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의 학부모가 된 김현희씨가 말하는 ‘나의 남편, 나의 아이들, 나의 생활’
⊙ “성형수술한 적 없고 남편이 없었다면 이 고통 견디기 어려웠을 것”
⊙ 알아보는 사람은 별로 없고 억양 때문에 연변에서 온 사람인 줄 알아
⊙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것
⊙ 학부모 입장으로 학교를 찾아갈 수 없는 처지라 아이들에게 늘 미안
⊙ 20대에 결혼했다면 외모를 보고 남편감을 골랐겠지만…
⊙ “성형수술한 적 없고 남편이 없었다면 이 고통 견디기 어려웠을 것”
⊙ 알아보는 사람은 별로 없고 억양 때문에 연변에서 온 사람인 줄 알아
⊙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것
⊙ 학부모 입장으로 학교를 찾아갈 수 없는 처지라 아이들에게 늘 미안
⊙ 20대에 결혼했다면 외모를 보고 남편감을 골랐겠지만…
- 지난 4월 월간조선사를 찾은 김현희씨.
지난 4월 23일 오후 月刊朝鮮 사무실로 손님이 찾아왔다. 金賢姬(김현희)씨. 그녀는 1997년 결혼과 함께 世人(세인)의 관심에서 사라졌다가, 월간조선 2월호와의 인터뷰, 지난 3월 부산에서 일본인 납북 피해자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 씨의 아들 이즈카 고이치로(飯塚耕一郞) 씨와의 공개 만남 등으로 다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라며 한 남자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평범한 삶을 살고자 했지만,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김현희씨의 얼굴은 사진으로 봤던 과거의 모습과 비교해 많이 야위어 있었다.
알려진 대로 그녀는 둘째 아이가 돌을 막 지난 무렵이었던 2003년 11월, MBC 취재진에 자신의 집이 노출된 다음날 새벽 그곳을 떠나 지금까지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좌파정권하에서 그녀는 “‘KAL858기 폭파 사건’은 조작됐고, 김정일의 공작지시는 없었다”는 대답을 직간접적으로 강요받았다. 그녀는 그 배후 중의 하나가 좌파정권하의 국정원이었다고 주장하며 국정원의 공식사과와 책임자 문책을 요구하고 있다. 국정원이 자신을 가짜로 모는 프로그램을 제작 중인 MBC 출연을 요구했고, 국정원 간부로부터는 제3국으로 이민을 떠나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좌파정권하의 ‘싸늘했던 시대’가 ‘평범한 여자’로 살아가고 싶었던 그녀의 바람을 철저하게 짓밟은 것이다. ‘살벌한 시대’는 그녀를 투사로 만들었고, 살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더 강해져야 했다고 한다. 그 결과가 그녀에게 안겨준 것은 ‘야윈 얼굴’이었다.
좌파정권에 맞선 당찬 여인
국정원 직원이었던 남편 정모씨는 필자에게 이런 말을 자주했다.
“김(정씨는 다른 사람 앞에서는 부인 김현희씨를 ‘김’이라고 호칭했다)이 강한 정신력 없는 일반인이었으면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을 겁니다.”
그런 고통의 시절이 마무리되어 간다고 느낀 것일까. 그녀는 지난해 연말 필자에게 크리스마드 카드를 보내 왔다.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힘들고 보람 있는 한 해였습니다. 어려운 저에게 늘 격려와 힘이 되어 주신 은혜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
승용차에서 내린 김현희씨는 “사무실에 기자들이 많은가”부터 물었다. 많은 사람의 시선을 동시에 받는다는 게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그녀는 지난 3월 부산에서 있었던 일본인 납북자 가족들과의 만남 후 열흘 가까이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필자의 “月刊朝鮮에는 모두 다 김현희씨 편만 있으니까 안심하고 들어가시죠”라는 답변에, 김씨는 “칼을 댄다는 무시무시한 글을 쓴 분을 직접 보니 호리호리하시네요”라며 웃었다.
김현희씨의 ‘칼을 댄다’는 표현은 月刊朝鮮 2004년 1월호 ‘추적/MBC·SBS 등 방송들은 왜 갑자기 ‘김정일도 인정한 KAL 858機(기) 폭파사건의 조작의혹’을 다루는가’ 題下(제하) 기사에 실린 필자의 글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당시는 방송사와 좌파매체, 親北(친북)인사들이 한몸이 되어 ‘KAL 858기 폭파사건 조작설’을 제기할 무렵이었다.
필자는 기사 말미에 “역사는 친북세력들과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언론인들의 가슴에 칼을 대게 될 것이다”라고 썼다. 그녀는 지금도 그 글이 가슴에 와 닿는다고 한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품고 지금까지 좌파정권과 싸워 왔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다.
이날 김현희씨 부부와 月刊朝鮮은 저녁식사 시간을 포함해 5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月刊朝鮮에서는 金玄浩(김현호) 대표, 金容三(김용삼) 편집장, 필자, 白承俱(백승구) 기자, 金正友(김정우) 기자가 참석했다. 이날 김현희씨는 자녀교육 문제 등 생활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생활인 김현희’의 여러 모습을 그녀는 솔직담백하게 이야기했다.
필자는 김현희씨 부부와의 만남 후, ‘자연인으로서의 김현희’의 삶을 갈망했던 ‘생활인 김현희’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이제는 정말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라고 갈망했던 그녀에게 ‘평범한 삶’을 우리 사회가 돌려주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그녀를 ‘미모의 테러리스트’가 아닌 ‘좌파정권에 맞서 싸운 당찬 여인’으로 기억해 주어야 할 것이다. 4월 23일 月刊朝鮮과 김현희씨가 나눈 대화들을 문답형식 위주로 재구성한다.
“빨래하는 게 큰 일”
그녀의 억양에는 북한 사투리와 현재 생활하고 있는 지역의 사투리가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1997년 결혼과 함께 시댁이 있는 지역으로 내려간 후 6, 7년 전 친척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잠깐 들른 것을 제외하고는 이번의 서울 방문이 결혼 후 처음이라고 했다. 김현희씨 가족은 2003년 11월 집을 나온 후 전화도 없고 컴퓨터도 없는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큰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이고 둘째 아이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여가 때는 주로 뭐하십니까.
“빨래하는 게 제일 큰일이고(웃음), 애들 뒷바라지하는 것도 제게는 중요한 일이죠.”
