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國柱의 북한미술 산책 ③ 북한 미술품에 ‘짝퉁’이 많은 까닭은

북한 당국, 외화벌이 위해 僞作을 대량 생산

  • 글 : 양국주 ‘Serving the Nation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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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내 유통되는 북한 작품들의 80% 정도가 模作

金基萬은 공훈예술가라는 명예를 누렸음에도 작품 수준이 신통치 못한 편이다. 그러나 운보 김기창 동생이라는 명함 하나로 이름값을 한다. 이래저래 운보는 죽어서까지 含量未達인 막내동생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셈이다.

⊙ ‘조선 최고의 미녀화가’ 鄭溫女… 작품 판매를 위해 자신의 그림 앞에서 사진을 찍어야만 하는
    참담한 현실
⊙ 북한의 ‘백호창작사’나 외화벌이 전담기관 창작사들, 유작을 버젓이 模作
⊙ 金基昶이 이산가족 상봉 때 北의 동생 金基萬에게 애지중지하던 ‘僧舞’를 선물… 2001년 운보가
    타계하자 액자에서 뜯긴 채 남쪽으로 건너와
⊙ 김영훈, 스승 咸彰然을 욕보이지 않기 위해 模作 만들지 않아

梁國柱
⊙ 1949년 출생.
⊙ 경신고, 연세대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회장, 한국학생연합회 의장, 이스라엘문화원장 역임.
⊙ 1987년 워싱턴으로 이주, 현재 분쟁지역과 재난지역을 돕는 국제 NGO Serving the Nations 대표.
독립운동가였던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1864~1953)은 서화가이면서 작품 감정에도 탁견을 가져 고서화에 배관(拜觀·남의 작품을 공경하는 뜻을 가지고 봄)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품(眞品)을 증명해 주는 배관임에도 불구하고 사람 좋은 위창이 모작(模作)인 줄 알면서도 배관서(拜觀書)를 써 준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해 “왜 위작까지 배관서를 써 주느냐”고 물으면 “배관은 내가 그 작품을 한 번 보아 주었다는 것이지, 진품을 증명한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위창같이 훌륭한 분이 배관을 해 주었으니 당연히 진품이라고 믿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위창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와 6·25 동란 직후, 집안의 가보(家寶)와 명품을 내다 팔아 끼니를 해결하려 했던 이들의 청(請)을 사람 좋은 위창이 차마 거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북한 최고의 여류화가 정온녀(鄭溫女)가 작품을 배경 삼아 찍은 사진은 오늘날 북한이 처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본인이 그린 작품임을 입증하기 위해 증명용으로 찍은 사진이기 때문이다.
 
  자존심도 버리고 작품 앞에 선 화가의 ‘참담함’이 사진 하나로 설명된다. 작품을 사려는 쪽에 진품임을 보증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기 때문에 거간꾼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다.
 
  위창이 오래 살았더라면,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1868~1933)처럼 굳이 배관을 하지 않아도 좋을 사진사로 전업해야 할 처지가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해강은 1907년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관인 ‘천연당’을 개관했다.
 
 
  ‘조선 최고의 미녀화가’ 鄭溫女
 
정온녀의 드로잉, ‘리맹화할머니’.
  1941년 스물한 살의 나이에 도쿄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한 정온녀는 2년 후 니혼대학 유학부를 나왔다. 당대 최고의 인텔리였다. 강원도 평강(平康)에서 태어나 라남고등학교를 마치기까지 주로 강원도와 함경북도 일대에서 살았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경성일보 기자와 용산고 교사로 있다가 ‘조선미녀대회’에 나가 1등 없는 2등을 차지했다. 선생의 신분으로 미인 콘테스트에 나설 만큼 그는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쉽사리 내려올 수 있으리라 믿었던 북행(北行) 길이 네 살 난 딸 주경이와의 마지막 길이 됐다. 북에 들어간 그에게는 여전히 ‘조선 최고의 미녀화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전쟁 기간 동안 내각 사무국의 전속 작가로 김일성(金日成)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지만, 한때 희천 공작기계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공장 노동자들과 농민의 삶을 체험해야 무쇠같이 단련된 작품을 제작할 수 있다는 당(黨)의 방침 때문이었다.
 
