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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柳時敏 폭력 피해자 4명의 망가진 人生

『민간인 감금·폭행을 현장에서 지휘한 사람이 장관이라니… 柳時敏의 사과라도 한마디 듣고 싶다』

이상흔    hana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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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피해자들의 가슴에 끊임없는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柳時敏은 사건 당시 제일 나이가 많은 자로, 현장을 오가며 교묘하게 치고 빠지고 하면서 폭행 사건을 주도한 사람입니다』(폭행피해자 全基東씨)
현재 진행형인 22년 前의 폭행사건
鄭龍範(사진 왼쪽)씨는 1984년 서울大 학생회 간부학생들에 의해 주도된 감금·폭행사건으로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 2005년 6월7일, 鄭씨는 서울고등법원에 「柳時敏 선거법 위반」 재판을 보기 위해 어머니(사진 오른쪽)와 함께 왔다. 뒤에 뒷짐을 진 사람이 柳時敏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자(화살표).
  열린당 柳時敏(유시민·47) 의원이 보건복지부 장관에 내정되자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林信鉉(임신현·48), 孫瀅九(손형구·41), 鄭龍範(정용범·47), 全基東(전기동·51)씨 등 4명의 시민이다. 이들은 1984년 柳時敏 당시 서울大 복학생협의회 대표 등 서울大 학생회 간부들에게 감금당한 채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자백을 강요받으며 폭행당했다.
 
  폭행을 당하던 중 실신해 병원에 실려 갔던 全基東(당시 29세)씨는 『柳時敏처럼 부정과 불의를 자행한 자가 인도주의자인 척 행동할 수 있는 세상에 분노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柳時敏은 지금까지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사과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집요하게 변명하고, 거짓말을 하다가 기회만 되면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피해자들의 가슴에 끊임없는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柳時敏은 사건 당시 나이가 제일 많은 자로, 현장을 오가며 교묘하게 치고 빠지고 하면서 폭행사건을 주도한 사람입니다』
 
  全씨는 2004년 17代 총선 때 柳의원을 「허위사실 공표 혐의(선거법 위반)」로 검찰에 고소했다.
 
  柳의원은 선거 홍보물에서 「이 사건 관련자들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이미 명예회복하였다」, 「이 사건은 全斗煥 정권이 저를 조작으로 엮어 넣은 사건」이라고 기재했다. 全씨는 柳의원의 이러한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며 검찰에 고소한 것이다.
 
  柳의원은 1심에서 벌금 50만원을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대법원은 『선거 홍보물에 「이 사건 관련자들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명예 회복을 했다」는 것은 허위 사실이지만, 이를 기재할 당시 柳時敏이 이것이 허위일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또 『「全斗煥 정권이 저를 조작으로 엮어 넣었다」는 표현도 다소 과장되긴 했으나,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는 단순한 의견 표명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일반인에게 흔히 「서울大 프락치 사건」으로 알려진 「서울大 민간인 감금·폭행사건」으로 柳時敏을 비롯 6명의 학생들이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처벌받았다.
 
  이 폭행 가담자들 중 柳의원은 열린당 국회의원을 거쳐 보건복지부 장관에 내정되었고, 윤호중은 열린당 의원(경기 구리), 이정우는 변호사, 백태웅은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大 교수가 되었다.
 
 
 
 삶이 뒤죽박죽된 4명의 청년
 
1984년 당시「서울大 민간인 감금·폭행 사건」에 대한 조선일보 기사.
  반면, 폭행당한 네 젊은이들의 삶은 이후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7급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이었던 鄭龍範씨는 柳時敏 일행에게 당한 폭행으로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기 시작, 현재까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
 
  鄭씨는 현재 종로에 있는 대형 음반 가게에서 매입한 음악 CD를 서울 시내의 카페를 돌아다니며 파는 일을 하고 있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CD 한 장을 못 팔 때도 많다고 한다.
 
