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내가 알던 박선호는 다섯 명을 저승으로 데리고 갔다!
친구 정인형·안재송을 죽이고 이기주·유성옥·김태원을 사형장으로 보냈다!
친구 정인형·안재송을 죽이고 이기주·유성옥·김태원을 사형장으로 보냈다!

- 김재규(왼쪽)와 박선호 콤비가 시해사건의 주역이었다. 10·26사태 현장검증 사진. 사진=조선DB
내가 10·26사건을 취재하면서 개인적 호기심을 풀려고 한 부분이 있다. 박정희는 과연 가슴 관통상을 당하고도 합수본부 발표처럼 “난 괜찮아”라고 말했을까? 인간이 과연 그럴 수 있나? 나는 10·26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주요 인물들을 거의 다 만났다. 물론 그 최후의 만찬장에 있었던 세 생존자도 포함된다. 김계원(金桂元)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심수봉(沈守峰) 가수, 그리고 신재순(申才順) 여대생.
이들 중 신재순씨의 증언이 가장 정확했다. 대담한 성격인 데다가 기억력과 표현력 또한 대단했다. 역사가 박정희 생애의 최후 목격자로 그녀를 선택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미친 짐승의 눈이었어요”
10·26사태 현장 목격자 신재순씨. 미국에 거주하다 1994년 귀국, 《조선일보》와 인터뷰할 때의 모습이다. 사진=조선DB〈차지철을 거꾸러뜨리고 앞을 보니 대통령은 여자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있어 식탁을 왼쪽으로 돌아 대통령에게 다가가자 여자가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권총을 각하의 머리에서 50cm 거리에 대고 쏘았습니다.〉
이 순간을, 그 사건 20년 뒤에 만난 신씨는 이렇게 기억했다.
“그 사람의 눈과 마주쳤을 때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의 눈이 아니라 미친 짐승의 눈이었어요. 그가 대통령의 머리에 총을 갖다대었을 때는 ‘다음에는 나를 쏘겠구나’ 생각하고 후다닥 일어나 실내 화장실로 뛰었습니다. 저의 등 뒤로 총성이 들렸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도 문손잡이를 꼭 쥐고 있었습니다.”
바깥이 좀 조용해지자 그녀는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대통령은 실려 나갔고 방바닥에서는 차지철이 하늘을 보고 누워서 신음하고 있었다. 일으키려고 손을 당겼다.
‘체념한 듯 해탈한 듯’
“차 실장은 몇 번 힘을 써 보다가 포기하는 눈빛을 하고 말했습니다. ‘난 못 일어날 것 같애.’ 그러고는 다시 쓰러져 신음하는데 그 눈빛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날 밤 차 실장은 김 부장을 자극하고 약을 올리듯 막말을 했습니다. 그래도 고마운 것은, 그날 제가 대기실에서 면접을 볼 때 술을 못 마신다고 했더니 그분은 ‘옆에 깡통을 갖다 놓을 터이니 거기에 부어 버려라’라고 말하더군요.”
나는 박정희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서 여러모로 물어보았고 설명은 일관성이 있었다.
“그날 밤 대통령께서는 좀 취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말이 헛나올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인자한 아버지 같았어요. 피를 쏟으면서도 ‘난 괜찮아’라는 말을 또박또박 했으니까요. 그 말은 ‘난 괜찮으니 자네들은 어서 피하게’라는 뜻이었습니다. 일국(一國)의 대통령이시니까 역시 절박한 순간에도 우리를 더 생각해 주시는구나, 생각했죠. 그분의 마지막은 체념한 모습이었는데 허무적이라기보다는 해탈한 모습 같았다고 할까요. 총을 맞기 전에는 ‘뭣들 하는 거야!’ 하고 화를 내셨지만 총을 맞고서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였어요. 어차피 일은 벌어졌으니까요.”