  최근 라파엘의 드로잉 한 점이 560억원에 경매되는 것을 보면서 모름지기 화가는 태어날 나라도 선택을 잘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라파엘의 드로잉치고는 졸작(拙作)에 해당하는 작품이 이렇듯 고가로 매매되는데, 북한 최고 여성 작가의 그림 시세가 천대받는 듯해 안쓰럽고 슬프기도 하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이 평안도 강계(江界)의 기녀(妓女) 진옥(眞玉)을 만나 육질(肉質) 가득히 농염한 추정(秋情)을 나누던 강계마을, <근화악부(槿花樂府)>에서 관능을 자극하던 ‘살 송곳과 골 풀무’ 육담으로 강계 미녀가 탄생되던가? 퇴락한 모습이지만 빼어난 미모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숨길 수 없는 정온녀가 강계(江界) 인근 장자강가에서 노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16세기 조선 최고의 여성으로 불렸던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재현으로 칭송받던 정온녀가 작품 판매를 위해 사진을 찍어야만 하는 세상, 아니 그것보다 작품 보는 눈이 없는 무식한 투자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증명사진을 찍어야만 하는 참담한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정온녀만이 아니다. 북에서 흘러나오는 대부분의 작품에 진품임을 증명하기 위해 유행병처럼 번지는 게 이런 종류의 사진이다. 정창모나 선우영까지도 작품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진품으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이런 비극도 알고 보면 북한 스스로 만든 자업자득(自業自得)일 뿐이다. 너무나도 많은 모작을 양산해 냈기 때문이다.
 
 
  전쟁이 만들어낸 模作 범람
 
도쿄미술학교 출신으로 ‘조선 최고의 미녀 화가’로 불리는 정온녀가 자신의 작품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북한 최고의 여성작가가 자신의 그림 판매를 위해 증명사진을 찍어야만 하는 처지가 오늘날 북한의 현실이다.
  1961년 7월, ‘조중우호협약(朝中友好協約)’을 체결한 중국 정부는 보유하고 있던 수많은 북한 골동품을 북한으로 반환했다. 감정 결과, 대부분이 위조품이었다.
 
  그뿐인가? 압록강과 두만강, 양안(兩岸) 간을 오가는 변방 보따리 장사꾼들을 통해 밀수되는 양도 부쩍 많아졌다. 한때 보위부에서 대대적으로 적발하고 작품을 감정한 결과, 역시 위작(僞作)이었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넘쳐나는 것’이 경제의 기본법칙이라지만 왜 북한은 이런 모작을 만들어 낼까? 멀리는 평양이 유엔군의 수중(手中)에 떨어졌을 때의 일이다.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 평양지부 건물과 보통문(普通門)을 제외하고 전쟁의 참화(慘禍)를 입지 않은 건물이 없었다. 34년 동안 주한 유엔군 사령관 특별고문을 지낸 제임스 리의 증언에 따르면, 1·4후퇴를 전후해 인구 40만명이던 평양에 떨어진 폭탄이 자그마치 44만 개였다고 한다.
 
  서울을 함락시킬 때만 해도 북한은 자신들이 남한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전 문화재 전문위원 남계 박진주에 따르면, 서울을 점령했던 북한군이 남한의 유물을 대거 북으로 옮겨가기도 했고, 서울 수복과 함께 쫓겨가던 북한군이 국새(國璽) 등 조선시대의 유물 일부를 의정부 길가에 버리고 간 일도 있었다. 반면, 1·4후퇴에 즈음해 북한 역시 상당량의 국보급 유물을 강탈당했다. 전쟁으로 빼앗고 빼앗기는 유물 쟁탈을 경험한 북한은 휴전 이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문화유산을 모작하기 시작했다.
 
  김용준(金瑢俊)을 위시해 조선미술가동맹이 집단적으로 모작사업에 개입했다. 더욱이 이 작업은 1952년부터 1963년까지 10년이 넘도록 ‘물질문화 유물보존 위원회’의 제작부장이던 정현웅(鄭玄雄)의 주관 아래 조직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왕릉의 고구려벽화는 물론이고, 조선미술박물관에 수장된 미술품들이 주요 모사 대상이었다.
 
  1994년, ‘큰물 사태’로 북한의 경제상황이 최악에 이르게 되자 미술품 모작사업을 외화벌이 차원에서 재차 진행했다. 특히 김일성 사망 이후 갑자기 배급이 끊기고 생존의 문제가 제기되다 보니 정부 차원에서 대대적인 모작사업을 벌였다.
 
