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證言

이승복 사건 조작보도 논란 둘러싼 金兌洙 변호사의 투쟁

“조작이라는 선입견을 주위에 강요하는 조작론자들의 위선을 보고야 말았다”

글 :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ksdhan@chosun.com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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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기념관 이승복 시체 사진은 공비에게 피살된 고영일씨의 사진

⊙ 8년여 법적 공방의 끝은 ‘조작되지 않았다’는 애초 진실의 再발견
⊙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신화 이렇게 조작됐다’로 사건 실체 부정한 조작론자들
⊙ 이승복 보도를 ‘誤報의 톱’으로 꼽았던 기사들과 주장이 결국은 최대의 誤報가 돼
⊙ 이승복 사건 보도 조작론 제기 뒤에는 조직적 움직임 있었다
⊙ “공산당이 싫어요” 외침 구심 삼은 정신무장이 현재의 대한민국 만드는 데 기여

金兌洙
⊙ 47세. 고려대 법학과 졸업.
⊙ 제38회 사법시험 합격. 동양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 조선일보 독자권익보호위원회 위원.
  1998년 8월 27일부터 9월 1일까지 6일간 서울 지하철 1호선 시청역 전시실에서는 이른바 ‘오보(誤報) 전시회’가 열렸다. 언론개혁시민연대(언개련)라는 단체의 창립기념 전시회였는데 이 전시회의 제목은 ‘개혁을 위해 뒤돌아본 우리 언론의 부끄러운 과거들’이었다.
 
  언개련은 정부 수립 50년 동안 있었던 국내 언론의 대표적 오보라며 50개 항목을 골라 ▲권력의 정당화-민주화 외면 ▲냉전 이데올로기 강화와 용공조작 ▲민중생존권 외면, 인권유린 ▲선정주의에 의한 오보 ▲언론사의 이기주의에 의한 오보 등 5개 주제별로 묶었다. 약칭 ‘언론 오보 50선’으로도 불렸다.
 
  이 전시회에서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는 북한 관련 보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점이다. 각 주제별로는 ‘독재에 날개를 달아준 예스맨 언론’ ‘반공구호 앞엔 진실도 필요 없나?’ 등의 제목을 붙여 전시했다. 이 가운데 단연 화제가 됐던 코너는 ‘반공구호 앞엔 진실도 필요 없나?’였다. 반공(反共) 정신의 상징이었던 ‘이승복 어린이’ 사건이 조작된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개련 측은 이 전시회 ‘반공구호 앞엔 진실도 필요 없나?’ 코너에 1968년 12월 9일 강원도 지역에 침투한 무장공비들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한 이승복 어린이 사건을 보도한 그해 《조선일보》 12월 11일자 사회면 톱기사를 크게 확대해 대형 패널로 내건 후 이런 설명을 붙여놨다.
 
  <“나는 거짓보도가 싫어요.”
 
  1968년 12월 조선일보는 사회면 머리기사로 ‘공비들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한 이승복의 입을 찢어버렸다’고 썼다. 이후 이승복은 반공의 상징이 됐다. 그러나 기사를 쓴 기자는 현장에 가지도 않고 현장 생존자도 만나지 않았다. 기사가 아니라 소설이었다.>
 
  이 전시회를 보도한 KBS, MBC 등 공중파 방송들의 저녁 뉴스가 클로즈업한 것도 이 이승복 관련 게시물이었다.
 
  공교롭게도 1998년은 정부 수립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지만 이승복 어린이 사건 3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30이라는 숫자의 기념적 의미 때문이었는지 이 해에는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벌어졌던 이승복 어린이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외침이 ‘《조선일보》가 조작해 낸 소설이자 신화’라는 주장으로 여러 언론매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98년 들어 《조선일보》의 이승복 어린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했다가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는 보도가 허위였다고 보도한 것은 《중앙일보》가 최초였다. 그해 6월 25일자 문화면의 기획연재물인 ‘미디어 파일’란에서 언론의 허위보도 사례로 이승복 사건을 꼽은 것이다. 《중앙일보》의 해당 기사 일부를 인용한다.
 
