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9년 의료선교사로 간호사 부인 페이지와 목포에 정착
⊙ 목포 프렌치병원에서 국내 최초 엑스레이 치료
⊙ 여성숙 전 광주기독병원장, “기도 막혀 졸도한 결핵환자의 음식물을 감염 무릅쓰고 입으로 받아내”
⊙ 1920년에 태어나 83세로 죽기까지 한국과 방글라데시에서 50년간 선교 사역
⊙ 카딩턴이 뿌린 결핵치료의 씨앗, 스티브 린튼과 인요한 박사 형제가 북한 결핵치료 사업으로
이어받아
梁國柱
⊙ 66세. 연세대 철학과 졸업. 연세대대학원 경영학과 석사.
⊙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회장, 한국학생연합회 의장, 이스라엘문화원장 역임.
⊙ 1987년 워싱턴으로 이주. 現 미국 버지니아주 소재 NGO단체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한국 내 사단법인 ‘서빙더피플’ 상임이사.
⊙ 저서: 《이스라엘 역사적 조명》 《조선교회사》 《제국의 무덤-아프간》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 외 다수.
⊙ 목포 프렌치병원에서 국내 최초 엑스레이 치료
⊙ 여성숙 전 광주기독병원장, “기도 막혀 졸도한 결핵환자의 음식물을 감염 무릅쓰고 입으로 받아내”
⊙ 1920년에 태어나 83세로 죽기까지 한국과 방글라데시에서 50년간 선교 사역
⊙ 카딩턴이 뿌린 결핵치료의 씨앗, 스티브 린튼과 인요한 박사 형제가 북한 결핵치료 사업으로
이어받아
梁國柱
⊙ 66세. 연세대 철학과 졸업. 연세대대학원 경영학과 석사.
⊙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회장, 한국학생연합회 의장, 이스라엘문화원장 역임.
⊙ 1987년 워싱턴으로 이주. 現 미국 버지니아주 소재 NGO단체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한국 내 사단법인 ‘서빙더피플’ 상임이사.
⊙ 저서: 《이스라엘 역사적 조명》 《조선교회사》 《제국의 무덤-아프간》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 외 다수.

허버트 카딩턴 선교사.
8만9000m²(2만7000평)의 땅, 그리고 병원시설을 사회복지법인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개신교의 수도 공동체)에 기증하였으니 어떤 의미에서 현재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그의 말도 거짓은 아니다. 연배로 따지면 1920년생인 카딩턴과 1918년생인 여 선생은 거의 동년배처럼 친구로 지냈다.
그는 반평생을 카딩턴과 함께 광주와 목포에서 결핵퇴치를 위해 바쳤다. 우리나라에서 카딩턴을 ‘결핵의 아버지’라고 하면 여성숙 선생은 ‘결핵환자의 어머니’다. 여성숙. 이 어른의 이름 석 자를 여수의 한센인 마을 애양원(愛養園)에서 들었다.
인촌상(仁村賞) 수상 대상자로 점찍고 이를 올리려 해도 한사코 본인이 거절하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다고 한다. 자기 이름 석 자 알리는 일에 목숨을 걸고, 박사 학위를 위해 거금을 들이는 마당에 이런 대박을 걷어차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하고 묘할 따름이었다. 여 선생은 결핵환자들과의 인연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전주예수병원에서 2년 반 동안 수련의로 있었어요. 그리고 광주 제중병원에 7년 반 있었고, 그 다음에 목포로 왔죠. 그렇게 차츰 이곳으로 내려오게 되었어요. ‘다음 차례는 제주도가 되려나 싶었는데, 못 갔어요.”
