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 72만6000여 관람객 울린 ‘어머니展’ 이어 감동 전시회 ‘아버지展’도 열린다
⊙ 2018년 12월 모의 개관 거쳐 2019년 1월 중순경 서울관악 하나님의 교회서 첫선, 전국 순회 전시 예정
⊙ 시·수필·사진·소품·영상 등 ‘아버지 사랑’ 작품·소품 234점 전시… 부대행사 별도 마련
⊙ “내가 꿈을 꾸는 것보다 자녀에게 꿈을 심어주는 것이 부모” 아버지의 진심이 묻어나는 전시
⊙ 일본 교환학생 “전시회 보면서 아버지 떠올라… 돌아가면 꼭 효도하겠다”
⊙ 2018년 12월 모의 개관 거쳐 2019년 1월 중순경 서울관악 하나님의 교회서 첫선, 전국 순회 전시 예정
⊙ 시·수필·사진·소품·영상 등 ‘아버지 사랑’ 작품·소품 234점 전시… 부대행사 별도 마련
⊙ “내가 꿈을 꾸는 것보다 자녀에게 꿈을 심어주는 것이 부모” 아버지의 진심이 묻어나는 전시
⊙ 일본 교환학생 “전시회 보면서 아버지 떠올라… 돌아가면 꼭 효도하겠다”
- 〈현장에서〉 신민재 作.
‘신경외과에서 진찰을 마치신 / 아버지 / 일어서면서 한 말씀 하신다. / 떠듬떠듬 / 저… 배가… 가끔… / 의사는 단호히 말씀한다. / 저는 배는 잘 몰라요 / 내과로 가 보세요. / 아버지는 / 마음속 불을 다 끄지 못한 채 / 서둘러 닻을 올리고 / 떠듬떠듬 / 냇가로 떠나신다.’
〈말씀〉 이상호
아버지는 거목이다. 세파(世波)에 지친 새싹들에게 너른 그늘을 내려주시고, 심신을 기대고 쉴 둥치를 남겨주신다. 아버지는 태산이다. 천년 세월이 지나도 든든한 그 풍채로, 뜨거운 진심(眞心)으로 우릴 품어 안아주신다. 아버지의 진심은 말이 없어 때론 차갑게 느껴졌다. 거칠게 자라난 수염과 소란스럽던 취기(醉氣), 퀴퀴한 담배연기도 괜히 싫기만 했다. 어리석은 나의 사소한 잘못에도 엄히 매질을 하시던 아버지는 정말 밉기도 했다….
우리의 그 철없던 미움은 어느새 흰 서리 내려앉은 머리칼과 활처럼 굽은 그의 등줄기에 녹아 흩어진다. 새벽녘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시던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이 떠오른다. 저녁이면 토끼 같은 자식들 볼 생각에 종이봉투로 감싼 통닭 한 마리를 사 들고, 노을 진 골목을 비척이며 걸어오던 아버지의 그림자가 떠오른다. 우리네 가정에 불어닥친 고난과 시련을 묵묵히 온몸으로 막아주시던 아버지에게 유일한 피난처는 가족(家族)이었다. 단칸 오막살이라도 들어가 쉬고 보듬어줄 수 있는 ‘내 아내와 내 아이들’이었다.
낡은 구두, 해진 양복, 손때 묻은 목장갑이 우리의 심중(心中)을 울컥하게 만든다. 우리는 왜 아버지의 사랑을 진심으로 읽지 못하고 그 메마른 손 한 번 잡아드리지 못했을까. ‘아버지, 왜 말하지 않으셨나요.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진심, 그 묵묵한 사랑에 대하여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총회장 김주철 목사, 이하 하나님의 교회)와 ㈜멜기세덱출판사가 아버지의 그 묵묵한 진심과 사랑을 전국 순회 특별전(展)으로 조명한다. 명칭은 ‘진심, 아버지를 읽다 - 그 묵묵한 사랑에 대하여’(이하 아버지전)다. 여기서 ‘읽다’라는 표현은 ‘읽다(read)’와 ‘이해하다(understand)’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아버지의 애틋한 사연과 이야기를 눈으로 보고 읽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면에 숨겨져 있는 ‘아버지의 진심’까지 헤아려 가족애(家族愛)를 도탑게 하길 바라는 차원에서 지어졌다.
이번 전시는 지난 5년여 간 ‘우리 어머니 - 글과 사진전’(이하 어머니전)을 찾았던 관람객들의 간곡한 요청과 막중한 기대에 부응해 마련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웃으며 들어갔다가 울면서 나온 전시회”라는 입소문을 타고, 전국 72만6000명의 사람들이 ‘어머니전’을 관람했다. 이들은 ‘어머니전’에 “큰 감동을 받았다”면서 “아버지전도 꼭 열어줬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지속적으로 밝혀왔다. 이에 가족애와 세대 간 화합, 지구촌의 평화와 안녕을 지향하는 하나님의 교회가 ‘어머니전’에 이어 ‘아버지전’을 차곡차곡 준비해 왔던 것이다.
