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발굴

일제강점기 조선땅에 온 벽안의 선각자들 ④ 플로렌스 루트

전남지역 전쟁고아 돌본 ‘光州의 어머니’

  • 글 : 양국주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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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미스대학 나온 才媛… 1927~78년의 51년간 光州에서 고아들 돌보는 사역
⊙ 6·25전쟁 나자 전쟁고아들 목포로 피신시켜… 華鶴山에서 석달간 모진 피란생활 감내
⊙ 나환자촌 愛養園에서 두 자녀 입양… 日本의 진주만 기습으로 강제출국당해 생이별
⊙ 1963년 은퇴 후에도 15년간 전남의 섬 돌며 사역… 1995년 버지니아에서 102세로 永眠

梁國柱
⊙ 65세. 연세대 철학과 졸업. 연세대대학원 경영학과 석사.
⊙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회장, 한국학생연합회 의장, 이스라엘문화원장 역임.
⊙ 1987년 워싱턴으로 이주. 現 미국 버지니아주 소재 NGO단체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한국 내 사단법인 ‘서빙더피플’ 상임이사.
⊙ 저서: 《이스라엘 역사적 조명》 《조선교회사》 《제국의 무덤-아프간》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 외 다수.
유화례 선교사.
<7월 23일 아침, 광주(光州)에서 불과 10km 안팎 거리의 장성(長城)에 공산군이 쳐들어왔을 때 제가 알지 못하는 광주지역의 크리스천들이 저를 데리러 왔어요. 그때 처음으로 저를 보호하려는 그들의 계획을 알았지만, 제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요.
 
  열흘 만이라도 모든 일에서 벗어나 실컷 잘 수 있었으면 하고 봄 내내 갈망해 왔죠. 그런데 열흘이 아니라 76일이나 쉬게 되었답니다. 그 시간 동안 언제 얼마만큼의 잠을 잘 수 있는지에 대해 항상 제 맘대로 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한밤중에 이산 저산으로 옮겨 다니며 피신해야 했기 때문이지요. 1950년의 여름은 제게 진정한 축복이었답니다.
 
  초가집에 숨어 있거나, 산속의 자연 동굴이나 산골짜기에서 노숙을 하거나, 잡초들을 지붕 삼아 살았지만, 언제나 하늘 아버지의 사랑 가득한 보호 아래 있었지요. 하늘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사람들을 인도해 저를 그들의 보살핌 안에 두셨답니다.
 
  저는 좋은 음식을 먹었고, 필요한 의복을 얻었고, 아프지 않았습니다. 저를 돌봐준 동광원(東光園) 크리스천 공동체에 대해 그들의 명성 외에는 사실상 아무 것도 알지 못했지만, 그들은 오직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저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두서너 명의 젊은이들은 저를 구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목숨까지 내놓겠노라고 맹세했답니다!>(1950년 11월의 편지)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 가지만 전쟁은 새로운 변화와 수많은 이야기를 재생산한다. 이 이야기는 1950년, 6·25 전란 중에 고아들을 돌보며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했던 이들을 피란시키면서 한국을 떠나지 않았던 플로렌스 루트(Florence E. Root·1893~1995) 여사의 이야기다.
 
 
  華鶴山에서의 피란생활
 
  6·25 전란 중에 외국인들, 특히 한국인에 대한 사랑을 각별히 드러냈던 선교사들은 전란을 피해 가까운 일본이나 고국인 미국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1927년 이래 유화례(柳花禮)라는 한국 이름으로 이 땅에서 살았던 플로렌스 루트의 6·25전쟁 이야기는 그런 의미에서 각별한 감동을 준다.
 
  100일이 넘는 그의 피란생활은 한국에 온 선교사들 사이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야기다. 그가 훗날 자신의 이야기를 신문에 연재 형식으로 발표한 것을 보면, 그는 전남 화순군 청풍면과 도암면에 위치한 화학산(華鶴山·해발 614m) 계곡과 굴 속에서 피란생활을 했다. 당시는 이곳을 능주(綾州)라 불렀고, 유화례는 화학산에서의 모진 피란생활을 ‘하나님이 주신 여름 별장’이라고 회상했다.
 
  밤낮없이 그를 찾아 헤매는 인민군들과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을 해 가면서 도망자 신세로 살았다. 주로 산속의 자연 동굴과 계곡 사이의 적당한 곳을 찾아 낙엽으로 몸을 가리고 밤을 새웠다. 잠시 숨어 지내면 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화학산 토굴 속에서 숨어 지낸 날은 76일이나 됐다. 그의 나이 쉰일곱에 열흘 정도 잠이라도 푹 자고 싶다던 평소의 바람이 긴장과 숨 막히는 불면의 여름밤으로 이어진 것이다.
 
