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발굴

일제강점기 조선땅에 온 벽안의 선각자들 ⑦ 로버트 윌슨

愛養園 설립해 조선 최초로 한센병 환자 돌보다

  • 글 : 양국주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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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싱턴대 의대 졸업, 1908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와 광주 제중원장으로 첫 사역
⊙ 1909년, 영산포 한센병 여인 처음 치료, 최초의 한센병원 광주 나병원(여수 애양원) 설립
⊙ 낙천적 성격으로 사냥 통해 스트레스 풀어, 40년간 1만명 넘는 한센 환자 돌봐

梁國柱
⊙ 67세. 연세대 철학과 졸업. 연세대대학원 경영학과 석사.
⊙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회장, 한국학생연합회 의장, 이스라엘문화원장 역임.
⊙ 1987년 워싱턴으로 이주. 現 미국 버지니아주 소재 NGO단체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한국 내 사단법인 ‘서빙더피플’ 상임이사.
⊙ 저서: 《이스라엘 역사적 조명》 《조선교회사》 《제국의 무덤-아프간》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 외 다수.
1920년대의 로버트 윌슨.
20세기 초, 중국의 한 도백(道伯)이 한센인과 같이 더러운 사람들을 성내(城內)에서 쫓아낼 방법을 고민, 그가 관할하는 행정구역에서 큰 연회를 열고 그들을 초청하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듣고 많은 한센인이 왔지만, 이들은 화려한 연회에서 배부른 음식 대신 차가운 총알 세례를 받고 시신조차 남김없이 소각되었다. 이런 비극적인 사실이 알려지자 유럽의 여러 나라가 중국과 인도의 한센인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극동의 변방 조선은 한센은 고사하고 현대적 의미의 치료가 전혀 불가능한 상태였다. 1884년에 의료 선교사로 들어와 고종의 시의(侍醫)를 맡았던 알렌은 1886년 발표한 〈서울 건강 리포트〉에서 그가 입국한 지 두 해 뒤인 1886년 7월 15일부터 두 달 반 동안 709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이 가운데 6132명이 천연두로 죽었고 하루에 460구의 시신이 실려 나갔다고 보고했다.
 
  1895년 돌림병으로 발생한 콜레라는 하루에 50~100명이 죽어 나갔다. 서울에서만 자그마치 2500명이 죽었다고 한다. 장티푸스와 이질, 스프루, 콜레라와 천연두가 민중의 삶을 좀먹는 공포의 사신(邪神)이었다.
 
  과거 많은 사람이 한센병은 유전병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증명되고 많은 사람이 깨닫게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러야 했다. 특히 이 병에 걸리는 동물이 하나도 없는 탓에, 인위적으로 배양을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치료법의 발전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부모가 한센 환자일 경우 그 병에 걸리는 아이는 약 40% 정도였다. 하지만 이는 (유전적인 요인 때문이 아니라) 부모와 밀접하게 접촉하며 살기 때문이었다. 한센병 환자 부모와 먹고 자기 때문에 걸리게 된 것이었다.
 
  한센병은 딱히 전염병이라고도 볼 수 없었다. 전염병에 매우 취약한 어린아이들도 한센 병자와 같이 살면서도 감염되는 아이들은 실제 40%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결핵균과 매우 비슷하며, 병 자체도 비슷하고 치료법도 결핵과 비슷한 측면이 있던 한센병이 1868년 한센에 의해 발견된 이래 근 50년이 지나서야 알려지게 된 셈이다. 1900년대, 한국의 한센 환자는 1000명에 한 명꼴로, 한센 환자와 접촉하는 사람들은 환자의 얼굴, 그들의 손이나 발을 보고서야 한센 환자임을 판별할 수 있었다.
 
 
  영산포의 한센 여인 처음 돌본 로버트 윌슨
 
1910년대의 한센 환자. 1909년 닥터 포사이드가 영산포에서 만난 한센 여인을 광주 제중원 원장인 윌슨 박사에게 인계해 치료한 것이 계기가 돼 최초의 한센 치료시설인 광주 나병원(여수 애양원)이 1913년 설립됐다.
  1911년에 전라도로 와서 1942년까지 목포와 광주에서 일했던 남대리(Leroy Tate Newland·1885~1969) 선교사는 그의 일기 속에서 자신이 보호하고 있는 한센인의 처지를 나라 잃고 병든 민족의 아픔에 비유해 글을 적고 있다.
 
