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발굴

일제강점기 조선땅에 온 碧眼의 선각자들 ⑫ 문화유산으로 남은 선교사의 건축물들

  • 글 : 양국주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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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기술자 徐路得, 이화여대 본관 건축… 그의 건축물, 대부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재
⊙ 基督敎書會, 전주 리차드슨홀, 6·25전쟁의 참화 속에 잿더미로 변해
⊙ 감리교, 선교사들 위해 온정리에 휴양시설 건설… 분단으로 彼岸의 향수 불러일으켜
⊙ 지리산 노고단의 휴양지, 펄 벅 여사의 선교사 父母도 피신
⊙ ‘한국판 슈바이처’ 카딩턴의 왕시루봉 遺宅 문제… 기독교와 불교 아름다운 同行해야

梁國柱
⊙ 67세. 연세대 철학과 졸업. 연세대 대학원 경영학과 석사.
⊙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회장, 한국학생연합회 의장, 이스라엘문화원장 역임.
⊙ 1987년 워싱턴으로 이주. 現 미국 버지니아주 소재 NGO단체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한국 내 사단법인 ‘서빙더피플’ 상임이사.
⊙ 저서: 《이스라엘 역사적 조명》 《조선교회사》 《제국의 무덤-아프간》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 외 다수.
스와인하트(서로득) 선교사.
장안에 내로라하는 140명의 거물급 인사들이 최고의 기생집 명월관(明月館)에 모였다. 당시 이화여전(梨花女專)의 본관 건물을 짓기 위해 미국으로 모금을 떠나던 마틴 루터 스와인하트(M. L. Swinehart, 한국명 徐路得)를 환송하기 위해서다. 1935년 9월 20일의 일이다.
 
  서로득은 1911년에 내한한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주로 광주에서 일했던 분이다. 당시의 보도대로라면, 서로득은 이화여전을 위해 100만 달러를 모금해야만 했다. 100만 달러의 거금이 걸린 중요한 행사이다 보니 선교사들과 유지(有志)들이 모여 그를 위해 한턱을 내도 부족함이 없을 일이다. 더욱이 소속이 다른 남장로회 선교사가 감리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이화학당의 본관 건물과 교수 사택 건립을 위해 미국으로 모금까지 나선 것은 극히 이례적 사건에 속하는 일이다.
 
  이처럼 당시 장로회와 감리회는 서로 필요하면 연합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연합사업이 세브란스와 연희전문학교다. 그래서 이들의 명칭 앞에는 항상 세브란스연합 병원과 연희전문 연합학교라는 간판이 붙어다녔다. 다만 이화학당은 감리교가 독자적으로 운영해 왔던 터라 남장로회 선교사가 감리회의 건물 공사 감독을 맡는 일은 고사하고 건축자금 모금까지 한다는 것 자체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서로득 선교사는 1911년에 건축전문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되었다. 그는 1937년에 은퇴할 때까지 26년간 광주에 머물며 실로 다양한 일들을 했다. 부인 로이스는 문학가로 저술가로 활동했으며, 한국의 어린이들과 이름 없는 여인네들을 문학작품 등으로 알리는 데 큰일을 했다.
 
  특히 이들 부부는 광주 인근 시골 마을 소태동과 화순 등지에 어린이 주일학교를 열면서 한국에서 기독교 주일학교 운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주중(週中)에 배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한 배영(培英)학교를 운영, 가난하고 배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건축기술자 徐路得의 흔적들
 
1915년 서로득이 순천에 세웠던 알렉산더 병원.
  건축 기술자로서 서로득이 남긴 공헌은 아직도 한국의 구석구석에 건축사적 흔적으로 남아 있다. 지금의 이화여대 본관 건물은 그의 대표작이면서 그가 이 땅에 남긴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1927년에 완공시킨 광주 수피아 여고의 윈스보로홀(Winsborouch hall)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기도 하다. 이 건물은 한국 최초로 난방시설이 되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가 지은 건축물 가운데 서울 종로거리에 기독교서회(基督敎書會) 건물과 전주 신흥학교의 리차드슨홀은 6·25전쟁의 참화 속에 잿더미로 변했다. 순천 선교부에는 초현대식으로 알렉산더 병원을 세우도록 기금을 보내주었다. 이는 1902년, 단지 한 달 동안 군산에 머물며 의료 선교사로 일했던 닥터 알렉산더가 1929년에 53세의 일기로 사망하자 부인 케이트가 남편을 기념하여 추모병원으로 확장하게 되었고 6개월의 공사기간에 걸쳐 지었다.
 
