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國柱의 북한미술 산책 ① 賣血로 생계 유지했던 鄭寬徹, 金日成 그려 ‘인생 역전’

선우영은 정창모와 더불어 북한의 초특급 ‘인민예술가’였다. 그는 마흔여섯의 이른 나이에 북한 최고의 화가에게 주는 칭호인 ‘인민예술가’와 ‘김일성상 계관인’의 칭호를 받았다. 평양 출신이었던 그는 ‘북한産’으로 출세가도를 달렸으나, 전주 출신이었던 정창모는 ‘남한産’이었기에 작품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당했다.

  • : 양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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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무렵 최고의 인물화 작가로 이름을 날렸던 李快大, 그가 急死하자 권력 핵심인사들
    앞다투어 그림 손 대
⊙ 폴란드 유학파 咸彰然, 26세에 빈국제미술전에서 <화전민>으로 金賞 수상.
    그의 판화엔 세계적인 코드 냄새 ‘물씬’
⊙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高羲東·金瑢俊, 도쿄에서 油畵를 공부하고 귀국해 朝鮮畵로 방향 선회
⊙ 도쿄미술학교 수석졸업생 金寬鎬, 누드화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로 聖畵도 그려
⊙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는 羅蕙錫·白南舜·李聖子·朴崍賢·千鏡子·李淑鍾 등 30여 명의 신여성을
    배출한 ‘신여성 사관학교’

梁國柱
⊙ 1949년 정읍 출생.
⊙ 경신고, 연세대 철학과 졸업. 연세대 대학원 경영학 석사.
⊙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회장, 한국학생연합회 의장, 서울청년기독실업인회 회장,
    이스라엘문화원장 역임.
⊙ 저서: <이스라엘 역사적 조명> <조선교회사> <제국의 무덤-아프간>.
⊙ 現 한인세계선교협의회(KWMC) 부의장 겸 ‘열방을 섬기는 사람들(Serving the Nations)’
    국제대표.
화가 정관철의 편지. ‘김일성 원수 빨치산 시대 그림’의 스케치는 무사히 통과됐지만 ‘김일성 원수의 뽀자(포즈)가 마음에 들지 않아 고치려 한다’는 내용과 함께 그림을 곁들였다.
지난해 8월 7일, 인민예술가 선우영(鮮于英)이 64세의 이른 나이로 갑작스레 타계했다. 그가 죽자마자 북한 당국은 ‘만수대창작사(萬壽臺創作社·북한의 미술창작 단체)’에 있던 그의 화실(畵室)에 들이닥쳐 생전(生前) 그가 사용하던 화구(畵具)와 그림 수백여 점을 몰수(沒收)했다. 선우영의 그림을 국보(國寶)로 지정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유족은 고인(故人)을 비명(非命)에 보내면서 그림 한 점 만져보지 못했다.
 
  1965년 위장에 구멍 뚫린 리쾌대(李快大)가 갑작스럽게 죽자, 당시 권력의 핵심부에 있던 인사들은 앞다투어 리쾌대의 유작(遺作)에 손을 댔다고 한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45년 만에 선우영에게도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북한의 고위급 인사들도 광복 무렵 최고의 인물화 작가로 이름을 날렸던 리쾌대의 그림이 좋은 것은 알았던 모양이다. 요즈음 불멸의 작가로 떠오른 이중섭(李仲燮)보다 주가가 높았던 탓일까? 북한 당국은 왜 선우영이 죽자마자 무엇이 급해 그림에 손을 댄 것일까?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의 애제자였던 리석호(李碩鎬)는 김용준(金瑢俊), 정종여(鄭鍾汝)와 더불어 채색 위주의 ‘몰골기법(沒骨技法·뼈가 없다는 뜻으로 윤곽 없이 그리는 그림)’으로 조선화의 큰 틀을 잡았다. 1971년 그가 죽을 때 그는 1000여 점의 유작을 남겼다. 부인은 이를 간추려 그가 죽고 17년이 지난 1988년 조선미술박물관에 기증했다. 북한 당국은 리석호와 같은 대가(大家)가 죽었을 때도 하지 않던 일을, 제아무리 사회주의 국가라지만, 개인의 창작물까지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고약한 짓을 한 셈이다.
 
