 포항제철 제2고로 화입식에서 직접 불을 댕기는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이 직접 설득해 풍산금속을 방위사업체로 지정
 
  결국 이 문제는 청와대까지 보고된 끝에 박 대통령 자신이 직접 유 회장을 만나 보겠다고 하여 그를 청와대로 부르는 단계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 사이에 김학렬 부총리가 그를 설득하려고 다시 기획원으로 불렀으나 시원스런 답변을 듣지 못한 터였다. 김 부총리가 “정부에서 여러 가지로 지원을 해 드리면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역정을 섞어 가며 설득했으나 그는 선뜻 응낙하지 않았다. 다만, 김 부총리의 체면을 생각했는지 곧바로 거절하지는 않고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겠다”며 유보적인 입장으로 돌아섰을 뿐이다.
 
  박 대통령은 이 방위산업 계획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방위산업 계획 자체가 박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된 것이었다. 1957년부터 4년간 일본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그 직전 서울을 방문해 박 대통령에게 방위산업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한국도 더 늦기 전에 방위산업에 착수하도록 권유했던 것이다. 기시 본인이 일본의 군수산업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제2차대전 당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에서 상공대신을 맡아 일본의 통제경제를 이끌면서 군수산업 분야에 깊숙이 관여했던 것이다.
 
  이미 우리의 경제개발 단계는 제2차 5개년계획을 지나면서 비료, 시멘트, 석유화학산업을 넘어 정유 및 종합제철 사업으로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하지만 방위산업은 아직 손을 대지 못하던 실정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남북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본 무기의 국산화는 시급한 국가적 과제였다. 방위산업이 중공업의 핵심을 이룬다는 점에서 아직 중공업 분야가 취약했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때 우리는 대부분의 군수무기를 미국에서 무상원조자금으로 조달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 유 회장을 만난 것은 이런 상황에서다. 박 대통령은 그에게 “황 차관보에게 얘기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보다 차원을 높여 방위산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유 사장께서 참여해 달라”고 부탁했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이 임진왜란 시절 조정을 위해 활약한 것처럼 그의 역할을 기대한다고도 했다. 풍산(豊山) 유씨 가문인 그는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했던 서애 선생의 후손이었다. 유 회장은 결국 박 대통령의 설득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풍산금속의 참여가 결정되면서 4대 핵심공장이 비로소 제대로 모습을 갖추고 본격 사업에 돌입하게 된다. 특히 풍산금속에 대해서는 경북 안강에 소재한 육군 병기창을 인계했으며 한국화약 독점으로 이뤄지던 화약사업까지 참여할 수 있도록 후속조치가 진행되었다. 오늘날 비철산업 분야에서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성장한 풍산금속의 새로운 시발점이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실무진의 의견을 받아들여 직접 설득에 나서면서까지 사업자로 선정될 수 있도록 지원했던 결과다.
 
  한편, 박 대통령은 방위산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방부에는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면서 황 차관보를 국방부 차관에 승진·기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직속상관인 김 부총리는 그가 기획원에서 할 일이 더 남아 있다며 은근히 반대 의사를 밝혔다. 이에 따라 박 대통령도 다음을 기약하자며 황 차관보에 대한 인사 방침을 보류시켰다. 그 대신에 외무부 아주국장이던 최광수(崔侊洙)씨를 국방부 군수차관보로 기용했다가 곧바로 차관으로 승진시켰다. 이때를 계기로 국방부 군수차관보와 기획예산차관보 자리는 기획원 출신들이 돌아가며 맡게 되었다. 최동규(崔東奎), 문희갑(文熹甲), 강신조(姜信祚)씨 등이 그런 사례에 포함된다.
 
  풍산금속에 앞서 그가 아직 과장 시절이던 1966년께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박인천(朴仁天) 회장의 금호그룹이 그러했다. 광주 지역을 기반으로 운수사업을 이끌어 가던 박 회장이 기획원 황 과장의 방으로 찾아가면서 시작된 일이다. 정부가 석유화학산업을 추진한다는 소식을 들은 박 회장이 사업을 신청하려고 직접 기획원을 방문한 것이었다. 미국의 다국적기업인 다우케미칼이 국내에 생산시설 진출을 타진하고 있었고, 미국의 아더 리틀 컨설팅회사도 용역보고서를 통해 우리 정부에 적극적인 석유화학산업 투자를 권유할 만큼 석유화학산업이 붐을 일으키고 있을 무렵이었다.
 
1964년 중동산 원유 33만 배럴을 수입하며 가동에 들어간 울산정유공장의 상압증류시설. 1968년까지 석유화학 관련 공장 13개가 들어섰다.
 
