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발굴

일제강점기 조선땅에 온 벽안의 선각자들 ② 한센인의 아버지 포사이드

한센병 여인 구한 선한 사마리아인, 조선의 한센인 사역에 불을 댕기다

  • 글 : 양국주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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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4년 來韓해 1911년까지 선교… 루이빌의과대학 졸업한 秀才
⊙ 群山 지역에서 의료 선교하다 강도의 습격으로 왼쪽 귀 잘리기도
⊙ 죽어가는 동료 선교사 구하러 가다 길거리에 쓰러진 한센병 여인 보고 먼저 구해
⊙ 풍토병 스프루에 걸려 死亡… 여수 애양원 등 전국의 한센인 시설 건립 이어져

梁國柱
⊙ 65세. 연세대 철학과 졸업. 연세대대학원 경영학과 석사.
⊙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회장, 한국학생연합회 의장, 이스라엘문화원장 역임.
⊙ 1987년 워싱턴으로 이주. 現 미국 버지니아주 소재 NGO단체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한국 내 사단법인 ‘서빙더피플’ 상임이사.
⊙ 저서: 《이스라엘 역사적 조명》 《조선교회사》 《제국의 무덤-아프간》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 외 다수.
포사이드 선교사.
1893년 4월, 일단의 동학민이 서울로 진격했다. 그들은 궁전 밖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붉은 천에 덮인 자그마한 상(床)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공손히 펼쳐 왕에게 자신들의 탄원을 들어주고 동학을 공식적으로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들은 또 이 나라에서 모든 외국인들을 몰아내기를 요청했다.
 
  “외국인들이 오기 전에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충분했고, 나라도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왕은 이들에게 외국인들의 원조도 받지 않고 나라도 잘 지키겠노라고 약조했다. 이들은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의 종교’를 지향하고 이 땅에서 외세를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이나 일본 함포가 제물포에 와서 암묵적인 시위를 하면 ‘양놈들을 몰아내자’는 깃발 아래 모였다.
 
  이 무렵의 조선이 가장 살기가 어려웠던 때였던지라 가진 자에 대한 가난한 이들의 저항심이 다분히 내포됐다. 더욱이 관리들의 부패와 수탈이 극심한 때라 백성의 궁핍은 이루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들의 소위 “못 살겠다”라는 표현 속에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더 이상 사는 게 아니다”는 현실이 담겨 있었다. 동학민은 이따금씩 서울로 몰려와 시내를 행진하고 집단적으로 그들의 힘을 과시했다. 고종은 자신이 외국인들을 돌보는 이유를 설명하고, 동학인들은 자신의 문제나 신경을 쓰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답했다.
 
 
  선교사들에게 위협 가해
 
1910년 선교사들의 단체사진. 맨 뒷줄 왼편이 포사이드의 모습이다.
  당시 조선은 대원군에 의해 오랫동안 쇄국 정책으로 일관하였기에 외국인들에 대한 반감과 적대적 인식이 적지 않았다. 동학은 노골적으로 감성적 민족주의를 부추기기도 했다. 1892년 11월, 내한 이래 전주를 중심으로 군산과 목포에 둥지를 틀었던 남장로교선교회는 “서양인들을 죽이겠다”는 온갖 협박에 시달리기도 했거니와 미국 공사의 지시에 따라 군산으로 난 해로(海路)를 따라 긴급 대피하는 소동도 있었다. 황주 땅에서 선교사 하워드 모펫(Howard F. Moffett)이 당한 육체적 협박은 애교에 가까웠다.
 