유화례를 살려야 한다는 본국의 캠페인 기사.
  그 사이 미국에서는 “유화례를 구하자”는 캠페인이 벌어졌다. 그를 선교사로 파송했던 미국 남장로교를 중심으로 고향인 뉴욕주와 모교 스미스 대학이 위치한 매사추세츠주 등지에서는 언론을 중심으로 못 말리는 고집쟁이 선교사의 애타는 스토리를 지면에 가득 실었다.
 
  그에게 매달 후원금을 보냈던 미시시피주 로럴(Laurel)의 장로교회와 그의 모교는 매일 밤마다 그를 위해 촛불집회를 열었다. 미국인들의 유별난 선교정신이 북한군에 의해 풍전등화(風前燈火) 같은 운명에 놓인 ‘유화례 살리기 캠페인’을 통해 6·25전쟁에 대한 뉴스 이상의 감동을 선물했다.
 
  남장로교는 이 캠페인을 통해 그들이 한 해에 모을 수 있었던 후원금의 열 배 이상을 모으는 기적을 일궜다. “모든 미국인은 전란(戰亂)을 피해 한국을 즉각 떠나라”는 미국 대사관의 빗발치는 독촉을 마다한 채, 유화례는 사랑하는 한국인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겠다며 한국에 남았다. 유화례의 결정은 스스로의 판단이었다.
 
  한국인들이 당하는 동족상잔(同族相殘)의 고통을 일본이나 미국으로 돌아가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도울 수도 있지만, 자신을 한국인의 일부로 여기며 살아 온 마당에 미국인이라고 자신을 ‘둔갑’시켜 한국을 떠날 수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선교부는 그의 결정을 존중해 주었다. 당시 한국에 와 있던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 400여 명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구축함 말리포사 호에 몸을 실었다. 목포에 와서 결핵병원을 시작했던 카딩턴(Cardinton) 선교사만이 부산에 남아 낙동강 전투에서 상해를 입은 전상자들을 치료했다. 대부분은 일본에서 대기하는 수순을 밟았다.
 
 
  고아들을 長城에서 木浦로 피신시켜
 
고등학생 시절, 뉴욕 쿠퍼스타운에서.
  유화례는 선교부의 기록과 중요한 문서를 자신이 교장으로 있던 광주광역시 양림동에 있는 수피아여학교(현 수피아여고) 뒷동산에 파묻었다. 공산군이 정읍(井邑)을 거쳐 장성까지 내려온 7월 23일까지 수많은 이들의 피란을 도왔다. 선교부 관내에 세운 충현원(忠峴園)의 고아들을 선교부 트럭으로 목포(木浦)의 고아시설인 공생원(共生園)으로 신속하게 옮겨야 했다. 거의 한달간에 걸친 피란 준비를 마무리할 즈음, 정작 자신이 피란을 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막상 공산치하가 되고 나니 인민군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이들, 적극적으로 인민군에 협조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심지어는 자신이 교장으로 있던 수피아여학교 선생들 가운데에도 세 명의 공산주의자가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많은 이들이 공산군에 동조하다 인민군을 따라 자진 월북했다.
 
  <수피아여학교 교사 세 명이 공산주의자로 밝혀졌습니다. 숭일학교(崇一學校·광주선교부가 세운 남학교로 現 숭일고교)에는 얼마나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제가 산에 피신해 있는 동안 양림교회 김창국(金昶國) 목사(시인 金顯承의 부친)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식솔들은 모두 여기에 있답니다.
 
  조용택(趙龍擇·옥과교회 전도사)이 들어와 시내 외곽에 있는 자신의 고아원 밖에 저를 위해 동굴을 준비했으니 자신에게 맡기라고 했습니다. 저는 피란 가는 사람들의 행렬 속에서 그를 뒤따랐습니다. 이공(李空) 이세종(李世宗·영성운동가)을 따르는 젊은이들(李賢弼과 鄭寅世 등 동광원 크리스천들로, 南原과 和順 등지에서 공동체를 운영)이 임시변통으로 마련한 지게에 저를 올리고 (송장처럼 위장해) 밖으로 운반해 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미리 준비한 곳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 밀치고 있어서 도무지 저를 숨길 수가 없었어요. 저는 아카시아 나무 덤불에 하루 종일 숨어 있었습니다. 해질 무렵 다시 저를 지게로 지고 갔어요. 무등산 아래서 캄캄한 한밤중에 두세 시간을 멈추었다가, 이튿날 두 번을 더 쉬고 중서지방 능주군으로 내려갔습니다. 간신히 그곳에서 저녁을 먹고 몇 시간을 쉴 수 있었답니다.
 