  박인천 광주여객 회장, 기획원 찾아 타이어 공장 희망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인천 회장.
  “어느날, 중절모자를 눌러 쓴 허름한 차림의 노인 한 분이 부채를 흔들면서 기획원의 내 방으로 찾아왔습니다. ‘황 과장을 만날 수 있느냐’고 하기에 들어오시라고 해서 자리를 권해 드렸더니 광주에서 버스운송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더군요.”
 
  그는 “박인천 회장은 첫눈에도 순박하고 털털한 인상이었다”며 첫 만남을 소개했다. 박 회장으로서는 그때 이미 나이가 예순을 넘겼을 때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마흔 중반의 나이로 미국산 택시를 인수받아 택시 운송업을 시작한 이래 버스노선에까지 영역을 넓혀 사업 수완을 과시하던 그였다. 그가 운영하던 광주여객은 버스 운송업체로는 당시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로 꼽히고 있었다.
 
  그때 마침 폴리스타이렌(poly-styrene) 분야의 사업주를 물색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석유화학 중간물질의 하나인 폴리스타이렌은 나일론이 인조섬유로 불리듯이 인조고무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다. 이를테면, 자동차 타이어의 원료가 바로 폴리스타이렌이다. 황 과장으로부터 이런 설명을 들은 박 회장은 “안 그래도 언젠가는 타이어 공장을 계획하고 있었다”며 반가워하는 기색을 보였고, 이에 따라 청와대까지 사업자 후보로서 보고가 올라갔다. 황 과장으로서는 석유화학산업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앞으로 누가 그 분야에 관심을 보일 것인지 장담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일단 지원자가 나타난 김에 사업을 맡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1972년 6월 8일 전국 각지에서 한국부인회 3500여명의 주부들이 서울시민대강당에 모였다. 혼·분식을 통한 새마을 식생활개선을 위한 ‘주걱데모’를 하고있다.
  그때의 사업환경을 감안하자면 타이어사업은 수익 전망이 보장되어 있었다. 자동차 생산이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직후 망가진 미군 지프차의 부속품을 조립해 시발택시가 선보인 이래 새나라자동차에 이어 신진자동차가 한창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으며, 울산에서도 포드자동차가 코티나자동차 조립공장을 가동하던 중이었다. 상류층을 중심으로 자가용 승용차도 서서히 보급이 시작될 때였다. 이런 속사정을 조금만 들여다볼 줄 안다면 타이어사업은 누구나 탐낼 만한 분야였다.
 
  그러나 보고를 접한 박 대통령은 박인천씨의 사업 참여에 대해 “실무진에서 제대로 판단하지 않았겠느냐”며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그는 정식으로 서류를 제출했고 상공부가 사업계획을 최종 승인함으로써 후속절차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현재 금호석유화학과 금호타이어의 근간이 되는 한국합섬고무공업 주식회사가 1970년 출범하게 되는 계기가 그러했다. 대통령의 입장에서 마음만 먹으면 큰 인심 쓰지 않고도 주변 사람들을 재벌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한 발 물러서서 실무진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부는 석유화학의 중간 산물별로 각각 생산공장을 짓기로 하고 민간회사들을 참여시켰는데, 조홍제(趙洪濟)씨의 동양나일론과 이원만(李源万)씨의 한국나일론이 이때를 전후해서 출범했고, 한국화약이 PVC 분야에서 다우케미칼의 합작 파트너로서 참여가 결정됐다. 또 폴리에틸렌 사업은 대림산업으로 최종 낙착을 보았고 아크릴섬유 분야에서는 태광산업과 경남모직이 사업 확대를 꾀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일론이나 플라스틱 등 석유화학 제품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을 때였다.
 
 
  박 대통령, 미국의 새마을운동 시비 해결되자 격려금 1억원 주도록 지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마무리되고 전국적으로 새마을운동이 퍼져 나가고 있을 1972년 무렵,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새마을운동에 대해 정치적 캠페인으로 오해하는 움직임이 거듭 전달되어 왔던 것이다. 아침마다 확성기로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지고 농민들이 팔을 걷어붙이고는 여기저기 몰려다니는 모습이 정치 목적으로 계획된 농촌동원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미국 대사관 관계자들이 그런 시각으로 황 차관보에게 질문을 던지고는 했다. 차관 업무를 담당했던 인연으로 그가 여전히 미국 대사관과의 접촉 창구였다.
 
  따지고 보면, 그런 오해가 생길 만도 했다. 새마을운동이 1969년의 3선개헌을 비롯하여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와 국가비상사태 선포, 그리고 1972년의 유신헌법 통과와 같은 일련의 권위주의적 정권형성 과정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미국 정부의 눈총을 사기에 충분했다. 순수한 농촌운동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 가미되어 있을 것이라는 의혹이었다. 당연히 이런 과정에서 미국과의 외교적인 관계도 원활하지 않을 때였다.
 
