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습격사건은 나라의 운명과 나의 인생 항로를 바꾸었다. 박정희의 應戰으로 북한은 망조가 들고 한국은 중화학공업 국가가 되었다.
⊙ 박정희 후보는 유세 현장에서 “우리나라가 수출 증대 세계 1등, 경제성장 3등을 했으니 박수를 쳐달라”고 호소했지만 나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 ‘軍大’ 3년 4개월에서 배운 것이 많아 먹고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 박정희 후보는 유세 현장에서 “우리나라가 수출 증대 세계 1등, 경제성장 3등을 했으니 박수를 쳐달라”고 호소했지만 나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 ‘軍大’ 3년 4개월에서 배운 것이 많아 먹고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 산업 현장을 시찰하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고려 무신란(武臣亂) 이후 약 800 년 만에 처음으로 군인이 권력을 잡았다. 세상이 빨라졌다. 64년 전으로 돌아가 그 시절을 생각하면 영화 필름이 갑자기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았던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거리에선 깡패와 상이군인들이 사라졌다. 계엄군은 길을 멋대로 건너는 행인들을 붙들어 임시로 만든 사각 줄 안에 몇 시간 세워 놓았다. 텔레비전이 없을 때 그 역할을 대신한 것은 극장에서 영화 상영 전에 틀어 주던 리버티 뉴스(뒤에 대한뉴스)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朴正熙) 의장의 활동사진은 여기서만 볼 수 있었다. 단정한 군인이 선글라스를 낀 작업복 차림으로 지휘봉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현장을 누비면서 이것저것 지시하는 장면의 연속이었다. 사회가 생동했다. 이 무렵 유행했던 노래, 한명숙의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는 경쾌한 멜로디로 이 시대의 주제가(主題歌) 역할을 했다.
영주천 유로를 바꾸다
그해 9월 혁명정부는 농어민부채정리법을 제정, 이른바 농어촌 고리채 탕감 정책을 폈다. 요사이 이재명 정부가 밀어붙이는 빚탕감 정책의 원조(元祖)쯤 되는 아주 성공적인 결단이었다. 약 500만 건이나 되는 농어민 부채를 실태 조사하여 정부가 악성(惡性) 부채를 대신 갚아 주고 낮은 금리(金利)로 장기 분할 상환하게 한 것이다. 약 1000억 원 이상을 탕감했는데 이는 농촌 근대화 정책의 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박정희의 혁명정부가 때려부수는 데서가 아니라 건설하는 데 유능하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처음으로 깊게 심어 준 계기는 혁명 두 달 뒤 있었던 경북 영주 대홍수 대책이었다. 박정희 의장은 현장을 시찰하는 자리에서 S자로 흘러 홍수를 자주 일으키는 영주천 유로(流路)를 직선으로 바꾸도록 지시하였다. 군의 공병대가 투입되어 직강(直江) 및 제방 공사를 하고 영주 시가지도 재구성하도록 하는 작업엔 여섯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군사작전처럼 해치운 것이다. 군 장교단의 우수한 경영능력을 보여 준 첫 사례로서 ‘건설하는 군인들’의 역사적 등장이었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정권을 잡고 경제개발에 착수하였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당시 경제통계 대상이었던 103개국 중 87위로 최하위권(最下位圈)이었다. 1위는 2926달러의 미국, 이스라엘은 1587달러로 6위였다. 일본은 26위(559달러), 스페인은 29위(456달러), 싱가포르는 31위(453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봉은 40위(326달러), 수리남은 42위(303달러), 말레이시아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 세 배가 많아 44위(281달러)였다. 아프리카 짐바브웨(당시 이름은 로디지아)도 당시엔 1인당 국민소득이 274달러로서 한국의 약 3배나 잘살았고 46위였다. 필리핀은 당시 한국인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보다 약 3배나 많은 268달러로서 49위였다. 남미의 과테말라도 250달러로 53위, 잠비아(60위·191달러), 콩고(61위·187달러)도 한국 앞이었다. 나세르의 이집트는 152달러로서 70위였다. 박정희 소장 그룹의 일부는 이집트의 나세르를 따라 배우려 했다. 아프가니스탄도 124달러로 75위, 카메룬은 116달러로 77위였다. 캄보디아도 116달러로 78위, 태국은 110달러로 80위였다. 차드 82위, 수단 83위, 한국 87위!