  날이 밝기 전, 우리는 가파른 산을 올라 1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아담한 집으로 갔습니다. 저를 데리고 온 이들이 농사 지으며 두서너 명의 아이들과 젊은이들을 돌보는 곳이었어요. 그래요. 그들이 바로 그 동광원 사람들이랍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목숨을 걸고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기꺼이 나를 지키고자 했던 이들이지요.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경찰인지 공산주의자인지 분간할 수 없는 세 사람과 맞닥뜨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알맞은 이들과 만나게 하셨어요. 우리를 검문하던 그들은 자신들의 입술을 닫고 우리들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그 지역에서 존경받는 크리스천 지도자인 정인세(당시 광주 YMCA 총무)를 알고 있었더군요. 정인세와 그와 함께하는 이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사는 것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많은 기적들 가운데 첫 번째 기적이랍니다.>(1950년 10월의 편지)
 
 
  호놀룰루에서 生涯 마지막 낭만을
 
  1893년 12월 미국 뉴욕주에서 태어난 유화례는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의 장로교 평신도 선교훈련 과정을 마친 뒤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조선에 왔다. 1926년 12월, 고베(神戶)를 거쳐 조선으로 떠나던 배가 호놀룰루를 경유하면서 크리스마스를 하와이에서 보내게 됐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를 미지의 세계로 떠나면서 하와이에서의 마지막 낭만이 그를 흥분시켰다.
 
  그는 샬롯 닷지를 렌트해서 하루 종일 하와이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와이키키 해변에서 수영도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다 정작 조선으로 가는 배를 놓칠 뻔했다. 음악을 전공한 감수성 많은 처녀가 미국이 주는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어떻게 강한 믿음의 여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
 
  하와이에서의 달콤한 낭만을 마지막으로 그의 인생은 그런 사치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통상적으로 3년에 걸친 한국어 훈련도 1년 반 만에 마칠 정도로 경성제국대학에서의 언어훈련을 최단기간에 이수했다. 그만큼 한국에서의 사역(使役)에 대한 열정과 집중력이 그로 하여금 한국에서의 기대에 부응할 정도로 과감하고 성실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더욱이 그에게는 6·25전쟁으로 인해 고국행을 거부했던 사건 말고, 또 다른 기적을 이미 맛보았던 터였다.
 
  1941년 12월, 일본은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적으로 공습하며 태평양전쟁의 막을 올렸다. 일본과 미국은 순식간에 적대관계로 돌아섰고, 일본은 일본과 조선에 있던 미국인들 모두를 강제로 추방했다. 이때 일본 정부는 자진 출국하지 않은 선교사들을 감옥이나 자택에 연금하는 형식으로 주거를 제한했다.
 
  남장로교는 당시 탤미지(Talmage) 선교사 부부와 유화례 그리고 도마리아(Mary Dodson) 등 네 명이 남아 선교부의 재산을 지키기로 했다. 일본 정부는 이들로부터 미국 선교부의 재산을 강탈할 목적으로 온갖 회유와 협박을 가했으나, 이들은 그들의 강압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 내는 데 성공했다.
 
  약 두 달간에 걸친 구금생활이 끝나고 6월 16일 고베에서 홍콩과 사이공을 거쳐 인도양으로 내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들은 아프리카 남단 모잠비크의 수도인 마프토(Maputo)와 핀란드에서 배를 갈아타고 8월 25일에 뉴욕에 도착했다. 고베를 떠나 하와이를 거치거나 샌프란시스코로 직행할 경우 보름 정도면 충분하던 바닷길이 일본과 미국이 적대적으로 바뀌고 나자 이처럼 두 달이 넘는 머나먼 길로 바뀌었다.
 
 
  입양했던 두 자녀와의 생이별
 
양자 이삭을 품에 안은 플로렌스 루트(왼쪽), 양녀 진주를 안은 마리아 도슨(오른쪽).
  유화례는 광주에 머물 때 선교부의 허락을 받아 1941년 3월부터 매달 1주간 여수에 있는 나환자촌 애양원(愛養園)에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함께 지냈다. 광주에서 한방을 사용한 동료 선교사 도마리아와는 친자매처럼 각별하게 지냈다.
 
