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단 산울림 창단,「林英雄 고도」20여차례 공연
● 原典에 충실,「양념」치는 것 철저히 배제
●「고도」는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연극
● 베ㅖ트의 고향,더블린에서 한국의 「고도」큰 반향
● 原典에 충실,「양념」치는 것 철저히 배제
●「고도」는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연극
● 베ㅖ트의 고향,더블린에서 한국의 「고도」큰 반향
「임영웅의 고도」
도대체 33년 동안, 같은 작품 하나를 20여 차례나 무대에 올린 그런 어처구니 없는(?) 고집을 부린 연출가가 이 세상, 그것도 한국에 있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란 작품이 연극 연출가 林英雄(임영웅·66)에 의해 1969년부터 2002년 7월까지, 두 세기에 걸쳐 정기공연 14회, 해외공연 4회와 페스티벌에 참가한 후 귀국공연 2회 등 무려 20여 회나 무대에 올려졌다.
연극인뿐만이 아니라 연극에 관심 있는 주변 사람들조차도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林英雄을 빼놓고 얘기는커녕 상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그냥 「임영웅의 고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연극평론가 이태주씨는 『이 작품의 공연은 연출가 임영웅의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이 되면서 동시에 그가 연극에 대해서 품고 있는 헌신과 양심의 상징적 표현이 되었다』고 했다.
林英雄이 그토록 「고도」에 깊이 천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병적인 집착같기만 한 「고도」의 매력은 과연 무엇일까?
1953년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파리의 바빌론 소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때 全세계 연극계는 충격적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리얼리즘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특히 충격적 사건이었다. 연일 세계의 연극계는 찬반 양론의 열띤 논쟁을 벌였다.
1950년대 말, 朝鮮日報 문화부 기자였던 林英雄은 도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이렇게 큰 파문이 이는 것일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해 이 작품(당시 일어판)을 읽었는데 그때의 감상은 「좀 어렵다는 느낌과 함께 별로였다」는 기억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곧 잊어 버렸다고 했다. 그러다가 1969년 카페 떼아뜨르 개관 기념 공연으로 해럴드 핀터의 「덤 웨이터」를 연출, 김성옥, 함현진 두 배우를 출연시켜 주목을 끌었는데 바로 해럴드 핀터가 베케트의 영향을 받았고 따라서 「고도」와 「덤 웨이터」는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서로 은밀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고 한다.
1969년 12월 初演
1969년 봄, 주간한국 주최로 自作詩 낭송회 「시인만세」 연출을 맡았는데, 이 행사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당시 金聖佑 국장이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初演 무대를 한국일보 소극장에서 올리기를 권유했다. 그래서 「임영웅의 고도」는 그 해 8월부터 연습에 들어 갔고, 공교롭게도 9월 연습 중에 베케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면서 1969년 12월17일 「고도」의 初演은 막을 올리기 일주일 전에 全공연 全회 매진 신기록을 수립했다.
이에 힘입어 林英雄은 1970년 극단 「산울림」을 창단했다. 창립단원들은 김용림, 사미자, 윤여정, 윤소정, 최선자, 손숙, 김성옥, 함현진, 김인태, 김무생 등이었다. 물론 창단 첫 회 공연도 당연히 「고도」였다. 김성옥, 함현진, 김무생, 김인태, 이재인이 무대에 섰다.
「고도」의 초연 때, 그는 잔인하리 만치 가혹하게 강행군을 했는데 어떤 때는 오전 11시에 시작하여 이튿날 새벽 6시까지 무려 19시간이나 연습을 시켜 배우들이 발바닥이 아파 목욕탕에서 타일을 밟을 수 조차 없었다고 한다. 이 때 그에게 붙여진 별명이 「사자」였다.
그의 연극 성공 비결은 고집스런 완벽주의다. 필자도 1980년대 초, 그의 밑에서 연출공부를 한 적이 있는데 그의 연습은 언제나 빈 틈이 없고 무대 연습은 가혹한 반복의 연속이었다.
그는 작품의 분석과 연구도 철저했다. 그는 극의 재미를 위해 특별히 양념 따위를 치는 것을 철저히 배제했다. 특히 섬세하고 치밀한 사실주의 연출은 여성 연극에 특히 돋보였다.
「위기의 여자」,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 「그 여자의 작은 행복론」 등은 그의 섬세하고 치밀한 사실주의 연극의 백미를 보여주고 있다.
필자가 왜 유독 「고도」에 집착하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사자」라는 애칭에 어울리지 않는 소년 같은 미소를 흘린다. 「백발의 소년」은 『연극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그리는 예술이죠. 「고도」는 현대인을 알몸으로 무대 위에 올려 놓고 낄낄거리고 좋아하는데 보고 난 후 생각하면 어리석고 바보 같은 인간이 자기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죠. 결국 인간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절망과 희망을 그리고 싶었습니다』고 했다.
『사람들은 흔히 베케트의 작품을 부조리극의 대명사처럼 얘길 하는데 「부조리극」이나 「反연극」, 「전위극」이란 말은 평론가나 저널리즘에서 분류한 용어일 뿐이지 리얼리즘 연극과 연출법이 특별히 따로 있는 게 아니다』고 그는 강조한다.
연출이란 흡사 작품 뒤에 숨어 있는 그 무엇을 찾아내는 「숨은 그림 찾기」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작품 그 자체가 바로 가장 좋은 참고서로, 자기 나름의 해석, 그 나름의 방법으로 그림을 그려 나간다. 그는 33년 동안 「고도」를 연출해 오면서 베케트의 작품에 단 한 자도 단 한 줄도 첨삭하지 않았다고 한다. 베케트의 작품은 「레고(Lego)」처럼 아주 정확히 잘 짜여 있기 때문에 하나만 빠져도 무너져 버린다고 한다. 한 때 두 시간 이상의 공연이 자칫 지루한 감이 들어 줄이는 작업을 시도했지만 줄이면 오히려 작품에 손상이 될 것 같아 한 자 한 줄도 삭제하지 않았다고 했다.
객관적으로 작가의 의도를 충실하게 따라 가려고 했고 효과나 음악은 방황하는 현대인을 알몸으로 무대에 올려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데 쓸데 없는 장식 같아서 (작가가 전혀 기술하지 않음) 배제했다고 한다.
효과 음악은 분위기와 정서를 강요할 수 있기 때문에 순수한 맛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여 아예 이 연극에서만큼은 사용하지 않고 있는데도 오히려 지난해 일본과 더블린 공연에서 「한국의 고도」는 가장 음악적이란 평을 받았다.
『이 작품에서 철학이나 사상을 찾지 말라』
베케트의 「고도」엔 이야기를 주고 받는 동안 유난히 「사이」, 「침묵」, 「긴 침묵」,「휴식」 이란 지문이 많이 나온다. 스트라빈스키와 오랜 친분을 맺어온 베케트는 평소 희곡을 악보처럼 쓸 수는 없을까 라는 고민을 해왔다고 한다. 「고도」가 특유의 內在律(내재율)을 보이고 있는 데에는 스트라빈스키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한다.
『「고도」엔 특별한 메시지가 있습니까』 라는 물음에 그는 『베케트의 충고를 읽어 보라』고 했다.
