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金大中·盧武鉉 정부의 방해 공작으로 기념관 건립 표류
⊙ 기념관 건물을 마포구 공공도서관과 나눠 써야 하는 옹색한 구조
⊙ “유신 2기 임기 1년 전 사퇴하고 金鍾泌에게 권력 물려주려 했다”
金正濂
⊙ 1924년 서울 출생.
⊙ 일본 오이타(大分)상업학교 졸업. 美 클라크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
⊙ 재무부 이재국장, 재무부 차관, 상공부 차관, 재무부 장관, 상공부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주일대사 역임. 現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장.
⊙ 저서: <한국경제정책 30년사> <아, 박정희> 등.
⊙ 기념관 건물을 마포구 공공도서관과 나눠 써야 하는 옹색한 구조
⊙ “유신 2기 임기 1년 전 사퇴하고 金鍾泌에게 권력 물려주려 했다”
金正濂
⊙ 1924년 서울 출생.
⊙ 일본 오이타(大分)상업학교 졸업. 美 클라크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
⊙ 재무부 이재국장, 재무부 차관, 상공부 차관, 재무부 장관, 상공부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주일대사 역임. 現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장.
⊙ 저서: <한국경제정책 30년사> <아, 박정희> 등.
- 9년3개월 간 박정희 대통령을 모신 김정렴 전 비서실장.
金正濂(김정렴) 前(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1969년 10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9년3개월 동안 朴正熙(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10개월 남짓한 기간을 제외하면 박 전 대통령과 집권 후반부를 함께한 셈이다.
1979년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에도 그는 계속 박정희를 분신처럼 모셔왔다. 1990년 <한국경제정책30년사-김정렴 회고록>을 시작으로 <아, 박정희-김정렴 정치회고록>(1997년) 등을 펴내 박정희의 경제정책과 리더십을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선 것이다.
1993년에는 세계은행 간담회에 기조연설자로 나가 박정희의 경제개발정책에 대해 강연하기도 했다. 2007년부터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다.
올해는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30주년이 되는 해. 박정희대통령기념관 건립현황과 박정희의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김정렴 실장을 찾아갔다.
지난 8월 리얼미터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국가 발전에 기여한 대통령으로 박정희를 꼽은 응답자가 53.4%로 가장 많았다. 金大中(김대중)은 25.4%로 2위, 盧武鉉(노무현)이 12.3%로 3위를 차지했다.
좌파정권 10년이 지나도 박정희에 대한 국민들의 긍정적 평가가 여전한 이유에 대해 김 실장은 “박정희 대통령 재임 18년 동안 5000년래의 가난과 굶주림을 완전히 해결했고, 그분 덕분에 最貧國(최빈국) 수준이던 이 나라가 선진국 문턱에 오르게 됐다는 것을 국민들도 인정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지난 20년 동안 일반 국민이나 전문가 집단에 역대 대통령의 치적이나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박정희는 늘 압도적으로 수위를 차지했다. 박정희에 대한 이런 높은 평가와는 달리 박정희대통령기념관 건립 사업은 지지부진하다.
金大中·盧武鉉 정부의 방해 공작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박정희대통령기념관 건립 지원 의사를 밝힌 것은 10년 전인 1999년 5월이었다. 이에 따라 그해 7월에는 申鉉碻(신현확) 전 국무총리를 회장으로 하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2001년 11월 기념사업회는 서울시와 서울 상암동 공원 내에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건립을 위한 부지사용 협약을 체결했다. 이듬해 1월 기념관 건립공사가 시작됐지만, 그해 6월 월드컵을 앞두고 중단됐다. 이때까지의 공정률은 16.5%였다.
이후 공사는 재개되지 못했다. 김대중 정권의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가 1999년과 2000년 국회의 승인을 얻은 국고보조금 200억원에 대한 집행 승인을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기념사업회의 모금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행자부는 “기념사업회가 건립비 214억원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100억원의 기부금을 확보하면 국고보조금 100억원에 대한 집행 승인을 내주겠다”고 했다.
기념사업회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무역협회, 대한상공회의소 등의 도움을 받아 100억원의 기부금을 모았다. 그러는 사이에 노무현 정권이 들어섰다.
노무현 정권은 “100억원을 모아 오면 국고보조금 100억원에 대한 집행 승인을 내주겠다”던 김대중 정부 시절의 약속을 어기고 집행 승인을 내주지 않았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기간 중 기념사업회는 모두 8차례나 국고보조금 집행 승인을 요청했지만, 그때마다 거절당했다.
노무현 정권의 행자부는 한술 더 떠서 2005년 3월에는 기념사업회에 ‘국고보조금 교부 취소’를 통보했다. 사업 추진이 부진하고, 기부금 모금이 당초 예정했던 500억원에 미달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기념사업회는 국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1심(2005년 12월)과 2심(2007년 12월)에서 勝訴(승소)했다. 1, 2심 법원 모두 정부의 보조금 교부 취소 처분의 부당성을 인정했다. 특히 2심 법원인 서울고등법원은 “2002년 현저히 증가하던 기부금 모금이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이후 저조해졌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이 사업에 대해 정권 내부의 비판적 시각이 더욱 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면서 “행자부 장관이 기념사업회의 보조금 집행 승인 신청을 수차에 걸쳐 거부했고, 그에 대한 정당한 사유를 인정할 수 없어, 보조금 집행 승인의 부당한 거부가 사업의 부진한 추진을 상당 부분 확대시켰다고 할 수 있다”고 判示(판시)했다. 기념사업 부진에 대한 책임이 좌파정권에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2만3000명이 건립 성금 35억원 모아
2심 승소로 금방이라도 재개될 것 같던 기념사업은 우파정권이라는 李明博(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에도 진전이 되지 않았다. 노무현 정권의 행자부가 이명박 정권 출범 직전 대법원에 上告(상고)했기 때문이다. 결국 올 4월에 와서야 대법원의 최종 확정판결이 나왔다.