  鄭龍範씨는 1978년 형이 軍에서 죽자 그 충격으로 신경쇠약에 걸려 한 달 반 정도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 후 鄭씨는 1년 가량 집에서 요양을 했기 때문에 폭행을 당할 때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鄭龍範씨의 어머니 전영재(79)씨는 『우리 용범이가 너무 억울하게 당했다』며 『폭행당한 후 정신이 이상해져 결혼도 못 했는데 내가 죽으면 누가 돌봐줄지 그것이 제일 걱정』이라고 말했다.
 
  『애가 맞고 집에 왔을 때 온몸이 시퍼렇게 돼 있었어요. 두들겨 맞기 전에는 공무원 시험 공부도 하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했거든요. 얻어맞은 후부터는 애가 헛소리를 하고 완전히 병신이 되었지요. 후유증으로 몇 년 동안 밤에 제대로 못 자고 약을 입에 달고 살았아요.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鄭씨는 폭행당하는 과정에서 앞니 하나가 절반 정도 부러졌다.
 
  鄭씨 어머니는 『그때 맞아서 부러진 이 치료를 잘못해서 그 후에 계속 고생을 했다』며 『몇 년 전 2500만원을 들여 이를 전부 새로 심어야 했다』고 말했다. 1994년 사망한 鄭씨 아버지는 살아생전 『장가도 못 간 놈이 병이나 도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며 늘 아들 걱정을 했다고 한다.
 
 
 
 대인기피증 심해져 대학 진학 포기한 林信鉉씨
 
全基東씨는 1984년 서울大 학생회 간부학생들에 의해 주도된 감금ㆍ폭행 사건 당시 실신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는 폭행 가해자들이 이 사건을 「민주화운동」 혹은 「서울大 프락치 사건」이라고 주장할 때마다 이에 맞서 법정 투쟁을 해왔다.
  나머지 폭행 피해자들도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全基東씨는 폭행 후유증으로 고시공부를 접어야만 했다. 全씨는 폭행당한 후 공부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몸이 아파 책상에 앉아 있지를 못하고 자주 바닥에 드러누워야 했다. 全씨는 뒤늦게나마 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고, 현재 관악구청 보건소에 근무하고 있다.
 
  林信鉉씨는 폭행을 당한 후 대인기피증이 심해졌고, 이로 인해 대학 진학 꿈을 접었다.
 
  林씨는 기자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이었죠. 이놈이 들어와서 한 시간 패고, 저놈이 들어와서 한 시간 패고…. 자기들도 내가 프락치가 아니란 것을 알았을 겁니다. 민간인을 다짜고짜 패 놓았으니 문제가 될까봐 어떻게든 프락치라는 기록을 남겨 놓으려고 자백을 강요한 것 같아요』
 
  그는 절에 가면 마음이 편해졌다고 한다. 입시 공부를 포기하고 절에서 알게 된 사람을 통해 丹靑(단청) 기술을 배웠다. 단청 일은 겨울철에는 일감이 없어서 생활에 어려움이 많다고 했다.
 
  『그때 일은 잊고 살지만 지금도 문득문득 생각이 납니다. 그 사람(柳時敏)을 보기 싫어 TV를 안 본 지 오래됐습니다. 거짓말을 좀 했다고 가두어 두고 폭행을 하는 것들이 인간입니까. 정신병자들이죠. 그런 사람을 공직에 임용하는 나라가 한심스러워요. 내가 사는 곳이 하필이면 柳時敏의 지역구인데 여유만 좀 있다면 이사 가고 싶습니다』
 
  孫瀅九씨는 현재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연락이 닿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 이야기에 의하면, 사업에 여러 차례 실패한 후 외국에 나가 연락을 끊고 지낸다고 한다.
 
  孫瀅九씨 어머니는 『다 지난 이야기를 뭣 하러 묻느냐』며 『그 이야기만 나오면 골치가 아프다』고 말했다.
 
