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증언

6·29 당시 김용갑 민정수석의 메모 단독 입수

“6·29 이끌어낸 전두환 결단이 지금의 대한민국 만들었다”

  • 글 : 권세진 월간조선 기자  sjkw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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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직전 2주간 전두환·노태우 비롯해 청와대와 민정당 인물들 행동과 발언 기록한 메모 단독 입수

⊙ 6월 민주화운동 당시 서울시청, 명동성당 시위 현장에서 민심 체감
⊙ 6월 14일 “대통령 직선제 수용하고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을 연구하자”고 건의
⊙ 1987년 6월 18일 전두환 대통령을 40분간 독대하면서 대통령 직선제 수용 등 건의
⊙ 흔들리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나라가 망할 지경인데 지도자의 노선이 중요하냐”고 진언
⊙ “6월 14일 녹지원 회의에서 거의 계엄령으로 결정”
⊙ “6·29 이후 보안사에서 쿠데타 모의”

金容甲
1936년생. 육사 17기 / 국가안전기획부 기획조정실장,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 총무처 장관, 국회의원(15·16·17대) 역임. 現 국민의힘 상임고문
김용갑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1987년 6·29 당시 작성했던 메모.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과 6월의 일지 두 가지다.
한국 정치에서 개헌(改憲)은 끊임없이 주기적으로 제기되는 이슈다. 1987년 6·29 선언으로 만들어진 현행 헌법은 36년간 한 번도 개정된 적이 없다. 그동안 수없이 개헌 논의가 이뤄졌지만 개헌이 성공하지 못한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국민적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현행 헌법에 심각한 허점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6·29를 계기로 탄생한 현행 6공화국 헌법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단연 ‘대통령 직선제(直選制)’다. 6·29가 1980년대 민주화 항쟁의 종착점이라고도 불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1987년 4·13 호헌(護憲)조치 이후 6월 민주화 항쟁이 격화되면서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盧泰愚) 대표는 6월 29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에게 건의한다며 직선제 개헌과 시국사범 석방, 언론자유 등 8개 항을 제시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바로 다음 날 이를 수용한다고 밝혔다. 이후 여야 합의로 마련된 직선제 개헌안이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되었다. 그해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는 통일민주당 김영삼(金泳三), 평화민주당 김대중(金大中), 신민주공화당 김종필(金鐘泌)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김용갑 전 수석은 1987년 6월 청와대 내부의 급박한 상황을 일지 형식으로 적었다.
  6·29 선언의 내막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증언이 있었지만,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6·29 선언은 전두환 연출-노태우 주연이라고 정리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김용갑(金容甲·87) 당시 민정수석비서관이다.
 
  김용갑 전 수석은 최근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게 직선제 개헌을 제안하며 보고한 A4 3장 분량의 메모(이하 메모1), 그리고 6·29 직전 약 2주간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표(후보)를 수차례 직접 만나며 긴박하게 돌아갔던 상황을 일지(日誌)식으로 기록한 A5용지 5장 분량의 메모(이하 메모2)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기증에 앞서 《월간조선》에 제공했다. 이 자료들은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이다. 김 전 수석은 “6·29 선언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맞물리면서 수십 년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며 진실을 상세하게 기록해달라고 당부했다. 6·29 막전막후의 긴박한 정황을 담은 해당 메모와 당시 정황을 김 전 수석의 설명과 함께 시간순으로 소개한다.
 
 
  “현장 보고 나니 민심 진정시킬 수 없다는 생각 들어”
 
  1987년 이뤄진 6·29와 개헌의 화두는 1986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1년 반 앞두고 여야는 대통령 간선제 헌법 개헌 여부와 관련해 격론을 벌이는 상태였다. 여당인 민정당은 내각제를, 야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했다. 민정당은 내각제로 민주화를 이뤄내야 한다는 여론 형성에 앞장섰다. 전두환 대통령도 내각제에 적극적이었고, 1986년 4월 내각제 국가들(영국, 서독, 프랑스, 벨기에 4개국)을 순방하면서 내각제와 관련한 정국 구상을 하기도 했다. 1986년 1월 민정수석이 된 김용갑 전 수석의 얘기다.
 