 
  북한 미술작품 가격, 최근 5년 사이 10배 폭등
 
허영의 모작, ‘노력영웅’.
  힘 없는 작가들인지라 항의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백호창작사’나 외화벌이를 전담하는 여러 기관 창작사들이 유작(遺作)이나 현존 작가들의 작품을 버젓이 만들다 보니 자연스레 ‘짝퉁’이 넘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남한의 경제적 성장과 한국화 그림 값 상승도 북한 모작이 늘어나는 데 큰 기여를 한 셈이다.
 
  최근 ‘한국아트밸류연구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98년 이래 국내 미술시장은 6배 이상 성장했다. 최근 금융위기 여파로 2006년 수준으로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2007년의 경우 한 해 작품 가격이 63%나 폭등했다고 한다. 북한 작품을 대량으로 소장한 어느 컬렉터는 “북한 작품 역시 지난 5년 사이에 특정한 작가를 중심으로 열 배 가까이 뛰었다”고 했다.
 
  남한에서 북한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만수대창작사(萬壽臺創作社·북한의 미술창작 단체)’는 2008년부터 외국 관광객을 상대로 가격을 10배 이상으로 올려서 팔기 시작했다. 어쩌다 만수대 창작사에 내걸린 작품이 고가(高價)에 팔리기라도 하면 북한 방송은 “○○○ 작가의 그림이 몇만 유로에 팔렸습니다”라는 식으로 연일 떠들어댄다.
 
  그 이후 그 작가의 작품 가격은 가장 최근에 최고의 가격으로 팔린 그림을 기준으로 결정된다. 한 번 이런 가격으로 팔렸으니 그 이하로는 내려올 수 없다는 것이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시장경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저들에게 경제법칙은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
 
  요즈음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여성 근로자의 임금을 올려 달라는 북한의 저의(底意)는 북한 평균임금을 생각하지 않고 남한의 여성 근로자 수준만큼 받아야 한다는 북한식 자존심이 작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작품의 질에 대한 아무런 검증 없이 턱없이 올라간 북한 그림 값은 아직도 그 끝을 모른다. 이중섭(李仲燮)이나 박수근(朴壽根)으로 대표되는 남한의 명품들에 비한다면, 소위 도쿄미술학교 출신들로 이중섭이나 김흥수(金興洙) 못지않은 북한의 유작은 진품인 경우 아직도 10~20배 이상의 상승 탄력을 갖고 있다.
 
 
  僞作시비
 
  워싱턴에 거주하면서 북한 미술품을 중개하던 신동훈씨는 북한 미술품을 경매하는 ‘포털아트’를 걸고 넘어졌다. 신동훈씨는 몇 해 전 <중앙일보> 사옥에 갤러리까지 열고 정창모와 선우영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했던 전문 화상(畵商)이다.
 
  조선미술협회 회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거의 20년 가까이 북한 작품 비즈니스만을 해온 그가 선우영 화실에서 촬영한 동영상을 KBS에 공개했다. 포털아트 웹사이트에 올라온 경매작품에 대해 선우영이 “이건 내 작품이 아니야”라는 식으로 위작임을 적시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진실 공방을 벌이는 사이, 양쪽은 모두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북한 미술품에 대한 열기에 찬물을 끼얹고 불신만 키운 꼴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포털아트에 작품을 공급했던 북 기관의 관련자뿐 아니라 신동훈씨와 거래했던 책임자들 역시 처벌을 받았다.
 
  그 역시 만수대창작사를 통한 공식 창구만을 통해 작품을 사들이고, <중앙일보>와 이윤을 나누다 보니 본인이 구매했던 가격에서 천정부지로 판매가를 정해야만 하는 악순환에 빠졌다.
 
  신씨는 작가들이 뒷문을 통해 작품을 내다 파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거니와, 그런 작품은 모두가 가짜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포털아트 측 역시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라는 대남(對南) 경제기구를 통해 사들인 만큼 절대 위작이 있을 수 없다고 했지만, 북한 그림에 조금이라도 실체적으로 접근한 사람이라면 민경련이 그림하고는 별다른 관련이 없는 조직임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만수대창작사’를 통하지 않은 작품 모두가 위작이라고 보는 신동훈의 억지나 민경련을 통해 들여온 작품은 모두가 진품이라고 생떼를 쓰는 사람들 역시 무책임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북한 당국은 필요한 휘발유와 교환하기 위해 선우영을 포함한 잘나가는 인민작가의 작품을 함경도 변방으로 보내 흥정을 붙이고 있다.
 