이렇게 기념사업이 표류하는 동안 신현확 초대 회장과 柳陽洙(유양수) 2대 회장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김대중 정권이 박대통령기념관 건립에 흥미를 잃은 것은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영남표 좀 얻어 보려고 기념관 건립 지원을 약속했다가 별 재미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죠. 김대중 대통령 시절, 신현확 전 총리와 함께 李相周(이상주)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을 만나 기념사업 관련 어려움을 얘기하고 선처를 부탁한 적이 있어요. 이 실장도 흔쾌히 승낙했고, 실제로 자신이 직접 이 문제를 챙겨 보겠다는 의지를 피력했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비서실장은 그 문제에 간여하지 말라’고 하더랍니다. 그 얘기를 전해 듣고 ‘아, 이게 안되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김정렴 전 실장은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강경상고 후배인 金雨植(김우식)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김 실장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김 실장의 요청을 받은 행자부 장관도 처음에는 긍정적이었지만, 외부 전화를 받은 후에는 입장이 달라졌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그렇다 치고, 이명박 정권은 왜 그랬을까요. 정부에서 상고를 취하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였잖습니까.
“이명박 대통령 취임 무렵에 새 정부 측 인사들에게 정부가 상고를 취하해 줬으면 하는 뜻을 전했어요. ‘두고 보자’고 하더군요.”
김정렴 전 실장에 의하면, 그동안 모금된 돈은 120억원 가까이 된다. 그중 전경련(50억원), 무역협회(10억원), 대한상의(10억원) 등 재계에서 지원한 돈을 제외하고 일반 국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내놓은 돈은 35억원 정도. 모두 2만3000여 명이 모금에 참여했다고 한다. 필자가 2004년 유양수 회장을 인터뷰했을 때나 작년 3월 김정렴 전 실장을 인터뷰했을 때와 거의 변동이 없는 액수다.
여기에 1999년과 2000년 국회 승인을 얻어 지급된 국고보조금 200억원 가운데 176억원이 남아 있는데, 26억원은 상암동 기념관 부지 터파기 공사에 지급됐다고 한다.
옹색한 기념관 구조
―이제 기념관 건립을 다시 해야 하는데, 방향은 어떻게 정해졌습니까.
“외국의 대통령 기념관이나 기념도서관은 대통령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그의 유품을 전시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박대통령기념관은 박 대통령 한 사람을 기리는 공간이 아니라 그 시절 대통령과 국민, 기업이 하나가 되어 이룩한 성취를 기념하면서 청소년 등 後代(후대)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는 공간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아울러 박 대통령과 관련된 기록이나 자료, 문헌 등을 수집 보관하는 연구센터로 기능하도록 할 것입니다.”
당초 기념사업회가 서울시와 체결한 약정에 의하면, 기념관의 명칭은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으로 하고, 기념사업회는 대지 9917㎡에 건물 연면적 5290㎡의 3층 건물을 지어 서울시에 기부채납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미국처럼 대통령 ‘기념도서관’이 아니라 ‘기념·도서관’이라는 점이다. 건물 공간의 55%는 마포구 공공도서관으로, 45%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념관으로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김 전 실장에 의하면, 운영은 기념사업회가 맡는데, 도서관 운영비용까지 기념사업회가 부담한다고 한다. 이처럼 기형적인 구조가 된 것은 2002년 당시 정권과 반대세력을 의식했기 때문.
―전체 건물 면적 중 기념관이 45%에 불과한 것은 너무 옹색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열람실이나 복도에도 박 대통령 시절의 고속도로 건설, 산림녹화, 새마을운동, 호국유적지 복원사업 등에 관한 사진들을 거는 등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려 합니다.”
―박 대통령 관련 자료들도 수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선 그 시절 주요 공직자들의 자료와 그들이 정책구상에 참고하기 위해 읽었던 책들부터 수집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료들을 수집해 기념·도서관에 ‘오원철 문고’ 하는 식으로 별도 코너를 만들 생각입니다.”
―얼마 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렸던 ‘선물과 유품으로 보는 박정희展(전)’을 보았습니다. 박 대통령의 집무실 책상이 무척 소박하던데, 박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청와대 집기는 몇 번이나 바꾸었습니까.
“내가 비서실장이 되기 전은 모르겠고, 내가 실장으로 있는 동안에는 한 번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과학기술자에 대한 박 대통령의 애정
대통령이 발의하고, 한때 與野(여야) 정치인들과 전직 총리·장관 등이 나서서 추진하는 박대통령기념관이 지지부진한 사이에, 최근 민간 차원에서의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이 시작됐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동창들의 모임인 연우회(회장 朴元勳)는 지난 10월 23일 KIST 안에 2100㎡(650평) 가량의 부지를 마련해 330㎡(100평) 규모의 ‘KIST 설립자 박정희 대통령 국제기념관’을 건립하기로 했다. 기념관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을 건립하고, 과학기술 발전과 관련된 박 전 대통령의 사진 등을 전시하기로 했다.
KIST 동문들이 박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린든 존슨 당시 美(미) 대통령이 한국군의 월남 파병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특별한 선물’을 한 것이 KIST이기 때문. 한미 양국 정부는 이듬해 2월 각각 1000만 달러를 出捐(출연), KIST(설립 당시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
김정렴 전 실장은 “KIST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애정은 정말 각별했다”고 회고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명을 받은 崔亨燮(최형섭·과학기술처 장관 역임) KIST 소장은 미국 대학에서 공부한 후 열악한 국내 연구환경 때문에 귀국하지 않고 있던 과학기술자들을 국내로 불러들이기 위해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했습니다. 자동차와 아파트를 제공했고, 전 국민 의료보험이 안되던 시절에 KIST에서 미국의 의료보험회사와 계약해 의료보험금까지 부담했죠.
