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時論] 2010년의 역사적 의미 - 호랑이 등에 올라탄 韓國, 세계 一流국가로 뛰어라

  • : 남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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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시장을 활짝 열어젖힌 한국은 이제 호랑이 등에 탄 것과 같은 처지다. 이제부터 우리는 다른 나라 국민들보다 더 늦게 잠자리에 들고, 더 일찍 일어나는, 세계에서 가장 근면한 국민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日帝 식민통치와 분단, 권위주의 통치는 우리 민족을 괴롭힌 현대사의 질곡이었지만,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민족의식을 눈뜨게 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에 불을 붙여 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국민혁명과 민주화를 단기간에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됐다.


南時旭
⊙ 1939년 경북 의성 출생.
⊙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외교학 석사, 獨 베를린 국제신문연구소(IIJ) 수료.
⊙ 동아일보 편집국장·논설실장·상무이사,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장, 문화일보 사장,
    고려대 석좌교수 역임.
⊙ 現 광화문문화포럼 회장, 세종대 석좌교수.
⊙ 저서: <항변의 계절> <체험적 기자론> <인터넷시대의 취재와 보도> <한국보수세력연구>
    <한국진보세력연구> 등.
⊙ 수상: 위암 장지연상(1993년), 임승준자유언론상(2005년), 인촌상 언론출판부문(2007년).
2010년은 일본이 한국을 강제병합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또 6·25 60년, 4·19 50년, 광주항쟁 3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들 사건 가운데서도 1910년 일본의 한국합병은 20세기 이후 우리 민족을 식민지로 만든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다. 다른 사건들도 모두가 그 연장선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광복 후 민족분단으로 인해 빚어진 처참한 6·25동란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과정에서 파생된 권위주의 통치와 이에 대항해서 일어난 4·19와 광주항쟁도 역사적으로 보면 모두 일본의 한국합병으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에서 假定(가정)은 부질없는 일이지만, 역사적 교훈을 얻는 데는 유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의 흐름은 특정의 시간과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필연적 因果(인과)관계에 따라 전개된다. 그렇기는 하나 그 인과관계의 원인이 된 사건들이 반드시 필연적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또 수많은 우연성도 역사의 전개과정에 개입할 수 있다. 따라서 ‘혹시 그때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하고 우리는 아쉬운 마음으로 역사를 가정해 볼 수 있다.
 
  필자는 19세기 이후 우리 민족에게 닥친 양대 재앙은 일본 제국주의와 마르크스-레닌의 공산혁명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민족에게 강요한 1910년의 한국합병은 과연 역사의 필연적인 코스였을까, 아니면 이를 막을 수 있는 무엇이 있었을까, 만약 있었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19세기 말~20세기 초는 弱肉强食(약육강식)의 제국주의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였다. 당시에도 국제법은 있었으나 힘이 정의였다. 그런 가운데서나마 우리 한민족이 살아남을 길은 없었던가.
 
  무릇 나라를 지키려면 자신의 군사력을 가지든가, 아니면 외교력으로 다른 나라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두 가지가 다 없으면 그 나라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 일본의 한국병합은 두 가지 경우 모두에 해당한다.
 
 
  鎖國의 함정
 
  그런데 막상 한국병합조약 자체는 비교적 조용하게 체결됐다. 이를 실무적으로 성사시킨 제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말한 대로 “한 사람의 군대도 동원하지 않고,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그보다 5년 전인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 체결 때처럼 무장한 일본 군인들이 덕수궁을 에워싼 채 조인을 강요하지도 않았으며, 3년 전의 고종황제 양위 때와 같은 큰 소란도 없었다.
 
  왜 그랬던가. 한국병합 당시 대한제국은 이미 껍데기뿐인 존재여서 사망선고만 남았던 것이다. 나라가 기울어지자 일진회 같은 親日(친일)단체가 하루빨리 연방을 만들자고 일본 측에 간청했다.
 
  기록에 의하면, 합병조약은 1910년 8월, 李完用(이완용) 총리대신과 데라우치 사이에 골자가 합의된 다음 8월 22일 순종황제가 참석한 御前(어전)회의에 회부되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가운데 순조롭게 의결을 보았다. 다만 평소 합병에 반대한 학부대신 이용직은 어전회의 개최 통지를 받지 못해 참석하지 못했다.
 
  어전회의에서 조약안이 통과되자 옥새가 찍힌 전권위임장을 수교받은 총리대신 이완용은 농상공부대신 趙重應(조중응)을 대동하고 통감부로 데라우치를 방문, 단숨에 조약에 조인했다. 그리고 양측은 샴페인으로 이를 축하했다. 1주일 후 합병조약을 발표하자 梅泉 黃玹(매천 황현)을 비롯한 40여 명의 순국자가 나왔다.
 
