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구’ ‘해병대’ ‘기러기아빠’의 대명사, 택시기사들의 스타
⊙ “나는 재벌 이미지 강한 정몽준 의원의 서민 소통 창구”
⊙ “MBC는 나를 키워 주고 내친 곳이지만 여전히 친정 같은 곳”
金興國
⊙ 53세.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관리자 과정 수료.
⊙ MBC 라디오 <김흥국·박미선의 특급작전>, 교통방송(TBS) <김흥국·정연주의 행복합니다> 등 진행.
⊙ 現 김흥국장학재단 이사장, 구세군 홍보대사, 선우 신사센터 대표.
⊙ 저서: 《김흥국의 축구 이야기》 《김흥국의 우끼는 어록》.
취재지원 : 張在軫 月刊朝鮮 인턴기자
⊙ “나는 재벌 이미지 강한 정몽준 의원의 서민 소통 창구”
⊙ “MBC는 나를 키워 주고 내친 곳이지만 여전히 친정 같은 곳”
金興國
⊙ 53세.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관리자 과정 수료.
⊙ MBC 라디오 <김흥국·박미선의 특급작전>, 교통방송(TBS) <김흥국·정연주의 행복합니다> 등 진행.
⊙ 現 김흥국장학재단 이사장, 구세군 홍보대사, 선우 신사센터 대표.
⊙ 저서: 《김흥국의 축구 이야기》 《김흥국의 우끼는 어록》.
취재지원 : 張在軫 月刊朝鮮 인턴기자
총선이 두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선거철이 되면 으레 등장하는 것이 유명인사들의 출마설이다. 이번에도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회자되는 인물이 몇몇 있다. 그중 하나가 ‘호랑나비’의 가수 김흥국(金興國)씨다.
‘라디오 스타’이면서 정몽준(鄭夢準) 한나라당 의원의 최측근으로 불리는 그는 지난 총선에서도 예비 후보로 거론돼 기자회견까지 가진 바 있다. 당시 그는 “나라를 위해 출마를 해 볼까도 많이 고민했지만 가수로서 방송활동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했다”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번에는 어떨까.
김흥국씨는 지난해 6월 MBC 라디오에서 퇴출당했다. 4·27 재·보선 때 한나라당 선거운동을 벌였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그는 “억울하다”며 삭발까지 하고 MBC 앞에서 1인시위를 벌였다. 그게 벌써 7개월여 전이다. 이후 방송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이번에는 뭔가 다른 결심을 한 것 같다”는 얘기가 방송가에서 솔솔 흘러나오고 있다.
그간의 근황이 궁금해 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월간조선》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는 듯하더니 “미국에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월간조선》 1월호를 읽었는데, 그 잡지 기자가 나를 찾다니 보통 인연이 아니네요”라며 크게 웃었다. “연말연시를 미국에 있는 가족과 보내고 오는 길입니다. 열흘 쯤 더 있다 오려 했는데, 어머님 기일(忌日)이 오늘이라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게 됐지요.”
귀국 다음날 서울 잠원동의 한 찻집에서 그와 마주앉았다. 지난 여름 삭발했던 머리는 어느덧 자라 옛 모습을 찾았고,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도 여전(당시 콧수염은 밀지 않았다)했다. 그는 모처럼의 인터뷰에 신이 난 듯했다.
‘기러기아빠’ 9년차
―그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여기저기 불러 주는 데가 있으면 가서 노래 부르고, 오래전부터 해 왔던 봉사활동을 하며 지냈습니다. 20년 동안 해 온 라디오 방송을 그만두면 ‘어떻게 사나’ 걱정했는데, 주변 분들이 많이 도와주어 그럭저럭 살았어요. 한 달에 두세 번씩 ‘사랑의 밥차’를 운영했고, 연말에는 구세군 활동도 했죠. 전화로 말씀드린 것처럼 연말연시는 미국에 있는 가족과 함께 보냈고요.”
김씨는 ‘축구’와 ‘해병대’ 외에 ‘기러기아빠’로 상징되는 인물이다. 그는 두 아이와 아내를 해외에 보낸 후 벌써 9년째 홀로 지내고 있다.
―가족은 현재 미국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캘리포니아주(州) 어바인(Irvine)에 있습니다. 올해 스물두 살이 된 아들 동현이가 그곳에 있는 디자인스쿨에 재학 중이죠. 딸 주현이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고요.”
남매는 스타 아버지를 둔 까닭에 어릴 때부터 유명세를 탔다. 대중에게 ‘번칠’이라는 애칭으로 알려져 있는 아들 동현은 태어나는 과정이 한 방송사 쇼오락 프로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됐다. ‘번칠’이라는 애칭은 방송 당시 김흥국씨의 고향인 서울 번동과 부인 윤태영씨의 고향인 경북 칠곡의 앞 글자를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10년 후 태어난 늦둥이 주현이는 몇 년 전 스타와 2세가 함께하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아버지 못지않은 ‘끼’를 발산한 바 있다.
―아이들 교육 때문이라지만 부부가 너무 오래 떨어져 있는 것 아닌가요.
“그렇죠. 제가 축구를 해서 (성적으로) 왕성한 사람인데…. 집사람이 중도에 포기했더라면 이렇게 오래가지 않았을 거예요. ‘몇 달만, 몇 년만’ 한 것이 벌써 9년이 됐네요. 딸아이가 머지않아 중학생이 되는데, 성격이 야무진 편이라 기숙사가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면 아내와 아들은 귀국할 예정입니다.”
그가 아들을 해외에 보낸 것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직후다. 당시 리라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아들이 ‘번칠’이라는 호칭 때문에 여간 스트레스를 받은 게 아니었다고 한다. 때마침 조기유학이 붐을 이루던 시기여서 ‘경험 삼아 한번 다녀오라’며 호주 시드니로 어학연수를 보냈다고 한다.