『이 작품에서 철학이나 사상을 찾을 생각은 아예 마시오. 보는 동안 즐겁게 웃으면 그만이오. 그러나 극장에서 실컷 웃고 난 뒤, 집에 돌아가서 심각하게 인생을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필자도 「임영웅의 고도」를 다섯 차례 보았지만 「고도(Godot)」의 실체를 알 수가 없다. 「고도」란 애초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사람도, 물체도, 신도 아니다. 동시에 전부다. 두 시간에 달하는 장광설의 연극을 보고 난 뒤라면 객석은 「고도」라는 존재에 대한 기다림으로 가득차게 된다. 아마 연출가 林英雄은 그 기다림의 힘으로 33년 동안 「고도」에 매달렸을지도 모른다.
「고도」의 미국 초연 때 연출자 알랠 슈나이더가 베케트에게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었더니 베케트가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고도」의 실체는 결국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아니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게 타당할 것 같다.
번역자인 吳澄子는 그의 아내이자 오랜 전우요, 소극장 산울림의 공동 대표다. 한국 사회에서 연극을 한다는 것이 일제시대의 독립운동만큼이나 어려운 시기인 1961년 5월22일 그들은 결혼, 지금까지 함께 연극을 해오고 있다. 그는 「고도」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다.
『「고도」의 언어에는 메시지나 교훈이 없다. 「고도」의 대사는 관객에게 무엇을 의미하거나 전달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인간의 조건과 삶의 풍경을 그냥 투사하는 「고도」의 대사들은 살아서 무대 위를 날아다니다가 우리의 주변 여기 저기에 떨어져, 묻혀 있던 우리의 슬픔과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고도」를 볼 때 바로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 철학적인 메시지나 교훈 따위는 아예 찾을 생각을 말고 바로 그 현장에 함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林英雄의 말대로 『연극은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이든 인간을 그리는 예술이다』 따라서 그의 연극에서는 과연 인간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를 보면 된다. 숨은 그림 찾기는 노력만 하면 다 찾을 수 있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다. 「고도」를 보노라면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날 때가 있다.
난해한 작품을 평이하게 해석
「임영웅의 고도」의 의미가 우리 연극사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벽처럼 두터운 식민지적 연극 관념을 과감히 革罷(혁파)하고 베케트의 작품을 통해 한국 연극에 새 지평을 열어 제친 것은 분명 그의 업적이다. 그러나 그는 과격한 진보주의자는 아니다. 온화한 보수속의 진보주의자다.
그는 30代 중반인 1969년 12월17일 「고도」를 초연한 이후, 古稀(고희)를 바라 보는 2002년까지 「고도」에 천착해 왔다. 연극 평론가이자 국문학자인 柳敏榮 교수는 베케트의 작품을 통해서 보여준 林英雄의 특징을 이렇게 적고 있다.
『첫째, 그는 매우 아카데믹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작품을 철저하게 연구하는 연출가이다. 그는 적어도 연출에 관한 한, 대강 대강이란 없다. 사실 베케트의 작품은 현상화하기에는 너무 난해하다. 극히 추상적이고 상징적이며 철학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林英雄의 손에 의해 극히 평이한 일상이 구체적 삶으로 관객에게 다가 서도록 만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상징세계의 顯在化」 라 부르고 싶은 것이다. 그는 적어도 작품에 자기의 인생을 投射한다. 이 말은 곧 작가가 그려 놓은 삶을 자신의 경험세계 속으로 끌어들여서 구체적 인생으로 표출해 놓는다는 이야기다. 이는 그가 연륜을 더해 갈수록 성숙한 작품으로 나타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하겠다』
「상징세계의 현재화」, 「임영웅의 고도」에 관한 한 이 표현은 的確하다.
무대가 오르면 어느 시골, 앙상한 마른 나무 한 그루만 버티고 서 있는 무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를 또 기다리는 떠돌이 사내들의 실없는 말과 몸짓이 한없이 반복된다. 「고도」 1막의 무대 설명은 「시골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2막은 「이튿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그것이 전부다.
제1막의 앞 부분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에스트라공:(힘 없이) 우린 꽁꽁 묶여 있는 게 아닐까? (사이) 안 그래?
블라디미르:(손을 들며) 쉿! 무슨 소리가 난다!>
그들은 우스꽝스럽게 굳은 자세로 귀를 기울인다.
『바람을 맞혀 버릴까』
이 짧은 대사에서 우리는 인간존재의 운명─어떤 보이지 않는 곳에 얽매여 있는─같은 걸 느끼게 된다.
그러나 결코 심각하게 얘기하지 않고 오히려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얘기하고 있는 데 이 작품의 묘미가 있다. 제2막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에스트라공:바람을 맞혀 버릴까? (사이) 이 쪽에서 바람을 맞혀 버리는 게 어떻겠냐고?
블라디미르:우릴 벌할 걸 (침묵-나무를 바라본다) 나무만이 살아 있구나>
정말 어림도 없는 소릴 에스트라공이 지껄인다. 왜? 아무리 기다려도 「고도」가 안 오니까. 그래서 오히려 이 쪽에서 「바람을 맞혀 버릴까?」 그런 생각을 한다. 바로 이 대목은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대목이다. 「임영웅의 고도」는 「웃음의 정서를 잘 살리고 있다」고 평한다.
양인자의 「그 겨울의 찻집」이란 노랫말 가운데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구절이 있다. 물론 「고도」의 대사와 노랫말의 한 구절을 대비시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지만 우리 정서엔 「눈물이 나오는 웃음」이 분명히 있다.
林英雄은 인터뷰 도중 필자가 베케트의 어떤 대사가 특히 맘에 드느냐고 했더니 『바람을 맞혀 버릴까?』라는 대사를 지적했다. 林英雄의 장기는 바로 이런 데서도 어김없이 발휘된다. 등장인물의 심리 파악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
그는 근엄해서 왠지 근접하기가 어렵지만 투박한 외모와는 달리, 매우 감성적이고 섬세하고 음악적이다. 1920年代 日帝 강점기에 국내는 물론 일본에까지 명성을 날린 재즈 뮤지션 林泰植씨가 그의 부친이고 지난 8월에 작고한 클라리넷 명연주자요, KBS 교향악단 지휘자였던 작곡가 林元植씨가 바로 숙부이다. 그의 음악적 자질은 태어나면서부터 그의 핏속에 흐르고 있는 셈이다.
林英雄이 KBS 라디오 교양반장 당시 필자는 PD로서 함께 일한 적이 있는데 이따금 회식 때 林元植 작곡의 「아무도 모르라고」를 내가 열창(?)하면 눈을 지그시 감고 감상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휘문高 시절 林英雄의 「英雄談」 하나가 생각난다. 그의 이름이 왜 英雄인지를 실감케 해주는 사건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6·25가 터져 부산 대청동 남일 초등학교 뒤 언덕배기에 네 칸짜리 판잣집을 임시교사로 사용하고 있던 처지였다.
『도대체 무슨 배짱이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가는데, 학예부장이던 제가 다짜고짜 교장 선생님께 찾아가서 그랬어요. 비록 피란지에 와서 고생하는 형편이지만 위축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학교 명예도 빛낼 겸 예술제를 한바탕 여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고 여쭸더니 교장선생님께서 전쟁 통에 예술제 개최할 재정이 어디 있으며 더군다나 판자 교실에서 예술제가 가당키나 한 얘기냐 하시면서 어이없어 하시더라구요』
어쨌든 소년 영웅은 당시 예술제에서 연극공연을 하기로 하고 기부금 모금에 나서 당시 白斗鎭 재무부 장관이 휘문 출신이란 걸 알고 그를 찾아가 담판을 벌였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林英雄군과 白斗鎭 재무 장관이 나눈 대화를 요약하면 대강 이런 얘기였다고 한다.