  “전두환 대통령의 최대 정치적 관심은 ‘평화적인 권력 이양’이었다. 이승만(李承晩),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말로를 보았기 때문에 자신만은 그런 길을 걷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권력을 넘겨주는 최초의 대통령이 되길 원했다. 대통령 임기가 2년이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민정수석이 되면서 대통령의 그런 뜻을 알게 됐고, 그 뜻을 이뤄드려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김 전 수석은 청와대에 들어오자마자 여야가 거세게 맞붙는 정국 혼란을 목격하게 된다. 대통령과 여당이 내각제를 외치는 동안 야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외쳤다. 제1야당 신한민주당(신민당)은 1986년 2월 김영삼, 김대중이 주도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와 공동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추진운동을 시작했다.
 
  3월 7일 신민당 이민우(李敏雨) 총재와 김영삼 상임고문,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은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1986년 가을 대통령 직선제 개헌, 1987년 대통령 선거 실시를 제의했다. 이후 전국에서 4~6월에 걸쳐 헌법개정 추진운동 지방 지부 현판식이 줄줄이 열렸다. 김 전 수석은 4월 19일 대전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현판식에 행정관 한 명과 함께 참석했다. 이날은 민추협 회직자 및 신민당 당직자, 대학생 등 1000여 명이 가두시위를 하고 9명이 구속된 날이었다.
 
  “전국에서 시·도별로 직선제 개헌운동 현판식이 열리고 있다고 해서 직접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주변에서는 반대했지만 내가 직접 보고 분위기를 실감한 후 대통령께 현실을 보고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체육관으로 들어가면서 집사람에게는 내가 30분 이상 안 나오면 경찰에 알리라고 했다. 일반 시민인 것처럼 행동하며 들어가 보니 군중의 열기와 분노가 심상치 않았다. 나중에 신문을 보니 2만여 명이 모였다고 한다. 현장을 보고 나니 민심을 이대로는 진정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국 혼란은 더 심해질 것이고 정부가 막는 것도 한계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올라와서 바로 대통령한테 보고를 했다.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말씀드렸고, 개헌 논의를 공론화해야 한다고 했다.”
 
 
  서울시청 앞 집회 등 지켜봐
 
1987년 6월 서울 명동 거리. 도로 전체가 거대한 시위장으로 변했다. 사진=조선DB
  이후 전두환 대통령은 4월 30일 청와대 3당 대표회담에서 “국회서 여야가 합의하면 임기 중 개헌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개헌 논의를 공론화한 것이다. 같은 해 7월 30일에는 민정당과 신민당의 합의로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발족했다. 이후 1년여간 여야는 개헌에 대해 토론을 이어갔고,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록 결론이 나오지 않고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전두환 대통령은 1987년 4월 13일 개헌논의를 중단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른바 4·13 호헌조치로,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게 정부·여당의 입장이었다.
 
  호헌조치 이후 정국은 급격히 혼란해졌다. 호헌조치에 앞서 1987년 1월 박종철군 사망 사건이 벌어져 민심이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태였다. 4·13 조치는 이런 상황에 기름을 부었다. 격한 시위가 이어졌으며, 특히 6월 들어 혼란은 극심해졌다. 서울 연세대에서 시위가 열린 6월 9일에는 이한열군이 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사경(死境)에 이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는 6월 10일에는 서울시 전역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범국민대회를 열었다. 100만여 명이 모인, 이른바 6·10 항쟁이다. 청와대도 상황을 보고받았지만 내부 갑론을박만 이어지는 상태였다. 서울시내 시위가 이어지던 6월 12일, 김 전 수석은 서울시청 앞으로 나갔다.
 
  “최루탄이 계속 터지니 견디기 힘들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인파에 밀려다니다 시위 주도자들을 따라 명동성당에 갔다. 3000여 명이 명동성당에 모였고 출입구를 봉쇄해서 나갈 수도 없었는데, 신분이 드러났다가는 당장 잡힐 분위기였다. 해산 후에 겨우 명동성당을 빠져나와 안기부장 안무혁(安武赫), 민정당 사무총장 이춘구(李春九)와 저녁을 먹었다. 그들에게 현장에 가보니 상황이 심상치 않다, 민심이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고 얘기했더니 그들도 동의했다. 내가 대통령 직선제도 고려를 해야 한다고 말했더니 두 사람이 깜짝 놀랐다. 그때 청와대와 여당에서 직선제는 입에 담기도 힘든 금지 단어였다.”
 
