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의 시각

해방둥이 기자의 짧은 회고록 ① 나는 국적(國籍)이 네 번, 어머니는 다섯 번 바뀌었다!

  •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TV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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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이 배를 타고 부산항에 내렸을 때 누님들과 아버지는 ‘아, 잘못 선택했구나’라고 직감했다고 한다. 누님들이 받은 가장 큰 충격은 행상(行商) 아이들이 몰려와 “내 물건 사이소”라고 경쟁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자기 물건만 팔면 될 터인데 “저 아이 물건은 가짜니 내 것을 사라”고 험담하는 데 놀랐다고 했다.
1945년 10월 부산항으로 귀국하는 재일 한국인들. 사진=월드피스자유연합
80년 전 1945년 8월 15일 나는 어머니 뱃속에 있었다. 우리 가족은 일본 도쿄(東京) 부근 사이타마(埼玉)현에 살고 있었다. 고향인 경북 청송군 안덕면에 살던 함안조씨(咸安趙氏) 몇 가족이 일본으로 가서 주로 공사판을 따라다니면서 돈벌이했다. 이들은 규슈(九州)에서 시작, 북상(北上)하면서 오사카(大阪), 나고야(名古屋), 하마마쓰(濱松)를 거쳐 해방 직전에 사이타마현에 정착했다.
 
  세 누님에게서 들은 태평양전쟁 중 미군 전투기의 공습 이야기는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장면이다. 군수(軍需)공장이 몰려 있는 곳이라 미군 전투기는 저공(低空)비행 하면서 폭탄을 투하하곤 했는데 이 마을 아이들은 근처 언덕에 올라 폭격을 구경하곤 했다. 미군 조종사들도 낮게 나는 전투기의 조종실 창문 너머로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곤 했다는 것이다.
 
  일본 패전(敗戰)과 함께 이 마을엔 미군이 진주했다. 흑인 장교가 부대장이었다. 당시 33세이던 아버지로부터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마을의 촌장(村長)이 딸을 이 장교의 정부(情婦)로 보낸 다음 부대에서 물자를 많이 얻어 냈는데 독식(獨食)하지 않고 공평하게 나눠 주니 마을 사람들 누구도 욕하지 않더란 것이다.
 
  아버지에게서 들은 일본인의 무서움에 관한 이야기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일본인 소년이 동네에서 도둑으로 몰렸다. 그 아버지는 억울하다고 했지만, 상대가 말을 듣지 않으니 칼로 도둑으로 몰린 아들을 찔러 죽인 다음 도둑으로 몬 사람을 죽이더라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3대 독자(獨子)였고 어머니(해방 당시 36세)는 내 위로 딸만 셋 낳았으니 나는 태어나서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는 그 뒤 여동생과 남동생을 하나씩 더 낳으셔서 모두 2남(男) 4녀(女)가 출생했다. 이는 살아남은 숫자이고, 실제로는 12명을 낳았으나 여섯 명이 영아(嬰兒)로 사망했다. 해방 때 한국의 영아 사망률은 1000명 출생에 약 150명이었지만 청송은 의료 시설이 전혀 없다시피 한 산골이라 더 높았을 것이다.
 
 
  싱가포르 함락의 충격
 
싱가포르 함락 후 일본군에 생포된 영국군 병사들. 싱가포르 함락은 아시아인들의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나중에 누님들한테서 들은 일본 체류(滯留) 이야기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또 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이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학생들에게 그곳에서 많이 나는 고무로 만든 공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는 것이다. 일본군이 1941년 12월 7일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하고 며칠 뒤 싱가포르 근해에서 영국 해군의 자존심인 전함(戰艦)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격침하고 이듬해 2월 15일 싱가포르를 점령한 사건은 미국과 영국으로 대표되는 백인종에 대한 황인종의 승리로 선전되었다. 영국의 해군장관 출신 윈스턴 처칠 수상도 회고록에서 이를 제2차 세계대전 때의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억했다.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의 종언(終焉)을 예약한 상징적 사건이다.
 
