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본 없이 찍어… 아날로그 감성을 좋게 봐주신 게 아닐까요”
⊙ “성공 비결은 일기 쓰기… 큰 성공을 이룬 시기엔 늘 일기를 썼다”
⊙ 10년 전에 만난 웰시코기 3형제와 지금도 한가족… “개한테도 의리를 못 지키면 그게 사람인가요”
⊙ “정치권 영입 제안 있었지만 생각도 안 해… 저는 제 능력을 알아요”
⊙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은사람들 매각 않고 굴지의 회사로 만들고 싶어”
⊙ 25년 전 그 사건… “증거 조작하고 사건으로 몰고 간 사람들 아직도 용서 못 해”
朱炳進
1958년생. 중앙대 연극영화과 졸업 / 1977년 TBC 전속 개그맨으로 데뷔, 〈일요일 밤의 대행진〉 〈일요일 일요일 밤에〉 〈주병진쇼〉 〈주병진 나이트쇼〉 〈주병진의 데이트라인〉 〈개밥 주는 남자〉 등 출연 / (주)좋은사람들 창업 / 《건방을 밑천으로 쏘주를 자산으로》 출간
⊙ “성공 비결은 일기 쓰기… 큰 성공을 이룬 시기엔 늘 일기를 썼다”
⊙ 10년 전에 만난 웰시코기 3형제와 지금도 한가족… “개한테도 의리를 못 지키면 그게 사람인가요”
⊙ “정치권 영입 제안 있었지만 생각도 안 해… 저는 제 능력을 알아요”
⊙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은사람들 매각 않고 굴지의 회사로 만들고 싶어”
⊙ 25년 전 그 사건… “증거 조작하고 사건으로 몰고 간 사람들 아직도 용서 못 해”
朱炳進
1958년생. 중앙대 연극영화과 졸업 / 1977년 TBC 전속 개그맨으로 데뷔, 〈일요일 밤의 대행진〉 〈일요일 일요일 밤에〉 〈주병진쇼〉 〈주병진 나이트쇼〉 〈주병진의 데이트라인〉 〈개밥 주는 남자〉 등 출연 / (주)좋은사람들 창업 / 《건방을 밑천으로 쏘주를 자산으로》 출간
- 사진=조준우
반세기 가까이 대중의 시선 속에서 살아온 삶은 과연 어떤 세계일까. 방송인이자 사업가 주병진 얘기다. 그는 최근 tvN의 〈이젠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프로그램에 출연 중이다. 여성들과 맞선을 보는 내용이다.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다. 방송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오자마자 조회수 수만 회를 거뜬히 넘긴다. 어떤 영상은 100만 회, 200만 조회수를 넘겼다. 댓글도 수천 개씩 달린다. 어떤 여성이 주병진에게 더 어울리는지 댓글창에서 토론이 벌어진다. 읽다 보면 온 국민이 주병진의 어머니, 누이 아닌가 싶다. 60대 남성의 사랑 찾기에 이 정도로 관심이 몰리는 이유는 뭘까. 지난해 12월 6일 서울 상암동 집에서 그를 만났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
― 방송 반응이 엄청나더군요.
“이게 무슨 일이지 싶어요.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굉장히 고민했거든요. 주책이라 생각했는데 다들 좋아해 주시네요.”
― 댓글도 읽어보나요.
“일부는 봅니다. 시청자들 반응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려고요. 많은 분이 저를 응원해 주신다는 걸 알았어요.”
사실 인터뷰 당시 그는 한창 이사 준비 중이었다. 혼자 살던 서울 상암동의 펜트하우스를 매각한 것이었다. 집안을 둘러보니 포장 중인 이삿짐 상자들이 놓여 있었다. 인터뷰 직후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다.
“넓은 집, 좋은 집에서 사는 게 꿈이었어요. 살아봤으니 이제 현실로 돌아가는 겁니다. 가족이 생길 줄 알았는데 안 생겼어요. 혼자 큰 집에 있으려니 너무 적적하더군요.”
그의 집은 방송에도 여러 번 소개됐다. 아마 전 국민이 한 번쯤은 그의 집 구경을 했을 터다. 그가 웰시코기 삼 형제 ‘대·중·소’를 입양해 키우는 방송 프로그램(〈개밥 주는 남자〉, 채널A)의 배경이기도 했다.
― 대·중·소는 잘 있나요.
“반려견 호텔에 있어요. 저 혼자 세 마리를 돌보기 힘들더라고요. 제때 밥 주는 것도, 매일 산책시키는 것도요. 개들도 고생이고 저도 고생이었어요. 털도 문제였어요. 세 마리의 털이 공중에 떠다니고, 바닥에 깔리는데 기관지가 안 좋아지더라고요. 같이 돌볼 가족이 없으니 어떡해요. 어쩔 수 없이 호텔로 보냈어요. 일주일에 한두 번 제가 호텔로 가요. 애들 데리고 뒷산에 가서 2시간씩 운동시키고 옵니다. 떨어져 살지만 우리는 가족이라는 걸 개들도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개한테도 의리를 못 지키는 게 인간입니까”
― 막내 소는 아팠지요?
“거대식도증을 앓았어요. 방송할 때 이미 1년 6개월밖에 못 산다고 했어요. 7~8년을 더 살고 떠났어요. 동물병원에서 그랬어요. 삶의 의지가 굉장히 강한 아이라고요.”
― 대·중·소를 2015년에 입양했으니 벌써 10여 년이 흘렀네요.
“원래 한 마리만 키우기로 하고 방송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세 마리를 가져다 놨더라고요. 일단 첫날 녹화는 끝내고 연출자에게 항의했어요. ‘내가 세 마리를 어떻게 돌보나.’ 나중에 방송 마치면 누가 데려갈지 정해놨다는 겁니다. 제가 말했죠. ‘그게 무슨 소리냐, 정이 들면 어떡할 거냐.’ 개한테도 의리를 못 지키는 게 인간입니까. 결국 제가 키울 수밖에 없게 됐지요.”
대·중·소라니 다소 성의 없는 작명 아닌가 싶었는데 기억하기 쉬운 이름 덕인지 시청자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다. 한국에서 웰시코기로는 가장 유명한 개들이 아닌가 싶다.
“개들이 이 집에서 자랐잖아요. 어린 시절 추억이 있는 집이니 이사 가기 전에 데리고 올 거예요. 사나흘 같이 보내려고요. 이 집에서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니까요.”
― 강아지 키우는 프로그램도, 맞선 방송도 큰 사랑을 받았네요.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유독 잘 맞나 봅니다.
“제가 방송에서 멀어져 있는 동안 방송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한 프로그램을 진두지휘할 능력이 있는 사회자가 진행하는 식이었어요. 50분짜리 방송이라면 65분, 길면 70분 동안 촬영했어요. 그러니 출연진의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좌우됐죠. 그러다 다중 MC 시대가 도래했어요. 네 명, 다섯 명…. 장비가 발전하고 자본이 투입되다 보니 1시간짜리 방송을 5시간, 6시간 촬영해 만들어내요.”
― 〈런닝맨〉이니 〈무한도전〉 〈1박 2일〉 같은 예능 프로그램이 다 그런 식이죠.
“방송 PD의 기획 능력이 중요해진 겁니다. 제작진과 카메라를 많이 투입해 장시간 녹화하면 일정 수준 이상은 나오거든요. 그러니 실패가 없어요. 자연스럽지는 않아요. 현실에 없는 인위적인 속도감인 거죠. 시청자의 감정이 그걸 따라가야 되니 속도감이 높아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사회적인 문제가 될 수 있어요.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상황인데, 그게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처럼 편집을 하니 방송이 너무 자극적인 거예요. 시청하는 이들이 폭력적인 성향을 띠게 될 수도 있는 거죠. 가령 고양이를 고층 아파트에서 던진다든가, 햄스터를 믹서기에 가는 영상을 만든다든가 하는 게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인기 비결은 아날로그 감성”
― 그럴 수 있겠네요.
“그런데 저는 예전 감성으로 방송을 합니다. 이번 맞선 방송도 그래요. 카메라 여러 대로 오랜 시간 찍는 게 아니에요. 대본도 없어요. 한 줄 정도 방향 설정은 있죠. ‘이번엔 옛사랑 얘기를 하면 어떨까?’ 저도 당일 무슨 얘기가 오갈지 몰라요. 녹화 들어가기 직전이 돼서야 생각하죠. ‘오늘 좋은 이야기들이 오가길 바랍니다.’ 마치 예전에 일본인들이 〈겨울 연가〉에 반했듯 아날로그 감성을 좋게 봐주신 게 아닐까요.”