문교부 장관이 박 대통령에게 ‘KIST의 젊은 과학자들이 국립대 총장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는다. 교수들의 반발이 심하다’고 보고했습니다. 대통령은 최형섭 소장이 가져온 봉급표를 보고 ‘나보다 봉급이 많은 사람이 수두룩하네’라고 하더니, ‘이대로 시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래봐야 그들이 받는 월급은 미국에서 받던 월급의 4분의 1 정도에 불과했어요. 하지만 모두 애국심 하나로 귀국해서 정말 열심히 연구했어요.”
―박 대통령은 KIST를 얼마나 자주 찾았습니까.
“건설 공사 기간 중에는 한 달에 한두 번, 건설 후에는 두 달에 한 번 정도였어요. 과학기술자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온 날에는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어요.”
“중화학공업 건설 바탕에는 만주·일본 체험 있었을 것”
지난 10월 19~20일 연세대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30주년을 맞아 ‘박정희와 그 유산: 30년 후의 재검토’라는 이름의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를 주최한 사람은 柳錫春(유석춘) 연세대 교수, 咸在鳳(함재봉) 美(미) 랜드연구소 수석연구원, 김형아 호주국립대 교수였다.
김형아 교수는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이라는 책을 통해 10월유신과 중화학공업 건설 간의 상호 관련성을 주장한 인물. 그는 중화학공업 건설의 3대 주역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과 함께 김정렴 전 실장을 꼽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중화학공업정책 추진을 선언한 것은 1973년 1월. 1980년대 초까지 100억 달러 수출,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달성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나라는 이제 막 가난에서 벗어나려던 참이었다. 수출이라야 섬유 등 경공업제품에 의존하던 시절에 철강·조선·기계·자동차·화학·전자 등 중화학공업에 투자해야겠다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이에 대해 김정렴 전 실장은 “박 대통령은 사색을 많이 하는 분이었다”면서 “늘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다 보니, 중화학공업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와 함께 김 전 실장은 조심스러운 말투로 덧붙였다.
“이 얘긴 처음 하는 건데, 아무래도 젊은 시절 만주와 일본에서의 체험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어요. 일본은 만주국을 세운 후에 기시 노부스케(후일 총리), 시이나 에쓰사부로(후일 외상) 등 혁신관료들이 주축이 돼서 만주에 중화학공업시설을 건설했어요. 박 대통령은 그때 허허벌판에 공장이 쑥쑥 올라가는 모습을 봤을 것입니다.
또 일본 陸士(육사) 재학 중에는 일본이 메이지유신 후 불과 70여 년 만에 봉건농업국가에서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할 정도의 경제·군사 강국이 된 것을 보았겠죠.
국내적으로 기반이 덜 되어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나 국내 경제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화학공업 건설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만주에서도 허허벌판에 중화학공업시설이 들어섰고, 일본도 70여 년 만에 열강으로 올라섰는데,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요.”
비서관의 외부 강연·기고 금지
김정렴 전 실장은 9년3개월 동안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아마 대통령비서실장 재직 기간으로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에서도 찾기 어려운 기록일 것이다. ‘대통령 보필 비결’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지난 4월 청와대 행정관들의 性(성)매매 관련 보도가 나왔을 때, 지난 10월 철책 절단 越北(월북)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 대통령이 ‘大怒(대로)’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명박 대통령뿐 아니라, 盧泰愚(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이후 대통령의 ‘대로’ 혹은 ‘진노’에 대한 보도가 심심찮게 나오곤 했다.
―박 대통령으로부터 야단을 맞은 적은 없습니까.
“두 번 있었어요. 한 번은 정인숙 사건 때였는데, 그때만 해도 실장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어요. 세간에서는 박 대통령이 정인숙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는 소문이 무성했는데, ‘이런 소문을 말씀드려야 하나’ 하고 속으로 걱정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박 대통령이 먼저 ‘실장, 정 여인 얘기가 도는데, 나와 관계가 있다며?’라고 하시더군요. ‘그런 소문이 있습니다’고 말씀드렸더니, ‘실장, 임자도 내가 관계 있다고 생각했어?’라고 하시더군요.
다른 한 번은 병역 이행 여부가 불분명한 비서관을 썼다가 야단을 맞았습니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면서 병역미필자들은 청와대에서 내보내도록 했습니다. 비서관 중 한 명이 병역을 이행하지 않았는데, 본인은 6·25 때 학도병으로 복무했는데 정식으로 병역을 이행한 기록은 없다고 주장했어요. 믿을 만한 얘기라고 생각해 계속 청와대에서 근무하도록 했는데, 박 대통령께서 아시고 돌려보내도록 지시하셨어요.”
―그럴 때 박 대통령의 말이나 행동은 어땠습니까.
“그냥 언성이 조금 높아지는 정도였습니다.”
―박 대통령이 장관이나 비서관들에게 화를 낸 적이 있습니까.
“박 대통령은 군대 시절부터 부하들에게 기합을 주거나 하는 분이 아니었어요. 회의석상에서도 장관에게 본인이 민망해 할 얘기는 하지 않는 분이었어요. 그냥 못 마땅한 표정을 짓는 정도였죠.”
―가끔 대통령이 ‘대로’했다는 보도가 나오는데, 그런 보도가 나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보도가 나와요? 허….”
―그때는 청와대 근무자들이 사고 치는 일이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대통령께서 항상 솔선수범하니까, 수석비서관, 비서관, 행정관들도 늘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컨대 청와대 근무자가 교통사고 같은 것을 내도, 그 시절 분위기상 경찰이 알아서 봐 주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김정렴 전 실장은 빙그레 웃었다.
“그랬을 수도 있겠죠.”
