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軍 당국, ‘北, 잠수함을 활용한 함정공격 연습’ 첩보 입수
⊙ ‘1번 어뢰’ 쌍끌이 어선 동원 비밀… 특수고무로 제작된 그물망으로 닷새 만에 인양
⊙ 합조단 파견 나온 공군 대령이 쌍끌이 제안 “2006년 동해안 F-15K 추락 당시 쌍끌이로 잔해 90% 인양”
⊙ ‘1번 어뢰’ 인양 후 북한 특수부대 침투 대비해 극비리에 보안시설로 옮겨
⊙ “제기된 의혹 재차 검증하다 보니 합조단 조사 신뢰성 높여”(박정이)
⊙ KBS 〈추적60분〉의 천안함 의혹 방송… “공영방송 의도가 무언지 의아해”
⊙ “천안함 주범 김영철은 민족의 죄인, 부끄러운 줄 알아야”(이종헌)
⊙ ‘1번 어뢰’ 쌍끌이 어선 동원 비밀… 특수고무로 제작된 그물망으로 닷새 만에 인양
⊙ 합조단 파견 나온 공군 대령이 쌍끌이 제안 “2006년 동해안 F-15K 추락 당시 쌍끌이로 잔해 90% 인양”
⊙ ‘1번 어뢰’ 인양 후 북한 특수부대 침투 대비해 극비리에 보안시설로 옮겨
⊙ “제기된 의혹 재차 검증하다 보니 합조단 조사 신뢰성 높여”(박정이)
⊙ KBS 〈추적60분〉의 천안함 의혹 방송… “공영방송 의도가 무언지 의아해”
⊙ “천안함 주범 김영철은 민족의 죄인, 부끄러운 줄 알아야”(이종헌)
- 천안함 침몰 29일 만인 2010년 4월 24일 오후 백령도 남쪽 해상에서 천안함의 함수가 인양돼 바지선에 올려지고 있다. 함수의 절단면은 그물망에 덮인 채 제한적으로 언론에 공개됐다.
3월 26일 천안함 폭침 8주기를 맞아 재조사의 뇌관이 점화되었다. 다분히 정치적이며 의도성을 지닌 의혹 제기다. 지난 3월 28일 방영된 KBS 〈추적60분 - 8년 만의 공개 천안함 보고서의 진실〉은 또다시 천안함 의혹에 기름을 얹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팩트가 나왔다기보다는 기존 의혹들의 되돌이표다.
좌초설, 기뢰설, 잠수함충돌설, 한미자작극설 등 천안함 폭침을 바라보는 의혹도 제각각이다. 천안함 민군 합동조사단(이하 합조단)의 조사결과에 맞서는 통일되고 일관된 주장이 없다. 즉 의혹 세력들은 자신의 주장에 부합하는 부분적인 사실만을 크게 부각시키고 다른 증거나 사실에는 아예 눈을 감는다.
게다가 천안함 사건의 주범인 김영철은 “남측에서 천안함 폭침 주범이라는 사람이 저 김영철”이라며 우리 국민을 조롱하는 상황이다. 천안함의 진실은 밝혀졌지만 우리 사회 내 의혹 세력이 있는 한 단죄까지는 요원해 보인다. 그러나 북한의 도발과 만행을 규탄하는 노력은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끝난 것이 아니다. 북한의 책임 인정과 사과 등의 전제하에서 천안함 응징 수단인 5·24 조치의 건설적 전향적 논의가 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5·24 조치는 개성공단을 제외하고 남북교역을 전면 중단시킨 사상 첫 대규모 대북제재를 말한다.
기자는 천안함 피격사건 직후 합조단장으로 활동, 진실규명에 앞장선 박정이(朴正二) 예비역 육군 대장과 《천안함 전쟁 실록, 스모킹 건》의 저자 이종헌(李鍾憲)씨를 만났다.
육사 32기 출신인 박정이 예비역 육군 대장은 12사단 37연대 2대대 소대장을 시작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22사단 55연대장 시절 강릉무장공비 대침투 작전에 참가했으며, 13공수여단장, 20기계화보병사단장, 합참 작전부장, 수도방위사령관, 합참 전력발전본부장, 제1야전군사령관 등으로 36년간 복무했다. 지난 2011년 10월 17일 전역했다.
박정이 전 합조단장은 ‘군번줄’ 일화로 유명하다. 지난 2010년 4월 30일 천안함 침몰 원인 규명을 위한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한 30명에 가까운 장성들 중 인식표(군번줄)를 차고 있던 서너 명의 장성 중 한 명이었다. 부하들에게 포용력 있는 선 굵은 지휘관이자 강한 책임감을 바탕으로 한 완벽한 업무 처리로 정평이 높은 인물이다.
이종헌씨는 천안함 피격 직후 청와대에 설치된 천안함 실무 T/F 책임을 맡아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 정부와 군 수뇌부의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했다. 이듬해 3월에는 《천안함 피격사건 백서》 발간에도 참여했다. 그는 “천안함 의혹이 합리적 의심의 영역도 있었지만 상당 부분은 이념과 진영 논리에 근거해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려 했고 결과적으로 북한을 변호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주장한다.
기자는 박 전 단장과 이씨를 지난 4월 2일 경기도 분당에 위치한 한국군사문제연구원에서 만났다.
‘스모킹 건’의 추억
박정이 전 합조단장은 36년의 군 생활 중 두 가지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1996년 강릉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났을 때 3000여 명의 연대병력을 이끌고 한 달 반 동안 야외에서 무장공비 소탕을 위한 대침투 작전을 수행한 적이 있었어요. 야전 상황이다 보니 제일 어려웠던 게 병력의 급식과 세탁, 배설 문제였어요. 실전 상황에서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면서 야전 군기를 확립하며 작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체감했어요. 그때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두 번째 기억은 합동조사단장 임무를 부여받은 일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런 일을 했나 싶어요. 당시 합참 준비태세검열실과 국방부 조사본부, 국방부 감사관실에서 천안함 피격의 원인 규명에 나섰지만 사건 발생 시점이 계속 바뀌고, 천안함 사건 당시 인근 레이더상의 새떼를 북한 전투기로 오인해 경고사격을 하는 등 계속 지엽적인 문제로 사건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민군 다국적 합조단이 꾸려진 겁니다.
쌍끌이 어선을 동원해 건져 올렸던 북한 ‘1번 어뢰’는 천운이 아니고선 건져 올릴 수 없다고 봅니다. 또 조사 방식도 굉장히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결과였고요. 군 생활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의미 있고 자긍심을 느끼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종헌씨는 “5·24 대북조치나 유엔 의장성명 등은 ‘스모킹 건’을 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합조단은 피격 현장에서 ‘1번 어뢰 추진체’를 인양했고 정보분석을 통해 북한 수출용 카탈로그에서 북한산 어뢰(CHT-02D)의 정체를 확인했어요. 북한은 이 어뢰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객관적 증거 앞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죠. 김정은을 위한 통 큰 도발의 꼬리가 잡히면서 북한의 만행은 다시 세계인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만약 스모킹 건을 찾는 데 실패했다면, 천안함의 진실은 미궁으로 빠져들었을 겁니다.”
박=“그때 중국이 협조했더라면 의장 성명이 아니라 유엔결의안까지 가능했어요.”
이=“당시 우리 대표단은 유엔에서 각국 대사들 앞에서 브리핑을 잘하셨고 영상자료까지 만들어 호소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유엔 주재 중국 대사나 러시아 대사조차 반박하지 못했어요. 그들은 북한을 끝까지 챙기려고만 했지요. 그나마 타협이 된 게 의장성명이고 천안함 피격 주체를 명시하지 못한 일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천안함은 실전 상황에서 ‘비접촉 어뢰’로 공격받은 드문 사례
― 지난 3월 28일 KBS 〈추적60분〉 보셨나요? 북한 소행이 아니라는 세력이 유포했던 의혹의 재탕이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천안함 피격 이후 8년이 지났는데 변화된 새로운 의혹이 하나도 없었어요. 새로운 팩트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주목하고 반박하겠지만 전혀 없었어요.”
박=“새로운 것은 38년 동안 수중구조 일을 했다는 민간업체 대표의 증언이 아닌가요?”
천안함 함수를 직접 인양한 민간업체 대표 전중선씨는 〈추적60분〉과의 인터뷰에서 “천안함 바닥에 무언가에 긁힌 듯한 스크래치(scratch·긁힘 현상)가 있는 것을 선명하게 봤다. 어뢰에 맞았는데 스크래치가 왜 생기느냐”고 주장했다.
이=“아닙니다. 당시에도 인양업체 관계자가 스크래치 주장을 하길래 군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얘기를 왜 하느냐’며 항의한 일이 있었어요. 과학적 분석이나 검토 없이 그냥 본 대로 얘기한 것이죠.”
박=“천안함은 두 동강이 나면서 일부 긁힘 흔적도 나 있었어요. 그건 침몰 시, 그리고 인양하면서 쇠밧줄에 묶어 올리면서 자국이 생긴 겁니다.”
이=“긁힌 흔적은 세월호 인양 때도 똑같이 있었습니다.”
박=“제가 볼 때 그건 스크래치가 아니거든요. 좌초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찢김 현상(cutting)으로 봐야 하는데, 스크래치라고 애매한 소리를 한 겁니다.