  광복 이후 세대인 선우영(1946년생)은 전주 출신의 정창모(鄭昌謨·1931년생)와 더불어 북한의 초특급 인민예술가였다. 그는 46세의 나이에 북한 최고의 화가에게 주는 ‘인민예술가’와 ‘김일성상 계관인’의 칭호를 받았다.
 
  대학 졸업 후 20년 만에 초스피드로 인민화가의 반열에 오른 그의 파격적 출세는 세필(細筆)과 암갈색 비벽(붓자국)의 효과에 이르기까지 우리 산하(山河)의 아름다움을 탁월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출세 가도에는 출신지역이 평양이라는 것도 적잖게 작용했다. 소위 ‘진골 성분’의 ‘북한산(産)’인 셈이다. 남쪽에서 월북했거나 남쪽 출신 배우자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았던 다른 작가들과 비교하면 북한 내에서 월북(越北) 작가들의 생존은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북한의 인민예술가 선우영.
  2005년, 베이징 국제미술전에서 정창모와 선우영이 나란히 금상(金賞)을 받으면서 이들 작품이 수장가(收藏家)의 매집(買集) 대상이 되었다. 대북(對北) 지원을 위해 평양을 드나드는 기관이나 무역상들이 경쟁적으로 이들 작품을 국내로 들여와 전시 혹은 밀매(密賣)했다. 그만큼 상품성이 보장되는 작가였다. 선우영 작품의 경우, 만수대창작사 이외의 다른 루트를 통해 결코 적지 않은 작품이 빼돌려졌다.
 
  제아무리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충성도 중요하지만, 화가 나름의 생존 비법은 따로 있게 마련이다. 필자의 주변에도 선우영의 그림을 50~200여 점까지 소장한 분이 여럿 있다. 선의(善意)의 소장가라기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선우영의 그림을 통해 ‘대박’을 바라는 투자자로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화가 입장에서 만수대창작사 소속이 되면, 정기적으로 일정한 양의 작품을 국가에 기증해야 한다. 그러나 배급제로 먹고사는 북녘에서 대가가 없는 일을 누가 자청하겠는가. 공동 사업장에 나가 매일 품을 파는 노동자들도 제 텃밭에는 말할 수 없는 공(功)을 들이는 법 아니던가? 물은 낮은 데로 흐르고, 돈은 이자가 많은 곳으로 몰리는 법이다. 개인의 창작열을 충성심 하나로 보상할 수는 없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만수대창작사에서 관광객에게 파는 그림과 별개의 루트를 통해 빼돌려지는 그림의 질(質)이 천양지차(天壤之差)다.
 
 
  폴란드 유학파 咸彰然, 그의 판화엔 세계적인 코드 냄새 ‘물씬’
 
함창연 화백의 유화 자화상.
  그나마 예외를 둘 수 있다면 올해로 작고한 지 10년이 되는 함창연(咸彰然)일 것이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포로가 돼 거제도에서 생활했다. 이승만(李承晩) 정부의 포로 석방 지침에 따라 북으로 돌아간 그는 폴란드 바르샤바로 유학을 떠났다. 조국이 전쟁의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시기에 외국 유학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향학열을 부추겼다. 그는 1953년부터 6년간의 유학기간 동안 ‘전투’하듯 창작에 목숨을 걸었다고 한다.
 
  귀국 후 평양에서 제작한 판화보다 유학 중 제작한 작품의 숫자가 많거나 질도 월등한 편이다. 나이 스물여섯 왕성한 청년의 몸으로 빈 국제미술전에서 <화전민(火田民)>으로 금상, 라이프치히 국제판화전에서 <밭갈이>로 금상을 받았다. 일찍이 유럽을 무대로 활동한 함창연의 작품에는 우리나라 사람의 정서(情緖)를 뛰어넘는 세계적인 코드가 물씬 풍겨 나온다.
 
