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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증언

함박도 공군 첩보대원들

“휴전 협정 이후에도 함박도는 분명 대한민국 땅이었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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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박도가 북한 땅? 어떻게 그럴 수 있어?”
⊙ “말도의 등대 서치라이트를 함박도에 비추면 북파공작원, 함박도로 귀환”
⊙ “함박도 도착한 공작원을 뗏목에 태워 숨어 대기하던 本船으로 이동”
⊙ “함박도를 알지요. 우리 영토니까. 그런데 그걸 왜 물어?”
⊙ 1965년 10월 29일 ‘함박도 어민 피랍사건’으로 공군 첩보부대 활동은 끝나
정경두 국방장관이 9월 4일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 함박도에 북한군 관련 시설이 들어선 모습을 모니터로 지켜보고 있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북쪽의 우리 섬 ‘함박도(咸朴島)’를 두고 정경두(鄭景斗) 국방부 장관은 “북한 땅이 맞다”고 주장했다. “주소가 우리 영토로 되어 있는 건 행정상 오류”라고도 설명했다. 함박도, 강화군 서도면 말도리 산97번지… 북한 땅.
 
  1950~60년대 당시 함박도 주변에서 복무했던 군인들은 국방부 장관의 “북한 땅”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서해 NLL 지역은 과거 남북이 치열하게 첩보활동을 벌이던 곳이다. 서로가 공작원을 보내 정보를 수집해왔다. 우리 정부는 이런 북파공작원을 ‘특수임무 수행자’라고 부른다. 북파공작은 1945년 이후 시작됐지만 1·4후퇴 이후 본격화했다. 당시 북파공작에 나선 이들은 대개 비(非)군인 신분이었다. 반면 일부 군인은 공작원을 북으로 보내거나 귀환을 돕고 혹은 북의 간첩침투를 저지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 무렵 공군 특무대(훗날 공군 첩보부대)는 서해 NLL 인근 강화도, 백령도, 연평도, 납섬(평안북도), 교동도, 주문도, 말도, 어화도 등지에 여러 파견부대를 운영했다. 파견대는 공작원, 통신원, 호송원, 선원 등으로 구성되며 대개 민간인 신분이었다. 파견대장은 장교와 문관, 상사 계급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미 공군 6006부대와 정보를 교환하며 북파공작에 참여해 공을 세웠다.
 
  파견대가 언제까지 서해 NLL 주변 섬에 머물며 활동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국군이 북파공작 활동 중단을 공식 선언한 것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다. 이후 서해 각 섬에 배치된 파견대도 해체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기자는 1950~60년대 북파공작에 참여한 대원들을 만나 함박도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평안북도 영변이 고향인 김인호(金仁鎬)씨는 1926년생이다. 북한에서 탈출해 미국 공군 6006 ‘이글부대’ 창설에 관여했다. 6006 이글부대는 CIA와 관련된 미국 정보부대다. 북파공작원으로서 그는 평양에 침투해, 북한의 중요시설 위치와 규모에 관한 사항을 파악해 귀환했다. 김일성이 궐석재판을 열어 그에게 사형을 선고할 정도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미국 6006부대와 한국 공군 5392부대 간 혼성 부대의 공작 과장이 나였어요. 5392부대는 일명 ‘실미도부대’라고 불렀죠. 실미도 사건, 기억나죠?”
 
  1971년 8월 23일 북한 침투 작전을 위해 창설된 실미도부대에서 공작원 24명이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인천 실미도를 탈출해, 서울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을 말한다.
 
  “나는 평양에서 반(反)김일성과 소련을 규탄하는 조양단(朝陽團)을 조직해 삐라를 뿌렸다가 체포되어 평양교화소에서 본궁(本宮)노무자수용소, 흥남노무자교화소 등으로 이감되어 3년을 더 살았어요.”
 