또 천안함이 어뢰 폭발이 아니라는 증거로 생존 장병이나 시신에서 고막 파열이나 코피가 나는 등 이비인후과적 손상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천안함 피격은 어뢰에 의한 직접 타격이 아닙니다. 수중에서 어뢰가 폭발, 그 충격에 의해 천안함이 두 동강 난 것입니다. 검안결과, 화상이나 파편상, 관통상이 없었고 생존 환자 대부분 골절이나 열창, 타박상이 다수입니다. 사망한 이들 역시 전원 익사로 추정됩니다.”
이=“어뢰에 의한 직접 타격은 2차 세계대전 당시 U보트를 생각하면 됩니다. 직접 타격의 경우 화염과 폭발이 일어나고 배가 두 동강이 납니다. 그러나 천안함은 비접촉 폭발이에요. 어뢰가 함체에 직접 부딪치지 않았어요. 배 밑에서 터져 폭발 압력이 위로 솟구쳐 버블이 선체를 치고 올라갔다가 가라앉으며 배가 두 동강이 난 겁니다.”
박=“맞아요. 사람들이 접촉 폭발과 비접촉 폭발을 전혀 모르고 얘기를 합니다. 아니면, 알면서도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 해군사령관 카를 되니츠가 이끌던 U보트는 접촉식 폭발어뢰로 연합국 함선을 공격했다. 이때 어뢰가 함정을 직접 타격하면서 승조원들 일부는 고막 손상과 파편상, 화상을 입었고 함정은 불바다가 된 후 침몰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에는 실전 상황이 드물어 비접촉 어뢰의 폭발 사례는 거의 없다. 천안함은 어뢰가 함체에 직접 부딪치지 않은 비접촉 폭발로 생긴 충격파와 버블 효과에 의해 두 동강 난 채 침몰했다. 천안함의 경우는 실전적 상황에서 비접촉 어뢰 공격을 받은 매우 드문 사례였다. 박정이 전 단장의 말이다.
“당시 천안함 피격사건은 수중에서 비접촉 어뢰 폭발로 발생한 것이죠. 수중에서 어뢰가 비접촉 폭발을 하면 충격파와 가스버블이 발생하는데, 가스버블 외부에서 발생하는 충격파가 먼저 선체에 충격을 가했고, 동시에 가스버블이 팽창하면서 선체를 들어 올려 배가 꺾였고(호깅 현상·hogging), 다시 수축되면서 선체를 아래로 당겨 재차 꺾였어요.(새깅 현상·sagging) 이때 버블이 붕괴되면서 버블제트 충격이 발생해 선체가 절단된 것입니다.”

KBS 〈추적60분〉의 의도는…
― 〈추적60분〉은 군 TOD(열상감시장비) 영상에서 천안함이 함수와 함미로 분리됐을 때 그 사이에 점점 멀어지는 ‘검은 점’이 나타난 것에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검은 점’이 잠수함이 아니냐는 것이었어요.
박=“TOD상의 ‘검은 점’이 무언지를 두고 당시 합조단 내부에서 논란이 됐고 검토의 검토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생존 병사가 ‘구명정이 터진 것’이라는 증언을 했죠.”
이=“‘검은 점’ 주장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잠수함과의 충돌로 몰아가려고 나온 의혹입니다. TOD 영상을 보면 ‘검은 점’ 속도가 배의 진행 속도보다 늦어요.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안이 텅 비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파도가 따라가는 속도보다 늦은 거지요. 이것은 상식적으로 볼 문제입니다. 만약 힘이 있고 단단한 물질이라면 함수가 떠내려가는 속도와 같은 속도로 떠내려가야 하는데 힘이 없으니 부력에 의해 천천히 떠내려가요. 그래서 구명정이 맞습니다.”
천안함 ‘흡착물질’ 논쟁도 〈추적60분〉에서 다뤄졌다. 흡착물질이란 천안함 선체와 이른바 ‘1번 어뢰’, 모의수조폭발실험에서 나온 백색분말가루를 말한다. 합조단은 어뢰 폭발 시 나타나는 알루미늄 산화물 계열의 폭발물질이라는 입장이지만 의혹 세력들은 “자연(용액상태)에서 침전하면서 생기는 물질”이라고 주장했다.
박 전 단장은 이에 대해 “실험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일축했다.
“흡착물질은 실험 조건이 다른 상태에서 실험하면 결과물이 다를 수 있어요. 합조단 실험은 실제 폭발 상황과 거의 비슷한 조건인 3000℃ 이상과 20만 기압 이상에서 이뤄졌어요. 그러나 의혹 제기자는 실제 상황과 같이 안 하니까 결과가 다른 것이죠.”
흡착물질을 규명하기 위한 합조단의 수중폭발실험은 천안함 피격 원인을 찾기 위한 가장 과학적 실험으로 손꼽힌다. 실험결과, 천안함 선체와 어뢰, 그리고 수중폭발실험에서 발견된 흡착물질은 모두 성분이 같은 폭발재임이 입증됐다.
또 국방과학연구소(ADD)의 별도 공간에서 폭발 조건과 가깝게 수중폭발실험을 실시했다. 실제 2m×1.5m×1.5m의 강철 수조를 만들었다.
이 실험으로 나온 성분 분석의 결과는 천안함 선수와 선미 그리고 연돌, ‘1번 어뢰’ 잔해에 달라붙어 있던 흡착물질과 일치했다. 이는 어뢰와 천안함 함수, 함미, 연돌이 같은 순간에 폭발했음을 말해주는 과학적 증거였다.
이=“하지만 미국 버지니아대 이승헌 교수의 실험 조건은 천안함이나 합조단 수조폭발실험과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는데도 그는 합조단 조사결과가 조작됐다고까지 주장합니다. 과학자로서 자세가 아니죠.”
박=“의혹을 제기한 분들에게 한국으로 들어와 같이 토의해 보자고 했는데 끝까지 들어오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박 전 단장은 “돌이켜보면 각종 천안함 사건 당시 제기된 의혹이 합조단 활동을 어렵게 만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의혹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검증에 검증을 더하게 만든 계기가 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박 전 단장의 말이다.
“제기된 의혹들을 재차 검증하다 보니 합조단에서 실시한 조사의 신뢰성을 한층 더 높여 주었으며, 의혹에 맞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조사활동으로 침몰 원인을 더욱 정확하게 규명하려는 동기를 부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8년이 지난 지금 〈추적60분〉 보도가 나왔어요. 국민이 봤을 때 ‘아직도 천안함 조사가 제대로 안 된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어요. 공영방송의 의도가 무언지 의아한 느낌을 가졌었어요.”
쌍끌이의 위력, ‘1번 어뢰’를 건지다!
북한은 전대미문의 ‘잠수정을 이용한 초계함 어뢰 공격’을 자행했고 그 도박은 성공한 듯 보였다. 그러나 우리 어선의 쌍끌이에 ‘1번’ 글씨가 쓰인 어뢰추진체가 인양되면서 꼬리를 밟혔고 이 추진체가 자신들이 수출용으로 만들어 해외에 넘겨준 설계도와 정확히 일치하면서 결국 범인으로 밝혀지고 말았다.
박정이 전 단장은 합조단 활동 중 가장 기뻤던 일로 ‘1번 어뢰’ 발견을 꼽았다. 그런데 아쉬웠던 일도 ‘1번 어뢰’와 관련한 해프닝이라고 얘기했다.
“사실 난감했어요. 어뢰가 폭발한 뒤 어떤 물질이 남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나중 조사해 보니 알루미늄 합금으로 만든 어뢰는 산산조각이 나고 잔해도 없다는 거예요. 남는 것은 어뢰추진동력장치로 쓴 쇠붙이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망망대해 47m 수심에서 그걸 건져 올릴까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어요. 강력한 자석을 넣을까, 모래 준설선을 동원해 일대의 모래를 다 뿜어 올릴까 고민도 했어요. 사실 어뢰 화약 성분을 검출했기에 근처 어디에 분명 어뢰추진체가 있을 것으로 확신했거든요.
당시 합조단 과학수사분과에 공군 대령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 말씀이 ‘2006년 6월 동해안에 F-15K가 추락했을 때 수심 372m 해저에서 3주 만에 전투기 잔해를 90% 이상 끄집어냈는데, 그때 쌍끌이 어선을 동원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작된 것입니다. 당시 쌍끌이 어선 ‘대평수산’의 김남식 선장에게 전화를 거니 ‘꼭 한번 해보겠다’고 하더군요. 애국심도 있고 안보의식이 투철한 분 같아서 맡기게 됐습니다.”
― 이번에도 쌍끌이 어선이 위력을 발휘했군요.
계속된 박 전 단장의 말이다.
“처음 특수고무로 그물망을 제작해 시험 삼아 해봤더니 (그물망이) 다 찢어지더군요. 다시 보강해 5월 10일부터 작업을 시작했는데 잔해들이 막 올라와요.