― 사회 변화 탓도 있겠죠. 평균 연령이 고령화된데다, 결혼 연령도 올라갔잖아요. 중년의 사랑에 관심이 많아진 거죠.
“그렇죠. 정작 부부간의 사랑은 뜨뜻미지근해진 경우가 많고요. 저를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 주병진씨의 행복을 기원하는 댓글이 많아서 놀랐어요. 어떤 댓글에선 진심이 느껴지더군요.
“저의 상처를 의식해 저를 감싸주시려는 마음을 많이 느껴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랬다. 그는 오랫동안 상처 속에 침잠(沈潛)했었다. 이걸 지켜본 이들이 느끼는 안타까움, 혹은 어떤 미안함이 끝없이 이어지는 응원 댓글로 드러난 게 아닐까. 마치 배우 최진실이 남기고 간 두 남매 준희·환희에게 국민들이 피붙이 같은 애잔함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그의 상처를 알려면 그가 걸어온 길을 알아야 한다.
한국형 스탠드업 코미디 개척
주병진은 1977년 TBC 전속 코미디언으로 방송에 데뷔했다. 〈청춘행진곡〉 〈일요일 밤의 대행진〉 등의 방송에 출연하며 코미디 시대를 견인했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를 진행하며 방송인으로서 최전성기를 보냈다. 이후에도 〈주병진쇼〉 〈주병진의 데이트라인〉 등을 진행하며 화제를 낳았다.
그의 이름에는 ‘개그계의 신사’라는 수식어가 붙곤 했다. 세련된 정장 차림의 젠틀한 이미지에 입담을 더해 한국형 스탠드업 코미디를 개척했다. 미국의 토크쇼 진행자 코난 오브라이언이나 제이 리노를 생각하면 된다.
― 다른 개그맨들 얘기를 들으니, 방송사 PD가 신처럼 대접받던 시절 동료들과 달리 PD들에게 당당했다고요.
“그때는 제작진이 연예인을 인부 대하듯 했어요. 출연진이 실수를 하면 공개적으로 욕을 하고, 연습 도중 뺨도 때렸어요.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굉장히 화가 났죠. 구봉서 선생님부터 쫙 계신데 거기서 막내인 제가 나설 수도 없고요. 너무 싫었어요.”
― 당당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뭔가요.
“주종(主從)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저는 방송에 나갈 때 어떻게 연기를 할지 제가 결정했어요. 대본을 직접 쓰기도 했고요. 부당한 요구를 하면 단호하게 거절했죠. 인사를 했는데 거들떠도 안 본다든가 출연진을 존중하지 않는 PD와는 일하지 않았어요.”
―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온 건가요.
“무모했던 거 아닐까요.”
돌이켜보면 당시 그의 방송 스타일은 유일무이했다. 개그맨, MC 어떨 때는 아나운서 같기도 했다. 그런 유일함이 자신감의 원천 아니었을까. 그를 만나 대화하며, 그 시절 그가 개그를 잘하는 아나운서처럼 비친 이유를 깨달았다. 일단 발음과 발성이 좋다. 다독가일까. 책을 많이 읽으면 발음이 좋아지기도 한다.
― 책을 많이 읽나요.
“책보다는 신문을 읽어요. 《조선일보》를 보는데 요즘엔 신문을 소리 내서 읽어요. 그 재미가 쏠쏠합니다.”
― 책은 안 읽고요?
“책을 그리 많이 읽는 편은 아니에요. 일기를 많이 씁니다. 열여덟, 열아홉 때부터 썼어요. 자꾸 쓰다 보니 문장 구성력이 좋아진 것 같아요. 한창 사회에 진입해서 혈기 왕성할 때 일기 쓰는 게 굉장히 도움이 됐어요.”
― 어떻게 도움이 됐나요.
“나를 점검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일기를 쓰며 새로운 구상도 많이 했고요. 잠자리 들기 전 항상 내 마음의 방 안에서 나를 만나고 대화하는 시간이 참 좋았어요. 가장 큰 발전을 한 시기엔 늘 일기를 썼던 것 같아요. 다시 일기를 써볼까 싶어요. 이삿짐 정리하는데 예전 일기장들이 나오더라고요.”
― 뭐라고 쓰여 있던가요.
“내 앞에 펼쳐진 상황에 대한 평가와 내가 잘못한 것들,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들이죠. 살 뺀다는 말을 매일 썼더라고요.”
정치권 제안 거절
― 비만했던 시절이 있나요.
“85kg까지 나간 적도 있어요. 지속적으로 체중 관리를 했죠.”
― 관리 비결이 뭔가요.
“운동이죠. 유산소운동과 근력운동을 꾸준히 합니다. 집 근처에 하늘공원과 난지공원이 있어요. 한 바퀴 돌면 7km 정도 됩니다. 매일 뛰었어요. 예전엔 마라톤도 했어요. 장재근 선수와 함께 제주 서귀포에서 파주 임진각까지 국토종단 마라톤을 하기도 했지요. 심장병 어린이를 돕는 행사였어요. 두 번 했죠. 그 행사로 심장병 어린이 13명이 수술을 받았어요.”
― 정치권에서 영입 제의는 없었나요.
“한두 번 받았어요. 한 다리 건너 조심스럽게 오더라고요. 저는 그 정도로 똑똑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기 때문에 생각조차 안 했어요. 워낙 그쪽에 관심도 없고요.”
― 어느 당이었나요.
“보수 쪽이었어요. 정치하다 망가진 사람 많잖아요. 저는 제 능력을 알아요.”
그의 눈은 늘 사업으로 향해 있었다. 그의 첫 사업은 ‘신문배달’이었다.
“중학생 때 신문배달을 했어요. 워낙 집이 못 살아서 용돈 벌려고요. 사직동에서 《한국일보》를 돌렸어요. 혼자 365부를 맡았죠. 보급소에서 신문을 떼와서 돌린 다음 대금을 받아 보급소에 신문값을 주고 남는 돈은 제가 갖는 식이에요. 일종의 대리점이죠. 볼지 안 볼지 애매한 집에도 신문을 일단 넣었어요. 구독료를 못 받으면 일단 손해인데, 그런 집엔 일부러 신문을 넣었다 안 넣었다 했어요.”
― 왜요?
“애간장을 태우는 거죠. 나중에 ‘제대로 넣어줄 테니 반값에 보세요’라고 제안해요. 받아들이면 절반이라도 건지잖아요. 그런 아이디어가 떠오르더라고요. 그때는 정육점에서 신문지로 고기를 싸줬어요. 그래서 신문이 남으면 정육점에 넘겨주고 용돈을 받기도 하고요. 군인 차가 지나가면 읽으라고 대여섯 부씩 던져줬어요.”
― 사장이었네요.
“제 구역의 사장이었죠.”
속옷업계 1위 평정
방송 활동을 하던 그는 서울 방배동에 카페를 차린다. 이름은 ‘제임스딘’. 금세 방배동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사업에 눈을 뜬 그는 속옷 시장에 뛰어든다. 그가 창업한 회사 ‘좋은사람들’은 속옷 시장을 평정하고 업계 1위에 등극했다.
― 매출이 가장 높았을 때 얼마까지 기록했나요.
“요새 매출 계산하는 식으로 따지면 3000억원 중후반대를 기록한 적도 있어요.”
― 남성 속옷 중 드로어즈와 트렁크를 대중화한 게 좋은사람들이었죠.
“한국엔 원래 드로어즈나 트렁크가 거의 없었어요. 흔하지 않았죠. 외국 다녀온 사람들이나 입었고요. 외국에서 골프장 샤워실이나 사우나에 가보면 삼각팬티를 많이 안 입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했죠. 왜 우리나라만 삼각팬티를 많이 입을까. 드로어즈, 트렁크 시장이 커질 거라 생각했어요. 제품을 만들어서 광고를 했어요. 바로 터지더라고요. 그런 속옷을 기다렸던 거예요. 시중 공급이 없으니 사람들의 욕구가 억눌려 있었던 거죠.”
드로어즈는 몸에 달라붙는 짧은 반바지 형태의 속옷을 말한다.
― 여러 브랜드를 만들었죠? 보디가드, 제임스딘이 생각나네요.
“그때만 해도 유아부터 성인까지 한 브랜드의 속옷을 입었단 말이에요. 예를 들면 남자는 아기 때부터 성인까지 ‘빅맨’을 입는 식으로요. 시장을 세분화해 봤어요. 고가(高價)더라도 세련된 속옷을 선호하는 이들을 위한 제임스딘, 대중적인 패밀리 언더웨어인 보디가드, 섹시한 속옷인 섹시쿠키 같은 식으로요.”