나는 “체념한 듯, 해탈한 듯했다”는 명언(名言)을 건져 자주 써먹는다. 박정희가 보통 사람처럼 행동했더라면? (권총을 차지 않았던) 차지철 실장처럼 실내 화장실로 달아났고 김재규가 숨어 있는 대통령을 찾아내 사살하는 모습이었다면 우리는 지금 그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 것인가. 박정희의 비범한 죽음과 그 목격자로 해서 우리는 한 운명적 인간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우스운 일이 하나 있었다. 김재규의 명령을 받아 명사수 정인형·안재송 경호관을 직접 사살하고, 총상을 입고 신음하는 다른 경호원들을 확인사살하라고 시켰던, 이날 궁정동 작전의 지휘자 박선호(朴善浩) 중정 의전과장이 두 여인(심수봉·신재순)에게 20만원씩이 든 돈봉투까지 주고 차에 태워 집으로 보내 주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이 사살당하는 것을 목격한 두 사람을, 이 사건의 주요 임무 종사자가 감시자도 붙이지 않고 현장에서 이탈하게 했다는 이 점이 10·26사건의 성격을 이야기해 준다. 김재규는 살인엔 과감했지만 그 뒤는 지리멸렬했다. 재판 과정에서는 실패한 구국(救國)혁명으로 미화하려 했지만 전두환에게 권력을 넘겨 주는 역사적 역할을 하고는 사라진다.
殺意의 탄생
1975년 1월 31일 박정희 대통령이 건설부를 연두 순시하기 위해 차지철(왼쪽) 경호실장, 김재규(맨 오른쪽) 건설부 장관과 함께 정부종합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조선DB궁정동사건은 하루 만에 30년의 역사를 결정했다. 박정희 18년을 끝내고 전두환·노태우(盧泰愚) 12년 시대를 여는 것이다. 계엄사령관으로 등장한 정승화(鄭昇和) 장군은 김재규에 의하여 대통령 시해 현장에 초대받아 와 있었다는 점으로 해서 의심을 샀고, 최규하(崔圭夏) 대통령 권한대행은 국가 위기의 순간에 지도자력을 보여 주지 못했다. 반면에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은 이날 밤 상황 대처가 기민했다. 두 수뇌부 인물의 권위가 약화된 틈을 타 정규 육사 출신 장교단의 대표 격인 그가 정보·수사권을 독점하면서 권력 공백을 채우게 되는 것이다.
10·26사건의 성격을 이해하려면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弑害)를 언제 결심했느냐가 핵심인데, 최초 진술이 가장 중요한 자료일 것이다. 자신을 합리화하기 전의 진정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박정희·차지철·김계원과 식사를 하던 도중에 바깥으로 나와서 경내에 있는 사무실 1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승화 총장을 찾아가 “조금 더 기다려 달라”고 사과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면서 그는 엄청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범행 이틀 뒤인 10월 28일 합수부에서 쓴 자필 진술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차 실장을 쏘아 버릴까. 그런데 차 하나 쏘아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안 되지 않는가. 한다면 각하를 제거해야지 하고 거사(擧事)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날 대통령과 경호실장이 좀 부드러운 모습이었다면 김재규의 생각도 달랐을 것이다. 만찬 분위기는 마치 두 사람이 짠 듯이 김재규 부장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울컥해 버린 김재규는 문제의 차지철을 죽이려고 했으나 대통령이 걸림돌이 됐다. 평소엔 과묵하고 예의 바르지만 가끔 울컥하는 성격인 김재규의 배신감은 살의(殺意)로 바뀌고 있었다. 살해 준비엔 그 뒤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보안이 생명인 암살 계획에는 최적의 시간이지만 암살 뒤의 계획까지 짜는 것은 불가능했다. 권력 탈취는 처음부터 성공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각하까집니까?”
10월 27일 아침 나는 출입처인 부산진경찰서에 가서 계엄사에서 내려 보낸 수배자 서류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 3년 전 정보부 부산분실 정보과장으로서 나를 불러 조사했던 박선호의 사진이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정보부는 내가 《국제신문》에 포항 석유 발견 관련 기사를 쓴 것을 문제 삼았었다. 정부 발표 이전엔 안 쓰기로 했는데 왜 미리 썼느냐고 추궁했다. 그 태도가 신사적이었고 옷을 잘 입는 사람이란 인상이 남았다. 궁정동사건을 깊게 취재할수록 해병대 장교 출신인 그가 궁정동사건의 키맨임을 알게 되었다. 궁정동 안가(安家)의 관리 책임자인 박선호는 김재규의 즉석 명령을 즉시 수용, 부하들을 동원해 대통령 경호원들을 급습했다. 그렇다고 고민이 없었을까? 나의 취재 노트를 확인한다.
‘박정희까지 쏘자’는 결론에 도달한 김재규에게는 옆 건물에 초대해 둔 정승화 총장의 존재가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됐다. 김재규는 화장실에서 나와 책장 선반 책 뒤에 감추어 두었던 32구경의 작은 독일제 호신용 권총을 꺼내 바지 오른쪽 호주머니 속의 유달리 크게 만든 라이터용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살의를 굳힌 김재규는 식당으로 돌아가는 그를 수행하는 박선호와 박흥주(朴興柱) 대령(수행비서)을 불렀다.