  이들은 나환자촌에 머물며 손양원(孫良源) 목사를 도와 성경을 가르치거나 그가 감옥에라도 들어가면 그를 대신해 설교도 했다. 비록 육체는 냄새 나고 세상에서 손가락질당하는 추한 모습이었지만, 그는 나환자들의 내면에 눈부시게 아름다움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들에게 내세(來世)에 대한 소망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넉넉히 견디어 나갈 희망과 평안을 가져다주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흉측한 얼굴을 한 사람들 가운데 몇몇 이들은 그들 마음속에 있는 성령의 빛으로 인해 아름답게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지켜보는 것은 우리의 귀한 특권이랍니다. 나병환자인 부모와 함께 사는 두 명의 작고 ‘전염되지 않은 깨끗한’ 아이들이 있었어요. 나병환자 부모는 주위에 자식들을 맡길 연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인도하셔서 그 아이들을 돌봐줄 과부(寡婦)를 보여주신 후 아이들을 데려오게 하셨습니다.
 
  그녀는, 그녀가 말한 대로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 하기를 갈망하는 여인이었지요. 그녀는 아이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가 부유한 과부여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그녀는 가난한 과부였답니다. 이 아이들은 우리가 눈을 떼지 않고 돌볼 수 있고, 그들이 보살핌 받는 것을 관리할 수 있는 곳에 있어요. 두 살배기 남자아이는 어제 생양파를 먹었답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커다란 기쁨이랍니다. 자신의 자녀들이 깨끗한 육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그 나병환자 부모가 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게 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육체적으로 커 갈수록, 그들의 마음 역시 주님 보시기에 깨끗하기를, 그렇게 인도되기를 기도합니다.>(1941년 7월의 편지)
 
  당시 애양원에는 1500명 정도의 양성 나환자들이 수용돼 있었다. 문제는 나환자들끼리 결혼한 부부가 낳은 아이들이었다. 생후 2년 이내에 이들을 부모와 격리해 키우면 부모로부터 전염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 역시 자녀들에게 천형(天刑)의 균을 상속시키고 싶어하지 않았다.
 
  유화례와 도마리아는 애양원에서 일하며 교제하게 된 나환자의 아이 가운데 아들과 딸을 하나씩 입양했다. 아들을 이삭, 딸을 진주라고 이름 지었다. 아이들에게 부모의 정(情)을 붙이고 살 무렵,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이 터진 것이다. 이들은 한국에서 강제 추방당할 때까지 입양한 아이들과 1년 6개월 정도를 함께 살았다. 다만 정국의 혼란과 일본 식민 당국의 집요한 감시로 이들을 미국으로 데려갈 수 없게 됐고, 하는 수 없이 평소 잘 아는 여의사 혜은이라는 집에 재입양을 할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루트 양(유화례 선교사)과 저는 우리의 작은 소녀를 보러 갔습니다. 그 아이는 7년 전 나환자 수용소에서 데려와 우리가 1942년 떠날 때까지 약 18개월 정도 보살폈어요. 그리고 한 여의사가 그녀를 입양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는 그녀의 생일이랍니다. 그녀가 아기였을 때 돌봐주던 (박)순이도 만나 함께 두세 시간을 보냈어요. 그들은 서로에게 무척 헌신적이었고 그들을 만나서 매우 기뻤답니다.
 
  우리의 작은 소녀를 입양했던 의사 혜은은 신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현재는 집에 있지요. 저는 그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그는 설교경험을 쌓기 위해 시골 교회에 함께 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설교자가 될 것이고 친절한 일꾼이 될 것입니다(플로렌스는 한때 일본에 의해 전도가 금지되었을 때, 20여 명의 가난한 신학생들을 지원해 목회자가 되게 했다-필자 주).
 
  이 젊은이는 어젯밤 야곱이 브니엘(Peniel)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한 내용을 설교했고, 이 설교를 듣고 사람들은 교회를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저는 이 신학생을 눈여겨보고 있어요. 그는 언젠가 미국에 가고 싶어합니다.>(1948년 4월 메리 도슨의 편지)
 
  많은 선교사들이 “현지인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면서 정작 고아들을 자식인 양 입양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엘리제 셰핑 선교사가 열네 명의 고아들을 입양했고, 유화례가 두 명을 입양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특히 이들은 문둥이의 아이를 입양함으로써 그들의 한국인 사랑이 단순한 말뿐이 아님을 삶으로 보여주었다.
 
