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포 땅에서 33년간 선교하다 1940년 귀국 후 영양실조로 死亡
⊙ 줄리아 선교사 지원 받은 윤치호, 목포에서 共生園 간판 내걸고 고아 돌봐
⊙ 일본 여성 지즈코와 결혼한 尹致浩… 6·25 때 원아들 구호식량 요청하러 갔다 행방불명
⊙ 아들 윤기 이사장, “아버지에게 그리스도 정신 심어 준 줄리아 묘소 참배 계획”
梁國柱
⊙ 67세. 연세대 철학과 졸업. 연세대 대학원 경영학과 석사.
⊙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회장, 한국학생연합회 의장, 이스라엘문화원장 역임.
⊙ 1987년 워싱턴으로 이주. 現 미국 버지니아주 소재 NGO단체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한국 내 사단법인 ‘서빙더피플’ 상임이사.
⊙ 저서: 《이스라엘 역사적 조명》 《조선교회사》 《제국의 무덤-아프간》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 외 다수.
⊙ 줄리아 선교사 지원 받은 윤치호, 목포에서 共生園 간판 내걸고 고아 돌봐
⊙ 일본 여성 지즈코와 결혼한 尹致浩… 6·25 때 원아들 구호식량 요청하러 갔다 행방불명
⊙ 아들 윤기 이사장, “아버지에게 그리스도 정신 심어 준 줄리아 묘소 참배 계획”
梁國柱
⊙ 67세. 연세대 철학과 졸업. 연세대 대학원 경영학과 석사.
⊙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회장, 한국학생연합회 의장, 이스라엘문화원장 역임.
⊙ 1987년 워싱턴으로 이주. 現 미국 버지니아주 소재 NGO단체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한국 내 사단법인 ‘서빙더피플’ 상임이사.
⊙ 저서: 《이스라엘 역사적 조명》 《조선교회사》 《제국의 무덤-아프간》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 외 다수.

- 줄리아 마틴 선교사.
현재 LA공항에서 5분도 걸리지 않는 묘지에 외롭게 누운 줄리아는 미국으로 돌아와 4년 만인 1944년 영양실조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독일계 미국인 여성 엘리제 셰핑이 1934년에 영양실조로 죽은 이래 줄리아 마틴이 그 뒤를 이었다.
이들의 영양실조에는 공통점이 있다. 가난한 조선인들에게 자신의 것을 퍼주느라 정작 자신들은 영양실조에 걸린 것이다. 아마 그가 1941년 일본 정부에 의해 추방되지 않았더라면 마율리(줄리아의 한국이름) 역시 목포에서 고단했지만 행복했던 조선에서의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는 은퇴 후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어 당시 로스앤젤레스에 살던 막내 여동생의 집에 얹혀 살았다. 당시에는 해외 선교를 다녀온 선교사들에게 은퇴 이후의 은급(隱給)에 대한 명확한 보장도 없던 시절이라 해외에서 몇십 년을 살다 온들 뾰족한 수가 없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 자신의 젊음을 바친 이들이야말로 훈장 없는 영웅들이 아닐 수 없다.
백인 여성 최초로 珍島를 방문
마율리는 33년의 고단한 삶을 목포(木浦)와 진도(珍島), 함평(咸平)과 해남(海南) 우수영(右水營) 지역에서 선교사역으로 기나긴 시간을 보냈다. 그는 1910년, 진도를 방문하고 그 감상을 이렇게 기록한다.
〈백인 여성들이 이 섬을 방문하게 된 것이 최초의 기록일 것이다. 이 섬에 사는 여성들이 기독교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알게 된 이후 이들은 설렘에 휩싸여 구난(救難)과 무지한 여성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깊은 갈망을 드러냈다. 그들은 수십 년 동안 미신(迷信)과 무지(無知)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 살아왔다. 진도에는 125개의 마을에 3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동양에서 선교사로 일하는 우리는 성경말씀에 나오는 구절들을 보다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방들은 가득 찼다. 창문과 문 틈새로 그리고 현관 너머 마루까지 사람들로 가득했다. 예배 때마다 사람들이 집 안에 가득한 가운데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진리의 도를 기쁨으로 들었다.
