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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한국 조선공업의 대부 민계식 전 현대중공업 회장

“한국 조선업 세계 1위 守成의 길은 기술개발뿐”

글 : 오동룡  조선뉴스프레스 취재기획위원·군사전문기자  goms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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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단체 ‘나라지킴이고교연합’ 대표로 활동… 국민의힘 토론배틀 79세 최고령 참가
⊙ MIT서 프로펠러 유체역학 박사학위… 정주영 회장이 대우에서 전격 스카우트
⊙ ‘힘센엔진’으로 전 세계 디젤엔진 시장 석권… 쿠바에 7억 달러 이동식 발전소 수출
⊙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 현대중공업 개발한 전기차 시승하고 합작 제의
⊙ 평형수 필요 없는 배 개발해 특허… “조선산업에 획기적 전환 가져올 전망”
사진=조선DB
  “현대중공업이 개발한 중형디젤엔진 ‘힘센엔진’이 전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고,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原電) 사고 때 대한민국 건국 후 최초로 이동식 발전시스템을 일본에 무상(無償)으로 원조했습니다. 이렇게 우수한 엔진을 개발하는 잠재력 있는 나라인데, 왜 우리가 일본이나 중국에 기가 죽습니까.”
 
  지난 7월 28일 서울 강남구 학동역에 있는 그의 사무실 MKS국가웅비전략연구소에서 민계식(閔季植·79) 전 현대중공업 회장을 만났다. 그는 경기고와 서울대 조선(造船)항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MIT대학에서 해양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대우조선을 거쳐 현대중공업에서 22년간 일하며 최고경영자 자리에 올랐다. ‘조선업계 발명왕’으로 불리며 우리나라를 조선 강국으로 이끈 민 전 회장은 한국 조선업의 ‘대부(代父)’로 불린다.
 

  팔순에 접어드는 나이임에도 그는 ‘대추방망이’처럼 다부졌다. 1983년 이란 출장 때 테헤란 시내에서 조깅팬티 차림으로 시내를 달리다 이란 혁명수비대에 풍기문란(?)으로 연행될 만큼 달리기는 그의 생활의 일부다. 경기고 시절인 1950년대 말부터 마라톤을 시작해 대학 1학년 때인 1961년 9·28 서울수복기념 인천-서울 국제마라톤대회에 출전해 2시간23분48초로 7위를 기록했다. 당시 1위는 2시간17분으로 골인한 ‘맨발의 왕자’로 불리는 로마올림픽 우승자 에티오피아의 아베베 비킬라였다.
 
  그는 몸만 건강한 것이 아니다. 그의 멘탈은 청년이다. 민 전 회장은 ‘나라지킴이고교연합’이란 보수(保守) 단체 대표를 맡고 있다. 지난 6월 말 국민의힘 토론배틀에 나가 20~30대 지원자들과 대변인 선발을 놓고 겨뤘다. 국민의힘 ‘대변인 선발’ 토론배틀 최고령자 참가자로 출연해 화제가 됐다.
 
 
  ‘조선공학의 대부’, 김재근 교수
 
2007년 3월 25일 제4회 울산매일 전국 마라톤대회에서 역주하고 있는 민계식 당시 현대중공업 부회장. 사진=민계식 제공
  서울대 조선항공학과 시절 민계식은 1949년 서울대 조선공학과를 창설한 우리나라 조선공학의 대부인 고(故) 김재근(金在瑾) 교수에게 배웠다. 김재근 교수는 일제(日帝)시대 경성제대 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태평양전쟁 때 인천의 조선기계제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 조병부(造兵部)에서 일본 해군의 소형 잠수정 건조에 참여하며 조선공학의 실무기술을 터득한 선박 건조 전문가다.
 
  민계식 전 회장은 “2000년대 조선산업은 한국의 대표 효자산업이었고, 세계 10대 조선소 중 7개를 보유할 정도로 활황이었으나 조선산업의 시작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며 “조선은 해방 후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분야 중 하나로, 조선산업이 오늘날 한국의 주력산업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조선공학계의 큰 스승 김재근 박사를 비롯한 몇몇 선구자의 부단한 노력과 열정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했다.
 