  “한센병으로 정신이 나간 한센 환자가 있었다. 그날 오후 내내 바깥에서 내게 말을 걸어 방해를 했다. 모임이 끝나고 바깥으로 나가보니 그가 강둑 끝에서 나침반의 동서남북 방향으로 절을 하면서 문드러진 팔을 내밀면서 ‘주여, 저를 살려주옵소서. 주여, 저를 살려주옵소서’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는 하루종일 이렇게 애처롭게 외치고 심지어 밤에도 뛰쳐나가서 적막함을 뚫고 자신을 살려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마지막 죽는 날까지 이렇게 외쳤다. 얼마 후 그는 자신이 소망하던 생명을 얻었다. 그 장면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아직도 그의 쉰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나에게는 한국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이 그와 함께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라 잃고 지도자가 없는 한국의 모습, 그는 동서남북을 보면서 살려달라고 했지만 삶을 찾지 못했고, 오히려 죽음을 찾았다. 그리고 이제 그는 죄로 저주받은 손을 내밀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저를 살려주소서, 저를 살려주소서’라고 외친다. 여러분은 한국의 한센 환자와 한국의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해지도록 기도해 주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은 교회와 교육 사업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그들은 병자를 돌보고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은 교회가 아니라 나라가 책임져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기에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가 조선의 의술을 위해 제중원(濟衆院)에 당시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금화 1만 달러를 희사했을 때, 대부분의 목사는 “이 돈을 모두 병원을 세우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이므로 이 금액에서 반을 떼어 교회 사업에, 나머지 절반을 병원 사업에 사용하자”며 떼를 썼다. 이 돈을 희사한 세브란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그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목사, 선교사들의 시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던 차에 1909년 4월, 목포에서 일하던 닥터 포사이드(W. H. Forsythe)가 여행 중에 영산포에서 만난 한센 여인을 자신의 말에 태우고 광주로 데려와 환자가 죽을 때까지 돌봐주었던 사건은 선교사들의 고정관념을 밑바닥부터 뒤집는 사건이었다. 한센 여인을 위한 집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포사이드와 광주 제중원의 원장인 로버트 윌슨(R. M. Wilson·1880~1963·한국명 우월순)의 호의로 그녀는 결국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낡은 온돌 위에서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는데 그녀의 고통과 죽음으로 말미암아 선교사들 사이에 그녀와 같은 병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이 넘치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센병 여인이 그리스도를 믿는지 아니면 종교가 무엇인지를 따져 묻지 않았다. 그야말로 종교적 한계를 넘어선 사랑 그 자체였다. 그녀는 자신을 끝까지 돌보아준 포사이드와 선교사들에게 “내 동족 같았으면 당신들처럼 이런 친절을 베풀어주지 않았을 겁니다”라며 감격해 했다.
 
  그녀가 죽자 광주 지방 선교사들은 기금을 모아 그 돈으로 방 세 개짜리 오두막집을 세웠고, 이곳에 한센 환자들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최흥종 목사의 부지 기부로 광주 봉선동에 한센인을 위한 시설이 세워졌다는 입소문이 온 나라에 돌자, 매일같이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렇게 되자 선교사들은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인도의 나병협회와 스코틀랜드 나환자협회 극동지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들의 관대한 후원으로 윌슨은 한센인을 위한 근사하고 편안한 숙소와 병원을 1913년에 세울 수 있었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나병원인 광주 나병원의 시작이었다(광주 나병원은 1936년 명칭을 여수 애양원으로 바꿈). 이후 환자들이 병원에 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숫자가 너무 많아 여성 환자들은 거의 아무것도 제공받지 못했다. 정식으로 나환자촌 1호가 문을 연 것은 1913년이었다. 초기의 자금 대부분은 런던에 있는 ‘나환자들을 위한 선교회’에서 충당했다.
 