中情의 유신헌법안에 거부감
지난 10월 대학교수 출신의 한 비서관이 평일에 제주도에서 열리는 학술회의에 참석해 물의를 빚었다. 김정렴 전 실장은 대통령비서실장 시절, 비서관 등 청와대 근무자들에게 외부 강연이나 기고는 물론 명함을 파서 돌리는 것도 금지했었다. 그 이유를 김 전 실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재무부와 상공부에서 장·차관을 했잖아요. 그때 보니 청와대 행정관이 각 부서의 局·課(국·과)에 나타나 청탁을 하거나 식사를 대접받는 거예요. 비서관쯤 되면 꼭 자기가 얘기하는 것이 대통령 말씀을 전달하는 것처럼 굴더군요. ‘이건 안되겠다’ 싶어서 실장이 되면서 청와대 근무자들에게 겸손하게 처신할 것을 강조하면서, 명함 새기는 것을 금했어요.”
―비서관들의 외부 기고나 강연을 못 하게 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비서관들이 외부 기고나 강연을 하면, 밖에서는 그걸 대통령의 방침으로 생각하더군요. 그래서 못 하게 했죠.”
지난 9월 17일 他界(타계)한 金聖鎭(김성진) 전 문화공보부 장관은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申稙秀(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을 법률특보로 임명, 유신헌법 개정과 자신의 퇴임 준비 작업을 맡겼다고 증언했다. 南悳祐(남덕우) 전 국무총리도 지난 9월 펴낸 회고록에서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특보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내가 봐도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방법은 엉터리’라면서 ‘헌법을 개정하고 물러나겠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김정렴 실장이 1990년 펴낸 <한국경제정책 30년사>에 의하면 1978년 7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9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박 대통령은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유신헌법 개정문제를 연구하도록 했다. 한편, 柳赫仁(유혁인) 정무수석비서관에게도 유신헌법 개정과 금후 국정운영 방안에 대해 연구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이와 함께 박 전 대통령은 유신헌법상 임기 만료 1년 이내에 대통령 유고시에는 후임자를 선거하지 않고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남은 임기를 대행하도록 되어 있는 것을 이용해 임기 1년 전 사퇴하고 金鍾泌(김종필) 전 총리를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을 김 전 실장에게 피력했다고 한다.
金鍾泌이 YS, DJ 이길 것으로 전망
김 전 실장은 “3선 개헌 이후, 특히 유신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영구 집권하려고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말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개정하고 下野(하야)할 생각을 했습니까.
“네. 박 대통령은 1972년 유신헌법을 만들 때부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정견발표 없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에 대해 부정적이셨어요. 나, 유혁인 정무수석, 김성진 대변인, 洪性澈(홍성철) 비서관 등이 있는 자리에서 중앙정보부가 案(안)을 내놓자 ‘이건 추대 아니냐?’고 언짢아하셨어요.
그 뜻을 중앙정보부에 전했지만, 중앙정보부에서는 ‘남북대화를 하자면, 우리도 90% 이상 지지율이 나와야 한다’고 고집했어요. 박 대통령은 마지못해 그걸 받아들이긴 했지만,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늘 갖고 계셨어요.”
―1978년에도 그런 식으로 다시 대통령이 되지 않았습니까.
“유신 2기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박 대통령은 ‘이번에도 추대 형식으로 됐는데, 카터가 주한미군을 뺀다고 하는 비상시기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다’면서 ‘1982년이면 중화학공업 건설이 일단락되어 20개 전투사단, 200만 예비군을 무장시킬 수 있게 된다. 자주국방이 되면 내 할 일은 다 하는 것이니 아이들 시집 장가 보내고 나도 좀 쉬어야겠다’고 하신 겁니다.”
―박 대통령이 정말 JP(김종필)를 후계자로 생각하신 겁니까.
“‘김종필이는 공화당 공천을 받아서 나오면 金泳三(김영삼)이나 김대중하고 붙어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져도 할 수 없는 일이고…’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박 대통령이 ‘JP가 YS나 DJ에게 져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까지 했습니까. 그건 야당에 정권을 넘겨줄 수도 있다는 얘긴데요.
“네.”
―박 대통령이 생각했던 개헌은 어디까지였습니까. 대통령 直選制(직선제) 수용도 고려했나요.
“직선제는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박 대통령은 1971년 대선 때부터 직선제는 안된다는 생각이 분명했습니다. 선거 유세 중에 북한이 보낸 공작원이 후보를 암살하기라도 하면, 그 혼란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間選制(간선제) 선거방식을 개선하는 정도였겠군요.
“그렇죠. 複數(복수)의 후보가 나와 정견발표를 하고 경쟁하는, 제대로 된 간선제를 해 보자는 생각이셨어요.”
―신직수 특보가 작업한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까.
“신 특보가 보따리를 싸 들고 대통령을 찾아뵌 것을 본 적은 있지만, 내용물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 보따리 안에 작업물들이 들어 있었겠죠.”
소신과 확인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 법률특보에 정식 임명된 것은 1978년 12월 개각 이후였다. 김정렴 실장은 이때 비서실장에서 물러나 주일대사로 나갔다. 김 전 실장의 얘기대로라면,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은 특보로 정식 임명되기 전부터 유신헌법 개정 작업을 시작한 셈이다.
―개헌작업은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진행됐습니까.
“1978년 12월 비서실장을 그만둔 이후의 상황은 모르겠어요. 1979년 내가 주일대사로 있을 때 유혁인씨가 출장길에 도쿄를 다녀갔는데, 유혁인씨도 그 문제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 후 6개월 뒤에 박 대통령이 돌아가셨어요.”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기나 표에 개의치 않고 옳다고 결정하면 밀고 나간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철저한 확인입니다. 고속도로 건설이건, 지하수 개발이건, 조림사업이건 간에 지시한 일은 반드시 확인했습니다. 장관으로부터 보고만 받은 게 아니라 필요하면 국장, 과장, 실무자를 찾아 직접 물어보고 확인했습니다. 담당자들은 ‘내가 하는 일은 대통령께서 관심을 갖는 중요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인기나 표에 개의치 않는 것은 사실상 추대되는 ‘유신대통령’에게나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직선으로 선출되고, 재임 중에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를 치러야 하는 5년 단임 대통령에게는 어려운 일 아닐까요.