  1965년 2월 ROTC 장교(3기)로 임관한 민계식은 ‘303수송이동관리단’ 소속으로 베트남전에 참전, 베트남 중부 퀴논 지역에 한국군 병력 수송을 담당했다. 그러나 민계식은 수송장교가 생리에 맞지 않아 3군단 산하 강원도 관대리에 있는 유격훈련부대 구대장으로 보직을 옮겼다. 그는 미국 유학 직전 우리나라 조선업계 현장을 익히기 위해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해 4개월간 근무했다. 당시 우리 조선업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당시 일본의 조선공업은 세계 제일로 일감이 넘쳐 새로운 조선소가 속속 건설됐죠. 우리나라의 조선공업은 대한조선공사라는 이름만의 국영기업이 있을 뿐 실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배를 짓는 것이 거의 없었고, 일감이 없다 보니 설계부원들이 모여 잡담을 하며 지낼 때가 많았어요. 급여도 규칙적으로 나오지 않아 가끔 옥상에 올라가 시위를 했죠. 원래 급여는 9000원이었는데, 수습기간 3개월 동안 7000원을 받았어요. 부산 영도산 중턱 청학동에서 하숙을 했는데, 한 달 하숙비가 5000원이었어요. 생활이 어려워 시내에 나가 가정교사로 생활비를 보탰습니다.”
 
 
  일본의 선박설계 오류를 잡아내다
 
지난 6월 24일 제1회 국민의힘 대변인 선발 토론배틀이 열린 가운데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최연장자 민계식 전 회장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조선DB
  민계식은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해 설계1과(조선설계과)에 배치됐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포항~울릉도를 취항할 280t급 화객선(강선) ‘청룡호’의 설계를 일본에 의뢰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배냐”고 할 손바닥만 한 선박이었다. 특별히 바쁜 일도 없었던 민계식은 대학 3학년 때 배운 선박 계산 지식을 활용해 청룡호의 유체정역학적 특성, 즉 흘수(吃水)에 따른 단면적, 평면적, 체적 등 각종 면적 중심과 체적 중심 배수량, 안정성 등을 계산해 일본의 자료와 비교했다. 그랬더니 일본이 보내준 설계자료와 커다란 차이가 났다. 특히 안정성에 있어서 커다란 문제가 드러났다.
 
  민계식은 직속 상관인 기본설계계장에게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렸더니 계장은 “네가 틀리면 틀렸지, 일본이 틀릴 리가 있느냐”고 오히려 면박을 주었다. 설계과장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민계식은 “설계부서 공문 형식으로 일본 설계회사에 공식의견을 물어보고, 만일 내가 실수한 것으로 결론이 난다면 수습기간 동안의 급여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얼마 후 일본 설계회사는 답신에서 자신들이 설계 실수를 했고, 빠른 시일 내에 무료로 설계 수정을 해서 보내겠노라는 사죄의 편지를 보내왔다. 280t 화객선 청룡호 명명식(命名式)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내외가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세계 제일의 조선강국이 된 오늘날에 비하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다.
 
  민계식은 1967년 8월 말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캠퍼스(UCB)에서는 펠로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는 연구조교(Research Assistant) 제의를 받았으나, 펠로십을 주는 버클리를 선택해 유학을 떠났다.
 
  “도착 다음 날 조선공학과에 가서 인사를 했는데, 세계 3대 유체역학자 웨하우센(Wehausen) 교수가 제 지도교수가 됐습니다. 정말 운이 좋았지요. 그분이 ‘항공유체역학이나 조선유체역학이 비슷하니, 1년만 더 공부해서 두 개의 석사학위를 따면 상당히 융통성(flexibility)이 있을 것’이라고 조언해주셨습니다.”
 
  마침 지도교수가 우주항공학과에서 강의를 시작했기에 민계식은 우주공학 분야를 먼저 공부, 미국 선박회사에서 함정 설계를 해 석사과정을 마쳤다. 이를 계기로 민계식은 항공기 날개 설계 기술을 먼저 습득하게 됐고, 몇 년 후 MIT에서 자신의 기술을 정교하게 다듬어 날개 설계와 프로펠러(screw propeller) 설계의 전문가가 됐고, 귀국 직전 세계 제일의 항공기 제작사 보잉에서 일할 수 있었다.
 