―세탁기가 없습니까.
“있긴 있는데 물이 잘 안 나와요. 보통 1시간이면 빨래가 끝나잖아요. 그런데 4시간이 더 걸립니다. 물이 잘 안 나오니까. 통에 물을 받아서 넣고 하다 보면 4시간이 더 걸립니다. 북한에서 했던 생활을 그대로 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국가로부터 정신적, 물질적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물질적 보상을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 가족이 이렇게 집을 나와 있는 게, 아무 이유 없이 나와 있는 겁니까. 지금에 와서 자꾸 ‘그 집 팔고, 다른 집 가면 되지 않으냐’고 그래요. 우리가 살던 집이 5년반째 그대로 있거든요. 사실 그 집이 증거 아닙니까. 지금 안 그래도 국정원이 저한테 폭파사건에 대한 조작진술을 강요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없다고 하는데, 그것까지 팔 수는 없죠. 사실 지금 사는 데가 참 어렵거든요. 보일러도 옛날식인데다가, 물도 잘 안 나와요. 북한생활을 다시 하는 것 같아요. 처음에 가니까, 부엌도 콧구멍만 하고 버너로 밥과 국을 끓였어요. 국을 끓이다 보면 금방 불이 죽고, 불이 죽으면 또 흔들어서 쓰고, 밥을 못할 정도였어요.”
쥐들이 득실대는 비좁고 낡은 집에서 감금 생활
―집이 비좁고 낡았나 보죠?
“부엌이고 화장실이고 하도 좁아서 혼자 외에는 못 들어갑니다. 생쥐하고 바퀴벌레가 약을 놔도 3개월 지나면 또 생겨요. 쥐가 집에도 막 들어와요. 그게 참 영리하데요. 사람 있으면 못 나가고 있다가, 문 열면 확 나가는 쥐가 많거든요. 바퀴벌레도 요즘 바퀴는 (집게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이만해요. 서양 바퀴인지. 지난 3월에 부산 가기 전날에도 새벽에 자다가 일어나서 이불 위로 지나가는 큼지막한 바퀴벌레를 잡다가 잠을 설쳤어요. 그런데 그런 곳에서 사는 저를 그날은 국가원수 경호하듯이 그러니까 그것도 참 어색하데요.”
―물이 지금도 잘 안 나옵니까.
“처음엔 물이 조금 나왔는데, 겨울이 되면 얼어서 물이 안 나와요. 설날에는 수도가 꽁꽁 얼어서 밥을 못 해 먹었어요. 밑에 가서 물을 길어 왔는데 물이 아까워서 설거지도 못하고. 화장실에 물도 못 내렸어요. 북한에서 그런 걸 봤었는데, ‘이야, 북한 생활을 여기서 하는구나’ 싶더군요. 한 달 정도 지나니까 녹아서 물이 나오는데, 물 색깔이 이상해요.”
그녀의 물과 관련된 이야기는 계속됐다.
“물이 나오더라도 이번에는 수압이 낮아서 잘 안 나와요. 안 나오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돼요. 겨울에는 세탁기를 한 번 돌리면 사흘 정도 걸려요. 물을 길어다 부어야 되니까요. 야밤에 빨랫감을 들고 다른 집에 가서 해 오게 했는데, 그것도 못할 짓이데요. 보일러도 기름보일러인데 하도 낡아서 제대로 작동을 못해요. 나중에 보니까 하도 낡아서 관 자체를 다 바꿔야 한다더군요.”
―탈북 여성 한 분한테 남한에 와서 가장 좋은 점이 무어냐고 물어 보니까 더운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하던데요.
“그렇죠. 북한에선 더운물 못 써요. 찬물만 쓰지. 찬물도 나오는 시간이 있어요. 아침에 2시간, 물 받아 놓고 그 물을 쓰고, 저녁에 또 한번 쓰고 그러죠. 물이 안 나오니까 진짜 스트레스 받더라고요.”
―지금도 그런가요.
“지금 조금씩 나오긴 하는데, 겨울이 되면 또 그러겠죠.”
북한보다 남한에서 산 시간이 더 많아
김현희씨는 1962년 생이다. 1987년 말 대한민국으로 압송됐을 때의 나이는 만 25세였다. 대한민국에서의 생활도 올해로 22년째다.
―요즘 북쪽 소식은 듣는 게 있습니까.
“매스컴에 나오는 게 다죠.”
―몇 년만 더 있으면 북한에서 산 시간보다 남한에서 산 시간이 더 많아지네요.
“저는 태어난 다음해부터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 3등 서기관으로 부임해 가는 아버지를 따라가 1967년까지 쿠바에서 살다 왔어요. 벌써 북한에서 지낸 시간보다 남한에서 지낸 시간이 많아진 셈이죠.”
―서울로 와서 정착하는 게 더 좋지 않나요?
“어휴. 그런데요. 오늘도 차 타고 오면서 서울에서는 못 살겠다고 얘기했어요. 큰 빌딩도 많고 차도 많고, 12년 전 여기서 살 땐 몰랐는데, 오랜만에 오니까, 못 살 것 같던데요. 이 복잡한 데서 어떻게 살았나 싶었어요.”
―서울에 있었으면 정신적으로 더 많이 힘들었을 것이라는 말로 들리네요.
“서울에 있었으면 이만큼 못 견뎠죠. 저는 남편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이만큼 버텼고, 살 수 있었어요. 안 그랬으면 버티지도 못했고, 살지도 못했어요.”
―얼마 만에 서울에 오신 겁니까.
“1997년에 결혼하면서 아예 지방으로 내려갔고, 친척분이 상을 당해서 잠깐 올라온 것 치면 한 6~7년 만에 온 것이죠. 서울이 옛날과 굉장히 많이 바뀌었어요.”
―거리를 다니다 보면 알아보는 사람은 없나요.
“모자를 쓰고 다니니까 요즘은 없어요. 말씨는 서울에 있을 땐 몰랐는데, 지금은 경상도 말씨하고 많이 섞여 있으니까 제가 얘기하면 ‘연변에서 오셨냐’고 물어요. 아직 북한 억양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해요.”
10평짜리 일식집 운영하기도
―지금 착용하고 있는 안경은 도수가 없는 건가요.
“그냥 변장용으로 내내 꼈었는데 이제 나이가 드니까 껴야 되겠더라고요.”