‘아버지전’은 2018년 12월 모의 개관을 거쳐 2019년 1월 중순경 서울 관악구 낙성대역 인근에 소재한 서울관악 하나님의 교회 특설전시장에서 첫선을 보인다. 이후 어머니전과 마찬가지로 전국 순회 전시를 개최할 예정이다. 이번 전시는 5개 테마관에 234점의 글과 사진, 소품으로 채워진다. 1관은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2관은 “이제 잘 보이니?”, 3관은 “…”, 4관은 “좋은 것만 주고 싶었는데…”, 5관은 “잃은 자를 찾아왔노라” 하는 소제목으로 각각 구성된다. 시인 박목월·김종길·정호승을 비롯한 저명 문인의 작품부터, 일반 문학동호인들의 글, 멜기세덱출판사에 투고된 독자들의 글과 사진이 전시된다.
손때 묻은 유품으로 남겨진 ‘가족사랑’
기자는 2018년 12월 서울관악 하나님의 교회에서 열린 ‘아버지전’ 모의 개관식을 취재했다. 갑작스런 폭설에 교회로 가는 곳곳이 빙판길이었지만 6층 전시장은 이미 관객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교회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전시장을 천천히 둘러보는 와중에도, 뒤에서 사람들이 밀려와 기자와 부딪힐 정도였다. 세대도 다양했다. 중년 남녀부터 20대 직장인까지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아버지전의 서막은 영상으로 시작됐다. 유년기의 자녀를 자상하게 바라보는 아버지의 미소와 세월이 흘러 노년이 된 아버지의 고독한 발걸음이 대조를 이뤘다. 아버지는 ‘일일이 풀어낼 길 없는 가족 사랑의 속뜻을 가슴에 묻고’, 어느새 자신만의 언어인 ‘독백’만 되뇌고 있었다.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추억’을 테마로 삼은 1관에는 시 2편, 수필 6편, 그림에세이 1편, 칼럼 1편, 사진 3점, 소품 30점 총 43점이 전시됐다. 입구부터 공간 구성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버지가 “우리 아들, 영원히 빼어나라”며 직접 지어주신 이름, ‘김영수(金永秀)’ 문패 아래 파란색 철제 대문이 열려 있었다. 김영수 일가의 시골집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십구문반(十九文半)의 신발’로 익숙한 시, 박목월의 ‘가정’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에 걸린 흑백 TV에서는 아버지의 육아 생활이 1990년대 홈비디오 형식으로 흘러나왔다. 겨울이면 아이의 운동화를 아궁이에 덥혀주시던 아버지의 사연도 인상적이었다.
아버지가 고이 간직한 사진첩, 직접 깎은 목침·곤봉·아령, 즐겨 쓰던 바둑판이 차례로 보였다. 어린 딸과 연날리기를 하며 즐거워하는 아버지의 함박웃음이 사진으로 걸려 있었다. 한쪽에는 큰 놋대야가 수돗가를 차지하고 있었다. 금세라도 러닝셔츠 차림의 아버지가 어디선가 수건을 목에 걸고 나타나 아침 세수를 할 것만 같았다.
‘김영수 댁’ 방 안으로 들어갔다. 솜이불과 장롱, 해진 달력 옆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방 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자식들의 상장이었다. 그 밑에는 서투른 손길로 접은 카네이션이 달려 있었다. 재롱 같은 아이들의 종이 상장도 아버지에겐 무한한 자랑이었을 것이다.
교회 관계자 말에 따르면, 아버지전에 기증된 신도들의 옛 물건 중에는 유독 유품이 많다고 한다. 짧게는 10년부터 길게는 50년, 70년이 넘은 물건들도 많았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수십 년간 간직해 온 자녀들의 정성과 효심이 느껴졌다.
25년 전 막내딸이 사준 양복은 새것 같았다
‘희생’을 주제로 한 2관에는 시 3편, 수필 7편, 칼럼 2편, 사진 20점, 소품 28점 총 60점이 전시됐다. 갈색 재킷을 입은 초로의 한 남성이 전시관을 서성였다. 가족사진을 보는 지긋한 눈매에서 회한이 묻어나오는 듯했다. 청춘 시절 무성했던 꿈들이 가장(家長)이라는 무게에 눌려 사라져가던 날들을 회고하고 있었던 걸까.
아버지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무엇일까. 전시관 한편에는 ‘힘·꿈·삶·땀·늘’이라고 적힌 박스들이 걸려 있었다. 그중 기자에겐 ‘늘’이라는 단어가 인상 깊게 다가왔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늘’ 힘이 세고, 꿈이 많고, 삶의 어른이자, 땀 흘리는 존재였다. 지금껏 ‘늘’ 그래왔듯이, 아버지는 항상 나를 위해 목말을 태워주던 ‘슈퍼맨’ 같은 존재일 줄만 알았다. 내가 그의 희생으로 양분을 얻어 커나갈수록, 그는 자꾸만 작아지고 여위어간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버지는 내 곁에 ‘늘’ 계실 줄만 알았다…. 어느새 눈가를 닦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25년 전, 막내딸이 고등학교 입학식 때 받은 장학금으로 선물해 준 아버지의 양복이 보였다. 사반세기라는 세월이 믿기지 않을 만큼, 질감이나 색상 모두 새것 같았다. 아끼고 아끼다 몇 번 입지도 못하고 간직해 둔 터였다. 아버지는 대신 자식이 신다 버린, 뒤꿈치가 터진 운동화를 구겨 신으며 살아왔다. 명절 때면 고향에 내려올 먼 타지의 아들딸들을 기다리면서….