카딩턴의 결핵요양원 인계한 여성숙
![]() |
| 목포지역의 결핵환자를 돌보는 데 여생을 바친 여성숙 목포의원 원장. |
“원래 이곳은 친구가 운영하던 결핵요양원(목포의원)이었는데, 그것을 인계 받아 운영하게 된 거예요. 당시에는 목포와 섬 지역에 결핵환자들이 많아 병원에 환자들이 참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기왕 결핵환자들 돌볼 거라면 환자들이 많은 곳에서 보자’는 심정으로 주저앉은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친구란 다름 아닌 카딩턴을 일컫는다. 카딩턴이 선교부의 지시로 임지(任地)를 목포에서 광주로 옮겨가는 바람에 여성숙은 졸지에 그가 운영하던 목포 결핵 의원을 맡게 되었다. 황해도 송화 출신인 여성숙이 목포를 제2의 고향으로 여기며 눌러 살게 되었던 것이다.
“결핵요양원을 운영할 때 여기 머물렀던 결핵환자들은 대부분 가난했습니다. 어느 날엔가 병상에 환자가 없어져서 알아보니 가족들이 굶고 있고 아이들이 학교에도 못 가는 형편이라 집으로 돌아가 버린 거예요. 섬에 살고 있는 분이 있었는데 배가 끊겨 보름이고 한 달이고 약도 없이 그 집에 머물다가 결국 가족에게 전염되는 일도 있었어요. 먹고살기 힘든 때라 영양이 부족해서 생긴 병이었습니다.”
—카딩턴 선교사와 오랫동안 일하셨는데, 그분은 어떤 분인가요.
“카딩턴? 그 사람 아주 멍청한 사람이지요. 말릴 재간도 없었어요. 그분은 무얼 계산하고 사람을 상대하는 분이 아니니 주어도 주어도 끝이 없는 샘물 같은 사람이지요. 사랑의 샘물이랄까? 그 숱한 세월을 병원에 공짜 환자가 들이닥쳤습니다. 저는 그리하면 안 된다고 누누이 말리건만 그분은 폐에 구멍이 난 환자들, 전염성 강한 환자들을 버려둘 수 없다며 몇 안 되는 병실을 폐병환자 수용소로 만듭니다.
6·25전쟁 직후부터 먹고사는 일이 힘들어져 광주 천변(川邊)에 폐병환자들이 득실거렸습니다. 당시 전라남도가 ‘호남의 곡창’이라고 하지만 그건 돈 많은 지주들의 몫이고 가난한 민초들은 대개 풀뿌리로 연명하던 때였으니까요. 카딩턴 의사만 나타났다 하면 환자들이 줄을 지어 카딩턴을 거지 대장 삼아 따라다녔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하루는 화장실에 있던 환자가 갑자기 기도가 막혀 졸도를 한 거예요. 간호사에게 이 소식을 들은 카딩턴은 화장실로 쫓아가 그 환자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추고는 그 환자의 입안에 든 음식 찌꺼기를 자신의 입으로 받아 내는 겁니다. 나 같으면 죽어도 못할 일인데…. 그분에겐 그런 일이 다반사입니다. 참 멍청한 의사지요. 자신이 감염될 가능성이 가장 큰 병인데도요.”
카딩턴의 이름 석 자를 되뇌며 그를 ‘멍청한 사람’이라고 힘주어 말하던 여 선생의 목소리 톤이 갑자기 낮아졌다. 창밖의 먼 산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그의 눈망울에 눈물이 고였다. 이 땅의 병들고 가난으로 고통 받던 이들을 위해 함께 힘을 보탰던 동지를 그리워하는 눈물인 듯했다.
명문 코넬대학에서 의학 전공
여성숙 선생이 단도직입적으로 멍청한 사람이라고 했던 카딩턴의 인사기록을 살펴보았다. 학력이 모자란 것도 아니었다. 그는 남장로교 재단에서 세운 데이비드슨 대학을 나와 아이비리그 명문 코넬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의사가 되었다(1941~1944년). 군에서 군의관을 지낸 다음, 리치몬드에 있는 유니언 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1947~1948년). 평신도 의사이면서 안수 받지 않은 ‘목사 후보생’인 셈이었다.
학문적으로 가장 뛰어난 스펙을 가진 그가 어떻게 멍청한 사람으로 불렸을까. 제 아무리 멍청하다는 표현이 농담일지라도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결코 유쾌할 리가 없는 소리임에는 틀림없다. 그것도 보통 멍청한 것이 아니라 천하에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멍청이 바보 가운데 최상급에 속한다는 말이 아닌가?