  1894년 동학은 핍절한 민중의 삶을 위한다면서 전주(全州) 시가지의 3분의 1을 불태우고 가난한 민중을 길거리로 내몰았다. 서양인들을 내몰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동학이 당시 민중의 삶을 위해 무엇을 기여했는지 깊이 참고할 대목이다. 나라 하나 제대로 건사하기 힘들었던 이씨 왕조의 무능과 부패는 제 살길 찾아 바쁜 형국이 마치 북한의 오늘 모습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약 2만명가량의 한센병 환자가 있었다. 대부분이 경상도와 전라도의 남쪽 따뜻한 지역에서 발병했다. 나라는커녕 그 어느 종교 집단도 고단한 민중의 삶에 눈을 돌리는 법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부호 세브란스(Severance, L. H.) 씨가 서울에 병원을 짓고자 1만 달러를 쾌척했을 때 대부분의 선교사는 이 돈을 병원 짓는 데 사용하지 말고 교회당 짓는 데 사용해야 한다면서 기부자의 순수한 뜻을 거스르기도 했다. 예수 믿고 천당만 가면 됐지, 민중의 질병이나 배고픔은 나라가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세브란스가 이를 완곡히 거절하자, 그때야 북장로교는 고집을 꺾고 세브란스 병원은 착공되게 되었다.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린 광주 제중원(濟衆院)의 간호원 조지아 휘슨(Georgia Hewson)이 서울로 올라와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모든 사정이 열악했던 1923년의 모습이다. 하물며 천형(天刑)의 죄인으로 치부되던 나환자들은 그 어느 누구로부터 돌봄을 받는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심지어는 한센병 환자는 씨를 말려야 한다며 ‘정관 시술’을 강제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한센병 환자를 지극 정성으로 돌본 사람이 윌리엄 포사이드(W. H. Forsythe·1873~1918) 선교사다. 1904년 9월 29일 고베(神戶)에서 기항하는 배를 타고 제물포에 내렸다, 1911년 병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18년 죽기까지 보낸 세월, 그의 관심은 오직 ‘조선’뿐이었다.
 
  그는 전주 예수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면서 한글을 익히느라 처음 2년을 보냈다. 틈만 나면 남문 시장터로 ‘쪽 복음’을 들고 전도하느라 바빴다. 또한 그는 전주 지역의 거지 아이들을 위한 고아 사역을 시작하였다. 더럽고, 추위에 떨고, 배고픈 거리의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따뜻하게 문질러 주고, 옷 입히고, 먹이고… 생각만 해도 감동스러운 사람이었다. 한번은 그가 부모 없는 아이들을 굴뚝 통로에서 불러내 보니 3명은 유기 상태로 이미 죽었고, 7명이 겨우 살아남았다. 그중 병원에서 죽은 아이는 “고통이 없는 아버지 집으로 저를 데려다 주세요”라며 숨을 거두었다.
 
  하루종일 번잡한 시장터에서 이런 벌거벗은 아이들이 아무런 표정도 없이 하루를 보냈다. 당시 한국에서 한국인의 인권은 무가치했다. 포사이드는 어느 누구도 한국인의 영혼이나 육체에 대해 존재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신경 쓰지 않을 때, “여러분, 그리스도의 친구여, 이들이 벌거벗은 채로 앉아서 무감각하게 굶어 죽어가는 것을 아무도 돌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조선인들을) 돌보아야 합니다”라며 미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한국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강도의 습격으로 왼쪽 귀 잘려나가
 
  그는 내한 이듬해 군산 지역에서 의료 사역을 하던 중 강도의 습격을 받아 왼쪽 귀가 잘리는 사고를 겪게 된다. 그는 즉각 세브란스로 옮겨져 에비슨과 헌트의 집도(執刀)로 응급처치를 마치고 완전한 회복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09년 3월, 미국에서 치료를 마치고 목포로 돌아온 포사이드는 이미 긴 여행을 통해 지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동료들과 자신의 전도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기독교인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군산과 전주로 떠난다. 당시 한국 내에서의 지방 여행은 지금과 달리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고생을 밥 먹듯이 해야 하는 지루한 여정이었다.
 
  1909년 4월 2일 포사이드는 보름간의 전주 여행을 마치고 목포로 돌아왔다. 목포에 도착한 바로 그날, 광주의 클레멘트 오웬(Clement C. Owen·1867~1909) 선교사가 위중하다는 전보를 받았다. 오웬은 광주 남쪽 지역 순회 전도를 나갔다가 광주에서 70마일(113km) 떨어진 장흥에서 이질에 걸려 죽음 직전까지 간 것이다. 광주 제중원의 외과 전문의 윌슨(Wilson)은 폐렴에 시달리는 오웬을 위해 내과 의사인 포사이드의 도움이 절실했다.
 
  1904년 광주 선교부를 개척했던 클레멘트 오웬의 마지막 순간이다. 광주 양림동에는 ‘오목사’라는 비석과 함께 한국에서 처음 죽은 남장로교 선교사 오웬의 묘지가 있다. 그의 묘비에 적힌 내용이다.
 