“둘 다 이리 와.”
어두운 가을밤 찬 공기를 마시면서 이야기하는 모양이 됐다. 박흥주가 보니 김 부장은 주기(酒氣)가 어리고 긴장된 표정이었다. 김재규는 상의를 들어 올리고 오른쪽 바지 호주머니를 툭툭 치면서 흥분된 말투로 말했다. 박선호가 보니 호주머니가 불룩했다.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권총이 살짝 눈에 들어왔다.
“자네들 어떻게 생각하나? 나라가 잘못되면 자네들과 나는 죽는 거야. 오늘 저녁에 내가 해치운다. 방에서 총소리가 나면 너희들은 경호원들을 처치하라. 육군총장과 2차장보도 와 있다. 너희들 각오는 다 되어 있겠지?”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박선호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그는 이 말을 하면서 박흥주의 표정을 슬쩍 보았다. 박흥주는 “느닷없는 이야기에 입만 벌리고 듣는 수밖에 없었다”(합수부 진술서)면서도 “예” 하고 대답했다. 김재규는 본관 쪽을 가리키면서 “이미 총장, 차장보도 와 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박선호가 김 부장의 귀에다 입을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각하까집니까?”
김재규는 고개를 끄떡하면서 “응” 했다. 박선호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거짓말을 했다.
“믿을 만한 놈 세 놈 있겠지?”
“오늘 저녁은 좋지 않습니다. 경호원이 일곱 명이나 됩니다. 다음에 하지요.”
“안 돼. 오늘 처치하지 않으면 보안이 누설돼서 안 돼. 똑똑한 놈 세 명만 골라 나를 지원해. 다 해치워.”
박선호가 주춤하는 기색을 보이자 김 부장은 다시 밀어붙였다.
“믿을 만한 놈 세 놈 있겠지?”
박선호는 엉겁결에 “예, 있습니다”라고 답했다(군 검찰 진술).
“좋습니다. 그러시면 30분의 여유를 주십시오.”
“안 돼. 너무 늦어.”
“30분이 필요합니다. 30분 전에는 절대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알았어.”
김재규는 박흥주 대령을 향해서 갑자기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라고 중얼거리더니 권총이 든 호주머니를 탁 쳤다. 그러고는 두말 없이 나동(棟) 식당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 세 사람이 붙어 서서 대화한 시간은 1분쯤, 무슨 진지한 논의가 있을 수 없었다. 김 부장의 일방적 지시만 있었을 뿐이다. 그는 엄청난 계획을 던져 놓고는 그냥 만찬장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계획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하는 열쇠는 이제 김재규의 손을 떠나 두 박(朴)씨 손에 넘어온 셈이었다. 나중에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수사관 앞에서, 그리고 법정에서 박흥주는 당시의 기분을 이런 줄거리로 설명했다.
박흥주, “무슨 말인지 몰라서 어안이 벙벙”
법정에서 최후 진술을 하는 박흥주 대령. 사진=조선DB박선호의 고민
박선호도 김재규가 만찬장으로 돌아가고 난 뒤 고민에 빠졌다. 그도 ‘총장이 와 있고 2차장보가 안 올 시간에 와 있으니 국내외 사정이 긴박하구나. 부장이 총을 차고 나와서 각오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 내가 거부를 하면 성공이건 실패이건 살아남지를 못하겠구나. 부장이 육군총장과 함께 유혈 쿠데타를 하는구나’ 하는 판단에 도달했다. 박선호가 보기에는 부장이 단독으로라도 할 것 같았다. 부장이 각하도 포함된다고 했지만 ‘차지철 경호실장만 사살하고 각하는 납치 정도 하겠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경호원들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는 데는 제미니 차로 총만 싣고 오면 2분도 안 걸리는데 처음에는 한 시간을 요구할까 하다가 30분의 여유를 달라고 했다.
박선호는 항소심에서 “그때 왜 부장님을 쏘거나 밀고를 하지 않았느냐고 저보고 바보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저는 그런 배신자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라고도 했다. 김재규는 법정에서 “명령은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무조건 복종하도록 하기 위하여 시간을 두지 않고 강하게 명령했던 것입니다”라고 진술했다.