아버지는 어머니만큼 쓰던 물건을 좀체 버리지 못했다. 손목시계는 고쳐가면서 40년을 썼다. 면도기도 서른 살 나이를 먹고, 빗은 반세기를 살았다. 1970년대 중동에서 일할 때 들고 다니던 서류가방은 아직도 쓸 만해 보였다. 사우디 건설 현장에서 쓰던 선글라스도 남았다. 체취 묻은 셔츠, 먼지 묵은 각종 연장들, 1987년 월급명세서에 수기로 적힌 ‘29만원’ 글씨도 그대로였다. 박등섭씨의 수필 〈아들에게〉의 한 부분이다.
“네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아빠가 공장에서 일하다 사고로 손이 크게 찢어졌었어. 그때 무슨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는지 아니? ‘손을 제대로 못 쓰면 어떡하지. 처자식 어떻게 먹여 살리나.’ 내 손이 다친 게 문제가 아니었어. 막일이라도 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내려온 곳이 여기, 거제 조선소다…. 옛날에는 아빠가 집에 오면 쓰러져서 잠만 잤었지? 몸이 녹초가 되었으니까. 내리사랑이란 말을 부모가 되어서 이해한다. 네가 옆에 있어 주는 것, 그 존재만으로 고맙고 행복해.”
소금 같은 아버지, 불꽃이신 아버지
사진 속에는 어부들이 멸치를 털고 있었다. 길이만 무려 1~2㎞에 무게 1t에 달하는 유자망을 내렸다가 다시 끌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하루해가 저문다. 그물을 한 번 털 때마다 아버지들의 온몸은 휘청거린다. 바가지에 생선을 가득 담아 든 채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어부 아버지’의 쇠잔해진 얼굴이 떠올랐다. 또 다른 사진 속 염전을 일구던 아버지의 모습과 겹쳐졌다. 아버지는 소금 같았다. 생의 물기를 다 빼고서야 얻을 수 있는 결정체이자, 자식들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자식의 피부에 생기가 돋을수록, 아버지는 쇠잔해졌다.
아버지는 또 불꽃이었다. 한 남성이 안전모에 마스크를 쓴 채 공사장 난간을 부여잡으며 작업하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전봇대를 오르내리는 전기기사, 불꽃이 튀어 송송 구멍이 난 청재킷을 입고 용접에 열중하는 사내의 모습도 있었다. 기름때 낀 장화, 고층 빌딩 유리창을 닦는 아버지 사진, 잡초를 베던 낫과 곡식을 긁어내던 갈퀴가 차례로 보였다. 아버지는 불꽃처럼 자신의 일생을 사르고 태워 ‘가정을 따뜻하게 해주는’ 존재였다.
‘아비란 연탄 같은 거지 / 숨구멍이 불구멍이지 / 달동네든 지하 단칸방이든 / 그 집, 가장 낮고 어둔 곳에서 / 한숨을 불길로 뿜어 올리지 / 헉헉대던 불구멍 탓에 / 아비는 쉬이 부서지지 / 갈 때 되면 그제야 / 낮달처럼 창백해지지’ 〈연탄〉 이정록
‘진심’의 테마로 구성된 3관에는 시 3편, 수필 16편, 사진 15점, 소품 57점 총 91점이 전시됐다. 3관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반전됐다. 사랑과 희생의 관점에서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갔다. 아버지의 내면이었다. 전시관 내부가 검게 변했다. 사진도 시종 흑백이었다. 스피커에선 빗소리와 바이올린의 처연한 합주(合奏)가 흘러나왔다. 교회 관계자는 “삶의 고비마다 힘들어도 말할 수 없었던, 아버지 내면의 슬픈 속울음을 형상화한 코너”라고 설명했다.
회사의 회전문을 나서서 땅거미 진 퇴근길을 걸어오던 아버지, 어린 딸이 직접 해주는 흰머리 염색에 함박웃음을 짓던 아버지, 아침이면 신문을 읽기 위해 안경을 고쳐 쓰던 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딸의 졸업식 때도, 아들의 군 입대 때도 항상 ‘조연’이었다. 언젠가 카메라를 내려놓고 딸의 학사모를 대신 쓰며 웃어보기도 했으면 싶었다. 어느덧 헌헌장부(軒軒丈夫)가 된 아들의 손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울어도 봤으면 싶었다.
아버지가 남긴 ‘자식 걱정’ 수제 비누
아버지 세대가 남자로서 추억을 되살릴 만한 코너도 마련됐다. 일반 군 복무 시절은 물론, 한국전쟁·베트남전(戰) 당시의 일기·사진·군수품들까지 전시됐다. 1970~80년대 중동 건설 현장에서 외국인 근로자들과 함께 모래 밥을 먹는 사진, 가족에게 주기 위해 열사(熱砂)의 땅에서 손수 만든 ‘아버지의 조개 거울’도 눈길을 끌었다. 베트남 파견 근무를 떠났을 때 쌍둥이 아들에게 보낸 아버지의 편지, 외항선 타던 아버지가 가족에게 전한 엽서 등이 수십 년 세월을 뛰어넘어 한곳에 모였다.