“1963~1972년에도 대통령 직접선거가 치러졌지만, 고속도로를 만들고, 예비군을 창설하고, 월남 파병을 했잖습니까. 그때 야당이 고속도로나 예비군에 대해 얼마나 반대했는데요. 지금 야당이 대통령 비판하는 것 이상이었어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9년3개월 동안이나 대통령을 모실 수 있었던 비결이 뭡니까.
순간 85세 노인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거침없이 얘기하던 그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잠시 할 말을 찾다가 이렇게 말했다.
“사심 없이, 열심히 일하는 거죠.”⊙
사진 : 서경리
1979년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에도 그는 계속 박정희를 분신처럼 모셔왔다. 1990년 <한국경제정책30년사-김정렴 회고록>을 시작으로 <아, 박정희-김정렴 정치회고록>(1997년) 등을 펴내 박정희의 경제정책과 리더십을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선 것이다.
1993년에는 세계은행 간담회에 기조연설자로 나가 박정희의 경제개발정책에 대해 강연하기도 했다. 2007년부터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다.
올해는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30주년이 되는 해. 박정희대통령기념관 건립현황과 박정희의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김정렴 실장을 찾아갔다.
지난 8월 리얼미터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국가 발전에 기여한 대통령으로 박정희를 꼽은 응답자가 53.4%로 가장 많았다. 金大中(김대중)은 25.4%로 2위, 盧武鉉(노무현)이 12.3%로 3위를 차지했다.
좌파정권 10년이 지나도 박정희에 대한 국민들의 긍정적 평가가 여전한 이유에 대해 김 실장은 “박정희 대통령 재임 18년 동안 5000년래의 가난과 굶주림을 완전히 해결했고, 그분 덕분에 最貧國(최빈국) 수준이던 이 나라가 선진국 문턱에 오르게 됐다는 것을 국민들도 인정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지난 20년 동안 일반 국민이나 전문가 집단에 역대 대통령의 치적이나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박정희는 늘 압도적으로 수위를 차지했다. 박정희에 대한 이런 높은 평가와는 달리 박정희대통령기념관 건립 사업은 지지부진하다.
金大中·盧武鉉 정부의 방해 공작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박정희대통령기념관 건립 지원 의사를 밝힌 것은 10년 전인 1999년 5월이었다. 이에 따라 그해 7월에는 申鉉碻(신현확) 전 국무총리를 회장으로 하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2001년 11월 기념사업회는 서울시와 서울 상암동 공원 내에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건립을 위한 부지사용 협약을 체결했다. 이듬해 1월 기념관 건립공사가 시작됐지만, 그해 6월 월드컵을 앞두고 중단됐다. 이때까지의 공정률은 16.5%였다.
이후 공사는 재개되지 못했다. 김대중 정권의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가 1999년과 2000년 국회의 승인을 얻은 국고보조금 200억원에 대한 집행 승인을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기념사업회의 모금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행자부는 “기념사업회가 건립비 214억원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100억원의 기부금을 확보하면 국고보조금 100억원에 대한 집행 승인을 내주겠다”고 했다.
기념사업회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무역협회, 대한상공회의소 등의 도움을 받아 100억원의 기부금을 모았다. 그러는 사이에 노무현 정권이 들어섰다.
노무현 정권은 “100억원을 모아 오면 국고보조금 100억원에 대한 집행 승인을 내주겠다”던 김대중 정부 시절의 약속을 어기고 집행 승인을 내주지 않았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기간 중 기념사업회는 모두 8차례나 국고보조금 집행 승인을 요청했지만, 그때마다 거절당했다.
노무현 정권의 행자부는 한술 더 떠서 2005년 3월에는 기념사업회에 ‘국고보조금 교부 취소’를 통보했다. 사업 추진이 부진하고, 기부금 모금이 당초 예정했던 500억원에 미달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기념사업회는 국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1심(2005년 12월)과 2심(2007년 12월)에서 勝訴(승소)했다. 1, 2심 법원 모두 정부의 보조금 교부 취소 처분의 부당성을 인정했다. 특히 2심 법원인 서울고등법원은 “2002년 현저히 증가하던 기부금 모금이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이후 저조해졌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이 사업에 대해 정권 내부의 비판적 시각이 더욱 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면서 “행자부 장관이 기념사업회의 보조금 집행 승인 신청을 수차에 걸쳐 거부했고, 그에 대한 정당한 사유를 인정할 수 없어, 보조금 집행 승인의 부당한 거부가 사업의 부진한 추진을 상당 부분 확대시켰다고 할 수 있다”고 判示(판시)했다. 기념사업 부진에 대한 책임이 좌파정권에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2만3000명이 건립 성금 35억원 모아
2심 승소로 금방이라도 재개될 것 같던 기념사업은 우파정권이라는 李明博(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에도 진전이 되지 않았다. 노무현 정권의 행자부가 이명박 정권 출범 직전 대법원에 上告(상고)했기 때문이다. 결국 올 4월에 와서야 대법원의 최종 확정판결이 나왔다.
