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서울, 낭만-빛과 그림자] 사라져가는 것을 위하여! : 월간조선

조선왕조가 한양으로 定都(정도)한 해가 태종 5년 1404년이다. 역사로만 따질 때 서울은 600년이 넘는 세계적인 古都(고도)다. 그런데 과연 역사에 걸맞은 古色蒼然(고색창연)한 도시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도시 전체가 시멘트로 처발라 회칠한 거대한 성냥갑 같은 빌딩의 숲이다.

겨우 수십 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가회동, 북촌 일대의 韓屋(한옥)을 제외하면 60여 년 된 고풍스러운 건축물을 찾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서울은 껍데기만 화려했지 역사의 알맹이가 없는 無精卵(무정란) 같은 도시가 되고 말았다.

쓰라린 속내를 달래주던 할머니의 따사한 손길 같은 청진동 해장국집은 이미 헐려 새로 지은 대형 주상복합빌딩으로 옮겨 갔다. 해가 바뀌어 친구들과 찾았을 때는 예전의 ‘청진옥’이 아니었다. ‘갓 쓰고 양복 입은 꼴’을 한 어정쩡한 모습이었다.

해장국에 막걸리 한 사발 주욱 들이켤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당연히 예전의 정취나 해장국 맛이 날 리가 없다. 그저 이름만 주워듣고 찾아온 뜨내기 깃발부대의 관광객들이 새벽부터 코를 훌쩍거리며 변질된 사이비 한국의 맛을 곁눈질하는 게 요즘의 풍광이다.

서울시 공무원들이 유럽 해외연수 출장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곳의 유서 깊은 역사의 향기를 제대로 맡아보고 왔으면 한다. 走馬看山(주마간산) 식의 관광이 아니라 유럽의 골목, 파리나 런던, 로마나 피렌체의 뒷골목은 물론 중소도시의 골목이 얼마나 잘 보존돼 있는지 보아야 한다. 골목의 정취와 고즈넉한 멋에서 각박한 도회에서 잊고 살았던 아련한 추억과 소중한 도시의 향기를 맛볼 수 있는지를 몸으로 체험하기를 바란다.

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들은 전통과 역사의 향기를 보존하기 위해 오래된 벽돌 한 장도 결코 소홀하게 다루는 법이 없다. 개발이니 재개발의 명분 아래 모조리 부숴버리는 서울의 도시개발정책, 새것을 과시하기 위해 과거를 모조리 파괴해 버리는 전시를 위한 개발은 중단해야 한다.

청진동 피맛골 입구에 있는 열차집.

소설가 崔仁浩(최인호)씨는 피맛골은 유일한 비상구였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1960년대 초 ‘광장 공포증’을 앓고 있던 대학 새내기 청년시대였다.

“나는 그 무렵(대학 신입생 시절) 온몸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끝없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채 쓰레기통을 뒤지는 생쥐처럼 이 골목을 다녔다.”

당시 대부분의 청년들에게 종로통의 다방과 명동의 술집, 피맛골은 유일한 비상구였다. 그때 명동엔 ‘명동백작’, 이봉구 선생이 단골로 다니던 ‘은성’, 서민들의 단골 쉼터이자 대화 마당인 피맛골의 ‘열차집’, 그리고 ‘詩人通信(시인통신)’에 문인들과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한때 열혈 문학청년들의 집합장소였던 ‘시인통신’은 몇 군데를 전전하다 결국 몇 년 전 인사동 시대를 끝으로 문을 닫았다.

청진동, 피맛골에 이어 샐러리맨의 애환을 달래주던 무교동, 다동 뒷골목은 이미 해체가 시작됐다. ‘열차집’ 바로 그 뒷골목에 조용히 숨어서 문인들의 애환을 품어주던 다섯 평짜리 ‘소문난 집’도 오늘내일 이전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해장이란 무엇인가

종로의 한 대형 주상복합 건물로 이사하기 전의 청진옥.