광주에는 아직도 카딩턴을 바보라고 말하고 멍청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무수히 많다. 그러면서도 누구나 ‘멍청한 사람’ 카딩턴을 그리워한다. 그리움이 얼마나 진하고 진하길래 이토록 사무치는 것일까?
전라도 광주에서 의사요 선교사로 일했던 사람, 허버트 카딩턴(Herburt A. Codington. Jr).
그가 1950년대부터 1974년까지 일한 목포와 광주 곳곳에는 카딩턴의 이름보다 그의 한국식 이름 고허번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49년 7월, 목포로 부임한 카딩턴은 원래 3년간의 짧은 기간을 선교사로 지망해 한국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애당초 3년간의 기간을 설정하고 온 것이 25년에 이르는 동안 한국에서 그가 가난하고 병든 이들과 더불어 산 세월이 되고 말았다.
1974년 한국이 더 이상 원조를 필요로 하지 않는 나라가 되자, 기꺼이 방글라데시로 떠나가 그곳에 클리닉을 세우고 병자를 돌보며 전도인의 삶을 살았다. 1920년에 태어난 그가 83세로 죽기까지 한국과 방글라데시에서 미국인이 아닌 ‘천국 시민’으로 살다 간 세월이 곱절이었다.
그가 방글라데시로 갔을 때, 그의 나이가 쉰다섯이었다.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것이다. 그 나이라면 노년의 축복과 미국이 주는 시혜(施惠)를 누릴 법도 하거늘, 그는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불꽃을 하나님의 선교와 병들고 지친 이들에 대한 쉼표 없는 사랑으로 자신의 삶을 불태웠다.
1949년, 그가 목포에 처음 부임했던 프렌치병원은 목포 시가지 한복판에 자리 잡은 장로교 선교부의 병원이었다. 그는 이미 한국에 수많은 결핵환자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방사선 엑스레이를 구해 가지고 들어왔다. 비록 단기 선교사 지망생이었으나 엑스레이를 가지고 들어온 것을 보면, 그는 매사에 준비성 있는 선교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페이지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평생의 반려자가 된 페이지 랭카스터와는 6개월 동안에 걸친 예일대학교 극동연구소의 언어연수 과정 중 만났다. 당시 뉴욕 장로교 병원에서 정식 간호사가 된 페이지는 중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는 부모를 돕고자 중국어를 익힐 목적으로 이 학교에 들어온 터였다. 그녀는 원래 난징에서 태어나 상하이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런 그녀가 한국의 선교사를 목표로 헌신한 젊은 의사 카딩턴을 만나 중국에서 한국으로 방향 전환을 이룬 것은 대단한 기적이다.
1949년 2월 예일대학에서 언어 연수를 마친 그들은 4월에 결혼식을 올리고 그해 6월 30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일본으로 떠나는 아프론디아(Afrondia)호에 몸을 실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가 따로 없었다. 이듬해 3월, 아들 허버트 유진(Herbert Eugene)이 태어났고, 1956년까지 네 명의 아이를 더 낳았다. 결혼해서 6년 동안 다섯 명의 아이를 출산하고 아이를 기르는 일이 얼마나 벅차고 힘든 일이겠는가? 그리고 늦둥이를 1960년, 결혼 10년 만에 두었으니 이 부부가 살아가는 방법이 어찌 일반인과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생체적으로 허락만 된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무한대로 자녀를 낳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자식을 많이 두려던 욕심이 부인을 사랑하는 그만의 표현이었을까? 카딩턴은 아이들이 집에서 어떻게 뛰어놀건 크게 상관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집은 놀이동산으로 변해 난장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딩턴은 자신을 남에게 잘 보이려고 가식하지 않았다. 집으로 사람 들이기를 마다하지 않아 손님 시중 드는 일이 부인에게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워낙 한국인들과 선교부 내의 미국인들을 인종차별 없이 대했던 그에게 사람들은 모두 마음을 열고 대했다.
