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가족, 도촌리 일대 지통마을→못골→평지마을 등 전전
⊙ “어려운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위인전 읽으며 다음 다잡아”(은사 박병기)
⊙ 출생지 두고 여러 異說… 안동시 예안면 도촌리 지통마을 vs 영양군 청기면 토곡리
⊙ 부모 묏자리에서 준엄한 청량산 보여… 풍수로 볼 때 최고 명당
⊙ 6·3 대선에서 대구 23.22%, 경북 25.52%, 안동 31.38% 득표… 2022년보다 2~3%p가량 상승
⊙ “어려운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위인전 읽으며 다음 다잡아”(은사 박병기)
⊙ 출생지 두고 여러 異說… 안동시 예안면 도촌리 지통마을 vs 영양군 청기면 토곡리
⊙ 부모 묏자리에서 준엄한 청량산 보여… 풍수로 볼 때 최고 명당
⊙ 6·3 대선에서 대구 23.22%, 경북 25.52%, 안동 31.38% 득표… 2022년보다 2~3%p가량 상승

- 경북 안동 예안면 도촌리 마을에 걸린 이재명 대통령 당선 축하 현수막. 사진=설동한
서안동IC에서 중앙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안동시 예안면에서 봉화군 재산면으로 가는 918번 지방도로를 탔다. 산과 들 사이가 굽이굽이 돌며 끝없이 이어졌다.
대선 이틀 전인 그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막판 영남권 공략 차원에서 안동을 먼저 찾아 지지를 호소하며 이렇게 말했다.
“안동은 인생을 시작한 제 출발점이자 인생을 마무리할 종착점입니다. 선대(先代)들도 다 여기 묻혀 계십니다. 그런데 왜 고향 분들은 저를 어여삐 여겨 주지 않나요? 이번엔 아니겠죠?”
‘고향 까마귀’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 달라는 말이었다. 지역 언론인 《경북매일》은 이 후보의 발언을 전하며 ‘뼈 있는 농담’ 이라고 에둘러 표현했다.
“왜 고향 분들은 저를 어여삐 여겨 주지 않나요?”
이튿날 6월 2일, 아침 일찍부터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다 말다를 반복했다. 그래서일까, 산골 마을은 더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도로도 한산했다. 기자는 지난 4월 경북 산불 피해 현장에서 만났던 세 사람과 다시 만났다. 안동 임하면 고택 오류헌 김상돈 대표, 서명수 《매일신문》 객원논설위원, 그리고 김준종 경북인터넷방송 대표와 함께 차를 몰았다. 이재명 대통령의 고향 마을을 발로 뛰며 누구보다 많이 취재해 온 이들이었다.
옛말에 ‘시어(鰣魚·준칫과 생선)는 뼈가 많고, 자미(子美·두보)는 문(文)에 능하지 못하며, 자고(子固·증공)는 시(詩)가 변변치 못하다’고 했다. 맛좋은 물고기이지만 뼈가 유달리 많은 것이 흠이며, 두보(杜甫)는 대시인이지만 산문에는 능하지 못했고, 증공(曾鞏)과 같은 문장가도 운문은 변변치 못했다는 말이다. 이 대통령은 소년공(少年工) 출신으로 성남시장과 1000만 인구의 광역단체장을 지낸 입지전적인 인물로, 피습의 위기까지 넘기며 천신만고 끝에 제21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그의 고향 사람들 기억 속 이재명은 여전히 가난과 결핍 속을 헤매던 야생 그 자체, 깡마른 몸의, 산과 들을 누비던 한 소년의 모습이었다. 소년은 쥐어짜면 색색의 물감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단풍잎 숲을 얼굴이 검게 그을리도록 헤치고 달렸고, 이슬에 젖어 축 늘어진 나뭇가지 밑을 포식자처럼 기어 다니며 씩씩하게 한 뼘씩 자라났다.