  이처럼 서로득이 지은 대부분의 건물은 근대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의 건축물 대부분이 근대 유산 문화재로 등록된 까닭이 있다. 그의 건축물은 역사적으로 오래된 이유 말고도 그가 추구한 건축 양식, 즉 고딕 양식으로 주로 벽돌을 이용하면서도 돌림띠 장식과 아치형 창문, 지붕의 도머(dormer)창 등의 모습이 공통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오웬기념관, 순천 매산학교 매산관과 왓츠 기념관에도 그의 독특한 건축 특징을 남겨놓았다. 당시 이러한 대형 건축물 이외에도 선교사들의 생활관 100여 채를 남겨놓았다.
 
  서로득은 건축물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중국에서 건축 기술자들을 데려오기도 했다. 당시 조선은 이러한 서양식 건물을 지을 만한 석공(石工)이나 경험 있는 노동자들을 구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반면에 일찍이 서양으로부터 강제로 조차(租借)되었거나 식민지화된 중국의 상해나 천진, 산동 지역에는 서양식 건물을 지어본 경험이 있는 기술자들이 많았다.
 
  조차지란 중국의 개항지에서 외국인이 행정·경찰·사법 등을 관할하는 지역으로, 1845년 상해에서 영국이 처음으로 설정하면서 시작되었다. 특히 상해 조차지는 태평천국운동 시기로부터 가장 안전한 지역이어서 외국자본이 집중되어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런 조차지는 청일전쟁 이후 증가하여, 영·일·러·독·오스트리아·이탈리아·벨기에 등 각국이 전 중국의 28개 지역에 조차지를 가질 만큼 양적으로 확대되었다.
 
  당연히 외국에서 직접투자를 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서구 국가들은 무역업과 금융업에 투자하면서 직접 생산에도 뛰어들면서 중국에 대한 경제적 지배를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조선 시대에 이미 숙련된 서양식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상당수의 중국인 건축 기술자들이 조선으로 옮겨 살았던 셈이다. 1925년 무렵, 서양식 건축물의 수요가 많았던 전주나 광주 지역에는 이러한 중국 기술자들이 500명씩 모여 살았고, 이들을 위한 별도의 전도대(傳道隊)가 운영되기도 했다.
 
 
  高宗의 샌드위치를 만든 선교사들
 
  1983년까지 100년 동안 약 2500명에 달하는 벽안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머무르며 살았다. 그들은 부산에서부터 용정과 함흥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목포에서 정주와 공주를 거쳐 안동과 강계, 그리고 영변과 선천에 둥지를 틀고 조선인들과 삶을 함께했다.
 
  일본의 침략 야욕 때문에 시작된 노일전쟁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건양 1년(1896년) 2월 11일에 국왕의 거처를 궁궐로부터 정동(貞洞)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고종은 거처를 옮긴 당일, 내각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을 비롯하여, 김윤식(金允植), 유길준(兪吉濬), 어윤중(魚允中) 등 친일파를 면직하고, 체포하도록 명하였다. 이어 김병시(金炳始)를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하면서 내각 인사를 새롭게 하였다. 이날 김홍집과 정병하(鄭秉夏)가 백성들에게 살해되었고 유길준·조희연(趙羲淵)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두려움과 공포로 불면의 밤이 찾아왔다.
 
  명색이 외국인인 언더우드와 윌리엄 레이놀즈 선교사가 고종의 침실에서 권총을 든 채 불침번을 서야 했다. 조선에 갓 입국한 유진 벨 선교사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레이놀즈의 부인 패치 볼링은 고종 부부를 위해 매일 샌드위치를 만들어야 했다. 음식에 독(毒)을 탈 것을 염려한 고종을 지켜내려던 선교사들의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이처럼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정변(政變)과 전쟁보다 선교사들의 삶을 고단하고 지치게 만든 것은 질병과 주거 환경이었다. 병들고 아플 때 지친 몸을 보듬고 쉼을 얻을 공간마저 없었다. 더군다나 선교사 부인들은 해산할 때 마땅한 병원이 없어 북한산의 절간에서 몸을 풀어야 했다. 레이놀즈의 큰아들이 미숙아로 태어난 지 열흘 만에 숨을 거두었고, 사무엘 무어의 아들 역시 태어나자마자 숨을 거두었다. 부산에서 첫 사역을 시작했던 베어드 부부는 어린 딸 로즈를 잃었다.
 