매일매일 수거물을 보고받았어요. 사실, 뭔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5월 15일 오전 9시30분인가? 모터 같은, 프로펠러 같은 어뢰추진체(모델명 CHT-02D)를 건졌다는 보고를 받았어요. 그리고 그날 오후 1시30분인가, 2함대 사령부로 공수됐어요. 딱 보니까 맞아요. 다만, 미국 어뢰 전문가와 우리 어뢰 전문가(이재명 박사)도 있었는데 누가 만든 어뢰추진체인지 식별이 어렵다는 겁니다.
그날 오후 3시부터 정밀 감식에 들어갔죠. 추진 후부를 열어보니까 ‘1번’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어요. 정보분과에 확인해 보니 우리 정보기관이 북한의 수출용 어뢰 카탈로그를 보유하고 있다는 겁니다. 설계도와 비교해 보니 딱 들어맞아요.
미국도 그런 어뢰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했고 우리만 가지고 있던 거예요. 그걸 가지고 북한 어뢰임을 증명한 겁니다.
이후 철저히 보안을 유지했어요. 만약 우리가 어뢰추진체를 수거했다는 정보가 새어 나가면 북한 특수부대가 침투할 수 있다고 봤어요. 극비리에 경계가 삼엄한 지하시설로 옮겨놓았지요.
김태영 국방장관에게 보고를 드렸고, 장관도 그날 오후에 2함대 사령부로 오셨어요. 미국조사단도 신속히 본국에 보고하더군요. 그래서 5월 20일 브리핑을 하게 된 것입니다.”
― 청와대 분위기는 어땠나요.
당시 청와대 천안함 실무 T/F 책임을 맡았던 이종헌씨의 말이다.
“정말 고민을 많이 했죠. 빨리 결론이 나야 하는데 시간은 흐르고… 북한 소행임이 거의 다 드러났지만 문제는 결정적 증거, 스모킹 건이 안 나와 초조한 상황이었어요. 어뢰에 의한 외부 폭발, 비접촉 폭발까지는 나왔는데 실물이 있어야지 설득이 되잖아요. 스모킹 건 확보로 모든 게 분명해진 거죠.”
그러나 그해 5월 24일 영국의 프리랜서 작가인 스콧 그레이턴(Scot Greghton)이 자신의 블로그에 5월 20일 합조단이 공개한 어뢰 도면과 실제로 찾은 어뢰추진동력체가 다르다는 내용을 포스팅했고 국내 인터넷 언론이 보도하면서 파문이 일었다. 박정이 전 단장의 말이다.
“브리핑에 앞서 리허설까지 했어요. 어뢰추진체 도면을 확대하도록 지시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설계도였어요. 북한 판매 카탈로그 안에 설계도가 2개가 있었는데, 한 실무자가 보안문제로 정확히 확인을 하지 않은 채 다른 설계도를 확대한 것이죠. 굉장히 큰 실수였어요. 실무자의 실수라고 하기엔 너무 낯 뜨거워서….”

우리 군 정보 파트, 북한 잠수정 공격 첩보 입수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침이 일어나기 전부터 우리 군은 북한 잠수정에 의한 어뢰 공격 가능성을 검토했다. 몇 차례 전술토의도 진행했다. 당시 군 정보 파트는 북한이 잠수함을 활용해 함정 공격을 연습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기도 했다.
― 천안함 피격 이전에 그런 정보가 우리 군에 입수가 됐나요.
이=“합참이 잠수함 가능성에 대해 지침을 내려보낸 게 있어요. 대잠 전술토의도 하고 1~2마일마다 급격히 항로를 바꾸라는 지침도 내리는 등 나름 대비를 했었습니다. 사실 2~3월이면 대동강이 풀리고 잠수함이 기동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보통 겨울에는 대동강이 얼어서 잠수함(잠수정)이 기동할 수 없어요. 대동강과 서해를 연결하는 서해갑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외해가 얼어버리면 나갈 수가 없는 것이죠. 하여튼 그런 상황이었고 대비를 해야 하는데 미흡했죠.”
박=“제1연평해전(1999년 6월 15일) 때는 우리가 완전히 승리했지만 제2연평해전(2002년 6월 29일)은 우리가 굉장히 피해를 봤어요. 대청해전(2009년 11월 10일) 때는 우리 측 피해가 전혀 없었어요. 그때 북한 최고사령부는 ‘값비싼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했죠. 그땐 겨울이 오는 상황이었고 서해함대사령부와 4군단 지역에서 응징 보복하려 한다는 징후도 있었습니다. 합참이나 군 차원에서 대비태세 강화 지시를 내렸고 잠수함 공격 시 대응 지침들을 내려보내기도 했어요.
겨울이 지나고 2010년 봄이 오면서 우리 군도 자연 긴장하는 상황이었죠. 그리고 4월이면 서해 바다에서 꽃게잡이가 시작됩니다. 수많은 어선이 작전 지역에 들어가서 조업을 해요. 그래서 꽃게잡이가 시작되기 전인 3월 말로 북한이 도발시점을 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송영무 국방장관이 지난 2010년 4월 6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미 공동작전 중에 북한이 도발했을 가능성은 없다”며 정부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어요. 이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박=“‘작전’이 아니라 한미 ‘연합훈련’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미군 잠수함과의 충돌설, 미군 잠수함의 오발설 등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훈련은 태안반도 앞바다에서 이뤄진 것이고 사건발생 장소와 170km나 떨어진 곳입니다. 전혀 관련이 없어요.”
― 왜 천안함 피격날짜를 2010년 3월 26일로 정했는지 다른 요인은 없을까요.
이=“정치군사적 측면에서 그때가 김정은의 본격적인 등장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고 봅니다. 김정일은 아들 김정은의 후계 체제를 만들어 주려고, 김정은의 군사적 성과를 위해 우리 군을 제쳐 버릴 수 있는 ‘통 큰’ 작전을 기획하지 않았을까요. 여기에는 3가지 요건이 필요한데 첫째는 한반도에 큰 영향을 미칠 만한 큰 작전이어야 하고 둘째는 절대 꼬리가 안 잡혀야 하고, 셋째는 북한이 비대칭 자산을 이용한 전술적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거죠. 이 3가지 요건에 맞춰 나름 모색한 결과 연어급 잠수정을 보내 백령도 근방의 초계함을 비접촉 어뢰로 공격하는 담대한 작전을 세운 겁니다.
저는 지금도 의심스러워요. 왜 합참은 초계함 한 척(천안함)을 백령도 수역에 거의 붙박이처럼 해놨을까 하고요. 작전구역이 좁으니 동선이 이미 노출되는 상황이었어요. 북한군 입장에선 손쉬운 먹잇감이었던 거죠.”
MB와 박근혜 청와대의 위기관리 체계는…
당시 천안함 피격 이후 정부의 위기관리 시스템은 어떠했을까. 사실 민관군의 모든 자원과 역량이 총동원되었다. 또한 많은 나라의 지원과 협력도 있었다. 피격 직후 생존자 구조와 탐색을 위해 해군과 해경은 물론 쌍끌이 등 민간 어선과 관공선까지 함께했다. 구조요청을 받은 모든 기관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현장으로 출동했다.
그러나 예상 못한 엄청난 사건은 혼선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박 전 단장의 말이다.
“상황보고 체계가 처음에는 제대로 잘 안 됐어요. 사실은 2함대 사령부에서 보고를 잘 해줬어야 됐는데, 해군의 보고가 다르고, 합참·해병대·경찰 보고가 다 달라 혼선이 있었습니다.
사건이 터진 날 저녁 늦게 합참 상황실에 가보니 ‘천안함 파공, 침몰 중’이라는 상황보고 제목이 보였어요. 이걸 상황 근무자가 상상해서 쓴 것인지….
청와대도 그래요. 합참의 신뢰성 있는 보고가 청와대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 청와대 해군 행정관에게 휴대폰 보고가 먼저 이뤄졌어요. 그러다 보니 국방장관보다 대통령이 더 빨리 알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어요. 상황보고 체계와 연계된 위기관리라든지, 언론보도 대응문제라든지 보완할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당시 청와대 상황은 어땠을까. 천안함 피격은 최전방에서 발생한 국가안보 위기관리 사안이었다.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과 정무수석실이 공동으로 대응, ‘청와대 천안함 대책회의’라는 별도의 T/F를 구성하고 유기적 협력체계를 구축했다.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종헌씨의 말이다.
“당시 청와대는 위기관리 인원을 많이 줄인 상태였어요. 작은 청와대를 지향하고 있었죠. 위기상황 센터장이 계셨지만 실제 상황팀장은 비서관급 한 명이었어요. 그 휘하에 몇 명이 있었는데 숫자는 적었습니다.
합참 공식보고 전에 청와대가 먼저 인지한 것은 사실이에요. 합참 후배가 청와대 행정관에게 전화로 ‘전방 NLL 근처에서 천안함이 침수되고 있다’고 보고한 것이죠. 청와대에 비상이 걸렸고 합참에 확인전화가 가고… 어쨌든 그것은 계통상의 문제지만 청와대는 빨리 상황을 파악, 대통령에게 실시간 보고가 이뤄졌던 겁니다.