안동시 예안면 도촌리 지통마을로 찾아가는 구절양장(九折羊腸)의 길이 너무도 험하고 첩첩산중이라, 어디가 어딘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강물을 따라가듯 무작정 자동차 바퀴가 흘러갈 뿐이었다. 잠시 차에서 내려 걸으니 뻐꾸기가 고즈넉히 울고 나비가 외롭게 팔랑거리고 있었다. 도로변에 드문드문 지붕들이 보이기 시작하기에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까, 계십니까” 불러 봐도 고개를 내미는 사람조차 없었다.
두메산골 화전민 부락 지통마을
노인조차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예안면 산골 중에도 가장 깊숙한 곳에 이재명 대통령의 고향이 있었다. 김상돈 대표와 김준종 대표, 서명수 위원이 주거니 받거니 말을 이었다.
“이재명 고향인 지통마을은 지토마·지통말·지촌(紙村)이라 불렸는데, 옛날 이 마을에 한지(韓紙)를 뜨던 통지통(紙筒·도자기 용기)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종이를 만드는 닥나무를 채취해서 지통마을이라고 불렀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우리가 아는 한지(韓紙)가 닥종이죠.”
“이재명 대통령의 아버지(이경희)가 백부에게 양자를 갔어요. 조카가 자식이 없는 큰댁에 양자로 들어가는 경우는 당시 드문 일은 아니었죠. 이 지통마을에 양부 집이 있었고, 성남으로 온 가족이 떠나기 전까지 안동 예안면과 영양 청기면 일대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어디서 살았는지는 다 확인이 되는데, 지금은 옛집이 사라져 흔적은 알 수 없지요.”
“소년 이재명에게 할머니가 두 분 계셨는데, 부친이 (종)조부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조부는 백마(白馬)를 타고 다녀서 ‘백마쟁이’라고 불렀다는데, 험한 산지를 말을 타고 다녔다고 하니 남들의 이목을 끌었을 겁니다.”
이 대통령 고향인 예안면 도촌리 지통마을에서 산을 몇 고개 넘어가면 봉우리가 36개나 된다는 청량산(870m)이 있다. 봉우리 이름들이 보살봉·문수봉·반야봉·연화봉 등 불가(佛家)와 관련이 깊어 예로부터 청량산은 ‘불가의 봉황’이라 불렸다. 봉황은 경사스러움을 상징하는 상상 속에 새다. 오직 오동나무에만 깃들어 그 열매를 먹고 예천(醴泉)을 마신다는, 서조(瑞鳥) 중에서도 길조(吉鳥)이다. 예천은 중국에서 태평할 때 솟는다는 단물을 말한다. 지통마을은 그런 청량산 자락 산골짜기에 자리한 화전민 부락이었다.
“삽재 다섯 개 里 안에 큰 인물 난다는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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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시 예안면 도촌리 지통마을에 위치한 이재명 대통령의 생가터 푯말. |
문득 반딧불이가 보고 싶었다. 소년 이재명도 이 두메산골에서 풀을 뜯어 넣은 유리병 안에서 깜박깜박거리며 별처럼 예쁜 짓을 하는 반딧불이를 보며 형설(螢雪)의 꿈을 키웠을까.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라는 노래가 들리는 듯했다.
도촌리는 과거 보부상(褓負商)들이 번성할 때 200가구가 넘게 거주하던, 비교적 규모가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44가구만이 거주하고 있다. 대부분의 농가에서 사과를 재배하는데 사과 품질이 우수해 대통령상도 받은 마을이란다.
일행은 한국농어촌공사 도촌저수지 제방에서 3km 정도 위쪽으로 올라갔다. 이 대통령이 자서전에서 “시골에서도 깔보던 동네”라고 한 말이 실감이 날 정도로 오지였다.
드디어 지통마을에 도착했다. 안동·영주민주연합에서 3년 전 세운 ‘제20대 대통령후보 이재명 생가터’라는 푯말이 시선을 끌었다. 지금쯤은 ‘21대 대통령 이재명의 생가터’로 바뀌어 있으리라. 구글 맵을 돌려 보니 주소가 ‘예안면 도촌리 산76번지’로 나와 있었다. 100여 평이 될 법한 생가터에는 고랑마다 검은 비닐에 덮여 땅콩이 재배되고 있었다.