『선배님, 이번 연극공연을 위해 기부금을 좀 내주셔야겠습니다』
『얼마면 되겠나?』
『100만원만 내십시오!』
『이 사람아, 장관 월급이 얼만데 100만원이야』
『아이고 선배님, 장관이 어디 월급만 가지고 삽니까?』
『이 사람 정말 큰 일 낼 사람이로군』
白斗鎭 장관은 이 조숙한 간 큰 후배의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50만원을 내놓았다고 한다. 전쟁통의 피란지 부산에서 기부금을 걷어 연극을 하겠다는 돈키호테式 발상도 황당했지만, 자신이 제작 겸 주연을 맡아 남도극장에서 이틀간의 공연을 성공리에 마쳐 오늘날 연출가 林英雄의 토대를 구축했다는 의미에서도 그의 英雄談은 예사로운 사건은 아니었던 것같다.
휘문의 「三傑」, 林英雄 申東坡 方榮雄
휘문을 나온 대학 동창에게 「휘문의 3걸」 얘기는 들은 적이 있는데 단연 연출가 林英雄과 농구의 申東坡, 소설의 方榮雄(1980년대 필자와 한 동네에서 호형호제 하며 술과 문학과 인생을 논한 「糞禮記」의 작가)을 손꼽았던 기억이 난다.
「임영웅의 고도」는 1969년 12월17일 初演부터 시작해서 2002년 5월24일 극단 산울림 99회 공연에 이르기까지 20회의 공연을 거치는 동안 대개 3期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1969년 12월 「고도」의 초연은 개막 일주일 전부터 全회 입장권이 매진되는 신기록을 수립, 李海浪 리얼리즘의 충실한 계승자였던 林英雄의 새로운 변신이 이뤄진 시기다.
1953년 파리 초연 당시 全세계 연극계가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였을 때 林英雄 그 자신도 앞서 언급했듯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베케트의 「고도」를 접했지만 그렇게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다가 金聖佑(당시 한국일보 국장)의 권유로 1969년 12월 한국일보 소극장에서 초연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난 뒤부터 다시 「베케트의 고도」를 꼬박 사흘에 걸쳐 숙독하고 비로소 그의 술회처럼 「고도」가 어려운 적수, 그야말로 難敵(난적)임을 알아 차린다.
그때 그는 原典을 충실하게 해석하여 있는 그대로 현대인의 허상을 알몸으로 그대로 보여주기로 결심한다. 결국 한국의 초연이 어느 「고도」보다도 가장 원형적이었다는 게 판명되었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에야 그의 해석이 옳았다고 인정받은 것이다. 그가 광복 이후, 한국 新劇의 건전한 방향을 제시하고 지킨 李海浪의 정통적 연극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고정관념에 사로 잡혀 있지 않고 「온화한 보수 속의 새로운 진보정신」을 개척해 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뛰어난 시대감각을 지닌 연출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정통극을 연출하기 전에 이미 우리나라 최초의 뮤지컬인 「살짜기 옵서예」를, KBS 시절인 1980년대 초엔 라디오를 통해 음악가의 생애를 극화한 스테레오 드라마를 최초로 연출하기도 했다.
시대에 걸맞은 배우를 기용하는 연출자
1969년 「고도」 초연 이후, 극단 산울림을 창단, 그 첫 공연 작품으로 역시 「고도」를 올리게 되는데 초연 때의 김성옥, 함현진 등 배우들을 그대로 썼다. 그는 특히 함현진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1977년 불운하게 생을 마감한 미완의 배우 함현진 얘기만 나오면 그의 눈자위가 심상치 않게 변한다.
「고도」의 초연 이후, 극단 산울림 창단 첫 공연, 1973년, 1985년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 기념 서울 연극제 공연에서 「임영웅의 고도」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서울 국제연극제는 林英雄의 다섯 번째 「고도」인 셈이었다. 블라디미르에 전무송, 에스트라공에 주호성, 럭키에 김진동, 포조에 조명남, 소년役에 박지영이 출연했다. 블라디미르의 전무송은 헐렁헐렁하고 허술한 차림에 구부정한 자세, 이는 영락없는 떠돌이 부랑자의 전형적인 차림이었고 에스트라공의 주호성은 꼭 끼는 낡은 옷에 나비 넥타이, 짧은 바지, 커다란 구두, 이는 찰리 채플린을 찜쩌 먹을 폼으로, 꾸밈이 많은 현란한 어조로 순발력과 마임(mime:無言 익살 연기)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林英雄은 언제나 그 시기에 가장 알맞은 배우를 쓰는 연출가이다. 그 시기에 물이 오른 연기자를 발굴해서 배역을 준다. 전무송, 주호성은 이 시기에 연기대상을 받은, 익을 대로 익은 연기자다. 선후배간이면서도 선의의 라이벌 관계인 두 배우를 발탁하여 그들의 농익고 해학적인 연기를 맘껏 구사케 함으로써 관객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마침 이때엔 스탠포드大 교수이자 연극평론가이며 부조리극의 세계적 권위자인 마틴 에슬린 박사가 서울 국제연극 포럼에 참석차 와 있었다.
연극 공연은 9월6일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올려졌는데, 9월5일 서울을 떠날 예정이었던 에슬린 박사는 단국대 공연예술연구소 주최의 강연도 할 겸 2박3일 간의 체재를 연장하고 9월6일 「임영웅의 고도」, 이른바 동양판의 새로운 「고도」를 보고 갔다(이는 전적으로 呂石基 교수의 배려로 이루어짐).
9월7일 오전 드디어 부조리 연극의 세계적 권위자인 마틴 에슬린 박사의 강연이 시작되었다. 그는 『한국의 「고도」가 추상화된 고차원의 상징기법으로 연출돼 베케트의 작품에 잘 들어 맞았으며, 특히 어릿광대로 치밀하게 계산된 배우들의 무용적인 몸짓이 인상적이었고 한마디로 웃음 속에 전달되는 동양적 허무감과 고독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찬탄했다.
1988년 9월9일자 朝鮮日報는 그의 강연 요지를 이렇게 적고 있다.
美 스탠포드大 마슬린 교수의 격찬
<「고도」는 베케트가 2차대전 중 南佛 보쿨루스에 숨어살며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자신의 상황을 인간의 삶 속에 있는 보편적인 기다림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오지 않는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 그렇다면 그 기다림은 무엇일까? 1960년대 폴란드에서 이 작품이 공연됐을 때,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는 소련으로부터의 자유였다. 프랑스 지배下의 알제리 공연에서는 실현성이 희박한 「토지개혁」이 기다림이었다. 미국 산퀀틴 감옥에서 공연됐을 때, 죄수들에게 「고도」는 「석방」을 뜻했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그는 의문만 제기했을 뿐, 상황은 각자의 체험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시사했다.
산울림 무대는 부드러움과 무용적인 움직임, 그리고 고도로 양식화된 동작으로 베케트가 갖가지 상징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용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이러한 연출방식은 혹시 한국의 전통예술이 지닌 추상적인 표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매우 아름다운 이미지로 승화시킨 마지막 장면은 이 작품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작품 해석에서는 서양과 몇 가지 차이점을 보였다. 어쩌면 주제에서 베케트의 「비관론」은 극동 관객에게는 너무도 서양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서양의 기술적 발전을 추구하는 파우스트적 사고와 동양의 체념적 철학의 차이 점일 수도 있다. 베케트는 그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 그저 상황을 제시할 뿐이다. 그의 철학은 「유쾌한 허무주의」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장면의 처리도 東西의 차이를 보여준다. 미국과 영국의 무대에서 종교적 「구원」의 의미를 찾으려 한 게 많았다. 어떤 미국 공연에서는 무대 위의 나무 한 그루를 그리스도가 못박힌 십자가처럼 표현한 것도 있다.
