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時炯 신경정신과 의사
⊙ 1934년 출생. 경북대 의대 졸업. 미국 예일대 후박사과정.
⊙ 경북대학·서울대(외래)·성균관대 교수, 강북삼성병원 원장, 사회정신건강연구소 소장 역임.
⊙ 1934년 출생. 경북대 의대 졸업. 미국 예일대 후박사과정.
⊙ 경북대학·서울대(외래)·성균관대 교수, 강북삼성병원 원장, 사회정신건강연구소 소장 역임.
6·25 당시 나는 대구 경북중 4학년(고 1)이었다. 아버지가 경북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어 우리 집은 대구 시내 삼덕동에 있었지만, 원래 고향 마을은 동촌비행장 부근이었다. 인민군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 내려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리 식구도 피란 계획을 세웠다. 당시 어른들은 전쟁이 나면 일단 도시를 벗어나야 한다고 알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미군의 공습에 대비해 소개(疏開) 훈련을 했던 영향이 남아 있었던 같다.
우리 가족은 두 패로 나뉘어 피란을 떠났다. 나와 동생은 막내 고모가 있는 영천 부근으로 갔고, 할아버지를 포함한 다른 가족은 진외가(아버지의 외가)가 있는 성주 쪽으로 몸을 피했다. 아버지는 일단 대구에 남았다.
나는 금호강변 고모 집 과수원의 원두막에서 피란 생활을 했다. 과수원 위로 날마다 공중 삐라가 새카맣게 떨어졌다. 맥아더 사령부가 대한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유엔군이 참전하기로 했으니 한국 국민은 생업에 종사하라’는 내용이었다. 삐라의 한쪽에는 영어가, 다른 쪽에는 한글이 인쇄되어 있었는데, 할 일이 없던 나는 거기 쓰인 영문을 하도 읽어서 달달 외웠다. 나중에 거기 적힌 내용이 대학교 입학시험 영어 문제로 나와 나는 ‘공짜’로 20점을 땄으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면서 인민군이 포항으로 밀고 들어오자 고모는 “위험하니까 빨리 대구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고모 집을 떠나 다시 대구 집으로 가는데 가두 모병을 하는 방위군에 잡혔다. 나는 지금은 키가 훤칠하지만, 당시엔 정말 작았다. 징집 연령도 아닌 데다가, 군인으로 가기에는 누가 봐도 키가 너무 작았기 때문에 현역병 징집 대상은 아닌 것 같았고, 아무래도 탄약이나 물자를 나르는 노무대로 편성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6대 종손인 형, 자원해 학도병으로 입대
가두 모병에 잡힌 사람들은 영천역 옆 창고에서 밤을 보냈다. 저 멀리서 총소리가 들리더니 급기야 총알이 우리가 머물고 있던 창고의 양철 지붕을 핑핑 소리를 내며 뚫고 들어왔다. 이른바 영천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무서웠고, 전쟁터로 가는 마당에 부모님께 무슨 인사라도 하고 집을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그 길로 그냥 집으로 와 버렸다. 서류에 등록된 것도 아니고, 감시가 심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곳을 빠져나오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다.
내가 집에 도착한 다음 날 성주로 피란 갔던 식구들도 돌아왔다. 우리 집이 있던 대구는 전쟁 내내 적이 접근하지 못한 곳이다. 결국 집이 가장 안전한 것을 모르고 우리 가족은 도리어 적이 내려오는 길목으로 갔으니 전쟁을 맞으러 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을 한 것이다. 집에 오니까 큰형(李暾炯)이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너의 형이 군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형은 전쟁이 나자 아버지와 어떻게 할 것인지 상의를 했는데, 아버지가 “너도 가야 안되겠느냐”고 했다. 형은 그 길로 곧바로 자원입대를 했다고 한다.
형이 군에 간 사실을 알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아들을 군에 보내면서 어떻게 어미 허락도 없이 보내느냐! 당장 아이를 찾아오라”고 화를 냈다. 우리 어머니는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여필종부(女必從夫)의 교과서 같은 분이셨다.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화를 내며 덤벼드는 것을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다.
형은 나보다 세 살이 많았고, 당시 경북중 6학년(고3)에 재학 중이었다. 낙동강 전선이 위험해지면서 학생 신분으로 지원입대한 이른바 학도병 1기인 셈이다. 형은 나하고 세 살 차이가 났지만, 키가 워낙 작아 국민학교 진학이 1년 늦어져서 학년으로는 2년 차이였다.