이날 박선호가 취한 행동을 이해하려면 그와 김재규의 관계를 알 필요가 있다. 그때 나이가 45세이던 박선호는 대구의 대륜중학교 학생 시절에 체육 교사 김재규를 알게 됐다. 박선호는 1953년에 해병학교 16기로 들어가 소위로 임관한 뒤부터 파월(派越) 청룡부대 대대장, 해병 서울보안부대장, 해병사령부 인사처장을 거쳤다. 1973년 10월 10일에 해병대가 해군에 흡수되어 통합될 때 예편했다. 전역한 다음 해인 1974년 4월 그는 당시 정보부 차장이던 김재규의 도움으로 정보부 총무과장으로 취직했다. 김재규가 건설부 장관으로 나간 뒤에는 정보부 부산지부 정보과장으로 옮겼고 여기서 1976년에 나와 만난 것이다.
박선호는 그해 초에 부산지부 정보과장직에서 면직됐다. 당시 부산에서는 서울에서 내려온 석진강(石鎭康) 검사 팀이 대규모 밀수 수사를 하고 있었다. 밀수꾼들을 비호해 온 정보부 직원들도 다수 조사를 받았다. 이 검찰 수사팀의 동향을 알아보려고 박선호가 도청을 시켰는데 이것이 정보부의 내부 감찰에 걸려 그만두게 된 것이었다.
그는 1년 정도 실직자 생활을 하다가 다시 김재규 정보부장의 도움을 받는다. 건설부 장관 출신인 김 부장은 박선호를 현대건설의 사우디 주베일 항만 건설 현장 안전차장으로 취직시켜 주었다. 1977년 4월의 일이었다.
한 여덟 달 근무하다가 이듬해 2월에 돌아온 그는 중앙상사라는 유류(油類) 수입상을 경영하게 됐다. 그해 8월 초 김재규는 그를 다시 중정 의전과장으로 임명, 궁정동 안가 관리 책임을 맡겼다. 박선호는 군검찰 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 부장은 본인의 은사이고 직업도 알선해 주시고 본인을 알아주고 아껴 주어 고마운 생각을 항상 하여 왔습니다. 《삼국지》 《대망》 같은 책을 많이 읽으라, 검소하게 생활하라, 우쭐거리는 행동은 삼가라는 등 좋은 말씀을 하여 왔기에 평소부터 존경해 왔습니다.〉
“총 뽑지 마! 우리 같이 살자!”
박선호가 현장검증에서 정인형·안재송을 쏘는 장면.궁정동사건에서 영화 같은 장면이 하나 있다. 대통령 일행의 만찬장과 마루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는 경호원 대기실. 직선거리로는 박정희와 약 12m쯤 떨어진 지점에 박선호가 앉아 있었다. 박선호는 마루와 통하는 대기실 문을 들어가서 바로 오른쪽에 있는 응접 의자에 앉아 총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경호원 대기실은 여섯 평쯤 되는데 가운데엔 길쭉한 탁자가 있고 그 3면을 둘러서 의자 일곱 개가 놓여 있었다. 안쪽 벽에는 텔레비전.
박선호와는 친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해병 간부후보 동기생 정인형(鄭仁炯) 경호처장은 박선호와 오른쪽 대각선 방향의 의자에 앉아 안주를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국가대표 사격 선수 출신 안재송(安載松) 부처장도 방금 전 화장실에 갔다 와서는 박선호의 왼쪽 맨 안쪽 의자에 앉아 무얼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박선호는 허리에 찬 권총에 손을 대고 옆방인 만찬장에 신경을 집중시켜 놓고 있었다. 심수봉의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박선호는 박정희의 콧노래 소리는 듣지 못했다. 기타 소리 속에서 총성 일발. 김재규가 차지철을 쏜 것이다. 박선호는 권총을 뽑아 들고 일어났다. 정인형·안재송은 의자에 앉은 채 박선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의아한 표정. 안재송이 허리에 찬 총을 뽑으려고 손을 가져갈 때 박선호가 소리쳤다.
“꼼짝 마!”
이어서 두 번째 총성. 김재규가 박정희의 가슴을 내려다보면서 쏜 것이다. 박선호는 제1발과 제2발 사이는 4~5초 간격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두 경호관의 손이 권총으로 향했다.
“총 뽑지 마! 움직이면 쏜다! 야, 우리 같이 살자!”
각 한 발로 두 명 살해
박선호는 정인형을 향해서 소리쳤다. 정 처장의 안색이 변하더니 포기하는 기색이었다. 옆방인 주방 쪽에서는 연발 총성과 고함이 잇따라 들려왔다. 안재송이 정인형의 얼굴을 보더니 결심한 듯 권총을 뽑으려고 상체를 오른쪽으로 홱 돌렸다. 박선호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안재송은 엎어지듯이 쓰러졌다.