한국무대에서 이 장면은 어떤 종결성을 의미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베케트는 종결성을 배제하려 했다. 왜냐하면 「끝없음」에 대한 개념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권위자 에슬린 박사의 격찬에 林英雄은 상당히 고무되었다. 이제 그의 야심은 동양의 「고도」, 이른바 「임영웅의 고도」의 세계화였다. 그는 초연 후 20년 만에 세계의 「고도」로 진출하기 위해 1989년 南佛 아비뇽 페스티벌에 참가하게 된다. 「임영웅의 고도」가 제2기의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되는 것이다.
1989년 7월24일부터 8월4일까지 프랑스 아비뇽의 아르모니 소극장에서 가진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공연 당시 어느 날 더블린 페스티벌 프로그램 디렉터가 찾아와 1990년 더블린 페스티벌에 「고도」를 가지고 참가하라는 권유와 함께 초청을 받게 된다. 그러나 선뜻 내키지 않았다.
베케트의 고향인 더블린에서 한국어로 된 「고도」를 올린다는 게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았다.
『베케트의 작품은 언어를 초월한다』
『한국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고 했더니 디렉터는 『베케트의 작품이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예스』라고 답변은 했지만 작가의 고향, 「호랑이 굴」에 들어가 공연한다는 게 솔직히 두려웠다고 했다. 드디어 1990년 10월1일 공연 첫날이 되었다. 30여 개국에서 참가한 더블린 연극제는 개막 당일 배우들이 분장을 하고 시가 행진을 하는 행사를 갖는데, 베케트의 고향에서 「동양의 고도」가 초연되는 데 대한 호기심에서인지 유난히 카메라 플래시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교민들도 교민이지만 대사관 측은 짐짓 한국 연극이 망신이나 당하지 않을까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다.
물론 영어로 설명된 안내 책자야 있었지만 대사는 한국어로 전달되었다.
공연에는 에스트라공에 송영창, 블라디미르에 정동환을 내세워 원숙한 육체언어를 선보였다. 비록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관객들에게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었다. 첫 공연의 막이 내리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관객들의 반응은 비교적 좋아보였지만 내심 불안하고 초조했다.
무대가 끝난 뒤 호텔에 돌아와서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호랑이 굴」에서의 공연에 대한 매스컴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하고 초조하여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새벽 4시 반 호텔을 빠져나와 길거리의 신문 가판대에서 조간 신문을 샀다.
全신문에 「동양의 고도」가 대서특필됐다. 특히 「The Irish Independent」紙는 『한국의 고도는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었다(Korean Godot worth the wait)』는 타이틀을 뽑아 격찬해 주었다.
구독률 70%에 달하는 「THE IRISH TIMES」紙는 1면에 가두 행진 사진과 함께 따로 5단으로 「한국의 고도」를 사진과 함께 「활발하고 감동적인 연기!」라고 대서특필해 주었다. 또한 「THE IRISH PRESS」는 「선명하게 전달된 연출력」이라는 타이틀을 달아주었고 그날 저녁 「EVENING PRESS」는 「언어의 장벽을 뛰어 넘은 고도」 라고 격찬해 주었다.
이 신문은 『베케트의 연극이 어떤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느꼈던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좋은 연극에는 배우의 대사 이상의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줄 것이다』라고 썼다.
日本 공연과 신문 칼럼
林英雄은 1990년 10월2일, 새벽의 감격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 연극의 번역자이자 오랜 동반자인 전우(그는 부인을 가끔 이렇게 부른다)인 吳澄子씨와 함께 전율과 흥분, 눈물어린 감격의 새벽을 영원히 잊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 이후 「임영웅의 고도」는 세계화의 확대(?)를 추진, 1994년 5월17일 폴란드 그단스크(바웬사의 고향) 비브제제 극장의 공연으로 동구권으로 진출하게 된다.
이제 남은 건 일본. 드디어 「임영웅의 고도」는 1999년 11월21일부터 23일까지 東京세션 스기나미홀에서 열린 사흘간의 공연에서 제3期의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된다. 초연 이후 실로 30년 만의 일이다.
마이니치 신문 1면 「여록」이란 칼럼엔 좀처럼 연극에 관한 글이 실리지 않는데 파격적으로 11월23일자 조간에 「고도」에 관한 기사가 이례적으로 실렸다.
<지난 30년 동안 재공연을 거듭하면서 갈고 닦은 것이니까 극단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어느 한 곳 틈새 바람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물론 배우들은 번역된 한국어로 말한다. 한국어의 울림이 이렇게 부드럽고 아름다운 것을 몰랐다>
<고도는 갇(GOD), 신이라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고도」를 되풀이해서 상연하는 사람들에게 고도는 무엇일까. 남북의 평화통일일지도 모르고, 정신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희구하고 있는 것만은 잘 알 수 있다. 그럼 일본에게 있어 고도는 무엇일까.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이 지금 있을까>
「고도」는 그의 운명
―「고도」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좀 난처한 질문을 받으면 우선 웃어 보인다.
『우선 마음 놓고 연극할 수 있는 그런 세상. 내 시대에는 안 올지 몰라도 후배들의 시대에는 꼭 왔으면 하는 바람, 그런 세상이 왔으면 뭐 더 바랄 게 있나요?』
그는 기본에 충실한 사람이다. 그의 연출은 교과서이자 유일한 참고서다. 1982년 대한민국 연극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쥬라기의 사람들」을 연출할 당시 필자는 그의 밑에서 기획 겸 조연출로 일한 경험이 있는데 그의 완벽주의는 배우들에게 잔인하리 만치 혹독했다. 그는 사전에 배우들의 움직임을 연출 노트에 도표로 꼼꼼하게 적어 놓고 배우의 動線(동선)은 물론 시선의 방향까지 정확히 지시한다.
연출이란 『자신이 받은 감동을 배우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배우와 全스태프들이 그 감동을 다시 관객에게 확산시키고 마침내 사회 전체를 그 감동을 통해 조금 더 살 만한 곳이 되게 만드는 것』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에머슨은 「무엇이 성공인가」라는 시에서 이렇게 얘길 한다.
<내가 한 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행복해지는 것/그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그의 철학과 일맥 상통하는 대목이다.
세 시간여 동안 그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숙부(林元植)의 삼우제를 막 끝낸 터라 피곤함이 역력해 보였고 어깨가 왼쪽으로 더욱 기울어져 보였다. 柳敏榮 교수의 말처럼 「걸어다니는 피사탑」이 더 기울어지기 전에 시급한 보수가 필요한 것 같았다.
『10년 전에 처음 베케트를 대했을 때, 그는 먼 곳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출하고 있는 지금 그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많은 것을 나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다. 처음 그를 대했을 때의 놀라움이나 당황은 지금의 나에게는 없다. 오직 나를 웃기고, 즐겁게 하고 한숨짓게 하고, 울린, 그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충실하게 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다. 「고도」의 말을 전하는 소년처럼 나는 「베케트」의 말을 전하는 사람이다』
33년 전 그가 처음 「고도」를 연출하면서 프로그램에 쓴 「연출자의 말」이다.
그가 언제까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고도」를 무대에 올릴지 알 수는 없다. 그의 연극 인생에서 「고도」는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그의 초심은 변하지 않으리라고 본다.
