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사가 기대야 할 동아줄은 헌법과 법률”
⊙ “‘법률 챗봇’이 궁금한 판결 즉각 답해주는 세상 온다”
⊙ “법원장 선출제, 소속 법관이나 직원들에 대한 평가를 엄정하게 하기 어려워 반대”
⊙ 35년간 판결문 1만 건 남긴 최초이자 최후의 법관
⊙ 법원 디지털화에 앞장… “공적 분야의 리더들이 디지털 학습을 해야”
⊙ 퇴임 후 비영리단체인 ‘디지털 상록수 교실’ 창설 계획
⊙ “‘법률 챗봇’이 궁금한 판결 즉각 답해주는 세상 온다”
⊙ “법원장 선출제, 소속 법관이나 직원들에 대한 평가를 엄정하게 하기 어려워 반대”
⊙ 35년간 판결문 1만 건 남긴 최초이자 최후의 법관
⊙ 법원 디지털화에 앞장… “공적 분야의 리더들이 디지털 학습을 해야”
⊙ 퇴임 후 비영리단체인 ‘디지털 상록수 교실’ 창설 계획
- 사진=오동룡
지난 2월 1일 서울고등법원 민사13부 강민구(姜玟求·64) 부장판사실. 북한산과 남산, 인왕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20층 창가엔 강 판사가 2014년부터 작업해 최근 완성한 전자책 영인본(影印本)들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강 판사가 바인딩한 책 두 덩어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아이고, 참으로 눈물 난다. 전자책 《송백일기 1, 2》 몇 권을 영인본으로 인쇄했는데, 지금 마침 배달이 됐다”며 “기자님이 운 좋게 마수걸이로 책을 받으시게 됐다”고 했다.
강민구 판사는 전자법정·전자소송 체계를 구축한 자타가 공인하는 법원 내 최고의 IT 전문가다. 2022년 6월 그가 ‘창의적 서울대법대인상(賞)’을 받았을 때, 그를 소개한 ‘선정기’가 그의 재직기간의 업적을 한눈에 보여준다.
〈동문께서는 지난 34년간 정확하고 원만한 재판 업무의 처리뿐 아니라, 뛰어난 IT 관련 지식을 이용하여 한국 사법부 사법정보화의 중추적 핵심 역할을 수행한바, 종합법률정보시스템 개발의 주역이고, 한국 전자소송·전자법정 도입에 산파역을 하였습니다. 동문께서는 뛰어난 저술가·기고자·강연자·봉사자로서, 탁월한 IT 관련 지식과 기술을 이용한 많은 사회공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영상 제작 혼자서 한다”
— 지난 1월 9일 대구법원에서 강의하셨다.
“2000년부터 2년간 대구법원에서 부장판사로 근무하고 2002년 2월 떠난 지 20년 만에 대구청사에 들어간 거다. 고향이 대구에서 40분 거리인 구미 선산이라선지, 2시간 강의 내내 마음으로 펑펑 울었다. ‘감격시대’ 그 자체였다.”
— 유튜브 영상을 제작업체에 의뢰하지 않고 손수 제작하시나.
“제작과 수정 작업 모두 혼자 하고 있다. 대구 강연은 러닝타임 1시간38분의 고화질 영상이라 업로드와 렌더링(서버로부터 HTML 파일을 받아 브라우저에 뿌려주는 과정)에만 3시간 이상이 걸렸다. 이번 강연은 영상 전문가가 도움을 주어 방송용 화질이 구현됐다. ‘디지털 시대의 생존 비책’이란 제목에 우리말과 영어, 중국어, 일본어 자막으로 각각 제작해 올려놓았는데, 4K(UHD) 영상이라 화질도 선명하더라.”
— 2017년 1월 11일 올린 부산지방법원장 퇴임 기념 고별 영상 ‘혁신의 길목에 선 우리의 자세’는 업로드 두 달 만에 조회수 100만을 돌파했고, 현재 135만 조회수를 기록하는 등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그 영상 하나만 135만 뷰를 기록했다. 나머지 부속 영상들까지 합치면 220만 뷰를 기록 중이다. 변화의 물결에 올라타지 않으면 죽는다는 간절한 외침이 국민들께 신선한 충격을 준 것 같다.”
판결 횟수 1만156건
지난 2월 20일 서울고법 민사부에서 형사부(재정신청부)로 발령받은 강민구 판사의 최종 판결 횟수는 1만156건이다. 대한민국 법원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강 판사가 미국 연수와 법원도서관 조사심의관 시절 등 판결 업무를 하지 않은 7년을 빼면 1988년 3월부터 27년간 1만 건의 사건, 연간 380건에 ‘강민구’란 이름 석자가 들어간 셈이다.
— 법관 재임 34년간 1만 건이 넘는 판결을 하셨다.
“통상 35년 재판하면 6000건 내외(소액사건 제외)로 하는 것이 평균적, 일반적이다. 1만 건은 하루에 사건 하나씩을 처리한 셈이다. 하나의 사건 판결에 아무리 빨라도 반년, 조금 복잡하다 싶으면 2년은 후딱 지나간다. 새로 부임해 간 곳에서 수년간 밀린 사건들이 눈에 띄면 밤을 새워서라도 다 해결했다.”
— 하루에 사건 한 건씩을 처리해야 하는데, 그 복잡한 사건 기록들을 물리적으로 어떻게 검토한단 말인가.
“물론, 민감한 판결은 검토해야 할 자료가 수만 쪽이다. 판결문만 150쪽이 넘는다. 4대강 판결은 판결문만 128쪽이었고, 기록은 1만 쪽이 넘었다. 그럼에도 그게 가능했던 것은 IT 자원을 판결서 작성에 최대한 투입해 속도가 다른 판사들보다 두 배 이상 빨랐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강민구=IT 판사’라는 닉네임이 솔직히 거북했다. ‘IT 판사’로 불리면 자칫 주 업무인 재판을 소홀히 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어 ‘정통 법관’이란 걸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 1만 건이 넘는 판결 중 기억에 남는 판결도 꽤 있을 것 같다.
“선례적 가치가 있고 헌법정신에 부합하는 판결, 네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대표적인 것이 ‘4대강 사업 한강 수계분쟁’의 항소심 사건이다. ‘사업의 목적과 내용, 부작용 등을 모두 고려할 때 이 사업이 정부의 재량권을 넘어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고, 내 판결이 기준판결이 돼 결국 대법원에서 내 의견대로 만장일치로 확정됐다.”
허원근 일병 의문사 사건
강 판사는 ‘녹십자 혈우병 치료제 에이즈 감염 손해배상 사건’ 피해자 집단 소송을 10년 만에 조정으로 마무리했다. 에이즈(AIDS) 바이러스를 걸러내지 않은 혈액으로 만든 혈우병 치료 주사제를 맞아 환자들이 감염된 사건으로 원고 피해자 19명과 그 가족이 집단소송을 한 사건이다. 그는 군대 상급자의 가혹행위로 사망한 군인을 ‘사고 사망’이 아닌 ‘순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을 하기도 했다. 서울고등법원 행정부 판사 시절, ‘국가유공자 비해당 처분취소 사건’에서 1심을 파기하고 14년 만에 해병대 고(故) 박혜종 상병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했다. 이 판결은 추후 ‘국가유공자법’ 개정의 단초를 마련하기도 했다.
— 2013년 8월 기자가 ‘허원근 일병 의문사 사건’을 취재할 때, 그때 고법 부장판사로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던 사건을 담당하셨다.
“허 일병 의문사 사건을 놓고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내 판결과 달리 한쪽 편만을 든 탐사보도를 해서 유감이었다. 성균관대 캠퍼스 공개법정에서 3시간 동안 쌍방이 파워포인트로 구술변론도 치열하게 했는데, 결국 ‘자살이 확실하다’는 86쪽의 판결문을 냈다. 대법원에서 몇 년 뒤에 그대로 확정이 났는데, 자살이지만 국가에서 유족들에게 30년간 의문사로 의심하게끔 바르게 행정처리를 못 해 심적 고통을 안긴 것에 대한 국가 책임을 물어 부모님에게 5억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했다.”
원망의 탑
— 재판은 승패가 갈린다. 재판을 1만 건 이상 하다 보면 서운해한 사람도 많겠다.
“1만 건 이상 재판하면 원고도 1만여 명, 피고도 1만여 명, 변호사와 증인 등 약 5만 명을 만나는 일이다. 그들의 사연을 듣고 정확하게 사실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재판이란 것이 승패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제로섬 게임이다 보니 패소(敗訴)한 당사자들은 섭섭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다른 판사보다 재판 횟수가 많은 나의 경우 그만큼 ‘원망의 탑’ 높이도 높을 것이다. 성남지원 있을 때, 법정구속을 시켰던 피고인이 1년 실형을 살고 나와 식칼을 품에 품고 1층 안내실에 들이닥친 적이 있었다. 2007년 성균관대 K교수의 ‘판사 석궁 테러 사건’도 재판장 집 앞에서 일어난 것이다.”
강민구 판사는 판결은 법으로 하더라도 승자와 패자 모두 다 수긍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법정에서 달래거나 화해시키는 노력을 수시로 기울인다. 변호사가 원고와 피고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아 최종 판결로 가지 않고 ‘합의’로 끝내는 것이다.