형은 경북고 32회였는데 역시 학도병으로 입대했던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이 형의 동창이다. 우리 형제는 7남매, 내가 둘째다.
형은 6대 종손(宗孫)인 데다가 공부를 잘해서 집안의 기둥과 같은 귀한 존재였다. 이런 형이 군에 간 후 몇 개월 동안 소식이 없으니 부모님의 걱정이 말이 아니었다. 당시 대구와 그 인근이 전후방으로 오가는 군인들의 집결 장소였기 때문에 나는 형의 소식을 듣기 위해 수없이 군부대를 찾아다녔다.
전쟁으로 아버지가 교편을 놓으시자 우리 7남매는 그야말로 생존의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어머니와 우리 형제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시장에 나가 고구마, 아이스케키, 만년필, 양말 장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그러다가 형이 진해 포병학교에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서둘러 진해로 출발했다. 지리를 잘 몰라 대구에서 진해로 가려면 부산을 꼭 거쳐야만 하는 줄 알고 먼저 부산을 향해 길을 떠났다. 부산 인근에 있는 구포 다리를 건너다 가두 모병에 잡혔다. 영천에 이어 두 번째였다.
나는 징집 대상자가 아닌 데다 키가 작아 대구에서 생활할 때는 한 번도 가두 모병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오랜만에 소식을 들은 형을 만나러 가는 길에 잡히고 보니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가두 모병에 걸린 일행은 구포다리 밑에서 밤을 새웠는데, 나는 강을 건너서 그냥 가던 길을 계속 가 진해에서 형님을 만날 수 있었다.
1950년 8월 학도병으로 지원한 형은 이후 대구 포병사령부에 배속됐다. 당시 학도병으로 지원한 형의 동창생 대부분이 전사한 것을 보면 형이 포병으로 간 것은 억세게 운이 좋았던 것이다. 이후 형은 포병 간부후보생으로 지원했고 장교가 되었다. 전쟁 기간 내내 포대장을 하다가 종전(終戰)을 맞았고, 이후 ROTC 교관을 오래했으며, 1960년대 중반 대위로 예편했다.
참전했던 형, “내 죽으면 화장해 미국과 선산, 백마고지에 뿌려 달라”
형은 군에 있으면서 조선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는데 제대 후 KAIST(한국과학기술원)가 창설되면서 그곳의 행정직원으로 들어갔다. 당시는 군을 제대한 장교를 우대하던 분위기였다. 이후 형은 우리나라에서는 이름도 생소하던 ‘컴퓨터’라는 신학문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일본의 도시바사(社)에서 운영하는 컴퓨터 학교에 다녔다. 이어 다시 미국 미네소타 주에 있는 IBM 컴퓨터 학교로 유학을 갔고, 그 후로는 미국의 큰 건설회사에 취직하여 미국 시민으로 살다가 2004년 세상을 떠났다.
형은 대단한 애국자이면서 철두철미한 정의파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문경에서 교사생활을 할 때 우리 가족도 문경에 2년간 머물렀는데 그때 형의 담임선생님이 바로 박 대통령이었다. 그런데도 형은 군이 정치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형이 유학 후 귀국을 하지 않은 것은 박정희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이 싫었던 것도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형이 생전에 대구에 있는 선산에 성묘를 나왔을 때다. 성묘를 마친 후 내가 “형님은 종손이니까 돌아가시면 이곳 선산에 묻혀야 한다”고 하자 형은 “내가 선산에 묻힌들 미국에 있는 자식들이 찾아오겠느냐”고 말했다. 내가 다시 “그러면 미국에 묻히려고요?”하고 묻자 형은 역정을 버럭 내며 “무슨 소리! 어떻게 지킨 조국인데. 화장해서 미국과 선산, 백마고지 등에 한 줌씩 뿌려라”하고 말했다.
이후 형이 한국에 또 한 번 나왔을 때 느닷없이 포천에 있는 ‘일동’이라는 곳에 가자고 했다. 그곳은 1950년 12월 31일 형이 속한 포병대가 중공군 포위에 거의 전멸당한 곳. 형은 당시 포병대가 주둔했던 학교 운동장에 가더니 한참을 왔다갔다하면서 “잘가라”고 중얼거렸다. 마치 학교 운동장을 전우들의 무덤인 양 발로 천천히 쓰다듬으면서 먼저 떠난 전우의 명복을 빌고 있었던 것이다.