“시드니 올림픽 때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을 응원하러 호주에 다녀왔습니다. 아이들이 지내기에 나쁘지 않은 나라더군요. 몇 달 동안 영어 공부도 할 겸 바람 쐬고 오라고 보냈는데, 아이가 적응을 잘하니까 자꾸 욕심이 생겨 이렇게 길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내를 보며 어머니는 강하다는 걸 느낀다”며 “아내는 아들을 위해 맹모삼천지교를 실천했다”고 말했다. 비행기 타기를 꺼리던 아내가 아들이 원하는 공부를 위해 호주에서 미국 하와이로, 캘리포니아로 옮겨 다녔다는 것이다.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지난해 말 결혼 20주년 행사를 가졌다. 그는 “협찬 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제법 알이 굵은 다이아반지를 선물하고, 결혼사진도 다시 찍었다”며 앨범을 보여줬다. 미스코리아 충남 진(1984) 출신인 부인 윤태영씨의 미모는 여전히 빼어났다.
‘번칠’이 엄마는 미스코리아 출신
―부인은 어떻게 만났습니까.
“아내와는 묘한 인연으로 만났죠. 제가 6남매 중 막내이고, 늦둥이입니다. 독실한 불자였던 어머니는 막내아들을 위해 전국 사찰을 돌며 기도했죠. 그러다 대구 팔공산에 있는 갓바위에 갔다가 불공 드리러 온 장모님을 우연히 만난 모양입니다. 장모님께서는 미스코리아가 된 후 서울에서 모델 활동을 하는 딸을 위해 기도 중이었다고 하더군요. 초면이었던 두 분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애들이 비슷한 일을 하고 있으니 언제 한번 만나게 하자’고 약속하곤 헤어졌다고 합니다.”
―그럼, 두 어머님의 정약으로 결혼이 성사된 건가요.
“아니요, 어머니께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죠. 아내도 마찬가지였을 거고요. 그런데 몇 년 후 제가 ‘호랑나비’로 벼락스타가 됐고, 난생 처음 CF 촬영을 하게 됐습니다. 구두 광고였는데, CF 감독이 함께 호흡을 맞출 여자 파트너가 필요하다며 후보 10명의 사진을 제 앞에 늘어놓더군요.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고르라는 것이었어요. 10장의 사진 중 이상하게 눈에 들어온 얼굴이 아내였어요.”
CF 촬영 후 그는 싫다는 윤씨에게 1주일을 매달려 잠원동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그가 가수로 막 뜰 때여서 윤씨는 숨어서 지내야 했다. 그는 “꿈을 접은 것도 억울한데 나 때문에 숨어 지내야 했으니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번칠’이는 속도위반으로?
“아닙니다. 저는 지킬 건 지키는 사람입니다. 아이는 결혼 후 홍콩으로 신혼여행 가서 생겼어요. 그야말로 홍콩 가서 만든 아이죠.”
무명 시절 <인간시대>에 출연
그는 도봉산 아랫마을인 서울 번동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980년대까지도 번동은 농사를 짓는 시골이었고, 비만 오면 산사태가 나서 흙더미가 안방까지 덮치는 곳이었다. 가난한 농군이었던 아버지는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좋아하던 축구를 포기하고, 서라벌예고 재학 중 교내 그룹사운드 멤버로 활동하며 가수의 길을 걷게 됐다. ‘호랑나비’로 뜨기 전까지 그는 10년을 무명가수로 지냈다.
―‘호랑나비’라는 곡은 어떻게 탄생했나요.
“그 얘기를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당시 최고 인기였던 MBC 휴먼 다큐 <인간시대>에 출연한 얘기부터 해야 하니까요. 이 프로에 출연하지 않았다면 ‘호랑나비’와도 인연이 닿지 않았을 겁니다.”
해병대 제대 후 그는 그룹사운드 멤버로 밤무대에서 활동했다. 그러다 고등학교 선배인 개그맨 강석씨 도움으로 솔로 앨범을 냈으나 빛을 보지 못했다.
―강석씨와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군요.
“고등학교 선배이고, 동네 형이었으니까 오래됐죠. 무명 시절 저를 가장 많이 도와주신 분입니다. 솔로 앨범이 나왔을 때는 아는 PD에게 부탁해 당시 청소년들 사이에 최고 인기였던 MBC 라디오 <이종환의 디스크쇼> 공개방송에도 나가게 해 줬죠. 두 곡을 부르기로 했다가 한 곡만 하고 무대를 내려와야 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아마 저를 소개한 PD가 제가 어떤 가수인지 이종환 선생님께 미리 말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생판 모르는 가수가 처음 듣는 노래를 하는데, 더벅머리에 콧수염까지 기른 데다 밤무대 복장이라 이 선생님께서 좀 놀랐던 것 같아요. 방청석을 가득 메운 학생들이 보기에는 좀 민망한 모습이었으니까요. 이 선생님이 노래를 중단시켰죠.”
첫 CF 출연료 전액 기증
―<인간시대>에는 어떻게 출연하게 된 건가요.
“그 무렵 그룹사운드 선배 딸이 불치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어요. 병문안을 가야 하는데 돈이 없었습니다. 빈손으로 가기 뭣해서 기타를 들고 가 노래를 불러 줬더니 아이가 굉장히 좋아하더군요.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갔죠. 이 사실을 <인간시대> 제작진이 알고 촬영하게 됐습니다.”
불치병 소녀와 무명가수의 일상이 <인간시대>를 통해 전파를 타자 많은 이들이 감동했다. 시청률이 고공행진을 거듭했다. 제작진은 불치병 소녀를 위해 ‘정아’라는 곡을 만들어 그에게 부르도록 했다. ‘정아’는 아이의 이름이었고, 노래는 당시 잘나가던 혼성듀오 ‘배따라기’의 멤버 이혜민씨가 만들었다. 그가 병실에서 ‘정아’를 부르는 장면이 나가자 여기저기서 출연 요청이 쇄도했다. 그는 아이의 고통과 선배의 아픔을 상업적으로 이용할 만큼 얼굴이 두껍지 못했다. 출연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그때 출연에 응했으면 무명가수 생활을 훨씬 빨리 청산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의 출세작 ‘호랑나비’는 ‘배따라기’의 이혜민씨가 만든 노래다. 그는 <인간시대>를 통해 쌓은 친분 덕분에 이 곡을 받았다. 처음 듣는 순간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이 노래에 끌렸다고 한다. ‘호랑나비’는 당시 최고의 디렉터이자 ‘한국의 퀸시 존스’로 불리던 나현구씨 손을 거쳐 허스키 보이스인 김흥국씨 목소리에 맞게 다듬어졌다.