일행은 우연히 향토사학자와 만났다. 중등학교 교감으로 정년퇴직한 설동한(薛東漢·74) 선생은 유서 깊은 안동과 관련한 여러 자료와 전설을 들려 주었다. 기자가 서울로 올라온 뒤에도 소식을 주고받았다.
“안동 예안면 태곡리와 인계리를 잇는 고개가 ‘삽재’인데, 이 삽재는 예안면 인계리, 동천리, 삼계리, 신남리, 도촌리 주민들의 주요 이동 통로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동계천을 따라 우회로가 나면서 삽재는 통로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지만 이 다섯 리(里) 안에 큰 인물이 난다는 전설이 있어요.”
“2022년엔 사자 구름이 해를 삼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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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통마을 이재명 대통령의 생가터에서 마주 보이는 산의 큰 소나무. |
“제가 24살 때인 1984년 안동 인계중 교사로 첫 발령을 받고 오니 마을 어르신이 제자를 잘 기르라는 뜻에서 그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대통령 당선이 유력한 이재명 후보를 보니 이 전설이 틀린 말이 아닌 듯합니다.”
설 선생이 생가터에서 마주 보는 산에 서있는 큰 소나무를 손으로 가리키며 “저 소나무가 삐뚤기는 하지만 굉장히 멋있는 나무가 아니냐”며 이렇게 말했다.
“삽재 5개리(里)에 큰 인물이 난다는 전설을 떠올리며 자주 지통마을을 찾아 사계절 경치를 다 찍어 놨어요. 지난 대선(2022년 3·9 대선) 때는 저 소나무 위에 있던 ‘사자 구름’이 해를 삼키더군요. 그래서 낙선을 예감했었죠.”
기자의 머리 위로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마구 쏟아지는 비는 아니었다. 비가 상서롭게 느껴졌다.
큰 합판을 들고 가는 마을 주민 이모(72)씨를 만났다. 다리를 다쳤는지 걷는 모습이 불편해 보였다.
“우리가 조그마할 때 이 후보 일가는 위쪽(지통마을)에 살고 우리는 저 밑(아랫마을)에 살았으니까 서로가 잘 알지요. 어른도 참 좋았고….”
― 이재명 후보의 선친 말씀이지요?
“네. 그때 (저도 어려서) 그분이 마을 이장을 하셨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그저 조그만 밭뙈기를 일구며 살았겠지요. 그땐 전부 다 어려웠으니까.”
― 이 후보의 조부는 기억나시나요?
“기억나고말고요. 그 어른도 참 좋으셨고…. 참 이 어려운 골짜기에서 태어나 가지고 대통령이 된다면… 어쨌든 뭐 큰 영광이죠. (이재명이)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이 마을 찾았어요. 여기 조부 산소가 있으니까. 작년에도 왔다가 갔어요.”
그는 한사코 자신의 이름을 밝히길 꺼렸다.
“어릴 때부터 머리가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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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 이재명이 살던 새못마을의 집이다. 지통마을에서 살다가 아랫마을로 이사했다. |
“재멩(재명)이, 아니 그분 형(이재선)이랑 제가 나이가 같아요. 그 시절 함께 학교에 다녔지요. 형 동생 할 것도 없이 서로 말 놓고 지냈죠.”
― 소년 이재명을 어떻게 기억하나요?
“키가 작았어요. 코를 많이 흘렸고….”(웃음)
그러더니 “코를 하도 옷소매로 닦아 소매가 번들번들거렸다”고 기억했다.
“어릴 때부터 머리가 비상했어요. 공부도 잘했는데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게 그때부터 있었어요. 선생님이 그러셨거든요. ‘재멩이 니는 나중에 천재 아니면 바보가 될 끼다’라고요.”
― 서로 집안 내력도 훤하겠네요.