  『나는 그 사람(柳時敏) 인상만 봐도 싫어요. 아무리 나라에 人材가 없어도 그렇지 그런 자를…. 얼마 전 全基東씨가 柳時敏을 선거법 위반으로 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무리 그런 거 해 봐야 법원에서 우리같이 힘없는 사람 이야기를 들어 주겠어요. 우리 아들 이야기는 주변 사람들이 모르니까 기사에 이름은 쓰지 않았으면 합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鄭龍範씨
 
  2005년 6월7일 낮 12시,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형사 10부에서는 17代 총선에서 허위사실을 공표한 혐의로 기소된 柳時敏 의원에 대한 항소심 재판이 열렸다.
 
  柳時敏 의원은 양복차림으로 서너 명의 일행과 함께 재판정에 모습을 나타냈다. 柳時敏 의원을 고소한 全基東씨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鄭龍範씨, 그리고 鄭씨의 어머니 전영재씨가 재판을 지켜보기 위해 나와 있었다.
 
  柳時敏 의원은 법원 복도에 서 있는 폭행 피해자들과 눈길을 마주치지 않고 자기 일행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柳의원에게 다가가 몇 마디 물으려 했지만, 그는 『바쁘다』며 자리를 피했다.
 
  鄭씨는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그는 柳時敏씨가 국회의원이 된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중얼중얼 이런 얘기를 했다.
 
  『그 새끼가 현역 국회의원이란 말이야?』
 
  『옷도 잘 입었던데. 벌금 많이 내도 되겠네. 그전에 TV에 나올 때 금테 안경 쓰고 양복도 멋있었는데』
 
  『결혼했어? 柳時敏』
 
  『그 사건이 1984년 9월이지? 그럼 21년째인데…』
 
  『柳時敏이 벌금 받으면 우리 보상은 없나?』
 
  鄭씨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하는 듯했다. 미움도 증오도 모르는 듯이 그저 남 이야기 하듯 재판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말만 드문드문 내뱉고 있었다. 옆에서 듣기가 안타까웠던지 全基東씨가 한마디했다.
 
  『때린 놈이야 신체와 정신이 안 다쳤으니, 마음껏 공부하고 돈을 벌 수 있지만, 나와 龍範씨는 그 사건 이후 몸과 정신이 완전히 망가져서 결혼도 못 하고, 鄭龍範씨는 정신이 이상해졌고…. 그 사람들의 행위는 인간 존엄성을 파괴한 것입니다』
 
  법정 복도에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柳時敏 의원에 대한 항소심 재판이 시작되었다.
 
  柳時敏 의원 뒷자리에 全基東·鄭龍範씨가 앉았다. 鄭씨 어머니는 『얌전하게 가만히 있어, 떨지 말고』 하며 아들의 손을 잡았다. 鄭씨는 눈을 한 곳에 고정하지 못하고 재판정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2005년 6월 서울고등법원, 柳時敏의 변명

 
  검사의 심리가 시작되었다. 이날 심리 중 주로 1984년 폭행 사건과 관련한 부분만 옮겨 본다. 柳時敏 의원이 20여 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검사 후보자 공개 자료 내용 중 「당시 폭행 사건은 조작」 운운 한 적이 있습니까.
 
  柳時敏 그렇습니다.
 
  검사 그것이 어떤 의미인가요.
 
  柳時敏 그 사건을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주도적으로 감금과 폭행을 한 것도 아니고, 누구와 공모한 것도 아닙니다. (全基東씨를) 병원에 데려가거나, 가족들과 접촉하는 등 나는 오히려 사건의 수습에 관여했습니다. 판결문에 내가 마치 사건을 주도한 것처럼 되었는데 진실과 다른 판결입니다.
 
  검사 그 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인가요.
 
  柳時敏 무관이 아니라, 판결문 자체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검사 폭행 사실에 관여한 적이 있는가요.
 
  柳時敏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이 붙들려 온 것을 본 적이 있어 그들을 내보내기 위해 그 가족과 협의하고 학교 당국과 연락해서 앰뷸런스를 부르고 차를 태워 보내는 데 관여한 적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폭행을 안 했으니 폭행에 관여한 사실이 없습니다.
 
  검사 법률적인 판단은 무시하고, 폭행에 관여한 사실이 없다는 것인지.
 