형의 포대는 6·25 당시 일동에 있는 이곳 학교 운동장에 포를 배치해 놓고, 밀려오는 중공군을 향해 포격하고 있었다. 형은 포대 작전과에 속해 있어 포가 늘어선 진지와는 약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포 사격 거리가 점점 좁혀지더니 결국 대포로는 더는 대응할 수 없는 위치까지 중공군이 밀려왔다. 그와 동시에 형의 포병대는 수많은 중공군에 포위됐다. 적군이 포진지를 공격하는 동안 작전과에 있던 소수의 병력은 포위망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때 전투로 국군의 포천~의정부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한 많은 1·4 후퇴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상념에 잠겨 있던 형에게 “여기도 유골 한 줌 뿌려야겠네요”라고 농담을 건네자 형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야, 유골이 한 트럭은 있어야겠다. 그래 여기도 뿌려라. 구천에 원혼이 되어 떠돌아다니는 전우들과 못다 한 이야기나 하며 지내련다”.
형은 돌아갈 무렵 자신이 겪은 6·25 이야기를 수기로 쓰고 있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수기를 마무리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지막 부분은 내가 내용을 추가해서 출간했다. 형이 선산에서 나에게 유언을 하며 내뱉었던 “어떻게 지킨 조국인데”가 책 제목이다.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취직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와야겠다. 전쟁이 나면서 나의 모교(母校)인 경북중학교엔 미 5공군 사령부가 주둔했다. 대신 우리는 현재의 동대구역 부근에 있던 기와 굽는 공장 안과 다리 밑 여기저기서 수업을 받았다.
나는 지금도 우리 정부가 전쟁 중에 학생들을 공부시킨 것이 바로 우리나라를 잿더미에서 일으킨 원동력이라고 믿고 있다. 여름방학이 끝나자 개학을 했으니 전쟁의 와중에 우리 정부의 배포가 놀랍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바로 산 넘어 대포소리를 들으면서 부서진 기왓장을 깔고 앉아 공부를 했다.
동촌비행장에 인접해 있던 우리 고향마을은 비행장 활주로 확장사업으로 사라졌다. 고향까지 잃은 우리 가족은 이제 기댈 데가 없었다. 하루 먹을 양식도 없는데 아버지도 앓아 누우셨다. 아버지는 가슴에 많은 한을 안고 사셨다.
할아버지는 일제 때 땅이 많은 부자였다고 한다. 작은삼촌이 와세다 대학을 다녔는데, 학생 신분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만주 하얼빈 감옥에 끌려갔다고 한다. 아마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힌 사람이 풀려난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하지만 작은삼촌은 풀려났다. 당시에 ‘변호사 말 한마디가 논 한 마지기’란 말이 있을 정도였는데, 할아버지는 작은삼촌을 감옥에서 꺼내기 위해 가산을 거의 탕진했다고 한다.
좌익활동 하던 삼촌은 감옥에서 총살당해
그 후 작은아버지는 대구에서 남로당(南勞黨) 활동을 하다가 전쟁이 나면서 소식이 두절됐다. 당시 대구의 지식층 대부분이 좌파 이념에 물들어 있었는데 삼촌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막내 삼촌도 좌익활동을 하다가 감옥에 있었는데 그분은 전쟁이 나면서 우리 정부가 감옥에 있는 좌익세력을 제거할 때 총살을 당했다.
아버지는 수재(秀才)라고 소문이 난 두 동생이 죽자 크게 상심했다. 또한 그 무렵 숙모도 갑자기 죽으면서 조카 두 명을 책임져야 했고, 우리 7남매도 먹여 살려야 했다. 집안에는 쌀 한 톨 나올 데 없이 가난한데 먹여 살려야 할 식구는 많았다. 거기에 전쟁이 나면서 종손인 형이 군에 가서 생사조차 모르게 되자 아버지는 화병이 나서 몸져 누운 것이다.
아버지가 눕자 나는 졸지에 13가족의 가장이 되었다. 더는 길거리 장사로는 먹고살 길이 없었다. 운 좋게 대구 앞산 아래 미군부대(캠프 헨리)의 ‘하우스보이’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우스보이 생활은 의과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3년가량 이어졌다. 그 사이 집안 형편이 좀 안정되고, 대학에 가서는 대구에서 제일 부잣집 과외선생을 했기 때문에 형편이 많이 나아졌다.