 
  미국 선박회사에서 함정 설계
 
  1968년 12월 결혼식을 올린 민계식은 이듬해 6월, 첫 번째 우주항공학 석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었다. 그때 아내가 출산 예정일을 3개월이나 앞당겨 조산했다.
 
  “첫아이가 인큐베이터에 3개월 동안 있으면서 병원비 2만3000달러가 청구됐습니다. 시간당 90센트를 받고 그릇 치우는 일(Bus Boy)로 시작해서 백화점 화장실 청소부(시급 2달러), 델몬트 통조림 공장 노동자(시급 3달러), 오클랜드 부두 노동자(시급 5달러)로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마지막엔 애리조나주 타이슨시에서 냉동고기를 실은 대형 트레일러를 운전해 샌프란시스코 프레몬트호텔까지 2000km를 이틀 만에 운전했습니다. 시간당 9달러를 받았는데, 이것이 미국 유학 중 마지막 막노동이었습니다.”
 
  부두 노동과 같은 막노동을 하며 파김치가 되어 강의실에 들어가면 교수들의 강의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강의노트를 빌려 보고, 녹음기를 사서 강의를 녹음해보기도 했으나 몸은 점점 지쳐갔다. 설상가상 막대한 병원비를 갚을 길이 없었다.
 
  생각다 못한 민계식은 지도교수인 웨하우센 교수에게 “석사학위로 정규 직업을 얻어 1년만 일해서 병원비를 갚고 학교로 돌아오겠다”고 하자, 지도교수는 “너처럼 나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더라”고 했다. 민계식이 MIT로 갔으니까 지도교수의 예측이 맞은 셈이다.
 
  당시 미 해군은 최신형 스프루언스급 구축함(Spruance-class destroyer)을 새로 설계해 30척을 건조하려는 미 해군 사상 최대의 함정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사업에 참여의사를 표명하고 제안서를 제출한 회사는 16개 회사였다. 민계식은 웨하우센 교수의 추천장을 받아 ‘바늘부터 비행기까지 만든다(from needle to airplane)’는 리턴십시스템스(Litton Ship Systems)에 입사했다.
 
  “선체기술부에 소속돼 함정의 유체정역학과 동역학적 특성에 대한 분석, 그리고 설계업무에 돌입했습니다. 제가 미 해군 역사상 최연소 참모총장이던 엘모 줌왈트(Elmo R. Zumwalt Jr.) 제독 앞에서 유체역학적 특성에 대해 프리젠테이션을 했죠. 우리가 사업을 따냈습니다.”
 

  1973년 9월, 최신형 스프루언스급 구축함 1호함 건조가 끝날 무렵, 민계식은 새로운 경험을 위해 원자력 잠수함을 건조하는 ‘제너럴 다이내믹스(General Dynamics) 그룹’의 전기보트 부문으로 이직했다. 핵잠수함 설계는 군사 특급비밀 취급 인가자만 들어갈 수 있었고, 인가자가 되려면 미국 시민권자여야 했다. 그는 귀국 후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지만, 일단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제너럴 다이내믹스에서 핵잠수함 설계하며 2년을 지내면서 병원비도 다 갚고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니까 더 이상 공부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내가 ‘앞날을 위해 빨리 박사학위를 마치고 보자’고 간청하다시피 해 1974년 9월 MIT 박사과정에 입학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미국의 공학계는 MIT 출신들이 주류임을 알게 됐기 때문에 버클리로 돌아가지 않고 MIT로 간 겁니다.”
 
  민계식은 1960년대 프로펠러 설계 프로그램의 세계적 권위자인 커윈(kerwin) 교수를 지도교수로 공부했다. 민계식의 1975년 박사학위 논문은 〈프로펠러 블레이드 주위의 유속측정과 추정기법(Measurement and estimation of flow velocity around propeller blades)〉이었다.
 