“재순이 누나도 알고, 제일 맏이가 재국이 형인데 강원도 광산에서 뭐 하고 다리를 다쳐서 절단했잖아요. 그래 가지고 고생을 많이 하시고….”
지통마을에 살던 이재명 집안은 살기가 어려웠던지 아랫마을인 못골로 이사 가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더 아래 마을인 평지마을로 옮겨 살았다. 그 이유를 권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때는 시골에 농토가 없었잖아요. 어디 등 붙이고 밥 먹을 수 있으면 어디라도 갔어요. 빈집이 있으면 거기서 살고요. 이재명 집도 저수지 아래 못골에서 살다가 좀 더 밑으로 이사를 갔어요. 한 가지 떠오르는 추억은, 학교 수업을 빼먹고 개울에서 가재를 잡고 놀았어요. 다른 친구들이 하교할 때 같이 집에 갔지요.”
왕복 40리 등하굣길 걸어 다녀
지통마을에서 삼계초등학교까지 산길로 20리나 됐기에 아침 일찍 일어나 밥 먹고 1시간 남짓 걸어 학교를 다녔다. 다음은 이 대통령이 성남시장 시절인 2006년 1월에 자신의 블로그에 쓴 글이다.
〈여름에는 그런 대로 견딜 만한데 겨울이면 아침 등굣길은 고통 그 자체였다. 어머니가 미리 데워 둔 따뜻한 세숫물에 세수를 하고 쇠로 된 돌쩌귀를 잡으면 손이 돌쩌귀에 얼어붙어 잘 떨어지지가 않는다. 겨울에는 먼저 간 학동들이 심술로 징검다리에 물을 뿌려 놓기 때문에 돌멩이가 얼어 고무신이 미끄러지면서 발이 얼음물에 빠져 얼어 터진다.〉
또 여름 홍수로 학교에 가지 않은 날이 더러 있었고, 아예 친구들끼리 작당을 해 홍수를 핑계로 집단 결석을 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 마을 사람들은 대체로 어떤 농사를 지었나요? 그리고 이 후보 아버지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특별한 농사는 없었고요, 그분은 동네일을 많이 맡아 보셨어요. 학식이 좀 있는 분이라 한문도 많이 쓰시고…. 담배 총대(조합장)를 하셨는데, 요즘은 엽연초(葉煙草) 농사를 안 짓지만 그때만 해도 거의 집집마다 담배 농사를 많이 했어요. 그분(이재명 아버지)이 1년에 한 번씩 (엽연초를) 검수하셨어요. 재멩이가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난 뒤에 그분이 마을에 와서 ‘우리 아들이 검사가 됐는데 마을 잔치를 한번 해야 한다’고 그러셨어요. 그때 아마 암(癌)이 있으셨던가 봐요. 잔치는 결국 못 하고 돌아가셨지.”
가난했던 시절, 소년 이재명의 집안만 그런 게 아니라 두메산골 사람들의 삶이 그저 고달팠으리라. 인생이 절망에 이르는 긴 우회로를 헤쳐 걷는 것에 불과할지라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았다.
문 닫는 대통령의 모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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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 이재명이 다니던 예안면 삼계리의 월곡초등학교 삼계분교장. 올 2학기에는 학생이 없어 폐교한다. |
“참 어려운 두메산골에서 태어나 산전수전 다 겪고 사회에서도 엄청 힘들었겠죠.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나라를 잘 이끌어 가지고 좋은 대통령으로 길이길이 남기를 바랍니다.”