  1959년, 평양으로 귀환하면서 그가 가져간 아홉 개의 트렁크에는 폴란드에 머물며 제작한 판화뿐이었다고 한다. 그는 미구(未久)에 결혼할 자신의 약혼녀에게 줄 선물조차 챙기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작품에 자신의 영혼을 불살랐고, 북한 당국이 자신을 뒷받침해 준 데 대한 보은(報恩)의 심정으로 모든 작품을 당국에 헌납했다.
 
  폴란드에서 제작했던 작품을 기증한 탓에 함창연의 작품에는 언제나 ‘희귀성’이란 꼬리표가 붙는다. 어쩌다 돌아다니는 함창연의 작품은 그를 가르쳤던 배운성(裵雲成) 홍익대 미술과 초대학과장의 판화나 황헌영(黃憲永) 등 웬만한 북한 대가들의 작품보다 고가(高價)로 인식될 정도다.
 
  판화가 상품으로 여겨지던 때가 아니어서인지 요즘처럼 여러 장의 AP(Artist's Proof·작가소장용)판을 제작한다거나, 수백 매씩 대량으로 생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함창연의 충직(忠直)한 마음을 북한 당국은 알아주지 않았다. 1980년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은 ‘공훈예술가’라는 초라한 명예만을 그에게 주었을 뿐이었다. 무용가 최승희(崔承喜)의 제자였던 함창연의 부인이 남쪽 태생이라는 ‘성분’이 남편의 성공 가도를 막는 ‘족쇄’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내에서 ‘함창연’ 이름 석 자 뒤에는 언제나 ‘최고’라는 수식어가 뒤따른다.
 
  필자는 함창연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파블로 피카소를 연상한다. 피카소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탓에 대부분의 사람은 피카소의 난해(難解)한 작품을 이해할 수는 없으면서도 무조건적으로 찬사(讚辭)를 던진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그림에 대한 상식이 부족하거나 작가의 차원이 워낙 뛰어난 것이려니 하며 스스로 겸손해 한다.
 
월북화가 이쾌대.
  좋은 그림은 시공(時空)을 뛰어넘는 최고의 심미안(審美眼)을 열어준다. 단순한 투자 목적으로 그림에 투자하는 사람들은 작품보다는 작가의 이름 석 자에 목을 맬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소장가라면 작품의 진위(眞僞) 여하를 떠나 예술적 가치만을 볼 것이다. 남북한의 정치적 상황을 뛰어넘는 함창연에 대한 객관적인 조명이 뒤따라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88년 월북 작가들에 대한 해금(解禁) 이후, 남북 간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정창모와 선우영 두 작가는 남한에도 널리 알려졌다. 물론 이중섭과 함께 동인 활동을 했던 리쾌대, 엄도만(嚴道晩)과 길선주(吉善宙) 목사의 아들 길진섭(吉鎭燮) 서울대 미술학부 교수 같은 작가들도 최근 들어 소개되는 형편이다. 그런 측면에서 2008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준비했던 <근대에 묻다> 작품전은 흔치 않은 시도였다.
 
  북한 작품에는 주제(主題)화나 선전(宣傳)화 등 남한 사회가 수용하기 어려운 내용들도 있지만, 월북작가들에게는 ‘빨간 딱지’가 붙은 채 논의조차 되지 못했던 시기가 근 50년에 가까웠다. 그런 점에서 남북 간 문화적 연대나 교류는 이제 걸음마 단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북이 극심한 대립으로 치닫고 있을 때는 사상적 연좌제에 걸릴 부담도 많았지만, 1994년 김일성(金日成)의 사망 이후 남북 간의 힘의 균형이 깨지자 북에 대한 경계가 풀어지기 시작했다. 지난 10년간 김대중(金大中), 노무현(盧武鉉) 정부로 이어지는 좌파정권의 ‘햇볕 정책’으로 북한 미술품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들어왔다.
 