  1892년, 7인의 남장로회 개척선교단이 미국을 떠나올 때 리니 데이비스 양은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도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산 자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헌신하기로 했던 다짐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윌리엄 전킨(전위렴)은 군산에서 사역하던 중 자녀 셋을 잃었고, 1908년 그가 전주에서 사역하다 죽자 그의 아내는 남편을 이미 묻힌 세 아이와 나란히 장사지냈다.
 
  1913년 4월, 코잇 선교사는 순천선교부를 열기 위해 새 집을 장만하고 식구들과 더불어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지낼 아름다운 꿈에 젖었을 때 하루건너 두 아이를 잃었다. 하루건너 목숨을 잃은 코잇의 어린 남매 토머스 우즈와 로베르타 세실의 나이는 두 살과 네 살이었다.
 
 
  맥켄지 선교사의 자살
 
1910년 선암사 사리탑에서의 선교사 일행.
  캐나다 선교사 윌리엄 존 맥켄지는 1893년에 조선에 당도하여 황해도 소래에서 언어훈련을 하며 자신이 살아갈 조선과 하나 되기 위한 고투를 벌였다. 초가집에서 김치를 먹어가며 온전한 조선인으로 자기 한목숨을 바친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내한 3년 만에 끝이 났다. 일사병과 장질부사로 힘든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끝에 그는 사냥총으로 자살을 하고 만다.
 
  〈6월 23일(토요일)… 잠을 잘 수도 없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너무 약해졌기 때문이다.
 
  오늘 오후에는 전신이 추워지는 것을 느꼈다. 옷과 더운 물주머니가 있어야겠다. 땀을 내야겠다. 조금은 나은 듯도 하다. 다만 죽음이 아니기를 바란다. 내가 한국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게 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내가 조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낮에는 뜨거운 햇볕 아래서 전도하고 밤이면 공기가 추워질 때까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몸이 심히 고통스러워 글을 쓰기가 너무 힘이 든다.(출처 www.kcm.kr)〉
 
  이런 선교사들의 고통스러운 일기를 대하는 것은 누군들 즐거울 수가 없을 것이다. 맥켄지 선교사의 죽음은 조선이라는 미지의 나라에 방아쇠를 당겼고, 조선에서 삶을 바치려는 선교사들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선교사들의 열악한 주거 환경과 생존을 위한 싸움에 미국의 후원자들이 돈을 보내었다. 복음을 위해 순직한 이들에게 감동 먹은 사람들이 그 뒤를 잇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갖는 역설에 속한다.
 
  미국 북장로교는 지금은 북한에 귀속된 장연군 구미포 해수욕장, 속칭 소래해변에 40여 채의 여름별장을 지었다. 1941년 12월, 진주만 폭격으로 일본이 미국과 적대국으로 뒤바뀌어 선교사들을 추방하기까지 소래해변은 선교사들의 사랑을 받았다. 언더우드와 올리버 에이비슨 등이 이곳에서 회갑연을 치렀고, 피곤한 육신을 달래는 위안처로 삼았다.
 
  감리교는 금강산 온정리, 원산해변에 선교사들의 휴양시설을 지었다. 그러나 이 시설 역시 광복 후, 1947년에 돌아온 선교사들에게는 돌아가지 못할 피안(彼岸)과 같이 금단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나마 지리산 자락에 지은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의 휴양시설이 이 땅에서 일군 저들의 피땀에 대한 쓸쓸한 증인으로 남는다.
 
  1892년 11월 3일, 제물포에서 밤새 모기들과 피나는 싸움을 하며 이튿날 용산 나루터에 내린 남장로회 선발대원들 역시 그들의 임지(任地)인 충청남도와 전라도로 들어가기 전 많은 것을 잃었다. 장흥 지역을 순회사역하다 돌림병으로 죽어가던 친구 오웬 의사를 살리기 위해 목포에서 밤을 새워 광주로 가던 포사이드가 영산포에서 만난 한센 여성을 살리기 위해 시간을 지체하였고, 그 사이에 오웬은 하늘나라로 긴 여행을 떠났다.
 