기자는 김상돈 대표, 서명수 위원, 김준종 대표와 함께 소년 이재명이 살았던 마을을 하나하나 찾아갔다. 처음에는 생가터로 알려진 예안면 도촌리 산76에서 살다가 바로 앞집으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그러나 살림살이가 고달팠던지 못골로 알려진 아랫마을 도촌리 768번지로 옮겨 갔다. 얼마 후 또 다시 평지마을로 불린 도촌리 567의4번지 인근으로 이사를 갔다. 도촌리 일대에서만 몇 번이나 이사를 다녀야 했을 만큼 어려운 삶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 터 위에 집들이 새로 지어졌다. 옛 모습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물고기가 산란 터를 찾듯, 5남 2녀를 거느린 가정은 조금 더 나은 곳을 찾아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생(生)이라는 큰 파도에 휩쓸리면서도 위태롭게 곡예를 하듯 타넘어야 했던 삶의 여정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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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 이재명이 1978년 야구 글러브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 모습이다. |
차를 몰아, 소년 이재명이 2학년부터 6학년까지 다닌 예안면 삼계리의 월곡초등학교 삼계분교장에 이르렀다. 아담한 운동장이 눈에 들어왔다. 알록달록한 2층 교사(校舍)는 텅 비어 있었다. 선생님도 학생도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저 산, 산, 산뿐이었다. 운동장 옆 조그만 밭에 촘촘하게 고춧대가 세워져 있었고 나비들이 여기저기 팔랑팔랑 날아다녔다. 그 몸짓에 변신을 꿈꾸는 소년이 오버랩되었다.
현재 삼계분교장의 재학생은 6학년 1명뿐이다. 올 1학기까지만 이곳에서 공부할 수 있고 2학기부터는 예안면 정산리에 위치한 월곡초등학교 본교로 전학을 가야 한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배출한 산골 학교가 대통령이 된 그해 문을 닫게 되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영양 청기리 이재명 외가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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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명 대통령의 어머니 구호명씨가 살던 영양군 청기면 옛집.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이다. |
영양군 청기면 청기리 일대 마을을 순례하며 구씨 일가가 살았던 집들을 탐문했다. 청기면에는 구씨들이 제법 많이 살고 있었다. 단서를 좇아 물어 물어 결국 영양군 청기면 청기2길 12의 파란 지붕에 이르렀다. 앞마당에는 경운기가 한 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작고 아담한 이 집에 이재명의 어머니가 살았다. 어쩌면 친정인 이곳에서 어린 이재명을 낳았거나 한동안 산후 조리를 했을 수도, 한동안 외조모의 손에서 자랐을 수도 있다. 인근 마을 주민의 말이다.
“여기 ‘서촌댁 할매’가 살았어요. 택호(宅號)가 서촌입니다. 이 땅도 자기네 땅이 아니었어요. 면사무소에서 준 거예요. 살기 너무 어려워 초가집을 짓고 살았는데 (면에다) 1년에 팥 몇 되 내고 살았나 보더라고요. 훗날 서촌댁이 이재명의 엄마를 낳았다는 말을 들었어요. 서촌댁이 떠나고(이사 가고) 곱추 아줌마가 이 집에 들어와 살았어요. 그분들은 구씨와 관련이 없는 분들이에요.”
― 어쨌거나 그 서촌댁이 이재명 외가라는 소문은 있는 거죠?
“그렇죠.”
마을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어떤 노인이 자전거를 타고 우리 곁을 휑하니 지나갔다. 주민 한 분이 지나가는 말로 “저 사람이 오원춘”이라고 했다.
몇 해 전 천주교 초대 안동교구장을 지낸 두봉 주교를 만났을 때 가톨릭농민회 오원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퍼뜩 떠올랐다.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이사 겸 영양군 청기면 분회장 오원춘이 이 마을에 살고 있었다. 1978년 지역농협이 ‘불량 씨감자’를 농민들에게 팔았고, 그가 피해보상운동에 나섰다가 보름 넘게 끌려다닌 사실이 알려지며 ‘짓밟히는 농민운동’의 불길이 타올랐었다.
‘서촌댁 외손주’
그와 인사하려고 쫓아갔으나 이미 보이지 않았다. 마을 이장을 지낸 오창대(吳昌大·61)씨를 만났다.