당시 김병기 국방비서관은 퇴근길에 연락을 받고 운전병이 목숨을 걸고 운전해 20분 만에 청와대에 도착했어요. 지하벙커에는 대통령과 비서실장이 계셨고 이후 국정원장, 통일부 장관 등이 속속 도착하는 상황이었어요. 피격 직후 이틀 사이에 청와대 벙커(위기상황센터)에서 외교안보장관회의(NSC 회의를 대신하여 확대 운영)를 4차례 갖는 등 실시간 현장 상황 보고를 받으며 대처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박근혜 정부의 세월호 참사 때와 차이가 있었던 것은 최고 컨트롤 타워가 제자리를 지켰다는 겁니다. 실제 대통령은 ‘제대로 잘 대응하라’는 원론적인 지시밖에 할 수 없지만 정부 대응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성공적이냐 실패냐의 차이는 대통령이 상황을 통제하느냐에 달려 있어요. 세월호 참사 때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제 위치에 계시지 않았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죠. 대규모 참사가 났음에 벙커에 내려와 상황을 점검만 했어도 일이 그렇게 커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치열했던 ‘언론과의 전쟁’ 이후
천안함 피격 직후 무려 500여 명의 기자들이 쏟아내는 기사와 일부 의혹 제기에 국방부 공보실은 연일 전쟁이었다. 즉시 해명자료를 배포하거나 오해에 대한 설명을 통해 사실을 알려 나갔다. 그러나 이들 의혹 주장이나 오보는 즉시 정정되지 않았다. 오보 등은 포털사이트나 검색엔진을 통해 끊임없이 떠올라 의혹 부풀리기의 자양분이 됐다.
박정이 전 단장은 “사건이 발생하고 합조단이 편성되기 전 닷새 동안 굉장히 혼란스런 기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우리 군이 좀 더 상황을 장악하고 언론과 유기적 관계를 가졌더라도 이렇게까지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겁니다. 저도 그 부분이 아쉬워요. 합조단이 편성된 뒤에는 국방차관이 위원장이 되어서 공보 전략회의를 했어요.
사실 우리 정부에는 공보처가 없잖아요. 누가 언론 브리핑의 주무부서인지 모르겠어요. 각 부처의 대변인만 있지 정부 대변인의 개념이 없어져 버렸거든요. 각 부처 대변인이 각자 한마디씩 하는 것으로 끝나버려요. 사안 사안만 발표하고 아무것도 없어요. 정확히 정부 의도가 뭐냐는 겁니다. 일본을 보세요. 항상 관방장관이 똑같은 톤으로 (정부부처와) 같은 내용을 확인해 주거든요.
천안함 사태 때는 국방부 차관이 공보 역할을 주도했는데 좀 더 정부 차원에서 공보에 대한 체계를 세워야 합니다. 그렇다고 언론을 통제하자는 게 아니라 정확하고 객관적인 자료를 주면서 기사화할 수 있게 해야지, 제대로 자료도 주지 않으면 신뢰성이 있을 수 없죠.
미국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치르면서 ‘전략 커뮤니케이션’ 개념을 발전시켰어요. 국가 차원에서 그들이 정책과 정책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민에게 어떤 메시지를 줘야 하나, 상대편 국가에는 어떤 메시지를 줘야 하나 등과 같은 전략 커뮤니케이션 도구를 개발해 대응했다고 합니다. 결국 세계의 부정적 여론을 잠재우면서 대 테러작전을 할 수 있었어요.”
이번에는 이종헌씨의 말이다.
“초기 공보 대응이 부족한 면이 있었죠. 사실은 제대로 공개하고 널리 알리는 작업이 필요했는데 군 입장에선 보안이 국민소통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었죠. 매체가 엄청나게 많아지고 언론 환경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체감하지 못했어요. 또 공보장교로 육군 출신을 세웠지만 해군 상황을 잘 모르니까 해군제독을 다시 공보장교로 바꿔 브리핑을 하는 상황이기도 했어요.
또 이들이 언론 인터뷰에서 알면 안다, 모르면 모른다고 답해야 하는데 일부는 미루어 짐작해 얘기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천안함 피격 발생 시점을 두고 혼선이 크게 있었습니다. 각 예하부대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기준으로 하다 보니까 계속 달라졌던 것이죠. 보고는 보고자가 수화기 든 시각과 수화기 내린 시각이 다른데 어떻게 일치할 수 있겠어요. 그렇게 엉키니까 공보에 혼선이 일었고 결국 청와대가 개입했죠. 당시 한국지질자원연구소에서 측정한 지진파와 공중음파를 분석해 시간을 특정할 수 있었어요. ‘3월 26일 21시 21분 58초’라는 지진파 감지기록을 토대로 혼선을 정리했던 겁니다.
대규모 안보위기 상황이 발생할 경우 언론은 처음엔 정부 발표에 의존하다가 어느 순간 자기 프레임을 갖게 됩니다. 그때 동원되는 사람이 외부의 자칭 전문가들입니다. 그런 사람 몇 마디 말에 군의 노력이 부정당하게 되고 오해를 사게 돼요. 또 소위 역량이나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 전문가라면서 터무니 없는 주장을 펼치는 경우도 있었어요. 게다가 그런 주장이 SNS를 타고 퍼지는 식이었죠. 천안함 피격 사태는 2010년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어 ‘천안함의 정치화’가 이뤄진 측면도 있어요.”
천안함의 정치화·이념화 현상
2010년 천안함 피격 당시 ‘천안함의 정치화·이념화 현상’ 바람이 거셌다. 특히 정치권이 천안함의 진실을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인식했다. 코앞으로 다가온 6·2 지방선거는 정치화 현상을 가속화시켰다. 야당은 정부 여당이 천안함을 선거에 활용하고 있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선거 승리를 위해 정부 발표를 비토했다.
― 현재 천안함 재조사 요구가 있지만 가능한 얘기일까요.
이=“천안함 의혹 세력들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는 진실을 공개하지 못할 분위기였는데 정권이 바뀌었으니 뭔가 새로운 것들이 있을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어요. 정부 관계자나 생존 장병이 양심선언을 못 하는 이유가 국정원 감시 때문이라는 둥 숱한 얘기가 있었잖아요. 하지만 정권이 바뀐 지 1년이 지나도 새로운 얘기가 없습니다. 현재 현 정부의 국방부도 합조단 결과를 인정하고 있어요. 의혹 세력들은 정부가 바뀌면 새로운 증언이나 증거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는데 앞으로 그럴 일은 없으리라 봅니다.”
박=“재조사를 하게 된다면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조사결과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동강 난 천안함 선체의 흔적들, 절단면, 절단상태, 함수·함미의 함저가 아래에서 위쪽으로 휘어진 상태, 함저 외판 패널에 생긴 디싱(소성처짐·dishing) 현상, 합력흔, 버블흔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요.
또 폭발현장(함수와 연돌)에서 수거한 HMX, RDX, TNT 등의 화약 성분을 다 분석해 냈거든요. 어뢰에 들어가는 화약 성분입니다. 북한 어뢰, 중국 어뢰의 화약 성분 표본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뢰가 누구 것이냐를 알 수 있었을 텐데 그걸 모르니 성분만 식별한 겁니다.
이런 결정적인 증거를 반박할 수 있는 증거가 나와야 재조사가 가능하겠죠.”
이=“가만히 들여다보면 의혹을 얘기하는 이의 주장이 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좌초를, 어떤 이는 잠수함 충돌설, 어떤 이는 내부폭발을 얘기합니다. 물론 결론은 재조사 요구로 모입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이유가 분명히 있는 것이죠.
만약 백 번 천 번 양보해서 재조사를 통해 범인이 확인되면, 지금 우리가 이를 추궁하거나 단죄할 수 있을까요. 지금 천안함 혐의자가 남북대화의 상대 파트너인데 과연 가능할지 싶습니다.
현 정부는 남북관계를 어떻게든 풀기 위해 천안함 문제를 덮고 가자는 분위기입니다. 사실 북한 입장에선 재조사 요구가 얼마나 불편할까요. 이미 결정적 증거가 다 나왔는데 다시 조사해서 북한 소행임이 재차 드러났을 때 어떻게 뒷감당하려고요?”
박=“진실은 진실로서 받아들여야 되지 않을까요? 조사단장으로서 한 점의 거짓이나 조작이 없었어요. 조사결과는 지금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유효하며 변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천안함 폭침의 주범은 김영철
―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천안함 폭침의 주범은 누구입니까.
이종헌씨는 “북한 정권의 지시를 받고 실행한 사람은 김영철”이라고 했다.
“다들 알고 있듯, 북한 정권의 지시를 받고 실행한 사람은 김영철이죠. 본인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그 죄를 추궁하는 남쪽 천안함 유족들의 마음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 김정은 차례입니다. 아버지 김정일도, 할아버지 김일성도 적대적 도발에 사과한 일이 있습니다. 천안함 사건이 8년 지났어요. 남북관계가 큰 폭으로 좋아지려면 천안함, 연평도 도발에 대해 ‘통 크게’ 사과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다가오는 남북정상회담에서 우리가 요구하고 이에 화답하는 모습이 있었으면 합니다.”
과거 김일성과 김정일은 1·21사태와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강릉 잠수함 침투와 제2 연평해전에 대해 각각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와 유감을 표시했다.
박정이 전 단장은 “당시 김영철 정찰총국장이 주도해서 사건을 일으켰다고 공공연하게 믿고 있었고 저도 공감하고 있다”고 했다.
