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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영화감독을 만나다

류승완(上)

그에게는 끊임없는 진화가 있다

글 : 임도경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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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고로 고교졸업 후 곧바로 영화계에 뛰어들어
⊙ 26세때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데뷔해 주목받아
⊙ <부당거래>는 영화에 대한 시각을 바꾼 후 성공한 작품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同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現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류승완 감독은 이제 서른일곱. 막 데뷔했을 법한 젊은 신예감독 나이대다. 막상 실물을 마주하고 앉으니, 미소년 같은 그의 모습이 그를 더 젊어 보이게 한다. 고교 시절 체조선수 출신의 감독답게 허물어지지 않은 체형도 그가 젊어 보이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는 만만치 않다. 첫 단편영화 <변질헤드>를 만들어 냈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23세. 이후 14년간 장편 7편, 단편 8편까지 총 15편의 영화를 숨가쁘게 만들어 내면서 한국 영화계의 중추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를 ‘천재감독’으로 추앙받게 한 2000년 첫 장편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스물여섯 살 때 작품. 이후 10년, 그는 6편의 영화를 만들어 내면서 액션 장르의 대가로서 면모를 굳혔다. <피도 눈물도 없이>(2002) <아라한 장풍대작전>(2004) <주먹이 운다>(2005) <짝패>(2006) <다찌마와 리-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2008) <부당거래>(2010)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하나같이 흥행 여부와 관계없이 개봉 당시 화제를 일으킨 영화들이다.
 
  특히, <패싸움> <악몽> <현대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등 4개의 단편이 모여서 완성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충무로뿐만 아니라 미국 할리우드까지 흔들어 놨다. 흑인 여배우 할리 베리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해 화제가 된 영화 <몬스터 볼>로 국내에 알려진 마크 포스터 감독은 이 영화를 (2009)로 리메이크했다.
 
 
  <부당거래>를 통해 사회적 모순을 정면 응시
 
  6500만원이라는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그는 연출, 각본, 주연, 무술까지 도맡아 리얼 액션을 선보이며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애초 한 개 관에서만 개봉할 수 있었지만, 관객들이 작품을 계속 찾자 전국에 확대 개봉된 예외적 기록도 세웠다.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상에서도 이미 그는 인기감독이었다. 같은 해 그가 인터넷 중편 영화로 제작 발표한 <다찌마와 리>(2000)는 접속 횟수가 백만 회를 넘을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모았다.
 
  이렇게 파장을 일으키며 데뷔한 지 10년. 그가 이후에 보여준 행보에 대해 영화계 안팎의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았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데뷔할 당시의 충격적인 신선함이 감퇴했다는 것이 전반적인 평가였다. 특히 와이어 액션물로 가장 많은 제작비를 투여한 <아라한 장풍대작전>이나 박노식 감독·주연의 1976년 작 <악인이여 지옥행 특급열차를 타라>를 리메이크한 작품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이하 <다찌마와 리>)처럼 키치 미학을 섣불리 건드렸다는 냉엄한 비판이 그를 위축시켰다.
 
  하지만 그는 곧 진화했음을 증명했다. 지난해 <부당거래>를 발표하면서 그에 대한 찬사는 다시 쏟아졌다. 영화평론가들은 한결같이 이 작품을 계기로 그가 작가적 변신을 이뤄 냈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장르에 대한 풍부한 이해
 
  <부당거래>에서 그가 이룬 괄목할 만한 성취는 여러 가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씨는 그에게서 다소 늘어지거나 과잉되기 일쑤였던 스토리텔링의 리듬감이 이 영화에서만큼은 완벽하게 성취됐다고 평가했다. 또 할리우드의 장인들처럼 장르의 외피 안에서 현실을 적절히 용해시키고 있고, 또 류 감독의 취약점이었던 서사의 흐름이 막힘없이 풀려 가고 있다고 했다. 또 영화평론가 장병원씨는 이에 더해, 이 작품은 류 감독이 장르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보여주는 분기점의 의미라고 했다. 강화된 계급적 시각으로 세상을 묘사할 수 있게 된 숙성된 현실인식을 보여줬으며, 한편으로는 대중의 요구와 적절하게 협상한 장르적 세련미를 갖췄다는 것이었다.
 
  <부당거래>에 대해 쏟아지는 찬사에는 이유가 있다. 류 감독의 영화에서는 가진 자는 늘 소외된 위치에 놓였다. 그가 영화 속에 구현한 대결의 서사 속에는 한국사회의 계급구조가 등장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딱한 사람들끼리의 물고 뜯는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 그가 경험해 온 세상의 이야기만을 소재로 했기 때문이다. 약자들이 살기 위해 인정을 버리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피도 눈물도 없이>, 우정을 팽개치는 <짝패>, 하류인생의 마지막 승부를 그린 <주먹이 운다> 모두 마찬가지였다.
 
  류 감독 스타일의 인생론이 <부당거래>에서는 확실하게 방향을 전환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 속에서 그는 빈궁한 삶을 벗어 버리고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시도를 했다. 또 그는 그 전까지 장르에 익숙할 뿐 아니라 그걸 자유자재로 요리하려는 듯한 모습을 거침없이 보여 왔는데, 이런 모습에서 탈피해 관객의 기대심리를 의식하는 모습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런 변화는 상당한 진화다.
 
  또 이 영화를 통해 비로소 그는 그간 자신이 신앙처럼 여겨 왔던 액션을 단순한 표현의 수단으로 정제해 내면서도 오히려 ‘파괴적 에너지’를 어떤 영화 못지않게 강하게 그려 내는 캐릭터 영화의 진수를 보여줬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경찰관, 검사, 사업가)들이 뿜어 내는 격렬한 심리적 액션은 강우석 감독의 <이끼>, 이정범 감독의 <아저씨>와 맥을 같이하는 세태영화의 계보로 기억될 것이다.
 