16년 차 아버지 송해범씨는 “청년 시절, 먼 곳을 보며 열심히 달렸다. 그러나 이제는 바로 앞의 사랑하는 가족을 바라보게 된다”며 “내 꿈은 우리 딸이라는 것을, 그것이 기쁨이고 내 도리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35년 차 아버지 박백천씨는 “내가 꿈을 꾸는 것보다 자녀에게 꿈을 심어주는 것이 부모”라고 했다.
한 아버지는 일기 9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자식들이 이를 수습해 전시관으로 옮겼다. 일기장은 ‘아버지의 속마음을 열어본다’는 차원에서 서랍에 넣어뒀다. 자식 누구도 무뚝뚝한 아버지가 소리 없이 일기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행간마다 ‘자식 걱정’이 묻어났다. 관람객들 사이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랑’이 듬뿍 담긴 4관에는 시 2편, 수필 6편, 그림에세이 1편, 사진 5점, 소품 23점이 전시됐다. ‘그루터기만 남은 고목’으로 변해가는 아버지의 노년을 조명했다. 어느덧 할아버지가 된 아버지가 손주들에게 주기 위해 감을 따는 모습, 자식들의 도장을 깎다가 지문이 다 닳아버린 아버지의 손가락, 임신한 딸의 아토피를 치료하기 위해 돌아가시기 전까지 수제 비누를 만들어 주시던 아버지의 사연까지 모두 담겨 있다. 특히 “아버지가 생전에 남긴 수제 비누를 아직도 쓰고 있다”는 기증자의 사연이 기자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전시장 한편에는 기증자 아버지가 생전 비누를 만들기 위해 원료 배합률을 빼곡하게 적은 노트, 실제 사용했던 비커 등 용기, 비닐봉지에 담긴 여러 개의 수제 비누가 자리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하늘 자녀들을 찾아 이 땅에 왔노라”
‘성경 속 아버지’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5관은, ‘십자가 고통’을 마다하지 않고 생명까지 내어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한 순교”를 깨달을 수 있는 코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 속 숭고하고 인자하신 아버지의 면모까지 살펴볼 수 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하늘 자녀’, 즉 지상의 온 인류를 되찾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로 육화(肉化)·강림(降臨)하신 이야기, 십자가 희생으로 대속(代贖)하신 이야기 등을 성경 기록과 음악, 미술 작품으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일례로 성경 이사야서 53장에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기록이 있고, 헨델의 명곡 ‘메시아’ 2부(수난과 속죄)에는 “질고(疾苦)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는 대목이 인용되어 나온다. 모두가 아버지 하나님의 희생을 표현한 것들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초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새 언약의 유월절(逾越節)을 지키고 있다. 5관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세워진 유월절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코너가 마련돼 있다. 설명에 따르면 〈최후의 만찬〉은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전날 저녁 식사를 묘사한 그림으로 성경에는 ‘유월절’로 기록돼 있다고 한다. 성경 누가복음 22장 15절에는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하는 대목이 나온다. 예수께서는 유월절의 떡과 포도주를 가리켜 당신의 ‘몸’과 ‘피’라 하시고, 제자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신다. 자녀들의 죗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당신께서 친히 살이 찢기고 피 흘릴 것을 계획하시고, 대속의 공로를 자녀들이 덧입을 수 있도록 유월절을 언약으로 세우셨던 것이다. 고로,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의 보혈과 희생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실천적 신앙”이요 “자녀로서 아버지의 유언(언약)을 받드는 행위”라는 것이다.
주 전시관 관람이 끝난 후에는 ‘영상관’ ‘통계로 보는 진심’ ‘포토존’ ‘북카페’ ‘진심우체국’ 등 코너가 마련된 부대행사장에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영상관에서는 ‘아버지의 일기’ ‘아버지의 꿈’ ‘벌판’ 등 동영상을 보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좀 더 깊게 느낄 수 있다. ‘포토존’에서는 ‘기념사진 무료 촬영·인화’ 이벤트도 열린다. 전시관에 비치된 편지지에 글을 써서 빨간 우체통에 넣으면,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손편지를 무료로 전달해 주는 ‘진심우체국’ 서비스도 마련돼 있다. ‘통계로 보는 진심’ 코너에서는 인터넷에서 진행된 아버지와 자녀 간 관계에 대한 여러 설문조사 결과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북카페’에서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문학작품을 읽으며 감성을 충족할 수 있다.
“부모 세대뿐 아니라 자식 세대도 함께 봤으면”
기자에게 있어 이번 ‘아버지전’은 감동은 물론 세련미까지 갖춘 전시회였다. 글과 사진, 소품에 담긴 간절한 사연들을 담아내는 절묘한 공간 구성이 돋보였다. 코너마다 색감·조명·배경·디자인이 주제와 조화를 이뤘다. 섬세함도 묻어났다. 전시관 사이를 지나가는 작은 통로에는 아버지의 퇴근길을 상징하는 가로등이 조형물로 세워져 있었고, 관람객들이 잠시 쉴 수 있는 간이의자도 마련돼 있었다. 밤낮없이 아버지전을 준비했다는 주최 측의 노력과 정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관람객들은 어떤 마음으로 봤을까. 아버지전을 보고 난 감회는 어떨까. 티슈로 눈가를 훔치며 전시관을 나서는 그들에게 물었다.