오히려 그의 인간적인 면을 거꾸로 악용하려 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돈 있는 한국 사람들마저 카딩턴 앞에 와서는 돈 없는 환자처럼 행세했다. “선생님… 저 돈이 없어요.” “안주머니에 돈이 보이는데요?” 여름날 환자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모시 적삼을 입고 온 탓에 호주머니 돈이 밖으로 내비친 것이다.
그럼에도 카딩턴은 시골에서 올라온 환자들의 행색이 남루하면 자신의 옷을 벗어 주었다. 그래서 어떤 환자들은 일부러 남루한 행색으로 나타났다. 이런 사정을 뻔히 아는 한국인 직원들이 이를 지적하면, “그래도 그들 가운데는 진짜로 어려운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환자의 62%를 무료로 치료
카딩턴이 기독병원장직을 내려놓고 결핵 파트만을 전문적으로 다루기 위해 내과만을 맡았을 때 외과 과장으로 일하다 병원장에 취임했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선교사는 카딩턴이 원장으로 재임할 때 광주 기독병원에 입원한 환자의 62%가 무료(無料) 환자였다고 말했다.
돈 없는 환자들이 병원에 찾아오면 입원부터 시키고 치료해야 직성이 풀리던 그의 성품 탓도 있지만, 그는 병원이 돈 버는 곳이 아니라 병자에게 인술(仁術)을 먼저 베풀어야 한다는 생명 경외(敬畏) 철학을 갖고 있었고, 예수 사랑을 병원 운영에서 몸소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딩턴의 이러한 병원 운영은 멍청이 짓의 대명사로 보였다.
병원 말아먹을 짓만 골라 했던 전임자에 비해 철저한 병원 관리를 통해 병원 시설을 확충하고 병원 내 간호전문대학까지 설립했던 디트리히 원장은 때로 허술하기만 했던 카딩턴을 비웃거나 무능하게 여기는 예의 없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후임 원장에 대한 카딩턴의 공손함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그만큼 재리(財利)에 밝고 똑똑했던 디트리히 선교사가 기독병원의 기초를 다지는 큰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카딩턴은 기독병원뿐 아니라 그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변함없는 사랑으로 회자되고 있다. 반면 똑똑한 사람이 세상을 지배하면 언제나 시끄럽다는 속설이 예외 없이 디트리히에게 불명예로 남는다.
두 사람은 우리나라에 인술을 베푼 의료 선교사로 많은 세월을 보냈으나 평가가 극명하게 나뉜다.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극명한 차이가 단순히 의사와 종교인의 간극을 넘어선 삶의 본질에 녹아 있는 탓이다.
그런 점에서 카딩턴의 생명 경외는 피아(彼我)의 구분을 넘어선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한국에 나와 있던 선교사들이 앞 다투어 일본과 미국으로 피란을 떠났지만 광주 선교부의 플로렌스 루트(Florence Root)가 남아 고아들을 돌보며 어려운 이들의 피란을 도왔고, 카딩턴은 부산에 남아 미군 병사들을 돕는 일뿐만 아니라 미군 등을 통해 부산에 있는 한국군 병원에 물자를 조달하려고 애썼다.
더욱이 부산 포로수용소에서는 부상당한 공산 포로들을 치료해 주고 돌보는 일이 이 땅의 평화와 화합에 선한 영향력이 될 것은 물론, 하나님의 긍휼을 드러내 주리라고 믿었다. 카딩턴은 빨치산의 준동으로 지리산 일대와 목포 지역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형편이 계속되자 전주에 남아 전주 미군 야전병원이 철수하면서 남긴 50여 명의 만성 감염성 공산군을 돌보았다.