 
  흠씬 두들겨 맞으며 고교 체조부 생활
 
<주먹이 운다>.
  피 튀기는 액션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훌쩍 성숙한 캐릭터영화 <부당거래>에까지 이른 그의 저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5시간에 가까운 인터뷰를 통해 얻어 낸 답은 실생활을 통해 습득한 강인함, 그리고 명석한 두뇌, 인간에 대한 애정, 이 세 가지가 바탕이 된 것은 아닐까이다.
 
  그의 영화세계는 실생활과 맞닿아 있다. 그의 사부 격인 박찬욱 감독은 그의 영화 중 <주먹이 운다>를 가장 좋아한다. 그런 영화는 그 자신처럼 중산층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사람들은 절대로 만들 수 없는 감각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 감독의 말처럼 그의 영화는 보통사람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리얼리즘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가 만드는 영화는 어쩌면 그가 살아온 길에 비하면 단지 한 개의 삽화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1973년 충남 온양에서 태어났다. 사업을 하는 아버지 덕에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중학교 1~2학년 시절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 사업에 실패한 뒤 암으로 투병 중인 어머니를 간병하다가 아버지마저 암에 걸려 10개월 뒤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당시 아버지의 나이가 마흔이었으니, 지금의 그 나이 대였다.
 
  사업에 실패하고 연이은 암 치료비로 남은 재산은 없었다. 조금의 재산이라도 두 자식(류승완, 승범)에게 남기려고 약까지 먹었던 아버지는 응급실에서 목숨을 건지고 곧 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그런 비극적인 상황을 지켜보면서 부모를 잃은 두 형제는 허약한 친할머니한테 맡겨졌다. 그때부터 그는 생활보호대상자 가정의 소년가장으로서 험한 세월을 이겨내 왔다. 영화감독으로 성공하기 전까지 옷 한 벌 사 입지 못해 쓰레기더미 속에서 골라 입었고, 사는 동네가 창피해 버스를 전 정거장이나 다음 정거장에서 내린 기억을 갖고 있는 사춘기를 겪어 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체조부에 들어간 이후 선배들로부터 이골이 나게 맞으며 졸업했다. 그때 당한 폭력의 기억이 영화 속의 리얼한 액션으로 재현됐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영화계에 뛰어든 건 행운이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남보다 빨리 성공했으니 가난이 그에게 준 선물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영화배우로서 동종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동생 류승범(30)씨 역시 연기지도 한 번 받지 않았지만 감각이 뛰어난 캐릭터형 배우로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어려운 생활을 이겨 냈지만, 그에게는 강퍅함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충분하게 사랑을 받고 살아온 덕분인 것 같다. 그의 곁에는 늘 그를 보호하는 ‘여성’이 있었다. 자식사랑이 유별났던 어머니는 치맛바람으로 그를 과보호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할머니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생활이 어려워도 사랑은 부족하지 않게 클 수 있었다. 동생 류승범씨의 이상형이 ‘할머니 같은 여자’라고 하니 할머니가 어느 정도로 헌신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세상에 나선 뒤에는 세 살 연상의 아내 강혜정씨가 늘 옆에서 그를 지지하며 지켜 줬다.
 
<부당거래>.
 
 
부딪치고 깨지기를 두려워 않는 감독

 
  영화동호인 모임에서 만나 1997년 결혼한 이들 부부는 지금까지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데뷔작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아내가 모아 온 결혼자금이 몽땅 투자된 영화다. <짝패> 이후 만든 프로덕션 외유내강의 대표직을 아내 강혜정씨가 맡고, 그는 소속 감독으로서 역할 분담을 해 내고 있다. 이들 사이에 태어난 1녀2남도 소신에 따라 대안학교에 보내고 있다. 올해 맏딸이 대안학교에서 초등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에 붙었다며 “우리집에도 고시 패스생이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또 영화 속에서뿐만 아니라 세상일에도 안테나를 바짝 세우고 있다. 효순이와 미선이 사건 무죄판결에는 평소 절친한 사이인 박찬욱, 김지운 감독과 함께 삭발로 항의했고, 스크린쿼터제 사수에도 나섰다. 이 때문에 반미인사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지금도 세상일에 자신의 의견을 숨기지 않는 그를 매체들은 반긴다. 뉴스생산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 주기 때문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이후 거침없이 전진했던 그는 2008년 <다찌마와 리> 실패 이후 최대의 위기를 겪었다. 냉혹한 영화판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영화만 하는 그를 투자자들이 외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프로덕션 사무실을 정리하고, 직원들 퇴직금을 주기 위해 CF감독까지 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는 영화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용감하게 수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렵게 투자자를 연결해 제작한 영화가 그의 제자 격인 권혁재 감독의 <해결사>(2010)다. 류 감독 자신도 ‘류승완의 친구들’이 개런티를 생각하지 않고 재기할 수 있게 도와준 덕분에 <부당거래>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부당거래>는 영화적으로도 그의 성숙미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겪은 인간적인 성숙은 더 깊은 것 같다.
 