  <1909년 봄 그는 광주 지역 남쪽으로 79마일(127km)을 돌며 순회했다. 열흘 후 그는 시골에서 심한 오한에 사로잡혔다. 하루종일 아무 간호도 받지 못한 가운데 고열에 시달렸다. 월요일 아침 조금도 나아지지 않자 그는 신실한 친구들에 의해 가마로 세 개의 산을 넘어 시골 면 소재지로 이송되었다. 여인숙에서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다. 다음날 그의 기력이 더 떨어지자, 30마일(48km)을 더 갔다. 가마꾼은 밤사이 길을 재촉해 광주에 새벽 2시에 도착했다.>
 
 
  오웬 선교사를 치료하러 가는 길
 
1940년대 사회에서 내몰리던 나환자와 결핵환자들이 스스로 마련한 민둥산 거처.
  포사이드가 서둘러 떠났던 목포와 광주 간의 거리는 90km였다. 당시에는 두 도시를 직접 연결하는 길이 신통치 않았다.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이동 경로는 말을 이용한 육로가 아니라, 목포에서 배로 영산강을 타고 올라가 영포(지금의 영산포)로 가야 했다. 밀물 때면 더 올라갈 수 있어 지금의 ‘호가정(浩歌亭)’까지 갈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영산포에서 하선해 강 서쪽 옆으로 난 길을 따라 호가정까지 이동해야 했다.
 
  호가정에는 지금도 정취 있는 정자가 있는데, 그곳이 옛 나루터임은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호가정 나루터에서 거룻배를 타고 강 건너 벽산동 포구에 이르면, 날씨가 짓궂은 날이면 길이 진흙탕으로 변했다. 이 마을에서 광주까지는 약 15km 거리다.
 
  “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 강 양안은 경치가 장엄했고, 날씨는 화창해서 새집으로 가는 길은 모두 감사했다. 후에 바람과 파도가 좋지 않은 가운데 몇 사람은 뱃멀미를 해서 수백 년 전 뉴잉글랜드의 해변에 상륙한 사람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1904년, 목포에서 광주로 거처를 옮기던 조지아나 휘팅이 쓴 ‘영산강 뱃길’ 이야기에서)
 
  포사이드가 광주로 오던 중 오웬은 이미 유명을 달리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는 포사이드의 마음은 황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그가 광주까지 15km 정도 남았을 때, 길거리에서 거적때기 위에 누워 있는 한 여인을 만났다. 신음소리를 내며 자신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녀는 4월의 쌀쌀한 날씨에도 자신의 몸 하나 가누기 어려운 한센병 환자였다.
 
  4월의 추위 속에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포사이드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이어진 그의 행위를 보면 알 수 있다. 지체하지 않고 말에서 내린 그는 진흙 길에 누워 도움을 청하는 그 여인을 들어올렸다.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그녀의 가냘픈 몸을 감싸 안았다. 죽음 직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동료 선교사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사실 이 불쌍한 조선의 여인 한 명쯤이야 내팽개치고 그냥 간다 한들 누가 뭐라 하겠는가? 조선의 임금이나 나라도 구제 못 하는 걸 외국에서 온 선교사가 책임져야 할 일도 아니지 않은가? 더욱이 한센병은 천형이라고 해서 누구도 선뜻 나서는 병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한센인을 돌본다는 것은 돌봐주나 안 돌봐주나 아무런 공로나 이익도 없는 일 아니던가? 오히려 돌아서서 모른 체하고 가던 길을 재촉하는 편이 현명했을 것이다. 더욱이 자신은 죽음 직전에 있는 사람을 구제하러 가는 중이 아니던가?
 
  더군다나 이 여인은 생면부지의 사람이요, 광주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은 이역만리 조선까지 와서 동역(同役)하는 친구다. 학벌로 따지면 광주의 친구는 남부의 명문 햄든시드니대학을 나와 버지니아대학에서 의술을 익혔고, 미국 최고의 명문 신학교인 유니언(UTS·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the City of New York)을 졸업한 수재 중의 수재다. 그에 비하면 이 여인은 그야말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오웬은 선교사이기도 했지만 의사이기도 했다. 이 버러지 같은 여인을 구하는 것보다 오웬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 훨씬 값어치 있는 일이었다.
 