카딩턴은 이들을 치료하면서 다시 자유를 얻은 남한 사람들이 공산군 포로나 그들에게 협력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복수하지 않도록 호소하기도 했다. 미국인들이 떠난 빈자리에 남겨진 공산군 포로들이 남한 사람들의 증오로 치료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카딩턴은 한 손으로 북한 공산군 포로들을 치료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성경을 나누어 주며 이들을 전도하기에 힘썼다. 진정 어린 그의 삶이 완악한 공산주의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이들을 회심시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카딩턴의 3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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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례 광주 5월 어머니재단 이사장. 광주기독병원 간호부장으로 15년을 일하면서 카딩턴 선교사를 도왔다. |
“그 당시는 헌혈이라는 게 없어서 당장 피 한 방울이 귀한 때였어요. 그런데 고허번은 뻔히 숨이 넘어가는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살리려는 안타까움에 수혈을 지시합니다. 병원 비즈니스를 생각하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왜냐하면 그렇게 사람이 죽고 나면 치료비를 냅니까? 병원을 상대로 고소고발이나 안 하면 다행인 게지요. 한번은 그분 사무실에서 카메라가 없어졌습니다. 병원이 발칵 뒤집혔지만, 그분은 오히려 담담했습니다. ‘그거 얼마 안 갑니다. 나보다도 더 필요한 사람이 가져갔을 것입니다’라면서요.”
안성례 선생은 “고허번의 삶은 ‘없을 무(無)’로 표현해야 한다”고 했다. 안 선생은 카딩턴은 딱히 논리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의 행적과 삶의 행태를 보면 다음과 같은 유추가 가능하다고 했다.
“첫째, 그분은 병자 최우선주의로 일하셨기에 환자가 돈이 있고 없고를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치료비를 못 받으면 할 수 없다는 식이었어요. 무료 환자가 많았다는 점에서 첫 번째 무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이 좋다 보니 자격에 미달하는 사람도 직원으로 받아 길러서 써먹었습니다. 무자격자를 데려다 직원으로 썼기에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당시는 워낙 먹고살기 힘든 때인지라 일자리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지요. 고허번 때문에 직업을 얻고 일자리를 얻은 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세 번째는 세상 사람들의 관점과 그분의 관점이 크게 달랐다는 겁니다. 심지어 자신이 소속한 남장로교 대다수 선교사들의 생각과도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장로 교단은 한국 선교를 시작한 이래 교회 개척 사역을 주로 했습니다. 그런데 고허번은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도 사람만 반듯하다면 가르치고 길러서 목사도 만들고 선생도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계획적이고 무정견(無定見)한 것처럼 보이지만, 고허번은 부족하고 모양이 뒤처져도 길러서 올바른 사람으로 일할 재목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카딩턴 역시 교단과 선교부 간의 오래된 전통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통적인 의미의 교회관에 매달리지 않았다. 그가 많은 부분에서 협력했던 오방(五放) 최흥종(崔興琮) 목사는 초기 한국 교회의 전통적인 목회 양식을 수용한 분이기도 했지만, 1938년 신사참배 이후 죽을 때까지 독자적인 목회와 신앙행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무등산 원효사(元曉寺·송광사의 말사로 6세기 초 창건)라는 절간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한센 환자와 결핵 환자를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며 그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기도 했다. 백범 김구(金九)가 수차례 찾아와 정치 지도자로 모시기를 바랐지만, 그의 삼고초려(三顧草廬)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광원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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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핵환자들의 생활공동체인 무등산 송등원의 옛 모습. |
동광원은 외부의 도움을 거부하며 자급자족하는 삶의 양식을 토대로 마을공동체를 일궈 가는 영성 수도 공동체다.
1943년 이현필 선생이 전북 남원 주민들 중 뜻이 있는 이들에게 성경 강해를 시작한 게 ‘동광원 공동체’의 시작이 되었다. 이들은 지리산 자락 서리내와 갈보리에 모여 움막을 짓고 노동을 통해 자급자족하는 삶을 영위했다. 이후 공동체 구성원이 차츰 늘어났고, 1947년 소년소녀 14명에게 성경을 가르치면서 수도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갖췄다.