  지브롤터처럼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로 불렸던 싱가포르에 주둔한 영국군은 압도적 병력 우세(영국군 13만 명, 일본군 3만5000명)에도 일본군의 육로(陸路)를 이용한 기습 침공에 무너졌다. 러일전쟁에 이어 백인이 황인종에 대규모로 항복한 사례로서 인도, 말레이시아, 미얀마(버마), 인도네시아의 반(反)식민지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윤치호 일기
 
윤치호
  윤치호(尹致昊) 일기를 읽으면 묘한 대목이 나온다. 미국 에머리 대학을 다닌 대표적 개화파 친미 기독교인인 그의 놀라운 인종 감정이 그것이다.
 
  1941년 12월 8일 일기에서 그는 “이제 진정한 인종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황인종 대 백인종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 태평양전쟁은 미국에 100%의 책임이 있다”고 적었다. 12월 9일 일기에선 “일본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을 시작한 이상, 백인종 특히 앵글로색슨인의 참기 힘든 인종적 편견과 민족적 오만과 국가적 침략으로부터 유색인종을 해방하는 데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윤치호가 서양 문물을 높이 평가했는데도 불구하고 가슴속 깊이 백인종에 대한 분노를 간직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온다. 일제(日帝) 말기 조선인 지식인들이 친일(親日)로 돌아선 데는 이런 분위기도 한몫했을 것이다.
 
  당시 70대 후반이던 윤치호는 12월 11일 일기에선 옛날 기억까지 소환한다.
 
  〈지금으로부터 56년 전 처음으로 상하이에 갔을 때 공원 어귀에 중국어와 영어로 ‘개와 중국인 출입 금지’라는 글귀가 적힌 표지판이 걸려 있는 걸 보고 난 설움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일본이 성장해 그들의 간판을 끌어내리면서 백인에게 “우리도 좀 살아 보자”라고 외칠 수 있게 됐다. 일본이 앵글로색슨인의 인종적 편견과 불의(不義)와 거만함이라는 풍선에 구멍을 뚫는 데 성공하길 바란다.〉
 
  12월 26일 자 일기.
 
  〈오늘 조간신문이 기쁜 소식을 전했다. 최근 10일 동안 일본군의 맹공(猛攻)에 맞서 홍콩을 끈질기게 방어해 왔던 영국군 사령관이 어제 오후 5시 50분에 끝내 항복했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동양에서 참기 힘든 인종적 편견과 거만함을 지녀 왔던 영국 제국주의의 최후 거점이 함락됐다. 난 이것이 영원하길 빈다. 일본은 동양에서 백인의 지배를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모든 유색인종의 찬사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백인우월주의자로 비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최근 행동으로 아시아 사람들 속에 잠자고 있는 윤치호류(類)의 감정이 표출되면 중국에 유리할 것이다.
 
 
  도시화, 산업화, 산림화, 자동차화
 
  해방 때 일본에 살던 한국인 약 200만 명은 귀국이냐 잔류(殘留)냐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 아버지는 1946년 초 귀국을 결심한다. 나는 젖먹이로 어머니 품에 안겨 돌아왔다. 우리 가족이 배를 타고 부산항에 내렸을 때 누님들과 아버지는 ‘아, 잘못 선택했구나’라고 직감했다고 한다. 누님들이 받은 가장 큰 충격은 행상(行商) 아이들이 몰려와 “내 물건 사이소”라고 경쟁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자기 물건만 팔면 될 터인데 “저 아이 물건은 가짜니 내 것을 사라”고 험담하는 데 놀랐다고 했다. 청송으로 가는 길에 부산에서 대구까지는 기차를 탔는데 요사이 북한 기차처럼 자리는 뜯겨 나가고 창문 유리창도 없었다.
 
  일본은 전후(戰後)에도 사회윤리가 무너지지 않았는데 돌아온 조국의 혼란상은 7년간 선진(先進) 문물을 체험한 우리 가족에는 일종의 문화 충격이었다. 나는 그 뒤 일본에서 귀환한 이들을 여러 명 만났는데 거의 공통된 소감이었다. 아버지는 “그래도 조상들이 묻혀 있고 친척들이 사는 고향에 돌아가서 아이들을 한국인으로 교육시켜야겠다”고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
 
  우리 집안이 여러 대(代)를 걸쳐서 산 청송군 현서면 덕성리는 영천과의 접경에 솟은 보현산(普賢山) 기슭에 있는 산간 마을이었다. 보현산은 1122m로 꼭대기엔 나중에 천문대가 들어섰다. 천문대의 조건은 공기가 맑고 도시의 불빛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한다.
 

