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역사 地圖

우리곁에 살아 있는 역사의 맥박과 숨결

  • : 정순태  st-j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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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민족사의 심장 서울이 목격해 온 大事件의 현장들

서울에는 만만한 땅이 없다. 발길 닿는 대로 걸어도 거기에는 2000년 역사의 숨결이 배어 있다. 더욱이 4大門 안 곳곳에는 온갖 사건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 일대 파노라마를 펼치고 있다.
원래 서울은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이룬 도시다. 서울의 역사현장을 따라가다 보면 토박이가 아닌 사람도 어느덧 진짜 서울사람이 되어 서울을 사랑하게 된다
1. 百濟의 都城
 
  漢城 백제의 핵심부 夢村土城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의 심장은 夢村土城(몽촌토성:꿈마을토성)이다. 몽촌토성에 가면 2000년 역사의 地層(지층)과 만날 수 있다. 이곳은 漢城百濟(한성백제)의 都城(도성) 혹은 핵심적인 關防(관방)이었으며, 그후엔 한반도 최강의 지배세력이 번갈아가며 차지했던 전략적 요충이었다. 몽촌토성의 능선에 오르면 어느덧 우리 역사와 오늘을 사는 사람의 혈맥이 하나로 이어지는 듯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漢江(한강)의 지류 城內川(성내천)이 휘감고 돌아가는 몽촌토성은 그리 높지 않다. 제일 높은 곳이라고 해봐야 해발 45m다. 그런데도 여기선 서울을 남북으로 가르는 한강, 그리고 한강 南岸(남안)에 버티고 있는 風納土城(풍납토성:바람들이토성)이 고함치면 들릴 만큼 가깝다.
 
  몽촌토성의 남쪽으로는 南漢山城(남한산성)이 우뚝 솟아 있다. 우리 古代의 남한산성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뒤를 받쳐 주는 漢城 최후의 보루였다. 조선왕조 시대에도 그러했다. 1636년 12월, 丙子胡亂(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서 淸軍(청군)을 막으려고 都城 서울을 빠져나온 仁祖(인조)는 몽촌토성에 잠시 들러 아픈 다리를 쉬어 갔다.
 
  百濟(백제)의 도읍지라고 하면 흔히 公州(공주)나 扶餘(부여)를 연상한다. 하지만 백제가 제일 오랫동안 도읍한 곳은 지금의 서울 지역이다. 백제시대 678년의 全기간 중 漢城백제가 490여 년, 熊津(웅진:공주)백제가 50여 년, 泗(사비:부여)백제가 130여 년 동안 존속했다. 송파구에는 백제시대의 고분들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石村洞(석촌동)의 초기 백제 고분군이다. 이곳 積石塚(적석총)은 만주 輯安(즙안:고구려 古都)에 있는 장군총과 쌍둥이처럼 비슷하지만 바닥면적은 더 크다.
 
  三國史記(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 시조 東明王(동명왕)의 아들 沸流(비류), 溫祚(온조) 형제는 王位계승 경쟁에서 밀려나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남행, 漢山(한산)의 負兒嶽(부아악:지금의 북한산)에 올라 새로운 터전을 물색했다. 여기서 형 비류는 彌鄒忽(미추홀:지금의 인천)로 가고, 아우 온조는 慰禮城(위례성)에 도읍하여 백제를 건설했다. 위례성이란 나무울타리를 치고 흙을 쌓아 만든 성읍이란 뜻이다. 기원전 18년의 일이었다. 위에서 나오는 한산, 부아악, 위례성 등은 서울의 강북지역이다.
 
  삼국사기에는 또 온조왕 13년(BC 6)에 왕이 漢水(한수) 남쪽을 순시하고, 그곳이 도읍할 만한 곳이라고 하면서 漢山 아래 목책을 설치하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옮긴 다음 궁궐을 짓고, 이듬해 천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漢水는 지금의 한강, 漢山은 지금의 남한산을 말한다. 이 대목에서 백제의 수도가 한강의 북쪽인 三角山(삼각산) 아래 위례성에서 한강의 남쪽 南漢山(남한산) 자락으로 옮겼던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전성시대는 近肖古王(근초고왕:346~375) 때였다. 근초고왕 代의 백제는 평양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故國原王(고국원왕)을 敗死(패사)시켰다. 그러나 고구려의 전성기를 연 廣開土王(광개토왕:391~413)은 대세를 역전시켜 백제의 아신왕 스스로가 「奴僕(노복)」을 자처할 만큼 백제를 굴복시켰다.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광개토왕의 아들 長壽王(장수왕:413~491) 때 본격화되었다.
 