특별히 우리에게 가슴 벅찼던 일은 나이 많은 여인이 우리가 있는 마을까지 찾아와 복음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런 기회를 행복하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아마도 자신이 살던 마을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최초의 여성이었을 것이다.
한국인들의 가장 좋은 특징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은 이웃들과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어떤 잘못일지라도 관대하고, 그들은 자신이 들은 복음의 메시지를 우물가에서 만난 이웃에게 무슨 큰 비밀이라도 되는 양 소곤대며 전하는 것이다. 진도는 섬이지만 넓은 면적이어서 끝에서 끝까지 가려면 약 50km(24마일)를 걸어야 한다.
나는 한국인 조력자들과 더불어 여러 마을을 방문했다. 함께한 매컬리 부인은 잘 훈련된 간호사로서 간단한 의약품으로 몸이 아픈 여성들과 아이들을 치료했다. 소문을 듣고 이웃마을에서 하루에 40명씩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의 아픈 몸도 치료받고 복음을 들었다.
내가 진도를 떠날 때 그들은 진도 섬에서 자란 나무로 멋진 지팡이 하나를 만들어 선물로 주었다. 그들은 ‘섬의 곳곳을 다니면서 이 지팡이를 사용하라’며 가는 길마다 줄줄이 늘어서서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소년가장 尹致浩를 사역자로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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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대 전라도에서 일하던 독신여성 선교사들이 모처럼 목포에서 한자리에 모였다. 뒷줄 맨 오른편이 줄리아 마틴 선교사다. |
마율리를 통해 기독교 복음을 접한 윤치호는 소작으로 생계를 간신히 유지하는 빈농의 자식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학교 문턱도 밟지 못했다. 더욱이 열세 살 때 아버지가 과로로 사망했다. 졸지에 소년가장이 된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윤치호는 함평으로 전도여행에 나선 마율리를 만났고, 마율리가 전한 복음은 새로운 서광(瑞光)과도 같았다. 한 끼 양식을 때우는 문제가 아닌, 인생 전체를 놓고 어떻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 하는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윤치호가 마율리를 따라 목포에 진출해 세운 삶의 공간이 목포시 호남동 18번지의 허름한 초가에서 시작한 ‘나사렛 목공소’였다. ‘예수처럼 살겠다’며 시작한 목수 직업은 일하며 배우고, 일하며 얻은 수입으로 더불어 살던 거리의 아이들에게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이 일이 윤치호가 목포에서 일하며 나누는 첫 번째 나사렛 공동체였다.
지독한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고 스스로 벌어 해결하려는 자세였건만, 이 실험은 1년 만에 끝이 났다. 윤치호는 고아에게 자립의 길을 열어 준다는 취지로 엿 가게도 열었다.
머지않아 그는 마율리 선교사의 조사(助事)가 되어 광주와 전주의 성경학교에서 성경 수업을 받는다. 두 군데 이상의 성경학교 수료증이 있어야 신학 공부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어서 피어선 성경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윤치호가 스물한 살이 되던 무렵인 1931년, 그는 아직 앳된 청소년이었음에도 당시 신문에는 복음과 구령(救靈)의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 윤치호의 모습이 아주 특별하게 나와 있다.
〈남장로회 광주선교부의 마율리 선교사가 남녀 전도인 두 명을 데리고 왔으며, 제주성내교회에서 1931년 4월 16일부터 23일까지 부흥사경회를 개최하였다. 부흥사경회에 참석한 사람은 60여 명이었다. 오전엔 공부하고, 오후에는 전도와 심방과 낙심한 교인을 찾아 권면하고, 밤이면 전도 강연회로 모였다. 마 부인과 함께 온 21세 되는 전도인 윤치호씨의 열렬한 강연에 청중이 감동을 받았다.〉(《기독신보》 1931년 5월 20일)
젊은 전도인 윤치호는 웅변가로서 그리스도의 전도사역에 깊이 심취되어 장로회 선교사들이 곳곳을 돌며 주최하는 사경회(査經會·성경공부 모임)에서 설교를 하게 하였는데, 모여든 성도들이 크게 은혜를 받았다. 그만큼 열정과 소명에 가득 찬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결과였다.
