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크로싱> 제작 秘話 : 월간조선

2005년 9월 필자가 쓴 <평양의 어항>을 읽은 미국 부시 대통령의 초대를 받고 백악관 면담을 한 이후 재미교포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링크’(LINK)의 초청으로 미국의 유명 대학교 10여 곳을 다니며 북한 인권 실상을 알리는 투어를 다녀온 적이 있다.

행사 마지막으로 UCLA 대학에서 강연회를 마치고 샌디에이고로 떠나기 전에 나를 꼭 만나보고 싶다며 재미교포 한 사람이 찾아왔다. LA 한인타운의 한 식당에서 만나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젊은 재미교포가 탈북자들의 심정을 너무 잘 이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패트릭 최(43ㆍ한국명 최대휘) 유니티미디어 사장은 미국에서 나서 자란 재미동포 2세지만 북한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만큼이나 북한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또 북한의 실정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명문 컬럼비아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최 사장은 “영화에 매료돼 1990년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화인의 길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그는 크고 작은 영화 12편을 제작ㆍ감독했고 그가 감독한 영화 가운데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워처>(Watcher)는 미국 흥행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필자가 쓴 <평양의 어항>이나 미국에 친척을 둔 탈북 가족의 탈출 스토리를 바탕으로 재미동포 작가가 쓴 책이 미국 내에서 베스트 셀러에 올랐는데, 책 내용들이 사실이라면 왜 이런 사실들이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살면서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영화 제의를 받아본 적이 없느냐고 질문했다.

사실 북한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한 영화감독이 있었다. 金正日(김정일)에 의해 북한으로 납치됐던 申相玉(신상옥) 감독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북한 탈출을 시도하다 체포돼 북한에서도 가장 잔인한 1급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돼 갖은 고초를 겪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신 감독은 살아생전 기자를 만났을 때 “당신이 쓴 책을 보니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며 수용소의 실상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자신도 고민이라고 털어놨었다. 신 감독은 자신이 직접 겪은 1급 정치범 수용소의 실상을 그린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제작비가 마련되지 않아 무산됐다.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려던 신 감독의 꿈은 좌절됐고, 그 후 많은 북한 관련 영화들이 제작됐지만 북한의 현실을 리얼하게 알리는 것보다 흥행을 먼저 따지다 보니 북한을 제대로 알리는 영화는 만들어질 수 없었다는 한국 내 사정을 최 사장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북한을 알리는 영화는 꼭 필요하며, 가능하면 자신이 그 일을 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 후 최 사장은 스태프들과 함께 북한 내부에 캠코더 등을 들여보내 다양한 동영상을 촬영해 진짜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고, 많은 탈북자들을 만나고, 중국 등을 통해 북한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다닌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기억에서 잊혀져 갔다.

지난 3월 한 탈북자로부터 북한 실상을 제대로 알리는 영화가 제작됐으며 곧 상영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크로싱>이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지금까지 북한을 소재로 한 영화 가운데 북한의 실상을 가장 잘 표현한 영화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 제작자가 누구인지 물었다.

북한인권활동을 돕는 데 앞장서고 있는 뉴욕 맨해튼의 <고려서적> 최웅표 사장의 아들인 패트릭 최가 제작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의 집념에 감탄했다. 언젠가는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았던 그가 <크로싱>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차인표의 용기 있는 행동

탈북자를 소재로 한 영화 ‘크로싱’의 한 장면.

<크로싱> 제작팀이 미국 워싱턴에서 첫 시사회를 한 후 5월 24일 국회에서 정치인들과 북한인권단체 관계자, 탈북자들이 함께 하는 시사회가 열렸다. 朴槿惠(박근혜) 前(전) 한나라당 대표도 이날 시사회에 참석했다. 영화가 시작돼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무뚝뚝한 북한 남자(脫北男)들도 하나 둘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고 나도 결국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북한주민 용수 역을 맡은 차인표 씨의 연기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북한을 악의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비난에 대해 차인표 씨는 “정치 이념을 떠나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이 영화를 통해 북한주민들의 고통을 한 번이라도 함께 느끼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소감을 발표했다.

이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잊을 수 없는 신인 배우가 있는데, 아버지를 찾아 두만강을 건너는 열한 살 준이 역의 신명철이다. 명철이는 전교생이 고작 25명인 충북 영동 시골 분교의 6학년 학생이었다. 김태균 감독은 “깎은 듯한 외모와 연기를 보여주는 아역 배우들이 많았지만 명철이의 선한 모습이 눈에 밟혔다”며 “어리지만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한 배우”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크로싱>은 함경북도 탄광촌에서 가족의 약과 식량을 구하기 위해 북한을 떠난 아버지(용수ㆍ차인표)와 그를 찾아나선 열한 살 아들(준이ㆍ신명철)의 엇갈림(Crossing)을 그린 휴먼 가족 드라마다. 2002년 탈북자 25명이 중국 경비원을 밀치고 베이징 주재 스페인대사관에 진입했던 사건을 포함해 탈북자 수십 명의 실제 증언을 바탕으로 만든 실화 소재 작품이다.

북한 인권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인권문제 거론이 남북관계 훼손이라는 사고에 빠져 있던 盧武鉉(노무현) 정권 시절에 만들어진 영화라 제작과정이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최 사장과 김태균 감독의 의리

탈북자 영화 ‘크로싱’을 제작한 재미동포 패트릭 최 유니티미디어 사장(왼쪽)과 감독 김태균(오른쪽).