—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팀추월 8강 경기의 ‘왕따 주행’ 논란을 두고 스케이터 김보름과 노선영 선수가 수년간 소송전을 벌였는데, 중재를 주선했다.
“원고인 김보름 선수 측에서 어제(1월 31일) 이의신청을 했다. 조정이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이제부턴 정식 판결 절차로 프로세싱을 진행하면 된다. 지금 이 자리에서 녹차를 타주면서 조정을 권고했는데, 아쉽게도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릴 것이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 조정이 성립되는 케이스는 얼마나 되나.
“꽤 많다. 2000년 초임부장으로 대구지법에서 근무할 때 2년간 373건을 조정한 적이 있다. 이틀에 한 건꼴, 전체 사건의 30%를 조정한 것 같다. 경북 선산중학 2학년 다닐 때 낫질하다 다친 왼손가락 상처를 보여주면, 당사자들 첫마디가 ‘판사님도 꼴 베었습니까’라며 태도가 달라졌다. 그들은 내 깊은 손가락 상처를 보며 소장(訴狀) 답변서에 숨겼던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다. 손가락 때문에 합의한 게 2년간 50건이 넘더라. 엄마하고 시집간 딸이 5000만원이 ‘증여’인가 ‘대여’인가를 놓고 계속 싸우고 있었다. 판사실로 두 사람을 불러 회심곡(回心曲)을 들려주었는데 눈물을 흘리며 바로 화해해 단박에 합의 조정된 적도 있다.”
— 합의 조정 쪽으로 유도한 판결도 꽤 있다고 들었다.
“일본 제초제 회사가 한국 제초제 회사를 상대로 한 특허분쟁 소송을 물려받았다. 내 방으로 중절모를 쓴 일본 제약회사 중역과 한국 회사 임원, 쌍방 대리인을 불러 하동 녹차를 손수 끓여 주면서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 차(茶)가 전래된 역사를 ‘강의’했더니, 일본 회사 중역들이 ‘차를 아는 재판장님이라 국수주의적 판결을 내리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간다’며 ‘판사님이 생각하는 중재안을 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준비해놓은 4장짜리 출력물을 건네자 바로 ‘오케이’했다. 수백억 규모의 큰 사건인데 ‘하동 녹차’로 합의 조정된 사건이다.”
“싸울 것만 법원에 와야”
— 조정이 활성화되려면 ‘디스커버리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우리에겐 생소한 제도다.
“원고와 피고가 상대방의 주장을 변호사를 통해 미리 확인하고, 한 발씩 양보해서 합의로 해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로의 ‘패’를 보고, 그것을 토대로 전문가와 협의해 당사자들끼리 합의하는 것이다. 미국은 조정으로 끝나는 게 전체 사건의 80%에 달하고, 20%만 법원으로 넘어온다. 그런데 우리는 소액이나 벌금, 약식사건에 대한 정식재판까지 모든 사건이 법원의 문턱을 넘는다. 대법원에 올라가는 사건이 연간 4만 건이 넘는다. 이건 지극히 비정상적이다. 싸울 것만 법원에 와야 한다.”
— 디스커버리 제도를 우리 법원에 도입하려면?
“법률을 개정해야 한다. 그럴 경우, 판사는 합의가 어렵거나 판단을 내리기 곤란한 복잡한 사건만 판결로 해결하게 되니까 법원의 소송 건수는 크게 줄어들 수 있다. 법원 바깥에 민간의 어떤 공적 중재원을 만들어 그곳에서 사건의 70~80% 정도를 담당하게 하면 된다. 소송 당사자들의 비용도 훨씬 줄어들 것이다.”
— 법원에 대한 불신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에 대해 ‘극단적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을 무의식적으로 기피하는 심리까지 생겨났다.
“국민들이 판사의 ‘성향’을 파악한다는 건 참으로 불행이다. 국민과 사법부와의 신뢰를 엄청나게 파괴하는 흐름인데, 참으로 개탄스럽다. 소수 인원의 일인데, 마치 법조인 전체가 ‘나쁜 집단’으로 치부되는 것 같아 너무 안타깝다.”
“헌법정신 생각하며 판결해야”
— 시류(時流)에 휘둘리지 않는 판결을 하려면 심지가 굳어야 할 것 같다.
“판사가 기대야 할 동아줄은 헌법과 법률이다. 판사가 재판할 때 흔들린다면, 이 사건을 관통하는 헌법과 헌법정신이 무엇인가를 심사숙고하면 답이 나온다. 그리고 판사는 확립된 선례와 판례를 존중하고, 직업적 양심, 평균적이고도 상식적인 정의감, 저울과 같은 공평의식의 소유자여야 한다. 한비자(韓非子)가 ‘법불아귀 승불요곡(法不阿貴 繩不撓曲)’이란 말을 남겼는데, ‘법은 부귀에 아부하지 아니하고, 줄자는 스스로 굽어서 측량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사법부 개혁에도 관심을 기울이셨다. 문재인(文在寅) 정부 시절 조국(曺國) 당시 민정수석과 소셜미디어상에서 일전을 벌이기도 했는데, 결국 ‘포토라인 없애기’를 관철시켰다.
“2018년 ‘밤샘 수사 폐지’를 가장 먼저 주창했고, 2019년 ‘동의 없는 포토라인 반대’ 의견 개진을 해서 제도 개선에 기여했다. 특히 포토라인 세우기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1심 판결이 나기도 전에, 유무죄를 따지지도 않고, 카메라 세례를 받게 하는 악습(惡習)이었다. 이것이 ‘중세 마녀재판’과 무엇이 다른가. 더구나 그 포토라인에 세우는 것을 검찰이 자의적(恣意的)으로 선별해 결정한다는 것은 검찰이 알권리를 구실로 현대판 ‘멍석말이’를 했던 것이다.”
— ‘법원장 후보 추천제’의 취지는 대법원장의 권한을 분산하고 법원장 선출에 민주적 요소를 확대하겠다는 취지에선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자칫하면 법원장 임명이 ‘인기투표’로 흐를 가능성도 있다는 지적이 있다.
“후보 추천제는 2019년부터 전국 13개 지방법원에서 17회의 추천이 이뤄졌고, 올해는 서울중앙지법 등 7개 지법으로 확대된다. 선거로 법원장이 되면 그 소속 법관이나 직원들에 대한 평가를 엄정하게 하기 매우 곤란하게 된다. 그래서 난 반대다. 미국의 주(州) 법원은 각각의 판사가 완벽하게 1인 독립기관이고, 법원장은 판사를 뒷바라지하는 ‘총무 판사’ 개념이라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 법원장은 사무 분담권도 있고, 직원 인사권도 갖고 있는 상당히 중요한 자리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와 친해질 수 없는 보직이다.”
—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판사는 오라클(신탁)을 받은 존재 같지만, 의외로 인간적 스트레스가 심한 직업인 것 같다.
“30년 정도 판사 일을 하다 보니 ‘극한직업’이란 표현이 맞는 것 같다. 형사사건의 경우, 원고와 피고의 인생에 법원 판결이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판결문을 작성하다 보면 그야말로 애간장이 녹으면서 스트레스 수치는 하늘을 찌른다. 연수원 동기로 얼마 전 1주기(1월 11일)를 맞은 고 윤성근(尹誠根) 부장판사도 그런 경우다. 손지열(孫智烈) 전 대법관도 극한직업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암으로 고생하다가 71세로 돌아가셨다.”
‘마징가제트 판결’
— 손지열 대법관은 선친 손동욱(孫東頊) 대법관과 함께 건국 이후 부자 대법관을 지낸 분 아닌가.
“그렇다. 나의 영원한 ‘사수’셨다. 1988년 의정부지원 초임 때 배석판사로 그분에게 재판의 지혜를 도제식으로 지도, 첨삭을 받았다. 처음 임관해서 형사 판결문을 썼는데, 주문(主文) 아래 판결의 근거에 해당하는 이유(理由) 부분을 ‘Z’자로 쭉 긋고 뒤에 새로 쓰셨다. 판결문을 통으로 바꾸신 셈이다. 이후론 그분께 지적받지 않았는데, 스스로 ‘마징가제트 판결’이라 부르며 마음속에 각오를 새겼다. 내가 창원지법원장에 취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거든 잘 하거라’며 식사를 사주셨는데, 항암제 투여로 그분은 거의 식사를 못 하셨고, 나 혼자 눈물 젖은 밥을 먹었다.”
— 판사님 건강은 괜찮으신가.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2002년 건강이 급격히 악화돼 사표를 낸 적도 있다. 이후 108배와 명상, 운동, 소식(小食)으로 이겨냈다. 폰에 있는 ‘삼성헬스’란 앱으로 2019년 9월부터 고교(용산고) 동창 열댓 명과 실시간으로 걷기 경쟁을 한다. 코로나19 기간 동안엔 청계산 산행을 할 수 없어 여의천을 왕복으로 걸어 1만 보를 채웠다. 늘 업무를 앞당겨 처리하는 습관이 몸에 밴 것도 건강 유지의 비결인데, 다 어머니 덕이다.”
— 어머니 덕이라니.
“내가 여섯 살 때(1963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어머니가 혼자가 되셨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남다르다. 법관 임관 후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평일 오후 6시에 서울서 차를 몰고 구미 선산으로 달려갔다. 밤 9시 이전에 도착해 어머니와 저녁을 먹고 이튿날 새벽 6시에 출발하면 오전 8시30분쯤 법원에 도착한다. 어머님과 한 방에서 자는 게 효도라고 생각해 2015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1년에 15~20회 이상, 30년 이상 계속했다. 어머니를 뵈러 가려면 일을 미리 당겨서 해야 했다.”