  한때 천경자(千鏡子)나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의 작품에 대한 위작 시비가 종종 있었지만, 북한 작품에 대한 위작 시비는 그리 많지 않았다. 북한 그림의 가격이 그리 높지 않았던 데다 북한과 단절된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구매자 입장에서 위작 여부를 가릴 만한 마땅한 수단이 없었던 탓이다.
 
  포털아트 사건은 북한 작품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생긴 현상이지만 앞으로도 이와 유사한 시비가 불거져 나올 가능성이 많음을 보여주는 단초에 불과하다.
 
  작가는 이미 죽고 없는데 북한의 대표적인 작가들로 알려진 정영만(鄭永萬)과 선우영(鮮于英), 정종여(鄭鍾汝)와 리석호(李碩鎬)의 작품을 시장에서 그리도 쉽게 구할 수 있을까?
 
  시중에는 이들의 인기도에 따라 위작이 상대적으로 판을 치는 현실이다. 대개는 화풍(畵風)이 비슷한 작가나 제자들이 스승의 작품인 양 정교하게 제작을 한다.
 
  김기만(金基萬)은 공훈 예술가라는 명예를 누렸음에도 작품 수준이 신통치 못한 편이다. 그러나 운보 동생이라는 명함 하나로 이름값을 한다. 이래저래 운보는 죽어서까지 함량미달(含量未達)인 막내동생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셈이다.
 
김기만그림, ‘참새떼’.
 
  김영훈, 스승 咸彰然 위해 模作 만들지 않아
 
  정관철의 뒤를 이어 미술가동맹 위원장을 지낸 정영만(鄭永萬)의 모작은 주로 최창호와 제자들이 만든다. 최창호는 최근 베이징미술전람회에서 금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승과의 작품가격이 하늘과 땅만큼 편차가 크다.
 
  반면에 웬만한 유화보다 그림 값이 높은 함창연(咸彰然)의 판화는 비교적 위작이 없는 편이다. 함창연이 1959년에 귀국하면서 유학시절 제작한 모든 작품을 정부에 기증한 탓에 시중에 흘러 다니는 작품이 흔치 않은 까닭이다.
 
  최근 북의 어려운 경제적 현실로 조선 미술박물관에 수장된 작품마저 내다 팔아야 할 형편이 되었다. 정부가 내각의 관리들에게 생필품조차 자급자족(自給自足)하도록 지시를 내린 터라, 함창연의 작품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거나 품귀현상을 빚게 된다면 외화벌이 차원에서 위작을 양산하거나 유통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함창연 사후 판화계의 독보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평양 미술대학 판화부장 김영훈은 고아 처지였을 때 함창연이 거두어 제 자식인 양 길렀다.
 
  북한 사회에서 선생이 죽고 나면 그 제자들이 위작을 대량 생산하고 있지만 함창연의 위작이 그리 많지 않은 이유는 김영훈 같은 사람이 스승 욕보일 짓을 하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나 당이 방침을 정한다면 그 역시 이를 거절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김영훈은 평양을 방문한 문익환(文益煥) 목사를 작품화했던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응로(李應魯·1904~1989)가 동백림사건(東伯林事件)으로 곤욕을 치른 후 평양에 와서 전시했던 작품”이라며 자그마치 5만 달러 가격을 붙인 채 필자에게 보내진 위작도 있었다.
 
  운보 김기창이 패혈증으로 병석에 누웠을 때,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형님의 병상을 찾았던 동생(김기만)에게 운보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승무(僧舞)’라는 작품을 선물했다. 2001년 운보가 타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작품은 액자에서 뜯긴 채 남쪽으로 건너왔다. 두말할 것 없이 돈 되는 남쪽에 내다 팔아야 웃돈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에게도 김기만이 내실(內室)에서 족자로 된 잉어그림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있다. 단동의 석광혁이라는 거간꾼이 ‘잉어도’를 팔려고 함께 보내온 사진인데, 잉어도는 북으로 돌려보내고 사진만 간직하고 있다. 김기만이 2004년 작고했으니 그가 팔고자 애썼던 ‘승무’나 ‘잉어도’가 지금은 누구 손에 들어갔을지, 그림도 인생처럼 유전(流轉)의 법칙이 작용하는가 보다.
 