이승복기념관에 걸린 이승복 초상화. 사망 당시 정상적인 사진이 없어서 어릴 때 사진으로 추정해서 그린 것이다.
  <지난 1968년 12월 11일 A신문은 “공산당이 싫어요-어린 항거 입 찢어”라는 제목으로 이승복군이 공비들로부터 살해됐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후 이 기사가 작문이라는 의문이 계속 제기돼 오다 한국기자협회가 발행하는 《저널리즘》 1992년 가을호가 조작된 기사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보도 후 《국민일보》 7월 1일자, 월간 《말》지 8월호, 《한겨레》 8월 15일자와 8월 28일자, 《경남매일》 9월 17일자에 유사한 보도가 이어졌고, 이어 MBC가 〈PD 수첩〉을 통해 9월 22일에 그와 유사한 내용을 방송함으로써 ‘이승복 보도 조작 논란’에 방점을 찍었다. 이 기사들이 한결같이 ‘조작’의 근거로 든 것은 《저널리즘》 1992년 가을호 기사였다.
 
  이런 일련의 보도 가운데 관심을 끄는 것은 주간지 《미디어 오늘》의 보도다. 당시 《미디어 오늘》 편집장이었던 김종배씨는 《저널리즘》 1992년 가을호에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신화 이렇게 조작됐다’를 쓴 장본인이었다.
 
  언개련의 서울 시청역 전시실에서의 이른바 오보 전시회가 끝난 직후에 발행된 9월 2일자 《미디어 오늘》은 언개련이 선정한 ‘오보 50선’을 소개하면서 ‘냉전 이데올로기 강화와 용공조작의 상징으로 이승복 관련 조선일보 보도’를 첫 번째 사례로 꼽았다. 정부 수립 50년 동안 있었던 국내 언론의 수많은 보도 중 《조선일보》의 이승복 관련 보도를 오보 중의 오보, 즉 ‘오보의 톱’으로 뽑은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대한민국 대법원과 검찰은 《조선일보》의 이승복 관련 보도가 사실이었음을 확인해 주었고, 이승복 관련 보도가 조작됐다는 주장을 편 당시 언개련의 김주언 사무총장, 김종배 《미디어 오늘》 기자의 문제 제기가 잘못됐음을 확인해 주었다. 이승복 관련 보도를 ‘오보의 톱’으로 꼽았던 그 기사들과 주장이 결국은 최대의 오보가 된 셈이다.
 
 
  조작론의 뿌리 《저널리즘》 92년 가을호
 
경기도 소재 모 초등학교에 남아 있던 이승복 동상. 이승복군 이야기는 교과서에서도 사라졌고 1970년대 각급 초등학교에 반공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던 동상도 대부분 철거됐다.
  《저널리즘》의 92년 가을호 보도로 시작된 이승복 사건 조작론은 언뜻 보기에 다양한 매체와 시민단체에 의해 제기됐던 것처럼 보인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다양한 매체가 보도했지만 조작론의 근거라는 것이 《저널리즘》 92년 가을호뿐이었기 때문이다.
 
  언론 오보 전시회를 총괄한 인물은 당시 언개련 사무총장이었던 김주언(金周彦)씨였다. 김씨는 1992년 기자협회장으로서 문제의 기사가 실렸던 《저널리즘》 92년 가을호의 편집인이었다. 김씨가 당시 외부 기고가였던 김종배씨의 이승복 어린이 관련 글을 게재했던 것이다. 언론 오보 전시회와 《저널리즘》 92년 가을호는 그런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오보 전시회에 선정 자료를 제공한 단체는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민언련)이란 곳이었다. 1998년 8월호 《말》지에 이승복 사건 작문설을 쓴 기고자 명은 ‘민언련 신문모니터 분과’로 돼 있었다. 《말》지는 민언련 기관지로 있다가 독립한 매체다.
 
  결국 이승복 사건 보도가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인물들이나 단체는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소속 단체와 주장 방법만 바꿔가면서 목소리를 높였던 것에 불과했던 셈이다. 그럼에도 사회적 파장이 일었던 것은 이승복 사건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승복 사건 조작 논란’은 《조선일보》가 1998년 11월 이승복 사건 보도가 조작됐다는 주장을 기사나 전시회를 통해 편 핵심 인물인 김종배씨와 김주언씨에 대해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한 후 2006년 11월 대법원 판결이 날 때까지 8년여의 시간을 끌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좌파 정권이 집권해 있던 시기였다.
 
 
  좌파 정권 시절 벌어진 법정 공방
 
이승복군 일가족이 공비들에게 무참히 피살당한 다음날인 1968년 12월 10일 마을 주민들이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조선일보》 측 소송 대리인으로 법정 소송을 담당했던 김태수(金兌洙) 변호사는 당시 벌어졌던 8년여간의 법정 공방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한 권의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김 변호사를 만나 이승복 사건 조작 논란을 둘러싼 법정 공방의 막전막후를 증언 형식으로 들어봤다.
 