1950년에는 광주를 중심으로 뜻을 같이한 유지 70인이 모여 고아원을 설립하고, 광주 YMCA 총무였던 정인세(鄭寅世) 선생이 원장 직을 맡아 시작했다. 이때부터 공동체가 ‘동광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전쟁 후 600여 명의 고아들을 돌보며 수도자의 삶을 살았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남원 동광원의 본원을 찾아갔지만 아무런 자료를 얻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설립자인 이현필 선생의 사진 한 장조차 얻기 힘들었다. 그들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철학으로 자신들이 이룬 성과나 업적을 문서로 남기지도 않고 홍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카딩턴의 도움으로 무등산 여러 곳에 결핵환자들을 위한 요양시설을 운영했고, 양림동에서 수백 명의 고아들을 돌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기념하는 증명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다.
그 점에서는 여성숙 선생 역시 같은 자세였다. 자신이 운영하던 목포 결핵병원과 카딩턴 선교사와의 기념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다.
“어차피 천국에 가면 만날 텐데 그까짓 것이 무슨 필요 있겠어요. 그런 거 남기면 쓸데없는 짐만 되지요. 사람이 살면서 행한 보응(報應)은 천국에 가서 받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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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광원 사람들은 1965년 사회복지법인 귀일원을 설립, 청빈, 순명, 순결을 생활신조로 살아가고 있다. |
동광원 사람들은 1965년, 사회복지법인 ‘귀일원(歸一院)’을 설립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신조로 장애인 가족들을 돌보고 있다. 전남 화순군 도암면과 경기도 벽제 계명산 아래에도 분원을 설립하고 각 지역별 영성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자발적 가난을 행하는 것이요, 정결한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청빈·순결·순명·깨끗한 사랑과 교제·자급자족의 노동과 봉사가 ‘동광원’ 사람들의 생활수칙이다. 청렴하게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는 ‘청빈’의 삶, 신체적으로 또는 심적으로 깨끗하게 정절을 지키는 ‘순결’한 생활, 순수하게 소명을 따르는 온건한 ‘순명’의 삶, 그리고 깨끗한 사랑의 교제와 부지런히 일하고 봉사하는 자급자족적 생활을 일상 구석구석에서 구현하는 게 ‘수도자의 삶’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일생을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남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밖으로 드러내거나 자랑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삶의 방식은 유화례 선교사나 카딩턴 선교사 모두의 삶의 방정식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이들은 선배 선교사 서서평이 1934년까지 광주에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 지키려 했던 ‘예수살기’로 이를 실천하고자 했을 뿐이다.
제2의 의료선교지로 방글라데시를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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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카딩턴 선교사 부부가 방글라데시에서 제2의 인생을 펼치기로 약속하며 광주 양림동 사택의 뜰을 거닐고 있다. |
데이비드슨 대학과 코넬 의과대학에서 함께 공부한 닥터 폴 크레인(Paul S. Crane, 1948년 전주예수병원을 개원하고 한국 최초의 수련의 제도와 기생충 박멸의 선구자 역할을 함)은 그가 변화를 받아 의료선교사가 된다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고 증언한다.
중국 선교사로 나간 부모의 영향으로 중국 선교사로 나가기를 지망했던 카딩턴 부인의 결정적 영향이 카딩턴으로 하여금 애당초 3년을 작정하고 왔던 한국에서 25년간을 버티게 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카딩턴이 방글라데시로 가서 제2의 의료선교사 인생을 살기로 작정하였을 때, 이것이 부인에게는 육체적으로 큰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에서 자녀를 낳고 기르는 동안 분만 후유증으로 뇌하수체 기능부전이 생긴 것이다. 선교라면 묻지도 않고 기쁜 마음으로 응답할 줄 알았던 부인이 한 달 동안 대답을 미룬 것이다.