  대북 지원을 위해 북한을 드나드는 모 인사는 반입해 오는 북한 그림을 매번 세관에 신고하고 있다. 정작 해금은 되었지만 북한 물자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많았던 터라 긴장감 같은 게 여전히 남아 있는 탓이다. 그러나 신문지상에서 김정일(金正日)의 사진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음에도 정작 김일성 부자(父子)를 그린 작품은 찾아볼 수 없다. 김일성 부자는 영원히 금기(禁忌)로 여겨질 모양이다.
 
  북한 내에서도 과거 김용준과 정관철(鄭寬徹), 길진섭 같이 특정 몇몇 화가만이 ‘지도자’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요즈음 중국에서 문화혁명 때의 기록과 그림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것처럼, 통일이 되면 흘러간 역사의 파편(破片)으로 이들 부자의 그림은 구하려 해도 구할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다. 흘러간 과거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시대정신에 역행했던 부끄러움에서 스스로 교훈을 받기 위해서라도 남겨야 할 이유가 있다.
 
  런던 버킹엄 궁전 인근에 북한 미술을 전시하는 갤러리에는 김일성 부자의 초상은 물론 ‘미제 타도’와 같은 선전 벽화마저 버젓이 걸려 있다. 가난한 북한 당국이 홍보차원에서 뒷돈을 대줄 리 없는 마당에 아직까지 현상 유지하는 것을 보면, 오히려 북한의 선전화가 영국과 독일, 중국에서 날개돋친 듯이 팔려나가는 기현상을 이해할 수 있을 법도 하다.
 
 
  日本에서 공부한 화가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
  지난 세기 북종화가나 남종화가들 대부분이 조선의 화단(畵壇)을 지배해 왔다. 이들은 도제(徒弟) 형식으로 서숙(書塾)에서 함께 기거(起居)하며 그림을 배웠다.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에 의해 창조적으로 종합, 결산된 전통화법은 이후에 제자인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晉)에게 전수됐다.
 
  안중식·조석진의 문하에서 김은호(金殷鎬), 박승무(朴勝武), 이상범(李象範), 노수현(盧壽鉉), 변관식(卞寬植), 이한복(李漢福), 이용우(李用雨), 최우석(崔禹錫)이 나왔다.
 
  소치(小痴) 허련(許鍊)의 아들인 미산(米山) 허형(許瀅)은 그의 아들 남농(南農) 허건(許楗)과 조카뻘인 의제(毅齊) 허백련(許百鍊)을 길러냈다. 해강(海剛)의 서화연구소에서 이응노(李應魯), 청전화숙(靑田畵塾)에서 정종여와 이건영(李建英), 김은호 문하에서 백윤문(白潤文)과 이석호, 김기창(金基昶)과 장우성(張遇聖) 등 기라성(綺羅星) 같은 제자들이 나왔고, 의제의 연진회(鍊眞會)에서 김옥진(金玉振)과 문장호(文章浩), 박행보(朴幸甫)가 배출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高羲東)이나 김용준처럼 도쿄에서 유화(油畵)를 공부하고 돌아온 뒤, ‘조선화’로 방향을 선회한 경우는 특별한 예에 속한다. 동양화 작가들이 스승의 사숙(私淑)에서 도제 관계에 의한 학습을 받은 것에 비해, 대다수의 유화 작가는 유학 생활을 통해 화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특별한 미술 전문교육 기관이 전무했던 탓이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33인의 한 사람인 길선주(吉善宙) 목사는 셋째 아들 진섭(鎭燮)의 도쿄미술학교 진출을 끝내 막지 못했다. 길진섭은 형님이 105인 사건으로 모진 고문 끝에 이른 나이에 죽고, 아버지가 1년 반이라는 기간을 감옥에서 지냈건만,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우에노(上野)의 도쿄미술학교로 진학을 하게 된다. 온 가족이 독립운동과 관련해 모진 경험을 했던 일과 일본에서 배우는 일과는 별개였던 모양이다.
 
서울대 미대 교수를 지내다 북으로 갔던 동양화가 근원 김용준의 자화상.
  ‘그림쟁이’라는 게 항상 배고픔을 달고 살아야 하던 때라, 당시 대부분의 부모가 화가의 길로 들어서려는 자녀를 적극적으로 말렸다. 가뜩이나 경제적으로 핍절(乏絶)하고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때의 모습이다. 필자가 화가들의 성장사(成長史)를 뒤져보면서 놀라웠던 것은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사람들을 찾는 일보다는 오히려 일본 유학을 가지 않았던 사람들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는 것이다.
 