―거리를 다닐 때 진짜 알아보는 사람이 없습니까.
“결혼 초기에는 가끔 알아보고 그랬는데, 지금은 제가 많이 변했나 봐요.”
―김현희씨의 얼굴을 기억하는 분들의 생각 속에는 생머리에 다소곳한 이미지가 각인돼 있을 겁니다. ‘김현희를 닮았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습니까.
“서울에 있을 때는 많이 들었어요. 그땐 친척집에서 있었는데, 한 총각이 그러데요. ‘김현희씨죠?’ 그래요. 아니라고 하니까, 막 닮았다고 그래요. 그땐 그런 소리 많이 들었어요. 서울 사람들이 눈썰미가 좋아요. 그런데 시골은 정치문제에 무관심하니까 그게 좀 편하죠.”
―미장원에는 가십니까.
“미장원에는 가야죠. 그럼 집에서 어떻게 머리를 자릅니까.”
―미장원 종업원은 김현희씨를 잘 모릅니까.
“내색을 안 하니까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어요.”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성형수술을 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정말 성형수술 하셨습니까.
“성형수술 한 적 없어요. 이게 성형수술 한 얼굴이면(웃음).”
―결혼 후 벌인 사업이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일식집을 했는데 10평짜리 규모로 작은 식당이었어요. 가맹점으로 세를 들어서 했는데 가맹점주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가맹점 인정을 안해 주는 거예요. 그럴 사람이 아닌데도요. 그것도 (외부에서 개입했다는) 냄새가 나더라고요. 매스컴에서 저를 ‘가짜다’ 하고 보도한 후 저를 가짜인 줄 알고 친척, 친구 다 등 돌리는 거예요. 애 아빠를 아는 친구들도 일부러 슬슬 피하고요. 완전히 고립을 시키는 것 있잖아요. 다행히 그래도 애 아빠 친구들 중에는 ‘어려우면, 빈 방이 있으니까, 갈 데 없으면 오라’고 하는 분들이 있어요. 말이라도 고맙지 않습니까.”
―친구는 있습니까.
“사실 친구가 없어요. 처음에는 안기부 사람들과 거의 친구처럼 지냈어요. 국정원은 저한테 제2의 고향이잖아요. 그런데 그때 그런 일이 생기니까, 진짜 등에 칼을 맞는 느낌이었어요. 그땐 세상이 싫더군요. 인간이 싫어지고….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그 당시엔 국정원의 ‘국’자만 들어도 싫었어요.”
아이들에게 미안
―아이들은 김현희씨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잘 모르죠?
“모르죠. 또 왜 이렇게 사는지를 잘 모르죠. 뭐가 좀 이상하다 그러죠. 큰애는 남자가 돼서 말이 별로 없어요. 최근에 趙甲濟(조갑제) 前(전) 月刊朝鮮 대표가 쓴 <김현희의 전쟁>을 무심코 책상에 올려놨는데, 그걸 큰애가 본 거예요. 제목의 漢字(한자)는 모르지만, 뒤표지에는 제 사진도 있고 이름도 한글로 돼 있고 그러니까. ‘엄마 옛날 이름이 김현희였어요?’ 하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아니라고 대답하니까, ‘에이’ 그러면서 더 이상 말은 안 하더라고요.”
―다 눈치로 아는 거죠.
“예. 더 크면 이해하게 될 건데….”
―큰아이는 좀 알고 있는 것 같고, 그럼 둘째 아이는요.
“딸애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데, 얼마 전 일본인 납북자 가족모임 사람들과 제가 만나는 게 TV 뉴스에 많이 나왔잖아요. 그 뉴스를 보다가 작은 애가 ‘엄마 저기 나왔네’ 그러더라고요. ‘보지 말라’고 그러고 지나갔어요.”
―자녀들이 사춘기가 되면 힘드시겠네요.
“그때 가면 이야기해야죠.”
―아이들은 누구를 닮았습니까.
“아들은 저를 닮았다고들 그래요. 딸은 반만 닮았다고 그러고요.”
―아이들 학교엔 가 봤습니까.
“일절 안 가요. 그래서 애들한테 미안하죠. 큰아이한테 ‘너는 회장, 부회장 뽑을 때 손 들지 말라’고 했어요. 회장, 부회장에 뽑히면 엄마가 학교에 가서 다 해야 하니까요. ‘엄마는 나이가 많으니까 젊은 엄마들이 잘하겠지’ 하니까, ‘우리 선생님 어떻게 생겼는지 와서 봐’ 하는 거예요. 학교에 오라는 거죠. 하지만 저는 갈 수 없죠. 아이들한테 미안해요.”
―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합니까.
“전에 강연하면서 모은 돈을 아껴서 그걸로 그냥 먹고살고 있어요. 다행히 시골은 서울보다 물가가 싸서 견딜 만해요. 서울에선 그렇게 못 살았을 거예요.”
1991년 6월 펴낸 김현희씨의 手記(수기)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는 한국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녀는 자신의 수기로 벌어들인 인세 8억5000만원을 KAL 858기 유족회에 줬다. 유족회 회원 중 일부는 김현희씨를 가짜로 모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오직 죽어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35호실 소속 공작원으로 있다가 脫北(탈북)한 朴健吉(박건길)씨는 月刊朝鮮 2009년 5월호와의 인터뷰에서 KAL 858기 폭파사건 이후 북한 對南(대남)공작 부서의 변화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폭파공작은 성공했지만 공작원 교육은 더욱 엄격해졌어요. 특히 여자 공작원은 목숨을 아까워하니까 조심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어요. 공작원 자살용 독약도 바뀌었지요. 청산가리 대신에 복어 毒(독)을 이용한 ‘뻬쁘로독신’(테트로도톡식)으로 변경됐습니다….”
―KAL 858기 폭파사건 이후 자살용 독약 성분을 강화하고 공작원들에게 목숨을 버리는 훈련을 더 시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지요.
“실패원인을 분석해서 다시 연구를 했겠죠.”
―여자 공작원은 목숨을 아까워하니까 조심해야 한다는 인식도 생겼다는데요.
“그런 훈련(음독자살)까지는 안 받았거든요. ‘마지막 순간에 해야 된다’ 정도였죠. 방법은 처음이었어요. 앰풀도 처음 봤고, 실험해 본 것도 아니고요. 연습해 본 것도 아니고, 그냥 깨물면 저절로 기화된다고 알았죠. 정신교육은 물론 받았지만요.”