‘앗싸’ ‘핫’ ‘오예’ 같은 추임새와 말미에 나오는 특유의 웃음소리는 KBS 악단장을 지낸 재즈 뮤지션 정성조(鄭成朝)씨의 아이디어였다. 음반 홍보를 맡은 정씨는 노래 중간 중간에 추임새를 넣어 훨씬 신나고 재미있는 곡으로 변모시켰다.
그런데 이 추임새와 웃음소리 때문에 노래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될 뻔했다. 이전에 어느 곡에도 시도된 적이 없는 이 추임새가 방송 심의위원들의 귀에 거슬리게 한 것이다. 강석씨가 진행 중인 음악 프로에 소개하기 위해 대기 중이었는데 심의가 나오지 않아 마냥 기다려야 했다.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 곡이 어떻게 나오게 된 건가요.
“강석 형의 목숨을 건 모험 덕분입니다. 그 형이 ‘일요일에는 방송국에 심의가 없다’며 일요일에 몰래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를 통해 내보낸 거예요. 일요일은 녹음방송이 나가는 날이라 형이 토요일 오후에 전화를 했더군요. ‘내일 방송 나가니까 들어 보라’고요. 차비가 없어 시내도 나가지 못하고 집에 갇혀 있다시피 하던 때라 어머니와 둘이 방송을 듣고 울었습니다. ‘호랑나비’는 그거 한방으로 끝났어요.”
―반응이 그렇게 빨랐나요.
“폭풍 같았지요. 당시 TV 토크쇼 가운데 <자니윤 쇼>가 유명했는데, 노래가 방송을 탄 지 1주일 만에 출연 섭외가 들어왔습니다. 특급스타만 나오는 이 프로에 출연한게 저의 TV 무대 데뷔였죠.”
이후 각종 쇼 오락 프로에 단골로 출연했다. 연말에는 최고 인기가요 상을 휩쓸다. 팬클럽이 생기고 팬레터가 오기 시작하자 그는 잠원동에 있는 56㎡(17평) 아파트를 전세로 얻어 이사했다. 당시 전세가가 2000만원쯤이었는데, 어머니에게 부탁해 동네에서 빚을 냈다고 한다.
―노래가 히트했고, CF도 찍었는데 그만한 돈이 없었나요.
“CF 출연 대가로 받은 돈이 2000만~3000만원쯤 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정도면 전세를 얻고도 남는 돈이었죠. 이 자리에서 처음 밝히는 건데, 사실 CF 출연으로 받은 돈 전부를 투병 중이던 정아에게 주었습니다. 선배 부부가 ‘부담스럽다’며 거절하길래 정아가 누워 있던 침대 시트 밑에 넣어두고 왔죠. 그 돈으로 정아가 잘 치료받고 건강해지길 바랐는데, 안타깝게도 정아는 얼마 후 세상을 떠나더군요. 이후 10여 년이 지나도록 선배 가족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털 없는 아내’가 만든 웃음
―만나지 못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저는 그 돈을 빌려준 것이 아니라 준 것인데, 자존심 강한 선배는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동안 갚을 길이 없으니까 선배 쪽에서 연락을 끊고 지낸 것이죠. 그러다 2009년 정아 여동생의 결혼식을 계기로 재회하게 됐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꼬마가 어느새 자라 결혼한다는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한데, ‘주례는 꼭 흥국이 아저씨가 봐 주셨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가슴이 뭉클하더군요. 그 아이 덕분에 나이 50에 주례를 섰습니다. 사회자가 저를 주례로 소개하자 결혼식장이 웃음바다가 됐지요.”
‘호랑나비’를 발표한 것이 1989년이다. 데뷔곡이 너무 강했던 탓일까. 이후 내놓은 곡은 ‘59년 왕십리’를 제외하곤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는 “‘59년 왕십리’ 후속타로 내놓은 곡이 ‘흔들흔들’이었는데, 노래 제목처럼 ‘호랑나비’로 얻은 인기가 흔들렸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59년 왕십리’ 이후 이렇다 할 히트곡이 없는데, 왜 그런가요.
“제가 다른 가수에 비해 앨범 욕심이 없었어요. ‘호랑나비’ 이후 후속타를 내야 하는데, 축구에 미쳐 월드컵 대표팀 응원하러 이탈리아로 날아갔잖아요. 그러곤 DJ가 좋아 라디오 방송 쪽에 눌러앉았고요.”
―처음 시작한 라디오 방송이 MBC FM의 <김흥국·박미선의 특급작전>이었습니까.
“네, 10년 넘게 장수했죠. 당시 이득렬(李得洌·2001년 작고) 사장이 저를 만나면 ‘재미있게 듣고 있다’며 손을 흔들어 줄 정도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이 프로를 통해 ‘김흥국 어록’이 많이 쏟아졌지요.”
그는 이 방송에서 ‘마돈나가 UCLA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는 뉴스를 ‘마돈나가 우클라 대학에서 강의를 했네요’라고 전했고, 가수 터보의 ‘Cyber lover’를 ‘시버 러버’, 차중락의 ‘철없는 아내’를 ‘털 없는 아내’ 라고 소개해 청취자들에게 웃음 폭탄을 안겼다. 그가 실수로 만들어 낸 어록은 이외에도 수없이 많다. 상식이 부족하거나 대본을 잘못 읽어 빚어진 촌극이었지만 청취자들은 그를 무식하다거나 무책임하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실수투성이인 그를 친근하게 받아들이고 즐거워했다. 지금도 인터넷 블로그에는 ‘김흥국 어록’을 소개하는 곳이 많다.
