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포동의 밤, 경찰 작전차를 태우는 불길은 30m쯤 올라갔다. 사방이 환해졌다. 최루탄 쏘는 폭음이 빵빵 울렸다. “우~” 데모 군중이 몰려가는 소리,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 비명, 폭음, 불길이 한데 엉켰다. 한 폭 역사화(歷史畵)의 민중봉기 장면이었다. 한국의 현대사는 이 순간을 기점(基點)으로 하여 격동의 터널 속으로 빨려 든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쇄작용이 일어난다. 10월 18일 부산 지역 비상계엄령, 20일 마산에 위수령(衛戍令), 그리고 10월 26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해, 권력의 진공을 메우면서 정규 육사 출신들이 밀고들어 온 12·12사건, 짧았던 ‘서울의 봄’,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가 공식화된 5·17 계엄 전국 확대, 그리고 5·18 광주사태. 부마사태에서 광주사태까지의 숨막히는 이 7개월의 현대사는 내가 쓰고 발굴한 자료 없이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자부한다.

- 1979년 10월 16일 오전 동래경찰서 앞을 행진하는 부산대 학생들.
1979년 2월 15일 저녁 6시를 넘은 부산 서부경찰서, 나는 회사로 들어가기 전에 습관대로 형사계에 들렀다. 형사들의 움직임이 부산했다. 나도 그들이 가는 곳을 따라 나섰다. 송도해수욕장이 내려다 보이는 길가에 파출소가 있었는데 형사들이 그곳으로 몰려갔다. 파출소 지하로 따라 들어갔다. 비닐로 싸인 고깃덩어리를 놓고 모여 있었다. 푸줏간에서 나온 쇠고기인가 했더니 자세히 들여다보니 여섯 토막 난 여자 알몸 시신(屍身)이었다. 머리, 두 팔, 두 다리, 몸통. 나는 다짜고짜 머리채를 들어 더듬어 보았다. 함몰골절이 만져졌다. 그런데 얼굴과 열 손가락의 첫 마디를 깎아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지운 시신이었다. 시계를 보니 마지막 판 마감 시간이 지나서 이 기사를 쓸 수가 없었다. 평소 친한 방송기자에게 기사를 불러 주어 특종을 하도록 했다.
송도 알몸 여인 토막살인사건
부산 송도 토막살인사건의 범인은 6년 뒤 잡혔는데 아내를 우발적으로 때려 숨지게 한 상해치사로 밝혀졌다.이렇게 해서 ‘송도 알몸 여인 토막살인사건’ 취재 전쟁이 시작되었다. 시신을 토막 내고 지문(指紋)을 없애기 위한 손가락 절단 등 너무 엽기적인 범행 수법 때문에 범인은 냉혈한(冷血漢)이든지 흉악무도한 자로 추정되었다. 나를 중심으로 한 《국제신문》 사회부 팀이 쓴 기사를 47년이 지나 다시 읽어 보면 너무 상세한 묘사에 새삼 놀라게 된다.
〈대문 앞 깊이 1.3m, 너비 1.7m의 도로 측구(배수로)에 마대로 싼 두 개의 토막 시체 뭉치가 버려져 있는 것을 ○○○씨(58)가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마대 윗부분을 연초록색 PVC 끈으로 동여맨 것(머리, 팔과 다리가 든 것)과 한쪽 끝이 동그스름한 역시 연초록 PVC 끈으로 가로로 아래 위 두 줄, 세로로 한 줄로 묶어진 네모진 것(몸통 부분)이 포개져 있고, 마대 곳곳이 흰 실로 기워져 있었다.〉
〈얼굴의 형체를 몰라보도록 광대뼈와 코, 윗입술을 칼로 도려내고 눈썹 부분을 난도질하는 등.〉
시신 해부도 같은 그림을 그려 여섯 토막에 난 상처 등을 묘사하는가 하면 “척추 상단의 목뼈를 잘라 낸 머리에는 둔기로 생긴 것 같은 3곳의 함몰골절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범인은 칼질을 잘하는 의료 종사자나 도축 전문가 소행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리했다.
누구를 위하여 이렇게 자세하게 써야 하는가 하는 생각보다는 이렇게 충실한 묘사를 하는 것이 라이벌 신문사에 이기는 방법이란 생각이 앞섰던 시절이다.
범인을 잡고 보니!