강금실 장관의 전화
— 창원지법원장과 부산지법원장 시절엔 ‘음악법정’을 도입해 운영했다.
“나는 ‘촌놈’ 감성이다. 중학교 때까지 산과 들의 소와 닭을 보고 자랐다. 성남법원 시절 형사단독을 하는데, 상시 미제사건이 850건이었다. 지금은 8개 형사단독이지만, 120만 명의 성남시에 당시 형사단독이 두 개밖에 없었다.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 열리는 법정이 시장터 같았다. 초조하게 재판을 기다리는 분들을 위해 집에서 오디오와 스피커를 떼어 와 법정에서 음악을 틀었다. 당시 강금실(姜錦實) 법무부 장관이 비서관을 통해 ‘아이디어를 쓰고 싶다’고 전화를 해왔다. 그 이후 전국의 교정시설, 구치소, 교도소 식사 시간에 음악을 틀었다고 한다. 지금은 각 재판부 사건도 줄어들고, ‘시차제 소환’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음악 법정이 필요 없어졌지만….”
— 법정에 예술작품을 걸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
“2012년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등 북유럽 3개국 법원의 제도 시찰을 다녀왔다. 노르웨이 오슬로 시(市) 청사를 비롯해 법정마다 그림이 걸려 있었다. ‘올커니’ 하고 돌아와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미국의 주 법정과 유럽의 상당수 국가가 법정에 미술품을 걸고 있었다. 대법원에 알리지 않고 슬그머니 지역 미술작가들과 협의해 그림을 빌려 걸었다. 작가들도 수장고에서 먼지만 쌓이던 작품들을 표구까지 해서 걸어주니 좋았을 거다. 도록(圖錄)도 만들어 주었는데, 나중에 서로 걸어달라고 난리였다. 현재 전국 11개 본·지원에서 예술법정을 운영하고 있다.”
— 현직 판사도 법정에 그림을 걸어달라고 했다던데?
“서울중앙지법에 근무하는 최아름 판사가 그 주인공이다. 화가였던 모친 박덕기 화백이 최 판사가 초등학교 때 잔디밭에 앉아 책 읽는 모습을 유화로 그렸단다. 최 판사가 그 그림을 자신이 들어가는 창원지법 212호 법정에 꼭 걸어달라 하더라. 최 판사 주례를 서면서 사연을 들어보니, 어머니가 최 판사 임관 6개월 전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거다. 엄마는 아들이 법복(法服) 입은 모습을 보지 못하고 한을 품고 돌아가셨는데, 아들이 그림을 통해 한을 풀어드린 거다. 엄마가 자신을 법정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엄마가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천사’ ‘문수보살’인 거다. 참으로 소설 같은 이야기다.”
— 영화로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지난번 방송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작가에게 전해달라(웃음). 이번에 펴낸 《송백일기 1, 2》 ‘법창에 비친 초상화’에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시즌2에서 다룰 만한 내용들이 가득하다.”
‘디지털 법원’ 구축 앞장서
강민구 판사가 주축이 돼 구축한 ‘디지털 법원’ 등 관련 종합법률정보시스템 사이트는 판례, 법령, 조약, 문헌 등 재판에 관한 모든 것이 들어 있고, 누구나 쉽게 검색이 가능하다. 그의 사법정보화 토대 구축의 노력 덕분에 우리나라는 현재 전자소송 분야에서 세계 3위권 수준이다.
— 언제부터 컴퓨터와 친해졌나.
“1985년 육군사관학교 교수부에서 3년간 교수 요원으로 근무한 것이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1980년대 후반, 육사는 정보화 물결에 대비하기 위해 서울대 등 전산학과 출신 학사장교 수십 명을 교관으로 활용했고, 그곳에서 화면과 키보드만 있는 ‘멍텅구리 컴퓨터(더미 터미널)’를 처음 접했다. 4~5년 대학 후배뻘인 전산학과 출신 학사장교들에게 파스칼, 포트란 같은 코딩 언어를 배웠다.”
— ‘디지털 법원’ 구상은 언제 하게 됐나.
“1988년 의정부지원 초임 판사 때부터 중대형 조립 PC를 용산에서 사서 재판에 활용했다. 국가에서 판사들에게 컴퓨터를 준 게 1991년이다. 군인이 소총과 총탄을 자기 돈으로 산 셈이다. 교통사고 사망자의 정년까지 호봉승급을 계산기로 계산하면 일주일 정도 걸리는데, ‘쿼트로 프로’의 함수 기능으로 15분 만에 판결문 계산표를 완성하자 주위 판사들이 깜짝 놀랐다. 당시 19명의 판사도 한 달 안에 컴퓨터를 다 마련했다. 이를 계기로 스마트 법원 개념을 생각했고, 1997~1998년 법원도서관 조사심의관을 하면서 ‘종합법률정보시스템’이라는 한국형 법률 데이터베이스의 결정판을 만들어 오픈시켰다. 국민의 사법부 정보 접근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계기가 됐다.”
법률 분야 챗GPT 탄생 임박
1998년 9월 강 판사는 판례, 법령, 논문을 PC에서 마우스로 가위질해서 쓸 수 있는 프로그램을 건국 이래 처음으로 만들었다. 김용담(金龍潭) 대법관(당시 수석재판연구관)은 “강 판사가 우리 재판연구관들의 목숨을 연장해줬다”고 했고, 송영길(宋永吉) 의원의 형 송영천(宋永天) 재판연구관(현 변호사), 이광범(李光範) 재판연구관(현 LKB파트너스 대표) 등이 강 판사에게 고생했다며 술과 밥을 샀다고 한다. 판례를 보고 직접 타자를 쳐야 했던 일이 마우스로 가져다 ‘복붙(복사와 붙이기)’만 하면 돼 일의 효율이 10배, 100배나 개선됐기 때문이다.
— 판결문 전면 공개도 추진하셨다.
“30년 전 어린 판사 시절부터 판결문 실시간 전면 공개를 주장해왔다. 그래야 빅데이터가 구축되고 AI(인공지능) 시대에 살아남는다.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아직 완벽하게 실시간 공개는 하지 못한다. 까맣게 가려서 주면 ‘난수표’라서 판결문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제도 개선 차원에서 ‘개인정보보호법’의 예외 규정을 두거나, ‘판결문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을 별도로 입법하든가 한시바삐 개선해야 한다.”
— 윤석열(尹錫悅) 대통령도 ‘챗GPT’에 관심을 갖는 등 시중에서 인공지능 챗봇이 핫이슈다. 인공지능이 법조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 같나.
“두 거인 기업(구글 vs MS)이 글로벌 인공지능 시장에서 사운을 건 전쟁을 시작했다. 판결문이 공개돼 서버에 탑재만 되면 법률 분야 챗GPT도 한글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우리가 궁금한 판결을 물어보면 챗봇이 바로바로 답변해줄 테니까. ‘A와 B가 토지를 가지고 아래의 내용으로 다투고 있다. 취득시효 법리가 이 사건에서 적용되는가’라고 물으면, 챗GPT 같은 인공지능 체계가 분석해 그 자리에서 답을 할 거다. ‘인격권 침해에 대한 판례를 정리해라’고 하면 판례를 쫙 정리해서 리포트를 낼 것이고.”
— 그렇게 되면, 미래엔 변호사란 직업도 사라지지 않을까.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추월하는 ‘특이점’이 2045년쯤이라 한다. 그렇게 되면 젊은 변호사 절반은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미국의 메이저 탑 100개 로펌엔 IBM이 인공지능인 ‘왓슨’을 기반으로 2016년에 만든 인공지능 변호사 ‘로스(ROSS)’ 시스템이 구비돼 있다. 이 때문에 미국 어쏘변호사(로펌 소속 변호사)들이 일감의 70%를 빼앗겼다. 앞으로 젊은 변호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야 한다. 결국 기초 법이론을 탄탄히 하고, 아날로그 지식으로서 여러 가지 책도 많이 읽어 창의력을 기반으로 콘텐츠를 구축해야 한다. ‘생각 근육’이 튼튼한 변호사만 생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현대판 ‘법조실록’ 완성
강민구 판사는 1988~2022년까지 34년을 실록화한 5400쪽, 7종의 현대판 ‘법조실록’을 탄생시켰다. 부산지법과 창원지법원장 시절 기록한 《용지호를 벗삼아》 《금정산의 여명1》 《금정산의 여명2》 《코트넷의 글자취(법원전산망 코트넷과 함께한 22년, 2000~2021)》 《JUMP to START COURT 백서》까지 합치면 11종, 8278쪽이다.
— 《조선왕조실록》에 비견할 만한 방대한 ‘법조실록’이 나왔다.
“참으로 꿈꾸듯이 만들어졌다. ‘에버노트’라는 혁신적 전자메모 도구에 초고(草稿)들이 다 저장이 돼 있었고, ‘에버노트’가 나오기 이전 기록은 PC의 하드에 저장해놓았었다. 최소한 20~30년의 기록을 불러내 소팅(분류)한 다음, 목차와 서문을 만들어 도깨비 방망이 휘두르듯이 뚝딱뚝딱 만들어낸 거다.”