  ―이승복 사건 관련 《조선일보》의 68년 12월 11일자 보도가 사실이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것은 2006년 11월인데 이제야 책을 펴내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특별한 이유라는 것은 없고요. 제가 8년여 동안 벌어졌던 법적 공방 자료를 모아서 원고의 90% 정도를 완성했던 때는 대법원 판결 이듬해인 2007년이었어요. 일단 기록으로 꼭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정리를 했던 건데 상업적 이유 등으로 출판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출판을 하겠다고 나서는 곳이 없었다는 얘기죠. 그러다 지난해 말 우연한 기회에 그 사건의 역사적 의미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출판을 하겠다고 해서 이번에 나오게 된 겁니다.”
 
  ―혹시 한때 득세하는 것처럼 보였던 종북(從北)주의자들이 몰락하는 시대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가요?
 
  “전혀요. 종북주의자들이 몰락하든 득세하든 저는 이승복 사건 조작 논란 공방은 우리 현대사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에이브러햄 링컨의 ‘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는 있다. 또 몇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는 말을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이념적 편향과 편견이 만든 허위가 진실을 덮고 한때는 혹세무민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영원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사례라고 봅니다. 저는 긴 재판 과정을 통해 백 보 양보해서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면 차라리 괜찮겠지만 그 잘못된 편견을 주위에 강요하는 사람들의 위선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당연히 기록으로 남겨야죠.”
 
  ―법적 공방이 벌어진 기간을 보면 좌파 정권 집권 기간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적 상황과 이 사건이 연결돼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까.
 
  “그것이 정권 차원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섣불리 판단할 수 없지만 이 사건을 둘러싸고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고 봅니다. 다만 그 조직적인 움직임의 목표가 《조선일보》를 흠집 내려고 한 것인지 반공의 상징이었던 이승복 어린이를 흠집 내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딱 꼬집어 말하기가 좀 어렵네요.”
 
  ―그런 시대적 공간과 상황이 판결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요.
 
  “이 사건 담당 재판부가 정치적 상황에 영향을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론 관련 소송을 많이 해본 제 경험상 우리 재판부는 예민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는 양쪽 상대방이 한 발짝씩 물러나게 하는 판결을 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의 경우 핵심은 《조선일보》 보도가 사실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었는데 그 핵심에서 어긋나는 판결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이웃들의 일치하는 증언
  “공산당이 싫어요”는 있었다

 
이승복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사건 당시의 《조선일보》 기사.
  ―98년 이승복 사건 조작 논란 보도의 출발이 사회 일반에서 《조선일보》와 같이 보수 언론의 범주에 들어가는 《중앙일보》였는데요.
 
  “글쎄요. 그 연유야 저로서는 알 수 없지만 《중앙일보》는 보도 얼마 후 정정보도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승복 사건을 보도한 《조선일보》 68년 12월 11일자 기사를 보자. 기사 작성자는 강인원(姜仁遠) 기자였다. 강 기자는 당시 사회부 소속으로 서울 중부경찰서와 종로경찰서를 출입하던 사건기자였는데 그 무렵 강원도 ‘울진-삼척지구’ 대규모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발생하자 현장에 파견돼 있었다.
 
  <최후 발악하는 잔비(殘匪)는 또 외딴집에 침입, 약탈행위를 감행한 후 북괴선전을 하려다가 열 살짜리 꼬마가 “우리는 공산당이 싫다”고 하자 돌멩이로 어린이의 입을 찍는 등 일가족 4명을 무참히 죽이고 2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만행을 저질렀다. 9일 밤 11시쯤 평창군 ○○면 ○○리 이석우(李錫雨·35)씨 집에 5명이 침입, 이씨의 부인 주대화(33), 2남 승복(10)군, 3남(승수)군, 3녀 승녀(4)양을 죽이고 이씨와 장남 승원(15)군에게도 중상을 입힌 후 닭 3마리, 옥수수, 쌀 등을 약탈 도주했다.
 
  장남 승원군에 의하면 공비들은 이날 밤 가족들이 저녁밥을 먹고 막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안방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
 
  다음은 조작론의 뿌리가 된 《저널리즘》 92년 가을호 ‘“공산당 싫어요” 이승복 신화 이렇게 조작됐다’ 제하(題下) 기사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조선의 보도가 확인취재를 거쳐 작성된 것이 아니라 추측과 문장력으로 작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의 기사는 승복군의 형으로서, 사건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인 학관씨(당시에는 승권으로 불렸다)로부터 얘기를 듣고 작성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학관씨는 조선 기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
 
  조선 기자가 학관씨를 만나지 않은 것은 그의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집에서 불리던 승권이란 이름을 계속 ‘승원’으로 오기한 점, 어머니 주대하씨를 ‘주대화’로 오기한 점 등 학관씨를 만났다면 결코 틀릴 수 없는 사실을 여러 군데서 오기 또는 오보한 점으로 미루어 그가 학관씨를 만나지 않았음이 확실하다.
 