김현희씨는 1987년 12월 1일 바레인 공항에서 담배 개비 안에 든 독약 앰풀을 깨물어 자살을 시도했다. 순간 바레인 경찰이 김씨를 덮치는 바람에 자살에 실패했다. 경찰이 김씨를 덮치는 순간 옆에 있던 KAL 858기 폭파사건 주범인 金勝一(김승일)은 독약 앰풀을 깨물어 그 자리에서 죽었다.
―독약앰풀을 깨물 때 심정이 어땠습니까.
“그 찰나에는 정신이 없었죠. 오직 죽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급박한 상황에서 (경찰들이) 여권을 뺏어갔어요. ‘일본으로 가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일본으로 가면 안되니까 비행기에서 깨물자고 약속을 했는데, 예상 밖으로 앰풀을 빼앗기는 판이니까 급해서 깨물었죠. (경찰이)덮치고 그러니까 제대로 안됐나 봐요.”
―공작원으로 뽑히지 않았다면 북한서 평범하게 평지풍파 없이 잘 살았을 것 같습니다.
“어느집 며느리로 갔을지도 모르죠. 북에 있을 때는 개인보다는 국가와 수령을 위해서 싸우자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중앙당에 불려 가서 차출되면 영광인 줄 알았죠.”
―1987년 당시 남한에서 대통령 선거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까.
“88 서울올림픽 앞두고, 다른 나라들이 올림픽 참가 신청을 하기 전에 이런 걸(대한항공기 폭파) 하라는 지시가 위에서 있었나 봐요. 그렇게 되면 다들 겁을 먹고 올림픽 참가 신청을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거죠. 선거라는 말은 듣지도 못했어요. 저는 중국에 있다가 임시적으로 동원됐어요. 김승일 하고는 할아버지와 손녀로 위장하면 호흡이 잘 맞는 것으로 봤던 것 같아요. 김승일이 연구를 많이 했고 저는 보조역할이었죠. 김승일이 못하면 제가 해야 되는 그런 역할이었죠.”
―대부분 국민들은 김승일의 존재 자체를 잊었습니다. 김현희씨 단독범행인 줄 압니다.
“그런데다가 제가 가짜냐, 진짜냐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아휴, 정말….”
―김현희씨의 변호를 맡았던 安東壹(안동일) 변호사가 쓴 <나는 김현희의 실체를 보았다>라는 책에는 김현희씨의 손이 크다고 나왔던데요.
“작지는 않고, 뼈대는 있는 편이죠(웃음).”
―한국에 오기 전에 운동을 많이 했나요.
“아무래도 일반 사람보다는 조금 몸이 좋았죠.”
―특수훈련을 받아서 맨손으로 쇠를 깬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연습은 했는데 저희는 해외 파트니까 군살이 배지 않도록 그렇게 심하게 하지는 않아요. 남자들은 진짜 몇 년 동안 하면 손에 표시가 나요.”
남편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
―KAL 858기 폭파사건 자체를 모르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직자들까지 나서서 사건이 조작됐다고 하니까 그 사건에 의혹을 갖는 젊은이들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TV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저에 대한 방송이 나온 다음에 제 주변 사람들도 그러더라고요. ‘솔직히 말해 봐라. 진짜냐 가짜냐’고요.”
―좌파들은 도대체 뭘 원해서 그런다고 생각합니까.
“제 입을 통해서 ‘KAL 858기 폭파사건은 김정일이 지시한 게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죠.”
―그런 말을 하도록 직접 압력을 받았습니까.
“차라리 방송에 나와서 그렇게 말하라고 하면 솔직한 거죠. 이건 계속 뒤에서 함정을 파 놓고는 괴롭히는 거예요. 방송을 보면 제가 진짜라고 하는 것이 10%나 됩니까. 그 방송을 보면 다 제가 가짜라고 그러지, 누가 진짜라고 합니까. 그렇게 수세에 몰리게 해서 제 스스로 가짜라고 그렇게 말하게끔 유도하는 거죠. 하지만 이 좌파 세력한테는 강하게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덤벼들지 않지, 약하게 보이면 막 덤벼들고 그럽니다.”
―험난한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험난한 여정이 계속되고 있는데 표정이 맑습니다. 道人(도인) 같습니다.
“(남편을 가리키며) 여기 도사 같은 분이 있잖아요. 정신적으로 많이 도움을 받습니다.”
―항간에는 특수훈련을 받은 김현희씨가 남편을 때린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일부러 우리 부부가 이혼할 거라는 등 그런 소문을 흘리는 것 같아요. 남편과 저를 갈라놔야 자기들이 원하는 일을 보다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어떤 스타일의 남자를 좋아하십니까.
“원하는 스타일은 나이에 따라 바뀌는 것 같아요. 젊어서는 외모를 많이 보거든요. 영화배우같이 잘 생긴 남자들이 눈에 확 들어오잖아요. 서른이 넘으니까, 외모가 안 들어와요. 이해해 주고, 마음 따뜻한 남자, 그런 사람이 마음에 끌리고 그러죠. 20대에 결혼했으면 외모 보고 결혼했을 거예요. 30대가 넘으니까, 외모가 안 들어와요. (남편이) 마음이 따뜻한 편이거든요.”
―남편의 어떤 점이 좋습니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죠. 제가 자유롭게 밖에 못 나가고, 갇혀 있는 생활을 하고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다 오면 막 자랑하고 싶어 하면서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 못하거든요. (남편은) 어디를 갔다 오면 土産品(토산품)이라도 하나 사 오든지, 말 한마디라도 혼자 갔다 와서 미안하다느니 그런 말을 해요. 평소에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런 게 참 고맙더라고요.”
―남편이 있어서 든든하죠?
“그럼요. 우리 가족의 방패인데요. 제가 친구를 사귈 수 없는 게 사람을 자유롭게 만날 수 없는 갇힌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누가 볼까봐 처음엔 마당에도 못 나가게 했어요. 집에서 통통 뛰고 그랬다니까요. 감옥생활이죠. 지금 사는 곳에 와서도 보호라고 하지만, 사실상은 감시죠. (남편은) 그 과정을 너무 잘 아는 사람이니까 다행이죠. 어디를 가도 항상 보고해야 되고, 경호원이 같이 따라다니고…. 다른 사람이라면 그 스트레스 때문에 1년도 못 돼서 이혼했을 거예요. 그런데 (남편은) 그걸 잘 아니까. 이해를 해 주죠.”