검시(檢屍) 결과 왼쪽 어깨로 들어간 총탄은 등판의 오른쪽 아래를 향해서 진행하다가 살에 박혔다. 이 탄도(彈道)는 안재송이 일어서지도 못한 상태에서 피격되었음을 말해 준다. 육군과학수사연구소 법의과장 정상우 소령의 사체(死體)검안서에 따르면 안재송은 이 한 발에 허파나 심장이 손상되어 사망에 이르게 된 것으로 사료된다는 것이었다.
이 순간 정인형도 몸을 일으켜 권총을 뽑으면서 박선호를 향해서 덮쳐 오듯 다가왔다. 박선호는 문 쪽으로 2보 가량 뒤로 물러서면서 친구를 향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탕!”
정인형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탄알은 왼쪽 목으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직선 관통을 했다. 목 관통상으로 목에 나 있는 기도(氣道)와 혈관이 파괴되어 질식사 또는 공기전색증으로 사망케 된 것으로 보인다.
박선호는 “그때 두 사람이 동시에 달려들었으면 나는 당했을 것이다. 뒷걸음치다가 문지방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고 재판정에서 진술했다. “같이 살자”면서 그가 두 경호원을 붙들어 둔 시간은 약 15초. 박선호는 그 15초가 길게 느껴지더라고 했다. 박선호는 또 “안재송이가 총을 뽑지 않았더라면 정인형도 뽑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본인도 그들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군검찰에서 진술했다. 안재송은 0.7초 안에 권총을 뽑아서 25m 떨어진 곳에 있는 박카스 병을 맞힐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었지만 선수(先手)를 빼앗겼던 것이다.
박선호가 대기실에서 마루로 뛰어나가는 순간 전깃불이 나갔다. 이 전깃불이 조금 일찍 나갔더라면 박선호가 당했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두 경호원이 안방으로 뛰어들어 가서 치명상을 입지 않은 박정희를 구출할 수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정승화 “B-2 벙커로 갑시다”
그날 가장 애매한 처지에 있었던 이는 박흥주 대령이었다. 그는 직속 부하가 없어 정보부 경비원처럼 대통령 경호원 저격 임무를 맡았다. 안방에서 첫 총성이 나자 제미니 차 안에서 같이 기다리던 이기주·유성옥과 함께 뛰어나와 경호원들이 모여 있는 주방으로 달려갔다. 권총 안전장치를 푸느라 사격이 늦었다. 안으로 일곱 발을 쏘았다. 이날 밤 그가 한 역사적 역할은 김재규를 육본 벙커로 유도한 것이었다.
김재규는 대통령과 경호실장을 사살한 뒤 옆 건물에서 식사 중이던 정승화 총장을 태우고 남산 정보부를 향해 출발했다. 승용차가 삼일고가도로에 올랐다. 정보부로 가는 길과 용산으로 가는 길이 갈리는 지점이 다가오자 김재규 부장이 앞자리에 있던 박흥주 대령에게 물었다.
“어디로 갈까? 부(部), 육본, 어디가 좋겠어?”
옆자리의 정승화 총장이 답변을 가로챘다.
“병력 배치를 하려면 육본으로 가야 하니 B-2 벙커로 갑시다.”
박 대령도 이에 호응하듯이 “그게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당시 정승화 총장은 차지철이 대통령을 쏜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김재규의 무능이 여기서 드러난다. 시해 이후의 상황을 장악하려면 당연히 자신이 관장하는 남산 정보부 시설로 가야 하는데 육본으로 가서 군인들 속에서 고립되어 버리는 것이다.
박흥주의 방황
박흥주 대령도 분주해진 육본에서 김재규와 분리되어 왔다 갔다 하다가 무장해제된 뒤 남산의 부장 비서실장실로 갔다. 비서실장 김갑수 준장이 말했다.
“전두환 장군이 박 비서관을 육군본부 벙커로 보내라더군.”
“알겠습니다. 부장의 행선지가 궁금하시겠지만 저도 모르겠습니다. 부장이 혹시 저를 찾으실지 모르니 나가 있겠습니다.”
박 대령은 남산 정보부 청사를 나와 다시 부장 차에 올랐다.
“어디로 갑니까?”
운전기사가 물었다.
“남산순환도로로 가세.”