그가 연극을 하는 한, 틀림없이 「고도」와 다시 만날 것이다. 아니 어쩌면 林英雄과 「고도」의 만남은 운명적인 것이 아닐까 한다. 그의 말대로 연극은 그의 팔자요, 운명이니까 말이다.●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란 작품이 연극 연출가 林英雄(임영웅·66)에 의해 1969년부터 2002년 7월까지, 두 세기에 걸쳐 정기공연 14회, 해외공연 4회와 페스티벌에 참가한 후 귀국공연 2회 등 무려 20여 회나 무대에 올려졌다.
연극인뿐만이 아니라 연극에 관심 있는 주변 사람들조차도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林英雄을 빼놓고 얘기는커녕 상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그냥 「임영웅의 고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연극평론가 이태주씨는 『이 작품의 공연은 연출가 임영웅의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이 되면서 동시에 그가 연극에 대해서 품고 있는 헌신과 양심의 상징적 표현이 되었다』고 했다.
林英雄이 그토록 「고도」에 깊이 천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병적인 집착같기만 한 「고도」의 매력은 과연 무엇일까?
1953년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파리의 바빌론 소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때 全세계 연극계는 충격적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리얼리즘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특히 충격적 사건이었다. 연일 세계의 연극계는 찬반 양론의 열띤 논쟁을 벌였다.
1950년대 말, 朝鮮日報 문화부 기자였던 林英雄은 도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이렇게 큰 파문이 이는 것일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해 이 작품(당시 일어판)을 읽었는데 그때의 감상은 「좀 어렵다는 느낌과 함께 별로였다」는 기억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곧 잊어 버렸다고 했다. 그러다가 1969년 카페 떼아뜨르 개관 기념 공연으로 해럴드 핀터의 「덤 웨이터」를 연출, 김성옥, 함현진 두 배우를 출연시켜 주목을 끌었는데 바로 해럴드 핀터가 베케트의 영향을 받았고 따라서 「고도」와 「덤 웨이터」는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서로 은밀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고 한다.
1969년 12월 初演 1969년 봄, 주간한국 주최로 自作詩 낭송회 「시인만세」 연출을 맡았는데, 이 행사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당시 金聖佑 국장이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初演 무대를 한국일보 소극장에서 올리기를 권유했다. 그래서 「임영웅의 고도」는 그 해 8월부터 연습에 들어 갔고, 공교롭게도 9월 연습 중에 베케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면서 1969년 12월17일 「고도」의 初演은 막을 올리기 일주일 전에 全공연 全회 매진 신기록을 수립했다.
이에 힘입어 林英雄은 1970년 극단 「산울림」을 창단했다. 창립단원들은 김용림, 사미자, 윤여정, 윤소정, 최선자, 손숙, 김성옥, 함현진, 김인태, 김무생 등이었다. 물론 창단 첫 회 공연도 당연히 「고도」였다. 김성옥, 함현진, 김무생, 김인태, 이재인이 무대에 섰다.
「고도」의 초연 때, 그는 잔인하리 만치 가혹하게 강행군을 했는데 어떤 때는 오전 11시에 시작하여 이튿날 새벽 6시까지 무려 19시간이나 연습을 시켜 배우들이 발바닥이 아파 목욕탕에서 타일을 밟을 수 조차 없었다고 한다. 이 때 그에게 붙여진 별명이 「사자」였다.
그의 연극 성공 비결은 고집스런 완벽주의다. 필자도 1980년대 초, 그의 밑에서 연출공부를 한 적이 있는데 그의 연습은 언제나 빈 틈이 없고 무대 연습은 가혹한 반복의 연속이었다.
그는 작품의 분석과 연구도 철저했다. 그는 극의 재미를 위해 특별히 양념 따위를 치는 것을 철저히 배제했다. 특히 섬세하고 치밀한 사실주의 연출은 여성 연극에 특히 돋보였다.
「위기의 여자」,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 「그 여자의 작은 행복론」 등은 그의 섬세하고 치밀한 사실주의 연극의 백미를 보여주고 있다.
필자가 왜 유독 「고도」에 집착하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사자」라는 애칭에 어울리지 않는 소년 같은 미소를 흘린다. 「백발의 소년」은 『연극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그리는 예술이죠. 「고도」는 현대인을 알몸으로 무대 위에 올려 놓고 낄낄거리고 좋아하는데 보고 난 후 생각하면 어리석고 바보 같은 인간이 자기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죠. 결국 인간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절망과 희망을 그리고 싶었습니다』고 했다.
『사람들은 흔히 베케트의 작품을 부조리극의 대명사처럼 얘길 하는데 「부조리극」이나 「反연극」, 「전위극」이란 말은 평론가나 저널리즘에서 분류한 용어일 뿐이지 리얼리즘 연극과 연출법이 특별히 따로 있는 게 아니다』고 그는 강조한다.
연출이란 흡사 작품 뒤에 숨어 있는 그 무엇을 찾아내는 「숨은 그림 찾기」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작품 그 자체가 바로 가장 좋은 참고서로, 자기 나름의 해석, 그 나름의 방법으로 그림을 그려 나간다. 그는 33년 동안 「고도」를 연출해 오면서 베케트의 작품에 단 한 자도 단 한 줄도 첨삭하지 않았다고 한다. 베케트의 작품은 「레고(Lego)」처럼 아주 정확히 잘 짜여 있기 때문에 하나만 빠져도 무너져 버린다고 한다. 한 때 두 시간 이상의 공연이 자칫 지루한 감이 들어 줄이는 작업을 시도했지만 줄이면 오히려 작품에 손상이 될 것 같아 한 자 한 줄도 삭제하지 않았다고 했다.
객관적으로 작가의 의도를 충실하게 따라 가려고 했고 효과나 음악은 방황하는 현대인을 알몸으로 무대에 올려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데 쓸데 없는 장식 같아서 (작가가 전혀 기술하지 않음) 배제했다고 한다.
효과 음악은 분위기와 정서를 강요할 수 있기 때문에 순수한 맛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여 아예 이 연극에서만큼은 사용하지 않고 있는데도 오히려 지난해 일본과 더블린 공연에서 「한국의 고도」는 가장 음악적이란 평을 받았다.
『이 작품에서 철학이나 사상을 찾지 말라』 베케트의 「고도」엔 이야기를 주고 받는 동안 유난히 「사이」, 「침묵」, 「긴 침묵」,「휴식」 이란 지문이 많이 나온다. 스트라빈스키와 오랜 친분을 맺어온 베케트는 평소 희곡을 악보처럼 쓸 수는 없을까 라는 고민을 해왔다고 한다. 「고도」가 특유의 內在律(내재율)을 보이고 있는 데에는 스트라빈스키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한다.
『「고도」엔 특별한 메시지가 있습니까』 라는 물음에 그는 『베케트의 충고를 읽어 보라』고 했다.
『이 작품에서 철학이나 사상을 찾을 생각은 아예 마시오. 보는 동안 즐겁게 웃으면 그만이오. 그러나 극장에서 실컷 웃고 난 뒤, 집에 돌아가서 심각하게 인생을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필자도 「임영웅의 고도」를 다섯 차례 보았지만 「고도(Godot)」의 실체를 알 수가 없다. 「고도」란 애초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사람도, 물체도, 신도 아니다. 동시에 전부다. 두 시간에 달하는 장광설의 연극을 보고 난 뒤라면 객석은 「고도」라는 존재에 대한 기다림으로 가득차게 된다. 아마 연출가 林英雄은 그 기다림의 힘으로 33년 동안 「고도」에 매달렸을지도 모른다.