서울 관악구에 사는 이영주씨는 “마음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던 아버지들의 수고·노력·노동을 표현한 대목에서 굉장히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이씨는 “아버지들은 그동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밀려오는 아픔들을 온몸으로 막아내면서도, 말 한마디 없이 술 한 잔으로 (쓰라린 마음을) 달래셨다”며 “사실 그 많은 아픔을 참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술이 아닌 우리 자식들이었다는 점을 다시 깨닫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서울 동작구에 사는 최승민씨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아버지 전시회라고 해서 보고 싶어서 왔다”며 “실제로 와 보니 전시가 매우 잘 돼 있더라. 젊은 사람들, 학생들에게 좋은 교육의 장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최씨는 “제가 금년 나이가 62세”라며 “지금 전시회에 나온 (저와 같은 나이대의) 사람들과 비교해 봤을 때, ‘나는 (과연 그들만큼) 아버지 역할을 잘 했는가’ 성찰하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서울 관악구에 사는 최미화씨는 “일전에 어머니전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이번에는 아버지전을 한다는 말을 듣고 모의 개관 첫날부터 오게 됐다”며 “사실 저의 친정아버지가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굉장히 많았다. 아버지전을 보니까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추억들이 되살아났다”고 했다. 최씨의 소감이다.
“전시 소품 중에서 아버지가 아이들을 지게에 태워주던 사진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저희 집도 지리산 쪽 시골이었는데요. (사진을 보자) 아버지가 저를 지게에 태우고 들에 나가셨던 일들이 다시 기억나더라고요…. 우리 아이가 꼭 이 전시회를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요즘 방송을 봐도 (존속살해·가정불화 등으로) 천륜이 무너졌다고 하잖아요. 아이들이 이 전시회를 본다면 다시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이 생겨날 거라고 봅니다.”
경기도 수원에 사는 김하영씨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진심을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타지에서 항상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을 담아 편지를 보낸 아버지가 생각난다”고 했고, 같은 곳에 사는 조아라씨는 “엄마는 평소 티격태격하더라도 아빠보다 가까운 사이였는데, 아버지전을 보고 나서 아빠에게 더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온 일본인 다카모토 미노리씨는 “(아버지전을 보고 나니까) 저는 7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모습이 생각났다.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열심히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아버지도 생각났다”며 “제가 이렇게 한국에서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해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제가 일본에 돌아가면 꼭 효도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말씀〉 이상호
아버지는 거목이다. 세파(世波)에 지친 새싹들에게 너른 그늘을 내려주시고, 심신을 기대고 쉴 둥치를 남겨주신다. 아버지는 태산이다. 천년 세월이 지나도 든든한 그 풍채로, 뜨거운 진심(眞心)으로 우릴 품어 안아주신다. 아버지의 진심은 말이 없어 때론 차갑게 느껴졌다. 거칠게 자라난 수염과 소란스럽던 취기(醉氣), 퀴퀴한 담배연기도 괜히 싫기만 했다. 어리석은 나의 사소한 잘못에도 엄히 매질을 하시던 아버지는 정말 밉기도 했다….
우리의 그 철없던 미움은 어느새 흰 서리 내려앉은 머리칼과 활처럼 굽은 그의 등줄기에 녹아 흩어진다. 새벽녘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시던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이 떠오른다. 저녁이면 토끼 같은 자식들 볼 생각에 종이봉투로 감싼 통닭 한 마리를 사 들고, 노을 진 골목을 비척이며 걸어오던 아버지의 그림자가 떠오른다. 우리네 가정에 불어닥친 고난과 시련을 묵묵히 온몸으로 막아주시던 아버지에게 유일한 피난처는 가족(家族)이었다. 단칸 오막살이라도 들어가 쉬고 보듬어줄 수 있는 ‘내 아내와 내 아이들’이었다.
낡은 구두, 해진 양복, 손때 묻은 목장갑이 우리의 심중(心中)을 울컥하게 만든다. 우리는 왜 아버지의 사랑을 진심으로 읽지 못하고 그 메마른 손 한 번 잡아드리지 못했을까. ‘아버지, 왜 말하지 않으셨나요.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진심, 그 묵묵한 사랑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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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 김용석 作. |
이번 전시는 지난 5년여 간 ‘우리 어머니 - 글과 사진전’(이하 어머니전)을 찾았던 관람객들의 간곡한 요청과 막중한 기대에 부응해 마련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웃으며 들어갔다가 울면서 나온 전시회”라는 입소문을 타고, 전국 72만6000명의 사람들이 ‘어머니전’을 관람했다. 이들은 ‘어머니전’에 “큰 감동을 받았다”면서 “아버지전도 꼭 열어줬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지속적으로 밝혀왔다. 이에 가족애와 세대 간 화합, 지구촌의 평화와 안녕을 지향하는 하나님의 교회가 ‘어머니전’에 이어 ‘아버지전’을 차곡차곡 준비해 왔던 것이다.