  “일반적으로 유속을 측정하는 기구로는 피토튜브(pitot tube)나 열선(hot wire)을 이용하는데, 이런 기기의 반응속도가 너무 느려 순간적으로 변하는 프로펠러 주위의 유동을 측정할 수 없었어요. 유동 특성을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지도교수와 상의한 끝에 레이저광(光)을 이용해보기로 했습니다. 미 해군에 제안서를 내니 채택이 돼 넉넉한 연구자금을 확보했죠.”
 
  민계식이 이용한 방법은 측정하고자 하는 위치에서 두 개의 레이저광을 교차시키고, 교차점을 지나가는 유체 중의 불순물이 반사하는 반사광의 주파수를 측정해 유속으로 환산하는 방법이었다. 세계 최초의 시도였다. 실험결과를 커윈 교수가 미국조선학회(SNAME) 프로펠러 분과위에 발표하자 전 세계적 파장을 일으켰다.
 
 
  대우조선 창립 멤버로 가다
 
  MIT에서 학위를 마친 민계식은 세계적 항공기 제작사 보잉으로 갔다. 그는 보잉에서 버클리와 MIT에서 갈고닦은 와류격자방법(Vortex lattice method)이란 신기술을 이용해 기존 항공기의 날개도 수정하고, 새로운 날개도 설계했다.
 
  1978년 8월 민계식은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 생활 11년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그는 귀국 후 한국선박해양연구소의 유체역학연구실과 선박설계연구실 두 분야를 담당하는 연구실장으로 근무했다. 선박해양연구소는 건물과 실험시설을 짓고 있었고, 연구인력이 부족해 틀이 잡히지 않았다.
 
  “당시 우리 조선산업은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외국에서 구입해온 설계도면을 이해하는 것도 힘들어했습니다. 설계도면에 따라 건조하기에 급급해 자체 설계나 성능 향상, 신제품 개발 등을 위한 연구개발에 대해선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조선업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기본적 과제들을 도출해 과제를 책정하고 연구를 수행해나갔습니다.”
 
  1979년 10월 민계식은 아내와 함께 부친의 성묘를 하고 대전으로 내려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아내를 저세상으로 보냈다. 실의의 시기를 보내던 그 무렵, 대우그룹이 옥포에 최신형 조선소를 인수해 대우조선공업이란 회사를 세웠다. 대우그룹은 김우중(金宇中) 회장을 중심으로 경기고 동창들이 주축이 됐다. 대우조선은 조선소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영업・설계・생산・관리 등 모든 분야에서 인원이 필요했다. 경기고 선배인 김훈철(金燻喆) 당시 선박해양연구소장은 “심기일전이 필요하다”며 대우조선으로 이직을 흔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민계식은 1979년 12월 대우조선에 기술담당 전무 및 기술연구소장으로 입사했다.
 
  “매일 오전 6시에 사장을 비롯한 5~6명의 임원이 김우중 회장과 함께 회의를 했고, 주로 조선소 건설에 관한 내용을 이야기했습니다. 입사 일주일 후 대관 업무 부서만 서울에 남고 다른 부서는 거제의 옥포조선소로 내려갔습니다. 내려와 보니 대리 한명과 타자수 겸 비서 한명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설계부 인원이 세명이었죠.”
 
 
  현대조선이 포기한 북해 특수유조선
 
2008년 5월 7일 전북 군산 현대 조선소 기공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민계식 현대중공업 부회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조선DB
  회사의 틀도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큰일이 일어났다. 노르웨이 국영회사인 스탓오일(Statoil·현 에퀴노르)사가 북해유전에서 생산되기 시작한 원유를 수송할 특수유조선 건조를 국제입찰에 부친 것이다. 이 사업은 당시 조선계 초미의 관심사였다.
 
  스탓오일은 당시 조선 기술이나 선박 운영에서 일반 상선에서는 시도되지 않은 파격적이고도 예외적 기술사양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추진시스템과 화물적재시스템이었다. 유조선 건조 사상 처음 시도하는 것들이었다. 민계식 전무는 우연히 만난 노르웨이 중개회사에 중개를 요청했다.
 