  그는 6·25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15일 국군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석방돼 평양 ‘릉라도 여관’ 지하 아지트에 숨어 있다가 남하했다. 그러고 나서 미 공군 도널드 니콜스 소령의 지시로 남하한 지 두 달 만에 다시 북에 들어가 국군 포로(철도군인, 기관요원)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현재 그는 순국선열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러니까 함박도는 우리 땅이었던 거지요”
 
함박도 주변 서해 5도 지도.
  ― 함박도를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함박도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용매도 이야기부터 해야겠어요.”
 
  용매도(龍媒島)는 황해도 청단군에 속한 섬이다. 지금은 북한 땅이다. 육지(영산리)에서 남쪽으로 약 6km 지점에 위치한 2.203km²(66만여 평) 크기의 섬이다. 지금은 간척지 방조제로부터 연장된 둑길을 통해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1953년 정전협정 전까지 북파공작원들은 용매도로 귀환했어요. 용매도는 공군 파견부대가 관할하고 있었거든요. 간조가 심해 물이 빠져나가면 육지에서 6km만 걸으면 용매도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뛰다시피 빨리 걸어야 해요. 개펄에 물풀이나 미역이 있어서 걷기가 어려웠거든요. 지금은 개간해서 섬이 육지가 됐다고 하더군.”
 
  ― 함박도는요.
 
  “밀물이 꽉 차서 수위가 가장 높게 되는 만조 때 함박도는 한 50평쯤 될까. 요즘 TV에서 보니 500평이 넘어 보이는데 그땐 50~70평 남짓할 정도로 작았어요.
 
  정전(휴전)으로 용매도에 있던 (공군) 파견부대가 철수하게 되니 공작원 귀환이 어렵게 됐어요. 대략 2만여 명이 북한 첩자(공작원)로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한 거야. 용매도가 우리 땅일 때는 용매도로 귀환했는데 막혀버린 거지.
 
  이후 용매도 대신 함박도를 이용했어요. 그러니까 함박도는 그 무렵 우리 땅이었던 거지요. 우리는 북파공작 부대원들을 당시 ‘귀환부대(원)’라고 불렀어요. 기자 양반, 적어봐.”
 
  ― 네, (수첩에) ‘귀환부대’라고 적었습니다. 용매도와 함박도 간 거리는요.
 
  “2km 조끔(남짓) 됐을까? 거기서 거기야, 망원경으로 보면….”
 
 
  “북파공작원의 귀환루트, 함박도”
 
북한에서 탈출해 미 공군 6006 이글부대 창설에 관여한 김인호씨.
  ― 우리 북파공작원들의 용매도 귀환이 어려워진 뒤에 이루어진 함박도 귀환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세요.
 
  “말도에서 신호를 보냈어요.”
 
  말도는 강화군 서도면 볼음리에 속한 섬이다. 38선에 바로 인접한 곳으로 북한 땅 연백평야와는 불과 5km 떨어져 있다. 말도는 서해5도인 백령도를 중심으로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등과 함께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말도 바로 옆 섬이 함박도다. 김인호씨의 계속된 말이다.
 
  “말도에 서치라이트 같은 큰 등대를 세웠어. 귀환부대(북파공작원)가 우리 쪽으로 암호를 보내면 모스 부호로 1차는 어디로 오고, 2차는 어디로 가라고 알려주었어. 그런데 이전에 귀환루트인 용매도가 (정전으로) 북한에 반환됐으니 함박도밖에 없거든. 그래서 말도에서 등대 서치라이트로 신호를 보내. 불빛을 용매도에서 함박도로 비추는 거야. 함박도로 오라는 신호지.
 
  함박도에서 한참 올라가면 구월산(황해도 신천군 용진면과 은율군 남부면·일도면에 걸친 해발 954m 산)이 있는데 우리 게릴라 부대가 활동한 곳이야. 김종벽 소령이라고…, 휴전 이후 돌아오지 못하다가 함박도를 거쳐서 왔어요.”
 
  1950년 12월에 창설된 황해도 구월산 유격대의 부대장은 김종벽이었다. 구월산 부대의 본래 이름은 ‘연풍유격대’. 창설 당시 600명 정도였으나 1951년 초에는 2500명으로 늘어났고, 정전 직후 북한 인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 북파공작원이 함박도에 도착하면?
 