순환도로를 거쳐 한남동의 한적한 주택가로 갔다. 큰 집들 사이에 차를 세운 뒤에 한 시간 반쯤 눈을 감고 쉬었다. ‘심경이 착잡하여 잠시라도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그랬다는 것이다. 새벽 4시 30분쯤 그는 다시 금호동으로 차를 몰게 했다. 박흥주 대령의 집은 차가 들어갈 수도 없는 언덕배기에 있었다. 언덕 밑에 차를 세우고 눈을 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박흥주는 한 500m를 단숨에 뛰어 올라갔다. 대문을 두드렸다. 아내가 나와 대문을 열어 주었으나 그는 들어가지 않고 선 채로 말했다.
“오늘 일이 있어 못 들어가니 그냥 간다.”
아내는 놀란 표정으로 “아빠 무슨 일이에요?”라고 했다. 더 말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대답도 하지 않고 부끄럼 타는 소년처럼 달아나듯이 차 있는 데로 뛰어 내려왔다. 되돌릴 수 없는 어제가 되어 버린 그 운명의 날 아침에 그는 국민학교 5학년생인 큰딸이 학급 간부로 뽑혔다고 해서 볼에 뽀뽀를 해 주고 준비물을 챙기는 것을 도와주고는 출근했었다.
사망·처형자 12명 중 7명이 장교 출신
1979년 12월 4일 10·26 공판. 맨 앞줄에 김재규 전 중정부장, 김계원 전 비서실장의 모습이 보인다.궁정동 현장에서 피살된 사람은 6명이었다. 박정희, 차지철, 정인형, 안재송, 김용섭(대통령 경호원), 김용태(박정희 전용차 운전기사). 범인으로 체포되어 사형 집행된 사람도 여섯 명이었다. 김재규, 박선호,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金泰元). 이들 12명 중 일곱 명이 군 장교 출신이고 그 가운데 네 명은 해병대 출신이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가 한강인도교를 건너 서울로 들어올 때 그를 따랐던 부대가 해병 제1여단 병력이었고, 마지막 날 그를 놓고 대치했던 이들도 해병대였다.
궁정동사건과 참여자들의 행태에서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는 군사문화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남자다움, 의리(義理), 비장함, 잔인성, 무모함 등이 섞여 있다. 박정희 정권 자체가 고려 무신란(武臣亂) 이후 약 800년 만에 처음 등장한 군인 정권이었다.
궁정동사건은 윤석열 계엄으로 드러난 국군 장교단의 행태와도 많이 다르다. 궁정동사건의 배역이 된 장교 출신들은 모두 한국전과 월남전에서 총을 쏘아 본 이들이었지만, 윤석열 계엄 때 등장한 군인들은 실전(實戰) 경험이 없다. 윤석열은 국군통수권자였지만 실탄이 장전된 총을 들고 근무한 적이 없다. 그런 그가 병정놀이 하듯이 망상적·발작적 계엄을 폈다가 자멸한 것이다. 그 어떤 미학(美學)도 없는 소극(笑劇)이었다.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
박선호는 이날 자신뿐 아니라 정인형·안재송, 그리고 직속 부하 이기주·유성옥·김태원을 저승으로 데리고 가는 선택을 했다. 해병대 하사 출신인 이기주(李基柱)와 승용차 운전사인 육군 중사 출신 유성옥(柳成玉)을 대통령 경호원 저격수로 골랐고, 경비원 김태원에게는 총상을 입은 경호원들에 대한 확인사살을 명령, 사형수가 되게 한 것이다.
이기주도 박선호에 의하여 저격수로 지명된 이후 번민에 빠진다. 그는 박선호가 M-16 소총을 권총으로 바꿔 차고 오라고 시켰을 때 ‘이 길로 도망가 버릴까’라고 생각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는 법정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과장이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지 원망도 했으나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 평소 나를 신임했는데 거절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유성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박흥주·이기주를 태운 승용차를 대통령 경호원들이 모여 있는 주방 근처에 세워 놓고는 달아날 생각도 했다. 그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 과장의 암살 지시에 반항하면 나중에라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방으로 차를 옮겨 놓고 차에 타고 있다가 지나가는 경호원을 향해서 문을 열어 달라고 했는데 모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때 문을 열어 주었다면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경호원이 다가와서 문을 열어 주면 “각하가 위험하다”고 알린 뒤 달아날 생각을 했다는 뜻인 것 같다. 그 경호원이 문을 열어 주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주방에 있던 두 명의 경호원과 대기실에 있던 두 경호관이 자위(自衛) 조치를 취했을 것이고, 오히려 김재규 쪽이 당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유성옥이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경호원이 그의 신호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충격에 빠져 어느 쪽으로도 확실한 행동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그냥 상황에 끌려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사람의 의지로써는 어떻게 할 수 없는 판이 짜여져 있었다. 그는 운이 나쁘게도 ‘연출자’ 박선호에 의하여 이 역사의 무대에서 한 배역을 맡도록 지명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날 박선호는 가장 지탄받아야 할 일을 했다. 총상 당한 대통령 경호원들에 대한 확인사살 지시였다.