  “다음 날 홍인기(洪寅基) 사장이 주재하는 중역회의에서 스탓오일사의 특수유조선 국제입찰 이야기를 꺼냈더니 ‘정신 나간 사람’ ‘어쩌려고 그러느냐’는 등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어요. 일반 유조선도 꿈꾸지 못할 판에 군함보다 더 복잡한 북해 왕복 특수유조선을 어떻게 건조하느냐는 것이었죠. 기존 조선소와의 경쟁은 상상할 수도 없고, 1차 관문에서 탈락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민계식 전무는 무조건 입찰에 참여하자고 선언하고, 홍인기 사장에게 두 가지를 요청했다. 영업부로 하여금 노르웨이 중개업자와 정식 계약을 체결하고, 두 번째는 속히 노르웨이에 지사를 차려달라고 했다. 서울대 법대를 나온 홍인기 사장은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재무부 이재국장을 거쳐 대우조선 사장으로 영입된 인물로, 이해력과 판단력이 빨랐다. 홍 사장은 “중역회의라고 해야 매일 조선소 건설에 대한 회의만 하다가 비로소 회사 본연의 희망적이고 회의다운 회의를 했다”며 민 이사의 요청을 수락했다.
 
  “당시 현대중공업이 설립된 지 7년이 넘었고, 조선소 건설이 끝나 설계요원도 400명이 넘었어요. 저는 현대가 입찰에 참여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대가 참여하지 않았어요. 10년쯤 지나 현대로 옮긴 후 대학 2년 후배인 설계담당 중역에게 물어보니, 기술적으로 너무 복잡해 설계할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했다고 하더군요.”
 
 
  기적 같은 야레나호 수주
 
  2~3개의 조선회사를 선정하는 2차 평가를 앞두고 민 전무는 발주처인 스탓오일이 환영할 우리만의 기술적 제안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선공학에선 추진축과 추진기(프로펠러)의 수가 많을수록 제어장치가 복잡해져 작동이 어려워지고 동일 선속에서 추진효율이 감소한다는 게 상식이었다. 민 전무는 이 점에 착안해 대형 엔진을 치차(gear)시스템을 통해 하나로 연결하고 단축추진으로 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의 치차제작사 로만 스톨츠홀츠(Lomann Stolzholz)와 협력했다. 민 전무는 이 사실을 노르웨이 스탓오일에 알렸다.
 
  마침내 2차 평가에서 일본강관(Nippon Kokan)과 대우조선 2개 사가 선정됐다. 이제 남은 문제는 선가(船價)였다. 중개인에게 두 후보 조선소에 대한 발주처의 평가를 문의해보았더니 기술 수준과 건조 능력을 거의 동일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민 전무는 일본보다 훨씬 저가(低價)로 하자는 의견에 대해 건조원가에 상당한 부대비용을 추가해 국제선가에 뒤지지 않는 가격으로 하자고 홍 사장을 설득했다.
 
  “며칠 후 최종 종합평가가 발표됐을 때 제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일본강관은 5550만 달러를, 대우는 5500만 달러를 써냈던 거죠. 조금만 더 배짱을 부렸더라면 미친 듯한 그동안의 수고가 공염불이 될 뻔했던 겁니다. 신생 조선사가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회사와 경쟁해 겨우 1%도 안 되는 50만 달러의 가격 차이로 수주를 했어요. 경험 없는 대리 한명과 타자수를 데리고 시작한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스탓오일과의 건조계약은 1980년 3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거행됐다. 약 2년 후 건조가 끝나고 명명식 때 운항해운사 사장 부인의 이름을 따 ‘야레나(Jarena)’로 명명됐고, 그해 최고의 선박으로 선정됐다.
 
