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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金正日 악수의 음모

일본은 對美 자주 노선을 표방하면서 金正日을 도와 한반도 분단의 영구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허문도    asadalm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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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 文 道
1940년 경남 고성 출생. 서울大 농대 졸업. 日 도쿄大 박사과정 수료. 조선일보 도쿄특파원ㆍ외신부 차장. 駐日 대사관 공보관. 문화공보부 차관. 대통령 정무1수석비서관. 통일원 장관 역임.
「광화문 현상」
  지난 6월 월드컵의 「광화문 현상」이 일본 수상 고이즈미(小泉純一郞)의 9월 평양 방문을 재촉했다 하면, 한국의 국제정치 학자들 중에 몇 사람이나 동의할까.
 
  잔치가 끝난 7월, 東京에서 만난 한국을 잘 아는 일본의 한 知人은 6월을 지켜본 소감을 얘기했다.
 
  『한국세가 대단한 일을 했다. 21세기의 전쟁은 스포츠다. 한국은 아시아인들이 유럽과 대등히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서울의 광화문과 시청 앞에 있었던 광경, 그건 혁명이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왜 「혁명」이냐고 묻지 않았고, 화제를 옮겼다.
 
  대한민국이란 국가 속에서 자기를 발견한 젊은이들의 자긍심, 환희, 열정, 규율감이 한데 어우러져 대륙을 질주하는 산맥과도 같고 바다와도 같은 力動(역동)을 펼쳐냈던 것이 「광화문 현상」이었다. 그것은 월드컵으로 촉발되었지만 월드컵을 넘어서 있다. 지난 수세기 간의 그늘진 역사가 남긴 저항 민족주의의 어둡고 검은 열정을 드디어 극복해 내고, 세계 속에 자기를 열어, 자기를 형성하고 자기를 창조하는 본격파 민족주의의 開花(개화) 앞에 대한민국이 도달했음을, 「광화문 현상」은 보여 줬다.
 
  본격파 민족주의는 「젊은 나라」들의 성장의 동력원이다. 이는 千古(천고) 불변의 진리다. 누가 지금 21세기에 무슨 민족주의냐고 얘기하는가. 오늘날의 모든 선진국이 「젊은 나라」였을 때 그 성장 에너지가 바로 민족주의였다. 지금 글로벌리즘을 떠드는 자들이 그럴수록 더욱 세련되게 내셔널리즘을 챙기고 있음을, 예를 들 겨를이 없지만 우리 세계화주의자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광화문 현상」을 앞에 하여, 세계의 어느 누가, 이웃 일본은 더욱 21세기 반도통일의 주재자가 대한민국일 것이라고 예견하지 않았을 것인가.
 
  4강이 어깨를 겨루고 있는 東北亞의 네거리에 앉아 있으면, 우리는 4强이 어깨를 들이밀 때 읊어대는 수사(레토릭)와 그들이 진짜 겨냥 뒤에 감추어 놓고 있는 기도를, 최소한도 가려볼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려볼 수 있어야만 원하지 않았던 결과를 지내 놓고서야 덮어 쓴 줄 알게 되는 愚(우)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韓末, 나라를 넘기는 문서에 도장 찍는 절차만 남긴 상태에서 비분강개를 하고, 脫氣(탈기)를 하고, 할복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던가.
 
  고이즈미가 평양에 가서 金正日을 만나고 北과 일본이 수교를 하여 100억 달러를 넘는 일본 돈이 北으로 가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은 확실해지고 북한의 고립은 끝나고 동북아는 해빙」되는 것인가. 그것이 전부인가.
 
  모두 햇볕정책에 너무 중독된 탓인지 고이즈미를 격려하기에 바쁜 DJ에 보조를 맞추어, 우리 朝·野는 물론 학자나 필객, 매스컴, 어디에도 「지역의 평화와 안전에 기여」라는 공동선언의 수사를 벗어나는 언급을 보지 못한다.
 
 
 
 키신저의 예언-日本의 對美 독자 노선
 
  그런데 우리 모두에게 대한민국의 국제적 현주소를 알게 하는 매운 지적이 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망하여 반도로부터 물러간 지 60년 가까이 되어, 100억 달러를 들고 다시 북한으로 진출하여, 한반도문제를 두고 1급의 발언자가 되려는 상황을 앞에 하여(1965년의 韓日수교는 냉전구조下에서 일본은 미국의 바둑알이었을 뿐 반도문제에 적극적으로 발언할 처지가 되는 계기는 아니었다) 우리의 국제감각을 눈뜨게 해주는 통찰력 넘치는 상황규정이 있다.
 