  조선 땅에 와서 가난하고 불쌍한 한센 영혼을 살리려 했던 와일리 포사이드 역시 장흡수부전증이라는 풍토병을 앓다 마흔네 살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모두가 조선을 귀히 여기고 이 땅의 사람들에게 몸도 마음도 주었던 사람들의 비극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조선에서 삶을 마감하면서 안타까워하거나 원통해 하지 않았다. 이 땅에 대한 사랑과 소원이 지극히 간절했기 때문이다.
 
 
  펄 벅 여사의 선교사 父母, 지리산 휴양지에 피신
 
  1923년 남장로회는 조선총독부로부터 허가를 얻어 지리산 노고단 지역에 캠프 그레이엄을 열고 그곳에 14동의 집을 지어 1926년 7월 완공한다. 이 시설은 앨런 그레이엄(Allen J. Graham)과 또 다른 그레이엄 부인의 후원으로 이뤄졌다. 머지않아 50여 채의 개인 주택과 강당도 지어졌다. 지리산 캠프는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이내 한국에 와 있던 선교사들의 사랑을 받았다.
 
  심지어는 의화단(義和團)사건 이후 서양인들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던 중국인들의 시위와 살해 위협에 중국에 주재하던 선교사들에게 피란처로도 활용됐다. 스스로 박진주(朴眞珠)라는 한국 이름도 지었던 펄 벅(Pearl Buck) 여사의 부모 역시 1910년대 전라도 광주에 숨을 곳을 찾아 머물기도 했다. 이처럼 전라도에 정착했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지리산 휴양터는 단순한 휴식 공간의 개념을 넘어 문화와 역사의 새로운 전승지(傳承地) 구실도 해주었다.
 
  건축은 문화와 삶을 가져다준다. 건축물은 단지 사람이 먹고 자는 삶의 공간만이 아니다. 지리산 노고단에 지어졌던 모든 건축물은 앞서 거론된 마틴 스와인하트 선교사의 걸작품들이다. 그들은 군산과 전주, 목포와 광양, 순천과 진도와 함평으로부터 이곳에 모여 지친 심신을 달랬고, 조선과 함께 나누는 사랑이야기로 밤을 지새웠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곳에는 우리나라에 스케이팅을 전수했던 윌리엄 레이놀즈가 산 정상에 나인 홀 골프장을 만들기도 하였다. 1929년에 지리산 정상에 지은 나인 홀 골프장은 아마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최정상의 골프장이었을 것이다.
 
  그는 1937년도에 은퇴하여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이곳에 머물며 현재 모든 기독교인이 읽고 있는 개역판 성경을 번역, 감수도 하였다. 그야말로 한 시대의 정신이 이곳 지리산에서 배양된 셈이다. 그런 점에서 지리산은 단순한 영산이 아니라 그곳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사실과 기여도에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이다. 종교의 영역도 아니고 단순한 자연보호의 차원도 아니다.
 
  요즈음 지리산 왕시루봉(높이 1212.1m)에 있는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주택을 ‘선교 유적’으로 보존하려는 기독교 단체와 불교계가 난상토론을 벌인 것을 보면, 상식과 왕시루봉 유적의 의미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초보적 수준에 불과하다. 왕시루봉 유적은 노고단(老姑壇, 높이 1507m) 선교사 유적이 6·25전쟁으로 폐허가 되자 남장로회 선교부가 당국의 허락을 얻어 노고단이 아닌 왕시루봉에 제2의 휴양시설을 건설한 곳이다.
 
  비록 세워진 지가 65년에 불과하지만 기왕에 세워진 노고단에 비해 하등의 차이점이 없다. 1920년대부터 가장 많은 한센병자를 돌본 이들은 광복을 전후하여 소록도와 여수 애양원의 한센병자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치유책을 제공하였다. 더욱이 광복 이후부터 가난과 빈곤으로부터 대물림된 결핵은 국가적 고통으로 떠올랐다.
 
 
  왕시루봉의 카딩턴 遺宅
 
왕시루봉의 카딩턴 유택. 결핵퇴치 사업에 전력한 그가 노르웨이 출신 부인 페이지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지어준 통나무집이다.
  1908년에 시작된 광주 제중원은 기독병원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결핵 퇴치사업을 광복 후 최대 의료사역으로 전개하였다. 이 중심에는 1949년에 입국한 허버트 카딩턴(Herbert A. Codington. Jr) 선교사가 있다.
 