그는 김재규가 정승화 총장을 태우고 육본으로 떠난 직후 10여 명의 경비원들을 불러 놓고 “청와대에서 몰려오면 쏴 버려”라고 했다. 박선호는 아수라장이 된 나동으로 가서 이기주에게 “안은 어때?”라고 물었다.
“부상당한 것 같습니다.”
박선호는 “김태원에게 가서 안에 들어가 꿈틀거리는 놈이 있으면 깨끗이 정리하라고 해”라고 시켰다. 이 한마디에 아내, 네 살배기 아들, 한 살짜리 딸을 두고 있었던 김태원(金泰元) 경비원의 생명이 날아간다. 이기주가 정문으로 달려가서 과장의 지시를 전달하자 김태원은 겁에 질린 말투로 물었다.
“저 안에 무서워서 어떻게 들어갑니까?”
“무섭기는 무엇이 무서워요?”
“할아버지와 부장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피신하셨어요.”
“그래도 무서워서 혼자서는 못 들어가겠어요.”
“나도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데 같이 갑시다.”
이후의 전개에 대해서 김태원은 이틀 뒤(28일) 합수부에서 작성한 자필 진술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이기주가 앞서서 경호원 대기실로 들어가기에 따라 들어갔습니다. 문 입구에서 텔레비전 앞에 엎어져 있는 사람(안재송-기자 注)에게 한 발을 쏘았습니다. 그리고 탁자 앞에 엎어져 있는 사람(정인형)에게 한 발을 쏜 후 명중되지 않은 것 같아 다시 한 발을 쏘았습니다. 이기주가 마루 쪽을 가리키면서 “저쪽에도 있다”고 해서 인공연못 쪽으로 가다가 안방 미닫이문 앞쪽에서 “음…” 하는 신음소리가 들려 마루 중앙에서 돌아서서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 뚱뚱한 사람(차지철)의 복부를 향하여 한 발을 쏘았습니다. 한 발을 쏘고 나니 왼쪽 팔이 움직이는 것 같아서 다시 한 발을 쏘았습니다. 주방으로 들어가면서 먼저 조리대 앞에 엎어져 있는 사람(김용섭 경호원)의 등판을 향해서 한 발을 쏘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옆을 보니 식당차 운전사 김용남, 조리사 김일선, 이정오가 엎드려 있었습니다.〉
확인사살로 죽은 이가 있나
가수 심수봉(1994년). 사진=조선DB주방에 쓰러져 있었던 김용섭 경호원을 향해 김태원이 발사한 총탄은 엉덩이에 맞았다. 그 전에 이미 김용섭은 다섯 발을 맞은 상태였다. 다섯 발 중 네 발은 가슴에 맞았다. 검안 의사는 이 가슴의 총상을 치명상으로 보았다. 김태원은 안방에 쓰러져 있는 차지철을 쏠 때 무서워서 방 안에 들어가지 않고 바깥 마루에 서서 비스듬히 안방을 향해서 두 발을 쏘았다. M-16 총탄의 탄피 두 개가 오른쪽으로 튀어 현관 부근에서 발견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것도 김태원이 확고한 살의를 가지고 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쟁점은 차지철이 언제 사망했느냐는 것이다. 정상우 소령은 김재규가 차지철의 가슴에 쏜 제2탄이 ‘혈흉에 의한 호흡 부전 및 심장 부전’을 일으켜 경호실장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진단했다. 김태원이 20분 뒤에 차지철의 복부에 쏜 두 발은 그의 사망과는 관계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옆방에 피신해 있었던 심수봉은 차지철이 있던 안방으로부터 신음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심수봉 증언의 문제점으로서 김태원의 변호인이던 김홍수(金洪洙)는 이런 요지의 지적을 했다.
“심수봉은 (김태원의 사격에 의한) 6~7발의 총성 뒤에도 그 신음 소리를 계속해서 들었다고 증언했는데 그렇다면 이 신음은 거리가 먼 안방(여기에 차지철이 쓰러져 있었다-기자 注)에서 난 소리가 아니고 가까운 주방에 있던 정보부 직원 김용남·이정오의 신음이었을 것이다.”