김영훈이 판화로 그린 ‘문익환 목사’.
 
  僞作인 줄 알면서도 눈감는 북한 작가들의 苦惱
 
  모작 중에는 이중섭(李仲燮)이 원산에서 선생을 하면서 제작했다는 것도 있고,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가 신의주(新義州) 우신여관(又新旅館)에 석 달을 머무르며 강계 미녀 주인에게 건넨 작품이라거나, 이당의 뒷배를 보아준 신의주경찰서 고등계형사 김덕기(金悳基)의 소장품(所藏品)으로 둔갑해 나오는 것도 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북청(北靑)에서, 송강 정철(松江 鄭澈)이 강계에서 유배생활을 한 탓에 그들이 머물던 지역의 유물로 둔갑되기도 한다. 어쩌면 그리도 정교하게 만들었던지 추사 글씨가 모작이었음에도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았다.
 
  남한 사회에서 북한 작품에 대한 열광이 그치지 않는 한 비즈니스 차원에서의 모사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진품으로 위장하기 위해 출처는 그럴듯하게 각색된다.
 
  선우영이 거간꾼 신동훈을 통해 “이건 내 작품이 아니야”라고 말하지만, 정작 선우영 본인도 정부가 외화벌이 차원에서 뒷구멍으로 유통시킨 일임을 내심 알고 있다. 다만 정부가 하는 일인지라 입바른 소리를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개성(開城)이나 금강산 관광지에서 버젓이 이들 이름으로 팔리는 대부분의 작품이 위작일지라도 항의할 입장이 못된다. 위작인 줄 뻔히 알면서도 눈감을 수밖에 없는 작가의 고뇌, 이것이 배고픈 북한의 구조적 현실이다. 북한이 먹고사는 문제에서 벗어난다 해도 이런 현상은 영원히 지속될 일이다.
 
  이런 사정을 이해한다면 마냥 북한에 손가락질할 일도 아닌가 싶다. 남한이야말로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이 최첨단 컴퓨터를 동원해 더욱 정교한 위작을 만들어 내는 곳 아니던가?
 
2009년 2월 11일, 김정일의 생일(2월 16일)을 기념하는 중앙미술전시회가 평양체육관에서 열렸다.
 
  남한 유통 북한미술품의 80%는 ‘가짜’
 
한상익, ‘꽃’.
  남한에서 이중섭 아들이 위작을 들고 조직적으로 판매하려다 덜미 잡힌 일은 이런 유혹이 언제나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니 작가가 증명용 사진 찍듯 작품을 배경으로 찍은 작품을 남한으로 유통시킨다면 체벌은 고사하고 작가 자신이 곤욕을 치를 각오를 해야 한다. 당에서 받을 고초도 무섭지만 당장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하는 처지가 안쓰러울 따름이다.
 
  남한 내에서 유통되는 북한 작품의 80% 정도가 모작이라고 보면 거의 틀리지 않는다. 작품의 대부분이 북에서 만들어졌거나 북한 미술인들이 중국에 머물면서 중개상의 요구에 따라 위작을 만들기 때문이다.
 
  베이징과 선양(瀋陽)을 중심으로 유작을 모사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고, 만수대나 백호창작사 등에 소속된 작가들 역시 외유(外遊) 기간에 모작 비즈니스에 한몫을 하고 있다.
 
  이런 작전에 속지 않는 방법은 수장가 자신이 그림에 대한 안목을 높이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명품에 익숙한 한국 수장가는 화가의 이름을 보고 산다. 그러나 제아무리 뛰어난 작가라 할지라도 언제나 좋은 작품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좋은 그림은 좋은 수장가가 만드는 법이다. 북한 그림이라면 사족을 못쓰듯 안달하는 수준 낮은 수장가 때문에 질 낮은 작품도 넘치는 것이다. 민간차원의 대북지원(?)이라고 생각하며 차라리 위안이라도 삼고 싶지만, 그림 보는 눈이 없는 무지한 소장가들 때문에 남한 사회가 치르는 대가도 엄청난 것이다.
 
  작품을 구매할 때마다 탄소측정(炭素測定)을 할 수도 없다. 해당 작가로부터 진품임을 확인하려는 노력은 또 얼마나 번거로운가. 시비를 피하기 위해 작품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다 보니 이래저래 북한 작가들은 평소에 찍지 않던 영정(影幀) 사진을 남기는 축복(?)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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