  “(썰물로) 수심이 얕아 뗏마(뗏목)에 태워 함박도 뒤에 숨어서 대기 중이던 본선(本船)으로 이동하는 거지. (말도 파견대원들이) 함박도에서 며칠씩 근무할 때는 식수를 챙겨 와야 했어. 그리고 파도가 치면 한여름에 기절해서 오는 아이들(부대원들)도 있었어. 그만큼 섬에 내리쬐는 열기가 뜨거웠거든.
 
  휴전 이후 한 5년간은 서치라이트를 비췄는데 유엔군 함대가 수시로 다니면서 우리 선박(공작선)의 움직임을 막았어. 확성기로 ‘서해 NLL 북쪽에서 나가라’고 소리치고 그랬어.”
 
  ― 썰물일 때 함박도 주변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하얀 모래사장이 있었어. 함박도는 연백에서 이쪽(말도)으로 내려가면 개펄이지만 저쪽(연백)은 진남포 앞바다까지 온통 모래사장이야. 물살이 섬 주위를 빙빙 돌아가게 되면 모래톱이 쌓여서 점점 수심이 얕아지고….”
 
 
  1965년 10월의 함박도 사건… 어민 109명 납북
 
위성 사진으로 본 함박도.
  김인호씨는 함박도 주변의 개펄에 대해 이런 이야기도 덧붙였다.
 
  “이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어. 그러니까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강화도 앞바다에서 진남포까지 대합조개 씨를 뿌렸어. 그게 세월이 흘러 엄청나게 자란 거야. (대합이) 어른 두 손을 펼친 것처럼 자랐어. 그걸 회로 뜨면 한 사람이 다 먹고 남아. 우리 군이나 어민들이 (함박도 주변의) 조개(대합류)를 캐서 인천에다 팔곤 했어.
 
  휴전 이후 인적이 끊기니까 수조기가 함박도 개펄이나 모래사장에서 낮잠을 자, 물이 들어오면 바다로 나가고. 물고기가 일광욕을 했어요. 나는 그걸 다 봤어. 한번씩 어민들이 조개를 캐도 북한군이 가만히 있었어요. 1~2년은 서로 조업을 했어. 몇 년간 잘해 먹었어.”
 
  ― 함박도는 우리 군 관할이었습니까.
 
  “우리가 (말도에) 주둔하고 있었어, 계속해서…. 함박도는 말도의 부속 섬이니까. 1965년에 사고가 나서 (공군 말도 파견대가) 해체된 거야. 이후 해병대와 교대한 거지.”
 
  1965년의 ‘사고’란 그해 10월 30일 함박도에서 발생한 어민 피랍사건을 말한다. 다음은 10월31일자 《조선일보》 1면 기사의 앞머리 부분이다.
 
  〈…10월 29일 오후 4시15분쯤 강화군 함박도 근해 개펄에서 조개잡이를 하던 우리 어부 232명이 무장한 북괴군 20여 명의 기습을 받아 그중 97명이 납치되고 135명이 무사히 탈출했다. 대부분이 볼음도, 주문도, 아차도, 교동도의 영세어민들인 이들은 이날 5척의 어선에 분승, 볼음도에서 3마일 서북방이며 인천에서 180리 지점인 남방한계선까지 배를 타고 가 바닷물이 빠진 후 조개잡이를 하다가 물이 빠진 사이에 육로로 침투한 적병의 기습을 받아 이와 같은 불상사를 당한 것이다.…〉
 
  기사에는 97명이 납치되었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 109명이 납북되었다. 그러나 피랍 23일 만인 그해 11월 20일 104명이 판문점을 거쳐 귀환했다. 5명은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조선일보》 기사 어디에도 어민들이 피랍된 함박도가 북한 땅이라 언급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김인호씨의 말이다.
 
  “1965년도까지는 공군 섬이었고 사고가 나서 66년도부터 해병대가 (말도) 경비를 시켰어(맡았어).”
 