 
  가난한 과부와 어린 고아를 돌보기 시작
 
1930년대 공생원과 윤치호의 목포 고아들.
  해방 후 한국의 쌀의 보고(寶庫)라던 전라도에도 기근(饑饉)이 몰려왔다. 전쟁 통에 자식을 버리고 도망치는 부모도 생겨났고, 신안(新安) 섬사람들 가운데는 먹고살기가 힘들어지자 자식을 뭍으로 보내 고아 아닌 고아를 만들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자생적으로 시작된 사회복지기관은 1919년 3월 서대문에 윤치호(尹致昊)를 회장으로 내세우고 오긍선이 시작한 경성고아구제회(京城孤兒救濟會)다. 그는 구제를 목적으로 경성보육원을 설립했다. 당시 세브란스 병원의 의사였던 오긍선은 낮에는 병원에서 일하고, 밤에는 40명의 고아들과 더불어 살았다.
 
  오긍선은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자신을 루이빌 의과대학을 졸업시켜 가난한 한국인들을 돌보라던 약속을 지킨 셈이다. 더욱이 그가 일군 고아원은 근대적 사회복지의 효시(嚆矢)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줄리아 마틴(Julia Martin) 선교사가 함평(咸平)에서 만나 예수를 믿게 한 윤치호가 1928년 10월, 목포에 공생원(共生園)을 세웠다. 이남 지역에 세워진 본격적인 고아사업이었다.
 
  실제 전주에서 일하던 전킨(W. M. Junkin) 선교사 역시 포사이드(W. H. Forsythe) 선교사와 더불어 전주지역의 고아들을 보살폈다는 1904년의 기록이 있지만, 고아원이라는 형태로 지속적인 복지시설을 유지한 경우는 아니었다.
 
  셰핑 선교사를 제외하고, 고아들과 과부를 돌본다는 것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동반하는 일이고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고 교회 세우는 일이 선교사가 해야 할 일로 여긴 탓이다. 고아와 같은 복지사업이 선교부에서 주목받게 된 것은 1950년의 전란 이후였다. 그때는 전쟁으로 엄청난 가족붕괴와 이산의 아픔이 널린 때였다. 한국의 중증 환부(患部)를 선교사들이라고 눈감고 외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가 나서서 미국의 교회들과 조야에 한국의 어려움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초 무렵의 최영욱 의사와 김필례 여사의 모습.
  <플로렌스 양이 최 부인에게 보내는 쪽지에 의사 최씨(崔永旭은 金弼禮의 남편으로 광복 후 초대 전라남도 도지사였다가 공산군에 체포-필자 주)가 체포당해 고문을 당하고 9월 25일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합니다. 그 감옥에는 의사 최씨와 이야기를 나눈 세 명의 크리스천이 있었는데, 그들은 의사 최씨가 회개하고 진정한 크리스천으로서 생을 마감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1950년 안나 매퀸의 편지에서)
 
  광복 이후 초대 전남도지사였던 최영욱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인물이다. 그는 한때 광주에서 서석병원을 운영하기도 했고, 광주 기독병원에서 의사로 일했다. 남장로교 선교부의 장학금으로 세브란스를 졸업한 그는 부인인 김필례와 더불어 1925년경 미국에 유학까지 다녀왔다. 김천배(YMCA 총무)의 추천으로 초대 전남도지사 자리를 맡았다. 그런 그가 6·25 전란 중 공산군에 의해 수감 중에 옥사를 한 것이다. 그의 부인 김필례는 우리나라 여전도회와 YWCA운동을 창설한 여성운동의 독보적 존재였다.
 
  김필례는 6·25전쟁 발발 직전인 6월 초, 미국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가 전란이 발발하면서 남편의 부음을 들었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각 교회로 사발통문(沙鉢通文)을 돌려 남편을 잃은 김필례를 교회로 초청하도록 주선했다. 공산주의자들과 대치한 한국의 현실을 위해 미국이 나서도록 도와 줄 것을 호소하는 김필례의 간절한 요망은 이들을 감동케 했다. 그가 미국에서 돌아올 무렵 구축함 세 척 분량의 구호물자가 김필례를 ‘수취인’으로 부산항에 도착해 있었다.
 