  그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는 조선에서 더 많은 훌륭한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포사이드로 하여금 그 여인 앞에 무릎 꿇게 만들었을까? 자신이 배운 학문과 지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센인 여인을 말에 태운 ‘선한 사마리아인’
 
  지난 세월 루이빌의과대학(Medical collage of Louis-Ville)에서 공부를 하고, 쿠바에서 군의관으로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치열하게 살아남으면서 그가 만났던 피 묻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 주님이 포사이드에게 새로운 생명의 삶을 전해준 것에 비교하면 자신의 학문이나 의술은 실로 초개(草芥)와 같은 것이었다.
 
  학문이나 명성이나 돈도 사람이 있고 생명이 있기에 의미 있는 일 아니던가? 그러기에 그는 지극히 작은 일에, 겉보기에 무가치한 일 같지만 온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는 일에 귀를 기울였다.
 
  포사이드에게 들린 이 신음소리는 십자가상에서 ‘보라 네 어머니다!’며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시던 예수의 절규 같은 것이었다. 군산 말목장터 인근에서 야심한 밤에 강도들로부터 잃어버린 ‘상처 난 귀’에 너무나 강렬한 주님의 음성이 가냘픈 한 여인의 신음으로 들린 것이다.
 
  포사이드는 주저하지 않고 한센병에 걸린 여인을 자신의 말에 태우고 자신은 스스로 마부(馬夫)가 되어 20km 정도를 걸어 광주 선교부에 도착했다. 자신의 몸은 이미 오랜 여행으로 탈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한센병 여인을 자신이 타고 가야 할 말에 올리고 자신은 마필을 이끄는 마부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의 본질이다. 제아무리 돈이나 학식이 많은 사람도, 사회적 지체가 높은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기꺼이 말을 끄는 마부가 된다.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적 관계를 준 구세주(救世主) 예수를 바로 만나면 이렇게 인격이 뒤집히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게 기독교의 본질이다.
 
  이 길가에서 만난 여인이 포사이드에 의해 구조된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포사이드가 한센병 여인을 자신의 말에 태운 일은 한국 사회에 어떤 의미를 주었을까? 보통 사람들에게 자선은 자신의 몸과 마음이 편안할 때 베풀 수 있는 것이다. 마음에 경황이 없고 몸이 지쳐 있음에도 남을 도울 수 있다면, 이는 몸과 정신이 아주 잘 훈련된 사람이다. 그야말로 하나님과의 동행과 친밀함이 성숙한 사람이다.
 
 
  오웬의 죽음
 
광주에 있는 오웬 선교사의 무덤.
  포사이드가 한센병 여인을 말에 태우고 광주에 도착했을 때, 광주선교부는 말 그대로 초상집이었다. 유진 벨(Eugene Bell)은 신학교 강의를 위해 평양에 머무르고 있었고, 포사이드를 그토록 기다리던 오웬은 1909년 4월 3일에 이미 주님의 품에 안긴 상태였다. 모든 상황이 끝나 있던 터라 포사이드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포사이드는 오웬 부인에게 조의를 표하면서 마음이 더욱 미어터지는 듯했다. 그녀는 만삭의 몸으로 넷째 아이의 출산을 코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웬 부인 역시 매사추세츠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북장로교 선교사로 파송되어 온 전문인 선교사였다.
 
  그가 결혼 9년 만에 네 번째 아이를 출산할 무렵 저 배 속의 아이는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날 처지가 되었다. 그야말로 한국 땅에 자녀 한둘을 묻지 않은 선교사가 몇 명이나 있을까? 또 아버지나 어머니 없이 자란 선교사 자녀들은 얼마나 될까? 한국 사회는 이들의 노고에 진정한 감사를 하고 있기나 한 것일까?
 
  오웬의 장례식은 4월 5일에 있었다. 당시 한국의 사회적 환경은 건강하게 살아간다는 게 기적이라고 할 만큼 모든 게 최악이었다. 1900년에 조선에 와서 40년 동안 평양과 관서 지역에서 일한 편하설(Charles F. Bernheisel) 선교사의 일기에는 당시의 처참한 상황이 역설적으로 표현된다.
 
  <1902년 12월 10일 남장로교 해외 선교부와 연결된 테네시주 내슈빌의 신학박사 데이비드 랜킨 목사가 저녁 무렵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는 동양의 선교지들을 방문 중이다. 12월 11일, 오후에 랜킨, 모펫 등과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저녁에 마을로 돌아오면서 랜킨은 마차 의자에 앉고 나는 당나귀를 탔다. 그는 매우 다정한 신사이고 대단한 달변가이다. 하루가 즐거웠다.
 