 
  “낡은 신발과 천 조각 필요”
 
1909년 무렵 세워진 광주 봉선동 시절의 나환자촌. 포사이드 선교사 밑에서 일하던 최흥종 목사가 기증한 부지에 자리 잡았다.
  〈저는 한센 환자 604명이 수감된 나환자촌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길가에서 한센 환자가 양배추 잎으로 상처를 싸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다른 환자는 더러운 신문지에 침을 뱉어서 자기 상처에 드레싱 하듯 붙여 놓더군요. 세상에 누더기 옷감이 넘쳐나는데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09년, 불쌍한 여성 한센 환자가 치료를 받기 위해 저희를 찾아왔지만 당시에는 한센 환자를 위한 방이 없어 구들장 위에 환자를 눕히고 몇 주 후 숨을 거둘 때까지 먹이고 보살펴주었습니다. 이 환자부터 시작해서 이제 우리 환자촌은 600명을 수용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이곳에 온 사람은 그나마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매일 아침 우리 환자 중에서 300명 정도는 수술 드레싱을 받아야 하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 여러분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야 싶어 가슴이 철렁하시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나환자들의 상처에 드레싱을 해달라고 부탁을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낡은 천이 많이 필요할 뿐입니다. 여러분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낡아서 못 쓸 옷감을 보내주십시오. 이런 낡은 옷감이 훌륭한 드레싱 재료로 둔갑합니다. 저희에게는 이 천들을 소독할 수 있는 증기 소독기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해주실 일은 낡은 천을 모아서 11파운드 이하의 소포로 묶어 ‘한국 광주 나환자 병원’ 앞으로 보내주시는 겁니다.
 
  대풍자유(大風子油·대풍자나무 종자의 껍질을 벗기고 압착해 얻은 황색 지방유를 대풍자유라고 하는데, 대풍자유는 동아시아에서 나병의 치료에 사용) 치료 효과는 여전히 좋습니다. 허약하고 처참한 상태로 우리 환자촌에 도착했던 사람들이 치료를 받으면 곧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합니다. 가게에서 일하며, 운동하는 시간과 노는 시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운동회를 하는 날이면, 새로 들어온 환자들은 거의 참석하지 않고, 몇 달 동안 치료를 받아온 사람들만 참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센 환자들 중에 펠라그라(pellagra·비타민결핍증)를 앓는 경우가 몇몇 있는데, 이 문제는 식단을 조절하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온갖 끔찍한 사진들 중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펠라그라 병을 앓는 한센 환자일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너무나 끔찍해서 묘사를 하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우리같이 건강한 사람들은 매일 잊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 땅 1평방인치당 5000만 마리 세균이 득실대는 환경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에 걸리지 않고 멀쩡하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루는 갈라진 발을 실과 바늘로 꿰매고 있는 환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환자는 마치 낡은 신발을 수선하듯 자기 발을 깁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덕분에 틈이 더 벌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열흘에 한 번 정도는 다시 바느질을 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실이 닳아서 뜯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센 환자들에게는 이런 게 정말 흔한 일입니다. 낡은 신발을 보내주면 한센 환자들이 발을 보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문에서 뉴욕 시장이 조촐한 저녁식사 대접을 받았는데, 그 비용이 2만5000달러였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 비용이면 700명의 한센 환자들의 1년 식사비와 치료비, 기타 비용을 충당하고도 남습니다. 또 이 돈이면 한센 환자들이 스스로 경작해 식량을 충당할 수 있을 정도의 큰 농장을 살 수도 있습니다.〉
 
  이 편지는 광주 제중원의 윌슨 원장이 미국의 후원자들에게 한국의 한센 환자들을 소개하면서 후원을 요청할 때 사용한 보고다. 낡은 신발과 천 조각은 그야말로 한센 환자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던 셈이다. 병을 앓는 것도 서러운데 마땅한 치료 방법도,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병자의 몸을 싸매줄 거즈(gauze·무명베) 한 조각도 없어 미국의 후원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광주 봉선동에 한센 환자 시설이 처음으로 들어선 1909년 이래 그 수효가 늘어나자 새로운 골칫덩이가 생겨났다. 한센병은 점차 더 번져나가고, 특히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지방이 극심했다. 따뜻한 기후 탓이었다. 그런 이유로 기독교 선교기관들이 나라가 못 하는 한센 병자 돌보는 일까지 도맡아 하게 되었다.
 