청진동의 명물 ‘청진옥’이 작년 말 정든 청진동을 떠나 현대식 빌딩 ‘르·메이에르’로 장소를 옮겼다. 사실상 예전의 ‘청진옥’은 사라졌다. 이제 청진동은 해장국 골목의 명성과 맛과 정취를 잃어버렸다. 밤새 지친 술꾼들이 이른 새벽에 찾던 그 골목엔 수상쩍은 빌딩들이 기웃거리고, 원조 ‘청진옥’의 해장국 맛도 자취를 감췄다.

서울은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있다. 옛것을 밀어낸 청진동 주변엔 현대적이고 차별화되고 세련(?)된 프랑스나 이탈리아풍의 간판을 내건 레스토랑들이 우후죽순처럼 다투어 들어서고 있다. 이러다간 서울이 자칫 멋대가리도 없이 몸집만 비대한 채 정신이 나간 허깨비처럼 서 있는 식물인간 같은 도시가 돼버리지나 않을지 걱정스러운데….

그나마 누워 있지 않은 게 다행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멋도 맛도 풍류도 없애버리고 ‘르네상스’를 하겠다니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린가?

청진동이 유명한 이유는 그곳에는 술꾼들의 술로 뒤틀린 腸(장)을 풀어주는 수많은 해장국집이 있기 때문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해장’도 제대로 보자. 흔히들 술로 뒤틀린 장을 술로 풀어준다는 뜻으로 해장(解腸)이라고 표기하지만 사실은 ‘해정(解?)’이 맞는 말이다. 1960년대에서 70년대 걸쳐 한국 최고의 멋쟁이였던 칼럼니스트 沈鍊燮(심련섭) 선생이 작고하고 그의 친지들이 1977년에 펴낸 <술, 멋, 맛>이란 글엔 바로 이 해장술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해정’에서 ‘정(Hang over)’이란 ‘명정(酩?)’의 ‘정(?)’으로서 ‘술 때문에 생긴 병’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술 때문에 걸린 병은 술로 풀어야 한다는 이른바 이독제독(以毒制毒)의 지혜로서 숙취엔 해장술이 제격이니 그게 해정(解?)인 것이다.

“아, 술 맛이 좋군. 고마워”

미국인들은 해장술을 ‘아이 오프너(eye opener)’라 부른다. 눈을 뜨게 해주니 ‘開眼酒(개안주)’가 곧 해장술이다. 영국 사람들은 ‘개털(Hair of the dog)’이라고 한다. 웬 개털? 그 처방이 우리의 민간처방과 너무 닮아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영국에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개에게 물렸을 때 그 개의 털을 조금 깎아 물린 상처에 바르면 낫는다는 속설(민간처방)이 있다. 숙취란 게 다름 아닌 술이 물어뜯은 위장이 아파서 생긴 병이니 결국 개털을 약간 발라주면 낫는다는 데서 해장술을 개털이라고 한다나?

일본인들은 해장술을 ‘무카에사케(迎酒)’라고 한다. 숙취의 원인이 전날 마신 술이 뱃속에서 大怒(대로)하여 요동을 부리는 탓이니 해장술 몇 잔으로 환영사절을 대신케 하면 노기가 봄눈 녹듯 사그라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모든 애주가들은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이튿날도 전날을 회상하면서 계속 마시는 구실을 삼는 모양이다.

술은 왜 마시는가? 이 물음에 대한 정답은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술을 예찬한 사람들이 많다.

“술은 입을 경쾌하게 해준다. 술은 또다시 마음을 털어놓게 한다. 그러므로 술은 하나의 도덕적 성질, 마음의 솔직함을 운반하는 물질이다.”

칸트의 말이다. 일찍이 金八峰(김팔봉) 선생은 이런 명답을 남겼다.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취하는 상태로 옮아가는 과정을 향락하기 위해서 마신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브람스가 임종할 때 술 한 컵을 청해 마시고 남긴 마지막 말은 “아, 술 맛이 좋군. 고마워”였다고 한다. 이 좋은 술을 제대로 마시지 못하는 요즘 대학가의 음주 문화, 술을 통해 인생의 참다운 멋을 깨우칠 수 있어야 할 텐데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품격과 풍류가 떨어진다는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각박한 세태에 문득 옛 선현들의 풍류가 그리워진다.