  柳時敏 사건 자체가 조작되었습니다. 내가 주도했다는 부분이 보안기관의 조작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난 20년간 늘 그렇게 말해 왔습니다.
 
  검사 당시 피고가 쓴 항소이유서에 「잠시나마 직접 조사에 임한 적 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사건 전체가 조작이란 말인가요, 피고인이 가담한 부분만 조작이라는 것인가요.
 
  柳時敏 폭행은 심각했지만 우발적이고, 그것이 당시 판결문처럼 공모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주도된 것은 아닙니다. 공모했다는 것은 보안기관의 조작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내 개인이 그 속에서 차지하는 부분도 조작입니다.
 
  검사 관여가 없었는데 유죄판결이 난 것이 조작이란 것인가요.
 
  柳時敏 당시 법률상 나의 행위가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형법상 저촉되면 벌을 받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한 것은 없지만, 내 행위가 죄가 된다면 유죄판결을 받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검사 실제로 학생 폭행 사건에 관여한 부분은 뭔가요.
 
  柳時敏 연행·감금을 지시한 적이 없습니다. 현장에 없었는데 학교에서 후배가 이야기해 줘서 학생회관에 오가면서 몇 차례 목격한 사건입니다. 관련이 있는 사건은 첫 번째 건(林信鉉)은 가족이 와서 가족에게 인계한 부분….
 
  세 번째(鄭龍範) 사건은 전혀 모르고, 네 번째(全基東) 사건은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가 심각한 폭행을 당해서 학생처에 전화해서 병원 앰뷸런스 불러서 태워 보낸 것에 관여했습니다. 軍 제대 후 친목 비슷한 복학생협의회를 만들어 대표를 하고, 사무실이 4층에 있어 매일 들르는 입장이었습니다. 별 생각 없이 후배들이 물어 오면 이야기해 주고…, 사건 수습한 것밖에 없습니다>
 
 
 
 「주도하지도, 때리지도, 관여하지도 않았다」
 
보건복지부 장관에 내정된 柳時敏 의원.
  이날 재판에서 밝힌 대로라면, 柳時敏 의원은 「그냥 학생회관에 오다가다 현장을 목격했고, 후배들이 물어 오면 답을 해 주고, 나와 별 상관이 없는 일을 앞서서 수습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柳時敏 의원은 그동안 『나는 당시 폭행 사건을 주도하지 않았으며, 피해자들을 때리지 않았기 때문에 폭행에 관여한 바 없다』고 주장해 왔다. 柳時敏 의원의 이런 주장은 1984년 그가 당시 1심 판결에 불복해서 쓴 「항소이유서」에서부터 시작됐다.
 
  柳의원이 쓴 「항소이유서」는 그가 최초로 이 사건에 대해 체계적으로 자기의 생각을 밝힌 것이고, 이후 그의 시각도 여기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前略) 문제의 9월26일 밤 전기동·정용범 兩人이 구타당하는 광경을 잠시 목격하고도 그것을 제지하려 하지 않았던 본 피고인에게는 다른 학생들보다, 더 큰 윤리적 책임이 있음에 분명합니다(법률적 측면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또한 임신현·손형구의 경우에도 본 피고인이 사건에 접했을 때는 이미 감금 및 조사가 진행 중이었으므로, 어떠한 지시를 내릴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이 조사를 위한 감금에 명백히 찬동했으며, 또 잠시나마 직접 조사에 임한 적도 있기 때문에 법률을 어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에 따른 책임이라면 흔쾌히 감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경우 가능한 짧은 감금과 非폭력이라는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실제로 이 원칙이 관철되었으므로 본 피고인은 아무런 윤리적 책임도 느끼지 않습니다. (後略)>
 
 
 
 
검찰조서 등에 나타난 柳時敏의 폭행 관여

 
  「아무런 윤리적 책임도 느끼지 못한다」는 柳의원의 주장과 달리 당시 폭행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들의 진술서·판결문·관련자 진술을 보면, 그가 이 사건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는 의심을 받을 만한 행적이 나타나 있다.
 