  헨리 키신저 前 美국무장관이 작년에 출간한 저서 (「Does America Need a Foreign Policy?」, Simon&Schuster社, 2001)가 그것이다.
 
  美日관계는 그동안 일본이 패전의 충격과 냉전의 위험 속에서, 미국과 경제에 있어서는 단호한 경쟁자였지만, 외교안보 정책에서는 미국에 추종해 왔다. 그러나 이제 일본은 미국과의 정치관계에서 커다란 변화의 경계점에 달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키신저는 일본의 태도변화를 불러오는 요소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그것은 한국과 중국이 정치·경제·군사에 걸쳐 그 힘이 증대되고 있는 것. 그리고 북한이 서울과 워싱턴과 北京의 제반 작용에 의해 의미 있는 역할자로 등장하게 된 것 등이다.
 
  키신저는 일본이 동북아 문제를 두고서 독자노선을 걸을 것임을 이 책에서 이미 내다보았다. 이번에 고이즈미는 日北 정상회담을 공식 발표하면서 3일 전에야 美측에 알렸다. 그동안 일본은 외교·안보정책에서 미국을 추종해 왔고, 북한문제를 두고는 韓·美·日 3국 공조를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고 있었는데, 북한에 결정적인 수를 쓰면서 일본은 미국과 상의하지 않은 것이다. 東北亞 문제를 두고 일본이 미국의 정치틀에서 벗어날 것이라 한 키신저의 진단이 적중한 것을 알게 된다.
 
  키신저는 美日동맹의 핵심적 도전 요인으로 美日 각각의 對중국 정책과 함께 對한반도 정책을 들면서, 일본과 한국의 국가 전략적 요청사항을 거침없이 풀어 제쳐 놓았다.
 
  한국이나 일본의 국제정치학자 같으면 조심스러워 할 대목이다. 한국과 일본 모두를 향해 제3자적일 수밖에 없는 키신저의 분석이니까, 우리는 일본이 金正日 체제와 수교하는 진정한 전략의도를 알아보는 데 최상의 길잡이를 얻게 된다.
 
  키신저를 따라가 본다.
 
  <(역사적인 이유로) 일본의 지도자들은, 한국의 외교정책은 불가불 일본이 동북아에서 우월적 세력으로 재현되는 것을 억제하려 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동시에 일본은, 한반도가 또 다른 아시아의 메이저 파워에 연계되지 않는 것이 일본의 안전에 긴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본은, 한국의 외교에서의 점증하는 개성적 주장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과의 유대(입에 올리진 않지만)까지 포함해서, 한국이 경제의 경쟁자로 대두되는 것이 불편하기만 하다.
 
  이리하여 일본은 2중노선 정책을 취한다:일본은 아시아 세력균형의 핵심적 요인으로서 미국 병력이 한국에 주둔하기를 원한다. 인해 주한미군을 철수하는 것은 주일미군의 일본內 기지 유지를 日本 국내적으로는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고, 그에 연동하여 일본과 여타의 아시아에 걸쳐 전혀 새로운 일련의 안보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일본은 또한 한반도에 대한 스스로의 영향력 유지를 추구한다. 일본은 통일한국이 결국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더욱 고집스런 경쟁자가 되겠기에(그리고 아마도 통일한국의 외교정책은 일본의 동기를 의심하는 바탕 위에 둘 것이기에) 한국의 통일을 嫌忌(혐기)한다. 그래서 일본은 在日 조총련의 對北 송금을 허용함으로써 북한이 경제적으로 연명하도록 돕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은, 그것들이 통일되었을 때 통일한국의 병기창에 추가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일본의 再무장 및 일본을 위한 미사일 방위망 개발 그리고 일본 스스로가 핵무기 건조의 옵션을 유지하게끔 자극제로 작용하고 있다>(위에 든 책 p.200~201)
 
 
 
 日本은 金正日을 도와 한반도 분단을 영구화하려고 한다
 
  비스마르크 연구가답게 키신저는 일본과 한반도의 국제정치 현황을 권력정치(파워 폴리틱스)의 안목으로 뼈대를 적출해 그려 놓았다. 햇볕정책의 「평화와 안정」 레토릭으로 무감각해져 있는 눈에 얼음덩이를 들이대는 맛이 아닐 것인가.
 