“꽃 핀 산, 마주앉아 술잔 기울이니(兩人對酌山花開)/ 한 잔 한 잔, 또 한 잔 하세(一杯一杯復一杯)/ 나는 술 취해 졸리니 그대 우선 가게나(我醉欲眠卿且去)/ 내일 아침에 술 생각 있거든 거문고나 안고 오시게(明朝有意抱琴來).”

이 시는 李白(이백)의 유명한 ‘산중에서 隱者(은자)와 대작하다(山中與幽人對酌)’란 시다.

예부터 술이란 마주 보고 마시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두 사람이 꽃가지 꺾어놓고 수놓으며 한 잔 또 한 잔 권커니 자커니 하다 취기가 오른 풍경이다. 여기서 ‘차(且)’는 손사래를 치며, “난 이제 취했다고!”하며 주정을 부리는 모습인데 陶淵明(도연명)은 집에 찾아오는 손님에게 술대접할 때, 자신이 먼저 취하면 “나는 술 취해 졸리니, 그대는 가게나!”라고 했다는데 천하의 이백도 이를 흉내 내고 있는 듯하다.

우리 조상 어른 가운데 松江(송강) 鄭澈(정철)도 여기에 못지않다. 특히 ‘將進酒辭(장진주사)’는 그의 호방한 품성이 잘 드러나 있다.

“한 잔 먹새 그려, 또 한 잔 먹새 그려/ 곳 것거 算(산) 노코 무진무진 먹새 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주리어 매여가나/ 流蘇寶帳(유소보장)의 萬人(만인)이 우려내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못 白楊(백양)수페 가기곳 가면/ 누른 해 흰 달 가난 비 굴근 눈 쇼쇼리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자 할고/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바람 불 제 뉘우친달 어디리.”

아마 조선조 500여 년을 통틀어 그만한 愛酒家(애주가)가 없는 듯하다.

民草들의 해방구

옛 선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술은 俗人(속인)이 마시면 興樂(흥락)을 얻고, 武人(무인)이 마시면 剛樂(강락)을 얻고, 君子(군자)가 마시면 淸樂(청락)을 얻고, 道人(도인)이 마시면 仙樂(선락)을 얻는다고 했다. 어떤 즐거움을 누리고 싶은가? 선택은 여러분의 酒格(주격)에 달렸다.

피맛골은 그 연원부터가 서민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조선시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정치의 중심지였다면 종로거리는 육의전을 비롯해 상가들이 밀집해있던 상업중심지였다. 따라서 종로에는 늘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붐볐고, 때로는 임금이나 말을 타고 지나치는 높은 벼슬아치들의 행렬이 지나가던 곳이었다.

당시 양반사회에 상민들의 자유와 권리라는 게 있을 턱이 있겠는가? “휘~ 물렀거라”라고 호령하면 백성들은 그저 허리를 굽힌 채 머리 조아리고 그들의 행차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불편을 겪었을 건 뻔한 일이다.

양반들에게 정면으로 맞설 수 없던 백성들은 그들의 꼴을 보지 않고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양반들의 행차가 잦은 큰길을 피해 이 골목을 이용했던 것이다. 이른바 양반들의 행차, 양반들이 탄 ‘말(馬)을 피해 다니는 길’이라고 해서 避馬(피마)길이라고 불렀고, 그 길 양쪽으로 형성된 뒷골목 동네에는 피맛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따라서 피맛골은 그 연원 자체가 ‘백성들의 해방구’, 시쳇말로 ‘民草(민초)들의 해방구’였다. 원래 피맛골은 지금의 교보빌딩 뒤에서 종로6가까지 이어져 있었다. 지금은 종로1가에서 3가까지만 그 모습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마저 금년 내에 서민의 애환이 담긴 추억의 쉼터이자 놀이터 하나가 사라지게 됐다.

‘개발의 힘’은 이렇게 대단한 것이다. 역사와 전통, 서민들의 애환쯤이야 하루아침 불도저로 밀어붙이면 그만인 게 오늘날 서울시의 도시 행정이다. 가시적인 전시효과를 위해서라면 600여 년 전통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다.