  1. 林信鉉 감금·폭행
 
  ● 임신현 진술(柳時敏이 임신현을 직접 조사한 부분): <柳時敏이 『당신, 틀림없이 기관원 같은데 기관원이 아니라면 누구에게 돈을 받고 동향을 살피러 왔는지 이야기하라, 이야기만 하면 아무일 없이 돌려보내 주겠다. 그렇지 않을 시에는 아이들이 구타하는 것을 책임지지 못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 임신현의 형 진술(가족의 신병 인도 요구를 거절한 부분): <휴게실에서 저의 동생을 빨리 석방해 달라고 항의하니, 柳時敏이 『기관원이라는 의심이 있으니까 조사를 하는 것이며, 석방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회의를 해야 한다』고 석방을 거절했습니다>
 
  ● 柳時敏 진술(임신현의 폭행 보고서 검토한 부분): <자술서를 제가 검토해 보았는데 내용이 학교 온 목적은 놀러왔다. 복학생협의회 놀이에 참가한 것은 막걸리를 마시려고 참석했다…>
 
  ● 신수철(자원공학과 4년, 복학생협의회) 진술: <柳時敏 형 등 몇 명이 나가 대책을 세운다고 한다. 보호자도 온다고 하여 신병확보가 어려우니 보내기는 해야 되는데 확증이 없으니 좀더 두고 보자고 전해 들었습니다>
 
  2. 孫瀅九 감금·폭행
 
  ● 柳時敏 진술: <학도호국단 총학생장인 백태웅으로부터 자기는 바쁘니까 대신 진술서를 받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당일 19시까지 2시간 가량 조사했습니다>
 
  ● 柳時敏 진술(감금 지시 여부 부분): <본인이 수시로 사무실을 들락날락했기 때문에 孫瀅九 자신이 백태웅 다음으로는 (저가 조사를 지시했다고) 느낄 수는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3. 鄭龍範·全基東 감금·폭행
 
  ● 심윤남(인문대 철학과 4년, 복학생 협의회) 진술: <柳時敏·심재철 형이 있는 가운데 회의를 열고 정용범과 전기동의 조사를 담당할 팀을 각 6명씩 2팀으로 하고 본인과 柳時敏 형은 전기동을 조사한다고 승낙만 하고, 실제로는 조사를 하지 않고, 가끔 2개소를 돌아다니면서 조사상황만을 살펴보았습니다>
 
  ● 심윤남 진술: <호국단 집행부 연구실로 가서 심재철과 柳時敏에게 전기동의 조사결과 거짓말을 한다고 하고서 그 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 오재영(인류학과 4년, 사회대 학생회장, 프락치 사건 대책위원회 위원장) 진술: <전기동과 정용범은 복학생 중심으로 조사가 이루어져 그날 밤 복학생협의회 위원장인 柳時敏이 관장했는지는 확실치 않았고, 그 후에 신병문제에 대하여 柳時敏이 하는 말을 들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모든 것은 자기책임이라고 하였습니다>
 
  ● 오재영 진술: <그날 밤 의사권은 선배와 간부들이 하였기에 때문에 주로 柳時敏 형이 하였고, 저희는 그때 동조를 하게 된 것입니다>
 
  ● 오재영 진술: <전기동과 정용범의 조사는 프락치 사건진상조사 위원회에서 직접 조사하지 않고, 柳時敏과 조원봉으로부터 조사결과를 전달받았습니다>
 
  ● 오재영 진술: <柳時敏·남승우·윤호중·본인 등 6명이 집행부 연구실에서 이야기를 하던 중 본인이 『프락치라는 물증도 없는데 때려 가면서 조사를 강행할 수 있겠느냐』는 말을 하였는데, 柳時敏과 남승우가 『조사하는 사람들이 조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 보자』고 말하여 본인이 동의하였습니다>
 
 
 
 全基東의 외로운 투쟁
 
2004년 4월 17代 총선 때 柳時敏 후보의 선거 홍보물. 그는 1984년 「민간인 감금·폭행 사건」으로 구속된 것을 민주화운동과 관련 있는 듯이 표현했다가, 피해자 全基東씨의 고소로 재판을 받았다.
  방송大 법학과 3학년에 다니며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던 全基東은 1984년 9월26일 레포트 작성을 위해 서울大 법대 교수에게 책을 빌리러 왔다가 7~8명의 학생들에게 납치를 당했다.
 