하우스보이는 부대 내의 세탁물을 수거하거나 여러 가지 잔심부름을 하는 것이다. 나중에는 미군이 잘 봐줘서 비행장에서 보초를 서는 스페셜가드(SG·초병)까지 ‘진급’을 했다.
‘꿀꿀이죽’ 기억 때문에 아직까지 부대찌개 먹지 않아
당시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음식 찌꺼기(잔반)를 ‘꿀꿀이죽’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을 실제로 먹는 것은 돼지가 아니라 바로 가난했던 우리 국민이었다. 꿀꿀이죽에는 고기가 제법 들어 있었기 때문에 미군부대 인근 시장에서 아주 인기 음식 중의 하나였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꿀꿀이죽도 한 그릇 사 먹을 형편이 되지 못했다.
문제는 이 꿀꿀이죽에 부대에서 버린 온갖 이물질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휴지나 담배꽁초 같은 것은 차라리 견딜 만했다. 하지만 이쑤시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컴컴한 시장골목에서 급하게 죽을 말아 먹다 보면 날카로운 이쑤시개가 입천장을 찌르기가 일쑤였다.
나는 어느 날 용기를 내서 부대의 군목(軍牧)을 찾아갔다. ‘압’이라는 소령이었다. 압 소령 앞에서 나는 짧은 영어로 군부대에서 나오는 음식 찌꺼기를 한국인들이 먹고 있으니, 제발 오물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압 소령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놀란 표정을 지으며 “너희가 진짜 그 음식 찌꺼기를 먹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압 소령은 “같이 한번 가서 보자”고 했다.
나는 괜한 이야기를 꺼내서 앞으로 ‘음식 찌꺼기 반출을 금지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이 꿀꿀이죽이라도 있어서 그나마 많은 사람이 배를 곯지 않고 지내온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따라 시장에 온 압 소령은 꿀꿀이죽을 한 그릇 사서 먹기 시작했다. 죽을 먹는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말없이 한 그릇을 다 비운 압 소령이 이튿날 내가 있는 캠프를 찾아왔다. 압 소령은 “‘부대에서 나오는 음식 찌꺼기를 한국인들이 먹고 있으니 앞으로는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공문을 전 미군 부대에 보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 다음 날부터 음식물 쓰레기를 담았던 녹슨 철제 통이 깨끗한 통으로 바뀌었고, 음식 찌꺼기 안에 이물질도 사라졌다. 압 소령은 나를 부대 내 교회 예배시각에 부르더니 교인에게 소개했다. 교인들이 손뼉을 치고, 압 소령이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내가 용기 있는 행동을 했다고 칭찬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꿀꿀이죽이 변하고 변해서 오늘날 ‘부대찌개’라는 음식으로 발전했다. 나는 하우스보이 하던 시절의 이런 아픈 기억 때문에 지금도 부대찌개를 먹지 않는다.
가난했던 학생이 정신과 의사가 되다
전쟁 후 나는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무슨 목적의식이나 사명감이 있어서 의사가 되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 친구들이 “의사가 되면 군대 징집이 보류된다”고 한 것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고, 또 의사가 되면 적어도 배는 안 고플 것이란 단순한 생각에서 의대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꿈이나 진로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다행히 나는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의대 진학엔 별문제가 없었다. 우리 집안이 교육자 집안이라 나는 의대에 갔으면서도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교수가 되어야 한다는 어떤 막연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미국에 유학할 대학은 예일대나 하버드 대학으로 한정했다. 이 두 대학을 목표로 한 데는 사연이 있다. 하우스보이 시절 어느 겨울 밤에 비행장 보초를 서는데 너무 추웠다. 나는 찬바람을 피하려고 비행기 유도등이 설치된 박스 안에 들어갔는데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 후 미군 순찰 하사관이 잠든 나를 발견하고 들고 있던 지휘봉으로 등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물론 그 순찰 하사관이 무슨 나쁜 의도를 가지고 때린 것이 아니라, 잠을 깨우려고 그렇게 한 것이었다. 보초병이 자리를 이탈하고 그것도 잠을 자고 있었으니 엄격하게 말하자면 총살을 시켜도 할 말이 없다.