  누가 이 21세기 시장경제와 세계화의 시대에 「권력정치」냐고 하는가. 시장경제와 세계화 같은 것을 기층에서 떠받치는 국제 권력정치에 둔감하여, 우리는 이웃에게 종살이를 하였고, 그 역사에서 아직도 충분히는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다.
 
  하나 첨언할 것은 키신저가 위에 든 저서의 서술을 통해, 햇볕정책과는 취향을 달리하는 국가전략의 추동체를 암묵리에 대한민국 위에 설정해 놓고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즉 햇볕정책을 대한민국의 국가전략으로서는 일시적이고 예외적인 것으로 치부해야만 키신저의 진단과 분석은 씨가 먹힌다.
 
  결국 키신저는 일본이 한반도의 분단상태 유지를 그들의 국가전략으로 하고 있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우리한테도 있는 시각이지만 韓日 우호시대라는 실체가 없는 무드에 밀려 띄우지 못했을 뿐이다. 일본을 너무 악인 취급한다는 얘기를 들을까 자격지심이 들어서.
 
  키신저 소론이 작년 것이니까, 그 위에 올 가을의 상황을 얹으면 그림은 명확해진다.
 
  고이즈미 수상이 평양에 갔다 와서 일본이 북한을 향해 하려는 것은, 한시적이고 정액적인 배상이 아니라, 북한 경제가 빈사상태를 탈출하여 산업화 달성이 가능하도록 필요한 경제원조를 지속적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고이즈미·金正日 공동선언으로 확실하게 드러난 일본의 의도는, 적어도 일본은 北의 안전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것과 東北亞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北과 협력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北과의 전쟁판이 벌어져도 일본은 가담치 않겠다는 얘기 아닌가.
 
  선언에는 핵 문제와 미사일 문제에 관한 합의가 있지만, 이는 일본이 취하겠다는 안보관련 행동천명의 다음으로 밀려나 있고, 문제되는 것은 北의 국제합의 준수 여부인데, 그동안 확인을 거부해 온 북한이 확인수단을 갖지 않은 일본을 상대로 핵 관련 자세에 관한 합의를 했다 해도 무의미하다.
 
  미국의 동맹인 일본의 고이즈미 수상이 부시 대통령의 北을 향한 惡의 축 전략을 깨고 나오려 하고 있다. 부시는 北을 惡의 축으로 규정해 놓고 핵과 미사일을 손털지 않으면 선제공격이라도 하겠다는 판인데, 먼저 北의 金正日이 부시의 친구인 고이즈미를 끌어안아 버리면, 공격은커녕, 손 털지 않으면 치겠다는 위협마저 주효하기 어렵게 되는 것 아닌가.
 
  일본은 키신저가 예단했던 대로, 미국과의 정치적 연대를 벗어나, 그들이 오래 감추어 놓고 일관되게 추구한 것으로 보이는 한반도 영구분단의 국가전략을 완성단계까지 밀어다 놓았다.
 
  北이 일본 돈으로 빈사상태에서 벗어나 산업화의 전망을 열게 되고, 일본의 도움으로 핵을 온존한 채 부시의 新안보전략의 선제공격 위협을 벗어나게 되면, 北의 체제는 반석 위에 오르고, 한반도는 영구분단으로 고착되는 것 아닌가.
 
  키신저는 앞에서 北核의 존재를 日本은 핵무장의 빌미로 삼을 것이라 보았지만, 일본이 핵이 온존된 北과 수교하려 드는 더 깊은 이유는 그같은 사연이 주변에 있을 것이다.
 
  일본이 신경 쓰는 것은 北核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강대해지고(올해로서 중국 상품의 미국 시장 점유율이 일본 상품을 넘어섰다) 있는 중국의 核일 것이다. 일본은 北에 核을 온존시켜, 수교와 경제진출로 그 존재를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서는, 미국의 저지를 뿌리치고 그것을 동기로 核무장을 결행하여, 그들이 미국만 믿고 악몽일 수밖에 없는 중국 核 옆에서 사는 불안에서 벗어나려 할 것이다.
 
  일본은 장기불황이라 해도 앞으로 10년간도 아시아 최강의 경제대국임에 변함이 없을 것이고, 이미 군사예산에서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위가 되어 있다. 반도의 북반부를 그들 경제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南北을 갈라 분할 게임을 하고 있을 일본이 核무장을 했을 때(그 잠재력은 중국核을 일거에 압도할 것이다), 그들의 입김은 반도 위에 얼마만큼 거세져 있을 것인가.
 