共生園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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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아들과 함께한 윤치호. 윤치호는 줄리아 마틴 선교사의 도움으로 공생원을 설립해 목포의 고아들을 돌봤다. |
그가 초기에 목공소를 차려 자립을 도모하면서 고아들을 돌보던 곳은 현재 목포의 구시가지인 양동 지역이었다. 양동에 자리 잡은 선교사 촌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살던 거리와 조선인 주거지역으로 나뉘어 있던 때였다. 자신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어 주었던 마율리 선교사나 양동 교인들이 주로 모여 살던 지역이었다.
윤치호가 마율리를 도와 목포에서 전도활동을 하던 당시, 목포에는 급작스러운 도시화 과정에서 빚어진 수많은 유랑아(流浪兒)들이 생겨났을 뿐 아니라, 가난한 섬사람들이 자식을 거두기가 어렵게 되자 목포에는 자연히 부랑아나 고아들이 지천에 깔렸다.
마율리 선교사와는 이래저래 모자지간(母子之間)보다 더 진한 사랑으로 얽혀 지낸 셈이다. 1869년생인 마율리와 1909년생인 윤치호와는 40년의 나이 차이뿐 아니라 전도자와 피전도자로 영적인 아들처럼 가까이 여겨지던 관계 이상이었다.
한때 윤치호는 목포 양동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한 이래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며 신사참배(神社參拜) 반대 설교로 여러 차례 구금되기도 했다. 목사가 되어 죄에 빠진 사람을 구제할 것인지, 아니면 가난으로 고통 받는 아이들을 구제할 것인지, 그의 선택은 그 어느 것도 편안한 것이 아니었다. 형극(荊棘)의 가시밭길이라는 말이 맞는 표현일는지도 모른다.
일제 강점기에 목사를 한다든지, 가난한 고아들을 돌보며 남들에게 손을 내밀며 산다는 일 자체가 어렵기는 매한가지였다. 목사를 했더라면 순교(殉敎)를 각오해야만 했고, 고아들을 돌보는 것 역시 하루하루 고단한 삶이었다. 아마 그가 살아 목사의 길을 갔더라면 목회자로서 대성하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1938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에 대한 면죄부를 터준 이래로 신사참배에 대해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차라리 목회자의 길보다는 고아들과 더불어 사는 일이 더욱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본인마저 고아처럼 사회로부터 냉대를 받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다.
尹致浩, 일본 여성 지즈코와 結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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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달산에 오른 공생원 식구들. |
지즈코는 목포 여자교육기관의 원조 격인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 음악교사로 1936년부터 선생 일을 시작했었다. 그녀는 조선총독부 관리인 아버지를 따라 7세 때부터 목포에서 살아 말도 통했고,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정서가 통했다. 그러나 결혼에 이르기까지 집안에서의 반대가 엄청났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한다 했을 때 할머니는 식음을 전폐하고 일본 여자를 파평 윤씨 집안의 며느리로 맞아들이는 일만은 안 된다고 우셨답니다.” 아들 윤기(일본 사회복지법인 마음의가족 이사장)씨가 전해 주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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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년 결혼한 윤치호와 일본인 여성 다우치 지즈코(윤학자). 윤학자 여사는 남편이 6·25전쟁 때 행방불명됐음에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1968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기까지 고아들을 돌봤다. 그는 1965년 제정된 제1회 목포시민의상을 받았다. |
우스갯소리지만 후일에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지낸 윤치호(尹致昊·대한제국 당시 개화파 사상가)가 1929년 3월, 서울에서 셋째 딸의 혼사를 치렀다. 사위는 도쿄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뜻깊은 그날 윤치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서울의 잘 알려진 가문에서 평양 출신을 사위로 맞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조롱과 비난, 심지어는 욕을 먹게 될 것이다.〉
나라 잃고 목숨줄 잇기에도 바빴던 세상에 명문 세도가들은 지방을 논하고 권력과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던 시절이었다. 사위 될 청년이 똑똑하고, 집안도 괜찮았지만 고향이 흠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1931년 4월 19일엔 “나는 지역파벌에 반대하면서 하루빨리 화해가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기에 서북인(西北人) 중에서도 전형적인 서북인이라 할 수 있는 평양 청년을 사위로 맞아들였다”고 토로했다.