영화 <크로싱>의 김태균(48) 감독과 최 사장과의 인연이 없었다면 영화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 감독은 최 사장과 형 동생 사이로 지낼 만큼 허물없이 지내왔지만 그가 처음 북한 실상을 알리는 영화를 만들자고 제의했을 때 동의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20년 영화 인생에 이런 영화는 정치적으로 너무 민감하고 흥행에 성공하지 못할 확률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애당초 이 영화에 참여할 생각은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 사장의 거듭되는 부탁에 처음에는 ‘스터디 팀’을 만들어주고, 작가도 소개해주면서 자료 조사와 준비 등 6개월간 그를 도와주었다. 하지만 탈북자들의 실상과 북한 인권 참상을 구체적으로 접하면서 일종의 사명감을 느끼게 됐고, 최 사장을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시나리오를 쓴 이유진 작가까지 섭외한 세 사람은 탈북자 수백 명을 만나고 중국 조선족 자치주인 옌지(延吉) 일대에 가서 북한주민들로부터 북한 실상을 직접 듣는 등 시나리오 구성에 발품을 팔았다.

이유진 작가는 탈북자 다큐멘터리만 100여 편을 시청했고, 꼬박 4년간 <크로싱> 대본에 매달렸다. 하지만 당시 분위기에서 이 영화에 투자자를 모집하기가 어려웠다.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이유로 외면 받다가 기적이 일어났다. 제작비 40억 원을 투자하겠다는 회사가 나타난 것이다.

영화가 원활하게 제작되자면 60억~70억은 투자돼야 했지만 비용을 최대한 아끼고 허리띠를 졸라맨 촬영이 거듭됐다. 중국 현지에서 촬영 할 때에는 “내가 제정신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불안한 촬영이 계속됐다고 한다.

영화를 만들면서 김 감독을 괴롭혔던 것은 ‘리얼리티’였다. 어떤 영화감독도 사실성과 디테일에 대한 집착은 당연한 일이지만 북한 실상이 남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참혹해 그대로 보여줄 경우 더 믿을 수 없어 하지 않겠냐는 고민이 그를 힘들게 했다.

그래서 남한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실제 상황의 10분의 1 정도로 순화시켜 표현했지만

북한 실상을 처음 느껴보는 관객들은 ‘쇼킹’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다.

영화 <크로싱>은 2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배우 차인표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 김용수 역을 맡았고 아들 김준이 역에는 6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발탁된 신명철 군이 열연했다.

탈북자 출신 조감독의 숨은 역할

<크로싱>이 북한의 실상을 현실감 있게 보여주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주역은 탈북자 출신 조감독 김철영(34) 씨다. 2001년 탈북해 남한으로 온 김 씨는 한양대에서 연극영화학을 전공했다. 북한에서는 출신성분이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김정일 체제가 항상 불만스러웠고 젊은 혈기에 이 체제를 뒤집어엎는 것이 꿈이었던 김 씨는 결국 영화로 북한체제에 도전한 셈이다.

김태균 감독이 영화를 함께 만들자고 했을 때 아픈 과거를 다시 끄집어내기가 싫어 거절했지만 “너 같은 당사자가 나서서 북한의 실상을 알리지 않으면 누가 하겠느냐”는 설득에 결국 참여하게 됐다고 한다.

<크로싱> 영화의 곳곳에는 김 씨가 직접 경험한 탈북 현장 모습이 담겨 있다. 황해도가 고향인 그는 탈출을 결심하고 두만강 접경 지역인 함경북도 지역으로 이동하는 데만 수일이 걸렸다. 살벌한 여행증 검열과 보위부 감시망을 뚫고 황해도에서 국경지역인 함북 지역으로 나간다는 것은 목숨 건 탈출이 아닐 수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중국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했지만 한국행을 시도하다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 중국 공안에 의해 쇠사슬에 묶인 채 다시 북송 되는 순간은 절벽 아래도 떨어지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국가안전보위부의 야만적인 고문을 이겨내고 한국행을 끝까지 부인한 덕에 정치범 수용소가 아닌 일반 탈북자 수감시설에 넘겨져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노역과 굶주림으로 많은 아이들과 노약자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김 씨 자신도 영양실조와 노역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경험했다.

김 씨는 “내가 겪은 탈북자 수용소의 참상을 그대로 그렸다면 대부분 남한 사람들은 믿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도 그는 많은 전화를 받는다. 한쪽에선 “당신 너무한 것이 아니냐? 그렇게 왜곡해도 되느냐”는 항의성 전화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왜 그것밖에 표현하지 못했나. 얼마나 처참한 것이 많은데, 다시 만들라”며 항의하는 탈북자들의 목소리다.

이미 예견한 것이지만 같은 문제를 놓고 정치적 성향에 따라 극명하게 갈리는 남한 사람들의 정서가 야속하기만 하다. 제작자와 감독, 그리고 이 영화의 주인공인 차인표 씨의 말대로 진실은 북한의 실상이 참혹하다는 것이며, 매일 일과처럼 벌어지는 이런 참상에 대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 그동안 왜곡돼 왔던 북한의 실상이 남한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더 많은 국민들이 <크로싱>을 통해 북한의 현실을 아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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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크로싱> 제작 秘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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