나는 범행 다음 날 사건 해설 기사를 통하여 ‘피살자의 뒷머리에 나있는 둔기에 의한 3개의 함몰골절을 직접 사인(死因)으로 보고 있음’을 전제로 이렇게 분석했다.
〈얼굴을 짓이긴 것이 여인의 죽음 이후라면 살해의 방법 자체는 시신 절단의 처참, 냉혈성과는 별도로 우발성이 짙은 폭력의 결과인 것 같다. 따라서 범인과 피살 여인은 가족관계 또는 평소 면식이 있는 사이로 추정된다.〉
토막을 내서 죽인 것이 아니라 죽여 놓고 버리기 편하게, 그리고 신원을 감추기 위하여 토막을 냈을 것이란 추리였다.
이 사건 범인은 6년이 지나 1985년 9월에 대구에서 붙들렸다. 범행 동기는 내가 예상한 대로였다. 범인 석창순(검거 당시 50세)은 외지(外地)에서 일을 하다가 오랜만에 정월 보름인 1979년 2월 10일 단칸 셋방으로 돌아왔다. 부인과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자신의 동생 집에 맡겨져 있었는데 부인은 사흘 뒤 술에 취해 시장을 떠도는 것을 발견하여 집으로 데리고 왔다. 냄새가 나 찬물에 목욕부터 시켰다. 젖은 몸에 닦지도 않고 서있는 부인에게 “그동안 뭐하고 돌아다녔나”라고 화를 내면서 머리를 때렸더니 비닐 장판에 물기가 있어 미끄러지면서 뒤로 넘어졌다. 흔들어 깨웠으나 일어나지 않자 석창순은 겁을 먹고 밖으로 뛰쳐나가 혼자서 술을 두 시간 동안 마시고 돌아왔는데 부인은 죽어 있었다. 그는 파출소에 신고를 하려고 500여m 떨어진 비산파출소 앞에까지 갔다가, 신고하면 전과자인 자신이 살인범으로 몰릴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와 밤을 새워 토막을 냈다. 그는 다음 날 고속버스 편으로 멀리 부산까지 짐을 싣고 가서 하필 나의 출입 경찰서 관할지에 버려 생고생을 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는 술김에 자신의 범행을 여기저기 털어놓았다가 변사(變死)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에 정보가 들어가 붙들렸고, 순순히 자백했다. 상해치사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간(肝) 질환으로 3년만 살다가 나와 곧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官報 특종
1979년은 사건이 많은 해였다. 내가 직간접으로 관계된 굵직한 사건만 해도 2월의 송도 토막살인사건, 4월의 정효주 2차 유괴사건, 5월의 마산만 패류 채취 금지령, 6월의 또 다른 동래 토막살인사건, 10월의 부마사태와 박정희 대통령 피살, 그리고 12·12 군사변란. 10년에 걸쳐 일어남직한 대사건들이 한 해에 압축적으로 터져나오면서 역사는 요동치고 나도 휘말려 든다.
나는 사회부 기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관공서에 배포되는 관보(官報)를 매일 읽었다. 대부분의 내용이 행정 관련이라 큰 기삿감은 없었지만 루틴 체크의 일환으로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해 5월 하순 부산시청 보사국에서 별생각 없이 관보를 읽다가 수산청 고시(告示) 몇 줄이 눈에 들어왔다. 5년 전 중금속 오염 보도로 ‘한국기자상’을 받은 나의 눈엔 크게 보였다. 전화로 기사를 불렀다.
〈수산청은 21일 마산만(馬山灣)의 수질 오염이 극심하여 이곳에 자연 서식 또는 양식하는 패류를 먹으면 인체에 유해한 것으로 판정, 모든 종류의 패류에 대해 무기한 채취 금지령을 내렸다. 수산청은 수산자원보호령 제22조의 오염 패류 채취 금지권을 처음으로 발동, 이같이 조치하고 오는 6월 1일부터 적용키로 했다. 부산시와 경남도 등 유관 기관에 보내온 수산청 고시 제12호에 따르면 패류 채취 금지 조치의 적용 해역은 (중략). 마산만은 마산수출자유지역과 창원공단에서 유입되는 공장 폐수와 도시 하수로 크게 오염되어 이미 국립수산진흥원은 지난해 이곳에서 채취된 패류에 대한 중금속 등 공해 물질 및 세균 오염도의 독성 실험을 실시, 그 결과를 바탕으로 패류 채취 금지를 수산청에 건의했었다. 연안 수질이 오염되어 특정 지역에 대해 수산물 채취를 금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 수산청 출입 기자가 기삿감을 놓친 이유는 패류 채취를 금지한다는 고시만 있을 뿐 오염 때문이란 설명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 후배 기자들에게 이 사례를 소개하면서 “기자는 홈런(특종)만 치겠다고 한가운데 들어오는 공만 기다리면 안 된다. 시시한 1단짜리를 귀하게 여기다가 보면 특종감이 걸려들 때가 있다. 스윙을 많이 해야 홈런이 터질 것 아닌가”라고 했다.