1910년대의 나환자 모습.
  12월 18일, 모펫 박사의 집에서 불행히도 아픈 랜킨 박사를 밤새도록 간호했다. 12월 19일 랜킨 박사의 병이 폐렴으로 판명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는 몇 주간 아플 것이다. 12월 22일, 밤 1시까지 랜킨 박사를 간호하였다. 매우 흔한 일이다. 우리는 몹시 걱정하고 있다. 12월 27일 랜킨 박사가 오후 2시에 소천(召天)했다. 그는 경련을 일으키다 사망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숨을 거두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의 뜻이고, 우리는 주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
 
  12월 29일 오후, 모펫의 집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마당에 모였고, 장지까지 따라갔다. 1903년 1월 18일, 수일 동안 아팠던 베어드의 아기 아더 아담스가 오후에 사망했다. 작년 11월에 한 살이었다. 1월 19일, 이른 아침 노블 부부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오후에 베어드 씨의 아기 장례식을 치렀다.
 
  1월 20일 리처드 베어드가 자기 동생이 죽은 바로 그 병에 걸렸다. 그는 곧 회복되리라 믿는다.
 
  2월 1일 리처드는 조금 차도가 있지만 아직 일어나지는 못한다. 존과 윌리엄이 백일해(百日咳)를 앓고 있음이 밝혀졌다. 2월 12일, 웰즈의 아기 메리 루가 베어드가 죽은 병에 걸려 매우 아프다. 2월 13일 오후에 웰즈 아기가 사망했다. 참으로 슬프다. 11월 1일 아침에 스왈른 부부에게 딸이 태어났다. 11월 27일, 헌트 가족에게 성홍열(猩紅熱) 기미가 보인다. 우리는 더 이상 번지지 않기를 희망한다.>
 
  젊은 선교사가 현장에서 발생하는 온갖 고통과 돌림병의 실상을 보고 적은 일기이다. 이것이 1900년대 초 우리나라에 와 힘겹게 살았던 선교사들의 모습이다. 돌림병은 차별이 없어 미국인이라고 비켜가지 않았다. 죽고, 죽고, 또 죽는 세상. 그런 와중에서도 새로운 아기가 태어난다. 전쟁과 기근, 전염병이 돌고 돌아 한쪽에서 죽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한쪽에서는 새로운 생존의 비밀이 열렸다. 아이들이 태어난 것이다. 오웬이 죽고 대를 이은 하나님의 사람이 태어난 셈이다. 마찬가지로 오웬이 죽던 순간에 포사이드에 의해 새로운 한센병 여인이 마치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난 것처럼.
 
 
  만약 내 同族이라면…
 
1926년 여수에 마련된 나환자들의 새 터전인 애양원에서 한센인들이 물을 긷고 있다.
  포사이드의 말에 얹혀온 한센병 여인의 이야기는 오웬의 장례식 못지않게 광주 지역 사회의 화제가 되었다. 오웬의 장례 때문에 이 사실을 목격한 한국인들이 훨씬 많게 되었고,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180cm의 키에 잘 생긴 36세의 미국인 의사가 최악의 상태인 한센병 여인을 말에 태우고 스스로 마부가 되어 광주에 나타난 사실은 한국 사람이나 한센병자들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포사이드는 한센병 여인을 진료소에 입원시켰다. 병원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불결한 모습, 그리고 역겨운 냄새를 다른 환자들이 용납할 리 없었다. 포사이드와 진료소의 책임자 윌슨은 이 환자만을 격리 수용할 제2의 장소를 물색해야만 했다.
 
  1909년 8월 《미셔너리리뷰(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기고한 오웬 부인의 글에는 포사이드가 벽돌 가마에서 이 여인을 어떻게 대하였는지, 이 여인의 형편에 관한 부분이 있다.
 