한강 르네상스와 도심 재개발은 별개의 것이다. 유리와 시멘트로 온통 처발라 놓은 서울의 모습을 보러 오는 외국인은 없다. 잘 보존된 한옥과 뒷골목의 정취와 한국 전통의 멋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빈대떡과 조개젓으로 55년 이어와

빈대떡과 어리굴젓 하나로 맛을 지켜온 피맛골 ‘열차집’은 1954년 문을 연 이래 55년을 이어오고 있다. 6·25가 터지고 꼬박 3년여 전쟁을 치르고 휴전이 된 그 이듬해 폐허의 황량한 세종로 뒷길 지금의 교보문고 뒤에서 종로소방서 쪽으로 가는 어느 한옥 담 틈에서 간판도 없이 빈대떡과 막걸리를 팔기 시작한 불법 노점(?)이 ‘열차집’의 효시다.

한옥의 추녀 밑에 한 많은 피란길의 엉성한 기차 칸처럼 기다란 의자를 놓고 빈대떡과 막걸리를 파는 이 집의 풍경을 보고 단골손님들이 ‘기차집’이란 애칭을 붙여주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 가게를 오늘의 피맛골 초입으로 옮기고 ‘기차집’과 이미지가 비슷한 ‘열차집’으로 정식 간판을 걸었다.

지금은 故人(고인)이 되었지만 창업자 안덕인씨는 빈대떡 솜씨도 뛰어났지만 인심도 후덕했다. 수복 후 고단한 피란생활에 지치고 배고픈 사람들의 가난한 주머니 사정을 익히 아는 그는 후덕한 인심으로 항상 손님들에게 베풀었다. 그것이 쌓여 ‘열차집’은 서울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예나 지금이나 이 집의 주 메뉴는 빈대떡과 조개젓이다. 당시만 해도 깨끗하고 맛있는 조개가 많았고, 특히 서해안의 굴은 그 맛이 일품이었다. 안덕인씨 부부는 이 싱싱한 조개에 굴까지 덤으로 넣어 빈대떡의 반찬으로 내놓았는데, 이것이 ‘기차집’ 특유의 조개젓 반찬이다.

전통은 ‘열차집’으로 그대로 계승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다. 주인이 바뀐 때는 1970년대 중반이다. 평소 후계자를 물색하던 안씨 부부는 맞은편에서 과자와 껌, 과일, 음료수를 팔며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하고 있던 尹海淳(윤해순), 禹濟恩(우제은)씨 부부를 눈여겨보아 두었다.

1960년 초쯤 윤해순(그는 꼭 ‘자유당 말기’라고 회상했다)씨는 지금의 교보문고 자리에 있던 동일여관에서 잔심부름하며 고단한 서울 생활을 익혔다. 그러다 고향 청양에 내려가 혼례식을 올리고 다시 상경하여 자리를 잡은 것이 ‘열차집’의 전신인 ‘기차집’ 맞은편의 조그마한 구멍가게였다.

1976년 안덕인씨는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 부부에게 가게를 물려주었다. 그때 우제은씨는 안덕인씨 부부와 함께 3개월 가량 일하면서 빈대떡과 조개젓 반찬의 노하우를 전수 받았다. 우씨는 “그분들은 우리에게 가게와 함께 따뜻한 마음씨도 물려 주셨다”며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지금도 이 집 특유의 조개젓 반찬에 곁들이는 양념간장(양파와 풋고추를 넣어 만든 간장 양념)에 찍어 먹는 노릇노릇한 빈대떡 맛의 담백하고 삼삼함은 어느 안주에 견줄 수 있겠는가.

돼지기름으로 부치는 빈대떡

막걸리와 빈대떡으로 유명한 53년 전통의 열차집.

‘열차집’은 그 역사가 올해로 55년, 윤해순씨 부부가 인수한 지도 벌써 33년째다. ‘열차집’은 막걸리와 소주와 맥주, 그리고 안주로는 빈대떡과 조개탕, 굴전, 파전, 두부 다섯 종류가 전부다. 역시 막걸리에 빈대떡이 제격이다. 열차집에서는 절대로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는다.