  류 감독은 아직 젊다. 부딪치고 깨지며 새로운 경험 쌓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여전히 다난한 변화의 도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부당거래>로 멋지게 전진한 그가 영화의 두께를 어떻게 더 채워 나갈지 다음 영화, 그리고 그 다음 영화를 흥미진진하게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류승완 인터뷰 (上)
 
 
“<부당거래> 찍으며 스타일 바꿨다”

 
   류승완 감독은 요즘 바쁘다. 제10회 미장센 단편영화제 ‘장르의 상상력전’에서 올해의 집행위원으로 선정돼 동분서주하고 있다. 4개의 단편 모음 장편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비롯해 8편의 단편영화를 통해 실력을 입증한 그가 이번 영화제를 어떤 캐릭터로 이끌어 갈지 궁금해진다. 이 영화제는 6월 24일부터 7일간 서울 용산 CGV에서 진행된다.
 
  이뿐만 아니라 MBC-TV 창립 5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타임-간첩 편> 연출을 맡아 영화감독이 찍은 방송용 다큐의 진면목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의 다음 작품이 스파이를 소재로 한 것이라니 예행연습은 확실하게 해 둔 것 같다.
 
  그의 아내인 강혜정 대표가 운영하는 프로덕션 외유내강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소문에서 듣던 대로 ‘달변가’였다. 5시간 가까운 인터뷰가 지루하지 않았으니까.
 
  ―방송용 다큐멘터리를 맡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았나요. TV 영상언어와 영화 영상언어는 접근법이 완전히 다른데요.
 
  “처음에 이창동 감독님이 재밌는 거 한번 해 볼 생각 없냐고 연락해 왔어요. 그 전부터 제가 다큐멘터리는 한번 해 보고 싶었어요. 영화감독이 되고 나서 10년 정도 넘어서니까 주로 만나는 사람이 업계 사람들이잖아요. 이게 재미가 없는 거예요. 제가 영화를 만드는 데 필요한 소스는 다양한 삶의 흔적을 보면서 채집하게 되는데, 지난 10년을 지탱해 줬던 것이 차단됐어요. 그동안에는 20대를 길거리에서 살고 엉뚱한 사람들 만나고 했던 것이 자양분이 됐는데, 그런 것들이 차단되는 거죠. 물리적으로 너무 바빠요.”
 
  ―간첩 문제를 다뤘는데, 제작과정은 재미있었나요.
 
  “<부당거래>(2010) 할 때 도움을 많이 줬던 《시사in》의 주진우 기자를 만나서 인터뷰하고 있는데, MBC 정동권 부장님이 오신 거예요. 얘기하다 보니까 창사 50주년 다큐멘터리인데 최근 한국의 50년 안에 있었던 모든 것들이 소재가 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사실 소재 선택에 있어서 무제한이나 마찬가지라는 얘기잖아요. 그러면 제가 준비하는 다음 영화가 스파이가 등장하는 영화인데, MBC에는 방송자료가 많을 테니 다큐멘터리를 핑계로 자료조사를 하면 어떨까 해서 하기로 했어요. 근데, 자료가 생각보다 없는 거예요. 정동에서 여의도로 이사 가면서 다 버렸대요. 그래서 ‘완전 똥 밟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기로 했으니 잘하자는 생각은 버리고 우당탕하는 모습으로 만들었어요.
 
  보면 아시겠지만, 저하고 주진우 기자가 간첩 찾으러 다니는 내용인데, 산만하고 덤 앤 더머처럼 나와요. 약간 사기꾼들 같기도 하고(웃음).”
 
 
  간첩 다큐 찍으며 미국보다 북한을 더 모르고 있다는 것 알아
 
  ―간첩 찾기를 일종의 막무가내 추적 같은 접근법으로 그렸네요.
 
  “그렇죠. 일종의 <엄마 찾아 삼만리> 같은 거죠.”
 
  ―직접 현장을 뛰면서 한국 사회의 또 다른 이면을 봤을 것 같은데요.
 
  “저는 애초에 거창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하질 않았어요. 저희한테 배당된 시간이 1시간이 채 안되는데 이 안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부터 생각했어요. 그리고 제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기는 정말 싫었고요. 대본도 없었거든요. 이거 자체가 저한테 다음 영화를 위한 학습의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딪쳤는데, 다큐를 끝내고 나서 사실 답을 얻은 게 아니라 더 큰 질문만 남았어요.
 
  분단이 예능의 소재가 될 수도 있다는 위험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포함해서 지금의 젊은 세대한테, 분단상황에 대한 인식을 전혀 신경 안 쓰고 있는 것보다는 이런 식으로라도 전하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 이 다큐를 선택했어요. 만들면서 제가 스스로 놀랐던 건, 제가 북한을 미국보다 더 모르고 있는 거예요. 지금 상태로 가다가는 통일이라는 단어 자체가 과거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왜 통일을 해야 되냐는 것을 잃어버리게 되면 효용가치가 사라지는 거잖아요. 저한테는 그런 좋은 질문을 많이 남긴 절호의 기회였던 것 같아요.”
 
  ―기자간담회에서 “다시 찍으면 잘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했던데, 특히 후회되는 부분이 있었나요.
 
  “아, 그건 기술적인 부분들이죠. 다큐를 처음 해 보니까. 이를테면 녹음을 할 때 붐 마이크를 여기서 썼으면 좋았겠구나, 왜 무선 마이크를 안 썼을까 하는 정도의 아쉬움이 있어요.”
 
  ―그건 영화 찍고 나서도 똑같지 않나요.
 
  “매번 그렇죠. 아마 이런 생각은 평생 갈 거 같아요.”
 
  ―그게 다음 영화의 원동력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렇죠.”
 
  ―TV와 영화의 차이로 인해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이 있다면요?
 