  나의 의식적 기억은 1950년, 한국 나이로 여섯 살 때부터 시작된다. 귀환 후 중농(中農) 생활을 시작한 아버지는 나를 일찍 현남국민학교에 보냈다. 누님들이 나를 학교에 데리고 다녔는데 등교하기 싫다고 길에서 뒹굴었고 차가 와도 고집을 피웠다고 한다.
 
  마을에는 일제시대에 낸 비포장도로가 지나고 있었다. 1945년에 한반도 전체의 자동차 보유 대수는 약 8000대였다. 남한엔 약 6000대가 있었다. 거의 일본 행정 당국과 기업 소유였으며 민간인 소유는 극소수였다. 인구 약 90만 명의 서울시 차량 등록 대수는 약 2000대였다(지금은 약 490만 대). 청송군은 해방 당시 인구가 약 9만 명(지금은 약 2만4000명)이었으나 자동차는 열 대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구가 80년 전의 4분의 1로 줄어든 지금 청송의 자동차 등록 대수는 1만2000대이다.
 
  지난 80년간 한국의 지형을 바꾼 4대 변화는 도시화, 산업화, 산림화, 자동차화가 아닐까? 나는 지금도, 자동차가 마을에 나타나면 아이들과 함께 쫓아가면서 위험하게 차 꽁무니에 매달려 맡던 그 휘발유 냄새를 기억한다. 벤젠 성분에서 나오는 추억의 향기!
 
 
  돌아오지 않는 외삼촌
 
  우리 마을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 주변에 조성되어 100가호(家戶)도 되지 않았다. 외할머니 댁이 옆집이었다. 외숙모는 당시 20대 후반인데 혼자였다. 외삼촌이 1943년 무렵 일본군에 입대, 미얀마 전선에서 군복 입은 사진 한 장과 마지막 편지를 보내고는 해방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외삼촌은 독자였는데 신혼생활 중에 입대했다. 외숙모의 생전 기억에 따르면 일본 당국에서 부추기는 바람에 내키지 않는 상태에서 지원한 것이라고 한다. 외할아버지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해방이 되어도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외할머니는 날마다 동구(洞口)에 나가 종일 기다리다가 돌아오곤 하였지만 끝내 생사(生死)는 확인되지 않고 1970년대에 국가로부터 수십만 원의 돈을 받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태평양전쟁 중 약 24만 명의 조선 청년들이 일본군에 지원이나 징집 형태로 들어갔고 약 2만 명이 전사했다. 살아남은 이들 중엔 국군 창설 때 장교나 부사관으로 임용되어 실전(實戰) 경험을 살려 한국전 때 북한군을 저지한 이들이 있다.
 
  외아들의 실종 상태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외숙모에겐 너무나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평생 수절(守節)한 외숙모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다가 100세를 넘겨 몇 년 전 돌아가셨고 외삼촌의 짧은 생애는 버마에서 보낸 사진 한 장으로 남아 있다. 외숙모는 내가 외삼촌을 많이 닮았다면서 특별히 아껴 주셨다.
 
 
  誤爆
 
6·25 당시 적진을 폭격하는 B-29. 때로는 오폭으로 민간인 피해를 야기하기도 했다.
  6·25 남침 전쟁이 터지기 직전 첫째 누님의 결혼식이 있었다. 그 장면 다음의 기억은 그해 7월 어느 날이었다. 나는 가족이 밭일 하는 데 따라나섰다가 우리 밭 옆으로 난 신작로를 따라 인민군이 보무당당하게 행진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군복은 깨끗했다. 나는 밭과 길이 만나는 곳에서 누렇게 익어 가던, 내 것이라고 찍어 두었던 오이가 걱정되었다. 팔뚝만 하게 자라 언제 따먹을까 고민하던 오이였다. 다음 날 갔더니 없어졌다. 나는 어제 지나가던 인민군이 따갔다고 짐작했다. 당시의 억울함 때문에 내가 이승복 소년보다 먼저 반공(反共) 소년이 되었다는 농담도 한다.
 