  그는 광주로 부임하자마자 결핵퇴치를 최우선 과업으로 삼았다. 그야말로 한국 사회 전체가 각혈(咯血)하듯 병든 사회였고, 그가 살아온 전라남도 인구의 55퍼센트에 이르는 사람들이 가임(可姙) 폐결핵 환자였다. 못 먹고살던 시절, 한국인들의 자화상이다. 가난과 빈곤이 가져다준 영양 결핍이 주원인이었다.
 
  1974년 카딩턴은 한국을 떠나 방글라데시로 옮겨 그곳에서 여생을 치열하게 살았다. 그는 평생 변변한 가재도구 없이 살았다. 의사로 돈을 모은 것도 아니었고, 자신의 몸뿐 아니라 하찮은 재산까지 한국 사회에 주고 떠난 한국판 슈바이처였다. 명리(名利)와 재물에 눈을 감았던 그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해준 것이라고는 지리산 왕시루봉에 노르웨이 태생인 부인 페이지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통나무 집 한 채를 지어주었을 뿐이다.
 
  먹고살기 급급한 한국 사회는 이제 이 땅에서 자신의 삶을 이어갔던 성자 카딩턴을 마땅히 기념해야만 한다. 그 점에서 왕시루봉의 카딩턴 유택(遺宅)은 이들 부부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기념물이다. 이런 기념물은 역사적 가치로 보는 것이지, 재물의 가치로 따지는 게 아니다.
 
서울 종로구 홍파동의 홍난파 집. 원래 1930년 독일 선교사의 집으로 지었다.
  필자가 다녀본 근대문화유산 가운데 서울 종로구 홍파동에 있는 홍난파(洪蘭坡) 선생의 유택은 1930년 독일인 선교사가 건축한 서양식 벽돌 가옥이었다. 홍난파는 이 집에서 1935년부터 생을 마감한 1941년까지 약 6년간을 거주했을 뿐이다. 홍난파와 관련된 유물 한 점 없는 이 집이 왜 근대문화유산이 되었을까?
 
  홍난파가 단지 몇 해를 살았다는 이유와 그가 우리 민족사에 끼친 문화적 공헌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리산 왕시루봉의 선교사 유택들은 문화적, 교육적, 의료사적 공헌과 종교적 의미까지 지닌 곳으로 본다. 허버트 카딩턴의 삶만 제대로 이해해도 우리 민족이, 이들에게 진 빚이 얼마나 많은지를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가 슈바이처와 같은 성인으로 살다간 세월과 울림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일부 불교계 언론의 주장을 살펴보니 이들은 “자연 보존 지역 내에 세워진 선교사들의 별장이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지가 의문이다. 특히 국립공원 1호인 지리산의 절대보존지역에서 스카이라이프를 설치하여 TV를 시청하고, 전기를 이용하기 위해 태양열 집광판을 무단으로 설치하고, 난방을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굴뚝을 설치하는 등 자신의 편의를 위해 시설물을 설치하는 것은 불법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이어 “1962년에 조잡하게 지어진 건물이 왜 근대문화유적에 들어가는지는 모르겠다”며 “이전에도 제시했던 것처럼 문화재 등재가 꼭 필요하다면 자연환경에 피해를 주지 않는 지역으로 이전했으면 한다. 환경부와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선교사 ‘별장’이 자연환경을 훼손할 가능성이 매우 큰 건물임을 명확히 인식하기를 바란다”고 촉구했다. 특히 지리산은 반달곰의 중요서식지로 확인되어 있으며, 여러 희귀생물이 분포되어 있는 핵심 자연보존지역이라는 것이다.
 
  불교계의 주장의 실상은 화엄사(華嚴寺) 머리맡에 기독교 유적이 들어서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유를 에둘러 말하는 것일 뿐이다. 마치 정부 관료나 국립공원관리공단이나 할 수 있는 사유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불편은 눈가림하고 다른 이유로 연막을 치는 것은 정직하지도, 정정당당하지도 못하다.
 
  이들이 전란 후 이곳에 자리를 잡을 때 화엄사의 어느 선승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은 이미 1923년도부터 지리산 노고단에도 이미 50여 동의 별장을 지어 살았다. 이곳이 “문화재 지정이 되면 관리를 위해 상시 출입이 진행되고, 주변 정비와 함께 향후 유적지 방문을 위해 많은 사람이 이곳을 출입하게 되면 지리산 생태계의 훼손은 심해질 것으로 예상된다”는 말은 불가(佛家)에서 언급할 말이 아니라고 본다.
 