  “일단 영화는 암묵적으로 관객들이 상영시간 동안 속박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거잖아요. 화장실 가고 싶은데도 참고 참다가 나가고. 그런데 방송은 그게 아니라는 거죠. 언제든지 채널이 돌아갈 수 있고, 식당에서 볼 수도 있고. 오히려 TV 프로그램이 훨씬 더 냉혹한 상태에서 관객들한테 노출돼 있어요. 저는 집에 TV 연결이 안돼 있어서 TV는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나 촬영할 때 숙소에서 보는 정도예요. 이런 생활이 몇 년 되니까 예전에 TV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집에서 집중하여 그 시간을 기다리고 했던 기억이 까마득해요. 저를 중심으로 인지하다 보니까 보통사람들도 그렇게 산만한 상태에서 볼 것이라는 게 제 안에 자리 잡고 있어서 다큐가 산만하게 나왔어요. 그러니까 언제 어디서부터 봐도 얘기되는 것 같고.”
 
 
  “인지도는 높은데 선호도는 낮더라”
 
  ―지금처럼 유명감독에 대한 선망으로 인해 영화 밖의 일들이 많아지는데, 이런 식으로 대중에게 다양하게 노출되는 일이 부담스럽지는 않나요.
 
  “저는 그것이 감독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변화에서 왔다기보다는 감독을 대중과 연결해 주는 매체환경이 변화해서 오는 특성인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제가 어렸을 때도 이장호, 배창호 감독님을 알았단 말이에요. 제가 초등학교 시절이었는데.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같이 유명한 감독의 영화에는 포스터에 사진도 박혀 있고 ‘흥행의 마술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마케팅의 중심적 인물로 등장했어요. 지금은 오히려 그렇지 않죠. 그때나 지금이나 흥행감독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크게 바뀐 것 같지 않다는 거죠. 매체들이 많다 보니까 말들이 많아지면서 뭔가 거기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고 찾는 사람도 많아지고. 영화계도 사람이 사는 데니까 여기 해 줬는데 저기 안 하긴 뭐해서 불려 다니잖아요. 옛날에 유현목 감독님도 《선데이 서울》에 고백수기 상담해 주고, 이런 것 하시고 그랬잖아요(웃음). 노출빈도가 많아지니까 착시현상도 있을 거예요.”
 
  ―영화 외적인 활동이 관객들을 스크린으로 끌어들이는 데 도움이 되나요.
 
  “도움이 안되는 것 같아요. 제가 갖는 딜레마가 뭐냐면, 스타 감독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허당이냐면, 제가 <부당거래>를 만들 때 투자사에서 마케팅 준비 하면서 선호도와 인지도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어요. 저는 인지도가 되게 높아요. 그런데 반면 선호도는 되게 낮은 거예요. 그리고 제가 실제로 만나 보면, ‘팬이에요. <무릎팍 도사> 잘 봤어요. 영화는 본 게 없는데 영화 챙겨서 볼게요’라는 사람들이 많아요. 제가 인터뷰나 대중매체에 나가는 것에 대해서 부담스러워하는 것 중 하나가 어느새 보니까 제 이름이 영화를 짓누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에요.”
 
  ―대중적인 인기인이 됐는데, 만든 영화는 마니아가 좋아하는 영화라는 게 그런 결과를 낳은 게 아닐까요.
 
  “그게 저한텐 좋은 게 아닌 거죠,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선. 사실 저는 제가 대중의 사랑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고, 저는 그냥 제 가족들하고 저하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하고만 친하게 지내면 돼요. 그것만으로 저는 행복하게 살 것 같고요. 저는 저의 영화가 훨씬 더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저 친구는 TV에 나와서 재밌고 뭐하고 한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이 만든 영화라는 인식을 갖고 들어와 영화를 보면서 자기가 그렸던 영화하고 다를 때 드는 배신감이, 오히려 백지상태에서 들어와서 그 영화를 충분히 즐겼을 때와는 결과가 다르다는 거지요. 제 영화가 다른 영화제에서 상영되거나 할 때 그런 경험이 많거든요.”
 
  ―다양한 매체에 노출되면서 형성된 이미지가 영화를 백지상태에서 즐기기에는 장애요소로 작용한다는 얘기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그 감독은 어떤 것만을 한다는 식으로 일종의 고정관념이 생기는 것이 저는 좀 위험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예전엔 그런 생각 못했는데 요즘엔 그런 생각 해요. 이 생각이 또 언제 바뀔지 모르는 거지만.”
 
 
  영화 포기하려던 시점에 데뷔작 찍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 찍고 남은 필름으로 천재감독 소리를 들은 첫 장편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를 만들었다는 걸 보니까, 그 속에 기구한 스토리가 있을 것 같은데요.
 