  …
 
  첫째는 강인원씨가 비록 학관씨는 만나지 않았지만 마을 주민들로부터 얘기를 전해듣고 기사를 작성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 가능성도 학관씨의 증언에 의해 폐기돼야 했다. 학관씨에 따르면 그가 집을 탈출, 헬기에 타기까지 마을과 예비군 초소에 머문 3~4시간 동안 사건 경위를 얘기할 경황이 없었다고 한다. …>
 
 
 
다른 신문들도 이름 틀리게 기재

 
  ―이승복군의 어머니 주대하씨를 주대화로 형 승권(학관)씨를 승원으로 이름을 오기(誤記)한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쳐도 강인원 기자가 당시 학관씨를 안 만난 것은 사실이잖습니까.
 
  “당시 강인원씨가 학관씨를 만나지 못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 《조선일보》 기사에서도 학관씨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얘기는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있어요. 하지만 김종배씨는 자신의 기사에서 학관씨가 이웃들에게 사건 경위를 얘기할 경황이 없었다고 했는데 사실과 달라요. 김종배씨는 《저널리즘》 기사에서 《조선일보》의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조선일보》 기자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전해듣고 썼을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확인해 보니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는 취지로 썼는데 강인원씨가 마을 주민들로부터 학관씨가 그 이야기를 했다는 말을 전해듣고 썼다는 사실은 검찰 조사 과정에서 또 재판 과정에서 이웃 주민들의 증언으로 다 밝혀진 이야기입니다. 98년 다른 매체들이 조작론을 들고 나왔을 때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의 확인 취재에서도 이승복군이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이 이웃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서 확인됐고요.”
 
  ―이웃 주민들이 말을 맞출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이학관씨를 최초로 간호한 이웃집 주인 최순옥씨, 또 학관씨가 피신하는 동안 함께 이동했던 서옥자씨 등 이웃 주민들의 말이 한결같아요. 그 사람들이 말을 맞춰야 할 이유도 없고 최순옥씨나 서옥자씨는 검찰에서 증인 자격으로 진술했던 98년에는 사건이 발생했던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에 살고 있지도 않았어요. 서옥자씨의 경우는 학관씨가 기억도 못하고 있었고요. 그런데 학관씨의 진술과 최순옥씨, 서옥자씨의 진술이 일치했어요. 그게 뭘 말하는 거겠습니까.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이 분명히 있었다는 거죠.”
 
  ―이승복기념관이 그곳에 있고 그곳을 찾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지역사회에 끼치는 경제적 이득을 이웃 주민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요?
 
  “좀 전에도 말했지만 두 분은 거기에 살지도 않고 과천하고 의왕에 사는 분들이에요. 그분들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이승복기념관을 찾는 분들은 고기를 사먹어도 평창이나 횡성으로 나가서 사먹지 기념관 부근에서 사먹지 않아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예요. 무엇보다 68년 12월 11일자 《조선일보》 기사는 현장에서 취재하지 않고는 그렇게 쓸 수가 없는 기사였어요.”
 
 
  《조선일보》의 반박과 조작론자들의 재반박 그 결과는?
 
2009년 6월 9일 강원도 평창군 이승복기념관에 복원한 생가.
  이승복군의 이웃 주민들이 검찰에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를 받게 된 경위는 이렇다.
 
  1998년 들어 각종 매체를 통해 이승복 사건 관련 《조선일보》의 보도가 오보 내지는 조작이라는 보도가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자 《조선일보》는 특별취재팀을 구성했다. 30년 전 선배 기자가 쓴 기사를 후배 기자들이 그 진실 여부를 검증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특별취재팀은 다시 사건의 현장을 찾아가서 사건 관계자, 사건 발생 주변 동네 주민들을 만나 취재하는 한편 조작설을 제기한 당사자들인 김종배씨, 김주언씨 등을 만나 인터뷰했다.
 