  백제 21대 蓋鹵王(개로왕)은 중국의 北魏(북위)와 동맹, 고구려의 남진을 막으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長壽王은 간첩인 중 道林(도림)을 밀파하여 蓋鹵王을 유흥에 빠지도록 유도했다. 놀기 좋아했던 개로왕은 바둑 고수인 도림과 바둑에 몰입하고, 도림의 건의에 따라 王宮 수축 등 대규모 토목사업에 國力을 집중시켰다.
 
 
  개로왕이 참수된 워커힐호텔 뒷산
 
  드디어 장수왕 63년(475), 고구려는 3만명의 군사로 백제를 침공하여 漢城을 포위했다. 개로왕은 守城戰(수성전)을 벌이는 한편 왕자 文周(문주)를 신라에 급파하여 지원군을 요청토록 했다. 그러나 고구려軍은 바람을 이용하여 성문을 불태우면서 공격했다. 도성 內 군민들은 동요하여 속속 고구려軍에 투항했다.
 
  대세가 기우는 가운데 개로왕은 수십 기를 거느리고 도성을 탈출하다가 고구려軍에 생포되어 지금의 광진구 워커힐호텔 뒤 阿且山城(아차산성)으로 끌려가 살해되었다. 왕자 文周가 신라 원군 1만명과 함께 漢城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도성은 고구려軍의 수중에 떨어져 있었다. 왕자 文周는 남쪽으로 내려가 웅진을 새 도읍으로 정함으로써 漢城백제 시대는 막을 내렸다.
 
  고구려軍에게 함락된 위례성의 정확한 위치는 불확실하다. 漢城백제의 都城에 관해서는 강동구 風納土城, 송파구 夢村土城, 南漢山城(남한산성), 二聖山城(이성산성:하남시 春宮洞) 등 네 가지 설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어떻든 위의 네 곳이 서로 인접해 있어 漢城백제의 수도권을 이루는 핵심부인 것만은 확실하다.
 
 
  2. 고구려·신라 시대의 서울
 
  북한산 碑峰에 진흥왕의 巡狩碑
 
  문주왕의 남천으로 서울 지역은 고구려의 통치권역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구려는 이곳에 北漢山郡(북한산군)을 설치하고, 南平壤(남평양)이라고 했다. 고구려는 서울지역을 백제, 신라를 제압하는 거점으로 삼은 것이다.
 
  이런 고구려의 南進정책에 대해 백제와 신라는 공동전선을 폈다. 드디어 551년, 신라 眞興王(진흥왕)과 백제 聖王(성왕)은 연합작전으로 지금의 서울지역에서 고구려軍을 몰아냈다. 신라는 한강 상류지역을 차지했고, 백제는 한강 하류의 옛땅을 회복했다. 그러나 신라는 553년 백제의 한강 하류지역까지 횡탈해 버렸다. 백제가 가야·왜와 연합하여 對신라 복수전을 벌였다. 그러나 554년, 聖王은 불운하게도 지금의 대전 지역에서 신라군의 매복작전에 의해 포로로 잡혀 참수되고 말았다.
 
  진흥왕 29년(568)에는 왕이 북한산에 올라 강역을 정하고 巡狩碑(순수비)를 세웠다. 거기가 바로 북한산 碑峰(비봉)의 頂上(1972년 경복궁 회랑으로 이전)이다. 이로부터 서울지역은 신라의 북방 전진기지가 되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면 서울을 차지하는 사람이 한반도의 最强(최강)이었다.
 
  그후 고구려는 다시 이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북한산성 등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평강공주의 남편으로 고구려의 명장이었던 溫達(온달)이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탈환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아차산성(워커힐호텔 뒷산) 싸움에서 신라군의 화살을 맞아 전사한 것은 591년의 일이었다.
 
  신라의 文武王(문무왕)은 백제, 고구려 멸망에 이은 對唐 8년전쟁 때 남한산에 晝長城(주장성)을 쌓아 唐軍의 남하에 대처했다. 통일신라 이후 이 지역은 漢陽郡(한양군)이 되었다. 한양군은 신라 9주 중의 하나인 漢州(한주:廣州) 소속으로서 지금의 양주와 고양을 領縣(영현)으로 삼았다.
 
  신라 말기 孝恭王(효공왕) 2년(898)에는 후고구려의 弓裔(궁예)가 漢州 관내 30여 성을 공략함에 따라 서울지역은 궁예에게 돌아갔다. 918년, 王建(왕건)이 궁예를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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