  ― 이후 해병대가 함박도를 지키지 않았나요.
 
  “함박도는 북파공작에 꼭 필요해 공군이 관할한 곳인데 이후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 해병대가 귀환부대를 몰랐을 거야. 그 결과,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 돌아오지 못한 북파공작원은 어떻게 됐을까요.
 
  “고첩으로 전환이 됐거나 잡혀 감옥에 갔을 거야.”
 
 
  “뭐, 북한 땅이 되어버렸다고?”
 
1961년 5·16군사정변 때까지 서해 말도 파견대장으로 근무한 이두우씨.
  기자는 1950~60년대 초까지 공군 특무대 말도 파견대장으로 근무하던 이두우(李斗宇·87)씨를 만났다. 그는 1961년 5·16군사정변 직전까지 말도에서 근무했다. 당시 계급은 상사였다고 한다. 현재 서울 관악구의 한 노인복지센터에 거주하고 있었다.
 
  ― 함박도는 우리 땅인가요.
 
  “그때 우리 영역이지. 드나들던 기억이 나는데…. 글쎄, 하도 오래되어서.”
 
  ― 드나드셨을 때가 몇 년도인가요.
 
  “말도, 볼음도, 강화도… 이렇게…. 서해안은 동해와 달라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해요. 물이 빠질 때는 확 빠져요. 일곱, 여덟, 아홉 물때가 되면 확 빠져나가요.”
 
  물때란 간조와 만조 사이의 시차를 말한다.
 
  ― 일곱, 여덟, 아홉 물때가 무슨 말인가요.
 
  “물때가 자꾸 바뀐다는 뜻이지. 내가 직접 함박도에 간 일은 없지만, 배 타고 다니면서 줄곧 보니까 함박도를 알지요. 우리 영토니까. 그런데 그걸 왜 물어요? 함박도, 볼음도…, 전부 우리 저거(섬이)지요.”
 
  ― 그런데 함박도가 북한 땅이 되어버렸어요.
 
  “뭐, 북한 땅이 되어버렸다고?”
 
  ― 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 그렇게 되어버렸어요.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이두우씨는 이런 말도 했다.
 
  “물이 확 빠질 때는 함박도도 거의 뭍이 되어버렸어. 말도 주민들이 뭘로 연명하는지 압니까. 석화라고 알지요? 굴을 쪼고(캐고)…. 어민들이 말도 파견대원과 함께 대합과 조개를 인천에서 팔아 쌀과 교환했어요.”
 
  기자는 거듭 함박도가 우리 땅인지를 물었다.
 
  “함박도는 늘 듣던 이름이거든. 가보지는 않았단 말이야. 무인도니까 갈 필요가 없잖아. 함박도는 내가 알기로 우리 영토입니다. …그때 당시엔. 그런데 어떻게 된 거예요? 언제 저쪽으로 된 거예요?”
 
  그는 말도 파견대장을 그만둔 사연도 말했다.
 
  “(1961년) 5·16혁명 직후 통신원이 ‘급히 본부로 귀대하라’고 해요. 그래서 공작선을 타고 도착하니 왜 불렀는지 아무도 몰라. 다시 확인하니 ‘내일 오전 8시까지 중앙정보부’로 오라는 겁니다. 그때 김종필(金鍾泌·JP·1926~2018)씨가 중앙정보부장을 할 때야.
 
  이튿날 아침 일찍 중정에 갔더니 나까지 일곱 사람이 모였는데 JP가 이랬어요. ‘구(舊)정권… 소위 지금의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맡길 수가 없다. 여러분도 알지 않느냐. 여러분이 핵이 되어서 새로운 정당의 창당을 위해 작업을 좀 해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안전가옥에서 분야별로 저명인사들을 개별 접촉해서 공화당 창당 멤버로 만들었어요. 1963년 초대 민주공화당 사무총장에 임명됐던 윤천주(훗날 문교부 장관, 서울대 총장), 윤주영(훗날 문화공보부 장관)씨 등이 기억납니다.”
 