사대부 가문인 서울의 윤치호가 느꼈을 부담처럼 비록 돈 없고 가난한 목포의 윤치호에게 있어서 일본인 부인을 맞이하는 일도 감당키 어려운 일이었다. 윤학자 역시 조선인의 아내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
윤치호 부부가 결혼한 날, 그는 장모가 사는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이것이 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신혼의 밤이었다. 결혼식장 밖에 가득했던 걸인들의 축복을 받았던 이들이기에 단지 그것 하나에 감사와 만족이 있을 뿐이었다. 장모님 댁에서 하룻밤을 따스하게 보내고 여느 일상처럼 다시 공생원으로 돌아왔다.
가난으로 일상처럼 남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윤치호에게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본인 부인을 둔 것은 더욱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생원 운영은 윤학자나 윤치호 부부 모두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6·25전쟁 당시 구호식량 구하려다 行方不明
1950년 전쟁이 터졌다. 윤 전도사는 “고아를 두고 이들을 두 번 죽일 수 없어 우리만 도망칠 수 없다”며 공생원을 지켰다. 그게 시련의 단초였다. 7월 중순 이후 목포에 진입한 인민군은 윤치호가 이승만(李承晩) 정권 아래 구장(區長)을 맡은 데다, 부인이 일본인이라는 점을 들어 그를 인민재판에 회부했다.
“윤치호 반동은 인민을 착취했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 괴뢰 정권에 가담하여 사회사업이라는 파렴치한 가면을 쓰고 인민이 피땀 흘려 모은 금전을 갈취한 악질 반동분자요. 게다가 그의 처 지즈코는 우리 민족의 철천지 원수인 일본 사람이오. 그는 총살감이오. 반동이라 인정하는 동무는 손을 드시오.”
손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뿐더러 주민은 도리어 그의 편에 서 줬다. “윤 동지는 이승만 정권 때 구장을 지냈습니다만, 실제로는 구장이라기보다 목포 시민들이 사랑하는 거지 대장이었습니다. 오로지 불쌍한 고아들을 위해 애써 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윤 동지의 부인은 일본인이긴 하지만 해방이 되었을 때 부모 없는 고아를 위해 헌신해 온 고마운 분입니다. 특히 윤 동지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까지 독립운동을 위해 몸 바친 애국자입니다.” “옳소!” (윤기 저서 《어머니는 바보야》 중에서)
윤치호를 죽여야 한다는 동조가 없자, 인민에게 봉사한다는 조건으로 대반동의 인민위원장 직을 맡게 했고, 사무실까지 설치했다. 3개월 동안 목숨을 부지한 세월, 인민군이 후퇴하자 이번엔 인민군을 도운 이유로 국군에 붙잡혀 갔다. 주변 인사들이 구명운동을 해 줘 1951년 1월 가까스로 석방됐지만 삶의 여정은 길지 않았다. 당시 300명의 원아를 돌보고 있던 치호가 전남도청에 원아들의 구호식량 요청을 하겠다며 길을 나섰다가 소식이 끊긴 것이다. 그때 윤치호의 나이 마흔둘이었다.
광주에 가면 늘 그가 묵던 여관에 한밤중 찾아온 세 명의 남자를 따라나선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 것이다. 그가 머문 방엔 짐 보따리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윤치호가 이 땅에 말없이 남기고 간 유물이 되어 버렸다.
여장부 尹鶴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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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설립된 공생원 20주년 기념비 앞에 선 윤학자 선생. |
다른 하나는, 좌파에 의해 납북 혹은 살해됐을 가능성이다. 인민위원장까지 시켜 놨는데 국군에 풀려난 것을 괘씸하게 여겨 그를 위해(危害)했을 가능성이다. 전쟁 이후 낮에는 국군, 밤에는 빨치산 공비가 판을 치던 세상인지라 그가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라는 어쩔 수 없는 추측이다.
공생원을 탐낸 사람들이 해코지했다는 설도 있다. 전쟁이 나고 외국 원조가 시작되면서 사회사업에 돈이 몰릴 것이라 생각한 사람들이 납치했을 것으로 보는 주장이다. 그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없는 지금, 생각이야 많지만 가능성에 머무는 수준에서 억지 해석일 따름이다.