  남장로교는 군산의 애육원(愛育園), 고창의 행복고아원, 광주의 동광원과 충현원 등을 집중적으로 도왔다. 이외에도 나이 든 이들을 돕던 이일성로원과 천혜경로원, 목포의 공생원 등이 선교부의 후원을 받았다. 대부분의 시설들이 500~700명의 고아들을 데리고 있었다.
 
 
  굶주림의 참담한 실상을 본국에 보고
 
1951년 무렵의 고아원에 지원된 물품들.
  <한국은 아직도 시련의 분량이 더 채워져야 하나 봅니다. 벌써 삼 년째 여름에 비가 충분히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다른 이들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의 수는 매일 늘어만 갑니다. 엄마가 자신의 아이들을 먹여살릴 길이 없어서 아이들을 강에 익사시킨다거나, 엄마가 간난아기를 고아원에 버리는 참담한 이야기들이 들려옵니다.>(1952년 9월의 편지)
 
  <환율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물가인상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어서 많이 염려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쌀 이외에 다른 것을 먹는다면 이렇게까지 나쁘지 않을 거라고 때로는 생각하려 했지만, 지금은 보리도 거의 쌀만큼 비싸졌고, 요리하기는 훨씬 더 어렵답니다. 감자는 끝이 났고, 그들에게 필요한 영양분을 위해 먹거리를 구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먹을 것을 사야 한다는 것은 애당초 그들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새 보리수확은 약 5주에서 6주가 더 지나야 하는데, 그때까지 그들이 어떻게 살아갈지는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단지 잡초에 불과한 것들을 여인들과 아이들은 녹색 채소로 먹으려고 길가와 공터에서 땅을 파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의 춘궁기(春窮期) 모습을 여러분은 보아야만 합니다.>(1952년 4월의 편지)
 
  한국인들이 당면하는 고난에 대한 분량은 그의 편지와 일기 곳곳에 나타난다. 그것은 단지 먹거리가 부족한 문제를 넘어 일제 식민지 수탈과 나라 잃은 민족의 아픔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울러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복음의 진실된 본질에 접근하는 신앙의 문제를 담고 있다.
 
  더욱이 그가 맡고 있는 수피아여학교를 중심으로 교육의 기회가 전무한 조선 여성들의 미개함과 지도력 부재를 안타까워하는 아픔이 진하게 배어 나온다. 누구보다도 조선인들의 밑바닥 삶을 경험하고 이들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가 접근하는 방식은 자신의 아픔보다 진하고 격렬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단호한 결기가 느껴진다. 누구보다도 한국인의 삶의 방정식에 따라 살았던 그였기에 주위의 한국인들에게도 한결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左右 목회자들을 화합시키다
 
1952년 남장로교 선교부의 지원으로 설립된 광주 충현원. 루트는 이곳에서 고아들을 돌봤다.
  <오늘 아침 저는 예레미야 33장 3절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어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그것에 대해 말할 게요.
 
  몇 주 전, 박동환 장로, 정인세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은 함께 모여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첫째, 광주의 교회 지도자들을 위해서, 둘째, 교회를 위해서, 셋째, 한국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기로 했지요. 함께 모여 기도하던 어느 날, 우리는 광주시의 목사님들에게 화해할 것과, 이 위험한 때에 주님 안에서 진정으로 함께 일할 것을 상의하기 위해 만날 것을 권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모였고 모두 세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소위 근본주의자들, 진보주의자들, 그리고 (기존의)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온 그룹이었어요. 저는 그들에게 짧게 우리의 목적을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최흥종(崔興琮) 목사님에게 몇 마디 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왜냐면 그가 가장 연장자였기 때문이었지요. 우연히도 그는 세 번째 그룹에 속해 있었습니다.
 
  최 목사님은 매우 간단하게 그리고 진실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침묵의 장벽이 있었죠. 아무도 기도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인도하셔서 그들이 모두 귀하신 한 분, 구세주를 함께 섬기는 것을 기억하도록 간곡하게 설득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하는 것을 거부하는 동안 사람들은 죽어 가고 나라 전체는 파괴를 향해 가고 있음을 기억하라고 말하게 하셨죠.
 
  그들은 조용히 듣고서 12월 28일에서 30일까지 짧지만 시간을 갖고 싶다고 했습니다. 일정이 짜이고 15명의 목사들이 이일학교 예배당에서 모여 하루에 두 끼를 먹으며 생활했습니다. 우리는 목요일 오후와 밤, 금요일 새벽·오후 그리고 밤, 토요일 아침 모임을 가졌습니다. 인도할 사람이 없어서 제가 인도했습니다. 저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인도했어요.
 