  흔히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1909년 10월 安重根(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됐기 때문에 합병이 서둘러 단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합병방침이 결정된 것은 그가 피살되기 6개월 전인 그해 4월이었다. 도쿄(東京)에서 합병 신중론자였던 이토를 가쓰라 다로(桂太郞) 수상과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외상이 설득해 3자간에 합의됐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된 원인을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 체결과 그 이전 상황에서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어떤 경위로 대한제국이 자신을 지킬 능력을 갖추지 못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는지 그 원인을 규명하고, 그동안 우리 민족이 안보를 의존하고 있던 청나라의 쇠퇴과정과 일본이 한반도 탈취를 위해 도발한 두 개의 전쟁, 즉 1894년의 청일전쟁과 1904년의 러일전쟁, 그리고 對英·對美(대영ㆍ대미)외교도 잊어서는 안된다.
 
 
  세계사적 관점에서 봐야 할 대한제국의 멸망
 
2010년은 한일합방 100주년, 6·25 60주년, 4·19 50주년, 광주항쟁 30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 민족이 일본에 나라를 잃은 원인을 따질 경우 최초로 부딪히는 문제가 대원군의 鎖國(쇄국)정책이다. 그가 丙寅洋擾(병인양요)와 辛未洋擾(신미양요)를 겪은 다음 의기양양하게 전국 도처에 斥和碑(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선언한 것은 1870년대 초, 즉 을사보호조약 체결 30여 년 전이었다.
 
  한말의 유명한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인 朴殷植(박은식)은 한국병합 5년 후인 1915년에 발간한 그의 <韓國痛史>(한국통사)에서 이를 대원군의 ‘학식부족’으로 돌리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만약 그때 (미국 등과) 국교를 체결하고 정치·예술·교육·산업의 장점을 받아들여 백성을 계몽하고 실력을 배양했더라면 조선은 자립할 수 있는 강국이 됐을 것이다. …우리 문물과 무력이 이미 충분하다고 자만하여 완고 오만으로 시기를 놓치니 대원군의 국제정세에 대한 무지함이 참으로 통탄스럽다.>
 
  박은식의 주장은 다소 일방적인 점도 있지만 두 가지 이유에서 그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본다. 즉 조선이 그로부터 10여 년 후에야 러시아의 南進(남진)을 우려한 淸(청)나라의 권고로 미국과 수교한 점과, 1875년 일본이 운요호(雲揚號·운양호)사건을 일으켜 이를 구실로 개방을 강요함으로써 이듬해 국교수립을 이룬 점이다. 일본은 최초의 수교국으로서 조선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때는 대원군이 물러난 다음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설사 박은식의 주장대로 대원군이 이때 미국과 수교를 했다 하더라도 과연 조선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자립할 수 있는 강국’이 됐을까는 의문이다. 미국은 당시 기본적으로 自國(자국) 함대의 항해안전 외에는 조선에 대한 관심이 적었으며, 나중에는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영국과 함께 일본을 지원한 점으로 보아 일본에 맞서 조선을 지키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것은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와 미국의 필리핀 영유를 상호 인정한 1905년의 태프트-가쓰라 밀약에서도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어려운 국제환경 속에서도 조선이 스스로 국정기조를 富國强兵(부국강병)정책으로 돌려 군대를 양성하고, 교육을 진흥하고, 산업을 일으키는 기적을 행할 수 있었더라면 문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이 일본에 맞설 정도의 군사력을 갖추는 데 필요한 막대한 財源(재원)을 어떻게 조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이것은 ‘기적’을 바라는 非(비)현실적인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다만 대원군이 세계의 大勢(대세)를 읽지 못하고 서양세력을 중국보다 열등한 오랑캐라고 생각한 안목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 초의 조선과 대한제국이 처한 내외정세를 이렇게 볼 때, 우리 민족이 그처럼 냉혹한 제국주의 정글 속에서 독립국가로서 주권과 영토를 제대로 보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아무리 따져보아도 ‘그때 만약에…’라는 역사의 가정은 씁쓸한 뒷맛을 준다. 역시 조선의 멸망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제국주의의 희생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과거는 미래를 이야기하는 ‘序文’
 
  다행히 일본에서도 제국주의와 한국 식민지화에 대한 반성론이 상당히 진지하게 일고 있는 것을 2009년 12월 초 필자가 도쿄에 출장을 갔다가 발견할 수가 있었다.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는 일본 월간지 <세카이>(世界) 신년호에서 미국이 1993년 하와이 왕국 병합 100주년을 맞아 클린턴 명의의 사과담화를 발표한 예에 따라 새해에는 하토야마(鳩山) 수상도 사과담화를 발표하고 일본 天皇(천황)이 訪韓(방한)해서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능을 참배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화제가 되고 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한국합병 100년이 된 지금 시점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과거는 미래를 이야기하는 ‘序論(서론·prologue)’이라는 말이 있다. 영국의 권위 있는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2010년의 세계’라는 전망기사에서 쓴 표현이다.
 