고문과 眞犯의 시대
경찰의 강압 수사를 못 견뎌 허위 자백한 보일러공을 언론은 동래 토막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단정했다.1979년 6월에는 부산시 동래구 사직동 하수구에서 송도 토막살인사건과 흡사한 방법으로 훼손, 유기된 여자 시신이 발견되었다. 부산진경찰서를 출입하던 나는 지원 취재를 했는데, 시신을 쌌던 신문지가 송도 토막살인사건을 자세하게(너무) 보도했던 《국제신문》이었음을 확인하고는 뜨끔했다. 그는 이 신문지에 낙서를 남겼는데 이게 체포의 한 단서가 되었다. 동래경찰서는 수사 착수 며칠도 지나지 않았고 피살자의 신원도 확인하지 못한 시점에서 보일러공을 붙들어 자백을 받았다고 기자들에게 서둘러 발표했다. 자칭 범인을 데리고 나와 기자들과 만나게 하고 실명(實名)과 사진도 공개했다.
피해 여성을 목욕탕으로 유인, 추행을 하려 하자 그녀가 반항, 목졸라 죽인 뒤 여섯 토막을 내 머리와 하체는 목욕탕 아궁이에 넣어 불태우고 나머지만 복개천에 버렸다는 설명은 그날 기자들의 검증으로 뒤집혔다. 시신을 잘랐다는 보일러실에선 피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보일러공은 지문을 짓이기는 데 썼다는 면도날을 버렸다고 했는데 시신에 박혀 있었다. 보일러공은 형사들이 겁을 주니까 허위 자백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에는 워낙 크게 보도되어, 이 칼럼을 쓰기 위해 엊그제 집사람(당시 《국제신문》 조사부 기자)에게 물었더니 “보일러공이 범인 아니었어요?”라고 반문했다.
이 무렵 언론엔 ‘진범(眞犯)’이란 말이 유행했다. 대법원 확정판결 이전엔 ‘범인’이란 표현도 말이 안 되는데 용의자 단계에서 ‘진범’이라고 부른 경우는 경찰이나 언론에 의하여 조작된 가짜인 경우가 많았다. 물고문이 경찰서 안에서 기자들의 양해(?) 하에서 거의 공공연하게 이뤄지던 시절이었다.
이 사건은 한편으론 과학 수사의 표본이 되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범인이 면도칼로 짓이긴 손가락을 복원하여 지문을 찾아내고 여성 지문 120만 장을 일일이 뒤져 일치하는 한 명을 찾아냈던 것이다. 이 사건은 피살자의 신원이 밝혀짐으로써 연고가 있는 범인이 자동적으로 파악되어 체포에 성공한 경우이다.
나는 피살자 양희자(梁喜子·당시 24세) 양을 취재하다가 너무 화가 났다. 다른 취재 기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졌는지 범인이 대구에서 붙들려 왔을 때 집단 구타를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악마와 천사
악마와 천사의 대조를 이룬 양희자 토막살인사건 보도.양희자 양을 다룬 《국제신문》 기획 기사는 제목이 ‘악마에 짓밟힌 천사’였다. 시작이 “가장 악독한 남자가 가장 선량한 여자를 가장 처참한 수법으로 난도질했다”였다.