  “데뷔작은, 엄밀히 말하면 전체를 그렇게 만든 건 아니고요. 제가 거의 영화를 포기하려던 시점이었어요. 그때 할머니와 저와 동생 셋이 살았죠. 연출부하고 단편영화 찍고 이럴 때죠. 장편시나리오 썼는데, 공모에 된 건 하나도 없고 또 하나도 못 팔고, 단편영화도 만들었는데 경쟁영화제에서 다 떨어지고…. 지금 제 집사람하고 정말 심각하게 공무원 시험 같은 걸 봐야 하나, 이러고 있다가 그 전부터 제가 장편을 찍는다면 꼭 이 영화를 찍겠다고 해서 써 놓은 시나리오가 제 데뷔작이었어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실제 만들어진게 96, 97년쯤 시작해서 촬영기간이 3년 걸렸거든요(이 작품은 <패싸움> <악몽> <현대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등 네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왜냐면 대본을 쓸 때 한 번에 장편으로 만들 수도 없고, 돈도 없고…. 어떤 제작자도 저를 영화감독으로 인정 안 해 줄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영화로 만드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애초에 대본을 쓸 때 얘기를 나눈 거죠. 단편으로 하나씩 만들어서 영화제 다니면서 영화제 상금을 받으면 다음 에피소드를 찍고, 전략을 그렇게 세워서…. 그래서 일단 첫 번째 에피소드를 찍어서 만약 이것마저도 모든 영화제에서 떨어지면 영화를 접자 하고 집사람이랑 적금통장 다 깨서 영화를 찍었는데, 그때 제 집사람이랑 친했던 선배가 <나쁜 영화>를 제작했던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촬영감독도 <나쁜 영화> 팀이라 거기에 남아 있는 16mm 필름을 얻어서 찍기 시작한 거지요. 필름 상태가 좋지 못해서 그걸로 다한 건 아니고요, 자투리 필름들을 얻어서 스타트한 건 사실이에요. <여고괴담>에서 남은 소품용 피를 썼다는 소문은 아주 일부가 사실이에요. <여고괴담>의 분장팀이 같이 일을 한 건 사실인데, <여고괴담> 피를 쓴 게 아니라 그 분장팀이 만들어 준 걸 쓴 거예요. 한마디로 아주 가난하게 찍었죠. 현장에서 밥해 먹고 그러면서 찍었으니까.”
 
  ―그 영화에 들어간 총예산이 6500만원이라는 말이 맞나요.
 
  “첫 번째 영화가 340만원 들었고, 그 다음에 500만~600만원 들었고, 나머지 몰아서 하면서 전체 순제작비가 6500만원 정도 됐죠. 1년 동안 경쟁영화제에서 떨어져 저는 포기하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일 년 만에 지금의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에서 5편 중 뽑혀 상금 500만원 받아서 다음 걸 하게 된 거죠. 그래서 순서도 첫 번째 에피소드 찍고, 돈이 가장 적게 드는 세 번째 에피소드를 찍었어요. 그 세 번째 에피소드가 한국독립단편영화제(현재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으면서 나머지 에피소드를 찍었지요. 그때 심사위원장이 이창동 감독님이셨어요. 상금도 상금이지만 ‘영화마을’이라는 비디오 체인에서 영화를 제작하려고 했을 때거든요. 거기 제작지원 프로그램에 돼서 데뷔작을 만들게 된 거죠. 저는 아주 특별한 케이스예요.”
 
  ―특별한 행운아라는 얘기지요?
 
  “매해 11월, 12월만 되면 대학을 가지 않고도 영화감독을 하고 싶은 꿈 많은 고교생들한테 이메일이 막 와요. 저의 데뷔에 대해 시간이 흐르면서 내용이 과장되고, 이러면서 신화를 만들게 되잖아요. 그래서 절대 나를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된다. 나는 보편적인 상황에서 된 사람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개봉할 당시 분위기가 <쉬리> 이후에 한국영화가 대형화되는 것에 대한 반감들이 비평계에 있는 상태였어요. 할리우드 스타일의 블록버스터 전략이 과연 옳은 것이냐 하고 가는 상황에서, 한동안 <파업전야>와 같은 독립장편영화들이 안 나오다가 툭 튀어나왔단 말이에요. 그런 외적인 상황과 지금 제가 말씀 드린 이 상황들이 겹치면서 굉장히 엄청난 현상처럼 된 거예요. 지금 나오는 <똥파리>나 <무산일기> <파수꾼> 등 이런 영화들이 다 훌륭한 독립영화들이고 다 사연 있는 영화들인데, 제가 봐도 제가 데뷔할 때 상황이랑 다른 것 같아요. 절대로 나의 케이스를 보편적인 것에 맞춰서는 되질 않는다, 그런 얘기들로 답장을 해 주죠.”
 
 
  노가다, 불법 운전연습 강사, 삐끼 등 안 해 본 것 없어
 
<아라한 장풍대작전>.
  ―그전에 연출부 생활은 했지요?
 
  “많이 알려진 것처럼 저는 대학을 못 나왔어요. 공부를 못해서. 한영고등학교 2부 체육부에서 체조를 전공했어요. 저희 학교 전체에서 대학진학률이 체육부가 제일 높아요. 저희 또래 체대생들은 ‘똘반’이라고 했는데, 들어갈 땐 돌들이 모여서 똘반인 줄 알았는데 똘똘 뭉쳐서 똘반이에요. 그때 대학은 실기를 거의 대부분 만점을 받고 들어가요. 그 정도로 혹독하게 해요. 제가 턱걸이 3개 했는데 세 달 만에 24개 했으니까. 저는 막판에 대학시험을 체대로 안 보고 영화과를 썼죠. 단국대를 썼나 그랬는데. 30-30-40의 비율은 영화과나 체육과나 같으니까 도전해 본 거지요.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들하고 영화를 찍었기 때문에 실기를 만점 받을 것 같았고, 이러면 체대 들어가는 거나 비슷하겠는데 하고 썼는데 떨어졌죠. 그 다음에 집안사정상 재수를 할 상황이 아니라서 대학 안 가고 사회생활하면서 영화 현장을 기웃거렸어요. 연출부 하는 틈틈이 계속 시나리오를 썼죠. 대학 떨어지고 나서부터는 일단 육체노동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죠. 노가다도 하고, 호텔 청소일, 불법 운전연습 강사에 삐끼까지 했어요.
 