그 뒤 한국이 얼마나 빨리 달리고 높게 뛰었는지는 설명이 필요 없다. 한국은 유신(維新) 시대로 불리는 1972~79년에 중화학공업 건설을 본격화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 랭킹에서 도약한다. 1972년에 한국은 323달러로 세계 75위, 말레이시아는 459달러로 64위였다. 1979년에 가면 한국은 1734달러로 59위에 오른다. 말레이시아는 63위로 1537달러였다. 말레이시아가 못해서가 아니고 너무 잘한 한국에게 뒤로 밀린 것이다.
파라과이로 이민 갈 뻔하다
해방 80년의 역사를 여러 측면에서 요약할 수 있는데, 우선 민족사에서 잊혀졌던 4대 정신을 재발견했다. 해양정신, 상무(尙武)정신, 기업가정신, 그리고 자주정신. 이런 투혼(鬪魂)을 불사르며 우리는 건국, 호국,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 복지화의 길을 달렸다. 군 장교단과 기업인과 과학기술자들이 새 역사 창조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군사문화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합리주의에 뿌리내린 박정희의 대전략은 자조(自助)정신-자립(自立)경제-자주(自主)국방-자유(自由)통일의 단계를 순차적으로 속도감 있게 밟아 가는 길이었다. 천지개벽의 변화를 이끈 박정희는 교사, 군인, 혁명가, 경영자의 네 역할을 하면서 최악의 조건에서 최단기간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업적을 남겼다.
5·16 군사혁명 이후 한국은 해양화(海洋化)의 길을 질주한다. 정부는 이민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이민선이 부산항을 떠났다는 기사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1962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가족들을 데리고 사진관으로 가더니 여권용 사진을 찍었다. 이민 수속을 하고 있다고 했다. 목적지는 파라과이였다. 나는 그 나라에 대하여 아무것도 몰랐지만 수속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다.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는 없을 터이니 조국을 떠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당시 파라과이의 1인당 GDP는 170달러 정도로 한국의 두 배였다. 작년 파라과이의 1인당 GDP는 6640달러로 한국의 3만6000달러의 약 5분의 1이다. 지난 64년간 한국은 파라과이보다 10배 빨리 뛰었다는 이야기다. 다행히 이민 수속은 실패하여 나는 지금 이 글을 한국에서 쓰고 있다.
다시 바다로 들어간 한국
세계무대에서 한국의 해양화를 선도한 이들은 유능한 선장들이었다. 해양대학 출신 선장들이 외국 선사(船社)에 취직했고 이들은 수출선원으로 불렸다. 수산대학 출신 선장들은 원양어선을 타고 먼바다로 나아갔다. 두 대학 모두 부산에 있었다. 1960년대의 베트남 파병도 한국 군인들의 첫 해외 진출이었고 1970년대 거대한 조선소의 등장은 한국을 세계적 해양강국으로 만든다. 조선조 시절 서해는 수백 년 동안 통항(通航) 금지 해역(海域)이었다. 이영훈 교수는 《한국경제사》(2016)에서 “조선은 바다에서 철수했다”고 했는데 한국은 다시 바다로 들어간 것이다.
내가 1965년에 국립 부산수산대학(제조과)에 들어가고, 기자로서는 해저 석유 시추 취재에 달려들고, 탱커를 타고 중동~울산 석유 항로 취재도 하고, 북양(北洋)어업이나 고래잡이와 관련된 글을 쓰고, 해운업과 바이킹, 그리고 세월호 사고 등에 관심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등 바다와 관련된 분야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 것도 한국 해양화의 흐름을 탄 덕분일 것이다. 38선 획정(劃定)은 남한을 사실상 섬으로 만들어, 생존을 위하여 해외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도록 밀어붙인 면이 있다. 이는 분단으로 위장한 축복이었다.