노란 녹두지짐엔 돼지고기 몇 점 외에 고사리나 김치 조각을 절대 넣지 않는다. 녹두지짐 고유의 맛이 다칠까 봐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직접 맷돌을 돌려 녹두를 갈았지만 이젠 전기장치를 달아 돌린다. 그러나 아직도 녹두지짐엔 돼지기름만을 쓴다. 절대로 식용유를 쓰지 않는다. 다만 돼지 비곗덩어리를 그냥 사용하는 게 아니라 미리 기름을 내어 따로 통에 담아 두었다가 쓴다. 식용유를 쓰면 녹두지짐 맛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 이 집을 찾는 사람들은 녹두지짐 맛이 다소 심심하다고 느낀다. 제대로 맛을 아는 사람이다. 화학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는 ‘열차집’ 빈대떡은 과연 빈대떡 맛이 있는지 의아할 정도지만(그에 비해 낙원동 ‘유진식당’ 빈대떡은 간간하고 바삭바삭해 대조적이다) 바로 그 맛에 익숙해지면 그 맛에 반해 버린다.

조개젓에 찍어 먹는 빈대떡 맛은 ‘열차집’만의 고유의 맛이다. 그러나 이 집의 정취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건 윤해순, 우제은씨 부부의 마음씨다. 여유롭게 아다지오(adagio) 속도로 이 집을 경영하는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인데다 토담 벽에 쏟아지는 봄 햇볕같이 온화한 두 부부의 얼굴에서 평안함을 느끼게 된다.

약간은 불콰한 얼굴로 말없이 손님을 맞는 윤해순씨와 부인 우제순씨의 미소도 포근하지만 긴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정담을 나누는 분위기가 더욱 술맛을 돋운다. 사직동 ‘대머리집’이 없어진 후 나는 친구들과 잦은걸음으로 이 집을 더욱 찾게 되었다. 1968년 봄 제대하고 복학 후 첫발을 디딘 이래 올해로 40년 넘게 단골집이 돼버렸다.

이제 이들 부부도 일흔이다. 언제까지 할 것이냐고 물었더니 큰아들 尹相建(윤상건·42)씨가 대를 이어 녹두지짐과 조개젓 반찬의 전통을 이어 갈 것이란다. 1남 4녀를 키워낸 이들 부부는 정든 피맛골을 떠나야 한다는 게 누구보다 아쉽고 애통한 마음 금할 수 없다고 했다.

세 번 놀라는 집

가게의 허름함과 단골손님의 면면과 주인의 미모에 세 번 놀란다는 삼경원.

세 번 놀란다는 뜻의 ‘三驚苑(삼경원)’은 ‘시인통신’의 한귀남씨에서 그동안 두어 차례 주인이 바뀌어 1992년 지금의 徐英順(서영순·70)씨로 17년째 이어와 그 자리에서만 40년을 넘게 버텼다. 처음엔 간판조차 없었다. 값싼 술값에다 후덕한 주인 인심이 입소문을 타고 번져 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그냥 ‘소문난 집’이라 불렀다. 그게 屋號(옥호)로 굳어져 피맛골 ‘소문난 집’은 ‘열차집’과 함께 문인들에게 명소가 되었다.

1998년 여름 단골손님인 성균관 유림 安商燮(안상섭) 선생이 옥호를 ‘삼경원’이라 지어와 벽에 붙여두었다. 지금도 삼경원에 들르면 ‘삼경하위야(三驚何謂也)’라고 적고 그 아래 일칙(一則) 관기옥야(觀其屋也) 이칙(二則) 관기빈야(觀其賓也) 삼칙 관기주야(觀其主也)라고 적혀 있다. 안상섭 선생 작호에 글쓴이는 安順權(안순권)씨다.

그런데 바깥에 붙여둔 ‘삼경원’ 간판은 지난 1월쯤 피맛골의 철거 소식과 함께 뒤숭숭한 골목 분위기를 틈타 누군가 떼어 갔다. ‘소문난 집’의 또 하나 애칭은 ‘그랜드 플라자’다. 다섯 평 남짓한 홀의 크기에 놀라(?) 단골손님인 곽종용 시인이 애교 있게 별칭을 붙여주었다.