  한국에는 기독교 선교회가 운영하는 한센 환자촌이 세 곳에 나뉘어 있었다. 호주 장로교가 부산 감만동에 상애원(相愛園)이라는 이름으로 500명을 수용했고, 대구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에서 450명,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광주 봉선동에 운영했던 애양원(愛養園)이 1926년 순천으로 장소 이전을 마쳐 800명을 수용했다.
 
  일제 총독부가 운영하는 소록도 한센 환자촌에는 250명이 입소해 있었다. 남장로교는 순천에 215에이커(약 31만 평)를 사들여 재활촌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광주에서 순천으로 이사 올 때 일본 총독부가 이주 비용 가운데 1만2500달러를 부담했다고 한다.
 
 
  스코틀랜드 나환자협회, 남장로교 선교사들 도와
 
로버트 윌슨이 설립한 광주 나병원의 나환자들.
  〈아시아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 기독교의 재생력을 실감했습니다. 한국에 도착한 다음날 우리는 이곳 ‘상투’의 나라에 세워진 두 번째 병원(첫 번째는 세브란스)과 수용시설의 개소(開所)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이곳은 수 세기 동안 이교도(비기독교) 정부가 존재했었고, 나환자들은 아무 보살핌 없이 살다가 죽어갔습니다.
 
  하지만 불쌍한 이교도들의 거주지와 주인은 거리상 수천 마일 떨어져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한 금전적 지원은 스코틀랜드와 영국에 있는 사람들이 제공하고 있으며, 이 일은 광주의 닥터 윌슨 선생이 맡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한센 환자들이 한 번도 꿈꾸어보지 못한 근사한 새 건물과 숙소가 생겼습니다. 개소식 날 20명 이상의 한센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이 이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히 가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모든 업무와 사회·종교적 생활이 지극히 이기적으로 움직이는 이곳에서 우리가 아무런 숨은 저의(底意) 없이 이러한 선교 업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수긍시키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현재 식민지인 이곳 조선에 와서 선교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척 기쁩니다. 선교사들이 직접 이곳에 와서 성령의 축복으로 이 세대에서 아무것도 의지할 곳 없는 이 나라 사람들의 삶에 복음이 뿌리내리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며, 당신들이 당신의 맡은 바를 충실히 한다면 이곳 사람들이 바라는 바를 분명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이 일제 치하에 있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선교 사업 활동이 어렵습니다. 선교사는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선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한센 환자 실태를 조사하러 왔던 스코틀랜드 나환자협회의 프렛(Pratt)이 써 보낸 편지다. 그들은 주로 인도 지역의 한센인들을 돕고 있었지만, 당시 미국 남장로교의 선교사들이 설립한 광주 봉선동의 나환자촌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실제 남장로교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의 대부분이 스코틀랜드 계열의 미국인(Scottish-American)들이었다. 이들의 요청을 거부할 이유가 없는 관계였다. 그들 역시 한센인들을 돕는 목적이 선교에 있음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다.
 
  윌슨 역시 이와 비슷한 의사를 갖고 있었다. 하루는 윌슨이 일하는 광주 제중원으로 서울의 선교사가 보낸 한센 환자가 찾아왔다. 그는 자그마치 두 달에 걸쳐 360km를 걸어왔다.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은 남자였다. 윌슨의 눈에는 그가 환자라기보다 차라리 시신에 가까웠다. 보통 사람의 두 배로 다리는 부어 있었고, 눈은 흰자위까지 모두 노래진 상태였다. 그가 광주에 도착한 날은 마침 비도 내려 그가 등에 진 짐 보따리마저 물에 젖은 상태였다. 지난 세월을 끔찍하게 살아온 만큼이나 우울하고 어두웠다.
 