서울에서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바다와 배를 잘 모르는 사(士)자 계급들이 많다. 이들이 세월호 사고나 천안함 폭침 같은 사건을 다루는 태도는 조선조 양반들이 서울에 앉아 이순신의 작전에 참견하는 것처럼 현실과 동떨어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몰락을 부른 한 요인이기도 했던 해양경찰 해체는 바다와 배에 무지한 국가 엘리트 세력의 치명적 실수였다(나는 해체 발표 당일, 선동에 굴복한 박근혜의 몰락을 예언했다). 한국의 하드웨어는 거대한 해양 세력인데 이를 뒷받침해 줄 해양정신이 부족하다.
軍人과 文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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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대선을 앞두고 지상 논쟁을 벌인 함석헌(왼쪽)과 이낙선. |
나는 장외(場外)에서 벌어진 함석헌(咸錫憲)-이낙선(李洛善) 논전(論戰)을 재미있게 읽었다.
함석헌은 1963년 7월 16일 자 《조선일보》 1면에 ‘3천만의 울음으로 부르짖는다’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박정희 님, 당신은 군사 쿠데타를 한 것이 잘못입니다. 나라를 바로잡자는 목적은 좋았으나 수단이 틀렸습니다. 수단이 잘못될 때 목적은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우리의 국시(國是)는 반공이 아니라 데모크라시입니다”라고 썼다.
박정희의 대리인으로서 반격에 나선 이는 ‘5·16혁명 기록의 사관(史官)’ 이낙선 중령이었다. 최고회의 공보비서이던 그는 8월 22일부터 3일간 《동아일보》에 ‘들이대는 말에 갖다 바치는 말씀’이란 제하의 글을 실었다. 그때 이낙선의 나이는 36세. 패기만만한 젊은 장교였다.
〈지금 우리가 가난을 면하기 위하여 걷고 있을 겨를이 없어 세찬 달음박질을 하는 통에 얼마쯤의 무리가 뒤따랐던 것도 사실입니다. 혁명정부는 어리석게도 국민을 편안히 쉬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논길을 넓혀라, 부엌을 개량하라, 호미 자루를 길게 하라, 리어카를 이용하라, 돼지를 길러라, 가을갈이를 하라, 퇴비를 많이 만들어라, 자동차는 고·스톱을 지켜라, 양담배를 피지 말라, 깡패를 잡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다음에 표 찍을 때 보자”고 하는 말도 들었습니다. 5·16은 결코 인기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낙선은 군대가 민주주의와 동떨어진 존재라는 주장에 이렇게 반론했다.
〈선생님은 군에서 부정선거에 항거한 일, 정군(整軍)운동, 소위 하극상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알 까닭이 없습니다. 선생님이 해박한 지식을 과시할 때 우리는 주견(主見) 있는 총명으로 답할 것입니다. 선생님이 뇌조직의 발달을 뽐내신다면 우리는 건전한 심신(心身)으로 맞세우겠습니다. 선생님이 개인적 재간으로 덤비신다면 우리는 단체적 협동력으로써 막을 겁니다. 만일에 오랜 경험을 앞세운다면 우리는 오히려 짧은 기간 내에 고도로 훈련되고 조직화되고 숙련되고 기계적인 행정 역량으로 반발할 것이고, 선생님이 그럴듯한 종교적인 계시, 임기응변의 잔꾀로 견주신다면, 우리는 언제나 생각하고 평가하고 다시 숙고하여 결론짓는, 반복(反復)이 주는 주도한 계획성으로 대할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즐겨 돌리시는 혓바닥운동이나 자랑으로 하시는 광필(狂筆)에 대해서는 차라리 묵묵한 실천으로 답하렵니다.〉
부끄럼 타는 박정희
당시 고등학교 2학년생이던 기자는 1963년 10월 9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있었던 공화당 유세를 들으러 갔다. 박정희 후보의 연설은 한마디로 재미가 없었다. 선동과 우스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차분하고 깐깐하게 연설하니 청중은 흥분하거나 웃을 일이 없었다. 박정희는 또 대중 앞에 나타나 연설하는 것이 뭔가 어색한 듯 수줍어하는 표정이었다. 시간이 수십 년이 흘러 박정희의 이날 연설을 녹음 테이프로 들었더니 느낌이 달랐다. 그의 연설에는 구체성과 실질(實質)이 있고 비전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열정이 느껴졌다. 그가 연설에서 약속한 것이 대부분 그 뒤 실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그의 연설은 당시의 청중이 아니라 역사를 향해서, 미래를 향해서 토로한 다짐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날 부산 유세에서 박정희는 낭만에 빠질 여유도 없는 것이 조국의 현실이라고 했다.