― 브랜드 명은 누가 지었나요.
“제가 다 지었어요. 좋은사람들이라는 회사 이름도 그렇고요. 그때는 회사명을 한자로만 지었거든요. 좋은사람들 이후로 회사 이름의 새로운 장르가 생겼어요.”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 큰 사랑을 받은 ‘몰래카메라’라는 코너 명도 그가 지었단다.
전신 누드로 광고 출연
“광고 카피도 제가 썼어요. ‘바지 속의 정장, 오늘밤 무장하십시오’ 이건 보통 속옷이 아니다, 특별한 날 입는 팬티라는 의미로요. 밖에서만 정장을 입을 게 아니라 팬티도 정장 수준으로 입어야 된다는 의미였죠. 지금 생각해도 잘 쓴 카피 같아요.”
― 그렇네요.
“연(年) 50억~60억원 정도로 매출이 올라가니 광고를 해서 박차고 일어나고 싶더라고요. 그때도 광고비가 비쌌거든요. 저렴하게 사람들이 선호하는 광고를 만들 수 없을까 고민했어요. 그때는 사람들이 스포츠신문을 많이 봤어요. 그런데 거기에 실리는 만화를 사람들이 찾아서 보는 거예요. 광고도 사람들이 찾아서 보게 할 수 없을까 싶었어요. ‘내가 잘하는 게 개그 대본 쓰는 거니, 그걸 이용해야겠다’ 싶어 똑같은 자리에 매일 지면을 사서 카피를 매번 바꾸면서 연재를 했어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광고를 찾아보기 시작하더라고요.
단연 최고는 누드 광고였다. 정장 차림으로 신문 지면 광고에 직접 등장해 ‘몇월 며칠에는 속옷만 입고 나오겠다’고 한 다음 정말 속옷 차림으로 등장했다. 그러곤 다시 ‘몇월 며칠엔 누드로 등장하겠다’고 공언했다. 파장이 엄청났다. 회사로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약속을 지켰다. 예고한 날 누드 사진을 공개했다. 단 돌잔치 때 찍은 누드 사진이었다. 사실 본인이 아닌 직원의 어린 시절 사진이었다고 한다.
광고 카피도 직접 써
― 지금은 그 회사가 예전 같지 않지요?
“속옷 시장 자체가 죽어버렸어요. 제가 경영하던 시기엔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나갔는데 지금은 시장 창출 능력이 없는 것 같아요. 중국산 저가 제품들이 들어오니 속옷이 생필품으로 전락했어요. 제가 좋은사람들을 경영할 때는 패션성을 가미해 입고 싶은 속옷 시장으로 만들었거든요.”
― 아쉽네요.
“무일푼으로 시작해 쌍방울, 태창을 따라잡고 시장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어요. 그 시절 함께했던 직원들은 좋은사람들 다닐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그때는 회사가 매년 100%, 200% 심지어 300%씩 성장할 때도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20년을 경영했어요. 요즘도 직원들을 만나요. 부서별로 오비(OB) 모임이 있거든요. 동창 모임 같고 분위기가 좋아요. 만약 과거로 돌아가 한 순간을 바꿀 수 있다면 좋은사람들을 매각하기 전으로 돌아가 굴지의 회사로 만들고 싶어요.”
그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완벽주의자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단어를 고르는 게 느껴졌다. 습관처럼 자기 검열을 하는 건 아닌지 물었다.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하도 당해서 그럽니다. 저를 건드리면 유명해질 거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진 이들과 살면서 자주 마주쳤어요. 이런저런 사건들이 있었잖아요. 대부분 제가 당한 경우였어요.”
― 한때 ‘인터넷 살인미수죄’라는 죄목을 만들어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죠. 그런 이유에선가요.
“저에게 큰 사건이 있었잖아요.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글을 쓰고, 그릇된 정보가 제공되면서 잘못된 여론이 조성됐어요.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큰 상처가 됩니다. 몸에 나는 상처는 언젠간 아물지만, 마음에 생긴 상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의 정신은 고통 속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목숨까지 끊을 수도 있어요. 실명제든, 다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익명성에 숨어 함부로 댓글을 다는 행태는 막아야 한다 생각해요.”
그가 말하는 큰 사건은 이거다. 사업가로 크게 활약하고 있던 2000년, 주병진은 여대생 강간범으로 몰린다.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요즘 말로 ‘피해호소인’ 강모씨에게 주병진의 변호사가 합의금을 준 게 유죄 정황으로 인정됐다.
1심 이후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강씨가 여대생이 아니라 룸살롱 종업원이었고, 이 여성의 여동생이 이전에 비슷한 수법으로 다른 이에게 돈을 뜯어낸 사실이 밝혀졌다. 심지어 강씨가 친구에게 얼굴에 상처를 내달라고 한 다음, 주병진에게 폭행을 당한 상처라며 거짓 증언을 한 사실도 공개됐다. 결국 주병진은 2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2002년 대법원도 무죄 취지의 공소 기각 판결을 내렸다.
주병진은 자칭 여대생 강씨와 당시 사건을 보도한 기자, 경찰관 등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냈다. 2007년 대법원은 판결을 내렸다. ‘피고(강씨)는 원고(주병진)에게 정신적 고통에 따른 위자료 1억원을 지급하라.’ 강씨는 미국으로 도주해 버렸다. 주병진은 결백을 인정받았지만 세상은 그의 억울함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자살하려 한남대교로
그의 전쟁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사람들의 시선, 책임지지 않는 댓글들, 회한, 미움 이런 것들과 말이다. 한때 그는 죽음까지 생각했다.
“죽기엔 너무 억울했지만 도저히 이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못 찾겠더라고요. 자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때 알겠더군요. 새벽 1시쯤 한남대교에 갔어요. 대교 위를 걸었어요. 그날 뛰어내리려 간 건 아니고, 뛰어내리는 사람들의 심리가 궁금했어요. 자살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었던 거죠. 근데 이미 먼저 와 있는 손님이 있더라고요.”
― 무슨 손님인가요.
“한 남성이 난간에 앉아 있더라고요. 한 다리는 도로 쪽에 다른 쪽은 강물 쪽으로 놓고 이쪽저쪽으로 몸을 흔들더라고요. 술에 취해 있었어요. 뒤쪽에서 살살 걸어서 접근했습니다. 반대쪽을 보고 있을 때 확 움켜잡고 끌어내렸죠. 엄청 놀라더군요. 끌어내리고 나니 난간 앞에 신발과 편지가 보여요.”
― 진짜 죽으려 한 거네요.
“편지를 읽어보니 여자친구 집에서 교제를 반대한다는 이유였어요. 속으로 생각했죠. ‘아이고,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데리고 다리를 건너와서 같이 포장마차에서 술 한잔하고 헤어졌어요. ‘열심히 살자, 죽지 말자’고 하면서요. 그 말이 결국 나한테 한 말이 돼버렸지.”
“결국 마음에 품고 떠나야 해요”
― 25년 전 일인데 아직도 극복이 안 됐나요.
“극복이 안 돼요. 결국 마음에 품고 세상을 떠나야 해요. 살아 있을 때 얼마만큼 유연하게 추억을 만들지, 그게 과제인 것 같아요.”
― 요즘 젊은 세대들은 일단 그 일 자체를 잘 몰라요. 최근 출연한 프로그램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보면, 대중은 이미 그 사건을 극복한 것 아닐까요? 혼자 못 빠져나오고 계신 것 같네요.
“그 사건 때문에 많이 힘들었고 자존심도 상했어요. 갈등했던 그 시간이 너무 아까운 겁니다. 그것 때문에 힘들었던 시간이 대체 몇 년이에요.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청와대 뒷산에 오래전부터 호랑이가 한 마리 살고 있었어요. 어떤 기자가 기사를 써요. ‘여기 위험한 호랑이가 살고 있다.’ 그러면 경찰이 출동을 해요. ‘얼른 잡아야 한다.’ 결국 호랑이를 몰아서 죽여버려요. 제 얘기처럼 느껴졌어요.”
― 왜요?
“당시 수사하는 사람들은 이걸 큰 사건으로 만들려고 엄청나게 노력했어요. 심지어 당시 경찰 병원에서 수사를 위해 체액 검사를 했는데, 제 체액이 아니었어요. 다른 사람 거였던 겁니다.”
― 그게 사실이라면 증거 조작인데요.