  두 달간의 공산 치하가 시작되었지만, 나의 기억은 동화(童話)에 가깝다. 전쟁의 위험을 온몸으로 받아야 했던 이는 아버지, 어머니였고 철없는 나는 전쟁이 가져오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재미있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맑은 여름날, 우리 마을이 하늘로부터 공격당하기 시작했다. 전투기 서너 대가 폭격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 마을엔 인민군이 한 명도 없었다. 근처 다른 마을에 주둔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외국인 조종사가 하늘에서 내려다본 한국 촌락은 비슷하니 오폭(誤爆)을 한 것이다.
 
  이날의 기억은 생생하다. 우리 가족은 2층 건물 높이의 담배 말리는 창고로 숨어들었다. “우당탕탕” 하는 총격과 폭격보다는 창고로 스며든 연기에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나는 벌벌 떨면서 “아부지, 이러면 죽는교?”라고 했다고 한다. 폭격은 한 30분간 계속되었다. 비행기 소리가 사라져 창고를 나왔더니 집은 불타고 소는 불고기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그날 먼 친척 할머니 한 분이 우리 집에 놀러 와 있었는데, 복숭아뼈에 총격을 당해 피를 흘리면서 목마르다고 하니 누군가가 냇가에 데려다 놓았는데 물을 많이 마시고는 출혈과다(出血過多)로 사망했다. 할머니의 남편은 자기 집에서 폭격을 맞아 같은 날에 돌아가셨다.
 
  우리 가족은 근처 산으로 뛰었다. 불타는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겁이 나는 게 아니라 배가 고팠고, 산속에 며칠 있으면서 집에서 키우던 닭을 가져와 잡아먹던 즐거운 기억이 남는다. 비행기 소리만 나면 온 마을 사람들이 폐광(廢鑛)된 광산의 굴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네 번 국적이 바뀌다
 
  당시 38세이던 아버지는 전쟁 때 청년단장이었다. 마을에 들어온 인민군은 아버지를 마을 대표로 세우고 주로 노동력 동원을 강요했다. 이때의 마음고생에 대하여 생전에 아버지에게서 직접 들어 본 적은 없다.
 
  가끔 고향에 들러 마을 사람들로부터 아버지의 활동상을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인민군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 총살 위협을 받았다든지, 그래서 국군이 들어온 뒤 우리 마을에선 한 사람도 부역자(附逆者)로 몰려 죽은 이가 없다든지 등등의 이야기였다. 아버지 생전에 자세한 증언을 받아 기록하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아버지가 인민군이 우리 집 소를 끌고 가는 것을 뒤쫓아가서 나무에 매어 둔 소를 데리고 도망쳐 나왔다는 이야기는 어머니가 해주었다. 국군이 수복(收復)작전을 하기 전 인민군복으로 위장한 두 사람이 밤에 찾아와 아버지를 불러내 마을 정세를 물을 때 구두를 보고 국군임을 알아채 협조했는데, 그때 잘못 판단했으면 죽었을 것이란 이야기 정도가 아버지가 직접 해준 증언이다.
 
  그해 여름 전쟁터의 소년들에게 전투는 재미있는 게임이었다. 저녁노을이 짙어 가는 보현산 너머 영천 쪽에선 쌍방 포격전이 벌어지는데 포탄의 궤적이 핑퐁 치듯이 오고 갔다. 다른 산 너머에선 전투기가 급강하(急降下) 폭격을 하면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저럴 때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1950년 9월 우리 마을은 다시 대한민국 품 안으로 돌아왔다. 내가 1945년 10월에 일본에서 났을 때는 여전히 일본 국적자였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건국 전이라 미군정(美軍政) 치하였고 무국적(無國籍) 상태였다. 미군정이 조선인 임시여권을 발행하던 때였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으로 비로소 국적을 취득했다가 인민군 치하로 들어갔으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소속이 되었고, 국군의 반격 후 다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한 셈이다. 네 번 국적이 바뀌었다. 나의 어머니는 대한제국 시절에 태어났으니 다섯 번 국적이 바뀌었다. 어머니 또래의 서울에 산 사람도 한국전 때 피란 가지 않았다면 다섯 번 국적이 바뀐 게 된다.
 