「고도」의 미국 초연 때 연출자 알랠 슈나이더가 베케트에게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었더니 베케트가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고도」의 실체는 결국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아니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게 타당할 것 같다.
번역자인 吳澄子는 그의 아내이자 오랜 전우요, 소극장 산울림의 공동 대표다. 한국 사회에서 연극을 한다는 것이 일제시대의 독립운동만큼이나 어려운 시기인 1961년 5월22일 그들은 결혼, 지금까지 함께 연극을 해오고 있다. 그는 「고도」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다.
『「고도」의 언어에는 메시지나 교훈이 없다. 「고도」의 대사는 관객에게 무엇을 의미하거나 전달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인간의 조건과 삶의 풍경을 그냥 투사하는 「고도」의 대사들은 살아서 무대 위를 날아다니다가 우리의 주변 여기 저기에 떨어져, 묻혀 있던 우리의 슬픔과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고도」를 볼 때 바로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 철학적인 메시지나 교훈 따위는 아예 찾을 생각을 말고 바로 그 현장에 함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林英雄의 말대로 『연극은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이든 인간을 그리는 예술이다』 따라서 그의 연극에서는 과연 인간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를 보면 된다. 숨은 그림 찾기는 노력만 하면 다 찾을 수 있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다. 「고도」를 보노라면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날 때가 있다.
난해한 작품을 평이하게 해석 「임영웅의 고도」의 의미가 우리 연극사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벽처럼 두터운 식민지적 연극 관념을 과감히 革罷(혁파)하고 베케트의 작품을 통해 한국 연극에 새 지평을 열어 제친 것은 분명 그의 업적이다. 그러나 그는 과격한 진보주의자는 아니다. 온화한 보수속의 진보주의자다.
그는 30代 중반인 1969년 12월17일 「고도」를 초연한 이후, 古稀(고희)를 바라 보는 2002년까지 「고도」에 천착해 왔다. 연극 평론가이자 국문학자인 柳敏榮 교수는 베케트의 작품을 통해서 보여준 林英雄의 특징을 이렇게 적고 있다.
『첫째, 그는 매우 아카데믹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작품을 철저하게 연구하는 연출가이다. 그는 적어도 연출에 관한 한, 대강 대강이란 없다. 사실 베케트의 작품은 현상화하기에는 너무 난해하다. 극히 추상적이고 상징적이며 철학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林英雄의 손에 의해 극히 평이한 일상이 구체적 삶으로 관객에게 다가 서도록 만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상징세계의 顯在化」 라 부르고 싶은 것이다. 그는 적어도 작품에 자기의 인생을 投射한다. 이 말은 곧 작가가 그려 놓은 삶을 자신의 경험세계 속으로 끌어들여서 구체적 인생으로 표출해 놓는다는 이야기다. 이는 그가 연륜을 더해 갈수록 성숙한 작품으로 나타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하겠다』
「상징세계의 현재화」, 「임영웅의 고도」에 관한 한 이 표현은 的確하다.
무대가 오르면 어느 시골, 앙상한 마른 나무 한 그루만 버티고 서 있는 무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를 또 기다리는 떠돌이 사내들의 실없는 말과 몸짓이 한없이 반복된다. 「고도」 1막의 무대 설명은 「시골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2막은 「이튿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그것이 전부다.
제1막의 앞 부분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에스트라공:(힘 없이) 우린 꽁꽁 묶여 있는 게 아닐까? (사이) 안 그래?
블라디미르:(손을 들며) 쉿! 무슨 소리가 난다!>
그들은 우스꽝스럽게 굳은 자세로 귀를 기울인다.
『바람을 맞혀 버릴까』 이 짧은 대사에서 우리는 인간존재의 운명─어떤 보이지 않는 곳에 얽매여 있는─같은 걸 느끼게 된다.
그러나 결코 심각하게 얘기하지 않고 오히려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얘기하고 있는 데 이 작품의 묘미가 있다. 제2막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에스트라공:바람을 맞혀 버릴까? (사이) 이 쪽에서 바람을 맞혀 버리는 게 어떻겠냐고?
블라디미르:우릴 벌할 걸 (침묵-나무를 바라본다) 나무만이 살아 있구나>
정말 어림도 없는 소릴 에스트라공이 지껄인다. 왜? 아무리 기다려도 「고도」가 안 오니까. 그래서 오히려 이 쪽에서 「바람을 맞혀 버릴까?」 그런 생각을 한다. 바로 이 대목은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대목이다. 「임영웅의 고도」는 「웃음의 정서를 잘 살리고 있다」고 평한다.
양인자의 「그 겨울의 찻집」이란 노랫말 가운데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구절이 있다. 물론 「고도」의 대사와 노랫말의 한 구절을 대비시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지만 우리 정서엔 「눈물이 나오는 웃음」이 분명히 있다.
林英雄은 인터뷰 도중 필자가 베케트의 어떤 대사가 특히 맘에 드느냐고 했더니 『바람을 맞혀 버릴까?』라는 대사를 지적했다. 林英雄의 장기는 바로 이런 데서도 어김없이 발휘된다. 등장인물의 심리 파악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
그는 근엄해서 왠지 근접하기가 어렵지만 투박한 외모와는 달리, 매우 감성적이고 섬세하고 음악적이다. 1920年代 日帝 강점기에 국내는 물론 일본에까지 명성을 날린 재즈 뮤지션 林泰植씨가 그의 부친이고 지난 8월에 작고한 클라리넷 명연주자요, KBS 교향악단 지휘자였던 작곡가 林元植씨가 바로 숙부이다. 그의 음악적 자질은 태어나면서부터 그의 핏속에 흐르고 있는 셈이다.
林英雄이 KBS 라디오 교양반장 당시 필자는 PD로서 함께 일한 적이 있는데 이따금 회식 때 林元植 작곡의 「아무도 모르라고」를 내가 열창(?)하면 눈을 지그시 감고 감상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휘문高 시절 林英雄의 「英雄談」 하나가 생각난다. 그의 이름이 왜 英雄인지를 실감케 해주는 사건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6·25가 터져 부산 대청동 남일 초등학교 뒤 언덕배기에 네 칸짜리 판잣집을 임시교사로 사용하고 있던 처지였다.
『도대체 무슨 배짱이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가는데, 학예부장이던 제가 다짜고짜 교장 선생님께 찾아가서 그랬어요. 비록 피란지에 와서 고생하는 형편이지만 위축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학교 명예도 빛낼 겸 예술제를 한바탕 여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고 여쭸더니 교장선생님께서 전쟁 통에 예술제 개최할 재정이 어디 있으며 더군다나 판자 교실에서 예술제가 가당키나 한 얘기냐 하시면서 어이없어 하시더라구요』
어쨌든 소년 영웅은 당시 예술제에서 연극공연을 하기로 하고 기부금 모금에 나서 당시 白斗鎭 재무부 장관이 휘문 출신이란 걸 알고 그를 찾아가 담판을 벌였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林英雄군과 白斗鎭 재무 장관이 나눈 대화를 요약하면 대강 이런 얘기였다고 한다.