〈어제 마산에서 유세를 마치고 부산으로 자동차를 타고 왔습니다. 연도(沿道)의 풍경은 대단히 아름다웠습니다. 오곡백과가 대풍년을 이루었습니다. 연도에는 코스모스가 한없이 피어서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대단히 부드러운 기분을 주었습니다. 한곳을 지나오면서 보니까 땅에 납작하게 붙은 쪼맨한(조그만) 오막살이 주막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 코스모스가 피었는데 그 코스모스 키가 오막살이 집보다 오히려 더 클 정도로 납작하게 붙은 주막집입니다. 거기 어떤 농부 같은 한두 분이 앉아서 막걸리를 이래(이렇게)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맑고 높은 가을 하늘, 오막살이 주막집, 코스모스, 두 사람의 농부, 막걸리. 이 광경이 아주 낭만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하나의 낭만이라고 듣고 버려 둘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냐. 금년과 같이 이렇게 풍년이 들었더라도 우리나라는 식량 하나 자급자족을 못 하는 그런 형편에 있다 이겁니다.〉
박정희와 윤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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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터 현은 1963년 특파원 기자로 내한해 윤보선·박정희와 인터뷰했다. |
1963년의 대통령 선거는 거대한 역사적 토론장이었는데 박정희 세력, 즉 국군 장교단은 지성(知性)과 논리 면에서 민간 정치인에 결코 밀리지 않았음을 나는 증언할 수 있다. 무식, 무능한 쪽은 그들이 아니었다. 민주주의로 포장한 조선조적 사(士) 계급의 명분론은 합리성으로 무장한 박정희 세력에 격파당했지만 득표 면에선 근소한 차이였다. 이는 조선조적 전통의 관성(慣性)과 민주주의란 가치관이 국민들에게 스며든 결과일 것이다.
逆轉 드라마
초·중·고등학생 시절 나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부산의 서점엔 《문예춘추》 같은 일본의 잡지나 문고판 헌책들이 많이 꽂혀 있었다. 일본어 문법책을 사서 몇 달 읽으니 한자가 많은 일본어책 읽기는 가능해졌다.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도 일본 책으로 읽었다. 나는 사회주의 경향의 책도 많이 읽었다. 특히 고등학교 진학 선물로 누가 사준 《근대혁명사상사》를 탐독하고 트로츠키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 책의 원명(原名)은 미국 좌파 문학가 에드먼드 윌슨이 쓴 《핀란드 역까지(To the Finland Station)》였다. 강봉식 씨가 번역하였다. 좌파 서적으로 판매금지하지 않고 팔리게 한 것이 신기하였다. 광복동에는 리어카에 지나간 미국 야구 잡지나 영문 서적을 잔뜩 싣고 파는 노점상이 있었는데 여기서 영어판 《공산당 선언》을 구해 와서 가슴을 뛰며 읽기도 했다.
박정희와 김종필을 좋아한 이유 중 하나는 두 사람의 미국에 대한 주체적 입장이었다. 박정희-윤보선 대결은 사상논쟁으로 번졌는데 ‘빨갱이’로 몰린 이는 박 후보였다. 그의 남로당 전력(前歷)을 폭로한 기사를 호외로 뿌린 것은 《동아일보》였다. 10월 15일 투표 방송은 역전 드라마였다. 우리 집안은 모두 박정희 편이었다. 투표일 직전 윤보선 측 인사가 “경상도에는 빨갱이가 많다”고 한 발언은 사상 문제로 피해를 본 이들을 자극하여 몰표가 나오게 했고 이게 당락을 갈랐다. 박정희 후보가 표를 많이 받은 곳은 1956년 조봉암 후보 표가 많이 나온 곳과도 많이 겹쳤다.