사망자에 대한 부검 없었다
정상우 소령은 전역한 뒤에 전남대 의과대 병리학과 교수가 됐다. 그는 1991년 11월호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차지철이 가슴에 총탄을 맞아 폐를 손상당하고도 약 20분간 생존해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문제는 10·26사건의 사망자에 대한 부검(剖檢)이 없었다는 점이다. 검안만으로 사인(死因)을 판단할 수도 없고 증언만으로 판단하기도 어려우며 강압적인 분위기의 수사 때 이루어진 자백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김태원은 합수부 조사를 받을 때 강압에 의해서 “차지철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쏘았다”는 거짓 내용을 자필 진술서에 써 넣었다고 주장).
기록 상으로는 김태원이 쏜 총탄이 유일한 원인이 되어 사람이 죽었다는 확증이 없다. 따라서 ‘확인사살’이란 용어는 과장으로 판단된다. 김태원에 대한 최종 심리 과정에서도 대법원판사 14명 중 7명이 ‘파기(破棄)환송’ 의견이었다. 마지막 회의에서 한 사람이 태도를 바꾸어 8 대 6으로 ‘피고인의 상고(上告) 기각’을 합의하게 됐고 그는 사형에 처해졌다.
‘주범은 차지철, 김재규는 하수인’
시해사건 수사국장 백동림(白東林·당시 보안사 대령)에 따르면 “수사요원들 사이엔 이 사건의 주범은 차지철, 김재규는 그의 하수인이란 농담이 돌았다”고 한다. 차지철이 그날 김재규를 자극한 것이 원인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이해할 수 없는 박정희의 말년 인사(人事)가 최후를 예약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차지철은 경호실장에, 김재규는 정보부장에 맞지 않았고 그래서 두 사람이 앙숙이 되었다. 박정희에게 “사람을 바꿔야 한다”고 의미 있게 건의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운명적이었다.
그날 궁정동 저녁 자리의 화제(話題)는 부마사태와 김영삼, 즉 민주화운동이었다. 김재규는 이 운동에 정신적 영향을 받고 있었다. “민주주의를 위하여”라고 중얼거린 것이 헛소리는 아니었다. 형식적으로는 발작적 범행이었으나 그 배경은 역사 흐름의 변화였다. 역사가 인간과 만나 결정적 장면을 만들 때 배역으로 등장한 인물들은 즉각적으로 행동해야 하는데 대개 평소 실력대로 한다. 이게 운(運)과 맞아떨어질 때는 대운(大運), 즉 대권(大權)을 잡기도 한다.
1979년 11월 3일 중앙청 앞에서 거행된 박정희 대통령 국장(國葬)은 그렇게 준비한 게 아닌데도 자연스럽게 초인적(超人的) 인물에 대한 헌정(獻呈)의 상징성으로 흘러가 장엄한 드라마가 되었다. 특히 선곡(選曲)!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 국장.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왼쪽)이 박 대통령 영전에 건국훈장을 바칠 때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울려 퍼졌다. 사진-조선DB‘체념한 듯 해탈한 듯’한 초인(超人)의 모습으로 죽은 박정희 영전(靈前)에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건국훈장을 바칠 때 국립교향악단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곡의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연주했다. 독일 철학자 니체의 동명(同名)의 책 서문을 음악화한 이 곡의 선정은 얼마나 상징적이었던가! 니체는 이 서문에서 “인간은 실로 더러운 강물일 뿐이다”라고 썼다. 그는 “그러한 인간이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고 이 강물을 삼켜 버리려면 모름지기 바다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덧붙였다. 한 시대의 청탁(淸濁)을 다 들이마시고도 끝까지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지 않고 죽어 간 박정희를 나는 ‘부끄럼 타는 초인’이라고 부른다.
박정희는 집권 18년간 한 사람도 암살하거나 발포 명령으로 죽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수많은 폭력 시위를 진압하면서도 국가폭력을 최소화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최악의 조건에서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단기간에 최대의 업적을 남긴 인물이 되었다.
그런 점에 비추어 궁정동의 유혈사태는 부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예언적이기도 했다. 거목(巨木)이 쓰러지니 권력의 진공 상태가 생기고 충격파가 이어지는 가운데 12·12 군사변란과 전두환 그룹의 집권, 그리고 광주사태가 숨가쁘게 전개된다. 나도 역사의 격랑 속으로 빨려 들어가 실직자가 된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