  식민지 시절, 일본을 통해 세계를 보던 형편이니 오죽했을까? 일본 유학파들이 화단을 장악한 것은 물론, 광복 이후 서울대와 평양미술대학의 기초를 다지는 데도 이들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1940년대 동남아 지역까지 전선(戰線)이 확대되자 유학생들은 징병(徵兵)을 피하기 위해 조혼(早婚)하거나 고향에 숨어 살았다. 일본 이외의 지역에서 유학한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았다. 당시 일본은 우리 민족의 ‘원수’였지만 예술을 위해 그 일본을 거역할 수 없던 것도 시대 상황이었다.
 
  평북 진남포 출신인 임용련(任用璉)이 독립운동의 여파로 일경(日警)에 쫓겨 시카고와 예일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임용련이 프랑스에서 만난 신여성 백남순(白南舜)과 결혼을 했던 일은 ‘사건’이었다.
 
  백남순은 조선 최초의 여류 화가인 나혜석(羅蕙錫)의 도쿄여자미술학교의 후배로 미술학교를 중퇴하고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김기창 역시 도쿄여자미술학교 출신이었던 박래현(朴崍賢)과 미술인으로서 부부의 연(緣)을 맺었다. 훗날 오산학교 선생으로 이중섭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멘토’ 역할을 해 준 사람이 임용련이었다.
 
베를린국립미술대학을 졸업한 유럽 유학 1호 화가 배운성의 자화상. 손영기와 더불어 북한 판화 1세대인 그는 북한 최고의 판화가 함창연을 지도했다.
  초기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장을 지낸 배운성은 청년기, 독일로 유학을 떠나는 부잣집 자제의 종자(從者)로 따라나섰다가 베를린의 국립미술대학을 졸업했다. 독일과 파리에서 19년간 유랑하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월북을 감행했다. 독일인 부인과의 사이에 낳았던 딸을 파리에 남겨두고 귀국했던 그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 이정수와 재혼했다.
 
  이정수는 열렬한 사회주의자로 당시 국내 미술계의 중진이었던 남편과 동반하면서 박물관의 유물을 북으로 옮기는 데 큰 몫을 했다. 남에서 옮겨간 유물의 대부분이 아직도 자강도 향산의 국제친선관 지하 수장고에 쌓여 있다.
 
  1940년 일본문화학원을 졸업한 이중섭의 한 해 후배인 배운성은 함경도 홍원(洪原) 태생인 김건중, 손영기와 더불어 북한 판화의 1세대 그룹으로서 함창연을 지도했다.
 
  이종우(李鍾禹), 이응노, 김흥수(金興洙), 남관(南寬), 변종화(卞鍾和), 김창렬(金昌烈)이 프랑스에서 작품활동을 했다고 한다. 김흥수가 함흥, 이중섭이 평북 평원, 김창렬이 평남 맹산 출신이다.
 
  남북한 출신을 애써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민족적, 사상적 혼란을 겪은 탓에 화가들 역시 이러한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인간은 ‘시대정신’을 결코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더러는 사상적 자유를 찾아 남하(南下)하기도 했고, 더러는 사상적 신념에 따라 북에서 둥지를 틀었다.
 
 
  도쿄미술학교 졸업생 鄭寬徹의 ‘인생 역전’
 
  도쿄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한 화가들을 살펴보자. 우선 남쪽 출신으로 고희동(高羲東)·김복진(金復鎭·조각)·장발(張勃)·김인승(金仁承)·심형구(沈亨求)·서진달(徐鎭達)·김주경(金周經)·오지호(吳之湖)·이마동(李馬銅)·양달석(梁達錫)·손동진(孫東鎭)·리순종(李純鍾)·김용준·윤자선(尹子善)·리지원·리한복(李漢福)·조규봉(曺圭奉·조각)·박승구(朴勝龜·조각)가 있고, 북쪽 출신으로 김관호(金寬鎬·평양)·길진섭(평양)·도상봉(都相鳳·함남 홍원)·박고석(朴古石·평양)·선우담(鮮于澹·평양)·정관철(평양)·한상익(韓相益·함남 함주)·김흥수(金興洙·함흥)·이달주(李達周·황해 연백)·김민구(金敏龜·원산)·리해성(李海晟·해주)·어순우(신의주)가 있다.
 