  학생들은 全씨의 가린 눈을 납치 다음날인 9월27일 오후에 풀어 주었다. 그러나 이때쯤 全씨는 폭행과 고문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실신했다.
 
  당황한 학생들은 학교 측과 상의한 후 앰뷸런스를 불러 全씨를 서울大병원으로 옮겼다. 全씨는 이 폭행으로 전치 8週의 상해를 입었다.
 
  다음은 柳時敏이 검찰에 설명한 鄭龍範과 全基東의 폭행 현장모습이다.
 
  <초저녁에 정용범과 전기동은 플래카드에 사용했던 광목으로 눈을 가려놓고, 손은 뒤로 역시 플래카드에 사용했던 천으로 묶여 있는 상태에서, 발로 등과 복부 부분을, 주먹으로 가슴과 머리 등을 7~8명이서 교대로 구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 5시30분경에는 정용범은 눈만 가려놓은 채 바닥에 꿇어 앉혀 있었고, 전기동은 눈도 가리고 손목도 묶여 있는 상태에서 바닥에 꿇어 앉아 다리 사이에 각목을 끼운 상태에서 간간이 주먹으로 가슴을 맞고 있었습니다(편집자 注: 전기동과 정용범은 각기 다른 방에서 조사를 받음)>
 
  새벽에 두 사람의 감금 현장에 온 이유에 대해 柳時敏은 『밤 사이 조사가 정보원과 관련한 것이 밝혀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왔다』고 진술했다.
 
  검찰조사에서 柳時敏은 『불법 감금을 하여 가혹행위를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았느냐』는 질문에 『민사·형사상의 책임을 져야 하고 그에 따른 형사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면서 구태여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복학생협의회 집행위원장이었고, 처음 발생한 임신현 사건이 복학생 주동이 되어 일어난 것이고, 그 뒤 사람들에 대해서도 복학생이 한두 명이 끼어 있었기 때문에 제가 빠질 수 없어 4명의 사건에 계속 개입하게 된 것입니다. 사건 전체의 목적은 앞에서도 제가 말을 했지만 그 사람들이 정보원인지를 밝히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전기동·정용범이 감금당하여 모진 고문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서도 왜 제지를 하지 않았나요.
 
  제가 非폭력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그 신념이 부족하고, 폭행하는 현장이 너무나 살벌했기 때문에 흥분되어 있는 가해 학생들을 제지할 수 없었습니다.
 
  4명을 감금하고 폭력을 행사하여 허위 자백을 받아 학생 선동에 이용하려고 한 것인가요.
 
  사건의 전체적인 목적은 그것이었지만 사실은 확인하여 그 기관에 대해 항의를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가짜 프락치 사건을 데모에 이용하면 학생시위가 가열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나요.
 
  네, 그렇습니다.
 
  이상 진술은 사실대로며, 할 말 있으면 하십시오.
 
  그 4명이 정보원이든 아니든 구금·폭행의 권리가 학생들에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폭행을 당한 사람들에게 죄스럽게 생각하고, 특히 전기동씨에게는 더욱 그런 감이 듭니다.
 
  학생들이 원래부터 폭력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고, 비폭력을 신봉하나 배움에 있는 상태라 불안전한 상태로 당시 흥분한 분위기 속에서 저지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복학생협의회 집행위원장으로서 후배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 올바른 방향으로가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 데 대해 책임을 통감합니다>
 
 
 
 柳時敏, 「민주화운동으로 두 번 투옥」
 
  柳時敏씨는 2004년 17代 총선 당시 선거 홍보물 문구에 1984년 「서울大 민간인 폭행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표현했다가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全基東씨에게 고소를 당했다.
 