‘삼경원’은 그 이름에 걸맞게 정말 세 번 놀란다. 첫 번째는 가격도 싸지만 탁자 세 개가 전부인 집의 허름함에 놀라고, 두 번째로 찾아오는 단골손님의 면면에 놀라고, 세 번째로 나이는 들었으되 단아한 주인의 미모에 놀란다는 뜻이다. 개업한 지 20년이 가깝지만 안주 한 접시가 아직도 5000원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三驚苑也吾天願(삼경원야 오천원)’이라 써 붙여놓고 ‘一則(일칙) 생두부+순두부+계란말이, 二則(이칙) 감자전+파전+햄+모둠전, 三則(삼칙) 오징어 볶음+오징어 데침+어묵’이라 쓴 메뉴판이다. 단골 중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정공채 시인과, 요즘 뜸해졌지만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소설가 김병총씨, 그리고 文名(문명)을 떨쳤던 문인들이 있다.

그립고 아쉬운 건 정공채 시인의 호방한 웃음을 다시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삼경원의 낡은 술탁자는 그대로인데 개발에 밀려 이 집마저 떠나버리면 어디서 그 숱한 정든 사람들의 얼굴과 따사한 온기를 찾을 수 있겠는가.

그 밖에 낙원동 뒷골목의 빈대떡과 냉면전문 ‘유진식당’은 아직은 건재하지만 언제 재개발이란 칼자루에 무릎을 꿇고 제 목숨을 내놓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여하튼 서울시가 새롭게 피맛골 조성계획을 세운다고 했지만 얼마나 오묘한 재주로 옛 정취를 되살릴지는 두고 볼 일이다. 모쪼록 개발논리를 앞세워 서울의 멋과 정취가 서린 도심 뒷골목을 ‘한강 르네상스’라는 불도저로 밀어 모조리 한강에 빠뜨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빈다.

“이 사업에 내 생애를 걸었다”

서울에는 ‘가을’이란 이름의 카페가 여러 곳 있다. 그중에서도 나는 두 곳의 ‘가을’을 가끔씩 들른다. 하나는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주차장 뒤편에 있는 ‘가을’이다. 밤이면 7080세대들이 즐기는 통기타 부대들이 출연하는 라이브 무대가 펼쳐진다.

몇 년 전 불의의 사고로 맘씨 좋은 여 사장이 떠난 뒤 다소 손님들이 주춤해졌지만 ‘가을’은 50~60대 장년부터 70대 이후 노년층에게 아직도 향수를 자아내는 곳이다.

또 하나의 ‘가을’은 한남동에 있다. 광화문 ‘가을’이 왁자지껄한 분위기인데 반해 한남동 ‘가을’은 고즈넉하고 약간은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두 곳 다 맥주와 포도주, 그리고 양주를 팔고 있는데 가격은 광화문이 다소 대중적인 반면 한남동은 다소 품격 있다. 그러나 강남의 카페에 비하면 엄청 싼 편이다.

사실 두 곳 다 맥주나 와인을 마실 경우 그리 큰 부담을 주지 않는다. 술이란 게 주인과 그곳에 오는 사람과 분위기에 따라 맛이 다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40~50대 중견 샐러리맨들이 한 달에 한두 차례 기분 좋게 마실 수 있는 곳으로 한남동 ‘가을’은 가격에 비해 그 정취만은 강남의 어떤 카페보다도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한남동의 카페 ‘가을’은 1977년 5월 초하룻날 문을 열었다. 올해로 33년째 단 한번도 장소를 옮기지 않은 채 요지부동 한 곳에서만 33년을 버텼다. 여장부 사장 朴勝愛(박승애)씨의 말이다.

“저는요, 천성이 게으른가 봐요. 변하는 것도 싫지만 변화 자체를 싫어해요. 별 욕심도 없고요. 먹고 살 만큼 수입이 생기면 그것으로 족하거든요. 게으르고 그래서 우직하게 한곳에서 30년 넘게 버텨온 건가 봐요.”

그녀는 확실히 우직한 면이 있다. 우선 정직하게 카페를 경영했다.

“전 이 사업에 제 생애 전체를 걸었거든요.”

그녀는 이 가게를 하기 전 조그마한 찻집을 하면서 검정고시 준비를 했고, ‘가을’을 경영하면서 대학에 입학했고, 대학을 다니면서 밤에 장사했다. 늘 ‘~하면서’ 가게를 운영했다.