— 전자책들의 성격이 다 다른데?
“《코트넷의 글자취》는 내부 전산망에 올린 재판 노하우이고, 《송백일기》는 수필집이고, 《호기심에 묻고, 열정으로 답하다(즉문즉답 대담집, 2015~2022)》는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즉문즉답한 대화록이다. 《법창에 비친 초상화(언론기사 자료집, 1988~2022)》는 언론에 등장한 기사 모음이고, 《일상의 소확행을 꿈꾸다(송백일기, 2020~2021)》는 과거의 《송백일기》, 《법복의 무게 속에 함께한 재판연구 33년(학술·논문 자료집)》은 학술논문집이다. 이 중에서 《코트넷의 글자취》와 《법복의 무게…》 두 개를 뺀 5종은 일반인들이 봐도 인생에 크게 도움이 될 콘텐츠들이다.”
— 기본적으로 전자책이지만 영인본도 찍으셨나.
“지인들이 주문하면 한 부라도 만들어 배송해드리는 체제다. 인세(印稅)는 받지 않는다. 모든 책은 목차를 누르면 그대로 점프가 되고, 《월간조선》 독자분들께도 무료로 다운로드 주소(https://c11.kr/y4z5)와 큐알코드(335쪽 사진)를 제공해드릴 것이니 참고하시길 바란다.”
— 한국인의 심리상 ‘공짜’로 주면 오히려 귀한 줄 모르는데….
“그런 측면도 있을 것이다(웃음). 그런데 이 ‘법조실록’은 우리 법원 공식 데이터베이스에 전문이 다 등록돼 영구적으로 남을 것이다. ‘디지털 정약용’의 심정으로 지난 5년간 힘든 시기를 지내면서 기록으로 무언의 항변을 했고, 그 결과 영광스럽게도 우리 법원의 영구기록물이 됐다.”
‘정보의 무지가 3년을 지배했다’
— 구술한 내용을 그대로 전자책으로 만드시는데, 그러려면 말이 간결해야 할 것 같다.
“1985년부터 3년간 육사 생도들한테 강연했기 때문에, 30대 초반에 구술 훈련이 됐다. 90% 이상 법조인이 서너 장 이상을 연속해 스피치 하지 못할 것이다. 뇌의 회로가 20~30년에 걸쳐 손가락으로 가는 게 고착화됐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끊어내는 심정으로 모든 것을 말로 쓰겠다는 결심을 하고 실천해야 한다. 독한 마음으로 석 달 이상의 훈련을 해야 허들을 넘을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클로바노트’나 ‘에버노트’에 구술할 필요성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지난해 11월 8박 9일간 이탈리아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귀국 이튿날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과 에버노트 구술 텍스트를 편집, 전자책으로 완성해 지인들에게 선물로 나눠줬다.”
— ‘법조실록’과 별도로 펴낸 전자책 《코로나 외신자료집》은 1만1000쪽에 달한다. ‘과학은 뒷전이고 정보의 무지가 3년을 지배했다’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코로나19 팬데믹 3년간 우리나라 전문가들은 묵언수행(默言修行) 중이었고, 복지부동의 코로나19 방역행정이 있었고, 과잉 격리 방역행정 때문에 애꿎은 자영업자 600만 명이 희생당했다. 문재인 정부의 ‘언발의 오줌누기식’ 시혜성 지원책은 그분들에게 효용이 되지 못했다. 집단적 공포심은 ‘정보의 무지’가 원인이었다.”
— 코로나19 팬데믹 때 언론의 보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우리 신문의 코로나19 관련 보도는 의학지식 부족으로 내용이 형편없었다. 반면 유럽이나 미국 메이저 언론의 코로나19 기사들은 논문에 준하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더라. 이래선 우리의 눈과 귀가 다 가려지겠다는 생각에 새벽마다 전 세계 언론의 코로나19 관련 기사를 한 시간 반씩 정리해 1년 6개월간 1만1000쪽, 400쪽짜리 전자책 27권으로 만들어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지금의 코로나19 보고서가 됐다.”
윤성근 판사의 《법치주의를 향한 불꽃》
— 《밤나무 검사의 음악편지》란 전자책 출간의 편집일을 맡았다.
“2009년 범죄와의 전쟁을 이끌고 슬롯머신 사건 수사를 지휘하신 송종의(宋宗義) 전 법제처장(천고법치문화재단 이사장)님께 재능기부를 한 셈이다(웃음). 용산고·서울법대 17년 후배인 나를 ‘도깨비 왕초’라고 부르며 무한 격려해주신다. 송 처장님과 며칠 밤을 지새우며 작업을 했다. 〈밤나무 검사의 음악편지〉는 송 처장님이 15년 전 두 달에 걸쳐 미국에 사는 세 손녀에게 명곡 클래식 음악마다 해설을 붙여서 일일이 육필 원고로 만들어 보낸 편지들을 모아 전자책으로 엮은 것이다. 남녀노소 누가 읽어도 술술 쉽게 읽히는 음악 교양책이다. 명곡 음원 250곡 이상이 유튜브 URL과 QR 코드로 실려 있는 최초의 책이다. 그 후에 발간된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에는 아내 장형원(張馨元)의 민화(民畫) 작품 30여 컷을 실었다.”
— 법원 내 ‘국제법 전문가’로 이름난 고 윤성근 판사의 책 《법치주의를 향한 불꽃》도 출판 과정에서 큰 감동을 주었다.
“작년 1월 11일 유명을 달리한 윤성근 판사의 《법치주의를 향한 불꽃》과 후속편 《법치주의를 향한 불꽃: 법창에 비친 윤성근의 초상화》(236쪽) 등 4종의 책인데, 초판은 단 48시간 만에 만들었다. 2021년 11월 아들 결혼식에 겨우 참석한 윤 부장판사의 건강상태를 보고 출판을 결심했다. 30여 명에 달하는 윤 부장판사의 배석들을 모아 단체 채팅방을 만들고, 사법연수원 동기 단톡방 등에 호소해 올라온 글을 모아 앱 작업을 통해 제작한 것이다. 송종의 천고법치문화재단 이사장께서 초판 5000부 제작비용을 대고 대한변협(이종엽 회장)과 398명이 지원해 5000권 판매가 완료됐다. 윤 판사는 담도암 말기 투병 중 93일간 쌀 한 톨, 물 한 방울 먹지 못했지만, 자신의 칼럼집이 나온 것을 보고 기뻐하며 2000만원 인세 일부를 기부하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내 강의의 후반부는 항상 아날로그”
— 한국 사회의 향후 디지털 혁신의 방향에 대해 전망한다면.
“공적 분야의 리더들이 디지털 학습을 해야 한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자원을 능수능란하게 리더가 쓸 줄 알면 대한민국은 완전히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될 것이다. 내가 대통령실, 국회, 세종청사,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강연을 하려는 것도, 내 강연을 한 번이라도 들은 분들은 디지털 세상에 눈이 뜨인다. 디지털 능력을 활용하면 생산성을 어떻게 증대시킬 수 있는가 깨우치게 된다.”
— 종이책도 존재의 가치가 있다고 보는 건가.
“내 강의의 후반부는 항상 아날로그다. 종이책을 많이 읽으라고 권한다. 책을 읽어주는 앱도 있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해도 아날로그적 내공이 축적된 인간을 AI가 완전히 이기기는 힘들다. AI를 만들 때 코딩이나 컴퓨팅 과학자만 필요한 게 아니라, 법률가도 필요하고 인문사회학자도 필요하고, 다양한 아날로그적인 지식과 지혜를 AI에다 투입하는 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주말이면 자녀들을 서점에 풀어놓아 아날로그 내공을 쌓도록 했다.”
“아내가 인정해줘 흐뭇”
— 판사님이 애용하는 킬러앱을 소개해달라.
“전자 메모앱 ‘에버노트’, 책의 한쪽을 찍으면 즉시 번역되고 문자인식(OCR) 기능으로 텍스트도 추출되는 ‘구글렌즈’, 인공지능형으로 출시한 혁신적 녹취 앱 ‘네이버 클로바노트’, 글자로 된 활자를 음성으로 변환해주는 ‘토크프리’, 음성입력이 되는 윈도11의 코타나(Cortana) 한글 입력 기능, 구글 크롬에서 300쪽 이하 PDF 문서를 일괄 번역하는 번역 기능 등이다.”
디지로그 창안자인 이어령(李御寜) 전 문화부 장관이 생전에 1만5000꼭지를 갖고 있었다는데, 강 판사는 에버노트에 1만7743꼭지가 있다고 한다. 하루 10꼭지 이상씩 업데이트한 셈이다. 그걸 휴대전화 등을 이용, 검색어를 입력하면 0.01초 만에 텍스트들이 나타난다. 강 판사는 “일전에 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이 아침 9시에 전화해 학술지에 논문 한 편을 한 달 기한으로 부탁하기에 저녁 5시에 25쪽 분량의 논문을 각주까지 만들어 보냈더니 그 연구원이 ‘판사님은 도와주는 스태프가 있느냐’며 놀라던데, 스태프는 다름 아닌 에버노트”라고 했다.
— 2024년 정년을 맞으시는데, 퇴임 후 계획은.