이렇게 기념사업이 표류하는 동안 신현확 초대 회장과 柳陽洙(유양수) 2대 회장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김대중 정권이 박대통령기념관 건립에 흥미를 잃은 것은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영남표 좀 얻어 보려고 기념관 건립 지원을 약속했다가 별 재미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죠. 김대중 대통령 시절, 신현확 전 총리와 함께 李相周(이상주)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을 만나 기념사업 관련 어려움을 얘기하고 선처를 부탁한 적이 있어요. 이 실장도 흔쾌히 승낙했고, 실제로 자신이 직접 이 문제를 챙겨 보겠다는 의지를 피력했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비서실장은 그 문제에 간여하지 말라’고 하더랍니다. 그 얘기를 전해 듣고 ‘아, 이게 안되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김정렴 전 실장은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강경상고 후배인 金雨植(김우식)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김 실장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김 실장의 요청을 받은 행자부 장관도 처음에는 긍정적이었지만, 외부 전화를 받은 후에는 입장이 달라졌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그렇다 치고, 이명박 정권은 왜 그랬을까요. 정부에서 상고를 취하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였잖습니까.
“이명박 대통령 취임 무렵에 새 정부 측 인사들에게 정부가 상고를 취하해 줬으면 하는 뜻을 전했어요. ‘두고 보자’고 하더군요.”
김정렴 전 실장에 의하면, 그동안 모금된 돈은 120억원 가까이 된다. 그중 전경련(50억원), 무역협회(10억원), 대한상의(10억원) 등 재계에서 지원한 돈을 제외하고 일반 국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내놓은 돈은 35억원 정도. 모두 2만3000여 명이 모금에 참여했다고 한다. 필자가 2004년 유양수 회장을 인터뷰했을 때나 작년 3월 김정렴 전 실장을 인터뷰했을 때와 거의 변동이 없는 액수다.
여기에 1999년과 2000년 국회 승인을 얻어 지급된 국고보조금 200억원 가운데 176억원이 남아 있는데, 26억원은 상암동 기념관 부지 터파기 공사에 지급됐다고 한다.
옹색한 기념관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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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지을 예정인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조감도. |
“외국의 대통령 기념관이나 기념도서관은 대통령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그의 유품을 전시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박대통령기념관은 박 대통령 한 사람을 기리는 공간이 아니라 그 시절 대통령과 국민, 기업이 하나가 되어 이룩한 성취를 기념하면서 청소년 등 後代(후대)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는 공간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아울러 박 대통령과 관련된 기록이나 자료, 문헌 등을 수집 보관하는 연구센터로 기능하도록 할 것입니다.”
당초 기념사업회가 서울시와 체결한 약정에 의하면, 기념관의 명칭은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으로 하고, 기념사업회는 대지 9917㎡에 건물 연면적 5290㎡의 3층 건물을 지어 서울시에 기부채납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미국처럼 대통령 ‘기념도서관’이 아니라 ‘기념·도서관’이라는 점이다. 건물 공간의 55%는 마포구 공공도서관으로, 45%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념관으로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김 전 실장에 의하면, 운영은 기념사업회가 맡는데, 도서관 운영비용까지 기념사업회가 부담한다고 한다. 이처럼 기형적인 구조가 된 것은 2002년 당시 정권과 반대세력을 의식했기 때문.
―전체 건물 면적 중 기념관이 45%에 불과한 것은 너무 옹색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열람실이나 복도에도 박 대통령 시절의 고속도로 건설, 산림녹화, 새마을운동, 호국유적지 복원사업 등에 관한 사진들을 거는 등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려 합니다.”
―박 대통령 관련 자료들도 수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선 그 시절 주요 공직자들의 자료와 그들이 정책구상에 참고하기 위해 읽었던 책들부터 수집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료들을 수집해 기념·도서관에 ‘오원철 문고’ 하는 식으로 별도 코너를 만들 생각입니다.”
―얼마 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렸던 ‘선물과 유품으로 보는 박정희展(전)’을 보았습니다. 박 대통령의 집무실 책상이 무척 소박하던데, 박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청와대 집기는 몇 번이나 바꾸었습니까.
“내가 비서실장이 되기 전은 모르겠고, 내가 실장으로 있는 동안에는 한 번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이 발의하고, 한때 與野(여야) 정치인들과 전직 총리·장관 등이 나서서 추진하는 박대통령기념관이 지지부진한 사이에, 최근 민간 차원에서의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이 시작됐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동창들의 모임인 연우회(회장 朴元勳)는 지난 10월 23일 KIST 안에 2100㎡(650평) 가량의 부지를 마련해 330㎡(100평) 규모의 ‘KIST 설립자 박정희 대통령 국제기념관’을 건립하기로 했다. 기념관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을 건립하고, 과학기술 발전과 관련된 박 전 대통령의 사진 등을 전시하기로 했다.
KIST 동문들이 박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린든 존슨 당시 美(미) 대통령이 한국군의 월남 파병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특별한 선물’을 한 것이 KIST이기 때문. 한미 양국 정부는 이듬해 2월 각각 1000만 달러를 出捐(출연), KIST(설립 당시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
김정렴 전 실장은 “KIST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애정은 정말 각별했다”고 회고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명을 받은 崔亨燮(최형섭·과학기술처 장관 역임) KIST 소장은 미국 대학에서 공부한 후 열악한 국내 연구환경 때문에 귀국하지 않고 있던 과학기술자들을 국내로 불러들이기 위해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했습니다. 자동차와 아파트를 제공했고, 전 국민 의료보험이 안되던 시절에 KIST에서 미국의 의료보험회사와 계약해 의료보험금까지 부담했죠.
문교부 장관이 박 대통령에게 ‘KIST의 젊은 과학자들이 국립대 총장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는다. 교수들의 반발이 심하다’고 보고했습니다. 대통령은 최형섭 소장이 가져온 봉급표를 보고 ‘나보다 봉급이 많은 사람이 수두룩하네’라고 하더니, ‘이대로 시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래봐야 그들이 받는 월급은 미국에서 받던 월급의 4분의 1 정도에 불과했어요. 하지만 모두 애국심 하나로 귀국해서 정말 열심히 연구했어요.”