“주병진이 피해자를 때린 상처라며 경찰관이 증거 사진을 찍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사진이 나오는 거예요. 그랬더니 소독약을 발라서 마치 멍든 것처럼 보이게 찍기도 했어요. 그걸 발라준 병원 간호사가 후에 인터뷰를 통해 고백했어요.”
무죄 취지의 판결을 받은 직후 그가 경찰관, 의사를 상대로 소송을 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차 안에서 제가 무슨 행위를 한 것도 없어요. 그런데 재밌는 사건이잖아요. 막 몰아붙이는 겁니다. 변두리 연애 주간지는 거짓말한 그 여성을 만나서 인터뷰하고 연재를 했어요. 제가 그 기자를 고소해 끝끝내 손해배상을 받았어요. 그 돈으로 불우이웃을 도왔지요.”
― 요즘 말로 ‘금융 치료’네요.
“그때는 거의 삶을 포기했었어요. 무죄를 받았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자존심이 상해서 방송도 안 했어요. 사업도 동생에게 맡겼어요. 세상이 너무 싫었어요. 사람이 무섭고 여자가 무섭고 세상이 너무너무 두려웠어요. 사랑을 하는 방법도 완전히 잊어버렸어요. 사업도 흔들리기 시작했죠. 제가 집중을 못 하니까요.”
결국 그는 2008년 좋은사람들의 주식과 경영권을 매각했다.
― 사건의 여파가 컸네요.
“인생 전체가 흔들린 겁니다. 귀찮고 죽고 싶은 생각밖에 안 들어요. 이민 가려고도 했어요. 미국으로요.”
― 왜 안 갔나요.
“수속을 밟고 있는데, 아이고, 어머니가 있잖아요. 혼자만의 고민에 둘러싸여 어머니를 잊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이민 가버리면 어머니 혼자 남게 된다. 이게 장남으로 도리인가’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떠나지 말고 마음을 추슬러 잘 싸워나가 보자, 상처를 치유해 보자 생각했지요.”
― 치유했나요.
“초기엔 복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엔 보답을 하자고 마음을 바꿨죠. ‘보답의 방법은 내가 잘되는 길밖에 없다….’”
― 누구에게 보답을 한다는 건가요.
“제가 용서를 구해야 하는 사람들, 저한테 용서를 구해야 하는 사람들 모두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 그래서 좀 편해졌나요.
“요즘에도 가끔 악몽을 꿔요.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 초조감 이런 것들에 놀라 자다 깨고, 다시 잠들고… 용서하면 편안해진다고 하니 용서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진 잘 희석해서 깨끗하게 만들려 해요. 저승에서까지 괴로우면 안 되니까요.”
유명인 뜯어먹는 집단
그의 말을 듣다 보니 문득 이선균이 떠올랐다. 이선균은 마약 투약 의혹으로 수사를 받던 중 2023년 12월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에서도 유명세를 볼모로 돈을 뜯으려 한 수상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이선균 또한 지옥 같은 삶이었을 것이다. 한밤중에 혼자 악몽에서 깨어나는 삶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서둘러 세상을 떠났을까.
― 이선균씨도 경찰서에 세 차례 소환되며 포토라인에 서야 했지요. 억울함을 호소한 후 그런 선택을 했고요. 이선균씨를 보며 어떤 마음이었나요.
“저는 그 마음을 아니까요. 어렴풋이… 최악의 상황이 펼쳐질까 봐 굉장히 우려했어요. 얼마나 가슴이 터질 것 같았으면 생명을 던지면서 탈출했겠어요. 너무 안타까워요.”
― 용서가 참 힘들죠. 그때 무고(誣告)를 한 강씨는 지금도 미국에서 잘 사는 모양입니다. 미국 동포들 통해 근황이 간혹 알려지더군요.
“저는 그 사람을 원망하지 않아요. 원망해서 뭐하겠어요? 나이 어리고 생각이 짧았던, 돈밖에 몰랐던 아이였던 겁니다. 그런 환경에서 살았던 사람이라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하고 있어요. 하지만 유명인을 뜯어먹는 집단들이 있어요. 그런 사건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결코 용서가 안 됩니다. 그들이 싫은 겁니다.”
당시 사건을 보도한 뉴스 영상을 보면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경찰서에서 기자들이 주병진을 둘러싸고 인터뷰를 한다. 어느 기자가 강씨의 이름을 대며 질문을 하자 주병진이 갑자기 단호히 말한다. ‘여성분은 보호되어야 합니다. 이름은 공개하지 마세요.’ 그가 후에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정말 대인배가 아닐 수 없다.
“스스로를 달래며 생각했어요. ‘그래 나보다 10배, 100배 억울한 사람들도 많을 거다. 그 사람들은 얼마나 고생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인간답게 사는 걸 포기하고 죽어갔을까.’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했어요. ‘내가 만약 사건을 조작하는 그 사람들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나도 살기 위해 그들처럼 하지 않았을까….’”
“실어증 앓기도”
― 갖가지 생각을 했군요.
“저는 인연을 잘 안 맺으려 해요. 그 사건 이후로 생긴 습관입니다. 이 사람을 만나면 또 어떤 변수가 작용해서 나를 힘들게 하진 않을지 두려워요. 운동하러 피트니스센터에 가도 고개 숙이고 운동해요. 눈인사하고 말을 걸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떤 이야기가 또 만들어지잖아요. 그러면 또 오해가 생기고 트러블이 일어날 수도 있고요.”
― 인생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네요.
“인생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혼란스러워졌죠.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제 안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겁니다. 제가 원래 진실이 아닌 일을 진실처럼 얘기하는 걸 싫어해요. 그래도 적당히 반응하면 되잖아요. 그 사건 이후엔 과민반응을 하는 겁니다. 경계도 많이 하고요.”
― ‘내가 지금 예민하게 구는구나’ 스스로 느끼나요.
“느껴요. 누가 저에게 가장 가슴 아픈 일을 언급하면 눈이 돌아가기 시작해요. 과민반응을 한다는 걸 제가 알아요. 선풍기에 강·중·약 버튼이 있잖아요. 그 일에 대해선 저는 ‘강’ 버튼밖에 없는 겁니다.”
― 심리 상담을 받아보진 않았나요.
“안 받았어요. 혼자 생각을 많이 했어요. 실어증(失語症)을 앓기도 했고, 공황장애를 겪기도 했어요. 혼자 여행을 자주 다녔어요. 한국에 있으면 자꾸 생각나니까 미국에 가 6개월 정도 머물기도 했어요.”
그가 내뱉는 말들에는 오랜 기간 세월의 톱니바퀴에 갈린 고뇌와 고민들의 조각이 박혀 있는 듯했다.
“제가 인생을 필요 이상으로 신중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은 해요. 너무 신중하게 살면 삶이 무거워져요. 가볍게 살려 노력해요. 남은 세월이 산 날보다 짧다고 생각하니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 같아요. 마무리 단계에선 하나둘씩 잘 정리해서 다 내려놓는 게 작은 목표입니다.”
― 결혼했으면 좋았겠다 싶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제 별명이 애엄마였어요. 아기를 무척 좋아해요. 남의 아기도 이렇게 예쁜데 내 새끼면 얼마나 예쁠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아기가 아빠와 함께 학교 갔을 때 창피하지 않은 나이를 마지노선으로 생각했어요. 그때까지 결혼하려 노력했지요. 이제 포기했어요.”
― 입양을 생각해 본 적은 없나요.
“상상은 해봤어요. 저 혼자 키운다고 생각하니 겁이 나더라고요. 아이가 다 자란 다음 입양됐다는 사실을 알면 심리적으로 아픔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제가 그 정도로 좋은 사람은 아니더라고요.”
― 결혼하려 어떻게 노력했나요.
“그 사건 전이었어요. 한 친구와 결혼하기로 무언 중에 합의가 됐어요. 그러다 갈등이 생겼어요. 그 친구가 ‘그만 만나자’고 하는데 눈물이 막 쏟아지더군요. 이렇게 헤어지면 다시는 사랑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제 인생에 결혼하고 싶었던 여성이 두 명 있었어요. 사랑했던 사람도 두어 명. 그 정도예요.”
― 살아온 세월에 비해 좀 적은 듯하네요.
“결혼은 일생일대 한 번의 승부라고 생각했어요.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지요. 잘 안 사귀었어요. 당시엔 사업에 대한 집념이 강했기 때문에 마음의 틈을 내어주지 않았어요. 누가 좋아지면 항상 간격을 유지하려 노력했죠.”