  박 장로님은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지요. 맨 처음 모임부터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죄에 대한 회개가 있었어요. 금요일 오후 모임에서는 아무나 자기 맘대로 떠드는 난투극이 있었지요. 죄를 고백하는 대신, 서로가 서로를 탓하는 것을 듣고 저는 믿음이 거의 사라져서 포기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바로 그때 분위기가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어젯밤과 오늘 새벽에 훌륭한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연합한 지체(肢體)들이 되어 돌아갔답니다.
 
  그리고 매주 일요일 교회에서 오후 예배를 드리고 함께 기도하기 위해 모일 것을 계획했어요. 기도 모임은 야간통행금지 때문에 저녁 예배를 대신해 중심이 되는 교회들 가운데 한 곳에서 연합 예배로 드려질 거예요.
 
  오늘 아침 마지막으로 ‘할렐루야, 놀라운 구세주’를 다 함께 불렀습니다. 모두에게 축복이 가득했고 확실히 제 잔이 넘치고 있었어요. 목사님들은 겸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이고자 하는 계획은 새롭게 영적으로 하나가 된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였지요. 악한 세력들을 흔들어 놓을 광주와 한국 전체 교회들의 깨어남 말고는 이번 크리스마스에 더 큰 기쁨을 가져다줄 것은 아무것도 없군요. 그러한 깨어남은 올 것입니다! 그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어요.>
 
  유화례의 이 편지는 1950년 12월 30일에 작성된 것이다. 6·25 전란 후 민족의 아픔과 교회의 일치를 위해 광주 지역의 기독교 지도자 15명을 초대해 허심탄회한 대화와 기도를 제안하는 데서 시작한다.
 
  문제는 보수와 진보 그리고 기성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간 무교회주의자들, 세 부류로 나뉘어 서로에 대해 삿대질하는 형국이었다. 그야말로 전란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비방하고 상대에게 책임을 묻는 처량한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다. 소위 목사라는 자들이 함께 만나는 법이 없고, 함께 광주를 위해 기도하는 모임조차 가져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76일 동안 화학산 동굴 속에서 피란생활을 경험했던 유화례에게는 진보와 보수의 경계를 넘어 한국이 먼저 하나가 되는 일이 시급해 보였다. 더욱이 6·25전쟁을 경험하고 난 직후인지라 절박한 일이 민족통합이었다.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인들의 문제를 한국인들 스스로 외면하는 현상이었다.
 
  사랑을 외치면서 이웃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사들의 설교가 무색한 꼴이 되었다.
 
  유화례는 이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기도하고 서로를 향한 심중을 풀어 놓기를 바랐지만 이마저도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유화례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했다. 연약한 한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을 던져 한국을 사랑하는 헌신이 이들 모두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지나온 100년 선교역사에 우리나라를 찾아온 그 수많은 선교사들 누구에게서 발견하지 못하는 유화례만의 영적 리더십이었다.
 
  자신의 몸을 던져 대의를 살린 진정한 영적 거인이었기에, 그리고 그 삶의 중심에 한국인으로 한국인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순교적 자세로 살아왔기에 그분에 대한 존경심과 진정성이 뭇 목사들의 마음을 호령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유화례는 감히 이 시대에 그리운 어머니의 모습이다.
 
  결국 그들은 며칠간의 기도 모임 끝에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가 되어 돌아갔다. 그리고 광주를 위해, 나라를 위해 새로운 헌신의 결단과 반전의 기회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진보도 보수의 문제도 아니다.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용납만이 가능케 하는 일이었다.
 
 
  은퇴 후에 보낸 복된 삶
 
1958년 수피아 교장 시절 유화례의 모습.
  유화례 선교사는 공식적으로 1963년 선교사로서의 사역을 마치고 은퇴했다. 그는 여느 사람처럼 고국으로 돌아가 편안한 말년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더 이상 봉급이 주어지지 않음에도 1978년, 그의 나이 여든다섯까지 이 땅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섬겨야 할 일을 부지런히 찾았다.
 
  은퇴 후 잠시 목포에서 정명여학교 교장 직을 수행한 일 말고는 전라남도 섬 지방을 다니며 전도인(傳道人)으로 살았다. 당시에 섬 지방에 변변한 숙박시설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목포에서 나룻배를 타고 크고 작은 섬들을 찾아다녔다. 한국 안에서 가장 버림받은 섬사람들이 그의 눈에 밟힌 것이다. 그리고 당시 섬 지방에는 이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들이 먹고살 문제와 더불어 남한에 정착해 살아가야 하는 절체절명의 문제가 가로놓여 있었다.
 