 
  큰누님
 
  1954년 가을 우리 가족은 부산으로 이사 갔다. 아버지가 2년 전에 큰누님만 데리고 부산에 가서 장사를 시작한 뒤 기반을 잡자 남은 가족을 이사시킨 것이다. 나는 부산 수정국민학교 2학년에 편입해 전후(戰後)의 소년기를 보내게 되는데, 일본에서 살다가 부산항에 도착했을 때 누님들이 느꼈던 것과 비슷한 문화적 충격을 경험했다. 말이 너무 거칠고 발음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담임선생님이 국어 시간에 읽기를 시키면 학생들이 일어나 교과서를 펼치고 “대갈 깼습니다”라고 한 뒤 읽어 내려가는데, 나는 아무리 교과서를 훑어봐도 그런 말이 보이지 않았다. 나도 지명을 받으면 “대갈 깼습니다”라고 읽었다. 나중에 찬찬히 들어 보니 “제가 읽겠습니다”를 빨리 말한 것을 내가 잘못 들은 것이었다.
 
  큰누님은 예식장이 아닌 집 안에서 단출한 결혼식을 올렸다. 전쟁이 나기 직전에 이미 결혼식을 올린 것을 희미하게 기억하던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것 같은데 그냥 지나갔다.
 
  그 비밀이 밝혀진 것은 그로부터 약 50년이 흘러서였다. 자형(姉兄)이 별세한 후 부산에서 서울 우리 집에 잠시 들른 70대 누님이 처음 듣는 이야기를 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첫 결혼 상대자는 좌익 활동 전력자였다. 당시 검찰이 자수한 좌익 출신들을 교도(敎導)하기 위하여 만든 보도연맹(保導聯盟)에 가입했다. 6·25 남침 소식은 며칠 뒤에 청송 산골에 알려졌다. 자형은 도망치지 않았다. 좌익 활동을 심각하게 한 적이 없어 안심했을지도 모른다. 경찰이 상부 지시에 따라 보도연맹원들을 불렀다. 경찰관은 모여든 이들을 총살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뭣도 모르고 소환에들 응하니 기가 찼던 모양이다. “돌아가서 옷 갈아입고 오세요”라며 돌려보냈다. 그 길로 달아나라는 신호였지만 자형을 비롯한 대부분은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타났고, 끌려가서 총살당했다.〉
 
  신혼 초였기에 아이를 갖지 않았던 누님은 남편이 죽은 뒤에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시댁에서 1년을 살았다. 아버지가 데리고 왔다. 원한에 사무쳐 그렇게 했다는 설명이었다. 누님은 “내가 그때 남자였으면 억하심정으로 빨치산이 되었을지 모른다”고도 했다.
 
  아버지를 따라 부산에 온 누님은 월남(越南)한 함경도 청년을 만나 재혼했다. “복수심에서 북한 출신과 결혼했다”고도 했는데, 악착같은 누님이 후덕(厚德)한 자형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국민학교 때 별명은 ‘계백’
 
  부산 수정국민학교 3학년을 마친 나는 이 학교에서 갈라져 나간 수성국민학교로 옮겨 3년을 다니고 1959년에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의 급조한 교사(校舍)에서 한 반에 60명이 넘는 학생들이 공부했다. 한국전이 쓸고 간 폐허 위에서 새로운 세대가 자라고 있었다. 여러 신문은 신년호에 우리 사진을 찍어 “해방둥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면서 희망의 증거로 삼았다.
 
  우리 반엔 10명 정도의 고아원 출신들이 있었다. 이들은 점심 도시락을 싸 오지 못했다. 나는 그들 중 한 아이가 가진 줄칼이 탐나 10일분의 내 도시락과 교환했다.
 