― 왜요.
“사업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워낙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잘살아봐야겠다, 크게 성공해야겠다고 늘 생각했어요. 섣불리 이성을 만나면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 그 사건 이후로 연애는 전혀 안 했나요.
“못 했어요. 누굴 만나도 덜컥 겁이 났어요. 트라우마라고 할까요.”
그 사건 이후로 연애 못 해

― 검증된 사람을 소개받으면 되잖아요.
“제가 주변에 틈을 주지 않았어요. 내쳤어요.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으니까요.”
― 그렇게 산 걸 후회하나요.
“아니요. 제가 얻고자 했던 것들은 얻었어요.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사랑이 빠진 거예요. 미완성인 겁니다. 물질이 충족됐다고 성공한 삶은 아니라 생각해요. 가족이 없는 집은 껍데기예요. 그래서 이 집 진작 팔고 싶었어요.”
― 이제 이 집을 떠나 새로운 시작이네요. 사랑도 새롭게 시작하고 싶지 않나요.
“조금씩 마음의 모서리가 부드러워지긴 했어요. 그렇지만 결국 못 지우는 얼룩도 있더라고요. 이번 삶에서는 그 흔적들을 완전히 지우진 못할 것 같아요. 저에게 세월이 많이 남아 있다면 어쩌면 할 수 있겠지만 이제는 무리예요. 결국엔 지우지 못하고 가지 않을까. 하지만 제 인생에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면요, 사랑이든 사업이든, 혹은 종교든, 깨달음이든, 모종의 사건이 다시 일어난다면 가볍게 갈 수도 있겠죠. 확률이 높진 않겠지만요.”⊙
새로운 집으로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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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병진은 맞선을 보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 중이다. |
“이게 무슨 일이지 싶어요.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굉장히 고민했거든요. 주책이라 생각했는데 다들 좋아해 주시네요.”
― 댓글도 읽어보나요.
“일부는 봅니다. 시청자들 반응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려고요. 많은 분이 저를 응원해 주신다는 걸 알았어요.”
사실 인터뷰 당시 그는 한창 이사 준비 중이었다. 혼자 살던 서울 상암동의 펜트하우스를 매각한 것이었다. 집안을 둘러보니 포장 중인 이삿짐 상자들이 놓여 있었다. 인터뷰 직후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다.
“넓은 집, 좋은 집에서 사는 게 꿈이었어요. 살아봤으니 이제 현실로 돌아가는 겁니다. 가족이 생길 줄 알았는데 안 생겼어요. 혼자 큰 집에 있으려니 너무 적적하더군요.”
그의 집은 방송에도 여러 번 소개됐다. 아마 전 국민이 한 번쯤은 그의 집 구경을 했을 터다. 그가 웰시코기 삼 형제 ‘대·중·소’를 입양해 키우는 방송 프로그램(〈개밥 주는 남자〉, 채널A)의 배경이기도 했다.
― 대·중·소는 잘 있나요.
“반려견 호텔에 있어요. 저 혼자 세 마리를 돌보기 힘들더라고요. 제때 밥 주는 것도, 매일 산책시키는 것도요. 개들도 고생이고 저도 고생이었어요. 털도 문제였어요. 세 마리의 털이 공중에 떠다니고, 바닥에 깔리는데 기관지가 안 좋아지더라고요. 같이 돌볼 가족이 없으니 어떡해요. 어쩔 수 없이 호텔로 보냈어요. 일주일에 한두 번 제가 호텔로 가요. 애들 데리고 뒷산에 가서 2시간씩 운동시키고 옵니다. 떨어져 살지만 우리는 가족이라는 걸 개들도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개한테도 의리를 못 지키는 게 인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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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병진은 〈개밥 주는 남자〉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웰시코기 3마리를 입양했다. 사진=유튜브 캡처 |
“거대식도증을 앓았어요. 방송할 때 이미 1년 6개월밖에 못 산다고 했어요. 7~8년을 더 살고 떠났어요. 동물병원에서 그랬어요. 삶의 의지가 굉장히 강한 아이라고요.”
― 대·중·소를 2015년에 입양했으니 벌써 10여 년이 흘렀네요.
“원래 한 마리만 키우기로 하고 방송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세 마리를 가져다 놨더라고요. 일단 첫날 녹화는 끝내고 연출자에게 항의했어요. ‘내가 세 마리를 어떻게 돌보나.’ 나중에 방송 마치면 누가 데려갈지 정해놨다는 겁니다. 제가 말했죠. ‘그게 무슨 소리냐, 정이 들면 어떡할 거냐.’ 개한테도 의리를 못 지키는 게 인간입니까. 결국 제가 키울 수밖에 없게 됐지요.”
대·중·소라니 다소 성의 없는 작명 아닌가 싶었는데 기억하기 쉬운 이름 덕인지 시청자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다. 한국에서 웰시코기로는 가장 유명한 개들이 아닌가 싶다.
“개들이 이 집에서 자랐잖아요. 어린 시절 추억이 있는 집이니 이사 가기 전에 데리고 올 거예요. 사나흘 같이 보내려고요. 이 집에서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니까요.”
― 강아지 키우는 프로그램도, 맞선 방송도 큰 사랑을 받았네요.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유독 잘 맞나 봅니다.
“제가 방송에서 멀어져 있는 동안 방송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한 프로그램을 진두지휘할 능력이 있는 사회자가 진행하는 식이었어요. 50분짜리 방송이라면 65분, 길면 70분 동안 촬영했어요. 그러니 출연진의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좌우됐죠. 그러다 다중 MC 시대가 도래했어요. 네 명, 다섯 명…. 장비가 발전하고 자본이 투입되다 보니 1시간짜리 방송을 5시간, 6시간 촬영해 만들어내요.”
― 〈런닝맨〉이니 〈무한도전〉 〈1박 2일〉 같은 예능 프로그램이 다 그런 식이죠.
“방송 PD의 기획 능력이 중요해진 겁니다. 제작진과 카메라를 많이 투입해 장시간 녹화하면 일정 수준 이상은 나오거든요. 그러니 실패가 없어요. 자연스럽지는 않아요. 현실에 없는 인위적인 속도감인 거죠. 시청자의 감정이 그걸 따라가야 되니 속도감이 높아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사회적인 문제가 될 수 있어요.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상황인데, 그게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처럼 편집을 하니 방송이 너무 자극적인 거예요. 시청하는 이들이 폭력적인 성향을 띠게 될 수도 있는 거죠. 가령 고양이를 고층 아파트에서 던진다든가, 햄스터를 믹서기에 가는 영상을 만든다든가 하는 게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인기 비결은 아날로그 감성”
― 그럴 수 있겠네요.
“그런데 저는 예전 감성으로 방송을 합니다. 이번 맞선 방송도 그래요. 카메라 여러 대로 오랜 시간 찍는 게 아니에요. 대본도 없어요. 한 줄 정도 방향 설정은 있죠. ‘이번엔 옛사랑 얘기를 하면 어떨까?’ 저도 당일 무슨 얘기가 오갈지 몰라요. 녹화 들어가기 직전이 돼서야 생각하죠. ‘오늘 좋은 이야기들이 오가길 바랍니다.’ 마치 예전에 일본인들이 〈겨울 연가〉에 반했듯 아날로그 감성을 좋게 봐주신 게 아닐까요.”
― 사회 변화 탓도 있겠죠. 평균 연령이 고령화된데다, 결혼 연령도 올라갔잖아요. 중년의 사랑에 관심이 많아진 거죠.
“그렇죠. 정작 부부간의 사랑은 뜨뜻미지근해진 경우가 많고요. 저를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 주병진씨의 행복을 기원하는 댓글이 많아서 놀랐어요. 어떤 댓글에선 진심이 느껴지더군요.
“저의 상처를 의식해 저를 감싸주시려는 마음을 많이 느껴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랬다. 그는 오랫동안 상처 속에 침잠(沈潛)했었다. 이걸 지켜본 이들이 느끼는 안타까움, 혹은 어떤 미안함이 끝없이 이어지는 응원 댓글로 드러난 게 아닐까. 마치 배우 최진실이 남기고 간 두 남매 준희·환희에게 국민들이 피붙이 같은 애잔함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그의 상처를 알려면 그가 걸어온 길을 알아야 한다.
한국형 스탠드업 코미디 개척
주병진은 1977년 TBC 전속 코미디언으로 방송에 데뷔했다. 〈청춘행진곡〉 〈일요일 밤의 대행진〉 등의 방송에 출연하며 코미디 시대를 견인했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를 진행하며 방송인으로서 최전성기를 보냈다. 이후에도 〈주병진쇼〉 〈주병진의 데이트라인〉 등을 진행하며 화제를 낳았다.