  그런데 제가 한 직업을 오래 갖지 못한 것이, 하다가 영화 필름 워크숍이 있으면 거길 가고, 시네마테크 같은 데서 하는 프로그램 있으면 거길 가고, 워크숍을 끝내고 나서 연결되면 에로영화 촬영부도 하고, 그러다 박찬욱 감독님을 찾아간 거죠. 스무 살 무렵이었어요. 고등학교 시절 제가 영화공부할 때 그분의 글을 보면서 영향을 많이 받아서였어요. 그런데 그때는 지금의 박찬욱과는 완전히 다른 박찬욱이라서, 박 감독님도 제작자들이 안 만나 주고 힘들 때였어요. 그 인연으로 22살 때인가 박찬욱 감독님 연출부를 하다가 영화가 엎어지는 바람에 또 돈 벌러 나서고 그랬어요.”
 
  ―결혼을 했을 때인가요.
 
  “결혼 안 했죠. 제가 박찬욱 감독님의 <3인조>(1997)를 끝내고 다른 거 하다가 엎어지고 해서 배우 이경영 선배 로드매니저를 했어요. 그때 결혼했죠. 그리고 <여고괴담 1>(1998)에서 소품을 했고, <닥터K>(1998) 세컨 조연출을 하고…. 제 공식적인 연출부는 그 3편이죠. 그 사이사이에 계속 《프리미어》 같은 영화잡지 등에 글쓰고 그랬어요. 그때 봉준호 감독도 힘들 때라 서로 아르바이트 추천해 주면서 근근이 버텼죠.”
 
  ―박찬욱 감독과 오랜 시절 소통했는데, 박 감독이 갖고 있는 감독으로서의 최대 미덕을 꼽는다면?
 
  “항상 앞으로 가요. 지금도 제 주위 어떤 사람보다 책을 많이 보고, 어떤 사람보다 영화를 많이 보고, 어떤 사람보다 사람을 많이 만나요.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것에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게 지금도 궁금해요. 제가 감독 되고 난 다음에 무슨 영화제에 같이 나갔을 때 제가 모르는 영화를 항상 먼저 보니까요. 제가 하도 궁금해서 어떻게 하면 감독님처럼 영화를 보고 책을 보냐고 했더니, 감독님이 ‘처자식한테 욕을 먹으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영화에 대한 열정은 아직도 아마추어 같아요.”
 
  ―두 분 다 한결같을 것 같네요.
 
  “박 감독님을 거친 영화감독이 꽤 있는데 제가 유독 감독님을 귀찮게 하고, 이런 것도 있는 것 같아요. 항상 시나리오 나오면 상의 드리지요. 일단 권위 세우는 걸 본능적으로 너무 싫어해요. 이창동 감독님도 그렇고, 제가 좋아하는 분들이 공통적으로 그러는 것 같아요. 물론 연출부 시절에는 상처도 많이 받았죠. 숙제 해 오면 ‘네가 감독이면 이렇게 할래’, 이래서 막 절규하고 그랬는데, 그분이 사용하는 유머 같은 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고…. 다들 박찬욱 하면 어려워하는데, 만나서 놀리고 그러니까 서로 편해요.”
 
 
  카메라 사려고 중3부터 고1 때까지 점심 굶으며 돈모아
 
  ―박 감독을 사부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감독으로서 배운 점을 꼽는다면?
 
  “영화에 대한 태도랄까. 박 감독님은 제가 어떤 시나리오를 쓰면 살벌하게 말씀하세요.”
 
  ―그게 대부분 타당한 지적인가요.
 
  “일부는 취향이 안 맞는 부분도 있어요. 박 감독님이 제 영화 중 좋아하시는 게 <주먹이 운다>거든요. 그런 영화는 자기는 못 만든다는 거예요. 자기는 중산층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정서에 대해서 머리로 이해하는 거지 느낄 수 없다는 거지요. 기본적으로 박 감독님이 어떤 계산 없이 그런 말씀을 해 주시는 거예요. 제가 지금 영화를 만들고 이런 인터뷰를 할 수 있게 한 데는 사실 제 개인 능력보다 사람 운 덕분인 것 같아요. 봉준호 김지운 같은 감독들, 스태프들 등 사람 운이 있어요. 제가 1등이 아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라이벌이 아니기 때문에….”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만들 때의 갈급하고, 최선을 다하던 마음을 매 영화에 유지하나요.
 
  “그러진 않은 것 같은데요, 그렇기에는 제가 많이 바뀌었어요. 일단 삶이 바뀌었으니까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만들 때는 할머니, 동생까지 전 가족이 11평짜리 집에서 다 살았어요. 오세훈 시장님이 그게 가능하냐고 하는데, 그게 가능해요. 그리고 그 영화가 성공하기 전까지는 제 돈으로 옷을 사 입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실제로 쓰레기장에서 쓸 수 있는 물건을 구해서 살았으니까요. 제가 일했던 불법 운전교습소 옆이 쓰레기장이었는데, 쓰레기장 형님들하고 친해서 쓸 수 있는 물건들을 얻어다 썼지요. 그때 생활보호대상자로 동사무소에서 쌀 받아서 살았어요.
 
  저는 저희 동네 가는 버스를 타고 내릴 때 동네 정류장에서 안 내렸어요. 그 전 정거장이나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지요. 쪽팔려서, 거기서 내리는 게. 저는 가난에 대한 공포가 아직도 있는 사람인데, 우리 윗세대의 가난하고 저희 세대의 가난은 다른 것 같아요. 윗세대의 가난은 전쟁 직후에 모두가 가난한 상태였으니까 상대적 박탈감은 없는데, 우리 때는 안 그랬어요. 전 카메라를 사려고 중3 때부터 고1 때까지 점심값 2000원씩을 굶으면서 모았어요. 어쨌건 극빈층의 삶에서 벗어났으니까 지금은 다르죠.”
 