 
  “기술개발하겠다는 곳으로 가겠다”
 
2016년 4월 5일 현대중공업 특수선사업부에서 해군의 7번째 214급(1800t급) 잠수함인 ‘홍범도함’ 진수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조선DB
  1988년 김우중 회장은 잠수함 사업에 큰 기대를 하며 민계식 전무를 잠수함사업부 설계담당 중역으로 임명했다. 잠수함사업부는 해군참모차장을 지낸 고중덕(高重德)씨를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가장 큰 어려움은 해군 실무진과의 협의였어요. 독일의 잠수함 설계제작사인 하데베(HDW) 요원들이 20년간 머물면서 해군들을 세뇌해서인지 해군들의 머릿속엔 독일 잠수함뿐이었어요. 특히 앞으로 잠수함의 대형화, 원자력 추진화에 대비해 세계 각국의 잠수함들을 비교 검토하고 장점만을 취해 우리 고유의 우수한 잠수함을 개발해야 할 텐데, 이러한 중장기적 준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우중 회장과 해군 사이에 끼여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처지였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민 전무는 후진의 교육을 위해 《잠수함 설계개론》 《잠수함의 주요장비》라는 두 가지 책을 저술했다.
 
  “김우중 회장은 고교 4년 선배인데 철봉대에서 함께 철봉도 하고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평소에 저를 부를 때 직위를 부르지 않고, ‘인마, 점마’를 하셨어요. 그분은 독일 출장을 갈 때 꼭 저를 대동하고 갔고, 항공기 안에서도 옆에 앉으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지시를 하셨죠. 기술개발, 핵심역량 집중, 애프터서비스 강화 등을 말씀드렸는데, 매번 실망스러운 반응이었습니다.”
 
  1990년 2월 민계식 전무는 최후담판을 하려고 김우중 회장을 찾아 “기술개발을 하실 거냐, 안 하실 거냐” 물었으나 김 회장은 심드렁했다. 민계식 전무는 “저는 기술자로 죽을 겁니다. 기술개발을 안 하겠다면 기술개발을 하겠다는 곳으로 가겠다”며 김우중 회장 방을 나왔다.
 
 
  “내일 오시는 겁니다”
 
2013년 5월 15일 카이스트에서 ‘해상풍력에너지’라는 대학원 과목을 강의하고 있는 민계식 전 회장. 그는 미국 버클리와 MIT 유학 시절 노트를 강의에 활용하고 있다. 사진=조선DB
  1990년 4월, 민계식은 현대중공업 기술개발담당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민계식 부사장이 현대로 간 것은 다소 엉뚱하다. 민계식 부사장은 현대중공업의 사주(社主) 격인 정몽준(鄭夢準) 회장과는 출생연도가 10년 차이, 대학도 10년, ROTC도 10년, MIT 유학도 10년 차이가 났다. 민 부사장은 1980년대 중반부터 가끔 계동사옥에서 티타임을 했다.
 
  1990년 3월 민계식은 정몽준 회장에게 기술의 특성, 기술개발의 중요성, 효율적인 수행방법 등을 요약한 내용과 함께 현대그룹의 기술개발 의지를 묻는 편지를 보냈다. 정 회장이 반색하면서 즉시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약속한 장소에 갔더니 부친인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 사무실로 데리고 갔어요. 명예회장은 저를 만나 악수를 하더니 다짜고짜 ‘내일 당장 오시는 겁니다’ 하면서, 내일 울산의 현대중공업에 가서 현지상황도 살펴보고 일할 준비를 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전 그해 말에 대우조선을 그만두고 1991년 초부터 근무할 생각이었는데, 얼떨떨하기는 하였으나 명예회장의 명을 어길 수도 없었어요. 아무튼 그분 추진력은 못 당해요.”
 
  민계식 전 회장은 조선사업본부 설계실과 선박해양연구소를 맡아 연구인력을 정예화시켰다. 그는 2001년 현대중공업 사장에 취임했고, 2010년 회장에 올랐다. 1990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그는 현대중공업을 이끌면서 대한민국을 세계 1등 조선대국으로 만들었다. 그가 현대중공업 CEO로 재직한 10년간 세계 일류상품 보유를 1개에서 34개로 늘렸고, 연평균 27.4% 성장이라는 전무후무한 역사를 썼다.
 
  민계식 전 회장은 “정주영 명예회장은 외국 기술에 의존하기보다 가급적 국내 개발하도록 연구개발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현대중공업에 근무하는 22년 동안 크고 작은 신제품, 신기술, 신사업들이 개발됐다.
 