“살아야지, 살아야지”
―좌파정권에 시달릴 때 혹시 극단적인 생각은 안 들던가요.
“저를 얼마나 흔들었습니까. 정치적으로 괴롭히고, 힘들게 했죠. 지난 정부는 저를 비롯해 북한에 해롭게 했던 사람들은 다 괴롭혔어요. 자살로 죽든 결국 죽으라는 거였죠. 집에서 쫓겨 나와서 환경이 안 좋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애들도 많이 아팠어요. 사실, 저도 많이 아팠습니다. 병원도 못 다녔고요. 조그만 애들이 환경이 바뀌니까 1년 동안 내내 아프데요. 자는 애들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애들이 엄마 잘못 만나서 고생한다고.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어요.”
―그런 걸 노렸던 거겠죠.
“그렇죠. 그렇지만 제가 마음을 약하게 먹으면 지는 거잖아요. 제가 죽으면 진짜 좋아할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진짜가 가짜 되는 거죠. ‘살아야지, 살아야지’ 이렇게 다짐하며 견뎌 왔습니다.”
―허리 디스크는 치료를 했나요.
“병원엘 못 다녔죠. 지금도 앉으면 좀 아프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오십견도 오고 그러더라고요. 한동안 어깨를 못 썼어요.”
―집에서 나온 뒤로 살이 많이 빠진 거죠?
“네.”
―앞으로 공개적인 활동을 조금씩 넓혀 갈 생각입니까.
“예. 아무래도 이렇게 됐으니까요. 사실 결혼하면서 그냥 조용히 살려고 했어요. 유가족들도 저한테 ‘나오지 말라’고 했고 그 입장도 존중해 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나가고 싶어서 나가는 게 아니죠.”
―金大中(김대중) 정권보다는 盧武鉉(노무현) 정권에서 더 시달린 거죠?
“네. 김대중 정권은 제가 큰애 낳고 둘째도 갖고 하는 상황이니까 액션을 못했나 봐요. 노무현 때는 둘째 젖 떼자 마자 막 본격적으로 제가 가짜라는 소설도 나오고 하는 걸 보면서 진짜 본격적으로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노무현 정권 초부터 정권 차원에서 공작이 시작됐거든요.”
―테러위협 같은 건 느낀 적 없습니까.
“경찰이 신변을 보호한다고 하고, 국정원이 정보관리 하고, 사실 다 관리하거든요. 직접적인 테러위협보다는 노무현 정권 때 저한테 그런 식으로 하는 것에 더 위협을 느꼈죠.”
―일종의 테러를 당한 셈이네요.
“네.”
―李明博(이명박) 정부에서도 김현희씨의 대외활동에 참견을 합니까.
남편 정씨가 대신 대답했다.
“예. 왜냐하면 대외활동이란 게 정부를 끼지 않고는 하기 힘들어요. 신변위협이 상당히 높고, 보안활동을 해야 하니까요. 실제 경비는 경찰이 하고 있고, 큰 행사를 하면 국정원과 경찰이 같이 해야 되고 복잡해요. 지금 상황은 많이 호전됐고요, 국정원이나, 경찰이나 잘해 주고 있어요.”
노래방에서 좋아하는 노래는 <만남>
―술은 평소에 좀 하십니까.
“좋아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자주 하진 못하죠.”
―속상해서 담배 배워 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습니까.
“그런 적은 없고요. 누구는 술로 달랜다고 그러는데 그런다고 풀어지나요?”
―남편께서는 저희 사무실에 오면 자기는 심부름꾼이래요. “나는 모든 것을 김의 허락을 받아야 된다”고 그러는데 관계 요로에 편지를 쓰기로 한 것은 누가 결정한 겁니까.
“그냥 뭐, 합심해서 써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가수 ‘소녀시대’를 아십니까.
“요즘 연예인들은 잘 몰라요.”
―노래방에는 가 보셨습니까.
“네.”
―노래방에 가면 무슨 노래를 부릅니까.
“옛날 노래예요. <만남> 같은 노래를 부르는데 요즘 노래는 몰라요.”
―교회에는 안 나가십니까.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교회 나가기가 힘들죠. 집에서 기독교TV를 보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어요. 좋은 말씀 많이 나오더라고요.”
―대한민국을 위해서 일을 하셔야죠.
“제 존재 자체가 그 일을 하는 거죠. 제가 뭐 북한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투표는 한 적 있나요.
“주소가 서울로 돼 있어서 해 본 적이 없어요. 서울로 와야 하니까 하고 싶어도 못했어요.”
―탈북자들도 많이 들어오고. 탈북자 중에도 대표성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 된다고 보는데 혹시 시대가 요구하면 국회의원을 해 보실 마음이 있으십니까.
“저 말고도 똑똑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수기를 쓸 생각은 없습니까.
“그런 얘기를 하는 분들이 많아요. 일본에서도 책을 썼으면 하는데,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네요.”
―돈을 벌 목적을 가졌다면, 지금 엄청 많이 벌 수 있을 텐데요.
“우리가 돈 그런 것 보고 싸워 온 게 아닙니다. 정권에서 그동안 회유해 온 게 그런 겁니다. 신변도 보장해 주겠다고 그러는데 우리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뭐 능력이 없습니까. 잘 먹고 소박하게 살고 있는데요. 그런 걸로 우리를 자꾸 꼬시려고 합니다.”
애들 숙제 봐 줘야
―벡스코 행사 후에 꽤 오래 몸살을 앓았다면서요.
“예. 감기에 몸살이 와 가지고. 주부처럼 살다가 만 12년 만에 공개된 자리에 나가려니까 긴장이 많이 됐어요. 얼굴도 쪼글쪼글하지, 아 나가야 되나, 하는 고민도 했어요.”
―1990년 사면 후 가진 기자회견 때보다 더 떨렸습니까.
“그땐 뭘 모르고 나갔으니까요. 이번에는 일본말도 한참 안 하다가 하려니까 부담됐고요.”
―일본어는 그래도 어릴 때 배워서 쉽게 기억이 났나 봐요.
“예. 다행히 금방 기억이 났어요.”
―사는 곳이 농촌은 아닌 것 같아요.
“네. 애들 학교 다녀야 되니까요.”