“우리 마을 노인 중에 이재명 어른(부친)이 결혼했을 당시 잔칫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는 분이 계세요. 그분이 여기서 연탄 배달을 했다고 하던가…. 그 집(청기면 청기2길 12)은 지금도 일부 땅이 면 소유입니다. 원래 방앗간 자리거든요. 그땐 대문도 없었어요.”
이번에는 마을 경로당을 찾았다. 할머니 10여 명이 모여 신나게 화투를 치고 있었다. 그곳에서 《내일신문》 최세호 기자를 만났다. 부지런한 기자로 소문 난 베테랑 기자다. 대선 전에 무슨 ‘냄새’를 맡고 여기 나타난 것 같은 눈치다. 함께 할머니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자세한 내력은 모르고, (이재명이) 서촌댁의 외손주라는 말은 들었어요.”
“서촌댁 딸 이름이 구호명씨가 맞아요.”
“이 마을에 62년째 살고 있지만 내가 시집오기 전의 일이어서 잘 몰라요. 저 집 구우서 아버지가 조그마할 때 (이재명 부모) 잔칫집에 가서 얻어먹었다고 하더군요.”
“원래 서촌댁이 있었는데 그분이 돌아가시고 후처로 들어오신 분이 택호를 물려받았어요. 처음 들어온 서촌댁이 이재명 모친인지 그다음에 들어온 서촌댁이 이재명 모친인지는 잘 몰라요.”
그때 김준종 대표가 기자의 옆구리를 찔렀다. 최 기자 몰래 경로당 밖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최 기자에겐 좀 미안했다.
김 대표가 우리를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더니, 방금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며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소년 이재명이 영양초등학교에서 1학년을 다니다가 2학년 때 삼계초등으로 전학을 갔어요. 그러니까 영양초등 시절 친구인 전모씨 전화를 방금 받았습니다.”
잠깐 숨을 고른 그는 ‘특종’이라며 말을 이어 갔다.
영양군 청기면 토곡리에서 태어났다는 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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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명 대통령의 또 다른 출생지로 알려진 영양군 청기면 토곡리 468번지 일대. 지금은 밭으로 변했다. |
놀라운 이야기였다. 물론 확인하기 어려운, 그러나 지금껏 전혀 알려지지 않은 증언이다. 기자는 전 씨를 만나보려 했으나 그가 원치 않아 직접 만날 수는 없었다.
상당히 구체적인 증언이었다. 우리는 그 ‘빈집’으로 차를 몰았다. 그러나 경북 영양군 청기면 토곡리 468번지에는 집 대신 이랑마다 비닐을 덮어 놓은 밭만 보였다. 계속된 김준종 대표의 말이다.
“영양군 청기면 토곡리 집에서 1년 남짓 살다가 읍내로 이사를 갔고 다시 3살 무렵 안동 예안면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겁니다.”
그러다 대여섯 살에 다시 영양으로 돌아왔고 영양초등에서 1학년을 마치고 다시 안동 예안으로 돌아갔다는 것이 김 대표의 전언이었다. 그는 또 “도촌리 지통마을로 돌아간 후 1년 뒤에 이 대통령의 아버지가 담배 수매 대금을 들고 야반도주를 했다는 소문이 있다”고 전했다.
추보식으로 정리하면, 소년 이재명은 영양군 청기면 토곡리에서 태어나 영양읍에서 살다가 안동 예안면 도촌리 지통마을에서 살았다. 그러다 다시 영양읍내로 나왔지만 여의치 않아 다시 지통마을, 못골, 평지마을로 옮겨 살다가, 먼저 상경한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경기도 성남으로 떠났다는 것이었다.
영양 청기면에 사는 오창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씨가 직접 토곡리 일대를 둘러본 뒤 기자에게 몇 가지 정보를 확인시켜 주었다.
“토곡리 마을 어르신을 찾아가 물으니 이 대통령의 아버지인 이경희씨가 468번지에 살았다는 말을 하더군요. 그분들이 (예안면 도촌리로) 떠난 뒤에도 빈집이 있었지만 세월이 흘러 집이 허물어졌다고 해요. 이경희씨가 살았다고 하니 그 가족도 함께 살았다는 게 확실하지만, 어린 이재명이 그곳에서 태어났는지는 확인하기 어려워요.”