  이 취재 결과는 《조선일보》 98년 9월 28일자에 특집으로 게재됐다. 《월간조선》도 《조선일보》 특별취재팀과는 별개로 독자적인 사실 추적에 나서 98년 10월호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의 이승복 소년은 이렇게 죽었다’ 제하 기사를 200자 원고지 200장 분량(26페이지)으로 게재했다. 편견과 예단을 버리고 백지상태에서 이런 취재를 벌인 결과 조작론자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여기서 이승복 사건 조작 논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승복 사건 조작설을 최초 제기한 김종배씨가 기자로 있던 《미디어 오늘》은 그해 10월 7일자에 총 8개 면 중 5개 면을 할애해(8개 면 중 1개 면은 전면 광고) ‘조선 취재기자 참사 현장에 없었다’ 등 13건의 이승복 관련 기사를 실어 《조선일보》 9월 28일자 보도를 반박했다. 이어 월간 《말》지 98년 11월호에는 ‘68년 12월 10일 이승복 생가에 조선일보 기자는 없었다’ 제하 기사가 실렸다. 필자는 역시 김종배씨였다.
 
  조작론자들의 재반격에서 눈길을 끈 것은 이들이 슬그머니 쟁점을 전환했다는 사실이다. 《미디어 오늘》의 재반박 기사 중 ‘“공산당은 싫어요” 빼고 모두 사실과 달라’라는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최초 쟁점이었던 ‘이승복의 말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을, ‘《조선일보》 기자 취재 현장에 없었다’는 주장으로 쟁점의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98년 11월 5일, 이학관씨는 MBC 〈PD 수첩〉의 PD와 《경남매일신문》 기자 등을 사자(死者)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한다. 이와 별개로 조선일보사도 법적 대응에 나서 같은 달 17일 김주언씨와 김종배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 사건은 99년 9월 《경남매일신문》 기자를 200만원에 약식 기소하는 선에서 종결됐다. 김주언씨와 김종배씨는 99년 7월 검찰의 불구속 기소로 형사재판에 회부됐다. 이들 사건 조사 과정에서 이승복군의 이웃 주민들과 사건 관련자들이 참고인 조사를 받았던 것이다.
 
  ―김종배씨는 《말》지 98년 11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강인원 기자의 현장 취재를 부인하는 가장 유력한 증거 중 하나로 당시 《경향신문》 강한필 기자의 12월 10일자 기사를 들고 있는데요.
 
  “김종배씨의 표현을 빌리면 그 기사를 ‘거짓의 여지가 발견되지 않은 보도’라고 했죠. 그런데 웃긴 것은 이 기사에도 《조선일보》 기자가 현장에 없었다는 이유로 들이댄 학관씨와 이승복 어린이 어머니의 이름이 틀렸어요. 《조선일보》와 똑같이 학관씨를 ‘승원’으로, 어머니를 ‘주대화’로 틀리게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에도 오류는 많아요. 오류의 질적 측면에서 보자면 《조선일보》 기사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쑥스러울 정도로 팩트에서 크게 벗어난 기사예요. 그런데 어떻게 한쪽에 대해서는 ‘거짓의 여지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극찬을 하고 다른 한쪽에 대해서는 ‘한 군데만 빼놓고 전부 다 틀렸다’고 혹평할 수 있는지 그 독특한 설명 방식을 저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어지는 김 변호사의 말이다.
 
  “게다가 10일자 기사는 《경향신문》과 마찬가지로 당시 석간신문이었던 《중앙일보》 《동아일보》 기사와 큰 차이가 없었어요. 사건 발생 이튿날인 10일 오전 정부 당국의 사건 브리핑을 받은 후 작성된 기사였기 때문이죠. 마감 시각 때문에 석간신문들은 브리핑 자료를 토대로 기사를 쓸 수밖에 없었던 거죠. 당시 조간이었던 《조선일보》와 《한국일보》의 기사는 현장 취재를 통해 정부 당국의 브리핑이 있었던 다음날인 11일자에 사건 관련 보도가 나왔고 《경향신문》의 현장 취재 기사도 11일에 나왔어요. 이틀에 걸친 조석간 신문의 기사만 제대로 비교했어도 그런 조작론은 나올 수가 없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현장 취재 기사와 브리핑을 받아 쓰는 기사의 차이를 알고 기사만 제대로 충실하게 읽었어도, 조석간 신문의 마감 시각 등 제작 시스템만 제대로 알고 있었어도, 그런 조작 운운하는 기사는 나올 수 없었다고 봅니다. 조작론을 최초 제기했던 분이 제대로 된 기자 경험이 없어서 그런 조석간 시스템과 기사 스타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런 의문을 제기했다고 봅니다. 한마디로 무지의 소치죠.”
 