나는 2박 3일간 이어진 개표 중계방송을 밤새워 들으면서 박정희 후보가 막판에 전라도에서 쏟아진 표에 힘입어 15만 6000표 차로 이겼을 때 박수를 쳤다. 직후의 총선에선 공화당이 압승했다.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 피살은 텔레비전의 위력을 실감하게 했다. 범인 오스왈드가 세계가 TV로 지켜보는 가운데 사살되는 장면, 장례식에 참석한 박정희 의장과 키 큰 드골 프랑스 대통령의 사진은 오래 남았다.
야구와 권투
한일회담 반대 시위는 1964년 6월 30일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불렀고, 1965년에도 계속되었다. 나는 부산수산대학교 제조학과 1학년 대표였다. 내가 입학시험에서 수석으로 합격했다고 친구들이 억지로 감투를 씌웠다. 그해 여름방학을 앞두고 학생회에서 시위 동원령이 내려왔다. 나는 과(科) 회의를 열어 찬반 토론회를 열었다. 시위 찬성자가 과반수였지만 자율적으로 개별적으로 시위 참여를 결정하도록 했다. 그 뒤의 집단농성에도 자율 참여를 원칙으로 했다.
1960년대 한국인의 문화생활에서 영화가 압도적이었다면 1960년대부터는 스포츠의 영역이 삶 속으로 확장된다. 나는 1964년부터 미국 메이저리그와 미국 흑인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에 빠졌다. 메이저리그 야구는 그 후 61년간 나의 시간을 매일 평균 2시간씩 잡아먹었다. 1960년대 후반에 가면 메이저리그 선수의 이름, 몸무게, 키, 타율 등 성적을 거의 다 외울 정도가 되었다. 유명한 야구 명언 두 개는 그 시절 한국인에게 딱 들어맞아 자주 인용한다.
“좋은 사람은 꼴찌 한다.”(리오 두로셔)
“끝나 봐야 끝난다.”(요기 베라)
김기수 선수가 1966년 6월 25일 장충체육관에서 이탈리아의 벤베누티 선수에게 판정승, 주니어미들급 세계 챔피언이 되었을 때(일요일) 신문들은 호외를 냈다. 텔레비전 보급 대수가 제한적일 때여서 알리가 나오는 권투 시합은 다방이나 사무실에서 여러 사람들이 모여 흑백 TV로 구경하는 경우가 많았다.
청와대 습격사건으로 나라와 나의 운명이 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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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1·21사태는 나와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
이렇게 적으면 나의 삶의 궤적에 큰 영향을 끼친 날이 하나 빠진다. 그것은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사건이다. 당시 나는 영어를 잘한다고 요격관제병으로 뽑혀 동해안 1219m 고지의 레이더 사이트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청와대 습격사건 이틀 뒤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땐 레이더 스크린엔 한국으로 전개되는 미군 전투기의 항적(航跡)이 줄을 잇고 있었다. 그해 11월엔 삼척·울진 무장공비 침투사건, 우리 레이더기지 상공은 야간작전의 조명탄으로 환했고 낮엔 1·21사태 때 잡힌 김신조 씨가 군용기를 타고 투항을 권유하는 방송을 하고 다녔다. 이듬해엔 동해에서 미군 정찰기 EC-121이 북한 공군에 의하여 격추되어 일촉즉발의 위기가 조성된다.
그때 한국은 두 개의 전선(戰線)을 가졌다. 베트남 파병 전선과 국내의 게릴라 전선. 박정희 대통령은 김일성(金日成)의 도전에 예비군 창설과 중화학공업 건설로 대응한다. 김정렴(金正濂) 당시 비서실장에 따르면 중화학공업 건설의 발상은 우리 손으로 무기를 만들어야겠다는 필요성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그런데 무기를 만들려면 정밀기계공업이 필요하고, 정밀공업은 중화학공업이란 기반이 없으면 가동할 수 없다. 그래서 중화학공업 건설이란 대도박을 벌이게 되고 이를 성공시키기 위한 효율적인 정치체제를 만들기 위하여 유신 선포가 이뤄진다.