『선배님, 이번 연극공연을 위해 기부금을 좀 내주셔야겠습니다』
『얼마면 되겠나?』
『100만원만 내십시오!』
『이 사람아, 장관 월급이 얼만데 100만원이야』
『아이고 선배님, 장관이 어디 월급만 가지고 삽니까?』
『이 사람 정말 큰 일 낼 사람이로군』
白斗鎭 장관은 이 조숙한 간 큰 후배의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50만원을 내놓았다고 한다. 전쟁통의 피란지 부산에서 기부금을 걷어 연극을 하겠다는 돈키호테式 발상도 황당했지만, 자신이 제작 겸 주연을 맡아 남도극장에서 이틀간의 공연을 성공리에 마쳐 오늘날 연출가 林英雄의 토대를 구축했다는 의미에서도 그의 英雄談은 예사로운 사건은 아니었던 것같다.
휘문의 「三傑」, 林英雄 申東坡 方榮雄 휘문을 나온 대학 동창에게 「휘문의 3걸」 얘기는 들은 적이 있는데 단연 연출가 林英雄과 농구의 申東坡, 소설의 方榮雄(1980년대 필자와 한 동네에서 호형호제 하며 술과 문학과 인생을 논한 「糞禮記」의 작가)을 손꼽았던 기억이 난다.
「임영웅의 고도」는 1969년 12월17일 初演부터 시작해서 2002년 5월24일 극단 산울림 99회 공연에 이르기까지 20회의 공연을 거치는 동안 대개 3期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1969년 12월 「고도」의 초연은 개막 일주일 전부터 全회 입장권이 매진되는 신기록을 수립, 李海浪 리얼리즘의 충실한 계승자였던 林英雄의 새로운 변신이 이뤄진 시기다.
1953년 파리 초연 당시 全세계 연극계가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였을 때 林英雄 그 자신도 앞서 언급했듯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베케트의 「고도」를 접했지만 그렇게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다가 金聖佑(당시 한국일보 국장)의 권유로 1969년 12월 한국일보 소극장에서 초연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난 뒤부터 다시 「베케트의 고도」를 꼬박 사흘에 걸쳐 숙독하고 비로소 그의 술회처럼 「고도」가 어려운 적수, 그야말로 難敵(난적)임을 알아 차린다.
그때 그는 原典을 충실하게 해석하여 있는 그대로 현대인의 허상을 알몸으로 그대로 보여주기로 결심한다. 결국 한국의 초연이 어느 「고도」보다도 가장 원형적이었다는 게 판명되었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에야 그의 해석이 옳았다고 인정받은 것이다. 그가 광복 이후, 한국 新劇의 건전한 방향을 제시하고 지킨 李海浪의 정통적 연극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고정관념에 사로 잡혀 있지 않고 「온화한 보수 속의 새로운 진보정신」을 개척해 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뛰어난 시대감각을 지닌 연출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정통극을 연출하기 전에 이미 우리나라 최초의 뮤지컬인 「살짜기 옵서예」를, KBS 시절인 1980년대 초엔 라디오를 통해 음악가의 생애를 극화한 스테레오 드라마를 최초로 연출하기도 했다.
시대에 걸맞은 배우를 기용하는 연출자 1969년 「고도」 초연 이후, 극단 산울림을 창단, 그 첫 공연 작품으로 역시 「고도」를 올리게 되는데 초연 때의 김성옥, 함현진 등 배우들을 그대로 썼다. 그는 특히 함현진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1977년 불운하게 생을 마감한 미완의 배우 함현진 얘기만 나오면 그의 눈자위가 심상치 않게 변한다.
「고도」의 초연 이후, 극단 산울림 창단 첫 공연, 1973년, 1985년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 기념 서울 연극제 공연에서 「임영웅의 고도」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서울 국제연극제는 林英雄의 다섯 번째 「고도」인 셈이었다. 블라디미르에 전무송, 에스트라공에 주호성, 럭키에 김진동, 포조에 조명남, 소년役에 박지영이 출연했다. 블라디미르의 전무송은 헐렁헐렁하고 허술한 차림에 구부정한 자세, 이는 영락없는 떠돌이 부랑자의 전형적인 차림이었고 에스트라공의 주호성은 꼭 끼는 낡은 옷에 나비 넥타이, 짧은 바지, 커다란 구두, 이는 찰리 채플린을 찜쩌 먹을 폼으로, 꾸밈이 많은 현란한 어조로 순발력과 마임(mime:無言 익살 연기)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林英雄은 언제나 그 시기에 가장 알맞은 배우를 쓰는 연출가이다. 그 시기에 물이 오른 연기자를 발굴해서 배역을 준다. 전무송, 주호성은 이 시기에 연기대상을 받은, 익을 대로 익은 연기자다. 선후배간이면서도 선의의 라이벌 관계인 두 배우를 발탁하여 그들의 농익고 해학적인 연기를 맘껏 구사케 함으로써 관객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마침 이때엔 스탠포드大 교수이자 연극평론가이며 부조리극의 세계적 권위자인 마틴 에슬린 박사가 서울 국제연극 포럼에 참석차 와 있었다.
연극 공연은 9월6일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올려졌는데, 9월5일 서울을 떠날 예정이었던 에슬린 박사는 단국대 공연예술연구소 주최의 강연도 할 겸 2박3일 간의 체재를 연장하고 9월6일 「임영웅의 고도」, 이른바 동양판의 새로운 「고도」를 보고 갔다(이는 전적으로 呂石基 교수의 배려로 이루어짐).
9월7일 오전 드디어 부조리 연극의 세계적 권위자인 마틴 에슬린 박사의 강연이 시작되었다. 그는 『한국의 「고도」가 추상화된 고차원의 상징기법으로 연출돼 베케트의 작품에 잘 들어 맞았으며, 특히 어릿광대로 치밀하게 계산된 배우들의 무용적인 몸짓이 인상적이었고 한마디로 웃음 속에 전달되는 동양적 허무감과 고독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찬탄했다.
1988년 9월9일자 朝鮮日報는 그의 강연 요지를 이렇게 적고 있다.
美 스탠포드大 마슬린 교수의 격찬 <「고도」는 베케트가 2차대전 중 南佛 보쿨루스에 숨어살며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자신의 상황을 인간의 삶 속에 있는 보편적인 기다림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오지 않는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 그렇다면 그 기다림은 무엇일까? 1960년대 폴란드에서 이 작품이 공연됐을 때,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는 소련으로부터의 자유였다. 프랑스 지배下의 알제리 공연에서는 실현성이 희박한 「토지개혁」이 기다림이었다. 미국 산퀀틴 감옥에서 공연됐을 때, 죄수들에게 「고도」는 「석방」을 뜻했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그는 의문만 제기했을 뿐, 상황은 각자의 체험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시사했다.
산울림 무대는 부드러움과 무용적인 움직임, 그리고 고도로 양식화된 동작으로 베케트가 갖가지 상징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용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이러한 연출방식은 혹시 한국의 전통예술이 지닌 추상적인 표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매우 아름다운 이미지로 승화시킨 마지막 장면은 이 작품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작품 해석에서는 서양과 몇 가지 차이점을 보였다. 어쩌면 주제에서 베케트의 「비관론」은 극동 관객에게는 너무도 서양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서양의 기술적 발전을 추구하는 파우스트적 사고와 동양의 체념적 철학의 차이 점일 수도 있다. 베케트는 그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 그저 상황을 제시할 뿐이다. 그의 철학은 「유쾌한 허무주의」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장면의 처리도 東西의 차이를 보여준다. 미국과 영국의 무대에서 종교적 「구원」의 의미를 찾으려 한 게 많았다. 어떤 미국 공연에서는 무대 위의 나무 한 그루를 그리스도가 못박힌 십자가처럼 표현한 것도 있다.