―아이들은 학교에 버스 타고 다닙니까. 걸어 다닙니까.
“걸어 다녀요.”
―아이들이 친구는 잘 사귀나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애들 친구를 집으로 오라고 할 수도 없고. 제 처지에 제가 갈 수도 없고요.”
―오늘 내려가야 합니까.
“애들이 아직 어려서요. 숙제도 하나 하나 다 봐 줘야 하고요.”⊙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라며 한 남자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평범한 삶을 살고자 했지만,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김현희씨의 얼굴은 사진으로 봤던 과거의 모습과 비교해 많이 야위어 있었다.
알려진 대로 그녀는 둘째 아이가 돌을 막 지난 무렵이었던 2003년 11월, MBC 취재진에 자신의 집이 노출된 다음날 새벽 그곳을 떠나 지금까지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좌파정권하에서 그녀는 “‘KAL858기 폭파 사건’은 조작됐고, 김정일의 공작지시는 없었다”는 대답을 직간접적으로 강요받았다. 그녀는 그 배후 중의 하나가 좌파정권하의 국정원이었다고 주장하며 국정원의 공식사과와 책임자 문책을 요구하고 있다. 국정원이 자신을 가짜로 모는 프로그램을 제작 중인 MBC 출연을 요구했고, 국정원 간부로부터는 제3국으로 이민을 떠나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좌파정권하의 ‘싸늘했던 시대’가 ‘평범한 여자’로 살아가고 싶었던 그녀의 바람을 철저하게 짓밟은 것이다. ‘살벌한 시대’는 그녀를 투사로 만들었고, 살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더 강해져야 했다고 한다. 그 결과가 그녀에게 안겨준 것은 ‘야윈 얼굴’이었다.
좌파정권에 맞선 당찬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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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 858기 폭파 사건과 관련 재판을 받던 시절의 김현희씨 모습. |
“김(정씨는 다른 사람 앞에서는 부인 김현희씨를 ‘김’이라고 호칭했다)이 강한 정신력 없는 일반인이었으면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을 겁니다.”
그런 고통의 시절이 마무리되어 간다고 느낀 것일까. 그녀는 지난해 연말 필자에게 크리스마드 카드를 보내 왔다.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힘들고 보람 있는 한 해였습니다. 어려운 저에게 늘 격려와 힘이 되어 주신 은혜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
승용차에서 내린 김현희씨는 “사무실에 기자들이 많은가”부터 물었다. 많은 사람의 시선을 동시에 받는다는 게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그녀는 지난 3월 부산에서 있었던 일본인 납북자 가족들과의 만남 후 열흘 가까이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필자의 “月刊朝鮮에는 모두 다 김현희씨 편만 있으니까 안심하고 들어가시죠”라는 답변에, 김씨는 “칼을 댄다는 무시무시한 글을 쓴 분을 직접 보니 호리호리하시네요”라며 웃었다.
김현희씨의 ‘칼을 댄다’는 표현은 月刊朝鮮 2004년 1월호 ‘추적/MBC·SBS 등 방송들은 왜 갑자기 ‘김정일도 인정한 KAL 858機(기) 폭파사건의 조작의혹’을 다루는가’ 題下(제하) 기사에 실린 필자의 글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당시는 방송사와 좌파매체, 親北(친북)인사들이 한몸이 되어 ‘KAL 858기 폭파사건 조작설’을 제기할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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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씨가 김성동 기자에게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 |
이날 김현희씨 부부와 月刊朝鮮은 저녁식사 시간을 포함해 5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月刊朝鮮에서는 金玄浩(김현호) 대표, 金容三(김용삼) 편집장, 필자, 白承俱(백승구) 기자, 金正友(김정우) 기자가 참석했다. 이날 김현희씨는 자녀교육 문제 등 생활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생활인 김현희’의 여러 모습을 그녀는 솔직담백하게 이야기했다.
필자는 김현희씨 부부와의 만남 후, ‘자연인으로서의 김현희’의 삶을 갈망했던 ‘생활인 김현희’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이제는 정말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라고 갈망했던 그녀에게 ‘평범한 삶’을 우리 사회가 돌려주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그녀를 ‘미모의 테러리스트’가 아닌 ‘좌파정권에 맞서 싸운 당찬 여인’으로 기억해 주어야 할 것이다. 4월 23일 月刊朝鮮과 김현희씨가 나눈 대화들을 문답형식 위주로 재구성한다.
“빨래하는 게 큰 일”
그녀의 억양에는 북한 사투리와 현재 생활하고 있는 지역의 사투리가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1997년 결혼과 함께 시댁이 있는 지역으로 내려간 후 6, 7년 전 친척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잠깐 들른 것을 제외하고는 이번의 서울 방문이 결혼 후 처음이라고 했다. 김현희씨 가족은 2003년 11월 집을 나온 후 전화도 없고 컴퓨터도 없는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큰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이고 둘째 아이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여가 때는 주로 뭐하십니까.
“빨래하는 게 제일 큰일이고(웃음), 애들 뒷바라지하는 것도 제게는 중요한 일이죠.”
―세탁기가 없습니까.
“있긴 있는데 물이 잘 안 나와요. 보통 1시간이면 빨래가 끝나잖아요. 그런데 4시간이 더 걸립니다. 물이 잘 안 나오니까. 통에 물을 받아서 넣고 하다 보면 4시간이 더 걸립니다. 북한에서 했던 생활을 그대로 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국가로부터 정신적, 물질적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물질적 보상을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 가족이 이렇게 집을 나와 있는 게, 아무 이유 없이 나와 있는 겁니까. 지금에 와서 자꾸 ‘그 집 팔고, 다른 집 가면 되지 않으냐’고 그래요. 우리가 살던 집이 5년반째 그대로 있거든요. 사실 그 집이 증거 아닙니까. 지금 안 그래도 국정원이 저한테 폭파사건에 대한 조작진술을 강요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없다고 하는데, 그것까지 팔 수는 없죠. 사실 지금 사는 데가 참 어렵거든요. 보일러도 옛날식인데다가, 물도 잘 안 나와요. 북한생활을 다시 하는 것 같아요. 처음에 가니까, 부엌도 콧구멍만 하고 버너로 밥과 국을 끓였어요. 국을 끓이다 보면 금방 불이 죽고, 불이 죽으면 또 흔들어서 쓰고, 밥을 못할 정도였어요.”