페이지는 자신의 인생 또 다른 25년을 허브(그녀는 남편을 항상 허브라 불렀다)와 함께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시작된 아름다운 동행인 셈이다. 비록 뇌부전증의 합병증으로 말년에 파킨슨과 치매와 싸워야 했지만 찾아온 손님들이 ‘광주’ 소리만 발음해도 눈물을 흘릴 정도로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광주에 대한 본능적 애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 부부는 한국보다 더 열악한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Dhaka)에서 콜레라와 결핵, 한센 환자들과 더불어 그들의 새로운 삶을 이어 나갔다. 언제나 그들의 아침 식탁에는 바나나와 버터를 바른 빵 두 조각, 그리고 한 잔의 인도 커피가 올랐다. 아마 그 이상을 먹으면 사치라고 생각했을 법도 하다.
그는 다카의 북부 도시 빈민촌에서 흙벽돌로 된 진료소에서 매일 넘치는 환자들과 25년을 씨름했다. 시간이 나면 오토바이에 전도지(傳道紙)를 싣고 나가 전도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무슬림 국가인 방글라데시에서 전도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을 익히 아는 경찰들은 고발이 들어와도 매번 그의 선교를 눈감아 주었다고 한다.
사랑의 사도, 카딩턴에게 붙여진 수식은 실로 다양하다. 그의 이러한 사역에 힘을 더한 것이 한국 내 광주 기독병원을 위시하여 세브란스와 각급 기독교 병원, 그리고 대학들이 카딩턴의 ‘예수살기’를 돕기 위해 아직까지 아름다운 동행을 이어 가고 있다.
광주기독병원은 한국 기독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문화와 의료 산업의 총체적 역사라고 말할 것이다. 포사이드로부터 시작된 한센 환자를 섬기는 노력이 애양원으로 결실을 맺었다면, 루이스 브랜드(Louis C. Brand)와 카딩턴으로 시작된 결핵 치료사업이 방글라데시까지 뻗어 가고 있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결핵사업이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4대 후손인 스티브 린튼(Steve Linton)과 인요한(印耀漢) 박사 형제에 의해 북한으로 그 지경을 넓혀 가고 있다.
광주기독병원 원장을 지낸 송경의(宋京儀) 선생(신경정신과 전문의)은 “자신에게는 옷 한 벌만 남기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모든 것을 주고 사택까지 신학생들의 합숙소로 아낌없이 내놓았던 고허번 선교사의 삶을 통해 기독병원의 정체성이 확립되었다”며 “고허번 선교사는 눈앞에 보이는 환자 진료를 최우선 순위로 삼고 무등산 주변 곳곳에 결핵환자 요양소를 마련하는 등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몸으로 보여준 성자”라고 했다.
마이너스 인생으로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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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글라데시에서 환자를 돌보고 있는 생전의 카딩턴 선교사. |
그런 그가 3년은 고사하고 50년이란 긴 세월을 한국과 방글라데시에서 살았다. 그것도 미국인의 삶이 아닌 철저한 현지인의 모습으로 살아간 것이다. 당연히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포기해야 하는 어려운 결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1967년, 늦둥이 막내를 대천해수욕장에서 잃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닮아 빼어난 미인이었던 큰딸 줄리를 자동차 사고로 잃었다. 간호사가 되어 방글라데시에서 아버지의 뒤를 잇던 줄리가 성탄절을 틈타 잠시 방문한 미국에서 만취한 운전자가 몰던 차에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카딩턴은 살아생전 아홉 살의 아들, 스물여덟 살의 꽃다운 딸 등 두 자녀를 잃었다. 상실이란 모든 것을 앗아가고 힘들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예의 겸손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인간의 한계와 갈등, 문제를 극복하고 감사로 견디어 온 믿음만이 삶의 소망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가 의료선교사로 활동했던 전라남도 지역의 600만 인구 가운데 55%에 이르는 사람들이 가임(可姙) 폐결핵 환자였다고 한다. 못 먹고 살던 시절 영양이 부족했던 한국인들의 자화상이다. 그런 속에서 카딩턴은 물질을 움켜쥐려는 욕망이 크면 클수록 그것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을 배웠다.
카딩턴의 삶을 조망하면서 만약 그가 의사가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으로 이 땅에서 살았더라면, 청빈과 순결을 강조하며 살았던 이현필이나 최흥종 목사 같은 삶을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