  선교사들이 사는 양림동에서 나환자촌이 있는 봉선동까지 그 부실한 몸으로 5리(2km)를 더 걸어야 했다. 5리라면 그가 걸어온 속력으로 보아 적어도 이틀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 우월순이 다른 일을 마치고 봉선동의 치료시설에서 그를 만나기로 약속하고 그를 먼저 보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월순이 자동차를 타고 가던 거리의 절반 지점에서 그를 만난 것이다. 이틀 거리의 절반에 해당하는 거리를 단숨에 달려온 것이다. 희망이라는 것, 살아날 소망이 있다는 것은 이처럼 지친 다리에도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가 보다.
 
  한센 환자들은 가족들로부터 버림받고 동족들로부터 천대받으며 더러운 시궁창에 숨어 살거나 상처 난 발로 걷다 피부가 까여서 과육(果肉)처럼 흐물흐물한 살덩이로 변해간다. 윌슨은 비록 어둡고 냉혹한 세상에서 거절당하고 분노하며 살아가지만, 이들을 수용하고 받아들여지는 순간 살아갈 소망이 생긴다는 것, 그리고 그 소망이 나환자촌의 문뿐 아니라 천국의 문도 함께 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랑이 낳은 눈물의 자식
 
애양원에서 한센인들이 합동결혼식을 올리고 있다. 선교사들은 한센인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과 한센인끼리 결혼해 가정을 이루는 것에 큰 보람을 느꼈다.
  나환자 수용소에 들어오게 해달라고 탄원하는 무리만큼 열성적이면서도 비참한 사람들을 보는 경우가 흔치 않을 것이다. 한센인들의 애양원 입소 요청은 친절한 사람들이 이들을 위해 약간의 후원금만 내주면 받아들여졌다.
 
  서울에서 온 어떤 부부가 이 나환자 정착촌을 방문했는데, 이들이 들어서자마자 불쌍한 한센 환자 다섯 명이 “살려주세요”라며 달려들었다. 그러자 남자가 윌슨 박사에게 “이들을 받아주시는 데 드는 비용을 제가 대겠습니다”라고 했다. 한 시간 후쯤 이들이 떠나려 할 때 또 다른 나환자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그 부인이 “제가 부담할 테니, 이 네 사람을 받아달라”고 했다.
 
  이 부부는 환자촌을 떠나기 전까지 나환자 총 15명의 비용을 부담했고, 이들이 들어서자 이미 입촌해 있던 나환자들이 “지옥에서 나와 천국으로 들어오시게나” 하면서 반겨주었다. 나환자들은 떼를 지어 몰려와 입소를 기다린다. 18명 또는 20명씩 무리를 지어 소나무 아래에서 밤을 지내며 입소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때로는 문밖에서 일주일을 기다리다 결국은 입소하지 못한 채 수백 리 길을 걸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 일을 하면서 가장 가슴이 아플 때는 바로 이런 순간이다.
 
  이처럼 강요된 후원이 아닌 자신들이 극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후원을 받는 데 유용한 전시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마치 북한이 특정한 고아시설 한 군데를 집중적으로 개방하면서 이런 시설을 찾는 모든 서방 구호단체에 ‘이곳은 당신네들이 단독으로 후원하는 곳’이라는 식으로 보다 적극적인 후원자를 모색하는 모습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결국 이런 비참한 현실을 통해 동정을 얻으려는 한센인들이나 또 이들의 가련한 처지를 이용해 후원자를 배가(倍加)시키려는 운영의 묘(妙)가 절묘한 한 수를 이룬 셈이다.
 
  한센 마을의 운영비는 대개 본인이 3분의 1을 부담하고 3분의 1은 일본 정부, 나머지 3분의 1은 뉴욕의 나환자협회와 스코틀랜드 나환자협회가 후원하는 비용으로 충당했다.
 
  한센 환자들은 몸도 불편했지만 대개는 가난했다. 그러므로 본인이 내야 할 부담에서도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선교부는 약 300에이커(36만7252평)를 더 사들여 이들에게 자활 농장을 운영하도록 했다. 목공(木工) 기술을 가르쳤고, 각종 농산물과 양계 사업을 하게 했다. 이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은 이러한 재활 기술을 통해 먹고살아 갈 경제적 수단을 확보하는 일과 같은 한센인들끼리 가정을 이루어 결혼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합동결혼식은 대개 일 년에 서너 번씩 이뤄졌다. 이들의 결혼을 통해 생긴 자식들이 부모로부터의 감염이 우려돼 태어나자마자 격리되는 아픔도 있었다. 대개 이런 아이들은 대구 지역의 북장로교 선교사 플레처가 운영하던 미감아(未感兒·한센병에 감염되지 않은 아이) 시설로 보내졌다. 사랑이 낳은 눈물의 자식인 셈이다.
 