그의 이름에는 ‘개그계의 신사’라는 수식어가 붙곤 했다. 세련된 정장 차림의 젠틀한 이미지에 입담을 더해 한국형 스탠드업 코미디를 개척했다. 미국의 토크쇼 진행자 코난 오브라이언이나 제이 리노를 생각하면 된다.
― 다른 개그맨들 얘기를 들으니, 방송사 PD가 신처럼 대접받던 시절 동료들과 달리 PD들에게 당당했다고요.
“그때는 제작진이 연예인을 인부 대하듯 했어요. 출연진이 실수를 하면 공개적으로 욕을 하고, 연습 도중 뺨도 때렸어요.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굉장히 화가 났죠. 구봉서 선생님부터 쫙 계신데 거기서 막내인 제가 나설 수도 없고요. 너무 싫었어요.”
― 당당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뭔가요.
“주종(主從)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저는 방송에 나갈 때 어떻게 연기를 할지 제가 결정했어요. 대본을 직접 쓰기도 했고요. 부당한 요구를 하면 단호하게 거절했죠. 인사를 했는데 거들떠도 안 본다든가 출연진을 존중하지 않는 PD와는 일하지 않았어요.”
―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온 건가요.
“무모했던 거 아닐까요.”
돌이켜보면 당시 그의 방송 스타일은 유일무이했다. 개그맨, MC 어떨 때는 아나운서 같기도 했다. 그런 유일함이 자신감의 원천 아니었을까. 그를 만나 대화하며, 그 시절 그가 개그를 잘하는 아나운서처럼 비친 이유를 깨달았다. 일단 발음과 발성이 좋다. 다독가일까. 책을 많이 읽으면 발음이 좋아지기도 한다.
― 책을 많이 읽나요.
“책보다는 신문을 읽어요. 《조선일보》를 보는데 요즘엔 신문을 소리 내서 읽어요. 그 재미가 쏠쏠합니다.”
― 책은 안 읽고요?
“책을 그리 많이 읽는 편은 아니에요. 일기를 많이 씁니다. 열여덟, 열아홉 때부터 썼어요. 자꾸 쓰다 보니 문장 구성력이 좋아진 것 같아요. 한창 사회에 진입해서 혈기 왕성할 때 일기 쓰는 게 굉장히 도움이 됐어요.”
― 어떻게 도움이 됐나요.
“나를 점검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일기를 쓰며 새로운 구상도 많이 했고요. 잠자리 들기 전 항상 내 마음의 방 안에서 나를 만나고 대화하는 시간이 참 좋았어요. 가장 큰 발전을 한 시기엔 늘 일기를 썼던 것 같아요. 다시 일기를 써볼까 싶어요. 이삿짐 정리하는데 예전 일기장들이 나오더라고요.”
― 뭐라고 쓰여 있던가요.
“내 앞에 펼쳐진 상황에 대한 평가와 내가 잘못한 것들,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들이죠. 살 뺀다는 말을 매일 썼더라고요.”
정치권 제안 거절
― 비만했던 시절이 있나요.
“85kg까지 나간 적도 있어요. 지속적으로 체중 관리를 했죠.”
― 관리 비결이 뭔가요.
“운동이죠. 유산소운동과 근력운동을 꾸준히 합니다. 집 근처에 하늘공원과 난지공원이 있어요. 한 바퀴 돌면 7km 정도 됩니다. 매일 뛰었어요. 예전엔 마라톤도 했어요. 장재근 선수와 함께 제주 서귀포에서 파주 임진각까지 국토종단 마라톤을 하기도 했지요. 심장병 어린이를 돕는 행사였어요. 두 번 했죠. 그 행사로 심장병 어린이 13명이 수술을 받았어요.”
― 정치권에서 영입 제의는 없었나요.
“한두 번 받았어요. 한 다리 건너 조심스럽게 오더라고요. 저는 그 정도로 똑똑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기 때문에 생각조차 안 했어요. 워낙 그쪽에 관심도 없고요.”
― 어느 당이었나요.
“보수 쪽이었어요. 정치하다 망가진 사람 많잖아요. 저는 제 능력을 알아요.”
그의 눈은 늘 사업으로 향해 있었다. 그의 첫 사업은 ‘신문배달’이었다.
“중학생 때 신문배달을 했어요. 워낙 집이 못 살아서 용돈 벌려고요. 사직동에서 《한국일보》를 돌렸어요. 혼자 365부를 맡았죠. 보급소에서 신문을 떼와서 돌린 다음 대금을 받아 보급소에 신문값을 주고 남는 돈은 제가 갖는 식이에요. 일종의 대리점이죠. 볼지 안 볼지 애매한 집에도 신문을 일단 넣었어요. 구독료를 못 받으면 일단 손해인데, 그런 집엔 일부러 신문을 넣었다 안 넣었다 했어요.”
― 왜요?
“애간장을 태우는 거죠. 나중에 ‘제대로 넣어줄 테니 반값에 보세요’라고 제안해요. 받아들이면 절반이라도 건지잖아요. 그런 아이디어가 떠오르더라고요. 그때는 정육점에서 신문지로 고기를 싸줬어요. 그래서 신문이 남으면 정육점에 넘겨주고 용돈을 받기도 하고요. 군인 차가 지나가면 읽으라고 대여섯 부씩 던져줬어요.”
― 사장이었네요.
“제 구역의 사장이었죠.”
속옷업계 1위 평정
방송 활동을 하던 그는 서울 방배동에 카페를 차린다. 이름은 ‘제임스딘’. 금세 방배동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사업에 눈을 뜬 그는 속옷 시장에 뛰어든다. 그가 창업한 회사 ‘좋은사람들’은 속옷 시장을 평정하고 업계 1위에 등극했다.
― 매출이 가장 높았을 때 얼마까지 기록했나요.
“요새 매출 계산하는 식으로 따지면 3000억원 중후반대를 기록한 적도 있어요.”
― 남성 속옷 중 드로어즈와 트렁크를 대중화한 게 좋은사람들이었죠.
“한국엔 원래 드로어즈나 트렁크가 거의 없었어요. 흔하지 않았죠. 외국 다녀온 사람들이나 입었고요. 외국에서 골프장 샤워실이나 사우나에 가보면 삼각팬티를 많이 안 입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했죠. 왜 우리나라만 삼각팬티를 많이 입을까. 드로어즈, 트렁크 시장이 커질 거라 생각했어요. 제품을 만들어서 광고를 했어요. 바로 터지더라고요. 그런 속옷을 기다렸던 거예요. 시중 공급이 없으니 사람들의 욕구가 억눌려 있었던 거죠.”
드로어즈는 몸에 달라붙는 짧은 반바지 형태의 속옷을 말한다.
― 여러 브랜드를 만들었죠? 보디가드, 제임스딘이 생각나네요.
“그때만 해도 유아부터 성인까지 한 브랜드의 속옷을 입었단 말이에요. 예를 들면 남자는 아기 때부터 성인까지 ‘빅맨’을 입는 식으로요. 시장을 세분화해 봤어요. 고가(高價)더라도 세련된 속옷을 선호하는 이들을 위한 제임스딘, 대중적인 패밀리 언더웨어인 보디가드, 섹시한 속옷인 섹시쿠키 같은 식으로요.”
― 브랜드 명은 누가 지었나요.
“제가 다 지었어요. 좋은사람들이라는 회사 이름도 그렇고요. 그때는 회사명을 한자로만 지었거든요. 좋은사람들 이후로 회사 이름의 새로운 장르가 생겼어요.”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 큰 사랑을 받은 ‘몰래카메라’라는 코너 명도 그가 지었단다.
전신 누드로 광고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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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사람들은 주병진의 누드 공개를 예고한 광고로 큰 관심을 받았다. |
― 그렇네요.
“연(年) 50억~60억원 정도로 매출이 올라가니 광고를 해서 박차고 일어나고 싶더라고요. 그때도 광고비가 비쌌거든요. 저렴하게 사람들이 선호하는 광고를 만들 수 없을까 고민했어요. 그때는 사람들이 스포츠신문을 많이 봤어요. 그런데 거기에 실리는 만화를 사람들이 찾아서 보는 거예요. 광고도 사람들이 찾아서 보게 할 수 없을까 싶었어요. ‘내가 잘하는 게 개그 대본 쓰는 거니, 그걸 이용해야겠다’ 싶어 똑같은 자리에 매일 지면을 사서 카피를 매번 바꾸면서 연재를 했어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광고를 찾아보기 시작하더라고요.