쥐들이 득실대는 비좁고 낡은 집에서 감금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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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구치 야에코 씨의 오빠인 이즈카 시게오 씨(왼쪽)와 다구치 씨의 아들 이즈카 고이치로 씨가 2009년 3월 11일 부산 벡스코에서 김현희씨와 만나고 있다. |
“부엌이고 화장실이고 하도 좁아서 혼자 외에는 못 들어갑니다. 생쥐하고 바퀴벌레가 약을 놔도 3개월 지나면 또 생겨요. 쥐가 집에도 막 들어와요. 그게 참 영리하데요. 사람 있으면 못 나가고 있다가, 문 열면 확 나가는 쥐가 많거든요. 바퀴벌레도 요즘 바퀴는 (집게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이만해요. 서양 바퀴인지. 지난 3월에 부산 가기 전날에도 새벽에 자다가 일어나서 이불 위로 지나가는 큼지막한 바퀴벌레를 잡다가 잠을 설쳤어요. 그런데 그런 곳에서 사는 저를 그날은 국가원수 경호하듯이 그러니까 그것도 참 어색하데요.”
―물이 지금도 잘 안 나옵니까.
“처음엔 물이 조금 나왔는데, 겨울이 되면 얼어서 물이 안 나와요. 설날에는 수도가 꽁꽁 얼어서 밥을 못 해 먹었어요. 밑에 가서 물을 길어 왔는데 물이 아까워서 설거지도 못하고. 화장실에 물도 못 내렸어요. 북한에서 그런 걸 봤었는데, ‘이야, 북한 생활을 여기서 하는구나’ 싶더군요. 한 달 정도 지나니까 녹아서 물이 나오는데, 물 색깔이 이상해요.”
그녀의 물과 관련된 이야기는 계속됐다.
“물이 나오더라도 이번에는 수압이 낮아서 잘 안 나와요. 안 나오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돼요. 겨울에는 세탁기를 한 번 돌리면 사흘 정도 걸려요. 물을 길어다 부어야 되니까요. 야밤에 빨랫감을 들고 다른 집에 가서 해 오게 했는데, 그것도 못할 짓이데요. 보일러도 기름보일러인데 하도 낡아서 제대로 작동을 못해요. 나중에 보니까 하도 낡아서 관 자체를 다 바꿔야 한다더군요.”
―탈북 여성 한 분한테 남한에 와서 가장 좋은 점이 무어냐고 물어 보니까 더운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하던데요.
“그렇죠. 북한에선 더운물 못 써요. 찬물만 쓰지. 찬물도 나오는 시간이 있어요. 아침에 2시간, 물 받아 놓고 그 물을 쓰고, 저녁에 또 한번 쓰고 그러죠. 물이 안 나오니까 진짜 스트레스 받더라고요.”
―지금도 그런가요.
“지금 조금씩 나오긴 하는데, 겨울이 되면 또 그러겠죠.”
김현희씨는 1962년 생이다. 1987년 말 대한민국으로 압송됐을 때의 나이는 만 25세였다. 대한민국에서의 생활도 올해로 22년째다.
―요즘 북쪽 소식은 듣는 게 있습니까.
“매스컴에 나오는 게 다죠.”
―몇 년만 더 있으면 북한에서 산 시간보다 남한에서 산 시간이 더 많아지네요.
“저는 태어난 다음해부터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 3등 서기관으로 부임해 가는 아버지를 따라가 1967년까지 쿠바에서 살다 왔어요. 벌써 북한에서 지낸 시간보다 남한에서 지낸 시간이 많아진 셈이죠.”
―서울로 와서 정착하는 게 더 좋지 않나요?
“어휴. 그런데요. 오늘도 차 타고 오면서 서울에서는 못 살겠다고 얘기했어요. 큰 빌딩도 많고 차도 많고, 12년 전 여기서 살 땐 몰랐는데, 오랜만에 오니까, 못 살 것 같던데요. 이 복잡한 데서 어떻게 살았나 싶었어요.”
―서울에 있었으면 정신적으로 더 많이 힘들었을 것이라는 말로 들리네요.
“서울에 있었으면 이만큼 못 견뎠죠. 저는 남편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이만큼 버텼고, 살 수 있었어요. 안 그랬으면 버티지도 못했고, 살지도 못했어요.”
―얼마 만에 서울에 오신 겁니까.
“1997년에 결혼하면서 아예 지방으로 내려갔고, 친척분이 상을 당해서 잠깐 올라온 것 치면 한 6~7년 만에 온 것이죠. 서울이 옛날과 굉장히 많이 바뀌었어요.”
―거리를 다니다 보면 알아보는 사람은 없나요.
“모자를 쓰고 다니니까 요즘은 없어요. 말씨는 서울에 있을 땐 몰랐는데, 지금은 경상도 말씨하고 많이 섞여 있으니까 제가 얘기하면 ‘연변에서 오셨냐’고 물어요. 아직 북한 억양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해요.”
10평짜리 일식집 운영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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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1월 3일 ‘김현희 KAL 858기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천주교 신부 115인 선언’ 기자회견. 이들은 아직도 KAL 858기 사건을 조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그냥 변장용으로 내내 꼈었는데 이제 나이가 드니까 껴야 되겠더라고요.”
―거리를 다닐 때 진짜 알아보는 사람이 없습니까.
“결혼 초기에는 가끔 알아보고 그랬는데, 지금은 제가 많이 변했나 봐요.”
―김현희씨의 얼굴을 기억하는 분들의 생각 속에는 생머리에 다소곳한 이미지가 각인돼 있을 겁니다. ‘김현희를 닮았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습니까.
“서울에 있을 때는 많이 들었어요. 그땐 친척집에서 있었는데, 한 총각이 그러데요. ‘김현희씨죠?’ 그래요. 아니라고 하니까, 막 닮았다고 그래요. 그땐 그런 소리 많이 들었어요. 서울 사람들이 눈썰미가 좋아요. 그런데 시골은 정치문제에 무관심하니까 그게 좀 편하죠.”
―미장원에는 가십니까.
“미장원에는 가야죠. 그럼 집에서 어떻게 머리를 자릅니까.”
―미장원 종업원은 김현희씨를 잘 모릅니까.
“내색을 안 하니까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어요.”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성형수술을 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정말 성형수술 하셨습니까.
“성형수술 한 적 없어요. 이게 성형수술 한 얼굴이면(웃음).”