〈지순(至純)의 여자가 사랑하고 섬기며 감싸 주었던 남자는 악마로 변했다. 이 악마는 주먹질, 발길질, 끊임없는 뭇매로 그 순정에 보답했다. 의처증, 병적인 증오심에 불탄 이 남자는 가위를 품고 일곱 달 동안 400여 군데의 다방을 헤매면서 피신한 연인을 찾았다. 악마에게 붙들린 천사는 범인 가족의 방관 속에서 몽둥이 세례 끝에 목졸림을 당하고 칼질, 톱질을 받은 뒤 토막 나버렸다. 가장 슬프고 몸서리쳐지는 얘기의 줄거리다.〉
양희자 양은 두 살 때 아버지, 15세 때 어머니를 잃었다. 학급에서 3등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으나 당감국민학교를 졸업 후 가난으로 진학을 포기, 15세에 동양고무공장의 여공이 됐다. 당시 미혼이었던 언니 석자(石子·당시 36세)씨를 어머니처럼 모시며 매달 봉급을 집에 가지고 와 가장(家長) 없는 가족이지만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았다. 희자 양은 용돈을 아껴 매달 꼬박꼬박 여성 잡지를 구입, 언니에게 선물하곤 했다.
언니가 결혼한 1973년 희자 양은 집을 나섰다. 양석자씨는 “동생이 우리에게 부담이 되길 싫어했다”고 말했다. 1976년부터 여공 생활을 청산한 희자 양은 다방 종업원 생활을 시작했다. 4년 동안 그녀를 10여 차례나 취직시켜 준 직업소개소 이정우(38)씨는 “항상 카운터 일을 원했다”고 했다. 예쁜 얼굴, 적은 말수, 깨끗한 이성 관계로 서면 일대에선 A급 종업원으로 통했다. 봉급에서도 특별대우를 받았다.
그녀가 어떻게 이양길(李陽吉·범행 당시 25세)과 같은 포악무도한 남자를 좋아하게 됐는지는 수수께끼다. 1976년 초부터 두 사람의 사이는 가까워졌다. 1978년 초 둘은 동래고교 뒤 셋방에서 동거 생활에 들어갔다.
양희자 양은 다방 종업원 생활을 하면서 100만원을 저축했다. 이 돈으로 이양길을 뒷바라지하고 가구를 사 모았다. 인상이 독살스럽고 술고래이며 여자관계가 복잡한 이양길은 그녀가 모은 돈을 탕진하고 잠시 실직하자 범행 한 해 전 헤어졌다가 다시 찾아다녔다. 언니 석자씨는 사건 전해 추석 전날에 비로소 동생이 이양길과 동거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동생은 언니 집에 와서 송편 빚는 일을 도와주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저 사람을 인간으로 만들어 함께 잘 살아 보겠다”고 다짐하더라는 것이다.
“저놈도 토막 내 죽여라”
피살 일곱 달 전 그녀는 온몸과 얼굴이 멍투성이가 된 채 다시 언니 집을 찾아왔다. 언니는 이젠 관계를 끊으라면서 동생과 함께 이양길을 찾아가 다투었으나 “동생을 데려가면 죽이겠다”는 위협에 눌려 애처롭게 보이는 동생을 뒤에 남겨 두고 발길을 돌렸다.
양희자 양은 한 달 뒤 다시 이양길의 감시를 벗어나 달아났다. 이양길은 함께 살 때는 폭행과 술주정으로 괴롭히고 떠나면 ‘남 주기는 아깝다’는 심보로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성미였다.
다섯 달 동안 피신 생활을 하던 그녀는 피살 한 달 전 언니 집에 다니러 와 낮잠을 자다가 잠복 중이던 이양길에게 붙들려 갔다. 피살 20일 전엔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고 머리카락이 단발처럼 잘린 채 당감동 친구 정모 양의 미장원으로 피신해 왔다. 그 며칠 뒤엔 수면제를 다량 복용, 자살을 꾀했다. 피살 일주일 전 그녀는 제24직업소개소에 찾아가 ‘해 다방’을 소개받았다. 그녀는 한 달 전부터는 친구 미용원에서 줄곧 시간을 보냈는데 이양길의 살기(殺氣)를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이양길은 6월 15일 밤을 여관에서 함께 지낸 뒤 그다음 날 오전 그녀를 자기 부모 집으로 꾀어 가 계획한 범행을 저질렀다. 자신의 방에 끌고 들어가 다시 같이 살자고 애원하다가 거절당하자 목을 졸라 살해했다는 진술이었는데 물론 믿을 수 없다. 시신을 토막 내고 버린 방식이 이 인간의 악마성을 증명한다. 《국제신문》 기사는 이렇게 끝난다.