“정보당국이 분석, 저희에게 제공해 그렇게 인식하고 있고, 김영철을 주범으로 알고 있습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에 와서 사과나 유감표명을 했어야 했어요.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장병 46명이 사망했습니다. 6명의 시신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국가적 안보사건 중 가장 심각한 사건이었어요. 살아 있는 안보 교과서를 국민은 절대 잊어선 안 됩니다. 당시 이 사건이 국민의 안보의식이 획기적으로 변화된 계기가 됐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김영철(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은 지난 4월 2일 남측 예술단의 평양 공연에 참여한 우리 측 기자들에게 “남측에서 천안함 폭침 주범이라는 사람이 저 김영철”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김영철의 발언에 대해 청와대는 “특별한 입장이 없다”고 밝혔다.
이=“천안함 피격이 그가 희화화시킬 정도로 가벼운 사건이 아닙니다. 국민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건을 마치 자기는 아니라는 식으로 ‘주범’ 운운하는 것은 정말 문제가 있어요.”
박=“저는 평창올림픽 때 대표단 자격으로 내려온 것 자체가 적절한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천안함 폭침의 실질적인 총책임자인데 왜 내려보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은 그들이 의도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5·24 조치를 해제, 무력화시키려는 목적이 그 속에 깔려 있지 않을까요?
북한을 보면 항시 이중적이거든요. 표면적으로 평화적 제스처를 취하지만 밑으로는 정치적인 복선이 깔려 있단 말이에요. 사과나 유감표명 한마디 없이 김영철을 내려보낸 이유는 남한 분위기를 간파하려는 속셈이 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국민은 분노하지 않았습니까.”⊙
좌초설, 기뢰설, 잠수함충돌설, 한미자작극설 등 천안함 폭침을 바라보는 의혹도 제각각이다. 천안함 민군 합동조사단(이하 합조단)의 조사결과에 맞서는 통일되고 일관된 주장이 없다. 즉 의혹 세력들은 자신의 주장에 부합하는 부분적인 사실만을 크게 부각시키고 다른 증거나 사실에는 아예 눈을 감는다.
게다가 천안함 사건의 주범인 김영철은 “남측에서 천안함 폭침 주범이라는 사람이 저 김영철”이라며 우리 국민을 조롱하는 상황이다. 천안함의 진실은 밝혀졌지만 우리 사회 내 의혹 세력이 있는 한 단죄까지는 요원해 보인다. 그러나 북한의 도발과 만행을 규탄하는 노력은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끝난 것이 아니다. 북한의 책임 인정과 사과 등의 전제하에서 천안함 응징 수단인 5·24 조치의 건설적 전향적 논의가 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5·24 조치는 개성공단을 제외하고 남북교역을 전면 중단시킨 사상 첫 대규모 대북제재를 말한다.
기자는 천안함 피격사건 직후 합조단장으로 활동, 진실규명에 앞장선 박정이(朴正二) 예비역 육군 대장과 《천안함 전쟁 실록, 스모킹 건》의 저자 이종헌(李鍾憲)씨를 만났다.
육사 32기 출신인 박정이 예비역 육군 대장은 12사단 37연대 2대대 소대장을 시작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22사단 55연대장 시절 강릉무장공비 대침투 작전에 참가했으며, 13공수여단장, 20기계화보병사단장, 합참 작전부장, 수도방위사령관, 합참 전력발전본부장, 제1야전군사령관 등으로 36년간 복무했다. 지난 2011년 10월 17일 전역했다.
박정이 전 합조단장은 ‘군번줄’ 일화로 유명하다. 지난 2010년 4월 30일 천안함 침몰 원인 규명을 위한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한 30명에 가까운 장성들 중 인식표(군번줄)를 차고 있던 서너 명의 장성 중 한 명이었다. 부하들에게 포용력 있는 선 굵은 지휘관이자 강한 책임감을 바탕으로 한 완벽한 업무 처리로 정평이 높은 인물이다.
이종헌씨는 천안함 피격 직후 청와대에 설치된 천안함 실무 T/F 책임을 맡아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 정부와 군 수뇌부의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했다. 이듬해 3월에는 《천안함 피격사건 백서》 발간에도 참여했다. 그는 “천안함 의혹이 합리적 의심의 영역도 있었지만 상당 부분은 이념과 진영 논리에 근거해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려 했고 결과적으로 북한을 변호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주장한다.
기자는 박 전 단장과 이씨를 지난 4월 2일 경기도 분당에 위치한 한국군사문제연구원에서 만났다.
‘스모킹 건’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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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이 전 천안함 민군 합동조사단장(왼쪽)과 《천안함 전쟁 실록, 스모킹 건》의 저자 이종헌씨. |
“1996년 강릉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났을 때 3000여 명의 연대병력을 이끌고 한 달 반 동안 야외에서 무장공비 소탕을 위한 대침투 작전을 수행한 적이 있었어요. 야전 상황이다 보니 제일 어려웠던 게 병력의 급식과 세탁, 배설 문제였어요. 실전 상황에서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면서 야전 군기를 확립하며 작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체감했어요. 그때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두 번째 기억은 합동조사단장 임무를 부여받은 일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런 일을 했나 싶어요. 당시 합참 준비태세검열실과 국방부 조사본부, 국방부 감사관실에서 천안함 피격의 원인 규명에 나섰지만 사건 발생 시점이 계속 바뀌고, 천안함 사건 당시 인근 레이더상의 새떼를 북한 전투기로 오인해 경고사격을 하는 등 계속 지엽적인 문제로 사건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민군 다국적 합조단이 꾸려진 겁니다.
쌍끌이 어선을 동원해 건져 올렸던 북한 ‘1번 어뢰’는 천운이 아니고선 건져 올릴 수 없다고 봅니다. 또 조사 방식도 굉장히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결과였고요. 군 생활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의미 있고 자긍심을 느끼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종헌씨는 “5·24 대북조치나 유엔 의장성명 등은 ‘스모킹 건’을 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합조단은 피격 현장에서 ‘1번 어뢰 추진체’를 인양했고 정보분석을 통해 북한 수출용 카탈로그에서 북한산 어뢰(CHT-02D)의 정체를 확인했어요. 북한은 이 어뢰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객관적 증거 앞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죠. 김정은을 위한 통 큰 도발의 꼬리가 잡히면서 북한의 만행은 다시 세계인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만약 스모킹 건을 찾는 데 실패했다면, 천안함의 진실은 미궁으로 빠져들었을 겁니다.”
박=“그때 중국이 협조했더라면 의장 성명이 아니라 유엔결의안까지 가능했어요.”
이=“당시 우리 대표단은 유엔에서 각국 대사들 앞에서 브리핑을 잘하셨고 영상자료까지 만들어 호소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유엔 주재 중국 대사나 러시아 대사조차 반박하지 못했어요. 그들은 북한을 끝까지 챙기려고만 했지요. 그나마 타협이 된 게 의장성명이고 천안함 피격 주체를 명시하지 못한 일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천안함은 실전 상황에서 ‘비접촉 어뢰’로 공격받은 드문 사례
― 지난 3월 28일 KBS 〈추적60분〉 보셨나요? 북한 소행이 아니라는 세력이 유포했던 의혹의 재탕이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천안함 피격 이후 8년이 지났는데 변화된 새로운 의혹이 하나도 없었어요. 새로운 팩트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주목하고 반박하겠지만 전혀 없었어요.”
박=“새로운 것은 38년 동안 수중구조 일을 했다는 민간업체 대표의 증언이 아닌가요?”
천안함 함수를 직접 인양한 민간업체 대표 전중선씨는 〈추적60분〉과의 인터뷰에서 “천안함 바닥에 무언가에 긁힌 듯한 스크래치(scratch·긁힘 현상)가 있는 것을 선명하게 봤다. 어뢰에 맞았는데 스크래치가 왜 생기느냐”고 주장했다.
이=“아닙니다. 당시에도 인양업체 관계자가 스크래치 주장을 하길래 군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얘기를 왜 하느냐’며 항의한 일이 있었어요. 과학적 분석이나 검토 없이 그냥 본 대로 얘기한 것이죠.”
박=“천안함은 두 동강이 나면서 일부 긁힘 흔적도 나 있었어요. 그건 침몰 시, 그리고 인양하면서 쇠밧줄에 묶어 올리면서 자국이 생긴 겁니다.”
이=“긁힌 흔적은 세월호 인양 때도 똑같이 있었습니다.”
박=“제가 볼 때 그건 스크래치가 아니거든요. 좌초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찢김 현상(cutting)으로 봐야 하는데, 스크래치라고 애매한 소리를 한 겁니다.
또 천안함이 어뢰 폭발이 아니라는 증거로 생존 장병이나 시신에서 고막 파열이나 코피가 나는 등 이비인후과적 손상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천안함 피격은 어뢰에 의한 직접 타격이 아닙니다. 수중에서 어뢰가 폭발, 그 충격에 의해 천안함이 두 동강 난 것입니다. 검안결과, 화상이나 파편상, 관통상이 없었고 생존 환자 대부분 골절이나 열창, 타박상이 다수입니다. 사망한 이들 역시 전원 익사로 추정됩니다.”