 
  사냥으로 스트레스를 푼 윌슨 원장
 
윌슨 원장(오른쪽에서 둘째)이 멧돼지 사냥을 끝낸 모습. 낙천적 성격의 윌슨은 한센인들을 돌보는 병원 업무 스트레스를 사냥으로 화끈하게 풀었다.
  로버트 윌슨 원장은 미주리주의 워싱턴대 메디컬스쿨을 졸업하고 1908년 조선에 파송돼 우리나라 최초로 한센인을 돌본 인물이다. 그는 한센인 요양소 ‘여수 애양원’의 전신인 광주 제중원장으로 사역했다. 그는 1948년까지 40년 동안 1만명이 넘는 조선인 나병 환자를 돌본 것으로 유명하다.
 
  광주 제중원의 윌슨 원장은 과도한 병원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사냥으로 풀기도 했다. 그의 사냥은 단순한 취미를 넘어 편집 증세까지 보였다. 한번 사냥을 나가면 인근의 화순 화학산과 지리산, 무등산으로 나가 일주일씩 사냥하는 게 보통이었다.
 
  머나먼 이국에서, 그것도 냄새 나는 한센인들과 살점 튀기는 수술과 악취 속에서 살아야 했던 그의 남모르는 고통과 헌신이 있었기에, 그리고 일과 함께 사냥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며 살아온 낙천적 인생관이 있었기에 1908년에 한국으로 와서 1948년까지 근무가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윌슨이 쓴 ‘한국에서의 사냥의 즐거움’이라는 글이다.
 
  〈겨울이 되면 수백만 마리의 까마귀들이 한국의 남쪽으로 몰려든다. 이들은 한센 환자들에게 음식도 되고 약재도 된다. 또 잡은 까마귀의 날개를 펼쳐서 밭 언저리에 걸어놓으면 까마귀들을 막을 수 있는 좋은 허수아비 재료도 된다.
 
  출몰한 까마귀 떼는 이제 막 자란 보리의 순들을 뿌리째 파헤쳐버리기 때문에 한센 환자들은 보리를 지켜달라고 간청을 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짐승의 고기라는 것을 잘 안다.
 
  한 소년은 자기의 약한 시력을 돕기 위해 ‘까마귀 다섯 마리’를 달라고 요청했다. 정확하게 ‘까마귀 다섯 마리’를 처방해 주면 된다고 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노루 2마리를 잡았는데 흰색 꼬리 종류였다. 그리고 여우 한 마리를 잡고 집으로 돌아올 채비를 차렸다.
 
  한국인들이 우리가 잡은 2마리 노루의 피를 달라고 했고,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김이 나는 피를 마셨다. 그 후 간과 허파를 잘라서 소금에 찍어서 같이 나누어 먹었다.〉
 
  소위 일벌레로 알려진 서서평 선교사나 브랜드 의사처럼 성실하게 일하며 사역 이외에는 아무것에도 한눈팔지 않았던 이들은 비교적 단명할 수밖에 없었다. 존경을 얻고 감동을 주었으나 본인은 단명했다. 윌슨의 경우는 반대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사냥 편집증은 우리 시각으로 비평하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많은 시간을 우리 곁에서 남들이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한센 환자들의 곁을 지킬 수 있는 요인도 됐다.
 
  1945년 광복 이후 미 군정청은 그를 소록도, 애양원 등 한센인 시설을 총괄하는 군정 자문관에 임명했고, 그의 아들 존 윌슨도 아버지의 사역을 이어 한국 땅에서 젊음을 불살랐다. 1948년 귀국 후 미국에서 신학공부로 목사 안수를 받기도 했던 로버트 윌슨은 1963년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서 8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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