단연 최고는 누드 광고였다. 정장 차림으로 신문 지면 광고에 직접 등장해 ‘몇월 며칠에는 속옷만 입고 나오겠다’고 한 다음 정말 속옷 차림으로 등장했다. 그러곤 다시 ‘몇월 며칠엔 누드로 등장하겠다’고 공언했다. 파장이 엄청났다. 회사로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약속을 지켰다. 예고한 날 누드 사진을 공개했다. 단 돌잔치 때 찍은 누드 사진이었다. 사실 본인이 아닌 직원의 어린 시절 사진이었다고 한다.
광고 카피도 직접 써
― 지금은 그 회사가 예전 같지 않지요?
“속옷 시장 자체가 죽어버렸어요. 제가 경영하던 시기엔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나갔는데 지금은 시장 창출 능력이 없는 것 같아요. 중국산 저가 제품들이 들어오니 속옷이 생필품으로 전락했어요. 제가 좋은사람들을 경영할 때는 패션성을 가미해 입고 싶은 속옷 시장으로 만들었거든요.”
― 아쉽네요.
“무일푼으로 시작해 쌍방울, 태창을 따라잡고 시장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어요. 그 시절 함께했던 직원들은 좋은사람들 다닐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그때는 회사가 매년 100%, 200% 심지어 300%씩 성장할 때도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20년을 경영했어요. 요즘도 직원들을 만나요. 부서별로 오비(OB) 모임이 있거든요. 동창 모임 같고 분위기가 좋아요. 만약 과거로 돌아가 한 순간을 바꿀 수 있다면 좋은사람들을 매각하기 전으로 돌아가 굴지의 회사로 만들고 싶어요.”
그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완벽주의자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단어를 고르는 게 느껴졌다. 습관처럼 자기 검열을 하는 건 아닌지 물었다.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하도 당해서 그럽니다. 저를 건드리면 유명해질 거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진 이들과 살면서 자주 마주쳤어요. 이런저런 사건들이 있었잖아요. 대부분 제가 당한 경우였어요.”
― 한때 ‘인터넷 살인미수죄’라는 죄목을 만들어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죠. 그런 이유에선가요.
“저에게 큰 사건이 있었잖아요.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글을 쓰고, 그릇된 정보가 제공되면서 잘못된 여론이 조성됐어요.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큰 상처가 됩니다. 몸에 나는 상처는 언젠간 아물지만, 마음에 생긴 상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의 정신은 고통 속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목숨까지 끊을 수도 있어요. 실명제든, 다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익명성에 숨어 함부로 댓글을 다는 행태는 막아야 한다 생각해요.”
그가 말하는 큰 사건은 이거다. 사업가로 크게 활약하고 있던 2000년, 주병진은 여대생 강간범으로 몰린다.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요즘 말로 ‘피해호소인’ 강모씨에게 주병진의 변호사가 합의금을 준 게 유죄 정황으로 인정됐다.
1심 이후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강씨가 여대생이 아니라 룸살롱 종업원이었고, 이 여성의 여동생이 이전에 비슷한 수법으로 다른 이에게 돈을 뜯어낸 사실이 밝혀졌다. 심지어 강씨가 친구에게 얼굴에 상처를 내달라고 한 다음, 주병진에게 폭행을 당한 상처라며 거짓 증언을 한 사실도 공개됐다. 결국 주병진은 2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2002년 대법원도 무죄 취지의 공소 기각 판결을 내렸다.
주병진은 자칭 여대생 강씨와 당시 사건을 보도한 기자, 경찰관 등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냈다. 2007년 대법원은 판결을 내렸다. ‘피고(강씨)는 원고(주병진)에게 정신적 고통에 따른 위자료 1억원을 지급하라.’ 강씨는 미국으로 도주해 버렸다. 주병진은 결백을 인정받았지만 세상은 그의 억울함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자살하려 한남대교로
그의 전쟁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사람들의 시선, 책임지지 않는 댓글들, 회한, 미움 이런 것들과 말이다. 한때 그는 죽음까지 생각했다.
“죽기엔 너무 억울했지만 도저히 이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못 찾겠더라고요. 자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때 알겠더군요. 새벽 1시쯤 한남대교에 갔어요. 대교 위를 걸었어요. 그날 뛰어내리려 간 건 아니고, 뛰어내리는 사람들의 심리가 궁금했어요. 자살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었던 거죠. 근데 이미 먼저 와 있는 손님이 있더라고요.”
― 무슨 손님인가요.
“한 남성이 난간에 앉아 있더라고요. 한 다리는 도로 쪽에 다른 쪽은 강물 쪽으로 놓고 이쪽저쪽으로 몸을 흔들더라고요. 술에 취해 있었어요. 뒤쪽에서 살살 걸어서 접근했습니다. 반대쪽을 보고 있을 때 확 움켜잡고 끌어내렸죠. 엄청 놀라더군요. 끌어내리고 나니 난간 앞에 신발과 편지가 보여요.”
― 진짜 죽으려 한 거네요.
“편지를 읽어보니 여자친구 집에서 교제를 반대한다는 이유였어요. 속으로 생각했죠. ‘아이고,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데리고 다리를 건너와서 같이 포장마차에서 술 한잔하고 헤어졌어요. ‘열심히 살자, 죽지 말자’고 하면서요. 그 말이 결국 나한테 한 말이 돼버렸지.”
“결국 마음에 품고 떠나야 해요”
― 25년 전 일인데 아직도 극복이 안 됐나요.
“극복이 안 돼요. 결국 마음에 품고 세상을 떠나야 해요. 살아 있을 때 얼마만큼 유연하게 추억을 만들지, 그게 과제인 것 같아요.”
― 요즘 젊은 세대들은 일단 그 일 자체를 잘 몰라요. 최근 출연한 프로그램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보면, 대중은 이미 그 사건을 극복한 것 아닐까요? 혼자 못 빠져나오고 계신 것 같네요.
“그 사건 때문에 많이 힘들었고 자존심도 상했어요. 갈등했던 그 시간이 너무 아까운 겁니다. 그것 때문에 힘들었던 시간이 대체 몇 년이에요.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청와대 뒷산에 오래전부터 호랑이가 한 마리 살고 있었어요. 어떤 기자가 기사를 써요. ‘여기 위험한 호랑이가 살고 있다.’ 그러면 경찰이 출동을 해요. ‘얼른 잡아야 한다.’ 결국 호랑이를 몰아서 죽여버려요. 제 얘기처럼 느껴졌어요.”
― 왜요?
“당시 수사하는 사람들은 이걸 큰 사건으로 만들려고 엄청나게 노력했어요. 심지어 당시 경찰 병원에서 수사를 위해 체액 검사를 했는데, 제 체액이 아니었어요. 다른 사람 거였던 겁니다.”
― 그게 사실이라면 증거 조작인데요.
“주병진이 피해자를 때린 상처라며 경찰관이 증거 사진을 찍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사진이 나오는 거예요. 그랬더니 소독약을 발라서 마치 멍든 것처럼 보이게 찍기도 했어요. 그걸 발라준 병원 간호사가 후에 인터뷰를 통해 고백했어요.”
무죄 취지의 판결을 받은 직후 그가 경찰관, 의사를 상대로 소송을 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차 안에서 제가 무슨 행위를 한 것도 없어요. 그런데 재밌는 사건이잖아요. 막 몰아붙이는 겁니다. 변두리 연애 주간지는 거짓말한 그 여성을 만나서 인터뷰하고 연재를 했어요. 제가 그 기자를 고소해 끝끝내 손해배상을 받았어요. 그 돈으로 불우이웃을 도왔지요.”
― 요즘 말로 ‘금융 치료’네요.
“그때는 거의 삶을 포기했었어요. 무죄를 받았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자존심이 상해서 방송도 안 했어요. 사업도 동생에게 맡겼어요. 세상이 너무 싫었어요. 사람이 무섭고 여자가 무섭고 세상이 너무너무 두려웠어요. 사랑을 하는 방법도 완전히 잊어버렸어요. 사업도 흔들리기 시작했죠. 제가 집중을 못 하니까요.”
결국 그는 2008년 좋은사람들의 주식과 경영권을 매각했다.
― 사건의 여파가 컸네요.
“인생 전체가 흔들린 겁니다. 귀찮고 죽고 싶은 생각밖에 안 들어요. 이민 가려고도 했어요. 미국으로요.”