  더욱이 고향을 버리고 외로운 섬 지방에 정착한 이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심는 일은 유화례 선교사와 같은 이들이 감당할 최적의 사역이었다. 이 땅에서 고통 받는 이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이들을 향한 유화례의 관심은 그가 일찍이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1927년 이래 광주에 몸담으면서 선배 선교사였던 엘리자베스 셰핑(Elizabeth Shepping·1880~1934)으로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받았던 감화의 결과였다.
 
  선교부에서 같은 방을 사용했던 메리 도슨 선교사는 1912년 셰핑과 같은 해에 광주에 부임했다. 셰핑이 1934년에 죽기 전까지 함께 전도하며 동고동락해 온 처지다. 그런 이유로 선교부 내에서 가장 존경받던 선배 셰핑 선교사의 삶은 언제나 유화례에게 살아 있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병상에서도 한국을 위해 기도
 
1993년 미국에서 백수를 맞은 플로렌스 루트의 모습.
  도슨과 유화례에게는 평생을 지고 갈 숙제이기도 했거니와 선배가 남겨 준 유업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수피아 교장 직을 맡지 않을 때에는 도슨과 번갈아 가며 그가 일군 이일성경학교의 교장 직을 맡아 전도부인을 양성하는 일에 진력을 했다.
 
  자신을 비우고 예수처럼 살기로 작정한 그에게 더 이상 1926년 크리스마스에 하와이에서 닷지 차를 렌트해서 황홀하게 해변을 배회하던 여유를 앗아가 버렸다. 그저 지치고 힘든 한국의 민초들에게 사랑으로 다가서는 일이 그의 유일한 기쁨이고 낙이었다.
 
  한 해를 목포에서 보낸 그는 광주 양림동에 작은 집 한 채를 지었다. 주로 광주 교도소의 장기 복역자들과 삶을 나누는 일로 한국에서의 나머지 삶을 살았다. 그는 1978년 전라도 광주에서 51년간에 걸친 봉사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갈 때 동료 선교사들의 애잔한 송별보다 값진 것은 광주 교도소 죄수들이 마련한 송별연이었다.
 
  그가 이 땅을 떠나던 1978년, 그의 나이 여든다섯이었다. 광주에서만 51년을 보냈고, 1927년 수피아여학교 음악교사를 시작으로 오랫동안 수피아여학교의 교장을 지냈으니 말이다. 수피아여고는 1974년 플로렌스를 기념해 ‘플로렌스 기념도서관’을 건립하기도 했다. 수많은 제자들과 지인들이 그를 가리켜 ‘광주의 어머니’라고 일컫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버지니아주에서 10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유화례의 묘소.
  다만 자신이 광주에 머물러 있는 것이 주위에 짐스럽고 부담을 주는 듯해 미국으로 옮겨 살았다. 하지만 언제나 한국에 묻히기를 바랐다. 1995년 102세의 일기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필자는 매달 한 차례 유화례 선교사의 병상을 찾았고, 한국을 잊지 않고 매일의 기도 제목으로 한국의 복음화와 한국 사회의 안정과 통일을 기도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기도하던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자신의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한 탓일까. 묘지를 구입하고 관을 준비하면서도 가격이 가장 싼 것 가운데서 고르라고 했다. 그는 말년에 자서전을 쓰라는 주위의 권유에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나를 미화할 수 있느냐”며 거절했다고 한다.
 
  자신을 위해서는 철저히 돈을 아끼고, 심지어는 집으로 배달되는 카드 샘플조차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다 이를 재활용하며 근검절약하는 삶을 살았다. 반면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 대하여서는 한없는 자비를 베풀었다. 자신이 받은 봉급의 대부분을 군산에 사는 양딸 정금순, 김천배 부부가 운영하던 군산보육원에 보내 주었다. 고창의 행복고아원도 그가 돌보는 시설이었다. 당시 교회의 형편들이 지독한 가난으로 찌들어 있던 때인지라 교회에서 설교 부탁이 오면 사례를 받지 않았다.
 
  버지니아주 해리슨버그에 있는 장로교 은퇴자 수양관에 머물다 1995년 102세의 일기로 소천한 유화례, 아직도 한국 땅을 향해 누운 그의 시신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엎드려 기도하던 모습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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