―박 대통령은 KIST를 얼마나 자주 찾았습니까.
“건설 공사 기간 중에는 한 달에 한두 번, 건설 후에는 두 달에 한 번 정도였어요. 과학기술자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온 날에는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어요.”
“중화학공업 건설 바탕에는 만주·일본 체험 있었을 것”

김형아 교수는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이라는 책을 통해 10월유신과 중화학공업 건설 간의 상호 관련성을 주장한 인물. 그는 중화학공업 건설의 3대 주역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과 함께 김정렴 전 실장을 꼽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중화학공업정책 추진을 선언한 것은 1973년 1월. 1980년대 초까지 100억 달러 수출,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달성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나라는 이제 막 가난에서 벗어나려던 참이었다. 수출이라야 섬유 등 경공업제품에 의존하던 시절에 철강·조선·기계·자동차·화학·전자 등 중화학공업에 투자해야겠다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이에 대해 김정렴 전 실장은 “박 대통령은 사색을 많이 하는 분이었다”면서 “늘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다 보니, 중화학공업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와 함께 김 전 실장은 조심스러운 말투로 덧붙였다.
“이 얘긴 처음 하는 건데, 아무래도 젊은 시절 만주와 일본에서의 체험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어요. 일본은 만주국을 세운 후에 기시 노부스케(후일 총리), 시이나 에쓰사부로(후일 외상) 등 혁신관료들이 주축이 돼서 만주에 중화학공업시설을 건설했어요. 박 대통령은 그때 허허벌판에 공장이 쑥쑥 올라가는 모습을 봤을 것입니다.
또 일본 陸士(육사) 재학 중에는 일본이 메이지유신 후 불과 70여 년 만에 봉건농업국가에서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할 정도의 경제·군사 강국이 된 것을 보았겠죠.
국내적으로 기반이 덜 되어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나 국내 경제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화학공업 건설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만주에서도 허허벌판에 중화학공업시설이 들어섰고, 일본도 70여 년 만에 열강으로 올라섰는데,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요.”
김정렴 전 실장은 9년3개월 동안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아마 대통령비서실장 재직 기간으로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에서도 찾기 어려운 기록일 것이다. ‘대통령 보필 비결’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지난 4월 청와대 행정관들의 性(성)매매 관련 보도가 나왔을 때, 지난 10월 철책 절단 越北(월북)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 대통령이 ‘大怒(대로)’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명박 대통령뿐 아니라, 盧泰愚(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이후 대통령의 ‘대로’ 혹은 ‘진노’에 대한 보도가 심심찮게 나오곤 했다.
―박 대통령으로부터 야단을 맞은 적은 없습니까.
“두 번 있었어요. 한 번은 정인숙 사건 때였는데, 그때만 해도 실장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어요. 세간에서는 박 대통령이 정인숙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는 소문이 무성했는데, ‘이런 소문을 말씀드려야 하나’ 하고 속으로 걱정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박 대통령이 먼저 ‘실장, 정 여인 얘기가 도는데, 나와 관계가 있다며?’라고 하시더군요. ‘그런 소문이 있습니다’고 말씀드렸더니, ‘실장, 임자도 내가 관계 있다고 생각했어?’라고 하시더군요.
다른 한 번은 병역 이행 여부가 불분명한 비서관을 썼다가 야단을 맞았습니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면서 병역미필자들은 청와대에서 내보내도록 했습니다. 비서관 중 한 명이 병역을 이행하지 않았는데, 본인은 6·25 때 학도병으로 복무했는데 정식으로 병역을 이행한 기록은 없다고 주장했어요. 믿을 만한 얘기라고 생각해 계속 청와대에서 근무하도록 했는데, 박 대통령께서 아시고 돌려보내도록 지시하셨어요.”
―그럴 때 박 대통령의 말이나 행동은 어땠습니까.
“그냥 언성이 조금 높아지는 정도였습니다.”
―박 대통령이 장관이나 비서관들에게 화를 낸 적이 있습니까.
“박 대통령은 군대 시절부터 부하들에게 기합을 주거나 하는 분이 아니었어요. 회의석상에서도 장관에게 본인이 민망해 할 얘기는 하지 않는 분이었어요. 그냥 못 마땅한 표정을 짓는 정도였죠.”
―가끔 대통령이 ‘대로’했다는 보도가 나오는데, 그런 보도가 나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보도가 나와요? 허….”
―그때는 청와대 근무자들이 사고 치는 일이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대통령께서 항상 솔선수범하니까, 수석비서관, 비서관, 행정관들도 늘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컨대 청와대 근무자가 교통사고 같은 것을 내도, 그 시절 분위기상 경찰이 알아서 봐 주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김정렴 전 실장은 빙그레 웃었다.
“그랬을 수도 있겠죠.”
中情의 유신헌법안에 거부감
지난 10월 대학교수 출신의 한 비서관이 평일에 제주도에서 열리는 학술회의에 참석해 물의를 빚었다. 김정렴 전 실장은 대통령비서실장 시절, 비서관 등 청와대 근무자들에게 외부 강연이나 기고는 물론 명함을 파서 돌리는 것도 금지했었다. 그 이유를 김 전 실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재무부와 상공부에서 장·차관을 했잖아요. 그때 보니 청와대 행정관이 각 부서의 局·課(국·과)에 나타나 청탁을 하거나 식사를 대접받는 거예요. 비서관쯤 되면 꼭 자기가 얘기하는 것이 대통령 말씀을 전달하는 것처럼 굴더군요. ‘이건 안되겠다’ 싶어서 실장이 되면서 청와대 근무자들에게 겸손하게 처신할 것을 강조하면서, 명함 새기는 것을 금했어요.”
―비서관들의 외부 기고나 강연을 못 하게 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비서관들이 외부 기고나 강연을 하면, 밖에서는 그걸 대통령의 방침으로 생각하더군요. 그래서 못 하게 했죠.”