‘아버지전’은 2018년 12월 모의 개관을 거쳐 2019년 1월 중순경 서울 관악구 낙성대역 인근에 소재한 서울관악 하나님의 교회 특설전시장에서 첫선을 보인다. 이후 어머니전과 마찬가지로 전국 순회 전시를 개최할 예정이다. 이번 전시는 5개 테마관에 234점의 글과 사진, 소품으로 채워진다. 1관은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2관은 “이제 잘 보이니?”, 3관은 “…”, 4관은 “좋은 것만 주고 싶었는데…”, 5관은 “잃은 자를 찾아왔노라” 하는 소제목으로 각각 구성된다. 시인 박목월·김종길·정호승을 비롯한 저명 문인의 작품부터, 일반 문학동호인들의 글, 멜기세덱출판사에 투고된 독자들의 글과 사진이 전시된다.
손때 묻은 유품으로 남겨진 ‘가족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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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객들이 ‘진심’을 테마로 한 3관에서 아버지의 일상을 포착한 사진들을 감상하고 있다. 사진=조현호 |
아버지전의 서막은 영상으로 시작됐다. 유년기의 자녀를 자상하게 바라보는 아버지의 미소와 세월이 흘러 노년이 된 아버지의 고독한 발걸음이 대조를 이뤘다. 아버지는 ‘일일이 풀어낼 길 없는 가족 사랑의 속뜻을 가슴에 묻고’, 어느새 자신만의 언어인 ‘독백’만 되뇌고 있었다.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추억’을 테마로 삼은 1관에는 시 2편, 수필 6편, 그림에세이 1편, 칼럼 1편, 사진 3점, 소품 30점 총 43점이 전시됐다. 입구부터 공간 구성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버지가 “우리 아들, 영원히 빼어나라”며 직접 지어주신 이름, ‘김영수(金永秀)’ 문패 아래 파란색 철제 대문이 열려 있었다. 김영수 일가의 시골집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십구문반(十九文半)의 신발’로 익숙한 시, 박목월의 ‘가정’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에 걸린 흑백 TV에서는 아버지의 육아 생활이 1990년대 홈비디오 형식으로 흘러나왔다. 겨울이면 아이의 운동화를 아궁이에 덥혀주시던 아버지의 사연도 인상적이었다.
아버지가 고이 간직한 사진첩, 직접 깎은 목침·곤봉·아령, 즐겨 쓰던 바둑판이 차례로 보였다. 어린 딸과 연날리기를 하며 즐거워하는 아버지의 함박웃음이 사진으로 걸려 있었다. 한쪽에는 큰 놋대야가 수돗가를 차지하고 있었다. 금세라도 러닝셔츠 차림의 아버지가 어디선가 수건을 목에 걸고 나타나 아침 세수를 할 것만 같았다.
‘김영수 댁’ 방 안으로 들어갔다. 솜이불과 장롱, 해진 달력 옆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방 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자식들의 상장이었다. 그 밑에는 서투른 손길로 접은 카네이션이 달려 있었다. 재롱 같은 아이들의 종이 상장도 아버지에겐 무한한 자랑이었을 것이다.
교회 관계자 말에 따르면, 아버지전에 기증된 신도들의 옛 물건 중에는 유독 유품이 많다고 한다. 짧게는 10년부터 길게는 50년, 70년이 넘은 물건들도 많았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수십 년간 간직해 온 자녀들의 정성과 효심이 느껴졌다.
25년 전 막내딸이 사준 양복은 새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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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 김용석 作. |
아버지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무엇일까. 전시관 한편에는 ‘힘·꿈·삶·땀·늘’이라고 적힌 박스들이 걸려 있었다. 그중 기자에겐 ‘늘’이라는 단어가 인상 깊게 다가왔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늘’ 힘이 세고, 꿈이 많고, 삶의 어른이자, 땀 흘리는 존재였다. 지금껏 ‘늘’ 그래왔듯이, 아버지는 항상 나를 위해 목말을 태워주던 ‘슈퍼맨’ 같은 존재일 줄만 알았다. 내가 그의 희생으로 양분을 얻어 커나갈수록, 그는 자꾸만 작아지고 여위어간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버지는 내 곁에 ‘늘’ 계실 줄만 알았다…. 어느새 눈가를 닦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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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떠올리던 한 관객이 눈물을 닦고 있다. 사진=조현호 |
아버지는 어머니만큼 쓰던 물건을 좀체 버리지 못했다. 손목시계는 고쳐가면서 40년을 썼다. 면도기도 서른 살 나이를 먹고, 빗은 반세기를 살았다. 1970년대 중동에서 일할 때 들고 다니던 서류가방은 아직도 쓸 만해 보였다. 사우디 건설 현장에서 쓰던 선글라스도 남았다. 체취 묻은 셔츠, 먼지 묵은 각종 연장들, 1987년 월급명세서에 수기로 적힌 ‘29만원’ 글씨도 그대로였다. 박등섭씨의 수필 〈아들에게〉의 한 부분이다.