 
 
상상력으로 기사를 쓴 사람들은 조작론자들

 
1970년대까지 반공의 상징으로 이승복군을 기리는 열기는 높았다. 1975년 10월 15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도 기념관을 찾아가 이승복군의 정신을 기렸다.
  ―왜 그런 ‘독특한’ 설명 방식이 나왔을까요?
 
  “제가 당시 이승복군 사건과 관련한 중앙 일간지 기사 등 모든 기사를 읽어봤습니다. 조작론자들의 주장이 담긴 기사들도 다 읽었죠. 그 기사들을 비교해 읽고 분석하면서 조작론자들은 오로지 《조선일보》를 비방할 단서만을 물색했을 뿐 이승복 사건의 객관적인 진실을 확인하려는 노력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저는 당시 기사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후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상상력을 발휘해 글을 쓴 것은 68년 12월의 《조선일보》 기자가 아니라 조작론을 제기한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당시 《조선일보》 《한국일보》의 11일자 사건 현장 취재 기사와 동아, 중앙 등 당시 석간신문의 브리핑을 토대로 한 10일자 기사의 차이는 무엇이었습니까.
 
  “현장 취재 기사와 10일 오전 9시에 강릉경찰서에서 있었던 브리핑을 토대로 쓴 기사의 차이는 이승복군 가족 중 생존자, 즉 할머니(강순길), 아버지(이석우), 형(이학관)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석우씨가 목숨을 건지게 된 과정을 설명하는 기사 내용이 대표적입니다. 이석우씨는 아내와 자식 등 가족에 대한 대학살이 일어난 후 집에 갔다가 낌새를 눈치채고 부엌에서 뒷문으로 뛰쳐나와 돌담을 뛰어넘어 탈출하다가 오른쪽 대퇴부를 공비에게 찔리는 일을 겪게 됩니다. 《조선일보》는 이 과정을 ‘…1명을 밀어내고는 재빨리 부엌문을 통해 내리막길로 뛰었다. 이씨는 방문을 내딛는 순간 공비의 칼에 엉덩이를 찔렸다’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묘사죠. 그런데 브리핑을 통해 이씨가 엉덩이를 찔렸다는 사실은 확인했지만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던 한 석간신문은 ‘문을 뒷걸음으로 열고 나가다가 공비에게 엉덩이를 찔려 비명을 지르며 피신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도망가면서 엉덩이부터 밖으로 내밀었다는 뜻인데 일견 그럴듯하면서도 말이 안 되는 표현이죠. 눈앞에 공비가 있었다면 뒷걸음질치겠지만 전후 맥락상 공비는 문밖에서 칼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데 엉덩이부터 내밀었다는 게 말이 됩니까. 브리핑에서 칼에 엉덩이가 찔렸다고는 하는데 자세한 설명은 없으니까 그런 설명이 나왔다고 봅니다. 당국의 조사결과도 《조선일보》의 보도가 맞는 것으로 나왔고요.”
 
  ―브리핑을 토대로 쓴 기사들에서는 피해자들의 이름만 정확했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승복군의 어머니의 한자 이름이 ‘朱大河’인데 가운데 ‘大’자를 ‘文’자로 적는 경우도 있었고 승복군을 ‘성복’으로, 동생 승수를 ‘성수’로, 승녀를 ‘성녀’로 적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당국이 필사하는 과정에서 ‘大’자와 ‘文’자의 구분이 애매하게 적혀 있었던 것 같고 ‘승’을 ‘성’으로 쓴 것은 당시 지방에서는 전화통화로 기사를 불러주던 시절이었음을 감안하면 기사 송고자가 영남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간단히 말해 《조선일보》만 이승복군 가족의 이름을 잘못 썼던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당시 취재 현장에 《조선일보》가 있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입증됐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상식적으로 봐도 《조선일보》 기사를 읽어보면 현장에 가지 않고는 그런 기사가 나올 수 없어요. 당시 중앙일간지 중 조간은 조선과 한국뿐이었는데 두 기사를 보면 현장 분위기도 분위기려니와 팩트에서도 거의 일치합니다. 브리핑을 받아 쓸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석간신문인 동아나 중앙과 비교해 보면 명약관화합니다. 경향의 다음 날짜 후속 기사도 현장 취재 후 작성된 게 맞고요. 나중에 현장사진과 그 사진이 찍힌 정황으로도 《조선일보》 기자가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이 인정되고요.”
 