  우리의 영웅은 관창(官昌)과 계백(階伯)이었다. 그때 아이들끼리 별명을 붙여 불렀는데 나는 ‘계백’이었다. ‘이름이 정체성(正體性)’이란 말 그대로 나는 상당 기간 백제 편이었다. 흑치상지(黑齒常之) 이야기가 나오는 역사소설을 읽고 계백의 백제군을 무찌른 김유신(金庾信)이 싫었다.
 
  ‘장군’이란 별명을 가진 아이는 힘이 셌다. 1970년대 후반 부산의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이던 나는 쌀집 주인이 칼을 맞고도 강도와 격투를 벌이다가 사망했다는 기사를 써야 했는데 피살자는 그 ‘장군’이었다.
 
  그때 선망의 대상이 된 존재는 살찐 아이들이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야윈 편이라 살찌는 게 소원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광화문에서 길을 걷다가 만난 한 도시계획 전문가가 “조 기자는 몸 관리를 정말 잘하네요”라고 했다. 그 사람이 지나가고 한참 생각했다. 내가 몸이 좋다고?
 
  주먹다짐이 예사였다. 자연스럽게 학생들 사이에 랭킹이 만들어졌다. 나는 5~6등에서 맴돌았다. 랭킹 1위는 수시로 도전을 받아 결투로 챔피언 자리를 지켜야 했다. 결투 때는 말리는 학생들은 없고 둘러서서 구경하다가 한 사람이 코피가 나면 끝을 냈다. 소년들 사이에서 결투 문화가 사라진 것은 1960년대 들어서이다.
 
  1950년대 후반 부산의 거리 풍경을 생각하면 좀 기이한 장면들이 스쳐 간다. 동네마다 골목마다 배고픈 소년들이 역기를 들고 평행봉에 매달리는 등 힘 자랑이 펼쳐졌다.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에서 아이들은 왜 그렇게 힘겨루기에 투지를 불태웠는지 의아하다. 일제시대를 겪은 교사들의 스파르타식 교육 영향인지, 불사조(不死鳥)처럼 생존 투쟁을 벌이며 일어서던 나라의 시대정신이 그런 식으로 표출되었는지. 여하튼 바깥에선 역기, 철봉이고 집에선 곤봉과 아령이었다. 당수·유도·권투 도장도 많았다. 의지력을 기른다면서 겨울에도 냉수마찰을 했다.
 
 
  시네마 천국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라디오도 드물었던 시절, 거의 유일한 오락은 영화였다. 이탈리아 영화 〈시네마 천국〉은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모처럼 영화관에 들어가면 낸 돈이 아까워 3회 연속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외화(外畵)였다.
 
  부산 동부경찰서 옆 대로변에 미성극장이 있었다. 집에서 가까웠다. 돈을 내고 입장할 형편이 못 되는 아이들이 나무 문에 구멍을 여러 개 파놓았다. 1956년 여름 방학 어느 날 오전 나는 일찍 가서 안경 구멍처럼 생긴 곳을 선점, 맞은편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정신없이 보고 있었다. 그 순간 오른쪽 눈을 번쩍 하고 쑤시는 게 있었다. 찔린 눈은 깜깜해지는데 구멍을 통해 나온 것은 안에서 아이스케키를 먹고 버리는 막대였다. 나는 아픈 눈을 감싸고 집으로 달려가 누워 버렸는데 다행히 실명(失明)에 이르지는 않았다.
 
  1950년대의 참혹한 장면은 상이군인(傷痍軍人)들의 횡포였다. 국가적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니 민폐를 끼치는 수밖에 없었다. 팔다리 잃은 이들이 상점에 들르면 고르는 대로 물건을 내주어야 했다. 5·16 군사혁명 뒤 원호처(援護處·현 국가보훈부)가 생기면서 상이군인 문제가 사라졌다.
 

  아버지는 1954년 무렵 장사를 하다가 사기를 당해 재산과 집을 날린 다음 연료 상점을 열었다. 부산 동구 좌천동 뒷길, 동명목재 강석진 회장 저택 맞은편이었다. 장작, 숯, 연탄(19공탄)을 찍어 팔았다.
 