지난 9월 17일 他界(타계)한 金聖鎭(김성진) 전 문화공보부 장관은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申稙秀(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을 법률특보로 임명, 유신헌법 개정과 자신의 퇴임 준비 작업을 맡겼다고 증언했다. 南悳祐(남덕우) 전 국무총리도 지난 9월 펴낸 회고록에서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특보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내가 봐도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방법은 엉터리’라면서 ‘헌법을 개정하고 물러나겠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김정렴 실장이 1990년 펴낸 <한국경제정책 30년사>에 의하면 1978년 7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9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박 대통령은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유신헌법 개정문제를 연구하도록 했다. 한편, 柳赫仁(유혁인) 정무수석비서관에게도 유신헌법 개정과 금후 국정운영 방안에 대해 연구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이와 함께 박 전 대통령은 유신헌법상 임기 만료 1년 이내에 대통령 유고시에는 후임자를 선거하지 않고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남은 임기를 대행하도록 되어 있는 것을 이용해 임기 1년 전 사퇴하고 金鍾泌(김종필) 전 총리를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을 김 전 실장에게 피력했다고 한다.
金鍾泌이 YS, DJ 이길 것으로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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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헌법 개정 작업을 맡았던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 |
―정말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개정하고 下野(하야)할 생각을 했습니까.
“네. 박 대통령은 1972년 유신헌법을 만들 때부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정견발표 없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에 대해 부정적이셨어요. 나, 유혁인 정무수석, 김성진 대변인, 洪性澈(홍성철) 비서관 등이 있는 자리에서 중앙정보부가 案(안)을 내놓자 ‘이건 추대 아니냐?’고 언짢아하셨어요.
그 뜻을 중앙정보부에 전했지만, 중앙정보부에서는 ‘남북대화를 하자면, 우리도 90% 이상 지지율이 나와야 한다’고 고집했어요. 박 대통령은 마지못해 그걸 받아들이긴 했지만,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늘 갖고 계셨어요.”
―1978년에도 그런 식으로 다시 대통령이 되지 않았습니까.
“유신 2기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박 대통령은 ‘이번에도 추대 형식으로 됐는데, 카터가 주한미군을 뺀다고 하는 비상시기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다’면서 ‘1982년이면 중화학공업 건설이 일단락되어 20개 전투사단, 200만 예비군을 무장시킬 수 있게 된다. 자주국방이 되면 내 할 일은 다 하는 것이니 아이들 시집 장가 보내고 나도 좀 쉬어야겠다’고 하신 겁니다.”
―박 대통령이 정말 JP(김종필)를 후계자로 생각하신 겁니까.
“‘김종필이는 공화당 공천을 받아서 나오면 金泳三(김영삼)이나 김대중하고 붙어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져도 할 수 없는 일이고…’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박 대통령이 ‘JP가 YS나 DJ에게 져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까지 했습니까. 그건 야당에 정권을 넘겨줄 수도 있다는 얘긴데요.
“네.”
―박 대통령이 생각했던 개헌은 어디까지였습니까. 대통령 直選制(직선제) 수용도 고려했나요.
“직선제는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박 대통령은 1971년 대선 때부터 직선제는 안된다는 생각이 분명했습니다. 선거 유세 중에 북한이 보낸 공작원이 후보를 암살하기라도 하면, 그 혼란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間選制(간선제) 선거방식을 개선하는 정도였겠군요.
“그렇죠. 複數(복수)의 후보가 나와 정견발표를 하고 경쟁하는, 제대로 된 간선제를 해 보자는 생각이셨어요.”
―신직수 특보가 작업한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까.
“신 특보가 보따리를 싸 들고 대통령을 찾아뵌 것을 본 적은 있지만, 내용물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 보따리 안에 작업물들이 들어 있었겠죠.”
소신과 확인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 법률특보에 정식 임명된 것은 1978년 12월 개각 이후였다. 김정렴 실장은 이때 비서실장에서 물러나 주일대사로 나갔다. 김 전 실장의 얘기대로라면,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은 특보로 정식 임명되기 전부터 유신헌법 개정 작업을 시작한 셈이다.
―개헌작업은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진행됐습니까.
“1978년 12월 비서실장을 그만둔 이후의 상황은 모르겠어요. 1979년 내가 주일대사로 있을 때 유혁인씨가 출장길에 도쿄를 다녀갔는데, 유혁인씨도 그 문제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 후 6개월 뒤에 박 대통령이 돌아가셨어요.”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기나 표에 개의치 않고 옳다고 결정하면 밀고 나간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철저한 확인입니다. 고속도로 건설이건, 지하수 개발이건, 조림사업이건 간에 지시한 일은 반드시 확인했습니다. 장관으로부터 보고만 받은 게 아니라 필요하면 국장, 과장, 실무자를 찾아 직접 물어보고 확인했습니다. 담당자들은 ‘내가 하는 일은 대통령께서 관심을 갖는 중요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인기나 표에 개의치 않는 것은 사실상 추대되는 ‘유신대통령’에게나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직선으로 선출되고, 재임 중에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를 치러야 하는 5년 단임 대통령에게는 어려운 일 아닐까요.
“1963~1972년에도 대통령 직접선거가 치러졌지만, 고속도로를 만들고, 예비군을 창설하고, 월남 파병을 했잖습니까. 그때 야당이 고속도로나 예비군에 대해 얼마나 반대했는데요. 지금 야당이 대통령 비판하는 것 이상이었어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9년3개월 동안이나 대통령을 모실 수 있었던 비결이 뭡니까.
순간 85세 노인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거침없이 얘기하던 그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잠시 할 말을 찾다가 이렇게 말했다.
“사심 없이, 열심히 일하는 거죠.”⊙
사진 : 서경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