  어쨌거나, 새마을운동으로 인해 미국 정부로부터 쓸데없이 오해를 사서는 좋을 게 없었다. 그들이 우리의 종합제철 사업을 반대하여 대한국제경제협의체(IECOK)라는 엉뚱한 감시탑을 만들었던 전례에 비추어 특단의 대비책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냥 놔두면 골치가 아플 것이 틀림없었다. 미국 정부의 오해를 풀지 못하면 앞으로 다른 사업에 있어 도움을 받기도 어려울 터였다. 더 나아가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된다면 다른 나라와의 관계도 덩달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얘기를 접한 박 대통령이 태완선 부총리(김학렬 부총리 후임)와 나를 함께 청와대로 불러들이더군요. 그리고 나에게 자초지종을 묻더니만 ‘그거 이상한 친구들이구먼. 그렇다면 오해를 풀어 주어야지’라고 하면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돌아가던 사정으로 미루어 새마을운동이 정치적 캠페인이라는 오해는 좀처럼 풀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결국은 우회적인 방법을 택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았다. 세계은행으로부터 새마을운동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얻어 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이를테면, 세계은행을 통해 미국 국무성을 공략하자는 전략이었다. 그에게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박 대통령은 황 차관보로부터 이런 방안을 보고받고는 슬며시 웃음을 내비쳤다. “세계은행이라면 자네 친구인 레이먼드 굿맨(Raymond Goodman)이 근무하고 있는 데가 아닌가”라며 비로소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결국 곧바로 출장명령이 떨어졌고 그는 워싱턴에 도착하자마자 굿맨을 만나게 된다.
 
  황 차관보는 그에게 우리 새마을운동에 대해 자세히 취지를 설명했다. 그는 세계은행이 한국의 새마을사업에 대해 심도있게 검토해 줄 것을 제안하면서 결과 보고서가 나오게 되면 국무성에 연락해서 오해를 풀 수 있도록 도와주길 바란다고 부탁했다.
 
  최종 결론이 난 것은 열흘쯤 지나서였다. 세계은행은 새마을운동이 한국의 농업경제 발전단계에서 필요한 작업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렇게 작성된 보고서를 국무성에 넘겨 주었다. 황 전 차관보는 “국무성도 이에 대해 이의가 없다는 답변을 보냈다는 것이 굿맨의 얘기였고 이로써 새마을운동으로 인한 오해는 말끔히 해소됐던 셈”이라고 그때를 회상했다.
 
  그가 워싱턴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보고회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얘기 끝에 그에게 격려금을 주도록 태완선 부총리에게 지시했다. 느닷없었다. 태 부총리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돈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되묻자 박 대통령은 “태 부총리 주머닛돈으로 주라는 것이 아니니까 정부 예산에서 주는 방법을 생각해 보라”고 했다. 정부 예비비에서 1억원 정도 주도록 하라는 얘기까지 덧붙였다. 황 차관보에게는 “그동안 자네가 자주 집을 비우는 바람에 집사람이 고생했겠는데 내가 많이 미안하다”고 위로의 얘기도 건넸다. 미리부터 생각한 얘기였던 듯했다.
 
  태 부총리는 더욱 어리벙벙한 표정이었다. 행정 관례나 예산 사용규정에도 전례가 없었을 뿐 아니라 공직사회의 기강에도 혼란이 일어날 소지가 다분했다. 태 부총리가 “그렇게 되면 평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 거듭 반대 의견을 제시했으나 박 대통령은 “그렇게 결정됐으니 조치하도록 하라”며 서둘러 매듭을 짓고 말았다. 이로써 방향은 정해졌고 구체적인 실행 방법만 남은 셈이었다. 당사자인 황 차관보가 오히려 난처했다.
 
1972년 4월 농촌주민들이 새마을운동 깃발을 세워 놓고 도로 확장공사에 참여해 마을 길을 넓히고 있다.
 
  박정희식 개발모델은 서울 컨센서스로 불러야
 
  청와대를 물러나오면서도 태 부총리는 “자네가 수고를 하기는 했지만 그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얘기냐”고 했다. 그는 듣기 민망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아니라고 말씀을 드리기가 곤란했던 것이니 내일이라도 그냥 없었던 얘기로 돌리면 될 것 아니냐”고 답변했지만 태 부총리는 난감한 눈치였다.
 