 
  “나라가 어떻게 될지가 문제 아니냐”
 
5공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김용갑 전 수석은 6공에서 총무처 장관을 지냈고, 15~17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사진=조선DB
  김 전 수석은 다음 날 현장 방문에 대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 역시 사태의 심각함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다음 날인 6월 14일 청와대 녹지원에서 전두환 대통령, 총리, 군 수뇌부, 경찰 등이 모여 회의를 했다. 사실상 계엄령을 선포하기 위한 회의였다. 치안본부장(현 경찰청장)은 경찰력으로 막을 수 있다고 했지만 다들 계엄령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날은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 후 다시 참석자들과 청와대 비서실장, 수석 몇 명이 모여 티타임을 가졌고 김 전 수석이 직선제 얘기를 꺼냈다.
 
  “내가 ‘지금 계엄령 선포가 문제가 아니다. 계엄령으로 당장의 혼란은 수습한다 해도 앞으로 정국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나라가 어떻게 될지가 문제 아니냐’고 강하게 말했다.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고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을 연구하자고 했다. 다들 깜짝 놀랐다. 당시 상황에선 상상도 못 할 얘기였다.”
 
  다음 날인 6월 15일은 민방위 훈련의 날로, 민방위의 날 대통령은 청와대 지하 벙커에 머무르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날은 대통령이 벙커에서 나와 수석들과 회의를 했다. 이날 청와대 수석들은 사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음을 감지했다. 김 전 수석은 이날 김윤환(金潤煥) 정무수석비서관과 시국 수습에 대해 논의했다.
 
  “개헌과 대야(對野) 관계 등 정치적인 분야는 원래 정무수석의 역할이다. 그래서 김윤환에게 물어보니 88올림픽 이후 선택적 국민투표 같은 ‘한가한’ 얘기를 하더라. 그래서 내가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고 직선제에 대해 설명했다. 김윤환도 쭉 듣더니 동의했다. 일단 정무수석 김윤환이 동의하면 여당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인 16일 김 전 수석은 민정당 국회의원인 현홍주(玄鴻柱), 김학준(金學俊), 유흥수(柳興洙)와 식사를 하며 직선제 얘기를 꺼냈다. “여당을 설득하려 한 건데, 정치인들이라 그런지 잘 알아듣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웬만큼 분위기가 잡혔다고 판단해 17일에 대통령께 직선제 개헌을 해야 한다고 보고하려고 준비를 했다.” 이 준비 내용이 [메모1]이다. 실제 보고는 6월 18일이다. (메모에서 한자로 표기된 부분은 대부분 한글로 바꾸었고, 판독이 어려운 부분은 ○으로 표시했다-편집자 주)
 
  (메모1)
 
  報告 1987. 6.18
 
  6/18(09:00) 각하
  6/19(10:10) 盧 代表
  6.19 報告 요약
  밖에서는 각하의 통치 방향 대변, 설명, 이해 오늘 보고: 각하 구상에 한 방법. 참고
  각하께는 사실 정확히 보고. 끝까지 들어주시기 바람
 
  1. 현 시국 인식
  ㆍ민심 회복 불능
  ㆍ민정당의 정치일정 추진 불가능
  ㆍ단기적 불을 끄더라도 (설사 되어도 지탱 곤란, 각하의 용기와 결단력 필요)
  ㆍ4·13 재검토 없이 근본해결 불능(이슈집약)
  ㆍ일거에 만회,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획기적인 구상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역발상법 의한 대응
 
  2. 몇 가지 방법
  ㆍ올림픽 직후 직선제나 선택적 국민투표
  ㆍ13대 국회의원 선거결과 -직선제, 내각제 개헌
  ㆍ4·13 조치에 국민투표 부의
  ※이 3가지 나름대로 약점. 일부의 반대 계속, 학원 불안
  일거에 민심을 회복 불가. 승산도 희박
  ㆍ마지막 각하의 우국충정에서 우러나오는 결단으로 직선제 대통령 선출 개헌 주장할 것임
 