“미국의 시인 에머슨의 말처럼, 나의 존재로 인해 그 누군가를 행복하게 했고, 떠난 나를 아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퇴임 후엔 비영리단체인 ‘디지털 상록수 교실’ 창설을 계획하고 있다. 심훈의 《상록수》가 아닌, ‘디지털 까막눈’을 깨부술 ‘디지털 상록수’ 운동이다. 내 블로그 이름이기도 하다. 이젠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는 방식의 장·노년층 디지털 문맹 타파 운동을 펼치려고 한다. 지난 6월 10일 서울대법대동창회 선정 ‘제2회 창의적인 서울법대인상’을 받을 때, 시상식장에서 맨날 컴퓨터, 스마트폰 잡고 있다며 볼멘소리 하던 아내가 처음으로 날 인정해줘 흐뭇했다.”⊙
![]() |
2022년 6월 10일 더플라자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2022년도 정기총회에서 서울법대 총동창회 우창록 회장(율촌 명예회장)이 강민구 판사에게 ‘창의적 서울법대인상’을 수여하고 있다. 사진=강민구 |
〈동문께서는 지난 34년간 정확하고 원만한 재판 업무의 처리뿐 아니라, 뛰어난 IT 관련 지식을 이용하여 한국 사법부 사법정보화의 중추적 핵심 역할을 수행한바, 종합법률정보시스템 개발의 주역이고, 한국 전자소송·전자법정 도입에 산파역을 하였습니다. 동문께서는 뛰어난 저술가·기고자·강연자·봉사자로서, 탁월한 IT 관련 지식과 기술을 이용한 많은 사회공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영상 제작 혼자서 한다”
![]() |
현재 135만 조회수를 기록하는 강민구 판사의 ‘혁신의 길목에 선 우리의 자세’ 동영상의 최신 버전 초기화면과 QR코드. 사진=유튜브 화면 캡처 |
“2000년부터 2년간 대구법원에서 부장판사로 근무하고 2002년 2월 떠난 지 20년 만에 대구청사에 들어간 거다. 고향이 대구에서 40분 거리인 구미 선산이라선지, 2시간 강의 내내 마음으로 펑펑 울었다. ‘감격시대’ 그 자체였다.”
— 유튜브 영상을 제작업체에 의뢰하지 않고 손수 제작하시나.
“제작과 수정 작업 모두 혼자 하고 있다. 대구 강연은 러닝타임 1시간38분의 고화질 영상이라 업로드와 렌더링(서버로부터 HTML 파일을 받아 브라우저에 뿌려주는 과정)에만 3시간 이상이 걸렸다. 이번 강연은 영상 전문가가 도움을 주어 방송용 화질이 구현됐다. ‘디지털 시대의 생존 비책’이란 제목에 우리말과 영어, 중국어, 일본어 자막으로 각각 제작해 올려놓았는데, 4K(UHD) 영상이라 화질도 선명하더라.”
— 2017년 1월 11일 올린 부산지방법원장 퇴임 기념 고별 영상 ‘혁신의 길목에 선 우리의 자세’는 업로드 두 달 만에 조회수 100만을 돌파했고, 현재 135만 조회수를 기록하는 등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그 영상 하나만 135만 뷰를 기록했다. 나머지 부속 영상들까지 합치면 220만 뷰를 기록 중이다. 변화의 물결에 올라타지 않으면 죽는다는 간절한 외침이 국민들께 신선한 충격을 준 것 같다.”
판결 횟수 1만156건
지난 2월 20일 서울고법 민사부에서 형사부(재정신청부)로 발령받은 강민구 판사의 최종 판결 횟수는 1만156건이다. 대한민국 법원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강 판사가 미국 연수와 법원도서관 조사심의관 시절 등 판결 업무를 하지 않은 7년을 빼면 1988년 3월부터 27년간 1만 건의 사건, 연간 380건에 ‘강민구’란 이름 석자가 들어간 셈이다.
— 법관 재임 34년간 1만 건이 넘는 판결을 하셨다.
“통상 35년 재판하면 6000건 내외(소액사건 제외)로 하는 것이 평균적, 일반적이다. 1만 건은 하루에 사건 하나씩을 처리한 셈이다. 하나의 사건 판결에 아무리 빨라도 반년, 조금 복잡하다 싶으면 2년은 후딱 지나간다. 새로 부임해 간 곳에서 수년간 밀린 사건들이 눈에 띄면 밤을 새워서라도 다 해결했다.”
— 하루에 사건 한 건씩을 처리해야 하는데, 그 복잡한 사건 기록들을 물리적으로 어떻게 검토한단 말인가.
“물론, 민감한 판결은 검토해야 할 자료가 수만 쪽이다. 판결문만 150쪽이 넘는다. 4대강 판결은 판결문만 128쪽이었고, 기록은 1만 쪽이 넘었다. 그럼에도 그게 가능했던 것은 IT 자원을 판결서 작성에 최대한 투입해 속도가 다른 판사들보다 두 배 이상 빨랐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강민구=IT 판사’라는 닉네임이 솔직히 거북했다. ‘IT 판사’로 불리면 자칫 주 업무인 재판을 소홀히 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어 ‘정통 법관’이란 걸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 1만 건이 넘는 판결 중 기억에 남는 판결도 꽤 있을 것 같다.
“선례적 가치가 있고 헌법정신에 부합하는 판결, 네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대표적인 것이 ‘4대강 사업 한강 수계분쟁’의 항소심 사건이다. ‘사업의 목적과 내용, 부작용 등을 모두 고려할 때 이 사업이 정부의 재량권을 넘어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고, 내 판결이 기준판결이 돼 결국 대법원에서 내 의견대로 만장일치로 확정됐다.”
허원근 일병 의문사 사건
강 판사는 ‘녹십자 혈우병 치료제 에이즈 감염 손해배상 사건’ 피해자 집단 소송을 10년 만에 조정으로 마무리했다. 에이즈(AIDS) 바이러스를 걸러내지 않은 혈액으로 만든 혈우병 치료 주사제를 맞아 환자들이 감염된 사건으로 원고 피해자 19명과 그 가족이 집단소송을 한 사건이다. 그는 군대 상급자의 가혹행위로 사망한 군인을 ‘사고 사망’이 아닌 ‘순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을 하기도 했다. 서울고등법원 행정부 판사 시절, ‘국가유공자 비해당 처분취소 사건’에서 1심을 파기하고 14년 만에 해병대 고(故) 박혜종 상병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했다. 이 판결은 추후 ‘국가유공자법’ 개정의 단초를 마련하기도 했다.
— 2013년 8월 기자가 ‘허원근 일병 의문사 사건’을 취재할 때, 그때 고법 부장판사로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던 사건을 담당하셨다.
“허 일병 의문사 사건을 놓고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내 판결과 달리 한쪽 편만을 든 탐사보도를 해서 유감이었다. 성균관대 캠퍼스 공개법정에서 3시간 동안 쌍방이 파워포인트로 구술변론도 치열하게 했는데, 결국 ‘자살이 확실하다’는 86쪽의 판결문을 냈다. 대법원에서 몇 년 뒤에 그대로 확정이 났는데, 자살이지만 국가에서 유족들에게 30년간 의문사로 의심하게끔 바르게 행정처리를 못 해 심적 고통을 안긴 것에 대한 국가 책임을 물어 부모님에게 5억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했다.”
— 재판은 승패가 갈린다. 재판을 1만 건 이상 하다 보면 서운해한 사람도 많겠다.
“1만 건 이상 재판하면 원고도 1만여 명, 피고도 1만여 명, 변호사와 증인 등 약 5만 명을 만나는 일이다. 그들의 사연을 듣고 정확하게 사실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재판이란 것이 승패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제로섬 게임이다 보니 패소(敗訴)한 당사자들은 섭섭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다른 판사보다 재판 횟수가 많은 나의 경우 그만큼 ‘원망의 탑’ 높이도 높을 것이다. 성남지원 있을 때, 법정구속을 시켰던 피고인이 1년 실형을 살고 나와 식칼을 품에 품고 1층 안내실에 들이닥친 적이 있었다. 2007년 성균관대 K교수의 ‘판사 석궁 테러 사건’도 재판장 집 앞에서 일어난 것이다.”
강민구 판사는 판결은 법으로 하더라도 승자와 패자 모두 다 수긍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법정에서 달래거나 화해시키는 노력을 수시로 기울인다. 변호사가 원고와 피고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아 최종 판결로 가지 않고 ‘합의’로 끝내는 것이다.
—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팀추월 8강 경기의 ‘왕따 주행’ 논란을 두고 스케이터 김보름과 노선영 선수가 수년간 소송전을 벌였는데, 중재를 주선했다.
“원고인 김보름 선수 측에서 어제(1월 31일) 이의신청을 했다. 조정이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이제부턴 정식 판결 절차로 프로세싱을 진행하면 된다. 지금 이 자리에서 녹차를 타주면서 조정을 권고했는데, 아쉽게도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릴 것이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 조정이 성립되는 케이스는 얼마나 되나.
“꽤 많다. 2000년 초임부장으로 대구지법에서 근무할 때 2년간 373건을 조정한 적이 있다. 이틀에 한 건꼴, 전체 사건의 30%를 조정한 것 같다. 경북 선산중학 2학년 다닐 때 낫질하다 다친 왼손가락 상처를 보여주면, 당사자들 첫마디가 ‘판사님도 꼴 베었습니까’라며 태도가 달라졌다. 그들은 내 깊은 손가락 상처를 보며 소장(訴狀) 답변서에 숨겼던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다. 손가락 때문에 합의한 게 2년간 50건이 넘더라. 엄마하고 시집간 딸이 5000만원이 ‘증여’인가 ‘대여’인가를 놓고 계속 싸우고 있었다. 판사실로 두 사람을 불러 회심곡(回心曲)을 들려주었는데 눈물을 흘리며 바로 화해해 단박에 합의 조정된 적도 있다.”