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를 내세운 유신체제가 출범하고 중화학공업 건설이 막 시작되었을 때인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이 터졌다. 중동 산유국들은 이스라엘을 응징하기 위하여 석유 수출 제한이란 집단행동을 하는데 친(親)이스라엘 국가로 몰린 한국은 한때 석유 수출 금지 대상국으로 찍히기도 했다.
박정희는 여기서 운명적인 결단을 내린다. 중화학공업을 접지 않고 오히려 밀고 나가면서 오일머니가 몰리는 중동 건설시장으로 진출, 1977년엔 중동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중동산 석유를 사고도 조금 남을 정도였다.
이런 연쇄반응을 부른 단초는 김일성의 1·21 청와대 습격사건이었다. 그의 6·25 남침은 민간인 박정희를 소령 박정희로 복귀하도록 하여 그 11년 뒤 쿠데타로 집권하도록 했는데, 1·21사건은 대통령 박정희를 자극하여 국력을 총동원한 대응을 불러들여 오늘날의 남북한 차이를 만들었다.
김일성의 두 번째 도발은 나의 인생 설계도 바꿔 놓았으니, 군 복무기간이 4개월 연장된 일이다. 예정대로 3년 복무 뒤 제대했으면 바로 대학 3학년으로 복학하려고 했는데 이게 틀어진 것이다.
軍大 이야기
나는 3년 4개월간 요격관제 특기병으로 근무한 뒤 1970년 6월 30일 공군 병장으로 제대하였다. 군번은 3275502. 대전에서 부산으로 열차를 타고 귀향(歸鄕)길에 올랐을 때 나의 심신(心身)은 부산에서 대전으로 갈 때보다 더욱 강건하게 되어 있었다. 나의 가슴은 대한민국 국민의 의무를 다했다는 자부심과 몸 성히 돌아오도록 도와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차있었다.
나는 사병 161기로 입대한 뒤 대전에서 훈련을 받던 중 폐렴과 늑막염 합병증으로 40일간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163기와 함께 항공병학교를 졸업했다. 입대 기준으로는 161기, 졸업 기준으로는 163기란 정체성(正體性)의 혼란을 줄곧 겪어야 했다. 나는 동해안의 레이더 사이트에 배치된 다음부터 군번(軍番)과 제대 연원일을 기준으로 하여 “나는 163기가 아니라 161기이다. 그러니 162기 너희들은 비록 나보다 먼저 훈련소를 졸업하고 이 부대에도 먼저 배치되었으나 나의 부하다”라는 입장을 취했다.
처음에는 말을 서로 놓던 163기가 반발하였고 162기 졸병들은 어이없어 하였으나 주먹다짐도 해가면서 내 몫을 찾아 먹게 되었다. 161기 동기생들이 나를 밀어 준 덕분에 나의 정체성 회복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이다. 한국 현대사의 한 시대를 주름잡은 육사 8기처럼 역시 동기생은 많고 보는 것이었다.
나는 요즘도 군대를 ‘軍大’라고 쓰곤 한다. 대학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고 그 덕을 기자 생활 때 보았다. 요격관제병은 관제사가 전투기를 유도할 때 그 옆에서 수동식 컴퓨터로 비행기의 속도, 고도, 방향 등을 계산하여 보좌해 주는 조수(助手)이다. 이때 얻은 비행기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나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 대한항공 007 피격사건 등 항공사고를 많이 취재할 수 있었다. 우리 부대는 미(美) 공군과 합동근무를 하면서 비행기 식별 업무로 해서 일본 자위대와도 연락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나는 영어·일어 회화를 실습할 수 있었고 지금껏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침묵의 暗室
우리 부대는 절간 같은 산정(山頂)의 고독한 사이트 내(內) 침묵의 암실에서 근무한 관계로 해서 학구적이었다. 유일한 낙(樂)이 있었는데 저녁 먹고 내무반에서 영화 상영을 할 때였다. 영어를 좀 한다고 조갑제 졸병은 만날 미군 부대에 가서 영화 필름을 빌려 오는 역할을 맡았다. 1년에 300편 정도는 보았으리라. 영화를 많이 본 이력도 요사이는 대화의 중요 반찬으로 살아 있다.