  ―《조선일보》 기자가 현장에 있었다는 증거로 제출된 사진 속 인물이 《조선일보》 취재기자가 아니다는 감정 결과도 나왔었는데요.
 
  “그랬죠. 재판부에 제출된 사진 중에 《조선일보》 강인원 기자가 찍힌 것으로 짐작되는 사진이 있었어요. 강인원씨 본인도 자신이라고 생각했고요. 멀리서 흐릿하게 보이는데 머리 스타일이나 모습이 당시 강인원씨와 비슷한 사진이었습니다. 그런데 감정 결과 강인원씨가 자신이라고 지목한 인물은 다른 마을 주민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강인원씨가 그 사진 속 인물이 자신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 것은 자신이 당시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30년도 더 지난 사진이었으니까요. 기억의 착오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조선일보》 사진기자가 현장에서 찍은 다른 사진들이 발견됐고 헌병이 사건 현장으로 가는 길을 통제했다는 등 강인원씨만이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정황 증언들이 사진으로 확인되는 등 다른 여러 가지 정황 증거들로 《조선일보》 강인원 기자가 현장을 취재했고 그것을 토대로 기사를 썼다는 사실은 확인됐습니다.”
 
 
  무죄라고 해서 조작론이 옳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승복 사건 등 강원 울진-삼척지구에 침투한 무장공비들의 만행을 취재 중인 《조선일보》 노형옥(오른쪽) 사진기자와 강인원 기자.
  이승복 사건 조작론자들이 기소된 후 제1심 형사재판은 1999년 9월 14일 처음 열렸고 2002년 7월 6일 35회 공판을 끝으로 변론이 종결됐다. 1심 선고가 이루어진 날은 2002년 9월 3일이었다. 1심은 피고인 김주언씨와 김종배씨에 대해 공소사실 전부에 대해 유죄가 인정돼 각각 징역 6월과 징역 10월의 실형이 선고됐다.
 
  항소심 판결은 2004년 10월 28일에 있었다. 항소심 공판은 14회 열렸다. 항소심에서는 실형을 선고했던 1심 판결을 파기하고 김주언씨에 대해서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피고인 김종배씨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2006년 11월 24일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법정 공방의 핵심 2가지, 즉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이승복군의 외침이 있었고 ▲사건 다음날 《조선일보》 기자가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기사를 송고한 점 등 두 가지 모두를 객관적 사실로 인정했다. 김주언씨가 소위 ‘오보 전시회’를 통해 적시한 내용, 김종배씨가 《말》지나 《미디어 오늘》을 통해 적시한 사실은 모두 허위로 판결됐다.
 
  ―조작설을 최초 제기했던 김종배씨가 무죄 선고를 받았는데요.
 
  “무죄라고 해서 김종배씨가 이승복 사건이 조작이라고 했던 주장이 맞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법원은 김종배씨의 경우 ‘적시한 사실이 허위이긴 하나 이를 진실이라고 믿음에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인정해 무죄를 선고한 것입니다.”
 
  ―일반인들로서는 이해가 어려울 것 같은데.
 
  “우리 법원은 어떠한 보도가 비록 허위라고 하더라도 취재기자가 그 보도내용을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는 면책을 허용합니다. 즉 어떠한 사실이 진실임이 입증된 뒤에만 보도할 수 있다고 하면 언론 활동이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으므로 최선을 다한 취재에 대해서는 그 보도 내용의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면책을 허용하는 거죠. 언론 활동에 숨 쉴 공간을 틔워주자는 취지인데 전문용어로 상당성(相當性) 요건이라고 합니다. 사실과 다른 광우병 보도로 물의를 일으켰던 MBC 〈PD 수첩〉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면 됩니다. 〈PD 수첩〉은 이승복 사건 조작설 보도에서도 그런 판결을 받은 전례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법을 악용한다면 그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김주언씨가 유죄를 받았지만 이승복 사건 조작설을 최초로 제기했고 그 이후에도 기사를 통해 조작설을 계속 제기해 왔던 김종배씨가 무죄 선고를 받은 후 ‘무죄’라는 단순한 문자적 의미만을 들먹여가며 조작설이 사실이었다고 주장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없습니까.
 
  “김종배씨 본인은 그렇게 안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조작론자들의 변호를 맡았던 변호인 중에 법원의 판결 결과와 상관없이 아직도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분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남의 의견은 안 듣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분들이 아닐까 싶네요.”
 