  작고한 오원철(吳源哲) 전 경제제2수석비서관(박정희 정부 시절)은 “19공탄 덕분에 산림이 보호되었다”고 했는데, 연탄가스 중독 사망자도 많았다. 지하 깊은 곳을 파야 석탄을 캘 수 있는 광산에선 붕괴 사고로 떼죽음하는 광부도 잇따랐다. ‘산업전사(産業戰士)’란 말은 이들에게 처음 붙여졌다. 몇 년 전 강원도 태백시에 있는 석탄박물관에 갔더니 강원도 탄광에서만 누적 사망 광부가 4000명 이상이었다.
 
 
  미군, 기름을 끊다
 
  1950년대 부산에선 아직 호롱불(호야)을 쓰는 곳이 많았다. 호야가 넘어져 불이 자주 났다. 지나가는 전선(電線)을 벗겨 놓았다가 밤에는 전깃줄을 걸어 전등을 밝히는 도전(盜電)도 예사였다. 그렇게 공부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이들도 많을 것이다. 1989년 대한항공기 폭파범 김현희 씨를 처음 인터뷰했을 때 그는 “시내 구경을 나갔다가 가장 놀란 일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상점에 물건이 많은 것과, 그 물건들을 바깥에 진열해 놓아도 도둑맞지 않는 점이 신기했다고 했다. 1950년대의 부산은 북한에 더 가까웠다.
 
  우리 아버지 연탄공장에선 5~6명의 인부가 일했다. 40대의 한 남자는 햇볕 드는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석탄 부스러기를 잘게 깨는 일을 하였다. 종일 말이 없었다. 저녁 무렵이면 부인이 데리러 오는데 단정한 옷차림의 정갈한 얼굴이었다. “남편은 교사였는데 좌익으로 몰려 조사를 받다가 얻어맞아 정신이 온전치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건장한 20대 제대 군인 출신은 연탄을 지게로 나르는 일을 했는데 나하고 친해 전투 이야기를 자주 해주었다. 적군과 대치 중인 전선에서 물을 길러 갔다가 북한 군인과 맞닥뜨려 때려 죽인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겨울인데도 냉방에 모셔 놓고 왔다고 걱정을 태산같이 했다.
 
  이 무렵 목격한 우스운 일 하나. 1957년 겨울, 한국엔 난데없는 석유 파동이 일어났다. 미군이 한국 정부에 대주던 기름을 끊은 것이다. 미군은 원조 물자의 하나로 기름을 한국 정부에 주고 정부는 이를 시중에 내다 팔아 번 돈을 정부 예산으로 썼다. 미군은 석유에 대하여 정부가 너무 낮은 환율을 적용한다면서 환율 인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기름 공급을 중단한 것이다. 버스 운행과 공장 가동이 멈추는 등 일대 소동이 벌어지니 이승만 정부는 손을 들고 환율을 인상했다. 5·16 이후 박정희(朴正熙) 정부가 울산에 정유(精油)공장부터 짓기로 한 것도 석유 자립 없는 나라는 나라도 아니란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절로 익힌 漢字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사진=조선DB
  나는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신문을 읽으면서 시사(時事)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기사는 토씨를 빼면 거의 전부가 한자 표기였고 연재소설은 한글이 많았다. 한자가 있어도 재미에 빠져 신문을 읽고 또 읽으니 저절로 한자를 알게 되었다. 나는 한 번도 한자 교육을 따로 받은 적이 없다. 글자 하나하나가 추상화적(抽象畫的) 이미지인 한자는 그림처럼 스스로 그 뜻을 알려 주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 중학교 들어갈 때는 신문을 자유자재로 읽었다. 고등학교 때 나는 메이저리그 야구에 빠져 미군 중계방송을 듣고 야구 잡지(영문)를 닥치는 대로 읽다가 역시 저절로 영어에 문리(文理)가 트인 경험이 있다.
 
  1956년 대통령 선거는 호기심 많은 나 같은 소년들을 유세장으로 끌어 냈다. 민주당 후보 신익희(申翼熙)는 “못 살겠다 갈아 보자”라는 구호로 아이들도 환호할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는 수세적 구호였다. “구관(舊官)이 명관(名官)이다.”
 