  3. 승산가능성 있을까
  ㆍ각하께서 우리 민족사에 문자 그대로 평화○ 위대한 대통령 기록 기회
  ㆍ생즉필사, 사즉필생(이순신)
  ㆍ솔로몬의 명재판
  ㆍ개헌공방으로 국가안위까지 운위될 때 여당이 과감하게 야당의 안을 수용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진정한 우국정당이 어느 쪽인가를 인식시켜줄 계기 마련
  ㆍ중산층(3/4) 동향○○
  -안정 희구, 야당의 수권 능력 의심(김영삼, 김대중 대통령 되면 걱정)
  -야당을 좋아하기보다 감정적으로 여당 미워함
  -각하 결단으로 (민심이) 여당으로 돌아옴
  ㆍ많은 지식인들이 우리 편(성명○차)
  ㆍ정부의 입장이 일거에 ○○(수세 → 공세)
  ㆍ정권욕에 사로잡혀 방심, 폭력으로라도 정권 잡으려는 야의 허를 찌르는 일격
  ㆍ잃었던 민심 일거에 회복
  ㆍ해외 비판 호전, ○○○ 사기 진작, 단결
 
  4. 타이밍 선택 중요
  ㆍ진정으로 야당 할 각오. 국민이 느껴야 함
  ㆍ각하의 우국충정에서 내려진 결단으로서보다 상황의 공명정대(각하 지켜봄, 여야 경쟁)
  ※민정당도 국민의 지지 못 → 야당 각오
  ※누가 정권을 잡든 경제 국가발전 지속
  ㆍ최종 결단 내리시기 전에 야당 대표 외 국가원로 의견 청취, 여론 수렴 형식(각하께서 지방회의)
  ㆍ시기 (환자 수술 가능성) (다소 상승 고지)
 
  5. 선행조건
  ㆍ정치적 보복 원천적 봉쇄(법, 국민 앞에 공표 보장)
  ㆍ김대중 해제(야당 내 투쟁)
  ㆍ선거 과열 방지(합동연설 → TV연설)
  ㆍ좌경운동권(반체제) 구별, 국민의 지지로 강력 단속
 
  6. 결론
  ㆍ각하는 40년 헌정사, 민주화 개혁, 우리 민족사에 위대한 대통령 기록
  ㆍ내년 2월 이후 혼란기 시 각하 보호(100%)
  ㆍKT, 완전 패배 안겨줄 기회 (정리) (단기적 4·13 포함 협상 제거)
  총동원하면 승산이 있음

 
 
  6월 18일, 전두환 대통령에게 40분간 독대 보고
 
1986년 4월부터 여야는 내각제와 대통령 직선제 공방을 이어갔다. 야당 신민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했지만, 6·29 선언으로 개헌 주도권은 여당으로 넘어갔다. 사진=조선DB
  1987년 6월 18일 오전 9시, 김용갑 수석은 대통령에게 보고하기에 앞서 “끝까지 들어달라”는 당부를 한다. 전두환 대통령의 급한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밖에서는 대통령의 통치 방향을 대변하고 설명하며 이해시키고 있으며 사실을 정확히 보고하려 하니 끝까지 들어달라”고 했다. 현시점에서 평범한 방법으로는 민심을 회복하기 어려운 만큼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역발상이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대통령의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그가 보고한 내용은 이렇다.
 
  “현재 시점에서는 민심을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야당(민주당)도 정권을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민주당이 정권을 잡아도 (나라가) 곤란해진다. 각하의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하다. 상대방(야당)의 허를 찌르는 획기적인 구상으로 상황을 일거에 만회할 수 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역발상을 실천해야 한다.”
 
  그가 말한 ‘역발상’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었다. 당시 대통령 직선제는 여권 내에서는 누구도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단어였다. 야당이 직선제를 관철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대선을 반년 앞두고 민심이 악화된 상태에서 직선제란 곧 정부·여당의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청와대와 여당은 정국 타개 방안으로 1988년 올림픽 후 국민투표를 통한 개헌, 내각제 개헌 등을 제시하고 있는 상태였다.
 