— 합의 조정 쪽으로 유도한 판결도 꽤 있다고 들었다.
“일본 제초제 회사가 한국 제초제 회사를 상대로 한 특허분쟁 소송을 물려받았다. 내 방으로 중절모를 쓴 일본 제약회사 중역과 한국 회사 임원, 쌍방 대리인을 불러 하동 녹차를 손수 끓여 주면서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 차(茶)가 전래된 역사를 ‘강의’했더니, 일본 회사 중역들이 ‘차를 아는 재판장님이라 국수주의적 판결을 내리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간다’며 ‘판사님이 생각하는 중재안을 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준비해놓은 4장짜리 출력물을 건네자 바로 ‘오케이’했다. 수백억 규모의 큰 사건인데 ‘하동 녹차’로 합의 조정된 사건이다.”
“싸울 것만 법원에 와야”
— 조정이 활성화되려면 ‘디스커버리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우리에겐 생소한 제도다.
“원고와 피고가 상대방의 주장을 변호사를 통해 미리 확인하고, 한 발씩 양보해서 합의로 해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로의 ‘패’를 보고, 그것을 토대로 전문가와 협의해 당사자들끼리 합의하는 것이다. 미국은 조정으로 끝나는 게 전체 사건의 80%에 달하고, 20%만 법원으로 넘어온다. 그런데 우리는 소액이나 벌금, 약식사건에 대한 정식재판까지 모든 사건이 법원의 문턱을 넘는다. 대법원에 올라가는 사건이 연간 4만 건이 넘는다. 이건 지극히 비정상적이다. 싸울 것만 법원에 와야 한다.”
— 디스커버리 제도를 우리 법원에 도입하려면?
“법률을 개정해야 한다. 그럴 경우, 판사는 합의가 어렵거나 판단을 내리기 곤란한 복잡한 사건만 판결로 해결하게 되니까 법원의 소송 건수는 크게 줄어들 수 있다. 법원 바깥에 민간의 어떤 공적 중재원을 만들어 그곳에서 사건의 70~80% 정도를 담당하게 하면 된다. 소송 당사자들의 비용도 훨씬 줄어들 것이다.”
— 법원에 대한 불신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에 대해 ‘극단적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을 무의식적으로 기피하는 심리까지 생겨났다.
“국민들이 판사의 ‘성향’을 파악한다는 건 참으로 불행이다. 국민과 사법부와의 신뢰를 엄청나게 파괴하는 흐름인데, 참으로 개탄스럽다. 소수 인원의 일인데, 마치 법조인 전체가 ‘나쁜 집단’으로 치부되는 것 같아 너무 안타깝다.”
— 시류(時流)에 휘둘리지 않는 판결을 하려면 심지가 굳어야 할 것 같다.
“판사가 기대야 할 동아줄은 헌법과 법률이다. 판사가 재판할 때 흔들린다면, 이 사건을 관통하는 헌법과 헌법정신이 무엇인가를 심사숙고하면 답이 나온다. 그리고 판사는 확립된 선례와 판례를 존중하고, 직업적 양심, 평균적이고도 상식적인 정의감, 저울과 같은 공평의식의 소유자여야 한다. 한비자(韓非子)가 ‘법불아귀 승불요곡(法不阿貴 繩不撓曲)’이란 말을 남겼는데, ‘법은 부귀에 아부하지 아니하고, 줄자는 스스로 굽어서 측량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사법부 개혁에도 관심을 기울이셨다. 문재인(文在寅) 정부 시절 조국(曺國) 당시 민정수석과 소셜미디어상에서 일전을 벌이기도 했는데, 결국 ‘포토라인 없애기’를 관철시켰다.
“2018년 ‘밤샘 수사 폐지’를 가장 먼저 주창했고, 2019년 ‘동의 없는 포토라인 반대’ 의견 개진을 해서 제도 개선에 기여했다. 특히 포토라인 세우기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1심 판결이 나기도 전에, 유무죄를 따지지도 않고, 카메라 세례를 받게 하는 악습(惡習)이었다. 이것이 ‘중세 마녀재판’과 무엇이 다른가. 더구나 그 포토라인에 세우는 것을 검찰이 자의적(恣意的)으로 선별해 결정한다는 것은 검찰이 알권리를 구실로 현대판 ‘멍석말이’를 했던 것이다.”
— ‘법원장 후보 추천제’의 취지는 대법원장의 권한을 분산하고 법원장 선출에 민주적 요소를 확대하겠다는 취지에선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자칫하면 법원장 임명이 ‘인기투표’로 흐를 가능성도 있다는 지적이 있다.
“후보 추천제는 2019년부터 전국 13개 지방법원에서 17회의 추천이 이뤄졌고, 올해는 서울중앙지법 등 7개 지법으로 확대된다. 선거로 법원장이 되면 그 소속 법관이나 직원들에 대한 평가를 엄정하게 하기 매우 곤란하게 된다. 그래서 난 반대다. 미국의 주(州) 법원은 각각의 판사가 완벽하게 1인 독립기관이고, 법원장은 판사를 뒷바라지하는 ‘총무 판사’ 개념이라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 법원장은 사무 분담권도 있고, 직원 인사권도 갖고 있는 상당히 중요한 자리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와 친해질 수 없는 보직이다.”
—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판사는 오라클(신탁)을 받은 존재 같지만, 의외로 인간적 스트레스가 심한 직업인 것 같다.
“30년 정도 판사 일을 하다 보니 ‘극한직업’이란 표현이 맞는 것 같다. 형사사건의 경우, 원고와 피고의 인생에 법원 판결이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판결문을 작성하다 보면 그야말로 애간장이 녹으면서 스트레스 수치는 하늘을 찌른다. 연수원 동기로 얼마 전 1주기(1월 11일)를 맞은 고 윤성근(尹誠根) 부장판사도 그런 경우다. 손지열(孫智烈) 전 대법관도 극한직업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암으로 고생하다가 71세로 돌아가셨다.”
‘마징가제트 판결’
![]() |
의정부지원 시절, 강민구 판사를 지도한 손지열 전 대법관. 2010년 8월 26일 서울 종로구 내자동 김앤장 사무실에서 촬영했다. 사진=조선DB |
“그렇다. 나의 영원한 ‘사수’셨다. 1988년 의정부지원 초임 때 배석판사로 그분에게 재판의 지혜를 도제식으로 지도, 첨삭을 받았다. 처음 임관해서 형사 판결문을 썼는데, 주문(主文) 아래 판결의 근거에 해당하는 이유(理由) 부분을 ‘Z’자로 쭉 긋고 뒤에 새로 쓰셨다. 판결문을 통으로 바꾸신 셈이다. 이후론 그분께 지적받지 않았는데, 스스로 ‘마징가제트 판결’이라 부르며 마음속에 각오를 새겼다. 내가 창원지법원장에 취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거든 잘 하거라’며 식사를 사주셨는데, 항암제 투여로 그분은 거의 식사를 못 하셨고, 나 혼자 눈물 젖은 밥을 먹었다.”
— 판사님 건강은 괜찮으신가.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2002년 건강이 급격히 악화돼 사표를 낸 적도 있다. 이후 108배와 명상, 운동, 소식(小食)으로 이겨냈다. 폰에 있는 ‘삼성헬스’란 앱으로 2019년 9월부터 고교(용산고) 동창 열댓 명과 실시간으로 걷기 경쟁을 한다. 코로나19 기간 동안엔 청계산 산행을 할 수 없어 여의천을 왕복으로 걸어 1만 보를 채웠다. 늘 업무를 앞당겨 처리하는 습관이 몸에 밴 것도 건강 유지의 비결인데, 다 어머니 덕이다.”
— 어머니 덕이라니.
“내가 여섯 살 때(1963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어머니가 혼자가 되셨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남다르다. 법관 임관 후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평일 오후 6시에 서울서 차를 몰고 구미 선산으로 달려갔다. 밤 9시 이전에 도착해 어머니와 저녁을 먹고 이튿날 새벽 6시에 출발하면 오전 8시30분쯤 법원에 도착한다. 어머님과 한 방에서 자는 게 효도라고 생각해 2015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1년에 15~20회 이상, 30년 이상 계속했다. 어머니를 뵈러 가려면 일을 미리 당겨서 해야 했다.”
강금실 장관의 전화
— 창원지법원장과 부산지법원장 시절엔 ‘음악법정’을 도입해 운영했다.
“나는 ‘촌놈’ 감성이다. 중학교 때까지 산과 들의 소와 닭을 보고 자랐다. 성남법원 시절 형사단독을 하는데, 상시 미제사건이 850건이었다. 지금은 8개 형사단독이지만, 120만 명의 성남시에 당시 형사단독이 두 개밖에 없었다.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 열리는 법정이 시장터 같았다. 초조하게 재판을 기다리는 분들을 위해 집에서 오디오와 스피커를 떼어 와 법정에서 음악을 틀었다. 당시 강금실(姜錦實) 법무부 장관이 비서관을 통해 ‘아이디어를 쓰고 싶다’고 전화를 해왔다. 그 이후 전국의 교정시설, 구치소, 교도소 식사 시간에 음악을 틀었다고 한다. 지금은 각 재판부 사건도 줄어들고, ‘시차제 소환’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음악 법정이 필요 없어졌지만….”