〈이양길은 양희자에 대한 비뚤어진 사랑과 증오의 포로가 돼 그 대상을 말살함으로써 광적인 집착에서 해방되려고 했었는지 모른다. 그녀가 남긴 수첩엔 영어 회화의 대역(對譯) 구절도 있어 국민학교 출신인 자신을 가다듬는 데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짐작게 했다.〉
현장 검증 때 주민들이 몰려와 “저놈도 토막 내어 죽이라”고 했는데 사형 확정 선고를 받고 나서도 5년을 더 살다가 처형되었다. 종교인들이 그가 반성하고 있다면서 탄원하여 사형 집행이 미뤄졌다고 한다.
사형 집행이 확정되면 내세(來世)가 두려워 진심으로 반성하는 수가 있다. 요사이처럼 사형 선고를 받아도 처형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 그런 반성의 동기도 약해질 것이다. 나는 기자 생활 중 한글 전용론자에서 한자(漢字) 혼용론자로, 사형 반대론자에서 사형 찬성론자로 바뀐 경험이 있다. 살인범의 인권보다는 피살자의 가족들이 겪는 고통이 더 무겁기 때문이다.
나의 1970년대 살인사건 취재 경험은 1980년대에 들어가면 고문(拷問) 취재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 연결점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체험일 것이다. 그런데 최근 특검 조사를 받고 나온 양평군 공무원이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는 글을 남기고 자살했다. 이제는 고문을 재정의(再定義)할 필요가 있겠다.
釜馬사태의 현장에서
부마사태 당시 부산진경찰서 경비과장이었던 이무영 前 경찰청장. 사진=조선DB그 열흘 전 부산 출신 김영삼(金泳三) 신민당 총재가 《뉴욕 타임스》 회견 발언으로 국회에서 제명된 것이 민심을 자극해 놓은 상태였다. 오후 늦게 회사로 들어가니 내근 기자들은 시민들의 항의 전화 받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왜 기사를 쓰지 않는가”란 독자들의 불평에 할 말이 없었다. 그날 밤 시위는 격화되었다.
밤 9시경, 남포동 거리에서는 내가 출입하던 부산진경찰서 진압 차량 행렬이 교통 체증에 걸려 멈춰 있는데 시위대의 습격을 받았다. 군중이 몰려오자 경찰관들이 차를 버리고 달아났다. 시위대는 기동순찰차(포니)를 뒤집고 새어 나온 기름에 불을 붙였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부산1가1163호 포니는 불길에 휩싸였다. 이무영 경비과장(뒤에 경찰청장 역임)은 이 불길이 뒤에 서있는 두 대의 작전차에 옮겨 붙을 것 같아 부하 서른 명을 향해서 “나를 따르라”고 외치면서 차를 향해 뛰었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그가 혼자 운전석에 올라 차를 빼려고 하는데 시위대에 포위되었다. 그들은 운전석 유리창을 깨고 각목으로 쑤셔 댔다. 흥분한 군중이 작전차를 들었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뒤집을 것 같았다. 마흔쯤 된 한 남자가 유리창을 두드리면서 “내가 책임질 테니 나오시오”라고 했다.
“정말 나를 살려 주시겠습니까.”
“안심하고 빨리 나와요. 차가 넘어갑니다.”
歷史畵 같았던 불길, 함성, 폭음, 비명
이(李) 경정은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남자가 그를 품으로 안다시피 하여 구석으로 끌고갔다. 모자와 웃옷을 벗겼다. 러닝셔츠 바람이 된 그는 길 건너편으로 뛰면서 어깨 너머로 작전차가 ‘펑’ 소리와 함께 불타오르는 것을 봐야 했다.
부산진경찰서 소속 부산7가1335호 작전차가 불타는 그 순간 나는 가까운 육교 밑에 있었다. 그 장면을 기사로 쓰지는 못했고 그 8년 뒤인 1987년에 펴낸 책 《유고(有故)》에 이렇게 기록했다.
〈불길은 30m쯤 올라갔다. 사방이 환해졌다. 최루탄 쏘는 폭음이 빵빵 울렸다. “우~” 데모 군중이 몰려가는 소리,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 비명, 폭음, 불길이 한데 엉켰다. 한 폭 역사화(歷史畵)의 민중봉기 장면이었다. 암흑의 도심지에서 치솟은 불길은 극적인 효과를 몰고왔다. 그것은 몇 시간 전만 해도 도저히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태였다. 부산대학의 데모, 울타리를 뛰어넘은 데모, 중심 시가지로 데모 확산, 야간 데모… 모두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으며 구경꾼이나 참여자들을 다 같이 놀라게 한 잇따른 사태 전개는 이 순간에 와서 클라이맥스를 연출한 것이다.