―실수가 반복되는데도 고치지 않은 건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니까 의도적으로 그런 것 아닌가요.
“실수를 일부러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제가 방송을 할 때 미리 대본을 보지 않는 고집이 있어요. 대본대로 하면 내 색깔이 없는 것 같아서 일부러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수를 남발하게 되는 것이죠.”
‘1인시위’ 연예인 1호
―MBC와는 여러 가지로 인연이 깊네요.
“저를 발굴하고 키워 줬으니 MBC는 저의 친정과 같은 곳입니다. 안타깝게도 저를 라디오에서 퇴출한 곳 역시 MBC지만 말이에요.”
작년 6월 초 김흥국씨는 MBC 측의 일방적인 퇴출 통보로 1년여 동안 진행해 온 라디오 방송 <김흥국 김경식의 2시 만세>에서 하차했다. 당시 MBC는 ‘김흥국씨가 일신상의 문제로 프로그램을 하차하게 됐다’고 밝혔다. 파업 중이던 MBC 노조가 4·27 재·보선 당시 김흥국씨가 정몽준 의원과 함께 한나라당 선거운동을 했다며 시사 프로그램에서 퇴출된 김미화와의 형평성 문제를 제기한 직후였다.
당시 그는 “정몽준 의원과의 친분 관계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고, “어떠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방송에서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는 등 방송을 이용한 사실이 없다”며 억울해했다. “만약 정치적 성향이 문제가 되었다면 처음부터 채용하지 말았어야 했으며, 뒤늦게 문제 삼는 치졸한 작태는 그야말로 MBC만이 가능한 마녀사냥”이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러곤 “다시는 자신과 같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며 5일 동안 MBC 앞에서 1인시위를 벌였다. 연예인이 방송국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는 그가 처음이다.
―동료 연예인들이 동조하고 격려해 주던가요.
“전화나 문자로는 다들 격려해 주었는데, 시위 현장에 온 분은 남진 선배님이 유일했습니다. MBC 눈치 보느라 함부로 다가오지 못한 것이죠. 그 입장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에 서운하지 않았습니다.”
동료 연예인들은 오지 않았지만 그의 라디오 팬인 택시기사며 주부들은 물이며 먹을 것을 들고 찾아와 “힘내라”며 응원해 주곤 했다고 한다. 그는 “그분들의 격려 덕분에 뙤약볕에서 5일 동안 버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시위 현장에 정몽준 의원은 오지 않았습니까.
“삭발식 때 오셨습니다. 기자 수백 명이 몰려와 기자회견장이 됐는데, 정 회장님께서 ‘축구로 친해져 나 좋다고 따라다니다 이런 일을 겪게 돼 내가 미안하다’고 위로해 주셨어요. 큰일 해야 하는 회장님께 오히려 제가 누를 끼친 것 같아 몸 둘 바를 모르겠더군요.”
나는 MJ의 서민 소통 창구
―정몽준(MJ) 의원과의 인연은 언제부터 시작된 건가요.
“1993년 정 회장께서 축구협회 회장으로 취임했을 때 처음 만났습니다. 취임 직후 저를 불러 ‘둘이 함께 한국 축구를 살려 보자’며 ‘김흥국은 영원한 한국 축구 응원단장이니까 축구 대사 역할을 해 달라’고 아주 정중하게 부탁하시더군요. 그게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20년을 정몽준 의원과 함께했다. 2002년 대선 때와 2008년 총선 때는 선거법을 의식해 방송 일까지 정리하고 선거 현장에서 정 의원을 도왔다. 그는 재벌 이미지가 강한 정 의원이 서민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충실히 했다. 정 의원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는 몇 안되는 측근이었다.
―가까이에서 보기에 정 의원은 어떤 사람입니까.
“재벌2세라는 선입견 때문에 ‘서민의 아픔을 모른다’ ‘카리스마가 없다’ ‘짠돌이다’는 평가가 많은데, 그분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곁에서 본 정 회장님은 누구보다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이죠. 여야 정치인들의 견제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서민의 아픔을 보듬어 줄 수 있는 분입니다. 무소속으로 있다 한나라당으로 왔는데, 친이(親李) 친박(親朴)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홀로 생존하는 거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속 얘기를 터놓고 하는 사이인가요.
“그분은 저를 만나면 ‘흥국아, 너는 참 세상 재미있게 산다’며 스트레스를 푸는 분입니다. 조금만 친절하게 대해도 ‘정몽준은 내 사람’이라며 이용하려 드는 이가 많아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데, 제가 무식할 정도로 솔직하고 바라는 게 없으니까 저한테만은 안심하고 오픈하는 것 같아요.”
―선거 때면 생업을 포기하고 정 의원을 지원해 온 셈인데, 그에 대한 보상은 받았습니까.
“존경하고 따르는 분이라 좋아서 했을 뿐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닙니다. 공식적으로 돈을 받은 적은 없지요. 다만 용돈이라며 손에 집히는 대로 주머니에서 꺼내 주는 돈은 받았어요. 함께 있는 사람들과 밥 사 먹으라고 주는 돈이니까요.”
―돈은 아니어도 이런저런 청탁은 있었을 법한데요.
“그분은 청탁은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분입니다. 그 성격을 잘 알기에 그 어떤 청탁도 해 본 적이 없는데, 딱 한 번 정중히 부탁한 일이 있었지요. 제가 존경하는 배삼룡 선생님이 아산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말 않고 들어 주시더군요.”
마이크가 그립다
정몽준 의원은 지갑을 갖고 다니지 않기로 유명하다. 사람들과 식사를 하거나 업무 중 발생하는 비용은 모두 수행비서들이 처리한다. 이 때문에 수행비서 없이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서 습관처럼 찻값이나 식사비를 내지 않고 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는 “‘짠돌이’라는 오해는 이런 습관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4월 총선에 출마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주변에서 고향 번동이나 제 노래의 배경인 왕십리 쪽에서 출마해 보라고 부추기는데, 제가 나가면 될까요?”