이=“어뢰에 의한 직접 타격은 2차 세계대전 당시 U보트를 생각하면 됩니다. 직접 타격의 경우 화염과 폭발이 일어나고 배가 두 동강이 납니다. 그러나 천안함은 비접촉 폭발이에요. 어뢰가 함체에 직접 부딪치지 않았어요. 배 밑에서 터져 폭발 압력이 위로 솟구쳐 버블이 선체를 치고 올라갔다가 가라앉으며 배가 두 동강이 난 겁니다.”
박=“맞아요. 사람들이 접촉 폭발과 비접촉 폭발을 전혀 모르고 얘기를 합니다. 아니면, 알면서도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 해군사령관 카를 되니츠가 이끌던 U보트는 접촉식 폭발어뢰로 연합국 함선을 공격했다. 이때 어뢰가 함정을 직접 타격하면서 승조원들 일부는 고막 손상과 파편상, 화상을 입었고 함정은 불바다가 된 후 침몰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에는 실전 상황이 드물어 비접촉 어뢰의 폭발 사례는 거의 없다. 천안함은 어뢰가 함체에 직접 부딪치지 않은 비접촉 폭발로 생긴 충격파와 버블 효과에 의해 두 동강 난 채 침몰했다. 천안함의 경우는 실전적 상황에서 비접촉 어뢰 공격을 받은 매우 드문 사례였다. 박정이 전 단장의 말이다.
“당시 천안함 피격사건은 수중에서 비접촉 어뢰 폭발로 발생한 것이죠. 수중에서 어뢰가 비접촉 폭발을 하면 충격파와 가스버블이 발생하는데, 가스버블 외부에서 발생하는 충격파가 먼저 선체에 충격을 가했고, 동시에 가스버블이 팽창하면서 선체를 들어 올려 배가 꺾였고(호깅 현상·hogging), 다시 수축되면서 선체를 아래로 당겨 재차 꺾였어요.(새깅 현상·sagging) 이때 버블이 붕괴되면서 버블제트 충격이 발생해 선체가 절단된 것입니다.”

KBS 〈추적60분〉의 의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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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침몰사고 민군 합동조사단 공동단장인 박정이 합참 전력발전본부장이 2010년 4월 25일 국방부에서 인양된 함수 절단면을 설명하고 있다. |
박=“TOD상의 ‘검은 점’이 무언지를 두고 당시 합조단 내부에서 논란이 됐고 검토의 검토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생존 병사가 ‘구명정이 터진 것’이라는 증언을 했죠.”
이=“‘검은 점’ 주장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잠수함과의 충돌로 몰아가려고 나온 의혹입니다. TOD 영상을 보면 ‘검은 점’ 속도가 배의 진행 속도보다 늦어요.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안이 텅 비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파도가 따라가는 속도보다 늦은 거지요. 이것은 상식적으로 볼 문제입니다. 만약 힘이 있고 단단한 물질이라면 함수가 떠내려가는 속도와 같은 속도로 떠내려가야 하는데 힘이 없으니 부력에 의해 천천히 떠내려가요. 그래서 구명정이 맞습니다.”
천안함 ‘흡착물질’ 논쟁도 〈추적60분〉에서 다뤄졌다. 흡착물질이란 천안함 선체와 이른바 ‘1번 어뢰’, 모의수조폭발실험에서 나온 백색분말가루를 말한다. 합조단은 어뢰 폭발 시 나타나는 알루미늄 산화물 계열의 폭발물질이라는 입장이지만 의혹 세력들은 “자연(용액상태)에서 침전하면서 생기는 물질”이라고 주장했다.
박 전 단장은 이에 대해 “실험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일축했다.
“흡착물질은 실험 조건이 다른 상태에서 실험하면 결과물이 다를 수 있어요. 합조단 실험은 실제 폭발 상황과 거의 비슷한 조건인 3000℃ 이상과 20만 기압 이상에서 이뤄졌어요. 그러나 의혹 제기자는 실제 상황과 같이 안 하니까 결과가 다른 것이죠.”
흡착물질을 규명하기 위한 합조단의 수중폭발실험은 천안함 피격 원인을 찾기 위한 가장 과학적 실험으로 손꼽힌다. 실험결과, 천안함 선체와 어뢰, 그리고 수중폭발실험에서 발견된 흡착물질은 모두 성분이 같은 폭발재임이 입증됐다.
또 국방과학연구소(ADD)의 별도 공간에서 폭발 조건과 가깝게 수중폭발실험을 실시했다. 실제 2m×1.5m×1.5m의 강철 수조를 만들었다.
이 실험으로 나온 성분 분석의 결과는 천안함 선수와 선미 그리고 연돌, ‘1번 어뢰’ 잔해에 달라붙어 있던 흡착물질과 일치했다. 이는 어뢰와 천안함 함수, 함미, 연돌이 같은 순간에 폭발했음을 말해주는 과학적 증거였다.
이=“하지만 미국 버지니아대 이승헌 교수의 실험 조건은 천안함이나 합조단 수조폭발실험과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는데도 그는 합조단 조사결과가 조작됐다고까지 주장합니다. 과학자로서 자세가 아니죠.”
박=“의혹을 제기한 분들에게 한국으로 들어와 같이 토의해 보자고 했는데 끝까지 들어오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박 전 단장은 “돌이켜보면 각종 천안함 사건 당시 제기된 의혹이 합조단 활동을 어렵게 만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의혹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검증에 검증을 더하게 만든 계기가 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박 전 단장의 말이다.
“제기된 의혹들을 재차 검증하다 보니 합조단에서 실시한 조사의 신뢰성을 한층 더 높여 주었으며, 의혹에 맞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조사활동으로 침몰 원인을 더욱 정확하게 규명하려는 동기를 부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8년이 지난 지금 〈추적60분〉 보도가 나왔어요. 국민이 봤을 때 ‘아직도 천안함 조사가 제대로 안 된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어요. 공영방송의 의도가 무언지 의아한 느낌을 가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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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피격의 증거물이다. 어뢰 추진축 뒷부분 안쪽에 ‘1번’이라고 적혀 있다. |
박정이 전 단장은 합조단 활동 중 가장 기뻤던 일로 ‘1번 어뢰’ 발견을 꼽았다. 그런데 아쉬웠던 일도 ‘1번 어뢰’와 관련한 해프닝이라고 얘기했다.
“사실 난감했어요. 어뢰가 폭발한 뒤 어떤 물질이 남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나중 조사해 보니 알루미늄 합금으로 만든 어뢰는 산산조각이 나고 잔해도 없다는 거예요. 남는 것은 어뢰추진동력장치로 쓴 쇠붙이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망망대해 47m 수심에서 그걸 건져 올릴까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어요. 강력한 자석을 넣을까, 모래 준설선을 동원해 일대의 모래를 다 뿜어 올릴까 고민도 했어요. 사실 어뢰 화약 성분을 검출했기에 근처 어디에 분명 어뢰추진체가 있을 것으로 확신했거든요.
당시 합조단 과학수사분과에 공군 대령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 말씀이 ‘2006년 6월 동해안에 F-15K가 추락했을 때 수심 372m 해저에서 3주 만에 전투기 잔해를 90% 이상 끄집어냈는데, 그때 쌍끌이 어선을 동원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작된 것입니다. 당시 쌍끌이 어선 ‘대평수산’의 김남식 선장에게 전화를 거니 ‘꼭 한번 해보겠다’고 하더군요. 애국심도 있고 안보의식이 투철한 분 같아서 맡기게 됐습니다.”
― 이번에도 쌍끌이 어선이 위력을 발휘했군요.
계속된 박 전 단장의 말이다.
“처음 특수고무로 그물망을 제작해 시험 삼아 해봤더니 (그물망이) 다 찢어지더군요. 다시 보강해 5월 10일부터 작업을 시작했는데 잔해들이 막 올라와요.
매일매일 수거물을 보고받았어요. 사실, 뭔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5월 15일 오전 9시30분인가? 모터 같은, 프로펠러 같은 어뢰추진체(모델명 CHT-02D)를 건졌다는 보고를 받았어요. 그리고 그날 오후 1시30분인가, 2함대 사령부로 공수됐어요. 딱 보니까 맞아요. 다만, 미국 어뢰 전문가와 우리 어뢰 전문가(이재명 박사)도 있었는데 누가 만든 어뢰추진체인지 식별이 어렵다는 겁니다.
그날 오후 3시부터 정밀 감식에 들어갔죠. 추진 후부를 열어보니까 ‘1번’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어요. 정보분과에 확인해 보니 우리 정보기관이 북한의 수출용 어뢰 카탈로그를 보유하고 있다는 겁니다. 설계도와 비교해 보니 딱 들어맞아요.
미국도 그런 어뢰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했고 우리만 가지고 있던 거예요. 그걸 가지고 북한 어뢰임을 증명한 겁니다.
이후 철저히 보안을 유지했어요. 만약 우리가 어뢰추진체를 수거했다는 정보가 새어 나가면 북한 특수부대가 침투할 수 있다고 봤어요. 극비리에 경계가 삼엄한 지하시설로 옮겨놓았지요.
김태영 국방장관에게 보고를 드렸고, 장관도 그날 오후에 2함대 사령부로 오셨어요. 미국조사단도 신속히 본국에 보고하더군요. 그래서 5월 20일 브리핑을 하게 된 것입니다.”