  국내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과 김관호가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이래, 이 학교는 가장 많은 숫자의 화가(畵家)를 배출했다. 평양의 부잣집 아들 김관호가 도쿄미술학교를 수석(首席)으로 졸업한 1916년, 그의 이름이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그가 능라도를 배경으로 목욕하는 두 나부(裸婦)를 그린 <해질 무렵>은 조선은 물론 일본에서도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유학생 시절, 고종 황제의 어진(御眞) 초상을 그리는 문제로 김은호와 경쟁하기도 했던 그는 누드화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화(聖畵)를 그린 작가다. 일본에 강제 병합당한 1910년 8월 29일, 길선주 목사가 중요한 행사 때마다 게양하던 태극기를 한지(韓紙)에 곱게 싸서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 강당 위 천장에 숨겨놓을 때, 김관호의 성화도 함께 감추었다는 글이 아들 길진경이 쓴 <영계 길선주>의 회상에 나온다. 1890년생인 그의 나이로 보아, 1909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채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성화를 그렸던 것이다.
 
김관호의 1916년 도쿄미술학교 졸업작품 <해질녘>(유화). 이 작품은 조선과 일본을 놀라게 했다. 그는 누드화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로 성화도 그렸다.
  1950년 10월 19일, 국군이 평양을 탈환하자, 자유를 찾았던 교인들과 평양 시민들은 장대현교회에 모여 국군을 환영하는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길선주 목사가 교회당 천장에 숨겨 놓았던 태극기와 김관호의 성화는 꺼내 보지도 못했다. 길 목사가 1935년에 타계한 데다 1926년도부터 시작된 교회 분규(紛糾)로 장대현교회를 사임한 지도 20년 전의 과거사가 된 탓이다. 장대현교회 자리에 ‘소년인민궁전’을 세운 터라 더는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조국 광복에 대한 소망을 품고 숨겨 놓은 태극기와 성화가 불쑥 나타날 것만 같은 환영(幻影)이 엄습할 때가 있다.
 
  가톨릭 신자로 기독교 신앙을 주제로 많은 그림을 그렸던 장발(張勃)은 서울대 미대 학장으로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고, 도상봉(都相鳳)은 광복 후 남한에서 국전(國展) 미술분과위원장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거물(巨物)이었다.
 
  반면,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서 일정한 직업도 없이 매혈(賣血)하며 밑바닥 삶을 살았던 정관철은 평양으로 돌아갔다. 그는 1945년 평양 군중대회 때 연설한 김일성을 그린 계기로 김일성 생전에 가장 총애를 받는 화가가 됐다. 1949년부터 그가 죽은 1983년까지 35년 동안 그의 조선미술가동맹위원장 자리를 넘볼 사람이 없었고, 북한을 통틀어 첫 번째 인민예술가와 ‘김일성상 계관인’, ‘예술 노력영웅’의 영예를 누렸다.
 
  정관철은 그가 죽던 날, 병실 벽면을 화판(畵板) 삼아 그렸다고 한다. 그가 죽고 난 이듬해인 1984년 2월, 그의 작품은 김정일의 생일을 기념해 전시됐다. 그의 화실을 무시로 드나들며 그림에 대한 소양을 넓혔던 김일성은 그가 죽고 난 후인 1986년, 정관철과 정종여, ‘2인 유작전’을 마련해 주었다.
 