  이 모든 일의 출발점이 日北수교의 완결이다. 日北수교는 일본이 東北亞에서 우월적 세력이 되는 출발점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하고 있는 대통령이라면 어떻게 반도 진출을 하려드는 일본 수상에게 박수를 치고 그 등을 떠밀 수 있다는 말인가.
 
 
 
 분단으로 한국을 밀어넣었던 日本이 이제는 영구분단을 획책하고 있다
 
  해방조국에 민족통합의 리더십을 확립하지 못한 종국적 책임은 우리 민족 내부에 있다. 이후의 역사는 우리가 살아야 할 살림이기 때문에 그렇다 해야겠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채찍질한다고 해서, 일본이 반도분단의 근원을 만든 책임과 더 원천에 있는 이유인 식민지배의 「원죄」에서 면탈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식민지배에서 동화정책을 실행하여, 우리 민족의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말살하려 듦으로서, 민족적 리더십의 원초적 발아가 불가능하게 토양자체를 제거하려 하였다. 식민지배에서 日帝가 보인 奸智(간지)와 악랄성은 세계에 그 유례가 없을 것이다.
 
  日帝는 태평양전쟁 말기, 천황제 잔존을 획책하느라 쓸데없이 항복시간을 천연하다가 원자폭탄을 얻어맞고 소련군 침공을 불러,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군에 분할 점령당할 계기 앞으로, 통합 리더십이 진공상태인 한국 땅을 밀어내 놓고, 그들은 패망해 버렸다.
 
  분단 앞으로 한국을 밀어놓고 눈감아 버렸던 일본이 6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그동안 통일의 문은 열려 있던 이 땅에 이번엔 영구분단의 족쇄를 채우려 들고 있다.
 
  7000만 동포가 어찌 깨어 있지 않을 것인가.
 
  반도분단을 일본이 그들의 국가전략으로 하고 있는 것이 밖으로 노출되는 계기가 東西냉전이 끝날 때까지는 별로 없었다. 기껏, 그들 국내에서 거류민 조직인 민단과 조총련을 국교가 있는 쪽이든 아니든, 출입국 관리법이나 치안정책 등을 통해 도토리 키재기 급으로 상호견제를 시켜놓는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全사회적으로 통용시킨 호칭에서 그 분단적 의도를 노출해 놓고 있다. 이들은 전체 在日 한국인을 지칭할 때에 在日 한국인이거나 在日 조선인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在日 한국·조선인이라 해 왔다.
 
  냉전기간에도 이들의 분단전략이 노출되는 때가 한 번 있었다. 1950년대 말, 在日동포를 조국에 귀환시킨다고 일본은 적십자를 앞세워, 한국의 격렬한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십수만 명을 北送시켰다. 당시 韓日 국교정상화 교섭에서 어로자원 보호선인 李承晩 라인, 평화선 등으로 강경한 李承晩 대통령한테 밀리기만 하던 일본이 분단전략 발상의 北送카드를 꺼내, 李承晩 대통령한테 앙갚음을 했던 것이다. 그때 이들이 내건 말장난이 인도주의의 실현이었다.
 
  시간이 얼마가지 않은 중에 北送됐던 일본인 妻(처) 문제가 불거져, 적십자에 외무성 관료까지 파견하여 원천적으로 이 사업을 조종했던 일본 정부는, 그들이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在日 한국인을 인도주의의 지옥으로 몰아냈다는 사실을 한 번쯤은 곱씹어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北送된 사람들 중에 일본 여자들이 있었으니까.
 
 
 
 
對北수교를 DJ 임기 중에 끝내려는 의도는?

 
  東西냉전이 끝나고, 독일이 통일되고 東歐공산권이 붕괴하면서 일본의 발길은 빨라졌다. 권력정치 감각이 있는 눈에는 당연히 한반도에 통일의 찬스가 다가온 것이었다. 1990년대 초의 소련과 중국의 對 한국수교는 공산대국들이 통일한국을 체념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의사표시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반도 분단 유지전략이 위기 앞에 섰음을 일본은 직감했다. 정부간 대화에는 시간이 걸리는지라 일본은 비상수단을 썼다. 일본은 집권 자민당과 그동안 北과 대화를 하고 있던 야당인 사회당의 합동 대표단을 평양으로 보내 金日成과 회담하고는 바로, 日北 조기수교 선언문을 채택했다.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한국을 방문했던 것이 1990년 6월이었는데 일본이 평양 측과 공동선언을 한 것은 9월이었다. 외교 사안으로는 신속하기가 전광석화였다.
 