― 청와대 분위기는 어땠나요.
당시 청와대 천안함 실무 T/F 책임을 맡았던 이종헌씨의 말이다.
“정말 고민을 많이 했죠. 빨리 결론이 나야 하는데 시간은 흐르고… 북한 소행임이 거의 다 드러났지만 문제는 결정적 증거, 스모킹 건이 안 나와 초조한 상황이었어요. 어뢰에 의한 외부 폭발, 비접촉 폭발까지는 나왔는데 실물이 있어야지 설득이 되잖아요. 스모킹 건 확보로 모든 게 분명해진 거죠.”
그러나 그해 5월 24일 영국의 프리랜서 작가인 스콧 그레이턴(Scot Greghton)이 자신의 블로그에 5월 20일 합조단이 공개한 어뢰 도면과 실제로 찾은 어뢰추진동력체가 다르다는 내용을 포스팅했고 국내 인터넷 언론이 보도하면서 파문이 일었다. 박정이 전 단장의 말이다.
“브리핑에 앞서 리허설까지 했어요. 어뢰추진체 도면을 확대하도록 지시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설계도였어요. 북한 판매 카탈로그 안에 설계도가 2개가 있었는데, 한 실무자가 보안문제로 정확히 확인을 하지 않은 채 다른 설계도를 확대한 것이죠. 굉장히 큰 실수였어요. 실무자의 실수라고 하기엔 너무 낯 뜨거워서….”

우리 군 정보 파트, 북한 잠수정 공격 첩보 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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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4년 7월 16일 해군사관학교 제70기 3학년 연안실습전대 생도들이 국립대전현충원 천안함 46용사 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
― 천안함 피격 이전에 그런 정보가 우리 군에 입수가 됐나요.
이=“합참이 잠수함 가능성에 대해 지침을 내려보낸 게 있어요. 대잠 전술토의도 하고 1~2마일마다 급격히 항로를 바꾸라는 지침도 내리는 등 나름 대비를 했었습니다. 사실 2~3월이면 대동강이 풀리고 잠수함이 기동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보통 겨울에는 대동강이 얼어서 잠수함(잠수정)이 기동할 수 없어요. 대동강과 서해를 연결하는 서해갑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외해가 얼어버리면 나갈 수가 없는 것이죠. 하여튼 그런 상황이었고 대비를 해야 하는데 미흡했죠.”
박=“제1연평해전(1999년 6월 15일) 때는 우리가 완전히 승리했지만 제2연평해전(2002년 6월 29일)은 우리가 굉장히 피해를 봤어요. 대청해전(2009년 11월 10일) 때는 우리 측 피해가 전혀 없었어요. 그때 북한 최고사령부는 ‘값비싼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했죠. 그땐 겨울이 오는 상황이었고 서해함대사령부와 4군단 지역에서 응징 보복하려 한다는 징후도 있었습니다. 합참이나 군 차원에서 대비태세 강화 지시를 내렸고 잠수함 공격 시 대응 지침들을 내려보내기도 했어요.
겨울이 지나고 2010년 봄이 오면서 우리 군도 자연 긴장하는 상황이었죠. 그리고 4월이면 서해 바다에서 꽃게잡이가 시작됩니다. 수많은 어선이 작전 지역에 들어가서 조업을 해요. 그래서 꽃게잡이가 시작되기 전인 3월 말로 북한이 도발시점을 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송영무 국방장관이 지난 2010년 4월 6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미 공동작전 중에 북한이 도발했을 가능성은 없다”며 정부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어요. 이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박=“‘작전’이 아니라 한미 ‘연합훈련’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미군 잠수함과의 충돌설, 미군 잠수함의 오발설 등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훈련은 태안반도 앞바다에서 이뤄진 것이고 사건발생 장소와 170km나 떨어진 곳입니다. 전혀 관련이 없어요.”
― 왜 천안함 피격날짜를 2010년 3월 26일로 정했는지 다른 요인은 없을까요.
이=“정치군사적 측면에서 그때가 김정은의 본격적인 등장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고 봅니다. 김정일은 아들 김정은의 후계 체제를 만들어 주려고, 김정은의 군사적 성과를 위해 우리 군을 제쳐 버릴 수 있는 ‘통 큰’ 작전을 기획하지 않았을까요. 여기에는 3가지 요건이 필요한데 첫째는 한반도에 큰 영향을 미칠 만한 큰 작전이어야 하고 둘째는 절대 꼬리가 안 잡혀야 하고, 셋째는 북한이 비대칭 자산을 이용한 전술적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거죠. 이 3가지 요건에 맞춰 나름 모색한 결과 연어급 잠수정을 보내 백령도 근방의 초계함을 비접촉 어뢰로 공격하는 담대한 작전을 세운 겁니다.
저는 지금도 의심스러워요. 왜 합참은 초계함 한 척(천안함)을 백령도 수역에 거의 붙박이처럼 해놨을까 하고요. 작전구역이 좁으니 동선이 이미 노출되는 상황이었어요. 북한군 입장에선 손쉬운 먹잇감이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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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1일 서울 광화문 광장과 세종대로가 태극기를 든 시위대로 가득 찼다. 경찰은 이날 보수단체 집회 인원을 1만5000여 명으로 예상했으나, 훨씬 많은 이가 참여했다. “정부가 천안함 폭침 주범인 북한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을 환대하는 것을 보고 나왔다”는 사람이 많았다. |
그러나 예상 못한 엄청난 사건은 혼선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박 전 단장의 말이다.
“상황보고 체계가 처음에는 제대로 잘 안 됐어요. 사실은 2함대 사령부에서 보고를 잘 해줬어야 됐는데, 해군의 보고가 다르고, 합참·해병대·경찰 보고가 다 달라 혼선이 있었습니다.
사건이 터진 날 저녁 늦게 합참 상황실에 가보니 ‘천안함 파공, 침몰 중’이라는 상황보고 제목이 보였어요. 이걸 상황 근무자가 상상해서 쓴 것인지….
청와대도 그래요. 합참의 신뢰성 있는 보고가 청와대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 청와대 해군 행정관에게 휴대폰 보고가 먼저 이뤄졌어요. 그러다 보니 국방장관보다 대통령이 더 빨리 알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어요. 상황보고 체계와 연계된 위기관리라든지, 언론보도 대응문제라든지 보완할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당시 청와대 상황은 어땠을까. 천안함 피격은 최전방에서 발생한 국가안보 위기관리 사안이었다.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과 정무수석실이 공동으로 대응, ‘청와대 천안함 대책회의’라는 별도의 T/F를 구성하고 유기적 협력체계를 구축했다.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종헌씨의 말이다.
“당시 청와대는 위기관리 인원을 많이 줄인 상태였어요. 작은 청와대를 지향하고 있었죠. 위기상황 센터장이 계셨지만 실제 상황팀장은 비서관급 한 명이었어요. 그 휘하에 몇 명이 있었는데 숫자는 적었습니다.
합참 공식보고 전에 청와대가 먼저 인지한 것은 사실이에요. 합참 후배가 청와대 행정관에게 전화로 ‘전방 NLL 근처에서 천안함이 침수되고 있다’고 보고한 것이죠. 청와대에 비상이 걸렸고 합참에 확인전화가 가고… 어쨌든 그것은 계통상의 문제지만 청와대는 빨리 상황을 파악, 대통령에게 실시간 보고가 이뤄졌던 겁니다.
당시 김병기 국방비서관은 퇴근길에 연락을 받고 운전병이 목숨을 걸고 운전해 20분 만에 청와대에 도착했어요. 지하벙커에는 대통령과 비서실장이 계셨고 이후 국정원장, 통일부 장관 등이 속속 도착하는 상황이었어요. 피격 직후 이틀 사이에 청와대 벙커(위기상황센터)에서 외교안보장관회의(NSC 회의를 대신하여 확대 운영)를 4차례 갖는 등 실시간 현장 상황 보고를 받으며 대처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박근혜 정부의 세월호 참사 때와 차이가 있었던 것은 최고 컨트롤 타워가 제자리를 지켰다는 겁니다. 실제 대통령은 ‘제대로 잘 대응하라’는 원론적인 지시밖에 할 수 없지만 정부 대응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성공적이냐 실패냐의 차이는 대통령이 상황을 통제하느냐에 달려 있어요. 세월호 참사 때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제 위치에 계시지 않았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죠. 대규모 참사가 났음에 벙커에 내려와 상황을 점검만 했어도 일이 그렇게 커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치열했던 ‘언론과의 전쟁’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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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25일 오후 2018평창동계올림픽 폐막식에 참석한 이방카 트럼프 미국 백악관 보좌관 뒤로 김영철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통일전선부장)이 자리하고 있다. |
박정이 전 단장은 “사건이 발생하고 합조단이 편성되기 전 닷새 동안 굉장히 혼란스런 기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우리 군이 좀 더 상황을 장악하고 언론과 유기적 관계를 가졌더라도 이렇게까지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겁니다. 저도 그 부분이 아쉬워요. 합조단이 편성된 뒤에는 국방차관이 위원장이 되어서 공보 전략회의를 했어요.