— 법정에 예술작품을 걸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
“2012년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등 북유럽 3개국 법원의 제도 시찰을 다녀왔다. 노르웨이 오슬로 시(市) 청사를 비롯해 법정마다 그림이 걸려 있었다. ‘올커니’ 하고 돌아와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미국의 주 법정과 유럽의 상당수 국가가 법정에 미술품을 걸고 있었다. 대법원에 알리지 않고 슬그머니 지역 미술작가들과 협의해 그림을 빌려 걸었다. 작가들도 수장고에서 먼지만 쌓이던 작품들을 표구까지 해서 걸어주니 좋았을 거다. 도록(圖錄)도 만들어 주었는데, 나중에 서로 걸어달라고 난리였다. 현재 전국 11개 본·지원에서 예술법정을 운영하고 있다.”
— 현직 판사도 법정에 그림을 걸어달라고 했다던데?
“서울중앙지법에 근무하는 최아름 판사가 그 주인공이다. 화가였던 모친 박덕기 화백이 최 판사가 초등학교 때 잔디밭에 앉아 책 읽는 모습을 유화로 그렸단다. 최 판사가 그 그림을 자신이 들어가는 창원지법 212호 법정에 꼭 걸어달라 하더라. 최 판사 주례를 서면서 사연을 들어보니, 어머니가 최 판사 임관 6개월 전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거다. 엄마는 아들이 법복(法服) 입은 모습을 보지 못하고 한을 품고 돌아가셨는데, 아들이 그림을 통해 한을 풀어드린 거다. 엄마가 자신을 법정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엄마가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천사’ ‘문수보살’인 거다. 참으로 소설 같은 이야기다.”
— 영화로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지난번 방송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작가에게 전해달라(웃음). 이번에 펴낸 《송백일기 1, 2》 ‘법창에 비친 초상화’에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시즌2에서 다룰 만한 내용들이 가득하다.”
‘디지털 법원’ 구축 앞장서
![]() |
강민구 판사는 1999년부터 2년간 미 주법원행정처(NCSC)에서 사법정보화 특수연수를 받았다. 사진은 강 판사가 귀국한 후 제출한 250쪽 분량의 연수결과 보고서 〈21세기 사법 정보화의 방향과 과제〉. 이것을 토대로 2003년 750쪽의 《함께하는 법정》 단행본을 출간했고, 우리나라 전자법정의 주춧돌이 됐다. 사진=강민구 |
— 언제부터 컴퓨터와 친해졌나.
“1985년 육군사관학교 교수부에서 3년간 교수 요원으로 근무한 것이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1980년대 후반, 육사는 정보화 물결에 대비하기 위해 서울대 등 전산학과 출신 학사장교 수십 명을 교관으로 활용했고, 그곳에서 화면과 키보드만 있는 ‘멍텅구리 컴퓨터(더미 터미널)’를 처음 접했다. 4~5년 대학 후배뻘인 전산학과 출신 학사장교들에게 파스칼, 포트란 같은 코딩 언어를 배웠다.”
— ‘디지털 법원’ 구상은 언제 하게 됐나.
“1988년 의정부지원 초임 판사 때부터 중대형 조립 PC를 용산에서 사서 재판에 활용했다. 국가에서 판사들에게 컴퓨터를 준 게 1991년이다. 군인이 소총과 총탄을 자기 돈으로 산 셈이다. 교통사고 사망자의 정년까지 호봉승급을 계산기로 계산하면 일주일 정도 걸리는데, ‘쿼트로 프로’의 함수 기능으로 15분 만에 판결문 계산표를 완성하자 주위 판사들이 깜짝 놀랐다. 당시 19명의 판사도 한 달 안에 컴퓨터를 다 마련했다. 이를 계기로 스마트 법원 개념을 생각했고, 1997~1998년 법원도서관 조사심의관을 하면서 ‘종합법률정보시스템’이라는 한국형 법률 데이터베이스의 결정판을 만들어 오픈시켰다. 국민의 사법부 정보 접근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계기가 됐다.”
법률 분야 챗GPT 탄생 임박
1998년 9월 강 판사는 판례, 법령, 논문을 PC에서 마우스로 가위질해서 쓸 수 있는 프로그램을 건국 이래 처음으로 만들었다. 김용담(金龍潭) 대법관(당시 수석재판연구관)은 “강 판사가 우리 재판연구관들의 목숨을 연장해줬다”고 했고, 송영길(宋永吉) 의원의 형 송영천(宋永天) 재판연구관(현 변호사), 이광범(李光範) 재판연구관(현 LKB파트너스 대표) 등이 강 판사에게 고생했다며 술과 밥을 샀다고 한다. 판례를 보고 직접 타자를 쳐야 했던 일이 마우스로 가져다 ‘복붙(복사와 붙이기)’만 하면 돼 일의 효율이 10배, 100배나 개선됐기 때문이다.
— 판결문 전면 공개도 추진하셨다.
“30년 전 어린 판사 시절부터 판결문 실시간 전면 공개를 주장해왔다. 그래야 빅데이터가 구축되고 AI(인공지능) 시대에 살아남는다.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아직 완벽하게 실시간 공개는 하지 못한다. 까맣게 가려서 주면 ‘난수표’라서 판결문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제도 개선 차원에서 ‘개인정보보호법’의 예외 규정을 두거나, ‘판결문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을 별도로 입법하든가 한시바삐 개선해야 한다.”
— 윤석열(尹錫悅) 대통령도 ‘챗GPT’에 관심을 갖는 등 시중에서 인공지능 챗봇이 핫이슈다. 인공지능이 법조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 같나.
“두 거인 기업(구글 vs MS)이 글로벌 인공지능 시장에서 사운을 건 전쟁을 시작했다. 판결문이 공개돼 서버에 탑재만 되면 법률 분야 챗GPT도 한글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우리가 궁금한 판결을 물어보면 챗봇이 바로바로 답변해줄 테니까. ‘A와 B가 토지를 가지고 아래의 내용으로 다투고 있다. 취득시효 법리가 이 사건에서 적용되는가’라고 물으면, 챗GPT 같은 인공지능 체계가 분석해 그 자리에서 답을 할 거다. ‘인격권 침해에 대한 판례를 정리해라’고 하면 판례를 쫙 정리해서 리포트를 낼 것이고.”
— 그렇게 되면, 미래엔 변호사란 직업도 사라지지 않을까.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추월하는 ‘특이점’이 2045년쯤이라 한다. 그렇게 되면 젊은 변호사 절반은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미국의 메이저 탑 100개 로펌엔 IBM이 인공지능인 ‘왓슨’을 기반으로 2016년에 만든 인공지능 변호사 ‘로스(ROSS)’ 시스템이 구비돼 있다. 이 때문에 미국 어쏘변호사(로펌 소속 변호사)들이 일감의 70%를 빼앗겼다. 앞으로 젊은 변호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야 한다. 결국 기초 법이론을 탄탄히 하고, 아날로그 지식으로서 여러 가지 책도 많이 읽어 창의력을 기반으로 콘텐츠를 구축해야 한다. ‘생각 근육’이 튼튼한 변호사만 생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현대판 ‘법조실록’ 완성
![]() |
강민구 판사는 1988~2022년까지 34년을 실록화한 5400쪽, 7종의 현대판 ‘법조실록’을 전자책으로 편찬했다. 사진=강민구 |
— 《조선왕조실록》에 비견할 만한 방대한 ‘법조실록’이 나왔다.
“참으로 꿈꾸듯이 만들어졌다. ‘에버노트’라는 혁신적 전자메모 도구에 초고(草稿)들이 다 저장이 돼 있었고, ‘에버노트’가 나오기 이전 기록은 PC의 하드에 저장해놓았었다. 최소한 20~30년의 기록을 불러내 소팅(분류)한 다음, 목차와 서문을 만들어 도깨비 방망이 휘두르듯이 뚝딱뚝딱 만들어낸 거다.”
— 전자책들의 성격이 다 다른데?
“《코트넷의 글자취》는 내부 전산망에 올린 재판 노하우이고, 《송백일기》는 수필집이고, 《호기심에 묻고, 열정으로 답하다(즉문즉답 대담집, 2015~2022)》는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즉문즉답한 대화록이다. 《법창에 비친 초상화(언론기사 자료집, 1988~2022)》는 언론에 등장한 기사 모음이고, 《일상의 소확행을 꿈꾸다(송백일기, 2020~2021)》는 과거의 《송백일기》, 《법복의 무게 속에 함께한 재판연구 33년(학술·논문 자료집)》은 학술논문집이다. 이 중에서 《코트넷의 글자취》와 《법복의 무게…》 두 개를 뺀 5종은 일반인들이 봐도 인생에 크게 도움이 될 콘텐츠들이다.”
— 기본적으로 전자책이지만 영인본도 찍으셨나.
“지인들이 주문하면 한 부라도 만들어 배송해드리는 체제다. 인세(印稅)는 받지 않는다. 모든 책은 목차를 누르면 그대로 점프가 되고, 《월간조선》 독자분들께도 무료로 다운로드 주소(https://c11.kr/y4z5)와 큐알코드(335쪽 사진)를 제공해드릴 것이니 참고하시길 바란다.”