  권력정치를 아는 대통령이 없고 급변한 東北亞의 전략환경을 통일을 두고 요리할 將材(장재)가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 찬스를 살렸겠는가.
 
  1991년 1월부터 시작된 日北 수교교섭은 그 무렵 인공위성에 포착된 北의 核개발 의혹으로 주로 미국 측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일본이 또 한번 그들의 분단전략을 유심한 눈에 느끼게 하는 계기가 있었다. 1993년 북한이 NPT(핵확산금지조약)를 탈퇴하여 국제 제재를 피할 수 없게 되자 北은 전쟁으로 받겠다고 공갈하고 나왔다. 이때 일본은 제재를 반대하는 쪽으로 미국 등에도 작용하였는데, 그 깊은 속의 이유가 北에 대한 국제 제재가 한반도의 통일로 귀결될 것이라고 내다 봤던 데에 있었던 모양이다.
 
  이때에도 일본이 애쓸 일은 없었다. 金日成이 전쟁이라니까, 한국의 金泳三 대통령과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고개부터 흔들었는데, 일본은 한국과 미국에 묻혀 힘 안 들이고 분단전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20세기 초두의 보호국化나 합방이 모두 당시의 한국 정부도 원해서 성사된 모양을 일본이 갖출 수 있도록 했던 역사를 한번 상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 金大中 대통령이 일본의 수교라는 이름의 對北 경제진출과 영구분단 획책을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있는 모양은 어떤가. 일본은 공공연히 北과의 수교교섭을 現 DJ 정권이 끝나기 전에 성사시켜야 한다고 하고 있다. 이게 무슨 얘기인가. 그들의 對北수교가 한국의 보통정권 같으면 반대할 수밖에 없는 뭔가를 갖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 아닌가.
 
  21세기의 초두가 되어 東北亞의 전략환경에는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 있다. 하나는 중국의 강대화, 하나는 부시 대통령의 北을 향한 「惡의 축」 전략이다.
 
  일본은 19세기末의 명치 시기 이래로 아시아의 패자 지위를 쌓아 올리려 하였고 쌓아 올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일본한테 당했어도 일본의 이 측면에 대해 잘 모른다. 일본 근대사 속으로 한 발자국만 들어가 보면, 그들의 이같은 정념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바로 알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일본은 경제를 가지고 이같은 지위를 회복했다고 내심 자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날이 갈수록 강대해지고 있는 중국이 이제 정치와 경제에서 일본과 경쟁할 만큼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日人들은 그들이 지난 세기에 중국 민족에게 안긴 모멸감을 잊지 못한다.
 
 
 
 일본은 北을 통해 중국 봉쇄선을 완결하려 해
 
  중국의 강대화란 전략환경의 변화를 일본이 중시하는 표현은, 일본의 對아시아 투자패턴에 드러나 있다고 키신저는 지적한다. 그것은 중국의 변경을 봉쇄하는 형태로, 대만에서 베트남까지 그리고 우즈베키스탄까지 선이 쳐지고 있다 하고 있다. 키신저의 관찰을 연장하면 이제 일본은 북한으로 경제 진출을 하여 중국 봉쇄선을 완결하려는 것이다.
 
  신의주 경제특구는 미구에 있게 될 일본 경제원조의 容器로 만들어졌을 터인데, 중국이 왜 양빈 장관을 체포했는지 그 이유에 짐작이 간다.
 
  부시 대통령이 北을 惡의 축으로 지목한 것은 東北亞 전략환경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기독교 문명권에서 惡이라는 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고, 어떤 코스트를 치르더라도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이다. 유일 초대국의 말이니까 고도로 현실성이 있다.
 
  일본은 惡의 축 전략의 종착점이 반도통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다봤기 때문에 움직였다. 반도분단의 국가전략이 파탄날지 모를 위기를 맞이하여 미국 우산 밖으로 나와 독자노선에의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것이 고이즈미 평양行의 의미일 것이다.
 
 
 
 
아시아주의와 對北 진출

 
  일본의 근대화와 서양화의 종착점은 일본 역사상 처음 있은 이민족에 의한 패망이었다.
 