당시에 내복을 입을 형편이 안 되어 맨살 위에 작업복 하나 입고 있는데 그 위를 회초리로 맞으니까 어찌나 아프던지 눈물이 났다. 이 이야기를 집에 돌아와 친척 형에게 하자 친척 형은 “미국을 이기고, 네가 당한 설움을 갚으려면 미국에서 제일 좋은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에서 제일 좋은 학교는 예일대와 하버드대”라고 말했다.
이때 한 친척 형의 말이 대학 생활 내내 머릿속에 박혀 있었던지 나는 언젠가 유학을 가면 반드시 예일이나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졸업 후 군의관까지 마친 후 정말로 예일대에 합격하여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예일대에서 당시로서는 국내에서 생소하던 사회정신의학을 전공했다.
전쟁은 어린 나와 우리 가족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하지만 그런 현실적인 고난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풍요로움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님을 알았으면 한다. 국가도 가난과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결코 삶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자식들을 훌륭하게 길러낸 기성세대의 인간 드라마를 후대에 잘 교육했으면 한다.⊙
<정리= 李相欣 月刊朝鮮 기자>
우리 가족은 두 패로 나뉘어 피란을 떠났다. 나와 동생은 막내 고모가 있는 영천 부근으로 갔고, 할아버지를 포함한 다른 가족은 진외가(아버지의 외가)가 있는 성주 쪽으로 몸을 피했다. 아버지는 일단 대구에 남았다.
나는 금호강변 고모 집 과수원의 원두막에서 피란 생활을 했다. 과수원 위로 날마다 공중 삐라가 새카맣게 떨어졌다. 맥아더 사령부가 대한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유엔군이 참전하기로 했으니 한국 국민은 생업에 종사하라’는 내용이었다. 삐라의 한쪽에는 영어가, 다른 쪽에는 한글이 인쇄되어 있었는데, 할 일이 없던 나는 거기 쓰인 영문을 하도 읽어서 달달 외웠다. 나중에 거기 적힌 내용이 대학교 입학시험 영어 문제로 나와 나는 ‘공짜’로 20점을 땄으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면서 인민군이 포항으로 밀고 들어오자 고모는 “위험하니까 빨리 대구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고모 집을 떠나 다시 대구 집으로 가는데 가두 모병을 하는 방위군에 잡혔다. 나는 지금은 키가 훤칠하지만, 당시엔 정말 작았다. 징집 연령도 아닌 데다가, 군인으로 가기에는 누가 봐도 키가 너무 작았기 때문에 현역병 징집 대상은 아닌 것 같았고, 아무래도 탄약이나 물자를 나르는 노무대로 편성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6대 종손인 형, 자원해 학도병으로 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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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야전포 중의 하나인 280mm 평사포 앞에 선 이시형 박사의 형 이돈형씨(전후 사진). |
내가 집에 도착한 다음 날 성주로 피란 갔던 식구들도 돌아왔다. 우리 집이 있던 대구는 전쟁 내내 적이 접근하지 못한 곳이다. 결국 집이 가장 안전한 것을 모르고 우리 가족은 도리어 적이 내려오는 길목으로 갔으니 전쟁을 맞으러 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을 한 것이다. 집에 오니까 큰형(李暾炯)이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너의 형이 군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형은 전쟁이 나자 아버지와 어떻게 할 것인지 상의를 했는데, 아버지가 “너도 가야 안되겠느냐”고 했다. 형은 그 길로 곧바로 자원입대를 했다고 한다.
형이 군에 간 사실을 알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아들을 군에 보내면서 어떻게 어미 허락도 없이 보내느냐! 당장 아이를 찾아오라”고 화를 냈다. 우리 어머니는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여필종부(女必從夫)의 교과서 같은 분이셨다.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화를 내며 덤벼드는 것을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다.
형은 나보다 세 살이 많았고, 당시 경북중 6학년(고3)에 재학 중이었다. 낙동강 전선이 위험해지면서 학생 신분으로 지원입대한 이른바 학도병 1기인 셈이다. 형은 나하고 세 살 차이가 났지만, 키가 워낙 작아 국민학교 진학이 1년 늦어져서 학년으로는 2년 차이였다.
형은 경북고 32회였는데 역시 학도병으로 입대했던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이 형의 동창이다. 우리 형제는 7남매, 내가 둘째다.