  우리는 한국병합 100년도, 6·25 60년도, 4·19 50년도, 광주항쟁 30년도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기 위한 ‘서론’으로 삼아야 한다. 이들 역사적 사건들을 단순한 과거사로서 치부하지 말고 우리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필요한 역사적 경험으로 여겨야 한다.
 
  우리에게는 쓰라린 과거 역사에 못지않게 세계가 인정하는 ‘근대국가 만들기’란 빛나는 역사도 있다. 합병 이후 100년을 되돌아보면 1950년대 말까지의 전반 50년이 민족고난의 시대였다면 1960년대부터의 후반 50년은 민족웅비의 시대였다.
 
  우리 국민은 1940년대에는 建國(건국)을, 1960년대에는 4·19와 연이은 5·16을 거쳐 산업화에 착수하고, 1980년대에는 광주항쟁을 거쳐 민주화를 완수한다. 대충 20년 주기의 압축적 국민국가 만들기와 산업화였다.
 
  일제 식민통치와 분단, 그리고 권위주의 통치는 우리 민족을 괴롭힌 현대사의 桎梏(질곡)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민족의식을 눈뜨게 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에 불을 붙여 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국민혁명과 민주화를 단기간에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물론 민족웅비의 시기에도 역사의 작은 굴곡은 있게 마련이었다.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에 걸친 10년간, 즉 1998년부터 2007년까지 사이에 이념분화시대가 열리고 金大中·盧武鉉(김대중·노무현) 두 정부가 등장함으로써 건국 후 일찍이 없던 左右(좌우) 갈등을 빚었다.
 
  이 기간 중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어 전 세계로부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러나 金正日(김정일)은 이를 악용해서 비밀리에 核(핵)무기를 개발, 한반도에 핵위기를 불러 남북관계는 파탄이 나고 말았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對北(대북)관계에 관한 한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低(저)자세로 일관, 북한의 개방 개혁을 저해하고 폐쇄고립정책을 도와주는 결과를 빚었다.
 
 
  세종시와 親日 청산은 盧武鉉의 대못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교통사고로 숨진 두 여학생을 추모하는 촛불의 물결 속에서 당선된 노무현은 우리 현대사를 가리켜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 운운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도덕적 정통성에 상처를 주었다. 지금 심각한 國論(국론)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세종市(시) 문제와 친일 청산문제는 당초 그가 박은 대못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2007년 李明博(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압도적인 대선 승리와 이듬해 그의 보수정권 출범은 10년 전의 김대중의 대선 승리와 이듬해의 진보정권 출범만큼이나 한국의 정치판도를 크게 바꾼 획기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이명박의 초기 國政(국정)미숙으로 인해 진정한 권력교체는 한동안 실현되지 못했다. 그는 정권 출범 1년 동안 각 분야에서 기득권을 내놓지 않으려는 舊(구)정권 세력과 그 동조자들의 저항을 받았다.
 
  노무현에 대한 수사 역시 이명박 정부의 엉거주춤한 태도로 인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다가 결국 노무현의 자살로 이어졌다. 2009년은 노무현 자살파동에 이어 미디어법안, 4대강 살리기 및 세종시 문제로 정치가 표류,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위기감과 혐오감이 극에 달한 가운데 저물었다.
 
  이제 우리는 21세기의 제2차 10년의 첫해인 2010년을 맞아 또다시 역사의 전환점에 서게 됐다. 언제나 그렇듯이 새해 역시 명암이 교차하는 불확실성의 한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격변의 2012년, 앞으로 2년
 
  새해에는 우선 2012년 대통령선거와 총선의 전초전인 지방선거가 예정되어 지진아와도 같은 우리의 미숙한 정치는 계속 파열음을 낼 조짐이다.
 