“네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아빠가 공장에서 일하다 사고로 손이 크게 찢어졌었어. 그때 무슨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는지 아니? ‘손을 제대로 못 쓰면 어떡하지. 처자식 어떻게 먹여 살리나.’ 내 손이 다친 게 문제가 아니었어. 막일이라도 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내려온 곳이 여기, 거제 조선소다…. 옛날에는 아빠가 집에 오면 쓰러져서 잠만 잤었지? 몸이 녹초가 되었으니까. 내리사랑이란 말을 부모가 되어서 이해한다. 네가 옆에 있어 주는 것, 그 존재만으로 고맙고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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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 멜기세덱출판사 사진 편집부. |
아버지는 또 불꽃이었다. 한 남성이 안전모에 마스크를 쓴 채 공사장 난간을 부여잡으며 작업하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전봇대를 오르내리는 전기기사, 불꽃이 튀어 송송 구멍이 난 청재킷을 입고 용접에 열중하는 사내의 모습도 있었다. 기름때 낀 장화, 고층 빌딩 유리창을 닦는 아버지 사진, 잡초를 베던 낫과 곡식을 긁어내던 갈퀴가 차례로 보였다. 아버지는 불꽃처럼 자신의 일생을 사르고 태워 ‘가정을 따뜻하게 해주는’ 존재였다.
‘아비란 연탄 같은 거지 / 숨구멍이 불구멍이지 / 달동네든 지하 단칸방이든 / 그 집, 가장 낮고 어둔 곳에서 / 한숨을 불길로 뿜어 올리지 / 헉헉대던 불구멍 탓에 / 아비는 쉬이 부서지지 / 갈 때 되면 그제야 / 낮달처럼 창백해지지’ 〈연탄〉 이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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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死鬪)〉 황철희 作. |
회사의 회전문을 나서서 땅거미 진 퇴근길을 걸어오던 아버지, 어린 딸이 직접 해주는 흰머리 염색에 함박웃음을 짓던 아버지, 아침이면 신문을 읽기 위해 안경을 고쳐 쓰던 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딸의 졸업식 때도, 아들의 군 입대 때도 항상 ‘조연’이었다. 언젠가 카메라를 내려놓고 딸의 학사모를 대신 쓰며 웃어보기도 했으면 싶었다. 어느덧 헌헌장부(軒軒丈夫)가 된 아들의 손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울어도 봤으면 싶었다.
아버지가 남긴 ‘자식 걱정’ 수제 비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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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과의 추억을 담은 아버지의 카메라. 사진=조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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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교회가 주최한 아버지전(展)은 5개 테마관에 234점의 글과 사진, 소품으로 구성됐다. 사진=조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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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애환이 묻어 있는 각종 공구들. 사진=조현호 |
‘사랑’이 듬뿍 담긴 4관에는 시 2편, 수필 6편, 그림에세이 1편, 사진 5점, 소품 23점이 전시됐다. ‘그루터기만 남은 고목’으로 변해가는 아버지의 노년을 조명했다. 어느덧 할아버지가 된 아버지가 손주들에게 주기 위해 감을 따는 모습, 자식들의 도장을 깎다가 지문이 다 닳아버린 아버지의 손가락, 임신한 딸의 아토피를 치료하기 위해 돌아가시기 전까지 수제 비누를 만들어 주시던 아버지의 사연까지 모두 담겨 있다. 특히 “아버지가 생전에 남긴 수제 비누를 아직도 쓰고 있다”는 기증자의 사연이 기자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전시장 한편에는 기증자 아버지가 생전 비누를 만들기 위해 원료 배합률을 빼곡하게 적은 노트, 실제 사용했던 비커 등 용기, 비닐봉지에 담긴 여러 개의 수제 비누가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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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 멜기세덱출판사 사진 편집부. |
하나님의 교회는 초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새 언약의 유월절(逾越節)을 지키고 있다. 5관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세워진 유월절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코너가 마련돼 있다. 설명에 따르면 〈최후의 만찬〉은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전날 저녁 식사를 묘사한 그림으로 성경에는 ‘유월절’로 기록돼 있다고 한다. 성경 누가복음 22장 15절에는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하는 대목이 나온다. 예수께서는 유월절의 떡과 포도주를 가리켜 당신의 ‘몸’과 ‘피’라 하시고, 제자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신다. 자녀들의 죗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당신께서 친히 살이 찢기고 피 흘릴 것을 계획하시고, 대속의 공로를 자녀들이 덧입을 수 있도록 유월절을 언약으로 세우셨던 것이다. 고로,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의 보혈과 희생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실천적 신앙”이요 “자녀로서 아버지의 유언(언약)을 받드는 행위”라는 것이다.
주 전시관 관람이 끝난 후에는 ‘영상관’ ‘통계로 보는 진심’ ‘포토존’ ‘북카페’ ‘진심우체국’ 등 코너가 마련된 부대행사장에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영상관에서는 ‘아버지의 일기’ ‘아버지의 꿈’ ‘벌판’ 등 동영상을 보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좀 더 깊게 느낄 수 있다. ‘포토존’에서는 ‘기념사진 무료 촬영·인화’ 이벤트도 열린다. 전시관에 비치된 편지지에 글을 써서 빨간 우체통에 넣으면,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손편지를 무료로 전달해 주는 ‘진심우체국’ 서비스도 마련돼 있다. ‘통계로 보는 진심’ 코너에서는 인터넷에서 진행된 아버지와 자녀 간 관계에 대한 여러 설문조사 결과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북카페’에서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문학작품을 읽으며 감성을 충족할 수 있다.
“부모 세대뿐 아니라 자식 세대도 함께 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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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객들이 벼 베기에 한창인 농부 아버지의 사진을 감상하고 있다. 사진=조현호 |
관람객들은 어떤 마음으로 봤을까. 아버지전을 보고 난 감회는 어떨까. 티슈로 눈가를 훔치며 전시관을 나서는 그들에게 물었다.