 
  당시 강원도에 베트콩마을이 들어섰다면…
 
  ―이승복 사건 조작 논란을 한가운데서 지켜보고 또 책으로 그 기록을 남기려는 노력을 하면서 느낀 이승복 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뭐라고 봅니까.
 
  “이승복군 자체는 그냥 어린아이였고 교육받은 대로 행동을 했다고 봐요. 그가 말한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외침을 구심 삼았던 우리의 정신무장은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의 자유가 이렇게 신장하게 된 요인도 그런 사람들의 희생이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1968년 강원도 울진-삼척지구에 침투한 간첩들이 월남처럼 베트콩 부락의 구축에 성공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대한민국의 한쪽 귀퉁이가 내전 상태에 들어갔을 것이고 그 문제의 해결에 국력을 쏟느라 산업화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겠지요. 우리는 지금도 마을 공동화장실 앞에서 길게 줄을 서고 차례를 기다리는 날들을 매일 아침마다 맞이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김태수 변호사는 인터뷰 말미 1968년 겨울 강원도 울진-삼척지구에 침투한 무장공비들에 맞서 싸웠던 이들의 반공정신이 얼마나 투철했는지를 들려주었다.
 
  “이승복군 때문에 이야기가 묻히긴 했지만 전병두라는 분이 있었어요. 30대였는데 칼을 든 무장공비 앞에서 공산당 입당 원서 안 찍겠다고 버티다가 돌에 맞고 칼에 찔려 죽었답니다. 세상 물정 다 알 만한 나이인데도 공산당이 싫다고 한 이승복군이나 다름없는 반공의식을 공비들 앞에서 대놓고 드러낸 거예요. 정말 대단한 반공의식이죠. 그 강원도 깊은 산골에 사는 분들의 삶이 얼마나 비루했겠습니까. 그래도 그분들은 공산당이 싫다고 했고 무장공비들이 자신들의 터전에 발을 못 붙이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다시 그런 분들을 제대로 기려야 하고 강원도민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단독]
 
이승복기념관의 이승복 시체 사진은 이승복이 아니다
-같은 시기 공비에 살해당한 고영일씨의 사진

 
이승복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이승복군 시체 사진. 그러나 김태수 변호사가 확인한 결과 그 사진은 비슷한 무렵 공비에 피살당한 고영일씨의 사진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승복기념관에는 발가벗겨진 채 입 주위가 칼로 찢긴 처참한 모습의 이승복군 사진이 걸려 있다. 기념관에 걸려 있던 이승복군의 사진이 너무 변색되고 망가져 1999년에 《대한뉴스》 필름을 인화한 것이라고 한다.
 
  기념관에 걸려 있는 이승복 시체 사진이 혹시 다른 사람의 사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김태수 변호사는 지난해 봄 사실 확인에 나섰다.
 
  이승복군 가족이 무장공비들에 의해 살해당할 당시 강원 지역에서 일가족 피살 사건은 총 4건이 발생했다. 11월 14일에 있었던 ‘최만석씨 일가 피살사건’은 최만석(86) 노인과 며느리 신월술(52)씨, 손녀 용갑(15)양 등 3명이 살해당한 사건이고, 11월 20일에 있었던 ‘고원식씨 일가 피살사건’은 고영일(60)씨, 이형녀(61)씨, 며느리 김명순(22)씨, 장녀 상오(6)양, 2녀 상금(2)양 등 일가족 5명이 피해자다. 11월 25일에 있었던 ‘우태봉씨 일가 피살사건’은 우씨의 어머니 박옥순(50) 여인, 이복동생 김생규(12)군, 장녀 영자(4)양 등 일가족 3명이 살해당한 사건이다.
 
  김 변호사는 《대한뉴스》 1970년 1월 1일자를 돌려보다가 기념관에 걸려 있는 사진이 고영일씨 사진일 거라는 추정을 하게 됐다. 김 변호사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정보자료실 지하창고에서 고영일씨 일가족 피살 사진을 찾아내 비교했다. 그 결과 이승복기념관에 걸려 있는 이승복 사진은 1968년 11월 20일 사망한 고영일씨 사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김 변호사가 곧 펴내는 책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에 소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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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배    (2014-03-03) 찬성 : 203   반대 : 126
이를 방심하거나 묵묵무답하고 적절하게 이용하여 대통령이 된 사람이 있었다. 어리석은 자들은 거짓과 위선에 속아 더 어리석게 되었다. 기만술에 능한 자는 바보를 바보로 만들지 않았다. 그를 영웅 취급하여 분위기를 띄우고 자신의 하수인으로 맹종자로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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