―부인과 상의해 본 적 있습니까.
“이번에 미국에 갔을 때 지나가는 투로 슬쩍 꺼냈더니 ‘그거 꼭 해야 돼?’라고 되묻더군요.”
―정 의원은 뭐라고 하던가요.
“아직 의논해 보지 않았습니다. 지난 총선 때는 ‘그런 일(출마할까 고민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먼저 얘기해야지’라며 야단을 치시더군요.”
그는 “마음 같아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서민들과 축구하고 막걸리 마시면서 멋지게 성공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솔직히 총선보다는 방송사 봄 개편에 더 관심이 간다”고 심정을 털어놓았다.
두 시간 동안의 인터뷰를 마치자 그는 “오랜만에 두 시간짜리 라디오 방송을 끝낸 기분”이라며 긴 숨을 토해 냈다. 그가 진정 잡고 싶은 것은 유세장의 마이크가 아니라 라디오 방송 마이크인 모양이다.⊙
‘라디오 스타’이면서 정몽준(鄭夢準) 한나라당 의원의 최측근으로 불리는 그는 지난 총선에서도 예비 후보로 거론돼 기자회견까지 가진 바 있다. 당시 그는 “나라를 위해 출마를 해 볼까도 많이 고민했지만 가수로서 방송활동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했다”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번에는 어떨까.
김흥국씨는 지난해 6월 MBC 라디오에서 퇴출당했다. 4·27 재·보선 때 한나라당 선거운동을 벌였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그는 “억울하다”며 삭발까지 하고 MBC 앞에서 1인시위를 벌였다. 그게 벌써 7개월여 전이다. 이후 방송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이번에는 뭔가 다른 결심을 한 것 같다”는 얘기가 방송가에서 솔솔 흘러나오고 있다.
그간의 근황이 궁금해 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월간조선》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는 듯하더니 “미국에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월간조선》 1월호를 읽었는데, 그 잡지 기자가 나를 찾다니 보통 인연이 아니네요”라며 크게 웃었다. “연말연시를 미국에 있는 가족과 보내고 오는 길입니다. 열흘 쯤 더 있다 오려 했는데, 어머님 기일(忌日)이 오늘이라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게 됐지요.”
귀국 다음날 서울 잠원동의 한 찻집에서 그와 마주앉았다. 지난 여름 삭발했던 머리는 어느덧 자라 옛 모습을 찾았고,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도 여전(당시 콧수염은 밀지 않았다)했다. 그는 모처럼의 인터뷰에 신이 난 듯했다.
‘기러기아빠’ 9년차
―그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여기저기 불러 주는 데가 있으면 가서 노래 부르고, 오래전부터 해 왔던 봉사활동을 하며 지냈습니다. 20년 동안 해 온 라디오 방송을 그만두면 ‘어떻게 사나’ 걱정했는데, 주변 분들이 많이 도와주어 그럭저럭 살았어요. 한 달에 두세 번씩 ‘사랑의 밥차’를 운영했고, 연말에는 구세군 활동도 했죠. 전화로 말씀드린 것처럼 연말연시는 미국에 있는 가족과 함께 보냈고요.”
김씨는 ‘축구’와 ‘해병대’ 외에 ‘기러기아빠’로 상징되는 인물이다. 그는 두 아이와 아내를 해외에 보낸 후 벌써 9년째 홀로 지내고 있다.
―가족은 현재 미국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캘리포니아주(州) 어바인(Irvine)에 있습니다. 올해 스물두 살이 된 아들 동현이가 그곳에 있는 디자인스쿨에 재학 중이죠. 딸 주현이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고요.”
남매는 스타 아버지를 둔 까닭에 어릴 때부터 유명세를 탔다. 대중에게 ‘번칠’이라는 애칭으로 알려져 있는 아들 동현은 태어나는 과정이 한 방송사 쇼오락 프로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됐다. ‘번칠’이라는 애칭은 방송 당시 김흥국씨의 고향인 서울 번동과 부인 윤태영씨의 고향인 경북 칠곡의 앞 글자를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10년 후 태어난 늦둥이 주현이는 몇 년 전 스타와 2세가 함께하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아버지 못지않은 ‘끼’를 발산한 바 있다.
―아이들 교육 때문이라지만 부부가 너무 오래 떨어져 있는 것 아닌가요.
“그렇죠. 제가 축구를 해서 (성적으로) 왕성한 사람인데…. 집사람이 중도에 포기했더라면 이렇게 오래가지 않았을 거예요. ‘몇 달만, 몇 년만’ 한 것이 벌써 9년이 됐네요. 딸아이가 머지않아 중학생이 되는데, 성격이 야무진 편이라 기숙사가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면 아내와 아들은 귀국할 예정입니다.”
그가 아들을 해외에 보낸 것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직후다. 당시 리라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아들이 ‘번칠’이라는 호칭 때문에 여간 스트레스를 받은 게 아니었다고 한다. 때마침 조기유학이 붐을 이루던 시기여서 ‘경험 삼아 한번 다녀오라’며 호주 시드니로 어학연수를 보냈다고 한다.
“시드니 올림픽 때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을 응원하러 호주에 다녀왔습니다. 아이들이 지내기에 나쁘지 않은 나라더군요. 몇 달 동안 영어 공부도 할 겸 바람 쐬고 오라고 보냈는데, 아이가 적응을 잘하니까 자꾸 욕심이 생겨 이렇게 길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내를 보며 어머니는 강하다는 걸 느낀다”며 “아내는 아들을 위해 맹모삼천지교를 실천했다”고 말했다. 비행기 타기를 꺼리던 아내가 아들이 원하는 공부를 위해 호주에서 미국 하와이로, 캘리포니아로 옮겨 다녔다는 것이다.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지난해 말 결혼 20주년 행사를 가졌다. 그는 “협찬 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제법 알이 굵은 다이아반지를 선물하고, 결혼사진도 다시 찍었다”며 앨범을 보여줬다. 미스코리아 충남 진(1984) 출신인 부인 윤태영씨의 미모는 여전히 빼어났다.