엇갈리는 증언
이번에는 김상돈 대표를 통해 “이재명의 외숙모가 제 고종사촌 누나”라는 분을 만났다. 장성진(張成鎭·73)씨는 “토곡리 468번지 집 소유주인 구자양씨는 영양군에서 유명하신 분”으로 기억했다.
“지역 유지라고 할까요. 힘도 장사고…. 이재명 출생지가 안동 예안이 아니라 영양 청기라는 소문은 사실입니다. 고종사촌 누나가 고인이 돼서 직접 물어볼 수는 없지만 집안 사람들이 그렇다고 얘기하더군요. 우리 매형이 그분(이재명) 아버지하고 댕기면서 도박도 하고….”
아무래도 미심쩍어 안동 예안면 지통마을 출신 권오식씨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권씨는 “이재명이 지통마을에서 태어난 게 확실하다”며 이렇게 알려왔다.
“도촌리 지통마을에서 태어난 게 맞아요. 우리 형님 모두 그렇게 말씀하시네요. 태어날 때 저도 애기였잖아요. 한동네 살면서 그걸 모르겠어요? 저희 큰형님이 지금 89세입니다. 지금도 재멩이네 집 옆에서 정정히 자리를 지키고 계시구요. 저보다 10살 많은 형님도 재멩이 태어난 곳이 지통마을이랍니다.”
기자는 대선 당일인 6월 3일 안동에서 풍수에 능통하다는 기당풍수지리학연구회 박일환(朴一煥) 회장을 만났다. 그의 사무실 벽에 ‘탈신공 개천명(奪神功 改天命)’이라는 문구가 걸려 있었다. ‘신의 공력을 빼앗아서 천명을 바꾸자’는 뜻이다. 박 회장은 예안면 지통마을에 다녀왔다고 했다.
“푯말이 서있는 지통마을 생가 터가 그 마을 다른 집들에 비해 기압이 제일 높아 보입니다. 고기압이라는 거지. 기압이 높다는 것은 온도 변화가 적다는 겁니다. 그 생가터는 씨앗이 흙을 만나 발아하는 상위 1% 땅입니다. 신(神)이 준 명당은 3% 이내라고 하지요. 게다가 이재명 부모를 모신 묏자리를 가봤는데 제일 화려한 땅이더군요.”
은사 박병기 선생님이 기억하는 소년 이재명
“제 초임지가 삼계초등입니다. 1972년 첫 부임해 1975년 소년 이재명과 만났지요. 먼 산길 걸어 등하교하던 시절이었으니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지금은 길이 잘 닦였지만 그때는 아주 꼬불꼬불 산길을 걷고 개울을 건너야 했기에 7km쯤 걷지 않았을까요? 왕복으로 14km 다녔을 겁니다.” ― 많은 제자 중에 유독 소년 이재명이 떠오르는 이유는 뭔가요?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다른 사람한테 쫄지 않고 꿋꿋하게 학교 생활을 잘했어요. 아마도 자신의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학교 도서관에서 열심히 책을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위인전을 읽으며 아마도 위안을 삼지 않았을까, 마음을 다잡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 삼계분교장이 올해 폐교가 된다고 합니다. “네, 안타까워요. 학생이 있으면 좋겠지만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지역 친화적인 문화공간으로 바뀌었으면 좋겠고, 대통령을 기억하는 공간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이 대통령이 어떤 대통령이 됐으면 합니까? “흩어진 민심 잘 모아서 우리 국민들이 단합했으면 좋겠고, 또 민생 잘 살려 국민이 좀 안심하고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 하고요. 그다음에는 금수저 흙수저 이렇게 말이 많은데 금수저든 흙수저든 능력 있는 이가 성공하는 공평한 세상이 좋은 세상 아니겠습니까. 5년 후 청와대를 나올 때 잘했다는 박수를 받았으면 합니다.” |
풍수가 “지통마을과 묏자리가 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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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명 대통령 부모의 묏자리에서 바라본 봉화군 청량산. |
“묏자리를 마주한 산을 안산(案山)이라고 하는데 청량산이 펼쳐져 있더군요. 안산으로 보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화려한 산이지요. 대한민국에서 최고다!”