그녀는 대학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했다. 카페 ‘가을’의 디자인은 그녀의 솜씨다. 한때 장안 최고의 ‘문화 사랑방’으로 명성을 떨쳤던 ‘가을’도 4월 15일에 문을 닫았다.

세 가지 경영철학

그녀는 올해, 그러니까 지난 2월에 회갑을 맞았다. 한남동 순천향병원 맞은편 그곳, 한자리에서 33년간 요지부동으로 ‘가을’을 지켜왔다. ‘가을’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해 서울의 명소가 된 건 주인 박승애씨의 활달한 성격과 카페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우선 그녀는 ‘가을’에 대한 긍지가 대단했다. ‘가을’을 낭만의 명소로 만든 건 그녀의 경영 철학이다.

‘밥집과 술집은 의리로 못 간다.’

그녀는 이 철학을 굳게 믿었다. 하루 이틀은 의리로 버틸 수 있지만 한 달 두 달, 1년 2년은 결코 안면이라는 의리로 버틸 수 없다는 것이다. ‘맛과 멋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승애씨는 자신이 애당초 에스(S) 라인의 몸매를 자랑하는 늘씬한 미모의 여인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텁텁하고 수더분하고 후덕한 맘씨 좋은 이웃집 아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페를 경영하면서 그는 세 가지를 꼭 지켰다. 그는 카페(그녀는 그냥 ‘술집’이라고 했다) 경영에 있어 건전한 풍토도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를 만들겠다는 철학을 가졌다.

첫째 ‘여자 장사’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둘째, 음악이 있는 가게, 그런 카페를 만들었다. 가수 지망생이었던 그녀는 자신이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피아노를 놓았고 나중엔 색소폰 연주자까지 영입했다.

셋째, 정직한 경영이었다. 문을 닫을 때까지 바가지나 단 한 방울의 술도 속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가을’을 정취 있고 아름다운 낭만의 ‘가을’로 만들었다.

그녀는 가게의 구성요소로 가장 중요한 건 손님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누가 오느냐, 어떤 손님이 오느냐에 따라 가게 분위기가 달라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가을’을 찾아오는 손님들의 구성은 삼박자가 조화를 이루었다. 정치인, 문화예술인, 사업가들이다. 물론 샐러리맨들도 있었지만 주로 이 세 부류의 단골손님들이 ‘가을’을 주도했다.

언론인으론 작고한 송지영씨를 비롯해 시를 쓰는 기자 김광협씨, 연극인 이해랑 선생을 비롯한 김동훈씨, 화가 이만익씨, 민속연구가 심우성씨, 영화감독 이장호씨, 영화배우 강수연씨, 통기타 가수 윤형주, 송창식, 이동원씨 등이 자주 출입했고 정치인으로는 정대철씨를 비롯한 정몽준 의원 등 수많은 정치·문화예술인들이 1980~90년대 단골손님으로 ‘가을’을 찾았다. 따라서 그곳에 가면 언제나 낯익은 얼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난 2월 박승애씨의 회갑 때 단골 知人(지인)들을 초청했는데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이만익 화백 부부, 정대철씨와 그의 일행, 연출가 임영웅씨와 그의 옛 KBS 교양 반원들, 그리고 가수 이동원씨가 찾아와 ‘향수’를 불렀다.

개업 당시 이곳에 들렀던 연출가 임영웅씨의 소개로 연극인들이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고 방송인들이 드나들면서 연예인 특히 가수, 작곡가들이 드나들었다. 또 순천향병원에 弔問(조문) 온 정대철 前(전) 의원이 우연히 들른 게 인연이 되어 그는 최고의 단골 VIP가 되었다.

처음엔 방송인, 연극인, 통기타 가수들의 출입이 잦았으나 교수, 화가, 문인, 나중에 정치인들까지 단골손님의 외연이 확대됐고, 1980년대 중반엔 ‘문화 사랑방’으로 서울의 명소로서 자리매김하게 됐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신용카드가 없던 시대라 현금 아니면 외상밖에 없었다. 당시 누군들 두둑한 현금을 가지고 다녔겠는가. ‘가을’엔 인심이 푸짐했다. 외상장부가 늘 비치돼 있었는데, 그 금전출납부를 ‘보증금 장부’라고 했다. 단골손님인 이만익 화백은 외상값이 어느 정도 쌓이면 그림 한 점씩을 가지고 왔다. 문을 닫기 전까지 ‘가을’엔 이 화백의 그림 여섯 점이 걸려 있었다.