  이 패망의 이유를 거시적으로 설명하는 몇 가지 지적이 있다. 두 가지를 들어본다. 하나는, 일본 국제 정치학계에서 준재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국책에도 많이 자문했고, 연전에 작고한 고사카(高坂正堯) 京都대학 교수 「아시아주의는 왜 생겼는가」라는 글에서 『日本의 대실패는 서양에의 대항과 아시아 지배가 결부되어 버린 곳에 그 기본적 원인이 있다』고 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일본인의 높은 긍지와 이로 인한 강력한 내셔널리즘』이 그 원인이라고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의 일본에 아시아주의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知的체계로서의 사상이기보다는, 일본인의 행동에의 열정을 고양시키는 심정이나 정념 같은 것이었는데 그같은 이름으로 굳어졌다.
 
  그것은 일본인들이 싫증도 안 내고 歐美를 숭배하고 끝없이 모방만 하다가 어느 일순 자기를 돌아봤을 때 부닥친 허무감과 반발감에서 시작되었다 한다. 그것은 일본인의 자존심의 소산이고 서양에 대항하겠다는 사명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아시아는 하나이고, 일본이 그 맹주라는 생각이 왈가왈부 없이 정착되었다 한다. 아시아주의 속에서는, 『일본이 중국을 지도하는 것은 역사적 사명이었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蔣介石을 응징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마지막에 가서는 이 사명의 수행을 방해하는 미국과 싸우게 되었고 그리하여 패망하였다.
 
  아시아주의는 서양화와 脫亞의식으로 근대화를 달성한 일본 문명의 피할 수 없는 심리적 부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패전을 하여 大戰 前의 군국주의는 없어졌다 할지 몰라도, 근대 일본문명과 함께 아시아주의적 심정은 없어질 수 없는 것이다.
 
  냉전기간 동안 미국의 우산 밑에서 伏流(복류)하던 아시아주의가, 냉전이 끝나 미국에 기대야 할 적극적인 이유가 없어지고, 10여 년간의 장기 불황으로 사회적 폐색감이 짙어지면서 내셔널리즘의 형태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게 아닌가 한다.
 
  근년 교과서 문제의 원천이었던 「國民의 歷史」가 일본 문명을 세계 문명의 계층구조에서 최정상에 올려 놓고, 태평양전쟁을 일본인에 의한 아세아 해방전쟁이라고 고아대어 200만 부가 팔려나간 것을 보면서, 아시아주의적 심정은 일본 속에서 다시 水面 위로 올라왔음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계층적으로 조직된 유일한 나라
 
  일본의 패망원인에 관한 또 하나의 근원적이고 거시적인 지적은 美國의 문화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의 것이다. 그 지적은 베네딕트 여사가 전쟁이 끝나기 전해 미국의 전시 정보국으로부터의 위촉으로 戰後의 일본점령 통치에 참고하기 위해 연구 집필한 일본인론인 「국화와 칼」 속에 있다.
 
  베네딕트 여사는 일본이 저지른 과오는 일본 문화를 다른 여러 아시아 나라들에 수출하려 들었던 것이라고 결론지었는데, 이 과오의 당연한 결과가 패전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화라 함은 한 민족사회의 인간들의 사는 방식의 총체를 말한다.
 
  베네딕트 여사는 일본 문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일본 사회의 계층적 질서(hierarchy) 내지 계층구조를 들고 있다. 일본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계층적으로 조직된 유일한 나라라는 것이다. 일본은 아시아 나라들 속에 그들이 생래적으로 익숙한 계층질서를 실현하기 위해 싸웠다는 것이다.
 
  베네딕트 여사는 일본이 전쟁에 패했지만 이 생래적인 계층질서 신앙을 금후(전쟁직후 기준)에도 비상한 장기간에 걸쳐 유지할 것이라고 봤다.
 
  키신저는 앞에서 인용했던 책에서, 미국의 안보·외교정책을 벗어난 일본의 자주노선이 취하게 될 모양으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하나는 부활된 내셔널리즘의 표현으로서의 자주 노선이고, 또 하나는 협동적인 세계질서에 기여하는 자주노선이다. 키신저는 후자의 협동적인 세계질서가 계층구조 위에 세워진 사회에서는 어려운 개념이라고 설명을 달아 놓았다. 키신저가 일본론의 세계적 고전인 베네딕트 여사의 소론을 그대로 받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상을 아울러 보면 일본이 東北亞의 변화된 전략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드러내려는 對美 자주노선의 성격에 짐작이 간다. 그같은 노선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일을 누가 모를 것인가.
 
  일본은 21세기에도 이웃 7000만과의 관계를 계층구조 속에서 맺으려 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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