  김용갑 수석의 제안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올림픽 이후 국민투표 등의 방안은 약점이 있고, 일거에 민심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각하의 우국충정에서 우러나오는 결단으로 직선제 개헌을 결심해야 한다. 살려고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이순신의 말과 ‘솔로몬의 명재판’을 생각해보라. 개헌 논의에서 여당이 과감하게 직선제를 수용해 국민들에게 진정한 우국정당이 어느 쪽인가를 확인시켜줄 수 있다. 국민은 야당의 수권 능력을 의심하고 있다.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걱정이 크다는 것이다. 국민은 야당을 좋아하지 않고 그저 감정적으로 여당을 미워할 뿐이다. 각하가 결단하면 민심이 여당으로 돌아온다. 많은 지식인이 우리 편이다. 야당은 정권욕에 사로잡혀 방심하고 있고, 폭력으로라도 정권을 잡으려 한다. 직선제 제안은 이런 야당의 허를 찌르는 일격으로 잃었던 민심을 일거에 회복할 수 있다.”
 
  여기서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중산층 동향’에 대한 부분이다. “3/4에 달하는 중산층은 안정을 희구하고 야당의 수권 능력을 의심하고 있으며, 야당을 좋아하기보다는 감정적으로 여당을 미워하는 것”이라는 김 수석의 보고는 전두환 정권 시절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형성된 중산층이 민주화로 가는 길에 안전판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의 발로로 보인다. 이는 나중에 대선 결과로 입증됐다.
 
 
  “나라 망친다”는 말까지 나와
 
  김 수석은 이어 직선제 제안은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보고했다.
 
  “진정으로 야당 할 각오를 해야 하고, 그런 각오를 국민이 느껴야 한다. 각하의 우국충정에서 내려진 결단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김대중 가택연금 해제와 야당 인사 사면 등 정치적 선행 조건을 제시해야 한다.”
 
  김 전 수석은 또 “직선제로 선거를 해도 여당이 이길 수 있다”고 보고했다.
 
  “직선제 제안으로 민심이 여당으로 돌아올 것이며, 야권은 김영삼과 김대중이 후보단일화를 할 수 없을 것이고, 노태우 후보의 고향인 TK(대구경북) 표 등을 생각하면 직선제로도 우리가 이길 가능성이 높다.”
 
  전두환 대통령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와 함께 김 수석은 민주화운동 세력과는 다른 반체제적인 좌경운동권을 국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단속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후일 김 수석은 총무처 장관 재직 시절이나 의정 활동을 하는 동안 ‘좌경 세력 척결’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김 전 수석은 보고 말미에 “이렇게 하면 각하는 우리 민족사에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했다. 끝까지 경청한 전두환 대통령의 반응은 놀랍게도 “동의한다”였다. 김 전 수석의 설명이다.
 
  “18일 오전 9시20분에 들어가서 40분 동안 보고했다. 대통령이 바로 민정당사에 가서 노태우 대표한테 보고하라고 하더라. 당사가 종로구라 가까웠다. 그래서 바로 가서 얘기를 하는데 노태우 대표가 편한 얼굴이 아닌 거다. 노태우 대표가 이렇게 말하더라.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160만 당원에게 내각제만이 우리가 살길이라고 외치고 다녔는데, 내가 어떻게 직선제를 하자고 할 수 있냐’고. 그래서 내가 당대표의 말을 끊을 수도 없어서 더 연구하자고 여지를 남기고 돌아왔다. 다시 청와대로 오니 11시쯤이었는데 경호실장이 바로 내가 한 보고에 대해 얘길 하더라. 전두환 대통령이 원래 성질이 급하다. 대통령이 안기부장과 당 사무총장 불러서 민정수석이 직선제 제안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라고 지시를 했다는 거다.”
 
  김용갑 수석은 청와대 옆 안가(安家)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무혁 안기부장, 이춘구 당 사무총장과 만났다.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을 그들에게 전하자 두 사람은 반대의 뜻을 보였다. “나라 망친다”는 말이 나왔고, 난상토론을 벌였다.
 