아름다운 청년, 윤치호는 갔어도 그의 꿈은 남았다. 가난한 이, 부모 없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던 이들에게 윤치호는 아버지요, 삼촌이요, 큰형님이었다. 1919년 서울에 오긍선(吳兢善)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경성 고아 구제회가 창립되고 경성보육원이 설립된 이후 1928년에 윤치호가 목포에 세운 공생원이 두 번째 고아원이다.
전쟁 이후 한때 고아들을 해외로 입양시키는 일이 제법 돈벌이가 된다는 소문에 우후죽순 격으로 고아원이 생겨나기도 했다. 미군과 해외 원조기관으로부터 들어오는 긴급구호 식량과 지원물자를 빼돌려 착복할 뿐 아니라 원생에게 돌아갈 몫을 자신의 것으로 가로채는 악덕 사회사업자가 생겨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자기 자식을 이들 고아와 더불어 키워 낸 부인 윤학자는 그 마음에 남편이 이루지 못한 꿈을 유훈처럼 키워 낸 여장부였다. 사랑은 결코 흉내 낸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제 자식을 고아들과 더불어 키우는 아비가 흔치 않다. 공생(共生)은 믿음의 사람 윤치호가 이 땅에 펼치고자 했던 삶이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져다준 줄리아 마틴이 윤치호의 든든한 원군(援軍)이 되어 주었듯이 한 많은 세상을 살면서 외롭고 지친 어린 영혼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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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달산을 배경으로 목포시 죽교동에 자리한 공생원 전경. 목포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 중 하나로 꼽힌다. |
목포 시민들의 눈초리가 무섭고, 별로 땅값이 오르지 않던 지역이 가장 아름다운 지역으로 탈바꿈한 모습으로 보아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은 공생원을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닐까도 싶다.
부인 윤학자는 남편이 행방불명된 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1968년에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희생과 봉사로 원아들을 제 자식인 양 돌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진액을 다해 섬기다 죽자 ‘목포시민장’으로 치러진 그녀의 장례식에 “3만여 명의 조객이 모였고, 목포가 흐느껴 울었다”고 했으며, 1965년 제정된 목포시민의상 제1호 대상자가 일본인 윤학자였다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지역민의 존경과 애정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공생원은 아이들의 먹을거리 마련을 위해 동냥을 마다하지 않아 ‘거지 대장’으로 불렸던 윤치호 전도사, 그리고 내 민족 내 부모조차도 버렸던 아이들을 위해 30여 년간 3000명을 돌본 ‘고아들의 어머니’ 윤학자 여사가 평생을 바쳐 고아 사랑을 실천한 곳이다.
4대에 걸친 ‘아름다운 同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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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윤치호의 뒤를 이어 공생원을 이끌고 있는 윤기 사회복지법인 ‘마음의가족’ 이사장. 생전에 한국사회복지대학을 설립하려 했던 모친의 뜻을 이어받으려 하고 있다. |
“인간은 누구나 고아입니다. 어려서 되느냐 어른이 되어서 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세계적으로 부모 없는 아이는 900만명에 달합니다. 연약했던 제 어머니가 3000명을 키웠듯이 세계의 비정부기구 등 사회단체들 3000개가 힘을 합한다면 900만명의 고아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한일 양국의 1000여 단체가 중심이 돼 아시아로부터 ‘고아’ 지원사업을 하려고 합니다. 북한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습니다.”
생전에 한국사회복지대학을 설립하고자 했던 모친이 당시 만든 설립 취지서에는 고아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으니, 그 뜻을 이어받으려는 윤기 이사장의 포부도 아버지 윤치호를 닮아 정이 가득했다.
그리고 세계 고아의날을 제정하기 위해 유엔을 방문하면서 아버지에게 그리스도 사랑의 정신을 심어 준 줄리아 마틴의 시신이 묻힌 로스앤젤레스 공항 근처 잉글우드 파크 묘원을 찾아 아버지와 어머니가 남기고 간 사랑의 공생운동에 관해 보고 드릴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며 못내 흥분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할머니 묘를 찾아가는 손주같이 들뜬 윤기 이사장의 70 노구가 앳된 소년처럼 밝아 보였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동행(同行)을 4대에 걸쳐 이루고 있는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