  ―생활이 많이 바뀌었나 보네요.
 
  “저는 중학교 때부터 일을 했어요. 어떻게 보면 지금의 저를 만들어준 게 가난에 대한 공포와 스트레스가 아닌가 해요. 어쨌건 가난하고 싸워야 했기 때문에, 그게 저를 만든 것 같아요. 그건 아무리 말로 해도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에요. 지금은 비행기 타고 나가서 외국 친구도 사귀고 맘만 먹으면 가고 싶은 데 다 갈 수 있지만, 예전엔 아무리 마음을 먹고 노력해도 가고 싶은 데 못 갔거든요. 하고 싶은 거 못하고. 그런데 지금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고, 엄청난 변화죠. 일단 가난에서 해방이 됐다는 것만 해도 같을 수가 없죠.”
 
  ―그런 경험들이 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그건 모르겠어요. 그건 좀 더 시간이 지나봐야 알 것 같고. 제 본인은 잘 못 느끼는 것 같아요. 아무리 그래도 제 본능 안에 가난이 줬던 절약하는 습관들이 본능적으로 남아 있어요. 저는 현장에서 시간의 누수나 예산이 엉뚱한 데로 빠져나가는 걸 못 견뎌 해요. 예산과 스케줄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예전의 그게 습관이 된 것 같거든요. 이제는 본능처럼 배어 버려서 안 없어지는 것 같아요. 그 모습을 제 영화가 보여주지 않을까 싶어요. 나중에 시간이 좀 더 흘러서 제가 만들었던 필모를 쭉 훑어보면 제 삶과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모두 영화에 투영될 테니까.”
 
 
  <다찌마와 리> 실패 후 많은 생각 했다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지난 10년간 7편의 장편영화와 8편의 단편영화를 만들었는데, 작품적 전환기를 구분해 본다면?
 
  “명확한 건 제 인생 전체에서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커다란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고요, 일종의 코리안 드림을 제 스스로 증명했던 것 같고, 그 다음 분기점은 <부당거래> 같아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이후에 저한테 일종의 권력이 생겼단 말이에요. 제가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었고, 그러다가 부딪쳤던 게 <짝패>(2006)를 끝내고 나서예요. 제가 하고 싶었던 영화가 무산되고, <다찌마와 리>(2008)를 다른 외부적인 여건으로 인해 만들게 됐고, 결국 흥행 실패하면서 제 의도와는 다르게 원치 않는 안식년을 갖게 됐어요. 그러면서 뭔가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와중에 나온 영화가 <부당거래>였거든요. 실제로 현장에서도 달랐고, 영화에 대한 평가도 달랐고.”
 
  ―사회를 보는 눈이 깊어진 건가요.
 
  “사실 그렇게 크게 달라진 건 없는데…. 저는 <짝패>나 <부당거래>의 주제가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아요.”
 
  ―<짝패>와 <부당거래>가 연결된 작품이라는 말이네요.
 
  “<부당거래>가 훨씬 더 복잡한 이야기긴 하지만, <부당거래>와 <짝패>의 시나리오 플로팅(ploting)을 보면 유사하거든요. 처음에 미스터리한 사건이 벌어져서 그 사건을 해결하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서로 의심하는 게 비슷해요. 믿었던 사람이 배신하고…. 그런데 <짝패>에서는 제가 일종의 영화광으로서 좋아하는 걸 전시하고, 나열하고, 취향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 훨씬 강했어요, 예를 들자면, 같은 스테이크가 나왔는데 소스를 너무 많이 친 게 <짝패>예요. <부당거래>는 황정민 류승범 유해진처럼, 어떤 배우를 선택하고 따라갈 것이냐라는 관점에서, 즉 소스보다는 스테이크 그 자체를 즐기게 한 거예요. 제가 왜 <부당거래>를 분기점으로 생각하냐면, <다찌마와 리>라는 영화를 저의 모든 취향으로만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 놓고 나니까 흥미가 사라진 거죠. 그런 식의 영화 만들기는, 10년 동안 해 볼 만큼 다 해 봤다, 영화감독 류승완이 조금 유명해지고도 싶었고, 나 이런 거 잘해 알리고도 싶었는데, 이제는 영화감독이라면 영화를 잘 만드는 것 이상의 임무는 없다는 걸로 바뀐 거죠. 내 이름이 앞서기보다 내 영화가 전면에 드러나는 것이 옳다는 걸 자각했어요.”
 
  ―<다찌마와 리>가 흥행에 성공했어도 같은 생각을 했을까요.
 
  “실패가 준 영향이 있죠. 만약 <다찌마와 리>가 성공했다면 내 취향이 먹히는구나 했을 텐데요. 물론 그 영화가 기록적으로 깨진 건 아니에요. 투자자 입장에선 물론 쓴 상처겠지만, 그게 몇 천 명이 본 정도는 아니거든요. 어쨌거나 실패는 실패인 거죠. 비평적으로도 그렇게 좋은 건 아니었고요. 성공도 해 보고 실패도 해 보니까 좀 정리가 되더라고요. 그리고 <다찌마와 리>가 끝나고 다음 영화가 완전히 다른 영화였는데, 그게 잘 진행됐다면 모르겠는데 그게 안됐어요. 업계 사람들이 절 바라보는 시선이 변한 것도 느끼고. 아, 정신을 차려야겠구나, 예전의 류승완과는 포지션이 다르구나, 인정을 빨리 해야 했죠. 그게 제 주변에 돌아가던 사실이었어요. 당시 프로덕션 사무실을 완전히 없애고 직원들 퇴직금 만들어 주려고 제가 뮤직비디오와 광고를 찍기도 했어요. 사무실 없이 다른 회사 사무실에 얹히거나, 커피숍에서 회의하는 최악의 상황을 겪었어요.”
 