  당시 柳씨가 선거 홍보물에 기재한 내용이다.
 
  <부끄럽지는 않지만 이제는 버리고 싶은 사진 한 장이 있습니다.
 
  「폭력범」으로 몰려 잡혀갔을 때 어느 신문사 기자가 찍은 사진입니다. 이미 특별 복권되었고, 다른 관련자들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명예회복을 한 사건이지만, 이 기록은 마치 묵은 흉터처럼 아직도 저를 따라다닙니다.
 
  20년 前 서울大 학생들이 경찰정보원 혐의를 받은 가짜 학생을 교내에서 붙잡아 때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全斗煥 정권은 당시 서울大 복학생협의회 대표였던 저와 총학생회 간부들을 배후조종자로 몰아 구속했습니다. 저는 길다란 구치소 담장 아래서 눈물짓는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주신 손으로 누군가를 폭행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말은 진실입니다.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제 인터넷 홈페이지(www.usimin.net)에 올려놓은 저의 「항소이유서」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고 믿었던 군사독재 시절, 제 젊음의 한 조각을 바쳐 쓴 기록입니다>
 
  柳의원은 또 선거 홍보물에서 전과 기록 소명란에 「全斗煥 정권 시절 서울大 학생들이 가짜 학생을 폭행한 일에 당시 복학생 대표였던 저를 조작으로 엮어 넣은 사건으로, 1987년 특별복권된 바 있음」이라고 기록했다.
 
  柳의원은 2003년 16代 再선거 홍보물 자기 소개란에 「민주화운동으로 두 차례 투옥」이라고 했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는 등 말썽이 일자 이 표현을 17代 총선에서는 삭제했다.
 
  全基東씨는 1994년부터 서울大 폭행사건 관련자들이 언론 등에서 「민주화 운동」이나, 「프락치 사건」이라는 표현에 대해 반론보도를 청구나, 진성서 제출, 헌법소원 등으로 맞서 오고 있다.
 
  全씨는 1997년 柳時敏이 기록한 저서 「아침으로 가는 길」에서 「서울大 프락치 사건」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에 반발 柳時敏과 책 발행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사과를 받아 낸 적이 있다.
 
  全基東씨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해자 측의 입에서는 「서울大 프락치 사건」이란 표현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2003년 4월 16代 국회의원 재선거 때 柳時敏 후보는 자신의 경력란에 1984년 민간인 감금ㆍ폭행 사건으로 감옥에 간 것을 「민주화 운동으로 두 차례 투옥」 되었다고 표현하여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를 당했다.
 
 
 柳時敏의 좌우명, 「남에게 폐 끼치지 말자」
 
  2003년에도 全基東씨는 柳의원의 저서와 홈페이지 등에 소개된 柳의원의 약력 중 「서울大 프락치 사건」, 「민주화운동으로 두 차례 투옥」 등의 표현을 사용한 것은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이라며 국가인권委에 진정서를 내기도 했다.
 
  2004년 17代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열린당으로 출마한 윤호중씨가 선거 홍보물에 「서울大 프락치 사건」이란 표현을 썼다가 全씨에게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이때 고소건은 검찰이 기소를 하지 않아 재판이 진행되지 않았다. 윤호중 의원도 서울大 폭행 사건 주동자의 한 명으로 처벌받은 바 있다.
 
  全씨는 『이 사건은 민주화운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민간인 불법 감금ㆍ폭행 사건일 뿐』이라고 분개했다.
 
  『무고한 시민을 감금하고 폭행해 프락치였다는 자백을 받아 내려 한 행위가 민주화운동이면 얻어 맞은 우리는 反민주세력입니까. 도무지 반성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민주화운동」, 「프락치 사건」 하면서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것은 우리 피해자들의 인권과 명예를 훼손하는 것으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도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들과 싸울 것입니다』
 
  취재를 마치고 살펴본 柳의원의 이력서에서 유독 그의 좌우명이 눈에 크게 들어 왔다. 「남에게 폐 끼치지 말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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