KBS가 남산시대를 마감하고 여의도로 옮긴 후 한때 나 역시 이 집을 단골로 다녔다. 취해 문을 나설 때 얼마냐고 물은 적도 없었지만 단 한 번도 그녀의 찌푸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쓰라린 세월 나를 따스하게 안아준 카페 ‘가을’

33년 만에 문을 닫는 서울 한남동 가을과 박승애 사장.

1980년대 초반, 마흔 즈음은 내 개인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절이었다. 가장 캄캄했고 암울했으며 영혼마저도 피폐한 적이 있었다. 새삼 이 나이에 옛 상처의 흔적을 매만져 본다는 게 부질없는 노릇이지만 그 아픈 기억이 떠오를 때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곳이 바로 ‘가을’이다.

그 우수의 계절에 ‘가을’은 나의 유일한 비상구였고 동시에 위안처였다. 통금시대에 쫓기듯 도심을 탈출하던 취객들에 비해 내가 언제나 여유롭게 통금시대의 자유를 만끽한 시기가 바로 그때가 아니었나 싶다.

자정 무렵 텅 빈 ‘가을’에서 마지막 손님으로 남은 사람은 대개 나였다. 그때마다 ‘가을’의 친절한 L군은 내게 꼭 개천의 상류쯤에 있는 여관을 잡아 주었다. 새벽 한 시쯤엔 항상 만원이 되는 이 여관엔 나의 지정 방 한 칸이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다. 이른바 이불을 쌓아두는 방이었다. 손님이 꽉 차게 되면 자연히 방이 비었고, 그러면 그 빈방은 언제나 내 차지가 되었다.

나는 서둘러 택시를 잡아타고 쫓기듯 집에 가야 할 필요가 없었다. 느긋하게 아다지오의 속도로 ‘가을’을 나서 자정에서 심야로 가는 길목, 개천의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내 아늑한 이불방에서 잠을 청하곤 했다.

지금은 복개공사를 하여 개천이 없다. 당시 새벽 잠결에 듣는 개천 물소리는 어느 먼 산골 계곡물 소리처럼 청아하게 들리곤 했다. 어느 때는 山寺(산사)에 온 듯한 착각마저 들 때가 있었고 그런 꿈까지 꾸면서 자곤 했다.

박씨가 애정을 쏟아 ‘문화 사랑방’으로 가꾼 지 33년, 그 세월을 견디어 온 ‘가을’도 건물주인이 바뀌면서 각박한 압력에 밀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권리금도 못 주고 다른 사람에게 가게를 양도할 수도 없다는 ‘화해조서’라는 계약에 서명한 다음부터 스스로 문을 닫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녀는 세태를 원망하기보다는 아름다운 4월에 자결을 택했다. 서울의 또 하나 명소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사라져가는 것을 위하여

모든 것은 사라진다. ‘가을’은 가을이 가기 전에 사라졌고 ‘열차집’과 ‘삼경원’이 2009년이 저물기 전에 사라질 것이라는 소식에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비록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젠가 사라지게 마련이라 하더라도….

로마나 파리, 런던, 이스탄불 같은 도시들이 수백 년에서 1000여 년의 세월이 넘도록 이 지상에 남아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 도시들의 매력이 개발이나 재개발의 휘황찬란함에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역사를 보존하고자 하는 지도자들의 확고한 신념, 바로 역사관과 전통 고수의 철학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열의와 의지가 똘똘 뭉쳐 이뤄낸 역사보존 의지의 합작품이다.

개발을 위한 도시행정, 오직 낡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역사와 전통을 깡그리 부숴버리고 위대해진 도시는 이 지구상에 단 한 곳도 없다. 역사는 결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는 건 진실이다.

전통과 역사, 정체성의 보존이야말로 진정한 보수요, 나라 사랑이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배신이요, 역사의 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