  아버지도 야당 편이었다. 신익희는 투표일을 며칠 남겨 두고 급사(急死)했다. 사람들이 사표(死票)를 각오하고 그에게 던진 표가 160만 표. 부통령 선거에선 장면(張勉) 민주당 후보가 큰 차이로 자유당 이기붕(李起鵬)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진보당의 조봉암(曺奉岩) 후보는 유효투표의 30%를 받았다. 나중에 내무장관이 되어 부정선거를 지휘, 4·19의 원인을 제공하는 최인규(崔仁圭)는 전 공산주의자 조봉암에 대한 이런 높은 지지를 보고 “이승만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없으면 한국은 선거를 통하여서도 공산화될 수 있겠다는 공포감이 생겼다”고 옥중(獄中) 회고록에 적었다.
 
  당시 11세 국민학교 4학년생이 느낀 바닥 민심도 신익희가 당선될 것 같은 분위기였고 노쇠한 이승만에 대한 싫증이 감지되었다. 아이들까지 신익희 추모곡이 된 ‘비 내리는 호남선’(박춘석 작곡, 손로원 작사, 손인호 노래)을 부르고 다녔다. 6·25의 참화(慘禍)를 겪지 않은 경상도 지역에서 조봉암 지지가 강했고, 빨갱이로 몰려 경찰이나 군으로부터 당한 이들의 반(反)이승만 감정도 상당했다.
 
  1958년 12월 24일 자유당은 무술경위(武術警衛)를 동원, 야당 의원들을 끌어내고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보안법 파동’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 아버지도 흥분했다.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 이른바 야당지(野黨紙)였다.
 
 
  중2 때부터 《사상계》 읽어
 
  나는 국민학교 때는 《새벗》 잡지, 중학교 때는 《학원》을 정기구독했는데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사상계》를 읽고 있었다. 《사상계》는 4·19와 5·16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비판적 지식인들과 개혁적 장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1960년 3·15의거에서 4·19, 그리고 4·26 이승만 하야(下野)로 이어지는 격동의 주요 현장은 마산·부산이었고 나는 부산중학교 2학년생이었다. 3월 15일 마산에서 일어난 부정선거 규탄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 사상자가 생기면서 시위의 불길은 부산을 거쳐 서울로 옮겨붙는데, 마산·부산에선 고등학생들이 주력이었다. 부산중학교와 운동장을 공유하는 부산고등학교가 시위에 적극적이었다. 중학교 교사들은 시위 찬반으로 엇갈려 교실에서 가르침이 정반대였다. 출범한 지 오래되지 않은 부산문화방송은 마산의 시위 현장을 라디오로 생중계하기도 했다.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당선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趙炳玉)은 4년 전 신익희처럼 투표일 직전에 사망, 이승만의 당선은 확정된 상태에서 부통령으로 자유당 이기붕 후보를 무리하게 당선시켜 후계자 문제를 없애려 한 것이다.
 
 
  계엄사령관 박정희
 
  1960년 4월 19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지고 부산에선 지역 계엄사령관 사진이 신문 지면에 등장했다. 군수기지사령관 박정희였다. 이름이 여자 같다는 게 첫 느낌이었다. 그리고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하야를 발표하니 세상이 뒤집어졌다. 가까운 동부경찰서로 달려갔다. 경찰관들은 자취를 감추고 군중이 경찰서로 난입, 약탈한 문서들이 거리를 하얗게 뒤덮었다. 학생들이 징발한 트럭들이 시위대를 태우고 어디론가 줄을 지어 가고 있었다.
 
  4·19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허정(許政) 과도정부를 거쳐 내각제로 개헌, 총선을 거쳐 민주당 시대가 열렸다. 부산의 중앙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민주당 유세장에는 주요한(朱耀翰), 박순천(朴順天)에 이어 거제 출신 김영삼(金泳三) 후보도 등장했다. 30대 초반의 앳되어 보이는 그의 연설은 별로였다.
 
  집권 민주당은 신·구파로 분열했고 이게 5·16을 부른 원인이 되었다. 구파(舊派)의 윤보선(尹潽善) 대통령 선출 뒤 실권(實權)을 쥔 총리를 뽑는데, 구파가 밀던 김도연(金度演)은 떨어지고 신파(新派)의 장면이 당선되었다. 아버지와 나는 구파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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