기자는 박 회장에게 이 대통령의 생가터로 제보를 받은 영양군 청기면 토곡리 468번지를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포털 사이트에서 위성사진으로 주변 지역을 둘러본 뒤에 이렇게 말했다.
“이 산이 여기를 막아 가지고 물이 이제, 이리로 꺾어 들어가잖아요. 여기서 이렇게 휘어져 나가는 형국인데…. 100이라고 보면 60~70%의 형국이라 보시면 돼요. 명당은 3%(안에 드는 땅)라고 했잖아요. 3%를 벗어나서 50~90%는 그냥 괜찮다! 60% 정도면 다른 곳에 비해 나쁘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지통마을과 비교해 좋은 입지는 아닌 듯 보였다.
서 위원 등과 함께 차를 몰아 청량산이 보이는 이재명 대통령의 부모 묏자리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산을 마주보았다. 구름이 청량산에 걸려 있었다. 산꼭대기가 무슨 관모(官帽)처럼 보였다.
가난한 산골 소년이 고향을 떠난 것은 초등학교 졸업식 직후인 1976년 2월 26일이었다. 3년 앞서 성남으로 떠난 아버지를 따라 온 식구가 상경한 것이다. 아버지가 도박으로 집문서, 땅문서를 날려 가족들은 이웃에 보리 한 되, 좁쌀 한 되를 얻어 생계를 꾸렸다.
그런 소년 이재명이 49년이란 세월이 흘러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전과 4범에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심뿐 아니라, 위증교사 사건 2심, 대장동·위례·성남FC·백현동 사건 1심, 불법대북송금 사건 1심, 경기도 법인카드 유용 사건 1심 재판을 뚫고, 끝내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2022년 대선과 비교하니
질기디질긴 놀라운 생명력으로 온갖 난관을 다 헤치고 대한민국의 한자리를 거머쥐었다. 그런 그를 고향 사람들이 차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미워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이재명 후보는 지난 2022년 3·9 대선 때 광주에서 득표율 84.8%, 전남에서 86.1%, 전북에서 83.0%를 기록했다. 그러나 대구에서 21.60%, 경북에서 23.80%를 기록했었다. 당시 고향 안동에서 대구·경북 평균보다 조금 높은 28.86%의 지지를 받았다.
2025년 6·3 대선에서 이 대통령은 대구 23.22%, 경북 25.52%로 3년 전 대선 때보다는 상승했지만 전체적으로 30%를 밑돌았다. 고향인 안동은 어땠을까? 31.28%를 얻어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61.27%)에 크게 뒤졌지만, 경북 23개 시·군 가운데 유일하게 30%대를 넘긴 지역이 안동이었다. 보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안동 예안면 전체 득표율은 40.31%, 지통마을이 있는 예안면 제2투표소는 44.90%였다. 예안면 제1투표소는 27.32%로 경북 평균보다 높았지만 안동 평균보다는 낮았다.
반면 2022년 대선 당시 이재명 후보가 예안면 전체에서 받은 득표율은 37.44%였다. 당시는 제1·2투표소 구분 없이 집계돼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대체로 3%포인트가량 상승한 셈이다. 이 대통령은 이 결과를 보고 서운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까?
첩첩산중 두메산골 코흘리개 소년이 도시의 소년공이 되고, 험난하고 굴곡진 세월을 이겨 내며 마침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여정은 실로 놀랍다. 그를 지탱해 온 치열한 집념이 이제는 위기의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우는 추진력이자, 꺼져 가던 희망에 불을 붙일 수 있을지는 앞으로의 행보에 달려 있다. 국민이 품은 희망을 저버리지 않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