 
  “함박도는 중립지대?”
 
  ― 공화당 창당 작업 후엔 무얼 하셨나요.
 
  “공화당에 계속 남아 지방국장을 오래했어요. 나와 같이 일하던 후배들이 다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어. 당시 JP와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나중에 울산석유화학공단 상임감사로 나갔어요. 공단 사장이 백선엽(白善燁) 장군이었어. 한 10년간 감사를 하다가 그만뒀어요.”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함박도는 우리 땅이야.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어.”
 
  기자는 또 다른 공군 말도 파견대장을 수소문했다.
 
  유인수씨는 1965년 6월 20일부터 그해 12월 15일까지 말도 파견대장으로 복무했다. 그러니까 그해 10월 일어난 함박도 어민 피랍사건 당시 말도 파견대장인 셈이다.
 
  그에게 전화로 ‘함박도는 누구 땅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의 답은 이랬다.
 
  “중립지대로 알고 있어요. 하여간 중립지역으로 알고 있는데 (함박도에는) 가지 않았어요.”
 
  ― 잘 안 갔다고요?
 
  “네, 중립지역으로 알고 있습니다.”
 
  ― 말도 파견대장으로 함박도를 어떻게 관할했나요.
 
  “관할을 안 했다니까….”
 
  ― 북한군은 함박도에 주둔하거나 관할했나요.
 
  “거기(북한군)도 들어오면 안 되죠.”
 
  ― 서로가 중립지대처럼 방치했나요.
 
  “그렇습니다.”
 
  ― 지금으로 치면 비무장지대로 알고 계신 거지요.
 
  “그렇죠.”
 
  유인수씨가 말도 파견대장으로 근무할 당시 함박도는 남북 간 중립지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 초만 하더라도 공군이 관할하는 섬이었으나 60년대 중반 이후 방치된 것이다.
 
 
 
  1965년 10월 함박도 어민 피랍사건의 전말
 
  태풍 ‘링링’이 서울을 강타하던 지난 9월 7일 기자는 공군 예비역 대위 출신 정영훈(鄭英壎·90)씨를 만났다. 평북 선천이 고향인 그는 1965년 10월 29일 함박도 피랍사건 당시 현장에 있던 인물이다. 당시 북파공작 임무를 마치고 말도에 머무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북한 인민군의 남파 첩보가 입수된 것은 1965년 6월 무렵이었어요. 우리 국군의 월남파병과 한일 국교정상화를 막으려고 황해도 해주의 사리원비행장에서 북괴 무장 인민군 300여 명이 AN-2기에 나눠 타고 서울 마포나루터로 기습한다는 내용이었죠.”
 
  정영훈 대위는 첩보의 진위를 확인하라는 ‘긴급첩보 수집명령’을 상부에서 받았다고 한다. 그의 고모부(《서울신문》 도쿄지국장)가 “네가 북에 직접 가서 확인하라”고 간곡하게 부탁해 비장한 심정으로 북파에 나섰다는 것이다.
 
  “2개월간의 침투 훈련을 받고 1965년 8월 31일 예편하자마자 반공동지(민간인) 5명과 함께 어선을 빌려 북파공작 준비를 했어요. 당시 (공군 특무대에) 공작예산이 없어 내년에 받기로 하고 자비로 마련했지요. 첩보대장 이주표 대령의 명의로 ‘말도 첩보공작 승인 약정서’를 체결하고 공군참모총장의 재가까지 받았죠. 그렇게 민간인 대원 5명과 함께 말도에 도착한 날이 그해 9월 20일로 기억합니다.”
 
  이들은 9월 30일 무렵 말도에서 배를 타고 2시간30분가량 올라가 황해도 해주 인근 앞바다의 ‘돌산도’에 잠복했다. 그곳에서 10월 4일까지 사리원비행장의 동향을 정탐했다.
 