  <임시 진료소에서 이틀 밤을 보낸 후 닥터 윌슨은 이 여성을 위해 오래된 벽돌 가마에 임시 거처를 만들어 주었다. 한센병에 걸린 지는 10년이 되었고, 4년 전 과부가 되어 생계가 어려워지고 친척도 없는 상태였다. 거처도 없이 이집저집을 다니며 구걸을 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닥터 포사이드와의 만남은 어떤 의미였을까? 포사이드는 자신이 아는 한국말을 최대한 동원하여 무엇 때문에 그녀를 도와주는지 설명해 주고 그녀의 생각도 이끌어냈다.>
 
  오웬 부인은 기고문에서 한센병 여인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다시 길거리로 떠돌아다니며 구걸을 할까 걱정이 되어 새로운 거처로 이 여성 환자를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끈질기게 설득하여 2주 후에 마침내 이 환자를 진료소에서 데리고 나왔다. 벽돌 가마에 모인 사람들은 한센병 여인이 닥터 포사이드의 따뜻한 손을 잡고 나오는 것을 보고 ‘마치 주님을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우리 쪽으로 올 때의 광경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어느 모로 보나 완벽한 신사인 닥터 포사이드가 병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냄새 나는 환자의 팔을 몇 번이나 잡아주면서 걸어왔다. 머리는 몇 년 동안 빗지 않은 듯 헝클어지고, 옷은 누더기로 더러웠으며, 손발은 부푼 상처로 덮여 있고, 온몸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풍겼다. 한쪽 발은 짚신을 신었고, 다른 발은 두꺼운 종이로 묶었고, 심하게 절뚝거렸다.
 
  다시 그녀가 우리한테 왔을 때 큰 환영을 받았다. 이따금 한국인 기독교 신자들과 선교사들이 그녀를 방문하여 예수님에 대해 말해 주고, 예수님께서 그녀를 위한 처소를 준비하였고, 새로운 몸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녀는 줄곧 ‘만약 내 동족이라면 여러분처럼 나를 대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며 행복해했다.>
 
 
  한센인 사역의 효시가 되다
 
1928년 무렵 부산의 한센인촌인 상애원의 모습.
  예수의 비유 중에 가장 유명한 비유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읽는 독자들은 자신의 외식(外飾·겉치레)에 대해 반성하고 사마리아인처럼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포사이드의 행위 이후 광주 선교부는 오웬의 죽음과 맞물려 약하고 버려진 자들을 도우려는 적극적인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특히 교회 개척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사역이라고 믿었던 선교사들은 이때부터 가난하고 소외된 조선 민중을 돌보는 일이야말로 최고·최선의 선교(宣敎)라는 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이 땅의 한센인들은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준 선교사들에게 무한한 감동을 느꼈다.
 
미국 켄터키주에서 찾아낸 포사이드의 무덤. 1918년 사망한 포사이드는 전 재산을 조선의 한센인 치료에 써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돌이켜보면 1909년, 광주 봉선동에서 시작된 한센인 사역은 1912년 이후, 부산 감만동 상애원(相愛園)에서 호주 출신의 맥켄지(MaKenzie) 선교사, 대구에 나환자 시설을 연 플레처(Fletcher)로 이어진다. 1926년 광주에서 옮겨간 여수 애양원(愛養園)과 소록도, 그리고 가톨릭도 1950년 이후에 나환자 사역에 발을 담근다. 모두가 기독교인들이 세운 이 땅의 금자탑이다.
 
  지금도 여수 애양병원은 병원의 시작을 포사이드에 두고 있다. 초대 원장은 닥터 윌슨이다. 흥미로운 점은 포사이드가 한 일은 극히 짧은 시간 동안 한센인 여인을 온몸으로 돌본 것이다. 그런데 포사이드는 영원히 조선 땅에서 한센인을 돌보는 사역의 효시(嚆矢)가 되었다.
 
  1911년, 포사이드는 조선에서 풍토병인 스프루에 걸리고 말았다. 스프루는 지방질·비타민·무기질 등을 흡수하는 데 장애를 일으키는 후천성 질병으로, 종국에는 심한 설사와 고열을 동반하면서 죽음에 이른다.
 
  포사이드는 스프루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포사이드는 1918년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죽기까지 몇 해에 걸친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중에도 조선으로 되돌아갈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일시적으로 건강이 좋아지면 조선을 도와야 한다며 강연을 다니고 글을 썼다. 긴 고통의 세월을 보낸 후에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영면했다. 그는 죽는 순간에도 자신의 유산을 조선의 한센병 퇴치에 써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포사이드는 진정 하늘에 속한 사람이면서 하늘에 머물지 않고 조선에 머물며 자신을 비우고 떠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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