‘번칠’이 엄마는 미스코리아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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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 아이들과 함께한 리마인드 웨딩 사진. |
“아내와는 묘한 인연으로 만났죠. 제가 6남매 중 막내이고, 늦둥이입니다. 독실한 불자였던 어머니는 막내아들을 위해 전국 사찰을 돌며 기도했죠. 그러다 대구 팔공산에 있는 갓바위에 갔다가 불공 드리러 온 장모님을 우연히 만난 모양입니다. 장모님께서는 미스코리아가 된 후 서울에서 모델 활동을 하는 딸을 위해 기도 중이었다고 하더군요. 초면이었던 두 분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애들이 비슷한 일을 하고 있으니 언제 한번 만나게 하자’고 약속하곤 헤어졌다고 합니다.”
―그럼, 두 어머님의 정약으로 결혼이 성사된 건가요.
“아니요, 어머니께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죠. 아내도 마찬가지였을 거고요. 그런데 몇 년 후 제가 ‘호랑나비’로 벼락스타가 됐고, 난생 처음 CF 촬영을 하게 됐습니다. 구두 광고였는데, CF 감독이 함께 호흡을 맞출 여자 파트너가 필요하다며 후보 10명의 사진을 제 앞에 늘어놓더군요.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고르라는 것이었어요. 10장의 사진 중 이상하게 눈에 들어온 얼굴이 아내였어요.”
CF 촬영 후 그는 싫다는 윤씨에게 1주일을 매달려 잠원동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그가 가수로 막 뜰 때여서 윤씨는 숨어서 지내야 했다. 그는 “꿈을 접은 것도 억울한데 나 때문에 숨어 지내야 했으니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번칠’이는 속도위반으로?
“아닙니다. 저는 지킬 건 지키는 사람입니다. 아이는 결혼 후 홍콩으로 신혼여행 가서 생겼어요. 그야말로 홍콩 가서 만든 아이죠.”
무명 시절 <인간시대>에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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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스타 박지성과 함께한 모습. |
―‘호랑나비’라는 곡은 어떻게 탄생했나요.
“그 얘기를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당시 최고 인기였던 MBC 휴먼 다큐 <인간시대>에 출연한 얘기부터 해야 하니까요. 이 프로에 출연하지 않았다면 ‘호랑나비’와도 인연이 닿지 않았을 겁니다.”
해병대 제대 후 그는 그룹사운드 멤버로 밤무대에서 활동했다. 그러다 고등학교 선배인 개그맨 강석씨 도움으로 솔로 앨범을 냈으나 빛을 보지 못했다.
―강석씨와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군요.
“고등학교 선배이고, 동네 형이었으니까 오래됐죠. 무명 시절 저를 가장 많이 도와주신 분입니다. 솔로 앨범이 나왔을 때는 아는 PD에게 부탁해 당시 청소년들 사이에 최고 인기였던 MBC 라디오 <이종환의 디스크쇼> 공개방송에도 나가게 해 줬죠. 두 곡을 부르기로 했다가 한 곡만 하고 무대를 내려와야 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아마 저를 소개한 PD가 제가 어떤 가수인지 이종환 선생님께 미리 말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생판 모르는 가수가 처음 듣는 노래를 하는데, 더벅머리에 콧수염까지 기른 데다 밤무대 복장이라 이 선생님께서 좀 놀랐던 것 같아요. 방청석을 가득 메운 학생들이 보기에는 좀 민망한 모습이었으니까요. 이 선생님이 노래를 중단시켰죠.”
―<인간시대>에는 어떻게 출연하게 된 건가요.
“그 무렵 그룹사운드 선배 딸이 불치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어요. 병문안을 가야 하는데 돈이 없었습니다. 빈손으로 가기 뭣해서 기타를 들고 가 노래를 불러 줬더니 아이가 굉장히 좋아하더군요.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갔죠. 이 사실을 <인간시대> 제작진이 알고 촬영하게 됐습니다.”
불치병 소녀와 무명가수의 일상이 <인간시대>를 통해 전파를 타자 많은 이들이 감동했다. 시청률이 고공행진을 거듭했다. 제작진은 불치병 소녀를 위해 ‘정아’라는 곡을 만들어 그에게 부르도록 했다. ‘정아’는 아이의 이름이었고, 노래는 당시 잘나가던 혼성듀오 ‘배따라기’의 멤버 이혜민씨가 만들었다. 그가 병실에서 ‘정아’를 부르는 장면이 나가자 여기저기서 출연 요청이 쇄도했다. 그는 아이의 고통과 선배의 아픔을 상업적으로 이용할 만큼 얼굴이 두껍지 못했다. 출연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그때 출연에 응했으면 무명가수 생활을 훨씬 빨리 청산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의 출세작 ‘호랑나비’는 ‘배따라기’의 이혜민씨가 만든 노래다. 그는 <인간시대>를 통해 쌓은 친분 덕분에 이 곡을 받았다. 처음 듣는 순간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이 노래에 끌렸다고 한다. ‘호랑나비’는 당시 최고의 디렉터이자 ‘한국의 퀸시 존스’로 불리던 나현구씨 손을 거쳐 허스키 보이스인 김흥국씨 목소리에 맞게 다듬어졌다.
‘앗싸’ ‘핫’ ‘오예’ 같은 추임새와 말미에 나오는 특유의 웃음소리는 KBS 악단장을 지낸 재즈 뮤지션 정성조(鄭成朝)씨의 아이디어였다. 음반 홍보를 맡은 정씨는 노래 중간 중간에 추임새를 넣어 훨씬 신나고 재미있는 곡으로 변모시켰다.