  6·25전쟁 무렵, 북한 주민들을 독려하기 위해 제작된 선전화의 대부분은 정관철과 황해도 재령 출신 림홍은(林鴻恩)이 그린 작품이었다. 조선미술박물관에는 림홍은의 선전화 그림이 13점이나 국보로 지정돼 있다. 일본미술학교를 중퇴했던 림홍은이 정관철과 나누어 가진 ‘인민예술가’의 영예는 공산당이 조직과 선전을 중요한 축으로 여겨온바, 이들이 미술을 통해 사회주의 건설에 바친 공로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림홍은은 1940년대 초 서울에서 <화수분>을 쓴 소설가 전영택(田榮澤)을 도와 아동잡지 <아이생활>의 편집실무를 맡다가 월북했다. 이후 그는 김일성 우상화 작업의 전사(戰士)로 우뚝 섰다.
 
  충북 청원 출신으로 6·25전쟁 때 의용군으로 입대, 함경도 지역에서 창작 활동을 해온 리지원의 부인 박경란은 정주 출신으로 선천(宣川) 보성여학교를 졸업했다. 그녀는 레닌그라드의 레삔미술학교를 졸업한 재원(才媛)이었다. 레삔미술학교에는 소련과 맺은 유학생 협약으로 수많은 북한 유학생이 음악과 공예, 회화를 중심으로 유학했고, 김린권도 그중의 하나였다.
 
  일본제국미술학교 출신으로는 손영기(평양·판화)·윤중식(尹仲植·평양)·권옥연(權玉淵·함흥)·홍종명(평양)·황염수(黃廉秀·평양)·황헌영(黃憲永·평남 대동)·김만형(金晩炯·개성)·라찬근(황해 송림)·림렬(함북 길주)·전순용(全舜勇·함북 함주)·김석룡(평양) 등 북쪽 출신들이 주류를 이룬 가운데, 주경(朱慶)·장욱진(張旭鎭)·박문원·박상옥(朴商玉)·이세득(李世得)·리쾌대·리팔찬(李八燦)·서돈학(중퇴) 등 남쪽 출신들도 가세하는 형국이 됐다.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출신 新女性들
 
신여성의 대표인물이라 할 수 있는 화가 나혜석. 이혼하기 전 4남매를 둔 나혜석과 김우영 부부.
  1980년 초, 필자가 이스라엘문화원장을 맡고 있을 때다. 그때 필자는 황유엽(黃瑜燁)과 홍종명(洪鍾鳴) 두 분과 유난스런 관계를 맺었다. 이스라엘 현대미술관에서 ‘홍종명 초청전(展)’을 열기로 했다. 당시 숭의여자전문대학장이었던 홍종명은 연일 계속되는 학생들의 데모 때문에 작품을 마무리하지 못하자 전시회를 이듬해로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그는 ‘덕소화실’에서 작업 중에 강도(强盜)를 만났고, 이스라엘 전시를 위해 준비해둔 작품들이 도난당했다는 비보(悲報)를 전해왔다. 필자가 주선했던 해외 전시를 위해 도둑맞은 작품을 다시 제작하느라 온갖 고초를 겪은 홍선생에 대한 미안함이 아직도 가슴 깊게 남아 있다.
 
  태평양미술학교 출신 가운데 구본웅(具本雄)·이인성(李仁星)·김용조(金龍祚)·조병덕(趙炳德)·남관·이준(李俊) 등이 남쪽 출신인 반면, 손응성(孫應星·강원 평강)·최영림(崔榮林·평양)·김영주(金榮注·함남)·최순삼(함흥)·오지삼(吳池森·황해 봉산) 등 북쪽 출신과 균형을 이뤘다.
 
  가와바타 미술학교 출신으로는 박영선(朴泳善·평양)·한묵(韓默·황해도)·박항섭(朴恒燮·황해도 장연)·최학렬(崔鶴烈·함남 홍원)·문학수(文學洙·평양)·민병제(閔炳濟·황해도 삼천) 등 북쪽 출신들이 대세를 이룬 반면, 남쪽 출신은 김종하(金鍾夏)가 유일하다.
 