  결국 이 문제는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보고한 끝에 금액을 5000만원으로 줄여 기획원 예비비에서 충당하기로 했다. 예비비 처리안이 국무회의에 올라간 것은 그보다 열흘쯤 지나서였다. 그는 “그때 국무위원들이 이 안건에 대해 깜짝 놀랐고, 김 총리가 참석자들을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며 자신의 불편했던 마음을 털어놓았다. 심지어 국무위원 가운데는 그에 대해 “다른 부처의 업무도 월권으로 관여하여 행정질서를 어지럽히는 장본인이 아니냐”며 비난하는 발언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예비비 처리안은 결국 국무회의를 통과했고 그는 5000만원이라는 거액의 포상금을 받았다. 그는 “지금 기준으로 따진다면 대략 5억원 정도가 될는지 모르겠다”며 “정부 예산으로 공무원 개인이 격려금 명목의 포상금을 받았다는 얘기는 그 뒤에도 들어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 격려금을 경제협력국의 장병조(張炳朝) 행정사무관을 시켜 기획원 각 국·과장실에 골고루 돌리도록 하고는 남은 돈을 기획원 업무에 사용하도록 태 부총리의 비서실에 맡겨 놓았었지요. 그렇게 남은 돈이 대략 3000만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는 그 돈의 용처와 관련해서도 할 말이 많은 듯했다. 그 직후에 유신헌법 개정안이 발표되고 각 부처 장관들이 연고지별로 유신체제를 홍보하도록 하는 역할이 맡겨졌는데, 그때 태 부총리가 그 돈의 상당 부분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는 “태 부총리가 나에게 돈을 주는 과정에서는 매우 언짢게 생각하더니만 결국 본인이 요긴하게 사용하게 됐다”며 “돈 버는 사람 따로 있고, 쓰는 사람 따로 있다더니 영락없이 그 모양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더 중요한 사실은 박 대통령과의 인연이 그것으로 거의 마지막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후 경제기획원을 떠나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연구원 신분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하버드에서 행정학 석사를 받은 그는 다시 버클리로 옮겨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마치고 1979년 귀국했지만 그해 10·26사건으로 박 대통령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으니, 뵐 기회가 영영 없어지고 말았다”며 그는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는 현재 회고록의 결론 부분에 이르러 몇 가지 대목에 대한 보완작업을 벌이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박 대통령의 한국식 개발모델을 ‘서울 컨센서스(Seoul Consensus)’라고 부를 만하다는 것이다. 미국식 경제운용의 원칙들을 묶어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이름으로 보급되었던 전례가 있었고, 덩샤오핑(鄧小平)으로부터 추진된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베이징 컨센서스’라는 개념으로 등장하고 있는 마당에 그 선험적 모델이 되었던 박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다시 새롭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그는 외국의 학자들이 박정희 모델에 대해 일반적으로 ‘권위주의적 개발(authoritarian development)’, 또는 ‘개발 독재(developmental dictatorship)’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새로운 논의가 요구된다는 입장이다. 박 대통령이 경제개발의 계획과 집행에 있어 정치논리를 물리쳤고, 개인적인 친소관계를 배제했으며, 지위 고하에 관계없이 실무자들과 대화와 소통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권위주의적 성향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는 지적이다.
 
  그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박 대통령의 경제정책이 계속 추진됐다면 그 마지막 지향점은 과연 어디였을까에 대한 문제다. 박 대통령의 경제집중화 모델이 작은 데서 큰 데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추진되는 단계별 접근방법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단순히 공장을 짓고 배불리 먹는 차원에서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당시 수입대체산업 투자로 시작된 경제개발 계획이 수출산업으로 전환됐고 다시 석유화학과 종합제철, 그리고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으로 확대됐다는 점에서 그 이후의 전개 방향에 대해서도 박 대통령의 복안이 없지 않았을 것으로 그는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1979년 박 대통령이 불의의 사태로 서거하면서 누구도 그 해답을 말할 수 없게 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며 “내 나름대로는 교육개발과 지식산업의 확충, 정보통신의 인프라 구축 등의 과정을 거쳐 결국에는 복지주의적 민주주의 체제가 등장하는 단계로 나아갔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다만, 경제개발 단계의 움직이는 속도가 예상을 앞질러 진행되고 있었는데도 박 대통령이 경제집중화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다른 분야에 대한 요구와 사회적 흐름에 제때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 박 대통령의 비극이었다. “박 대통령이 경제개발의 각 단계마다 철저한 완벽주의를 기하는 동안 변화의 흐름이 앞서 감으로써 시간차 조절이 늦어져 이런 비극이 유래됐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박 대통령 집권기의 마지막 경제부총리였던 남덕우(南悳祐)씨는 박 대통령이 ‘이제 유신체제가 한계에 다다라 다음 단계인 민주사회 건설에 들어가야 한다’는 의사를 밝혔던 것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던 김정렴(金正濂)씨의 증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으로도 박 대통령이 경제건설의 마지막 단계로 민주사회 정착을 바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들 말한다. 이런 주장이 부질없어 보이는 까닭이다. 그렇더라도 박 대통령이 경제개발의 성공을 통해 민주사회 건설의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튼튼히 다져 놓았다는 점만큼은 분명히 인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것이 박 대통령 당시를 돌아보는 그의 회고록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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