그런데 이 추임새와 웃음소리 때문에 노래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될 뻔했다. 이전에 어느 곡에도 시도된 적이 없는 이 추임새가 방송 심의위원들의 귀에 거슬리게 한 것이다. 강석씨가 진행 중인 음악 프로에 소개하기 위해 대기 중이었는데 심의가 나오지 않아 마냥 기다려야 했다.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 곡이 어떻게 나오게 된 건가요.
“강석 형의 목숨을 건 모험 덕분입니다. 그 형이 ‘일요일에는 방송국에 심의가 없다’며 일요일에 몰래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를 통해 내보낸 거예요. 일요일은 녹음방송이 나가는 날이라 형이 토요일 오후에 전화를 했더군요. ‘내일 방송 나가니까 들어 보라’고요. 차비가 없어 시내도 나가지 못하고 집에 갇혀 있다시피 하던 때라 어머니와 둘이 방송을 듣고 울었습니다. ‘호랑나비’는 그거 한방으로 끝났어요.”
―반응이 그렇게 빨랐나요.
“폭풍 같았지요. 당시 TV 토크쇼 가운데 <자니윤 쇼>가 유명했는데, 노래가 방송을 탄 지 1주일 만에 출연 섭외가 들어왔습니다. 특급스타만 나오는 이 프로에 출연한게 저의 TV 무대 데뷔였죠.”
이후 각종 쇼 오락 프로에 단골로 출연했다. 연말에는 최고 인기가요 상을 휩쓸다. 팬클럽이 생기고 팬레터가 오기 시작하자 그는 잠원동에 있는 56㎡(17평) 아파트를 전세로 얻어 이사했다. 당시 전세가가 2000만원쯤이었는데, 어머니에게 부탁해 동네에서 빚을 냈다고 한다.
―노래가 히트했고, CF도 찍었는데 그만한 돈이 없었나요.
“CF 출연 대가로 받은 돈이 2000만~3000만원쯤 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정도면 전세를 얻고도 남는 돈이었죠. 이 자리에서 처음 밝히는 건데, 사실 CF 출연으로 받은 돈 전부를 투병 중이던 정아에게 주었습니다. 선배 부부가 ‘부담스럽다’며 거절하길래 정아가 누워 있던 침대 시트 밑에 넣어두고 왔죠. 그 돈으로 정아가 잘 치료받고 건강해지길 바랐는데, 안타깝게도 정아는 얼마 후 세상을 떠나더군요. 이후 10여 년이 지나도록 선배 가족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털 없는 아내’가 만든 웃음
―만나지 못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저는 그 돈을 빌려준 것이 아니라 준 것인데, 자존심 강한 선배는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동안 갚을 길이 없으니까 선배 쪽에서 연락을 끊고 지낸 것이죠. 그러다 2009년 정아 여동생의 결혼식을 계기로 재회하게 됐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꼬마가 어느새 자라 결혼한다는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한데, ‘주례는 꼭 흥국이 아저씨가 봐 주셨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가슴이 뭉클하더군요. 그 아이 덕분에 나이 50에 주례를 섰습니다. 사회자가 저를 주례로 소개하자 결혼식장이 웃음바다가 됐지요.”
‘호랑나비’를 발표한 것이 1989년이다. 데뷔곡이 너무 강했던 탓일까. 이후 내놓은 곡은 ‘59년 왕십리’를 제외하곤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는 “‘59년 왕십리’ 후속타로 내놓은 곡이 ‘흔들흔들’이었는데, 노래 제목처럼 ‘호랑나비’로 얻은 인기가 흔들렸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59년 왕십리’ 이후 이렇다 할 히트곡이 없는데, 왜 그런가요.
“제가 다른 가수에 비해 앨범 욕심이 없었어요. ‘호랑나비’ 이후 후속타를 내야 하는데, 축구에 미쳐 월드컵 대표팀 응원하러 이탈리아로 날아갔잖아요. 그러곤 DJ가 좋아 라디오 방송 쪽에 눌러앉았고요.”
―처음 시작한 라디오 방송이 MBC FM의 <김흥국·박미선의 특급작전>이었습니까.
“네, 10년 넘게 장수했죠. 당시 이득렬(李得洌·2001년 작고) 사장이 저를 만나면 ‘재미있게 듣고 있다’며 손을 흔들어 줄 정도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이 프로를 통해 ‘김흥국 어록’이 많이 쏟아졌지요.”
그는 이 방송에서 ‘마돈나가 UCLA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는 뉴스를 ‘마돈나가 우클라 대학에서 강의를 했네요’라고 전했고, 가수 터보의 ‘Cyber lover’를 ‘시버 러버’, 차중락의 ‘철없는 아내’를 ‘털 없는 아내’ 라고 소개해 청취자들에게 웃음 폭탄을 안겼다. 그가 실수로 만들어 낸 어록은 이외에도 수없이 많다. 상식이 부족하거나 대본을 잘못 읽어 빚어진 촌극이었지만 청취자들은 그를 무식하다거나 무책임하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실수투성이인 그를 친근하게 받아들이고 즐거워했다. 지금도 인터넷 블로그에는 ‘김흥국 어록’을 소개하는 곳이 많다.
―실수가 반복되는데도 고치지 않은 건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니까 의도적으로 그런 것 아닌가요.
“실수를 일부러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제가 방송을 할 때 미리 대본을 보지 않는 고집이 있어요. 대본대로 하면 내 색깔이 없는 것 같아서 일부러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수를 남발하게 되는 것이죠.”
―MBC와는 여러 가지로 인연이 깊네요.
“저를 발굴하고 키워 줬으니 MBC는 저의 친정과 같은 곳입니다. 안타깝게도 저를 라디오에서 퇴출한 곳 역시 MBC지만 말이에요.”
작년 6월 초 김흥국씨는 MBC 측의 일방적인 퇴출 통보로 1년여 동안 진행해 온 라디오 방송 <김흥국 김경식의 2시 만세>에서 하차했다. 당시 MBC는 ‘김흥국씨가 일신상의 문제로 프로그램을 하차하게 됐다’고 밝혔다. 파업 중이던 MBC 노조가 4·27 재·보선 당시 김흥국씨가 정몽준 의원과 함께 한나라당 선거운동을 했다며 시사 프로그램에서 퇴출된 김미화와의 형평성 문제를 제기한 직후였다.