형은 6대 종손(宗孫)인 데다가 공부를 잘해서 집안의 기둥과 같은 귀한 존재였다. 이런 형이 군에 간 후 몇 개월 동안 소식이 없으니 부모님의 걱정이 말이 아니었다. 당시 대구와 그 인근이 전후방으로 오가는 군인들의 집결 장소였기 때문에 나는 형의 소식을 듣기 위해 수없이 군부대를 찾아다녔다.
전쟁으로 아버지가 교편을 놓으시자 우리 7남매는 그야말로 생존의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어머니와 우리 형제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시장에 나가 고구마, 아이스케키, 만년필, 양말 장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그러다가 형이 진해 포병학교에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서둘러 진해로 출발했다. 지리를 잘 몰라 대구에서 진해로 가려면 부산을 꼭 거쳐야만 하는 줄 알고 먼저 부산을 향해 길을 떠났다. 부산 인근에 있는 구포 다리를 건너다 가두 모병에 잡혔다. 영천에 이어 두 번째였다.
나는 징집 대상자가 아닌 데다 키가 작아 대구에서 생활할 때는 한 번도 가두 모병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오랜만에 소식을 들은 형을 만나러 가는 길에 잡히고 보니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가두 모병에 걸린 일행은 구포다리 밑에서 밤을 새웠는데, 나는 강을 건너서 그냥 가던 길을 계속 가 진해에서 형님을 만날 수 있었다.
1950년 8월 학도병으로 지원한 형은 이후 대구 포병사령부에 배속됐다. 당시 학도병으로 지원한 형의 동창생 대부분이 전사한 것을 보면 형이 포병으로 간 것은 억세게 운이 좋았던 것이다. 이후 형은 포병 간부후보생으로 지원했고 장교가 되었다. 전쟁 기간 내내 포대장을 하다가 종전(終戰)을 맞았고, 이후 ROTC 교관을 오래했으며, 1960년대 중반 대위로 예편했다.
참전했던 형, “내 죽으면 화장해 미국과 선산, 백마고지에 뿌려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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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 포병대의 전투모습. 미군에게서 인수한 105mm 곡사포가 우리 포병대의 주력이었다. |
형은 대단한 애국자이면서 철두철미한 정의파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문경에서 교사생활을 할 때 우리 가족도 문경에 2년간 머물렀는데 그때 형의 담임선생님이 바로 박 대통령이었다. 그런데도 형은 군이 정치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형이 유학 후 귀국을 하지 않은 것은 박정희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이 싫었던 것도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형이 생전에 대구에 있는 선산에 성묘를 나왔을 때다. 성묘를 마친 후 내가 “형님은 종손이니까 돌아가시면 이곳 선산에 묻혀야 한다”고 하자 형은 “내가 선산에 묻힌들 미국에 있는 자식들이 찾아오겠느냐”고 말했다. 내가 다시 “그러면 미국에 묻히려고요?”하고 묻자 형은 역정을 버럭 내며 “무슨 소리! 어떻게 지킨 조국인데. 화장해서 미국과 선산, 백마고지 등에 한 줌씩 뿌려라”하고 말했다.
이후 형이 한국에 또 한 번 나왔을 때 느닷없이 포천에 있는 ‘일동’이라는 곳에 가자고 했다. 그곳은 1950년 12월 31일 형이 속한 포병대가 중공군 포위에 거의 전멸당한 곳. 형은 당시 포병대가 주둔했던 학교 운동장에 가더니 한참을 왔다갔다하면서 “잘가라”고 중얼거렸다. 마치 학교 운동장을 전우들의 무덤인 양 발로 천천히 쓰다듬으면서 먼저 떠난 전우의 명복을 빌고 있었던 것이다.
형의 포대는 6·25 당시 일동에 있는 이곳 학교 운동장에 포를 배치해 놓고, 밀려오는 중공군을 향해 포격하고 있었다. 형은 포대 작전과에 속해 있어 포가 늘어선 진지와는 약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포 사격 거리가 점점 좁혀지더니 결국 대포로는 더는 대응할 수 없는 위치까지 중공군이 밀려왔다. 그와 동시에 형의 포병대는 수많은 중공군에 포위됐다. 적군이 포진지를 공격하는 동안 작전과에 있던 소수의 병력은 포위망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때 전투로 국군의 포천~의정부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한 많은 1·4 후퇴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상념에 잠겨 있던 형에게 “여기도 유골 한 줌 뿌려야겠네요”라고 농담을 건네자 형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야, 유골이 한 트럭은 있어야겠다. 그래 여기도 뿌려라. 구천에 원혼이 되어 떠돌아다니는 전우들과 못다 한 이야기나 하며 지내련다”.