  “돌산도는 일종의 무인도인데 10월 4일까지 AN-2기 동향을 살폈어요. 보통 AN-2기엔 15명이 탑승합니다. 인민군 300명을 태우고 남파하려면 최소 40대는 있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죠. 그때 첩보로는 김일성이 모택동을 만난다고 중국을 드나들 때이니 더욱 긴장할 수밖에요.”
 
  ― 돌산도에서 망원경으로 비행장이 보였나요.
 
  “보이지는 않지만 멀리서 AN-2기의 이착륙을 감지할 수는 있지요. 그런데 그 첩보가 거짓이라고 판단했어요.”
 
  ― 왜요.
 
  “AN-2기가 전혀 뜨질 않았거든. 아예 없었어요. 있어 봐야 몇 대뿐이고…, 야간비행 훈련이나, 저공 훈련도 없었어요. 그래서 정보판단서를 작성해 인천까지 가서 직보했어요. 이 보고를 받고 박정희 대통령이 전투사단의 월남파병을 신속히 단행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1965년 당시 함박도는 미미한 존재”
 
1965년 10월31일자 《조선일보》 1면. 기사 제목은 ‘함박도 개펄서 조개잡이 하다 어부 97명 납북’이었다.
  ― 함박도 피랍사건은 어떻게 해서 일어난 겁니까.
 
  “기왕에 임무를 마쳤으니 조개잡이도 하고, 또 말도 앞바다 비무장지대까지 침범하여 숭어를 잡고 조개를 캐는 북한 어부와 기관원을 납치할 생각으로 그해 10월 10일부터 두 차례 접근했으나, 북측이 극도로 경계하는 바람에 안 됐어요.
 
  그러다 10월 29일 오후 4시30분쯤 어민 244명과 배 5척에 나눠 승선해 재차 함박도 개펄까지 접근했는데, 때마침 해무가 짙어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어요. 우리가 배에서 내리자마자 북한 인민군 20명이 기다렸다는 듯 따발총과 수류탄, 긴 칼을 가지고 딱 포위한 거야. 우리 쪽 배 한 척이 수류탄 맞아 침몰했고 109명이 강제 납북되었어. 인민군은 따발총으로, 우리는 M-1 소총으로 대항했지. 따발총의 사정거리가 몇 m인 줄 아세요? 50m야. M-1 소총은 (사정거리가) 250m거든. 인민군이 접근을 못 하게 대응해서 어민 135명은 구출했지만 109명은 결국 납치되고 말았어요.
 
  23일이 지나서 남녀 어민 각각 54명과 51명이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지만 침몰한 배의 선장과 기관장, 잡혀간 어민 3명은 돌아오지 못했어요.”
 
  정영훈씨는 그동안 자신의 ‘특수임무 수행’과 관련한 보상금 신청이 수차례 좌절됐다. 그러나 최근 국방부에서 재심이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조만간 동료 대원들의 인우보증을 받아 관련 서류를 제출할 것이다.
 
  “당시 함께 북파공작에 나섰던 동료 대원 5명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유가족들은 어렵게 산다고 해요.”
 
  ― 북파공작 활동을 할 당시 그러니까 1960년대 중반, 함박도는 어떤 상황이었나요.
 
  “강화군 서도면 말도리 산97번지가 함박도 아닙니까? 서해안엔 함박도처럼 사람이 살지 않은 무인도가 많이 있었어요. 첩보부대로 봤을 때 말도는 북방 최전선 기지지만 함박도는 존재가 없었어. 그냥 무인도지.
 
  그러나 함박도 어민 피랍사건으로 사실상 공군 대북첩보 활동은 이후 끝이 나고 말았어요. 마지막 북파공작인 셈이었지요.”
 
  함박도는 1965년 10월 어민 피랍사건 이후 잊혀갔고 군 당국의 관심마저 멀어져 결국 북한 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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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만식    (2019-09-19) 찬성 : 83   반대 : 2
야! 문재인이, 이낙연이, 정경두! 김정은이 한테 얼른 함박도 비우라 하고 주권과 국토의 원상을 신속하게 회복한 후 국민들께 보고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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