나는 휴가 갈 때 상관들의 연애편지 심부름도 더러 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부산의 군병원에 근무하던 간호장교를 알게 되었다. 눈이 많이 와서 찻길이 끊어지는 바람에 예정된 4박 5일의 휴가가 취소되어 내무반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 나는 이 간호장교에게 단편소설 분량의 편지를 써서 소포로 부쳤다. 언제 답장이 오는가 하고 가슴을 졸이고 기다리는데 한 달쯤 지나서 그것이 왔다. 엽서 한 장이었는데 “잘 받았습니다”가 전부였다. 답장이 아니라 접수증이었다. 공군 졸병과 간호장교 사이의 연애는 성사되지 않았지만 이때 연습해 둔 긴 글 쓰기는 나의 생활무기가 되고 있다.
요격관제병이 맨 처음 하는 일은 플라팅(plotting)이란 것이다. 비행기 항적을 플라스틱 게시판에 그려 넣는 일이다. 플라터(plotter)는 게시판 뒤에서 리시버를 끼고 있다가 레이더 관측병이 불러 주는 좌표를 찍으면서 비행기가 날고 있는 자취를 그려 넣으니 글자는 거꾸로 써야 한다. ‘글자 거꾸로 빨리 쓰기’가 기네스북에 오른다면 내 이름은 상위(上位)에 있을 것이다.
박정희 “금메달과 동메달을 따도 박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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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 후보는 ‘박정희 영구 집권’을 경고했다. |
나는 제대한 뒤 대학 3학년으로의 복학을 포기했다. 빨리 사회생활을 하고 싶었다. 신문사 수습기자 입사시험에서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지 않는 부산의 《국제신보》에 지원서를 냈고 1971년 2월 1일부터 기자로 뛰게 되었다. 김일성 때문에 나라와 나의 운명도 달라진 것이다.
기자 생활 두 달 뒤인 1971년 4월 27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金大中)-박정희 후보는 부산 유세를 조선방직(조방) 터에서 했다. 쇼를 할 줄 모르는 박정희의 연설은 교과서적이었다.
〈얼마 전에 지난 60년대의 10년 동안 전 세계 120여 개 국가 중에서 어느 나라가 가장 경제성장이 빨랐느냐 하는 통계를 봤습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 대한민국이 세 번째로 들어갔습니다. 3등을 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모든 국가가 수출 증대를 위해서 필사적인 노력을 해왔는데, 전 세계 국가 중에서 어느 나라가 가장 빨리 성장을 했는가 하는 통계를 보니까, 대한민국이 1등이었습니다. 경제성장에 있어서는 3등을 하고 수출에 있어서는 1등을 했다, 그것은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나라가 국가대표 선수를 뽑아서 올림픽 대회에 보내 경제성장에 있어서는 동메달을 땄고 수출에 있어서는 금메달을 땄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선수들이 올림픽 대회에 나가서 금메달, 은메달 따고 돌아오면 김포비행장에 나가서 꽃다발을 걸어 주고, 자동차 타고 서울시내에서 축하 퍼레이드를 하며 전 시민들이 박수를 보내 주는데, 지난 10년 동안 경제건설 올림픽 대회에 있어서 우리 공화당 선수 팀이 두 번 출전해서 동메달과 금메달을 따도 우리 국민들이 한 번도 크게 박수해 준 일이 없어요. 오늘 여러분들이 한번 박수를 보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스물여섯 살의 조갑제 기자는 그 자리에서 박수를 치지 않았다. 같은 자리에서 김대중 후보의 연설을 들었을 때의 흥분과 재미가 없었다. 김대중은 “이번 선거가 영구 집권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경고하고 다녔다. 그 8년 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를 지지했던 나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1971년 4월 27일 나는 물론 박정희를 찍지 않았다. 투표일 며칠 뒤 박정희 대통령은 김종필을 불러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국민들이 표를 이렇게밖에 안 주나”라고 섭섭한 감정을 토로하면서 ‘중대 결심’을 시사한다. 그를 서운하게 만든 사람 중에 나도 포함된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