— 한국인의 심리상 ‘공짜’로 주면 오히려 귀한 줄 모르는데….
“그런 측면도 있을 것이다(웃음). 그런데 이 ‘법조실록’은 우리 법원 공식 데이터베이스에 전문이 다 등록돼 영구적으로 남을 것이다. ‘디지털 정약용’의 심정으로 지난 5년간 힘든 시기를 지내면서 기록으로 무언의 항변을 했고, 그 결과 영광스럽게도 우리 법원의 영구기록물이 됐다.”
‘정보의 무지가 3년을 지배했다’
— 구술한 내용을 그대로 전자책으로 만드시는데, 그러려면 말이 간결해야 할 것 같다.
“1985년부터 3년간 육사 생도들한테 강연했기 때문에, 30대 초반에 구술 훈련이 됐다. 90% 이상 법조인이 서너 장 이상을 연속해 스피치 하지 못할 것이다. 뇌의 회로가 20~30년에 걸쳐 손가락으로 가는 게 고착화됐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끊어내는 심정으로 모든 것을 말로 쓰겠다는 결심을 하고 실천해야 한다. 독한 마음으로 석 달 이상의 훈련을 해야 허들을 넘을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클로바노트’나 ‘에버노트’에 구술할 필요성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지난해 11월 8박 9일간 이탈리아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귀국 이튿날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과 에버노트 구술 텍스트를 편집, 전자책으로 완성해 지인들에게 선물로 나눠줬다.”
— ‘법조실록’과 별도로 펴낸 전자책 《코로나 외신자료집》은 1만1000쪽에 달한다. ‘과학은 뒷전이고 정보의 무지가 3년을 지배했다’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코로나19 팬데믹 3년간 우리나라 전문가들은 묵언수행(默言修行) 중이었고, 복지부동의 코로나19 방역행정이 있었고, 과잉 격리 방역행정 때문에 애꿎은 자영업자 600만 명이 희생당했다. 문재인 정부의 ‘언발의 오줌누기식’ 시혜성 지원책은 그분들에게 효용이 되지 못했다. 집단적 공포심은 ‘정보의 무지’가 원인이었다.”
— 코로나19 팬데믹 때 언론의 보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우리 신문의 코로나19 관련 보도는 의학지식 부족으로 내용이 형편없었다. 반면 유럽이나 미국 메이저 언론의 코로나19 기사들은 논문에 준하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더라. 이래선 우리의 눈과 귀가 다 가려지겠다는 생각에 새벽마다 전 세계 언론의 코로나19 관련 기사를 한 시간 반씩 정리해 1년 6개월간 1만1000쪽, 400쪽짜리 전자책 27권으로 만들어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지금의 코로나19 보고서가 됐다.”
윤성근 판사의 《법치주의를 향한 불꽃》
![]() |
강민구 판사가 ‘밤나무 검사’로 유명한 송종의 전 법제처장(현 천고법치문화재단 이사장)과 펴낸 《밤나무 검사의 음악편지》는 두 용산고·서울법대 선후배의 합작품으로 법조계의 화제가 됐다. 2016년 7월 5일 송종의 전 처장이 논산 양촌리 밭에서 포즈를 취했다. 송종의 전 처장은 농촌기업 써니빌을 일궈냈고, 모은 돈으로 천고법치문화재단을 만들었다. 사진=조선DB |
“2009년 범죄와의 전쟁을 이끌고 슬롯머신 사건 수사를 지휘하신 송종의(宋宗義) 전 법제처장(천고법치문화재단 이사장)님께 재능기부를 한 셈이다(웃음). 용산고·서울법대 17년 후배인 나를 ‘도깨비 왕초’라고 부르며 무한 격려해주신다. 송 처장님과 며칠 밤을 지새우며 작업을 했다. 〈밤나무 검사의 음악편지〉는 송 처장님이 15년 전 두 달에 걸쳐 미국에 사는 세 손녀에게 명곡 클래식 음악마다 해설을 붙여서 일일이 육필 원고로 만들어 보낸 편지들을 모아 전자책으로 엮은 것이다. 남녀노소 누가 읽어도 술술 쉽게 읽히는 음악 교양책이다. 명곡 음원 250곡 이상이 유튜브 URL과 QR 코드로 실려 있는 최초의 책이다. 그 후에 발간된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에는 아내 장형원(張馨元)의 민화(民畫) 작품 30여 컷을 실었다.”
— 법원 내 ‘국제법 전문가’로 이름난 고 윤성근 판사의 책 《법치주의를 향한 불꽃》도 출판 과정에서 큰 감동을 주었다.
“작년 1월 11일 유명을 달리한 윤성근 판사의 《법치주의를 향한 불꽃》과 후속편 《법치주의를 향한 불꽃: 법창에 비친 윤성근의 초상화》(236쪽) 등 4종의 책인데, 초판은 단 48시간 만에 만들었다. 2021년 11월 아들 결혼식에 겨우 참석한 윤 부장판사의 건강상태를 보고 출판을 결심했다. 30여 명에 달하는 윤 부장판사의 배석들을 모아 단체 채팅방을 만들고, 사법연수원 동기 단톡방 등에 호소해 올라온 글을 모아 앱 작업을 통해 제작한 것이다. 송종의 천고법치문화재단 이사장께서 초판 5000부 제작비용을 대고 대한변협(이종엽 회장)과 398명이 지원해 5000권 판매가 완료됐다. 윤 판사는 담도암 말기 투병 중 93일간 쌀 한 톨, 물 한 방울 먹지 못했지만, 자신의 칼럼집이 나온 것을 보고 기뻐하며 2000만원 인세 일부를 기부하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내 강의의 후반부는 항상 아날로그”
— 한국 사회의 향후 디지털 혁신의 방향에 대해 전망한다면.
“공적 분야의 리더들이 디지털 학습을 해야 한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자원을 능수능란하게 리더가 쓸 줄 알면 대한민국은 완전히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될 것이다. 내가 대통령실, 국회, 세종청사,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강연을 하려는 것도, 내 강연을 한 번이라도 들은 분들은 디지털 세상에 눈이 뜨인다. 디지털 능력을 활용하면 생산성을 어떻게 증대시킬 수 있는가 깨우치게 된다.”
— 종이책도 존재의 가치가 있다고 보는 건가.
“내 강의의 후반부는 항상 아날로그다. 종이책을 많이 읽으라고 권한다. 책을 읽어주는 앱도 있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해도 아날로그적 내공이 축적된 인간을 AI가 완전히 이기기는 힘들다. AI를 만들 때 코딩이나 컴퓨팅 과학자만 필요한 게 아니라, 법률가도 필요하고 인문사회학자도 필요하고, 다양한 아날로그적인 지식과 지혜를 AI에다 투입하는 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주말이면 자녀들을 서점에 풀어놓아 아날로그 내공을 쌓도록 했다.”
“아내가 인정해줘 흐뭇”
![]() |
강민구 판사가 휴대전화에 설치한 에버노트를 이용해 음성으로 메모를 하고 있다. 사진=강민구 |
“전자 메모앱 ‘에버노트’, 책의 한쪽을 찍으면 즉시 번역되고 문자인식(OCR) 기능으로 텍스트도 추출되는 ‘구글렌즈’, 인공지능형으로 출시한 혁신적 녹취 앱 ‘네이버 클로바노트’, 글자로 된 활자를 음성으로 변환해주는 ‘토크프리’, 음성입력이 되는 윈도11의 코타나(Cortana) 한글 입력 기능, 구글 크롬에서 300쪽 이하 PDF 문서를 일괄 번역하는 번역 기능 등이다.”
디지로그 창안자인 이어령(李御寜) 전 문화부 장관이 생전에 1만5000꼭지를 갖고 있었다는데, 강 판사는 에버노트에 1만7743꼭지가 있다고 한다. 하루 10꼭지 이상씩 업데이트한 셈이다. 그걸 휴대전화 등을 이용, 검색어를 입력하면 0.01초 만에 텍스트들이 나타난다. 강 판사는 “일전에 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이 아침 9시에 전화해 학술지에 논문 한 편을 한 달 기한으로 부탁하기에 저녁 5시에 25쪽 분량의 논문을 각주까지 만들어 보냈더니 그 연구원이 ‘판사님은 도와주는 스태프가 있느냐’며 놀라던데, 스태프는 다름 아닌 에버노트”라고 했다.
— 2024년 정년을 맞으시는데, 퇴임 후 계획은.
“미국의 시인 에머슨의 말처럼, 나의 존재로 인해 그 누군가를 행복하게 했고, 떠난 나를 아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퇴임 후엔 비영리단체인 ‘디지털 상록수 교실’ 창설을 계획하고 있다. 심훈의 《상록수》가 아닌, ‘디지털 까막눈’을 깨부술 ‘디지털 상록수’ 운동이다. 내 블로그 이름이기도 하다. 이젠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는 방식의 장·노년층 디지털 문맹 타파 운동을 펼치려고 한다. 지난 6월 10일 서울대법대동창회 선정 ‘제2회 창의적인 서울법대인상’을 받을 때, 시상식장에서 맨날 컴퓨터, 스마트폰 잡고 있다며 볼멘소리 하던 아내가 처음으로 날 인정해줘 흐뭇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