 
  노태우 측의 직선제 불가 통보
 
1987년 7월 1일 시민들이 6·29선언의 전폭 수용을 밝히는 전두환 대통령의 특별담화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조선DB
  다음 날인 6월 19일, 전두환 대통령은 김용갑 수석을 불러 “노태우가 뭐라고 했냐”고 물었다. 김 수석은 “검토하겠다고 했다”며 “얘기는 했지만 각하가 만나서 얘기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차마 반대한다고 직접 보고는 할 수 없었고, 두 사람이 직접 해결해야 할 상황이었다”고 김 전 수석은 술회했다.
 
  “노태우 대표 입장에선 누가 얘기해도 안 들을 상황이었다. 내가 나가고 나서 펄쩍펄쩍 뛰었다고 한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날(19일) 오후 5시반에 안기부장이 전화해서 ‘노태우 대표와 회의를 했는데 직선제는 못 한다고 결론을 냈다’고 했다. 당 사무총장을 포함해 노 대표 참모진과 논의를 했는데, 일단 노 대표의 반대 입장이 강했고 당에서 대선 후보 말을 안 들어줄 수 있느냐는 거였다. 그래서 내가 ‘이 중차대한 문제를 대통령도 동의했는데 왜 당신들끼리 결정을 하느냐’고 쏘아붙였다.”
 
  이날 저녁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후보는 회동을 가졌다. 김 전 수석에 따르면 상황은 이렇다.
 
  “20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대통령이 나를 불러 노태우와 만난 결과를 말해줬다. 대통령 말씀으로는 대통령이 노태우를 만나자마자 ‘태우야, 직선제밖에 답이 없다’고 했는데, 노태우 대표가 ‘정치지도자의 노선이 그렇게 왔다 갔다 해서야 되겠느냐’고 강하게 반응했다고 한다. 당론을 내각제로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바꿀 수 있냐는 것이었다. 대통령도 조금 흔들리는 듯해서 내가 ‘나라가 망할 지경인데 지도자의 노선이 중요하냐’고 주장했다.”
 
  6월 20일 이후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김 수석은 노태우 대표를 어떻게 설득할지를 두고 분주하게 고민했다.
 
  “6월 20일엔 내가 민정당 사무차장 현홍주 의원을 불러 ‘노태우 좀 설득해달라’고 다시 한 번 부탁을 했고, 21일에는 안현태 경호실장에게도 협조를 요청했다. 여야를 막론하고 여론을 주도하는 이들을 만나 조언을 들어야 한다는 얘기도 계속했는데, 20일에는 노태우 대표가 이민우 신민당 총재, 이만섭(李萬燮) 총재,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을 만났다고 했다.”
 
  김 전 수석이 다시 대통령과 독대한 날은 6월 25일. 전두환 대통령은 “노태우와 얘기를 마쳤다”고 했다. 이후 노태우 후보 측은 6·29 선언문 초안을 만들고 6월 29일에 발표했다.
 
  (메모2)
 
  6.5 직선제 가능성 보고
  6.12 롯데호텔에서 안기부, 민정당 사무총장(19:00)에게 직선제 주장
  ※반대에 부딪혔음
  6.14 청와대에서 일요일 녹지원에서 계엄에 대비한 주요 ○○ 회의 후 시국대책에 대한 수석비서관 간담회에서 직선제 주장
  동의자 없음
  6.15 정무수석에게 시국수습 의견 청취
 
  정무1: 몇 가지 있지만 88 서울올림픽 이후 선택적 국민투표나 바로 직선제 주장
  민정: 직선제 주장 설득 성공, 단 15일께 민정이 보고 허락도록 약속
  6.16 (12:50) 대화식당에서 현홍주·김학준·유흥수 의원에게 의견 청취. 긍정적인 반응, 보안 특별 강조. 김 비서관에게 보고서 작성 지시
  6.17 각하 보고 ○○ 하루종일 기다리다 보고 못 하였음
  6.18 (09:20) 각하께 보고(각하께서도 동의)
 
  지시: 노 대표를 만나서 설득도록
  ※ 노 대표가 건의하는 형식으로
  (10:10) 노 대표께 민정당사에서 보고
  ○○ 등 걱정하시면서 안기부장, 사무총장, 박철언과 같이 토의토록
  (11:00) 경호실장에게 각하께 보고 사정 설명
 