한국무대에서 이 장면은 어떤 종결성을 의미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베케트는 종결성을 배제하려 했다. 왜냐하면 「끝없음」에 대한 개념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권위자 에슬린 박사의 격찬에 林英雄은 상당히 고무되었다. 이제 그의 야심은 동양의 「고도」, 이른바 「임영웅의 고도」의 세계화였다. 그는 초연 후 20년 만에 세계의 「고도」로 진출하기 위해 1989년 南佛 아비뇽 페스티벌에 참가하게 된다. 「임영웅의 고도」가 제2기의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되는 것이다.
1989년 7월24일부터 8월4일까지 프랑스 아비뇽의 아르모니 소극장에서 가진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공연 당시 어느 날 더블린 페스티벌 프로그램 디렉터가 찾아와 1990년 더블린 페스티벌에 「고도」를 가지고 참가하라는 권유와 함께 초청을 받게 된다. 그러나 선뜻 내키지 않았다.
베케트의 고향인 더블린에서 한국어로 된 「고도」를 올린다는 게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았다.
『베케트의 작품은 언어를 초월한다』 『한국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고 했더니 디렉터는 『베케트의 작품이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예스』라고 답변은 했지만 작가의 고향, 「호랑이 굴」에 들어가 공연한다는 게 솔직히 두려웠다고 했다. 드디어 1990년 10월1일 공연 첫날이 되었다. 30여 개국에서 참가한 더블린 연극제는 개막 당일 배우들이 분장을 하고 시가 행진을 하는 행사를 갖는데, 베케트의 고향에서 「동양의 고도」가 초연되는 데 대한 호기심에서인지 유난히 카메라 플래시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교민들도 교민이지만 대사관 측은 짐짓 한국 연극이 망신이나 당하지 않을까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다.
물론 영어로 설명된 안내 책자야 있었지만 대사는 한국어로 전달되었다.
공연에는 에스트라공에 송영창, 블라디미르에 정동환을 내세워 원숙한 육체언어를 선보였다. 비록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관객들에게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었다. 첫 공연의 막이 내리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관객들의 반응은 비교적 좋아보였지만 내심 불안하고 초조했다.
무대가 끝난 뒤 호텔에 돌아와서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호랑이 굴」에서의 공연에 대한 매스컴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하고 초조하여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새벽 4시 반 호텔을 빠져나와 길거리의 신문 가판대에서 조간 신문을 샀다.
全신문에 「동양의 고도」가 대서특필됐다. 특히 「The Irish Independent」紙는 『한국의 고도는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었다(Korean Godot worth the wait)』는 타이틀을 뽑아 격찬해 주었다.
구독률 70%에 달하는 「THE IRISH TIMES」紙는 1면에 가두 행진 사진과 함께 따로 5단으로 「한국의 고도」를 사진과 함께 「활발하고 감동적인 연기!」라고 대서특필해 주었다. 또한 「THE IRISH PRESS」는 「선명하게 전달된 연출력」이라는 타이틀을 달아주었고 그날 저녁 「EVENING PRESS」는 「언어의 장벽을 뛰어 넘은 고도」 라고 격찬해 주었다.
이 신문은 『베케트의 연극이 어떤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느꼈던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좋은 연극에는 배우의 대사 이상의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줄 것이다』라고 썼다.
日本 공연과 신문 칼럼 林英雄은 1990년 10월2일, 새벽의 감격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 연극의 번역자이자 오랜 동반자인 전우(그는 부인을 가끔 이렇게 부른다)인 吳澄子씨와 함께 전율과 흥분, 눈물어린 감격의 새벽을 영원히 잊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 이후 「임영웅의 고도」는 세계화의 확대(?)를 추진, 1994년 5월17일 폴란드 그단스크(바웬사의 고향) 비브제제 극장의 공연으로 동구권으로 진출하게 된다.
이제 남은 건 일본. 드디어 「임영웅의 고도」는 1999년 11월21일부터 23일까지 東京세션 스기나미홀에서 열린 사흘간의 공연에서 제3期의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된다. 초연 이후 실로 30년 만의 일이다.
마이니치 신문 1면 「여록」이란 칼럼엔 좀처럼 연극에 관한 글이 실리지 않는데 파격적으로 11월23일자 조간에 「고도」에 관한 기사가 이례적으로 실렸다.
<지난 30년 동안 재공연을 거듭하면서 갈고 닦은 것이니까 극단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어느 한 곳 틈새 바람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물론 배우들은 번역된 한국어로 말한다. 한국어의 울림이 이렇게 부드럽고 아름다운 것을 몰랐다>
<고도는 갇(GOD), 신이라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고도」를 되풀이해서 상연하는 사람들에게 고도는 무엇일까. 남북의 평화통일일지도 모르고, 정신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희구하고 있는 것만은 잘 알 수 있다. 그럼 일본에게 있어 고도는 무엇일까.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이 지금 있을까>
「고도」는 그의 운명 ―「고도」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좀 난처한 질문을 받으면 우선 웃어 보인다.
『우선 마음 놓고 연극할 수 있는 그런 세상. 내 시대에는 안 올지 몰라도 후배들의 시대에는 꼭 왔으면 하는 바람, 그런 세상이 왔으면 뭐 더 바랄 게 있나요?』
그는 기본에 충실한 사람이다. 그의 연출은 교과서이자 유일한 참고서다. 1982년 대한민국 연극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쥬라기의 사람들」을 연출할 당시 필자는 그의 밑에서 기획 겸 조연출로 일한 경험이 있는데 그의 완벽주의는 배우들에게 잔인하리 만치 혹독했다. 그는 사전에 배우들의 움직임을 연출 노트에 도표로 꼼꼼하게 적어 놓고 배우의 動線(동선)은 물론 시선의 방향까지 정확히 지시한다.
연출이란 『자신이 받은 감동을 배우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배우와 全스태프들이 그 감동을 다시 관객에게 확산시키고 마침내 사회 전체를 그 감동을 통해 조금 더 살 만한 곳이 되게 만드는 것』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에머슨은 「무엇이 성공인가」라는 시에서 이렇게 얘길 한다.
<내가 한 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행복해지는 것/그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그의 철학과 일맥 상통하는 대목이다.
세 시간여 동안 그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숙부(林元植)의 삼우제를 막 끝낸 터라 피곤함이 역력해 보였고 어깨가 왼쪽으로 더욱 기울어져 보였다. 柳敏榮 교수의 말처럼 「걸어다니는 피사탑」이 더 기울어지기 전에 시급한 보수가 필요한 것 같았다.
『10년 전에 처음 베케트를 대했을 때, 그는 먼 곳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출하고 있는 지금 그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많은 것을 나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다. 처음 그를 대했을 때의 놀라움이나 당황은 지금의 나에게는 없다. 오직 나를 웃기고, 즐겁게 하고 한숨짓게 하고, 울린, 그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충실하게 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다. 「고도」의 말을 전하는 소년처럼 나는 「베케트」의 말을 전하는 사람이다』
33년 전 그가 처음 「고도」를 연출하면서 프로그램에 쓴 「연출자의 말」이다.
그가 언제까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고도」를 무대에 올릴지 알 수는 없다. 그의 연극 인생에서 「고도」는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그의 초심은 변하지 않으리라고 본다.
그가 연극을 하는 한, 틀림없이 「고도」와 다시 만날 것이다. 아니 어쩌면 林英雄과 「고도」의 만남은 운명적인 것이 아닐까 한다. 그의 말대로 연극은 그의 팔자요, 운명이니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