형은 돌아갈 무렵 자신이 겪은 6·25 이야기를 수기로 쓰고 있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수기를 마무리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지막 부분은 내가 내용을 추가해서 출간했다. 형이 선산에서 나에게 유언을 하며 내뱉었던 “어떻게 지킨 조국인데”가 책 제목이다.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취직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와야겠다. 전쟁이 나면서 나의 모교(母校)인 경북중학교엔 미 5공군 사령부가 주둔했다. 대신 우리는 현재의 동대구역 부근에 있던 기와 굽는 공장 안과 다리 밑 여기저기서 수업을 받았다.
나는 지금도 우리 정부가 전쟁 중에 학생들을 공부시킨 것이 바로 우리나라를 잿더미에서 일으킨 원동력이라고 믿고 있다. 여름방학이 끝나자 개학을 했으니 전쟁의 와중에 우리 정부의 배포가 놀랍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바로 산 넘어 대포소리를 들으면서 부서진 기왓장을 깔고 앉아 공부를 했다.
동촌비행장에 인접해 있던 우리 고향마을은 비행장 활주로 확장사업으로 사라졌다. 고향까지 잃은 우리 가족은 이제 기댈 데가 없었다. 하루 먹을 양식도 없는데 아버지도 앓아 누우셨다. 아버지는 가슴에 많은 한을 안고 사셨다.
할아버지는 일제 때 땅이 많은 부자였다고 한다. 작은삼촌이 와세다 대학을 다녔는데, 학생 신분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만주 하얼빈 감옥에 끌려갔다고 한다. 아마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힌 사람이 풀려난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하지만 작은삼촌은 풀려났다. 당시에 ‘변호사 말 한마디가 논 한 마지기’란 말이 있을 정도였는데, 할아버지는 작은삼촌을 감옥에서 꺼내기 위해 가산을 거의 탕진했다고 한다.
그 후 작은아버지는 대구에서 남로당(南勞黨) 활동을 하다가 전쟁이 나면서 소식이 두절됐다. 당시 대구의 지식층 대부분이 좌파 이념에 물들어 있었는데 삼촌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막내 삼촌도 좌익활동을 하다가 감옥에 있었는데 그분은 전쟁이 나면서 우리 정부가 감옥에 있는 좌익세력을 제거할 때 총살을 당했다.
아버지는 수재(秀才)라고 소문이 난 두 동생이 죽자 크게 상심했다. 또한 그 무렵 숙모도 갑자기 죽으면서 조카 두 명을 책임져야 했고, 우리 7남매도 먹여 살려야 했다. 집안에는 쌀 한 톨 나올 데 없이 가난한데 먹여 살려야 할 식구는 많았다. 거기에 전쟁이 나면서 종손인 형이 군에 가서 생사조차 모르게 되자 아버지는 화병이 나서 몸져 누운 것이다.
아버지가 눕자 나는 졸지에 13가족의 가장이 되었다. 더는 길거리 장사로는 먹고살 길이 없었다. 운 좋게 대구 앞산 아래 미군부대(캠프 헨리)의 ‘하우스보이’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우스보이 생활은 의과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3년가량 이어졌다. 그 사이 집안 형편이 좀 안정되고, 대학에 가서는 대구에서 제일 부잣집 과외선생을 했기 때문에 형편이 많이 나아졌다.
하우스보이는 부대 내의 세탁물을 수거하거나 여러 가지 잔심부름을 하는 것이다. 나중에는 미군이 잘 봐줘서 비행장에서 보초를 서는 스페셜가드(SG·초병)까지 ‘진급’을 했다.
‘꿀꿀이죽’ 기억 때문에 아직까지 부대찌개 먹지 않아
당시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음식 찌꺼기(잔반)를 ‘꿀꿀이죽’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을 실제로 먹는 것은 돼지가 아니라 바로 가난했던 우리 국민이었다. 꿀꿀이죽에는 고기가 제법 들어 있었기 때문에 미군부대 인근 시장에서 아주 인기 음식 중의 하나였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꿀꿀이죽도 한 그릇 사 먹을 형편이 되지 못했다.