  경호실장: 각하께서 안기부장에게 검토토록 지시 전달 하명
  (11:20) 청운동 안가에서 안기부장, 이춘구 사무총장에게 각하께 보고 사항 구두로 설명
  -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음
  - 다시 검토해서 의논하기로 하였음
  - 만약 4·13이 무너지면 그대로 직(職)을 그만둬야 한다고 함
  6.19 (14:20) 각하께 2번째로 직선제 건의. 계엄령 적극 반대
  ※각하께서 노 대표 반응 하문: 아직 검토 중이라고 보고
  (17:30경) 안기부장 전화, 노 대표께서 각하께 직선제는 불가하다 결정되었으니 더 이상 이야기 없길 바람
  - 사전에 협의 못 해 미안
  - 그 엄청난 일을 하루밤새 뒤집는 것은 경솔하다고 ○○○ 전달
  6.20 (09:30경) 각하께서 등청하시자마자 민정 찾으셨음
 
  각하 말씀: 노 대표가 어제 보고하였음. 직선제는 안 하겠다는 것임. 대통령의 정치적 노선이 문제된다는 것임
  곧이어 수석비서관과 동석(실장, 경호실장, 정무1,2, 공보. 후에 사정수석)
  각하께서 지나가는 말씀으로 직선제도 고려될 수 있었으나 문제가 많아서라고 전했음
  6.21 (09부터 2시간) 경호실장에게 가서 협조요청
  -하루 만에 결론짓는 것은 안 된다고 했음
  -끝까지 주장할 것 양해 요청
  6.20 (12:00) ○○식당에서 현홍주 의원에게 윤곽 설명(특히 각하 보고문에서)
  만일 노 대표께서 의견 요청 시는 분위기 ○○○ 밀어나가자고 약속
 
  6.23 or 24: 현홍주 의원 노 대표 불러서 자신감 갖고 조언(초안 작성)
  6.25 (14:30) 각하께 3차 건의. 각하께서 결심
  ※노 대표 6/25 저녁 6/27 결정

 
  민정당 노태우 대선 후보는 결국 1987년 6월 29일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1988년 2월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정권을 이양한다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도록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한다 ▲김대중의 사면복권을 포함하여 시국사범 등을 석방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기 위해 새 헌법은 기본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수정한다 ▲언론 관련 제도와 관행을 개선, 언론자유를 최대한 보장한다 ▲사회 각 부문의 자치/자율을 최대한 보장하고, 이를 위해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를 실시하고, 대학도 자율화한다 ▲자유로운 정당 활동을 보장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 풍토를 조성한다 ▲밝고 맑은 사회 건설을 위해 사회정화 조치를 강구한다.
 
  노태우 후보는 선언과 함께 “이 선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대통령 후보를 포함한 모든 공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했고, 민정당은 이 선언을 당의 공식 입장으로 인정했다. 전두환 대통령도 특별담화를 통해 6·29 선언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6·29 선언에 대한 역사적 평가
 
  6·29 선언은 5공 청문회와 5·18 진상규명특별법 제정 등 사회적 분위기에 묻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지난 2017년 6월 30주년을 맞았지만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여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어서 관련 행사와 학술대회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2018년 ‘6·29 선언의 진상과 평가’라는 사업을 시작하고 사료(史料) 수집에 나섰지만 한동안 중단되기도 했다. 김용갑 전 수석은 “(사업 중단이) 문재인 정권의 지시 때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며 “문재인 정권은 정권 내내 6·29 선언에 대한 왜곡 폄하를 일삼았고 객관적인 평가를 가로막았다”고 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6·29 평가 사업은 최근 재개된 것으로 알려졌다. 역사박물관은 2월 초 김용갑 전 수석의 메모를 입수해 기증식을 가졌고, 학계 자문과 검토를 거쳐 자료를 공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쿠데타 모의도"
 
1987년 6월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후보가 전두환 대통령과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사진=조선DB
  청와대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김 전 수석은 청와대 내부 공격에 시달리기도 했다.
 