  1993년 울산에서 러시아 나홋카까지 300명을 태우고 50노트(시속 약 95km)로 운항이 가능한 초고속 수중익(水中翼) 쌍동선 ‘한마음호’를 개발했다. 1994년 세계적 저널 《Jane’s Fast Ship》은 한마음호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초고속선이라고 소개했다.
 
 
  ‘엽전이 무엇을 한다고…’
 
  당시 현대중공업의 엔진기계사업본부는 중대형 디젤엔진의 고유 모델이 없어 매년 막대한 기술료를 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중공업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가 그랬다. 민계식 부사장은 막대한 기술료가 매년 해외로 유출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통감하고 한국만의 고유 모델을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선박용 디젤엔진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추진용 대형 엔진이고, 다른 하나는 수요가 많은 일반용(주로 발전용) 중형 엔진이다. 현대중공업은 사업성을 고려해 중형 디젤엔진의 고유 모델을 개발하기로 했다.
 
  현대중공업이 독자기술로 개발한 ‘힘센엔진’은 현재도 전 세계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중형 선박엔진의 대명사다. 하지만 그 개발과정은 쉽지 않았다.
 
  “1992년에 엔진기계사업본부와 협의를 마치고 개발품의서를 준비해 C사장에게 보고하면서 ‘3년 안에 개발을 마칠 수 있다’고 했더니 사장이 ‘미친 자식’ 하고 품의서를 휙 던져버려요. 그분은 퍽 하면 ‘엽전이 무엇을 한다고 그러느냐’고 자기비하를 하는데, 그 말이 참 듣기 싫었습니다. 결국 비공식적으로 진행하다 1995년 후임 사장에게 경위를 설명하고 재가를 받았어요. 이때부터 중형 디젤엔진 고유 모델 개발업무가 날개를 달았습니다.”
 
  중형 디젤엔진은 그 뒤로 7년 만인 1999년 개발을 완료했다. 1998년 6기통 720마력의 시험용 고유 모델 중형 디젤엔진을 제작하고 내부 온도 측정 등 필요시에만 잠시 정지할 뿐 거의 1년 내내 구동하며 최종적으로 내구성을 측정했다. 전사적으로 이름을 공모해 ‘힘센엔진(Himsen Engine)’으로 명명했다. 민계식 전 회장은 “개발이 완료되자 정작 조선사업본부에서 이 엔진을 선박에 탑재하지 않겠다고 했다”며 “선박의 부품(장비)인 발전용 엔진을 팔려다 선박 자체의 계약이 어렵게 된다는 것이었다”고 했다.
 
 
  쿠바 지폐에 들어간 ‘힘센엔진’
 
현대중공업이 국내 개발한 선박용 중형 디젤엔진 ‘힘센엔진 ’. 사진=조선DB
  “저는 생각 끝에 현대중공업에서 신조선을 건조하고 있는 독일의 최대 컨테이너사인 하파그로이드(Hapag Lloyd)사의 파울로이드 사장(함부르크 공과대학 출신)에게 힘센엔진의 경제성과 성능을 자세히 설명했어요. 현대중공업에서 건조 중인 하파그로이드 컨테이너선에 장착해서 6개월만 사용해보고 만족하면 원가만 내고, 만족하지 않으면 하파그로이드에서 선호하는 엔진으로 무상 교체하겠다고 제안했죠. 이렇게 우리 고유 모델 힘센엔진이 세계 최초로 대형 컨테이너선에 5대가 탑재됐습니다. 3개월이 지난 후 하파그로이드사는 우리가 제시한 원가에 6%를 더해 지불했고, 현대중공업에서 건조하고 있는 모든 하파그로이드 배에 힘센엔진을 장착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힘센엔진이 개발되자마자 이동이 쉽고 대규모로 장기간 구동이 가능한 이동식 발전시스템(Packaged power station)의 개발이 가능해졌다. 이 시스템은 40피트 컨테이너 안에 엔진기계사업본부에서 생산하는 힘센엔진과 전기전자시스템사업본부에서 생산하는 발전기를 설치해 전기를 생산하는 장치였다.
 
  2008년 카리브해 일대에 강력한 허리케인이 발생해 쿠바의 발전소가 대부분 파괴됐다. 심한 전력난을 겪고 있던 쿠바는 발전소 건설에 대한 국제입찰을 발표했다. 당시 쿠바는 적성국(敵性國)으로 분류돼 한국과는 국교가 성립되어 있지 않았다.
 