국전 미술분과위원장을 지낸 화단의 거물 도상봉.
  문화학원 출신으로는 이중섭(평남 평원)·유영국(劉永國·경북 울진)· 박성환(朴成煥) 등이 있다. 평양의 문학수는 ‘가와바타’와 ‘문화학원’ 두 곳에서 수학했고, 해주 출신 리해성(李海晟) 역시 ‘가와바타’와 ‘도쿄미술학교’ 두 곳에서 학업을 마쳤다.
 
  이외에도 장리석(張利錫)이 다마가와(多摩川)제국미술학교, 유경채(柳景埰)가 도쿄 료쿠인샤화학교(綠陰社畵學校), 김평국(金平國·평북 영변)·최도렬(경북 울진)·림홍은(황해도 재령)·지달승·이귀상· 김환기·이우환(李禹煥)·임직순(任直淳)·김경(金耕)·문신(文信)·리국전(李國銓·조각) 등이 니혼대학교에서, 함대정(咸大正·평북 박천)이 일본 중앙대에서 공부했다.
 
  근원(近園) 김용준의 성북동 고택 노시산방(老枾山房)을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가 인계했던 것은 남다른 일화가 됐다. 1941년 근원에게서 노시산방을 인수했던 수화가 1944년에 고희동의 주례로 수필가 김향안(金鄕岸)과 결혼하면서 이 집을 ‘수향산방’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김향안의 본명은 변동림(卞東琳). 그녀는 스물일곱에 폐결핵으로 요절한 시인 이상(李箱)의 부인으로 화가 구본웅의 이복동생이었다.
 
서울대 미대 초대 학장을 지낸 재미 서양화가 장발.
  “밤이면 늑대가 출몰하던 성북동 험한 산골짜기가 무에 그리 좋아 이사하느냐”며 펄펄 뛰던 근원의 부인도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더욱이 수화 결혼식 사회를 맡았던 정지용(鄭芝溶)은 북으로 끌려간 이후 행방불명이 되었고, 길진섭은 고향인 평양에 고단한 육신을 뉘었다. 꿩이 날아들고 밤이면 무섭다던 그런 아내를 이끌고 첩첩산중 의정부로 나가 살았던 근원이 아꼈던 노시산방에는 감나무 몇 그루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정종여가 오사카미술학교, 김종태(金鐘泰)·이제창(李濟昶)·정현웅(鄭玄雄)·황유엽(黃瑜燁)이 일본에서 활동했다. 목포 출신 표세종이 도쿄 무사시노(武藏野)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전후 북으로 들어갔다.
 
  여성으로는 나혜석, 백남순, 이성자(李聖子), 박래현, 천경자(千鏡子), 정온녀, 이숙종(李淑鍾·성신여대 설립자)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박약했던 시절 도쿄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여성화가로서 독보적인 활동을 했다. 이마동의 부인이 된 윤연이 등 30여 명에 달하는 신여성이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출신이다.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의 재불화가로 아흔이 넘도록 왕성한 작품활동을 해온 이성자 화백.
  친일파 변호사 김우영(金雨英)과 결혼했던 나혜석이 남편 따라 나섰던 파리여행에서 보성학교 교장으로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한 최린(崔麟)과 질펀하게 놀았다. 발각된 그녀가 결국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수덕사(修德寺)를 찾아가 만공(滿空) 스님에게 출가시켜 달라고 3년을 졸랐던 이야기는 개화기 신여성의 애증사(愛憎史)를 보는 듯하다.
 
  만공이 “네게는 부처가 될 씨가 없다”며 수계(受戒)를 거절하자, 이혼 후 자녀를 만나지 못하고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녀는 정신적인 충격으로 합천의 해인사(海印寺)와 사천의 다솔사(多率寺)를 전전하다 행려병자로 비참한 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다솔사에 머물며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 스님의 보살핌을 받을 때 그린 <다솔사 송림> 그림을, 탐심(貪心)을 내던 변 모 화가가 탈취하다시피 가져간 1970년대의 일화는 동도(同道)의 길을 걷던 화가의 또 다른 탐욕을 보는 듯해 씁쓸하기까지하다.⊙
 
  <‘梁國柱의 북한미술 산책-②’는 ‘북으로 간 화가들’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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