  “직선제가 되면 (여당의) 대선 성공을 어떻게 보장할 거냐, 이길 수 있다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나라 망하면 어떻게 할 거냐 등의 말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대선 선거 기간 중 선거대책본부장을 하겠다고 자청했다. 6·29 정신을 전국에 전파하겠다는 각오였다. 대통령에게는 미리 ‘선거운동을 하면서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으니 그걸 기분 나쁘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대통령에게 그렇게 당부를 해놓았기 때문에 노태우 후보도 정부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었고, 유권자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6·29가 아닌 계엄령 또는 쿠데타로 끝날 뻔한 위기도 있었다.
 
  “6월 14일 녹지원 회의 때만 해도 계엄령으로 거의 결정이 난 상태였다. 하지만 현장에서 최루탄 가스를 맞아가며 민심을 직접 보고 온 내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계엄령으로 당장 시국을 수습한다 한들 그 후 어떻게 통치를 해나갈 것이며 그렇게 뜨거운 국민들의 바람을 어떻게 외면할 것인가. 계엄령만은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해 더욱 직선제만이 살길이라고 대통령께 목숨 걸고 호소했다.”
 

  6·29 이후 쿠데타 시도도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북한의 김일성에게 나라를 뺏긴다는 여론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보안사 등을 중심으로 쿠데타 음모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부하였던 모씨가 나에게 알려온 얘기다. 쿠데타 모의 세력의 논리는 직선제 대통령 선거는 북한에 기회를 주는 것이고, 야당이 집권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며 북한을 막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군이 다시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전두환 대통령을 체포해 선거를 중단시켜야 한다는 계획도 나왔다고 했다. 그는 보안사 내부에서 쿠데타 음모가 감지됐지만 윗선에 보고를 할 수 없었다고 했는데, 보안사령관과 대통령에게 들어가면 엄청난 혼란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대통령은 뿌리를 뽑겠다고 나서지 않겠나. 민정수석 선에서 처리해달라고 얘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외부로, 가능하면 해외로 나가라’라고 하고 노태우 후보에게는 군 관계자들을 격려해주라고 조언했다. 다행히 쿠데타 음모는 내부적으로 불발됐다고 한다.”
 
 
  “전두환, 쓴소리 들을 줄 아는 분”
 
  김 전 수석은 5공을 폄하하고 6·29를 외면하는 작금의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6·29가 아니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잘못한 것도 있지만 공도 많다. 그러나 인정은커녕 갖은 고초를 당했다. 돌아가신 지 1년 넘게 유해가 묻히지도 못하고 집에 그대로 있으면서 어디로 갈지도 모른다고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국민들과 정치권도 그렇다. 5공이 공과(功過)가 있는데 과는 엄청나게 이야기하면서 공은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5공 때 경제성장을 거듭하며 수출이 크게 늘었고, 매년 10% 이상 경제성장을 했다. 물가는 0%까지 잡았다. 취업도 잘되고 살림도 풍요로웠다. 그런데 그런 대통령을 과소평가하고 이 사람한테는 (매장할) 땅 한 평도 안 된다니 우리 국민들이 너무하는 것 아닌가.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은 사면복권하면서 그에게는 왜 그리 가혹한가. 언론도 마찬가지다. 북한 김정은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라고 표기하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왜 전두환씨인가.”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서 “쓴소리를 들을 줄 알고 옳은 얘기는 받아들일 줄 아는 분”이라고 했다.
 
  “민정수석은 민심의 동향을 보고하는 역할이라 당시 대통령에게는 듣기 싫은 보고밖에 없었을 것이다. 경호실장 말로는 대통령이 ‘민정수석이 보고를 하는 날은 잠이 안 온다’고 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심기가 불편할 때는 나에게 ‘당분간 보고 좀 하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 그래도 민정수석을 교체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쓴소리하는 참모를 계속 곁에 뒀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가 있지 않은가. 그 후의 대통령들은 나처럼 직언하는 사람을 계속 곁에 두는 사례가 드물었다.”
 
  김 전 수석은 전두환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까지 민정수석 자리를 지켰다. 김용갑 전 수석은 “6·29를 이끌어낸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결단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직선제 수용은 전두환 대통령의 구국의 결단이었다. 정부와 여권에서는 6월 항쟁의 대응책으로 계엄령을 주장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 결국 대통령의 결단이 대한민국을 살려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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