  우리나라의 빼어난 산수 좋은 곳에 자리 잡은 고찰들치고 자연 생태계를 훼손하지 않은 절간이 없는 탓이다. 필자가 지리산을 갈 때마다 구례에서 고갯길을 넘어 남원의 뱀사골로 갈 때 길을 막고 출입료를 받는 천은사(泉隱寺)의 행태는 납득하기 어렵다. 그리고 한국의 절간마다 건축대장에도 없는 불법 건축물이 어디 한두 개인가?
 
 
  기독교와 불교의 아름다운 同行을 위해
 
  나는 기독교와 불교계가 아름다운 동행(同行)을 이루기를 간절히 바란다. 변변한 병원 시설이 없던 시절, 절간을 찾아 선교사들이 여름 망중한(忙中閑)도 즐기고 심지어는 절간에서 아이를 해산했듯, 지리산 화엄사와 쌍계사(雙磎寺) 스님들이 순천의 알렉산더 병원에서 결핵치료를 받았듯, 이들은 불자에게 빈부귀천(貧富貴賤)과 종교의 색과 질을 따져 묻지 않았다. 1922년 8월에 쓴 메리 닷슨 선교사의 일기이다.
 
  〈지리산으로의 첫 여행을 했다. 이곳에 오르는 길은 매우 급경사였으나 치솟아 오른 산봉우리들, 그늘진 산골짜기들, 수정같이 맑은 샘물, 태양빛에 반짝거리는 폭포수들로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수많은 거대한 나무들과 꽃피는 관목들이 있고 분홍바늘꽃과 목련들, 고사리들은 띠를 이루고 있다. 나무가 없는 햇볕이 드는 언덕바지에는 아름다운 하루살이 노란 백합들이 보인다.
 
  조선인들은 자기 나라를 사랑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곳을 구경하기 위해서는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걸어간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에 익숙해 있는 조선 사람들은 우리가 감동하는 만큼 감동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헤리엇 녹스와 나는 같은 천막을 사용하고 있다. 햇살이 비치는 시간에 우리는 바깥에 나와 있다. 그러나 며칠 동안 폭풍이 심하게 불었다. 샘(Sam)과 타마자 박사와 그의 두 아들은 높은 꼭대기까지 산책을 나갔다가 폭풍에 발이 묶여 24시간 동안 절에서 지냈다. 스님들이 그들에게 음식을 내어주었다. 이 산에는 호랑이, 표범, 멧돼지, 늑대 등 맹수(猛獸)도 있어서 이곳 사람들도 밤에는 감히 이곳을 오르지 않는다.〉
 
  광주선교부에서 일하던 그녀는 몇몇의 선교사들과 더불어 지리산 천왕봉(天王峰) 근처로 캠프를 갔던 모양이다. 운무(雲霧)가 자욱한 그날 함께했던 남자들이 산책로를 따라나섰다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그들은 산 정상 인근의 암자에 머물며 스님들로부터 하루 동안 공양도 받고 보호도 받았다. 그들 역시 이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선교사 신분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따져 묻지 않았다. 이런 것이 아름다운 동행이다.
 
  산 정상에 암자를 지었던 스님들이 정부로부터 허락을 받고 수행을 하고 사는지를 이들 역시 따져 묻지 않았다. 무릇 수행을 하거나 신심을 다투는 종교인들은 이웃의 필요에 민감하고 너그럽게 포용해야만 한다. 그래야 예수도, 석가도 있는 법이다.
 
  바다 건너 불교가 넘어와 호국 불교의 큰 그림자를 내었듯, 이 땅에 온 기독교는 교육과 사회 복지 전반에 걸쳐 천년 불교 못지않은 영향을 사회 전반에 끼치고 있다. 서학(西學)과 양이(洋夷)에 대한 경계심에 의해 창설되고 받아들여진 동학(東學)이 민중 속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쇠잔해진 것처럼, 민족의 주체성과 도덕의식을 바로잡는 것만이 조선의 살길이라고 생각하여 창시된 동학의 입장에서 보면 불교 역시 외국에서 건너온 외래 종교가 아니던가?
 
  다만 민중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백성을 위로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기독교도이든, 불교도이든 존재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절간도 포교하는 이들이 진정한 섬김을 회복한 이후라야 천년 고찰의 면목도 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도들도 기독교의 정신을 회복하는 길만이 이 땅에서 순교한 선교사들의 목숨을 헛되이 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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