  ―이준익 감독이 <평양성> 깨지고 상업영화에서 손 떼겠다고 한 것도 이해하겠네요?
 
  “이해는 하는데, 그것도 좀 너무 몰아가는 것 같아요. 홍상수 감독님의 지금 행보가 그런 거잖아요. 언론에서는 마치 영화계를 은퇴하는 것처럼 몰아가서 그것도 좀 안타까워요. 영화사를 놓고 보면, 많은 감독이 스튜디오나 주류에서 밀려났을 때 그런 독립영화를 해 저예산으로 걸작을 만들어 내고, 이런 것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어요. 박찬욱 감독님께서 어제도 그 얘기 하시는 게 저예산 영화 만드는 법을 빨리 터득해야 한다는 거지요.”
 
 
  “영화는 돈 들인 만큼 나온다”
 
<피도 눈물도 없이>.
  ―투자자들이 류 감독에게는 특히 저예산으로 좋은 영화를 만들어 주기를 기대할 것 같은데요. 6500만원으로 대박을 만든 실력이니까.
 
  “저는 그 부분에 대해 단호합니다. 투자사들의 입장은 전형적인 기업 논리지요. 하지만 영화라는 게 산업의 속성이 있기 때문에 돈을 들인 만큼 나온단 말이에요. 이를테면 지금 강제규 감독님이 하는 전쟁영화를 누구나 상식적으로는 적게 들여야 리스크가 줄어드는데, 그런 전쟁영화를 그냥 예산을 쫀다고 해서 되진 않거든요. 외부의 시선이나 기대가 존재한다고 해서 자연스레 내 안에서 나오는 게 아닌데, 그 기대에 부응해서 하게 되면 그것도 결과가 안 좋을 것 같아요. 모든 영화는 그 영화가 요구하는 적합한 수준이 있어요.”
 
  ―일종의 재기작인 <부당거래>에 참여한 전 스태프와 출연진이 개런티보다는 동지애로 모였다고 하는데, 헛살아 오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겠어요.
 
  “영화계 사람들이 ‘류승완이 들어간다는데 도와줘야지’ 하고 자기 개런티도 안 받고 해 주는 게 고마웠어요. 제가 현장에서 스태프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 일한 게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부당거래> 전까지 스태프들한테 약간 가혹한 감독으로 유명했거든요. 재촉하고 소리 지르고, 지독했어요. 저는 현장에 나가면 그 현장에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순간들이 벌어진다는 생각에 일단 찍을 수 있는 모든 소스들을 다 확보해서 돌아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거든요. 담배 피울 틈도 안 주고 몰아치고 그랬어요. 제 자신이 촬영 끝나고 숙소에 돌아가면 아팠으니까.
 
  그런데 <부당거래>는 즐기면서 찍고, 끝나고 나서 배우들하고 맥주도 마시고, 여유도 있었고 속도도 빨랐고…. 내가 왜 그동안 이렇게 안달복달 지랄발광하면서 그랬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제 영화 자체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물론 기술적인 숙련도가 좋아진 건 있겠죠. 안 좋아지면 바보니까. 그런데 오히려 바뀐 것이 있다면 근본적인 태도랄까, 현장에서 저의 연출하는 방식이나 운영방식들이 달라진 것 같아요. 전에는 정말 연출만 신경 썼다면, <부당거래> 할 때는 감독하는 것에 신경 썼으니까요. <부당거래> 하고 나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어떤 거구나, 저의 취향과 대중의 취향의 접점이 어떤 것이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번 발견했어요.”
 
  ―<짝패>에서는 주인공으로 나왔는데, 직접 연기를 같이 하는 것이 연출지도에 도움이 되나요.
 
  “제가 온전하게 배우로서 출연했다고 할 만한 영화는 <오아시스>(2001)였는데, 그 목적 때문이었어요. 이창동 감독님의 연기 연출 비법을 알고 싶었거든요. 다들 그러시겠지만, <박하사탕>(1999)은 정말 충격이어서 어떻게 인간한테 저런 모습을 끌어내는지 궁금했어요. <오아시스>는 저한테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었고, 많은 걸 가르쳐줬죠. 연기 연출은 그냥 나올 때까지 하는 거라는 걸 알았어요.
 
  <짝패> 하고 나서 연기에는 완전히 흥미를 잃었어요. 재미도 없고, 제가 연기까지 맡기에는 영화 속에서 보고 싶은 배우가 너무 많아요. 그 배우들과 일할 가능성을 차단시켜 가면서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요. 제 연기의 장점은 그나마 액션이었는데, <짝패> 하면서 무릎 다치고 나서는 운동량이 예전처럼 되질 않고 몸이 굳어서 액션도 안돼요. 실제로 지금은 현장에서 연출하는 게 훨씬 재밌어요.”
 
  ―<짝패>로 배우의 한은 다 풀었네요?
 
  “한을 못 풀었죠. 액션을 정말 죽이게 찍겠다고 했는데 제가 무릎 부상을 당한 게 액션촬영 첫날이었어요. 그래서 잘 보시면 제가 쩔둑대요. 수술을 하면 촬영이 다 망가지니까 그때 계속 진통제 먹고 마취제 주사 맞으면서 찍은 거예요. 한쪽 다리가 바보니까, 머릿속에 그려 놓은 모든 게 몸이 안 따라주니까, 디자인이 원하는 대로 안 나온 거예요.”⊙(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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