당시 그는 “정몽준 의원과의 친분 관계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고, “어떠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방송에서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는 등 방송을 이용한 사실이 없다”며 억울해했다. “만약 정치적 성향이 문제가 되었다면 처음부터 채용하지 말았어야 했으며, 뒤늦게 문제 삼는 치졸한 작태는 그야말로 MBC만이 가능한 마녀사냥”이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러곤 “다시는 자신과 같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며 5일 동안 MBC 앞에서 1인시위를 벌였다. 연예인이 방송국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는 그가 처음이다.
―동료 연예인들이 동조하고 격려해 주던가요.
“전화나 문자로는 다들 격려해 주었는데, 시위 현장에 온 분은 남진 선배님이 유일했습니다. MBC 눈치 보느라 함부로 다가오지 못한 것이죠. 그 입장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에 서운하지 않았습니다.”
동료 연예인들은 오지 않았지만 그의 라디오 팬인 택시기사며 주부들은 물이며 먹을 것을 들고 찾아와 “힘내라”며 응원해 주곤 했다고 한다. 그는 “그분들의 격려 덕분에 뙤약볕에서 5일 동안 버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시위 현장에 정몽준 의원은 오지 않았습니까.
“삭발식 때 오셨습니다. 기자 수백 명이 몰려와 기자회견장이 됐는데, 정 회장님께서 ‘축구로 친해져 나 좋다고 따라다니다 이런 일을 겪게 돼 내가 미안하다’고 위로해 주셨어요. 큰일 해야 하는 회장님께 오히려 제가 누를 끼친 것 같아 몸 둘 바를 모르겠더군요.”
나는 MJ의 서민 소통 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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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총선 당시 서울 동작을에 출마한 정몽준 의원과 함께. |
“1993년 정 회장께서 축구협회 회장으로 취임했을 때 처음 만났습니다. 취임 직후 저를 불러 ‘둘이 함께 한국 축구를 살려 보자’며 ‘김흥국은 영원한 한국 축구 응원단장이니까 축구 대사 역할을 해 달라’고 아주 정중하게 부탁하시더군요. 그게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20년을 정몽준 의원과 함께했다. 2002년 대선 때와 2008년 총선 때는 선거법을 의식해 방송 일까지 정리하고 선거 현장에서 정 의원을 도왔다. 그는 재벌 이미지가 강한 정 의원이 서민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충실히 했다. 정 의원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는 몇 안되는 측근이었다.
―가까이에서 보기에 정 의원은 어떤 사람입니까.
“재벌2세라는 선입견 때문에 ‘서민의 아픔을 모른다’ ‘카리스마가 없다’ ‘짠돌이다’는 평가가 많은데, 그분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곁에서 본 정 회장님은 누구보다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이죠. 여야 정치인들의 견제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서민의 아픔을 보듬어 줄 수 있는 분입니다. 무소속으로 있다 한나라당으로 왔는데, 친이(親李) 친박(親朴)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홀로 생존하는 거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속 얘기를 터놓고 하는 사이인가요.
“그분은 저를 만나면 ‘흥국아, 너는 참 세상 재미있게 산다’며 스트레스를 푸는 분입니다. 조금만 친절하게 대해도 ‘정몽준은 내 사람’이라며 이용하려 드는 이가 많아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데, 제가 무식할 정도로 솔직하고 바라는 게 없으니까 저한테만은 안심하고 오픈하는 것 같아요.”
―선거 때면 생업을 포기하고 정 의원을 지원해 온 셈인데, 그에 대한 보상은 받았습니까.
“존경하고 따르는 분이라 좋아서 했을 뿐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닙니다. 공식적으로 돈을 받은 적은 없지요. 다만 용돈이라며 손에 집히는 대로 주머니에서 꺼내 주는 돈은 받았어요. 함께 있는 사람들과 밥 사 먹으라고 주는 돈이니까요.”
―돈은 아니어도 이런저런 청탁은 있었을 법한데요.
“그분은 청탁은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분입니다. 그 성격을 잘 알기에 그 어떤 청탁도 해 본 적이 없는데, 딱 한 번 정중히 부탁한 일이 있었지요. 제가 존경하는 배삼룡 선생님이 아산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말 않고 들어 주시더군요.”
마이크가 그립다
정몽준 의원은 지갑을 갖고 다니지 않기로 유명하다. 사람들과 식사를 하거나 업무 중 발생하는 비용은 모두 수행비서들이 처리한다. 이 때문에 수행비서 없이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서 습관처럼 찻값이나 식사비를 내지 않고 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는 “‘짠돌이’라는 오해는 이런 습관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4월 총선에 출마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주변에서 고향 번동이나 제 노래의 배경인 왕십리 쪽에서 출마해 보라고 부추기는데, 제가 나가면 될까요?”
―부인과 상의해 본 적 있습니까.
“이번에 미국에 갔을 때 지나가는 투로 슬쩍 꺼냈더니 ‘그거 꼭 해야 돼?’라고 되묻더군요.”
―정 의원은 뭐라고 하던가요.
“아직 의논해 보지 않았습니다. 지난 총선 때는 ‘그런 일(출마할까 고민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먼저 얘기해야지’라며 야단을 치시더군요.”
그는 “마음 같아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서민들과 축구하고 막걸리 마시면서 멋지게 성공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솔직히 총선보다는 방송사 봄 개편에 더 관심이 간다”고 심정을 털어놓았다.
두 시간 동안의 인터뷰를 마치자 그는 “오랜만에 두 시간짜리 라디오 방송을 끝낸 기분”이라며 긴 숨을 토해 냈다. 그가 진정 잡고 싶은 것은 유세장의 마이크가 아니라 라디오 방송 마이크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