서울 관악구에 사는 이영주씨는 “마음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던 아버지들의 수고·노력·노동을 표현한 대목에서 굉장히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이씨는 “아버지들은 그동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밀려오는 아픔들을 온몸으로 막아내면서도, 말 한마디 없이 술 한 잔으로 (쓰라린 마음을) 달래셨다”며 “사실 그 많은 아픔을 참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술이 아닌 우리 자식들이었다는 점을 다시 깨닫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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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임상기 作. |
서울 관악구에 사는 최미화씨는 “일전에 어머니전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이번에는 아버지전을 한다는 말을 듣고 모의 개관 첫날부터 오게 됐다”며 “사실 저의 친정아버지가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굉장히 많았다. 아버지전을 보니까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추억들이 되살아났다”고 했다. 최씨의 소감이다.
“전시 소품 중에서 아버지가 아이들을 지게에 태워주던 사진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저희 집도 지리산 쪽 시골이었는데요. (사진을 보자) 아버지가 저를 지게에 태우고 들에 나가셨던 일들이 다시 기억나더라고요…. 우리 아이가 꼭 이 전시회를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요즘 방송을 봐도 (존속살해·가정불화 등으로) 천륜이 무너졌다고 하잖아요. 아이들이 이 전시회를 본다면 다시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이 생겨날 거라고 봅니다.”
경기도 수원에 사는 김하영씨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진심을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타지에서 항상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을 담아 편지를 보낸 아버지가 생각난다”고 했고, 같은 곳에 사는 조아라씨는 “엄마는 평소 티격태격하더라도 아빠보다 가까운 사이였는데, 아버지전을 보고 나서 아빠에게 더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온 일본인 다카모토 미노리씨는 “(아버지전을 보고 나니까) 저는 7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모습이 생각났다.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열심히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아버지도 생각났다”며 “제가 이렇게 한국에서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해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제가 일본에 돌아가면 꼭 효도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불변의 사랑과 희생”… ‘어머니展’이 보여준 감동 물결
전시관은 ‘희생·사랑·연민·회한… 아, 어머니!’라는 부제 아래 A존(‘엄마’), B존(‘그녀’), C존(‘다시, 엄마’), D존(‘그래도 괜찮다’), E존(‘성경 속 어머니 이야기’)의 5개 테마관으로 구성돼 있다. 각 테마관에는 시·수필·칼럼 등의 글과 사진, 추억의 소품 등이 입체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본 전시장 외에 부대 행사장으로 동화 애니메이션이 상영되는 ‘영상문학관’, 어머니에게 엽서를 보낼 수 있는 ‘사랑의 우편함’, 관람객들 사진을 무료 촬영·인화해 주는 ‘포토존 - 어머니라고 말해요’, 전시회에서 받은 감동을 나눌 수 있는 ‘북카페’ 공간 등이 마련돼 있다. 기자도 지난 초겨울 ‘서울도봉방학 하나님의 교회’에 마련된 어머니전 특설전시장을 관람한 바 있다. 교회 관계자는 “하루 200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아온다”고 했다. 당시 기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전시 소품들을 보고 문득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이 떠올라 눈시울을 훔치던 여러 중년 여성의 모습이었다. 이미 많은 분이 울고 간 듯, 전시장 각 코너마다 눈물을 닦을 수 있도록 휴지가 미리 배치돼 있었다. 꿰맨 바가지, 55년이 넘은 물동이, 낡은 다듬잇방망이는 없는 살림에 물자를 아껴 쓰시던 어머니의 억척스런 절약정신을 보여줬다. 살림에 바빠 글을 차마 못 깨쳐 공책에 연습하시던 어머니의 글씨, 농사일로 거친 손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수줍게 웃어 보이던 어머니의 미소, “나는 괜찮다”며 자식 밥 위에 얹어 주시던 갈치 한 토막의 이야기는 메마른 기자의 가슴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직접 성경 구절에 빨간색으로 밑줄을 그어, ‘어머니 하나님’의 존재 근원을 알려주던 코너도 인상적이었다. 50대 관람객 권을용씨는 “메마르고 팍팍한 일상과 감성에 한줄기 단비 같은 시간이었다”고 했고, 20대 관람객 안예진씨는 “곧 어머니가 되는 저에게 ‘최고의 어머니’가 되는 준비 자리였다”고 했다. 40대 관람객 이행남씨는 “전시를 보고 나니 가족에 대한 마음이 더 애틋해졌다”고 소회를 밝혔다. 울산에서 남편과 함께 ‘어머니전’을 관람한 한 주부는 전시 주관사에 편지를 보내 “전시회를 관람한 후 남편이 180도 달라졌다. 무뚝뚝한 성격이던 남편이 어느새 빨래며 청소며 집안일을 돕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교회가 추진하는 어머니전은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 현재까지 미국·칠레·페루 등 해외 각국에서 11회에 걸쳐 어머니전이 개최됐고, 현지 관람객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미국 뉴욕에서 열렸을 때는 ‘지역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브루클린 자치구청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칠레 산티아고시 라시스테르나 구청 별관에서 열린 전시관에는 칠레 정부 종무국장 등 저명인사들이 참석해 전시를 호평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