사실 우리 정부에는 공보처가 없잖아요. 누가 언론 브리핑의 주무부서인지 모르겠어요. 각 부처의 대변인만 있지 정부 대변인의 개념이 없어져 버렸거든요. 각 부처 대변인이 각자 한마디씩 하는 것으로 끝나버려요. 사안 사안만 발표하고 아무것도 없어요. 정확히 정부 의도가 뭐냐는 겁니다. 일본을 보세요. 항상 관방장관이 똑같은 톤으로 (정부부처와) 같은 내용을 확인해 주거든요.
천안함 사태 때는 국방부 차관이 공보 역할을 주도했는데 좀 더 정부 차원에서 공보에 대한 체계를 세워야 합니다. 그렇다고 언론을 통제하자는 게 아니라 정확하고 객관적인 자료를 주면서 기사화할 수 있게 해야지, 제대로 자료도 주지 않으면 신뢰성이 있을 수 없죠.
미국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치르면서 ‘전략 커뮤니케이션’ 개념을 발전시켰어요. 국가 차원에서 그들이 정책과 정책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민에게 어떤 메시지를 줘야 하나, 상대편 국가에는 어떤 메시지를 줘야 하나 등과 같은 전략 커뮤니케이션 도구를 개발해 대응했다고 합니다. 결국 세계의 부정적 여론을 잠재우면서 대 테러작전을 할 수 있었어요.”
이번에는 이종헌씨의 말이다.
“초기 공보 대응이 부족한 면이 있었죠. 사실은 제대로 공개하고 널리 알리는 작업이 필요했는데 군 입장에선 보안이 국민소통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었죠. 매체가 엄청나게 많아지고 언론 환경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체감하지 못했어요. 또 공보장교로 육군 출신을 세웠지만 해군 상황을 잘 모르니까 해군제독을 다시 공보장교로 바꿔 브리핑을 하는 상황이기도 했어요.
또 이들이 언론 인터뷰에서 알면 안다, 모르면 모른다고 답해야 하는데 일부는 미루어 짐작해 얘기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천안함 피격 발생 시점을 두고 혼선이 크게 있었습니다. 각 예하부대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기준으로 하다 보니까 계속 달라졌던 것이죠. 보고는 보고자가 수화기 든 시각과 수화기 내린 시각이 다른데 어떻게 일치할 수 있겠어요. 그렇게 엉키니까 공보에 혼선이 일었고 결국 청와대가 개입했죠. 당시 한국지질자원연구소에서 측정한 지진파와 공중음파를 분석해 시간을 특정할 수 있었어요. ‘3월 26일 21시 21분 58초’라는 지진파 감지기록을 토대로 혼선을 정리했던 겁니다.
대규모 안보위기 상황이 발생할 경우 언론은 처음엔 정부 발표에 의존하다가 어느 순간 자기 프레임을 갖게 됩니다. 그때 동원되는 사람이 외부의 자칭 전문가들입니다. 그런 사람 몇 마디 말에 군의 노력이 부정당하게 되고 오해를 사게 돼요. 또 소위 역량이나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 전문가라면서 터무니 없는 주장을 펼치는 경우도 있었어요. 게다가 그런 주장이 SNS를 타고 퍼지는 식이었죠. 천안함 피격 사태는 2010년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어 ‘천안함의 정치화’가 이뤄진 측면도 있어요.”
천안함의 정치화·이념화 현상
2010년 천안함 피격 당시 ‘천안함의 정치화·이념화 현상’ 바람이 거셌다. 특히 정치권이 천안함의 진실을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인식했다. 코앞으로 다가온 6·2 지방선거는 정치화 현상을 가속화시켰다. 야당은 정부 여당이 천안함을 선거에 활용하고 있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선거 승리를 위해 정부 발표를 비토했다.
― 현재 천안함 재조사 요구가 있지만 가능한 얘기일까요.
이=“천안함 의혹 세력들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는 진실을 공개하지 못할 분위기였는데 정권이 바뀌었으니 뭔가 새로운 것들이 있을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어요. 정부 관계자나 생존 장병이 양심선언을 못 하는 이유가 국정원 감시 때문이라는 둥 숱한 얘기가 있었잖아요. 하지만 정권이 바뀐 지 1년이 지나도 새로운 얘기가 없습니다. 현재 현 정부의 국방부도 합조단 결과를 인정하고 있어요. 의혹 세력들은 정부가 바뀌면 새로운 증언이나 증거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는데 앞으로 그럴 일은 없으리라 봅니다.”
박=“재조사를 하게 된다면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조사결과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동강 난 천안함 선체의 흔적들, 절단면, 절단상태, 함수·함미의 함저가 아래에서 위쪽으로 휘어진 상태, 함저 외판 패널에 생긴 디싱(소성처짐·dishing) 현상, 합력흔, 버블흔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요.
또 폭발현장(함수와 연돌)에서 수거한 HMX, RDX, TNT 등의 화약 성분을 다 분석해 냈거든요. 어뢰에 들어가는 화약 성분입니다. 북한 어뢰, 중국 어뢰의 화약 성분 표본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뢰가 누구 것이냐를 알 수 있었을 텐데 그걸 모르니 성분만 식별한 겁니다.
이런 결정적인 증거를 반박할 수 있는 증거가 나와야 재조사가 가능하겠죠.”
이=“가만히 들여다보면 의혹을 얘기하는 이의 주장이 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좌초를, 어떤 이는 잠수함 충돌설, 어떤 이는 내부폭발을 얘기합니다. 물론 결론은 재조사 요구로 모입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이유가 분명히 있는 것이죠.
만약 백 번 천 번 양보해서 재조사를 통해 범인이 확인되면, 지금 우리가 이를 추궁하거나 단죄할 수 있을까요. 지금 천안함 혐의자가 남북대화의 상대 파트너인데 과연 가능할지 싶습니다.
현 정부는 남북관계를 어떻게든 풀기 위해 천안함 문제를 덮고 가자는 분위기입니다. 사실 북한 입장에선 재조사 요구가 얼마나 불편할까요. 이미 결정적 증거가 다 나왔는데 다시 조사해서 북한 소행임이 재차 드러났을 때 어떻게 뒷감당하려고요?”
박=“진실은 진실로서 받아들여야 되지 않을까요? 조사단장으로서 한 점의 거짓이나 조작이 없었어요. 조사결과는 지금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유효하며 변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천안함 폭침의 주범은 김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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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14일 경기도 평택 해군 제2함대에서 전군주요지휘관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승조 연합사부사령관, 김성찬 해군참모총장, 한민구 합참의장, 김태영 국방부 장관, 황의돈 육군참모총장, 이계훈 공군참모총장, 박정이 1군사령관. |
이종헌씨는 “북한 정권의 지시를 받고 실행한 사람은 김영철”이라고 했다.
“다들 알고 있듯, 북한 정권의 지시를 받고 실행한 사람은 김영철이죠. 본인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그 죄를 추궁하는 남쪽 천안함 유족들의 마음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 김정은 차례입니다. 아버지 김정일도, 할아버지 김일성도 적대적 도발에 사과한 일이 있습니다. 천안함 사건이 8년 지났어요. 남북관계가 큰 폭으로 좋아지려면 천안함, 연평도 도발에 대해 ‘통 크게’ 사과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다가오는 남북정상회담에서 우리가 요구하고 이에 화답하는 모습이 있었으면 합니다.”
과거 김일성과 김정일은 1·21사태와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강릉 잠수함 침투와 제2 연평해전에 대해 각각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와 유감을 표시했다.
박정이 전 단장은 “당시 김영철 정찰총국장이 주도해서 사건을 일으켰다고 공공연하게 믿고 있었고 저도 공감하고 있다”고 했다.
“정보당국이 분석, 저희에게 제공해 그렇게 인식하고 있고, 김영철을 주범으로 알고 있습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에 와서 사과나 유감표명을 했어야 했어요.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장병 46명이 사망했습니다. 6명의 시신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국가적 안보사건 중 가장 심각한 사건이었어요. 살아 있는 안보 교과서를 국민은 절대 잊어선 안 됩니다. 당시 이 사건이 국민의 안보의식이 획기적으로 변화된 계기가 됐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김영철(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은 지난 4월 2일 남측 예술단의 평양 공연에 참여한 우리 측 기자들에게 “남측에서 천안함 폭침 주범이라는 사람이 저 김영철”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김영철의 발언에 대해 청와대는 “특별한 입장이 없다”고 밝혔다.
이=“천안함 피격이 그가 희화화시킬 정도로 가벼운 사건이 아닙니다. 국민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건을 마치 자기는 아니라는 식으로 ‘주범’ 운운하는 것은 정말 문제가 있어요.”
박=“저는 평창올림픽 때 대표단 자격으로 내려온 것 자체가 적절한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천안함 폭침의 실질적인 총책임자인데 왜 내려보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은 그들이 의도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5·24 조치를 해제, 무력화시키려는 목적이 그 속에 깔려 있지 않을까요?
북한을 보면 항시 이중적이거든요. 표면적으로 평화적 제스처를 취하지만 밑으로는 정치적인 복선이 깔려 있단 말이에요. 사과나 유감표명 한마디 없이 김영철을 내려보낸 이유는 남한 분위기를 간파하려는 속셈이 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국민은 분노하지 않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