  “저는 중역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동식 발전소 3기(약 600만 달러)를 멕시코를 통해 무상으로 후원했습니다. 쿠바는 우리의 이동식 발전소를 사용해본 후 ‘입찰도 필요 없으니 무조건 이동식 발전시스템을 써달라’고 난리가 났어요. 2007년 12월 국교도 없는 쿠바에 7억 달러 상당의 이동식 발전소 344기를 수출했습니다. 쿠바는 감사의 표시로 쿠바 화폐 10페소에 힘센엔진이 장착된 이동식 발전소를 밑그림으로 그려 넣었습니다. 쿠바에 이동식 발전소 수출은 현대중공업 사원들에게 뜨거운 자부심을 갖게 했습니다.”
 
 
  電氣車 완성 못 한 것 아쉬워
 
2011년 2월 현대중공업 회장에서 물러나는 민계식 회장. 사진=민계식
  한국 조선업은 지난 5월 중국을 제치고 다시 한 번 세계 조선 수주 1위를 차지하는 등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조선·해운 시황 분석기관인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지난 5월 세계 선박 수주량은 127만CGT(60척)로, 중국과 한국, 일본이 각각 71만CGT(31척·56%), 44만CGT(24척·35%), 11만CGT(5척·9%)를 수주한 것으로 집계됐다.
 
  민 전 회장은 “우리 조선업이 세계 1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술개발만이 살길”이라며 “제조업의 핵심은 연구개발이고, 사람이 새로운 세포가 증식되어야 성장하는 것처럼 제조업도 새로운 제품이 속속 개발되어야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민계식 전 회장은 현대중공업 재임 시절 전기차(電氣車)를 완성시키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했다. 현대중공업은 2005년 9월 후륜구동인 제네시스를 기반으로 전기차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제로백(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걸리는 시간) 8초, 최고시속 180km, 충전 후 최대 주행거리 250km, 에너지 경제성은 휘발유 자동차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이후 마티즈를 모델로 소형 전기차, 이탈리아 피아트를 모델로 중형 전기차를 완성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구멍가게’ 수준일 때 방한(訪韓)해 우리가 개발한 소・중・대형 전기차 모델을 모두 시승하고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전기차’라며 자신들의 시설을 인수하든지, 합작하자고 했습니다. 2005년 저는 GM그룹의 쉐보레를 인수, 전기자동차를 생산해서 미국 전역에 대대적으로 진출할 계획을 세웠지만, 안타깝게도 전기차 사업은 내연(內燃)기관 개발자들의 방해로 인해 사주의 재가를 받지 못하고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平衡水 필요 없는 선박 건조 방법 특허
 
  민 전 회장은 최근 평형수(平衡水·Balast water)가 필요 없는 새로운 선박 건조 방법을 개발해 세계 특허를 내놨다. 이를 시뮬레이션으로 돌려본 결과, 기존 선박 건조 방법보다는 건조비용 면에서 20~30%를 낮출 수 있고, 이 기술을 적용한 선박은 보수·유지 면에서도 현재보다 적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조선산업에 획기적 전환을 가져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산(早産)으로 민 전 회장 부부를 애태웠던 첫아들은 지금 MIT를 졸업하고 ROTC 장교로 임관해 미 해병대 코브라헬기 전투부대 대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민 전 회장은 “1992년 초여름 어느 날, 울산 현대중공업 방파제 위에 미 해병대의 코브라 헬기 8대가 착륙해 있고, 8대는 공중에서 엄호비행을 하고 있었다”며 “현대중공업 방파제 위에서 아들놈과 뜨거운 포옹을 했는데, 영화의 한 장면 같았던 아들놈의 헬기를 사진으로 남겨두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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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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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종갑    (2021-10-02) 찬성 : 9   반대 : 0
민계식 님과 같은 인물이야말로 우리나라 산업발전의 지대한 공로자이며 진정한 애국자 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입국의 선도자로서 널리 알려 과학도의 배출에 기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0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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