문제는 이 꿀꿀이죽에 부대에서 버린 온갖 이물질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휴지나 담배꽁초 같은 것은 차라리 견딜 만했다. 하지만 이쑤시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컴컴한 시장골목에서 급하게 죽을 말아 먹다 보면 날카로운 이쑤시개가 입천장을 찌르기가 일쑤였다.
나는 어느 날 용기를 내서 부대의 군목(軍牧)을 찾아갔다. ‘압’이라는 소령이었다. 압 소령 앞에서 나는 짧은 영어로 군부대에서 나오는 음식 찌꺼기를 한국인들이 먹고 있으니, 제발 오물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압 소령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놀란 표정을 지으며 “너희가 진짜 그 음식 찌꺼기를 먹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압 소령은 “같이 한번 가서 보자”고 했다.
나는 괜한 이야기를 꺼내서 앞으로 ‘음식 찌꺼기 반출을 금지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이 꿀꿀이죽이라도 있어서 그나마 많은 사람이 배를 곯지 않고 지내온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따라 시장에 온 압 소령은 꿀꿀이죽을 한 그릇 사서 먹기 시작했다. 죽을 먹는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말없이 한 그릇을 다 비운 압 소령이 이튿날 내가 있는 캠프를 찾아왔다. 압 소령은 “‘부대에서 나오는 음식 찌꺼기를 한국인들이 먹고 있으니 앞으로는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공문을 전 미군 부대에 보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 다음 날부터 음식물 쓰레기를 담았던 녹슨 철제 통이 깨끗한 통으로 바뀌었고, 음식 찌꺼기 안에 이물질도 사라졌다. 압 소령은 나를 부대 내 교회 예배시각에 부르더니 교인에게 소개했다. 교인들이 손뼉을 치고, 압 소령이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내가 용기 있는 행동을 했다고 칭찬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꿀꿀이죽이 변하고 변해서 오늘날 ‘부대찌개’라는 음식으로 발전했다. 나는 하우스보이 하던 시절의 이런 아픈 기억 때문에 지금도 부대찌개를 먹지 않는다.
전쟁 후 나는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무슨 목적의식이나 사명감이 있어서 의사가 되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 친구들이 “의사가 되면 군대 징집이 보류된다”고 한 것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고, 또 의사가 되면 적어도 배는 안 고플 것이란 단순한 생각에서 의대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꿈이나 진로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다행히 나는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의대 진학엔 별문제가 없었다. 우리 집안이 교육자 집안이라 나는 의대에 갔으면서도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교수가 되어야 한다는 어떤 막연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미국에 유학할 대학은 예일대나 하버드 대학으로 한정했다. 이 두 대학을 목표로 한 데는 사연이 있다. 하우스보이 시절 어느 겨울 밤에 비행장 보초를 서는데 너무 추웠다. 나는 찬바람을 피하려고 비행기 유도등이 설치된 박스 안에 들어갔는데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 후 미군 순찰 하사관이 잠든 나를 발견하고 들고 있던 지휘봉으로 등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물론 그 순찰 하사관이 무슨 나쁜 의도를 가지고 때린 것이 아니라, 잠을 깨우려고 그렇게 한 것이었다. 보초병이 자리를 이탈하고 그것도 잠을 자고 있었으니 엄격하게 말하자면 총살을 시켜도 할 말이 없다.
당시에 내복을 입을 형편이 안 되어 맨살 위에 작업복 하나 입고 있는데 그 위를 회초리로 맞으니까 어찌나 아프던지 눈물이 났다. 이 이야기를 집에 돌아와 친척 형에게 하자 친척 형은 “미국을 이기고, 네가 당한 설움을 갚으려면 미국에서 제일 좋은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에서 제일 좋은 학교는 예일대와 하버드대”라고 말했다.
이때 한 친척 형의 말이 대학 생활 내내 머릿속에 박혀 있었던지 나는 언젠가 유학을 가면 반드시 예일이나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졸업 후 군의관까지 마친 후 정말로 예일대에 합격하여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예일대에서 당시로서는 국내에서 생소하던 사회정신의학을 전공했다.
전쟁은 어린 나와 우리 가족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하지만 그런 현실적인 고난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풍요로움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님을 알았으면 한다. 국가도 가난과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결코 삶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자식들을 훌륭하게 길러낸 기성세대의 인간 드라마를 후대에 잘 교육했으면 한다.⊙
<정리= 李相欣 月刊朝鮮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