― 왜 안 갔나요.
“수속을 밟고 있는데, 아이고, 어머니가 있잖아요. 혼자만의 고민에 둘러싸여 어머니를 잊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이민 가버리면 어머니 혼자 남게 된다. 이게 장남으로 도리인가’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떠나지 말고 마음을 추슬러 잘 싸워나가 보자, 상처를 치유해 보자 생각했지요.”
― 치유했나요.
“초기엔 복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엔 보답을 하자고 마음을 바꿨죠. ‘보답의 방법은 내가 잘되는 길밖에 없다….’”
― 누구에게 보답을 한다는 건가요.
“제가 용서를 구해야 하는 사람들, 저한테 용서를 구해야 하는 사람들 모두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 그래서 좀 편해졌나요.
“요즘에도 가끔 악몽을 꿔요.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 초조감 이런 것들에 놀라 자다 깨고, 다시 잠들고… 용서하면 편안해진다고 하니 용서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진 잘 희석해서 깨끗하게 만들려 해요. 저승에서까지 괴로우면 안 되니까요.”
유명인 뜯어먹는 집단
그의 말을 듣다 보니 문득 이선균이 떠올랐다. 이선균은 마약 투약 의혹으로 수사를 받던 중 2023년 12월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에서도 유명세를 볼모로 돈을 뜯으려 한 수상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이선균 또한 지옥 같은 삶이었을 것이다. 한밤중에 혼자 악몽에서 깨어나는 삶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서둘러 세상을 떠났을까.
― 이선균씨도 경찰서에 세 차례 소환되며 포토라인에 서야 했지요. 억울함을 호소한 후 그런 선택을 했고요. 이선균씨를 보며 어떤 마음이었나요.
“저는 그 마음을 아니까요. 어렴풋이… 최악의 상황이 펼쳐질까 봐 굉장히 우려했어요. 얼마나 가슴이 터질 것 같았으면 생명을 던지면서 탈출했겠어요. 너무 안타까워요.”
― 용서가 참 힘들죠. 그때 무고(誣告)를 한 강씨는 지금도 미국에서 잘 사는 모양입니다. 미국 동포들 통해 근황이 간혹 알려지더군요.
“저는 그 사람을 원망하지 않아요. 원망해서 뭐하겠어요? 나이 어리고 생각이 짧았던, 돈밖에 몰랐던 아이였던 겁니다. 그런 환경에서 살았던 사람이라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하고 있어요. 하지만 유명인을 뜯어먹는 집단들이 있어요. 그런 사건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결코 용서가 안 됩니다. 그들이 싫은 겁니다.”
당시 사건을 보도한 뉴스 영상을 보면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경찰서에서 기자들이 주병진을 둘러싸고 인터뷰를 한다. 어느 기자가 강씨의 이름을 대며 질문을 하자 주병진이 갑자기 단호히 말한다. ‘여성분은 보호되어야 합니다. 이름은 공개하지 마세요.’ 그가 후에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정말 대인배가 아닐 수 없다.
“스스로를 달래며 생각했어요. ‘그래 나보다 10배, 100배 억울한 사람들도 많을 거다. 그 사람들은 얼마나 고생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인간답게 사는 걸 포기하고 죽어갔을까.’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했어요. ‘내가 만약 사건을 조작하는 그 사람들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나도 살기 위해 그들처럼 하지 않았을까….’”
“실어증 앓기도”
― 갖가지 생각을 했군요.
“저는 인연을 잘 안 맺으려 해요. 그 사건 이후로 생긴 습관입니다. 이 사람을 만나면 또 어떤 변수가 작용해서 나를 힘들게 하진 않을지 두려워요. 운동하러 피트니스센터에 가도 고개 숙이고 운동해요. 눈인사하고 말을 걸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떤 이야기가 또 만들어지잖아요. 그러면 또 오해가 생기고 트러블이 일어날 수도 있고요.”
― 인생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네요.
“인생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혼란스러워졌죠.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제 안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겁니다. 제가 원래 진실이 아닌 일을 진실처럼 얘기하는 걸 싫어해요. 그래도 적당히 반응하면 되잖아요. 그 사건 이후엔 과민반응을 하는 겁니다. 경계도 많이 하고요.”
― ‘내가 지금 예민하게 구는구나’ 스스로 느끼나요.
“느껴요. 누가 저에게 가장 가슴 아픈 일을 언급하면 눈이 돌아가기 시작해요. 과민반응을 한다는 걸 제가 알아요. 선풍기에 강·중·약 버튼이 있잖아요. 그 일에 대해선 저는 ‘강’ 버튼밖에 없는 겁니다.”
― 심리 상담을 받아보진 않았나요.
“안 받았어요. 혼자 생각을 많이 했어요. 실어증(失語症)을 앓기도 했고, 공황장애를 겪기도 했어요. 혼자 여행을 자주 다녔어요. 한국에 있으면 자꾸 생각나니까 미국에 가 6개월 정도 머물기도 했어요.”
그가 내뱉는 말들에는 오랜 기간 세월의 톱니바퀴에 갈린 고뇌와 고민들의 조각이 박혀 있는 듯했다.
“제가 인생을 필요 이상으로 신중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은 해요. 너무 신중하게 살면 삶이 무거워져요. 가볍게 살려 노력해요. 남은 세월이 산 날보다 짧다고 생각하니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 같아요. 마무리 단계에선 하나둘씩 잘 정리해서 다 내려놓는 게 작은 목표입니다.”
― 결혼했으면 좋았겠다 싶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제 별명이 애엄마였어요. 아기를 무척 좋아해요. 남의 아기도 이렇게 예쁜데 내 새끼면 얼마나 예쁠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아기가 아빠와 함께 학교 갔을 때 창피하지 않은 나이를 마지노선으로 생각했어요. 그때까지 결혼하려 노력했지요. 이제 포기했어요.”
― 입양을 생각해 본 적은 없나요.
“상상은 해봤어요. 저 혼자 키운다고 생각하니 겁이 나더라고요. 아이가 다 자란 다음 입양됐다는 사실을 알면 심리적으로 아픔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제가 그 정도로 좋은 사람은 아니더라고요.”
― 결혼하려 어떻게 노력했나요.
“그 사건 전이었어요. 한 친구와 결혼하기로 무언 중에 합의가 됐어요. 그러다 갈등이 생겼어요. 그 친구가 ‘그만 만나자’고 하는데 눈물이 막 쏟아지더군요. 이렇게 헤어지면 다시는 사랑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제 인생에 결혼하고 싶었던 여성이 두 명 있었어요. 사랑했던 사람도 두어 명. 그 정도예요.”
― 살아온 세월에 비해 좀 적은 듯하네요.
“결혼은 일생일대 한 번의 승부라고 생각했어요.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지요. 잘 안 사귀었어요. 당시엔 사업에 대한 집념이 강했기 때문에 마음의 틈을 내어주지 않았어요. 누가 좋아지면 항상 간격을 유지하려 노력했죠.”
― 왜요.
“사업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워낙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잘살아봐야겠다, 크게 성공해야겠다고 늘 생각했어요. 섣불리 이성을 만나면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 그 사건 이후로 연애는 전혀 안 했나요.
“못 했어요. 누굴 만나도 덜컥 겁이 났어요. 트라우마라고 할까요.”
그 사건 이후로 연애 못 해

― 검증된 사람을 소개받으면 되잖아요.
“제가 주변에 틈을 주지 않았어요. 내쳤어요.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으니까요.”
― 그렇게 산 걸 후회하나요.
“아니요. 제가 얻고자 했던 것들은 얻었어요.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사랑이 빠진 거예요. 미완성인 겁니다. 물질이 충족됐다고 성공한 삶은 아니라 생각해요. 가족이 없는 집은 껍데기예요. 그래서 이 집 진작 팔고 싶었어요.”
― 이제 이 집을 떠나 새로운 시작이네요. 사랑도 새롭게 시작하고 싶지 않나요.
“조금씩 마음의 모서리가 부드러워지긴 했어요. 그렇지만 결국 못 지우는 얼룩도 있더라고요. 이번 삶에서는 그 흔적들을 완전히 지우진 못할 것 같아요. 저에게 세월이 많이 남아 있다면 어쩌면 할 수 있겠지만 이제는 무리예요. 결국엔 지우지 못하고 가지 않을까. 하지만 제 인생에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면요, 사랑이든 사업이든, 혹은 종교든, 깨달음이든, 모종의 사건이 다시 일어난다면 가볍게 갈 수도 있겠죠. 확률이 높진 않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