  2012년은 비단 국내에서 정권이 교체되는 정치적 전환기일 뿐만 아니라, 우선 남북 군사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戰時(전시)작전통제권이 한국군으로 이양됨과 동시에 한미연합사가 해체되는 해다. 북한에서는 金日成(김일성) 출생 100주년, 김정일 출생 70주년을 맞아 이른바 强盛大國(강성대국) 완성의 해로 계획하고 있는 시기다. 북한은 한미동맹을 파기하지 않는 한, 핵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눈을 해외로 돌리면, 2012년에는 오바마 대통령의 再選(재선) 여부를 결정하는 미국 대선이 있을 것이다. 이해에 중국에서는 후진타오(胡錦濤)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물러나고 제5세대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선출되는 제18차 전국 인민대표자회의가 열린다.
 
  <이코노미스트>에 의하면, 미국과 함께 G2로 격상된 세계경제 3위국인 중국은 새해에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설 것이다. 이에 따라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도 그만큼 커질 것이며, 이에 따라 우리의 통일문제도 새로운 국면을 맞을 수밖에 없다.
 
  <이코노미스트>의 전망에 의하면 새해 선진국의 경제회복 속도는 빠르지 않아, 11월의 미국 하원의원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고전을 면치 못할 가능성이 있으며, 5월의 영국 총선에서는 노동당이 정권을 빼앗길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서나마 우리에게 희망과 기대감을 주는 점은 새해에 우리 한국이 여러 나라 중에서도 가장 먼저 경제위기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예측이다. 국책연구소와 민간연구소가 예측하는 새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평균 5% 내외에 달한다. 이는 중국(8.6%)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셈이다. <이코노미스트>가 전망한 대로 미국(2.4%), 일본(1.3%), EU(0.6%)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빠른 회복세다.
 
  한국은 이미 2009년에 400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기록해 처음으로 세계 9위의 수출국에 올랐으며, 2014년까지는 세계무역 8강국으로 등장하리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만약 한국의 새해 경제성장률이 5% 내외에 이른다면 그것은 노무현 정부 5년간 이룩한 평균 경제성장률 4.42%를 훨씬 넘는 것이어서 그 의미가 작지 않다. 새해 경제성장률이 5% 내외가 되는 경우 그 효과는 이명박 정부의 정치적 안정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21세기 2차 10년간 국가를 위해 좋은 조짐이 아닐 수 없다. 다시 한 번 경제의 도약을 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한국은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한국은 1인당 국민총생산이 1만 달러에 달한 다음 10년 이상 2만 달러에 이르지 못하다가,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7년에 환율 덕택으로 잠깐 이를 달성하고는 다시 그 이하로 떨어졌다. 이는 그동안 ‘잃어버린 10년’ 논쟁의 원인이 됐다.
 
  한국은 선진국이 되려면 빨리 경제성장 행진을 다시 시작하여 3만 달러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경제성장 없이는 복지도 교육도 국방도 제대로 될 수가 없다. 물론 지금부터의 경제성장은 과거처럼 근로자와 국민복지를 외면한 성장 일변도가 되어서는 안되지만 일단 성장엔진에 다시 불을 붙여야 한다.
 
  그러나 새해 경제는 변수도 많다. 환율·금리·油價(유가)의 3高(고)현상 심화의 극복도 문제지만, 우리 경제를 지금보다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家計(가계)부채와 실업자 증가, 과격한 노사대립을 극복해야 하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산업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즉 산업구조를 개편해서 지식산업·정보산업·기술산업 등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산업구조의 고도화야말로 한국경제의 활로라고 볼 때, 새로운 10년이 열리는 새해의 과제는 우리에게 한층 무거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새해에는 韓美(한·미) FTA 비준 문제가 본격화되고 중국·일본과도 FTA를 논의할 가능성이 있다. 지금 우리는 선진국과의 FTA를 축복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것은 한국기술의 무한발전 가능성을 믿는 낙관론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10년, 20년 후에도 계속 낙관을 할 수 있을까. 불행히도 어느 시기에 이르러 우리의 기술력이 경쟁국들에 뒤떨어지는 사태가 일어나 종래까지 잘나가던 IT·자동차·철강 등의 수출이 삐거덕하는 시기가 온다면 그때 우리는 어떻게 될까.
 
  국내 시장을 활짝 열어젖힌 한국은 이제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과 같은 처지다. 이제부터 우리는 다른 나라 국민들보다 더 늦게 잠자리에 들고, 더 일찍 일어나는, 세계에서 가장 근면한 국민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한국은 세계 일류국가가 되지 않으면 날로 치열해지는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에 대비하여 정치·산업·노사관계·교육 등 국내체제를 시급하게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우리 역사가 100년 전의 痛恨(통한)을 씻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올바른 방향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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