“이란의 시가전이 이랬을 거다.”
나와 함께 데모 현장을 쫓아다니고 있던 《국제신문》 이철호 부국장이 말했다. 4·19를 취재했던 그는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하다. 적어도 내일은 위수령이다”라고 했다. 이 불길이 데모대에 미친 심리적 효과는 컸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잊게 되었다. 조금은 신들린 기분에 휩싸였고 난폭해졌다.〉
보도사진이 없는 부마사태
1979년 부마사태 당시 동래 시가지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은 부산대 학생들.한국의 현대사는 이 순간을 기점으로 하여 격동의 터널 속으로 빨려 든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쇄작용이 일어난다. 10월 18일 부산 지역 비상계엄령, 20일 마산에 위수령, 그리고 10월 26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해, 권력의 진공을 메우면서 정규 육사 출신들이 밀고들어 온 12·12사건, 짧았던 ‘서울의 봄’,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가 공식화된 5·17 계엄 전국 확대, 그리고 5·18. 부마사태에서 5·18까지의 숨막히는 이 7개월의 현대사는 내가 쓰고 발굴한 자료 없이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자부한다.
210여 일의 이 드라마는 한국 현대사 30년을 결정했다. 18년의 박정희 통치를 끝내고 13년의 최규하(崔圭夏)·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시대를 열었으며 그 여진(餘震)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나는 이 기간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역사의 격류에 휩쓸렸고 그 역사의 일부를 만들어 가는 역할도 했다. 부마사태를 취재하던 기자는 5·18 뒤엔 실직자가 되어 있었다. 역사적 사건이 개인의 생애를 바꿔 놓는 좋은 사례이다. 부마사태가 없었더라면 나는 부산에서 기자 생활을 계속했을지도 모른다.
한국 언론사에서 부마사태는 시위 현장 보도사진이 거의 없는 유일한 경우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학생들이 찍었고 내가 《월간조선》에 공개한 두 장의 시위 사진 외엔 사진기자가 찍은 시위 사진은 없다. 당시 부산의 기자들은 취재해 봐야 기사를 쓸 수 없는 사건이라고 생각하여 초동대응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사진부 기자들은 밤에 현장에 나갔으나 플래시를 터트렸다간 군중 속에서 봉변을 당할 처지가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시위대는 기자들에게 적대적이었다.
역사적 實錄에 대한 확신
부마사태의 역사적 의미를 깨달은 것은 1979년 10월 27일 새벽이었다. 나는 살인사건 현장에서 경찰로부터 비상 발령과 대통령 유고 소식을 접했다. 부마사태가 이 거대한 역사적 사건의 원인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때는 김재규(金載圭)가 18일 새벽 부산에 와서 시위 현장을 둘러보고 “이건 민란이다”라고 판단, 서울에 돌아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사실, 부마사태의 원인과 대책을 놓고 권력 심장부에서 갈등이 커졌다는 사실, 궁정동 만찬에서도 부마사태를 놓고 차지철(車智澈)이 김재규를 자극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10일 전 시위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감은 확실히 왔다. 그래서 나의 부마사태 취재는 시작되었다. 5·18 현장 취재 직후 신문사에서 밀려난 1980년 5월 말까지 집중적인 취재가 이뤄졌다.
김종필·김영삼·김대중이 ‘서울의 봄’을 경쟁하고 있을 무렵, 계엄하이지만 언론의 자유가 상당히 허용되고 있을 무렵이라 취재도 수월해졌다. 부마사태에 참여한 학생, 운동가들도 적극적으로 응해 주었다. 경찰을 출입하고 있었으니 경찰 측의 대응 과정도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었다. 관훈클럽 신영기금의 저술 지원도 받았다. 12·12사건 이후 군부의 동향은 불투명해졌지만 민주화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신나는 취재가 쌓여 갔다. 시위는 넓은 지역에서 이뤄지므로 다른 기자들의 취재 노트도 많이 들여다봐야 했다. 시위에 이른 과정과 주동자의 인맥과 조건의 성숙, 그리고 시위 현장을 다각도로, 입체적으로 구성하기 시작했다. 역사적 실록(實錄)이 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