―결혼 후 벌인 사업이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일식집을 했는데 10평짜리 규모로 작은 식당이었어요. 가맹점으로 세를 들어서 했는데 가맹점주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가맹점 인정을 안해 주는 거예요. 그럴 사람이 아닌데도요. 그것도 (외부에서 개입했다는) 냄새가 나더라고요. 매스컴에서 저를 ‘가짜다’ 하고 보도한 후 저를 가짜인 줄 알고 친척, 친구 다 등 돌리는 거예요. 애 아빠를 아는 친구들도 일부러 슬슬 피하고요. 완전히 고립을 시키는 것 있잖아요. 다행히 그래도 애 아빠 친구들 중에는 ‘어려우면, 빈 방이 있으니까, 갈 데 없으면 오라’고 하는 분들이 있어요. 말이라도 고맙지 않습니까.”
―친구는 있습니까.
“사실 친구가 없어요. 처음에는 안기부 사람들과 거의 친구처럼 지냈어요. 국정원은 저한테 제2의 고향이잖아요. 그런데 그때 그런 일이 생기니까, 진짜 등에 칼을 맞는 느낌이었어요. 그땐 세상이 싫더군요. 인간이 싫어지고….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그 당시엔 국정원의 ‘국’자만 들어도 싫었어요.”
―아이들은 김현희씨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잘 모르죠?
“모르죠. 또 왜 이렇게 사는지를 잘 모르죠. 뭐가 좀 이상하다 그러죠. 큰애는 남자가 돼서 말이 별로 없어요. 최근에 趙甲濟(조갑제) 前(전) 月刊朝鮮 대표가 쓴 <김현희의 전쟁>을 무심코 책상에 올려놨는데, 그걸 큰애가 본 거예요. 제목의 漢字(한자)는 모르지만, 뒤표지에는 제 사진도 있고 이름도 한글로 돼 있고 그러니까. ‘엄마 옛날 이름이 김현희였어요?’ 하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아니라고 대답하니까, ‘에이’ 그러면서 더 이상 말은 안 하더라고요.”
―다 눈치로 아는 거죠.
“예. 더 크면 이해하게 될 건데….”
―큰아이는 좀 알고 있는 것 같고, 그럼 둘째 아이는요.
“딸애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데, 얼마 전 일본인 납북자 가족모임 사람들과 제가 만나는 게 TV 뉴스에 많이 나왔잖아요. 그 뉴스를 보다가 작은 애가 ‘엄마 저기 나왔네’ 그러더라고요. ‘보지 말라’고 그러고 지나갔어요.”
―자녀들이 사춘기가 되면 힘드시겠네요.
“그때 가면 이야기해야죠.”
―아이들은 누구를 닮았습니까.
“아들은 저를 닮았다고들 그래요. 딸은 반만 닮았다고 그러고요.”
―아이들 학교엔 가 봤습니까.
“일절 안 가요. 그래서 애들한테 미안하죠. 큰아이한테 ‘너는 회장, 부회장 뽑을 때 손 들지 말라’고 했어요. 회장, 부회장에 뽑히면 엄마가 학교에 가서 다 해야 하니까요. ‘엄마는 나이가 많으니까 젊은 엄마들이 잘하겠지’ 하니까, ‘우리 선생님 어떻게 생겼는지 와서 봐’ 하는 거예요. 학교에 오라는 거죠. 하지만 저는 갈 수 없죠. 아이들한테 미안해요.”
―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합니까.
“전에 강연하면서 모은 돈을 아껴서 그걸로 그냥 먹고살고 있어요. 다행히 시골은 서울보다 물가가 싸서 견딜 만해요. 서울에선 그렇게 못 살았을 거예요.”
1991년 6월 펴낸 김현희씨의 手記(수기)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는 한국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녀는 자신의 수기로 벌어들인 인세 8억5000만원을 KAL 858기 유족회에 줬다. 유족회 회원 중 일부는 김현희씨를 가짜로 모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오직 죽어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35호실 소속 공작원으로 있다가 脫北(탈북)한 朴健吉(박건길)씨는 月刊朝鮮 2009년 5월호와의 인터뷰에서 KAL 858기 폭파사건 이후 북한 對南(대남)공작 부서의 변화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폭파공작은 성공했지만 공작원 교육은 더욱 엄격해졌어요. 특히 여자 공작원은 목숨을 아까워하니까 조심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어요. 공작원 자살용 독약도 바뀌었지요. 청산가리 대신에 복어 毒(독)을 이용한 ‘뻬쁘로독신’(테트로도톡식)으로 변경됐습니다….”
―KAL 858기 폭파사건 이후 자살용 독약 성분을 강화하고 공작원들에게 목숨을 버리는 훈련을 더 시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지요.
“실패원인을 분석해서 다시 연구를 했겠죠.”
―여자 공작원은 목숨을 아까워하니까 조심해야 한다는 인식도 생겼다는데요.
“그런 훈련(음독자살)까지는 안 받았거든요. ‘마지막 순간에 해야 된다’ 정도였죠. 방법은 처음이었어요. 앰풀도 처음 봤고, 실험해 본 것도 아니고요. 연습해 본 것도 아니고, 그냥 깨물면 저절로 기화된다고 알았죠. 정신교육은 물론 받았지만요.”
김현희씨는 1987년 12월 1일 바레인 공항에서 담배 개비 안에 든 독약 앰풀을 깨물어 자살을 시도했다. 순간 바레인 경찰이 김씨를 덮치는 바람에 자살에 실패했다. 경찰이 김씨를 덮치는 순간 옆에 있던 KAL 858기 폭파사건 주범인 金勝一(김승일)은 독약 앰풀을 깨물어 그 자리에서 죽었다.
―독약앰풀을 깨물 때 심정이 어땠습니까.
“그 찰나에는 정신이 없었죠. 오직 죽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급박한 상황에서 (경찰들이) 여권을 뺏어갔어요. ‘일본으로 가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일본으로 가면 안되니까 비행기에서 깨물자고 약속을 했는데, 예상 밖으로 앰풀을 빼앗기는 판이니까 급해서 깨물었죠. (경찰이)덮치고 그러니까 제대로 안됐나 봐요.”
―공작원으로 뽑히지 않았다면 북한서 평범하게 평지풍파 없이 잘 살았을 것 같습니다.
“어느집 며느리로 갔을지도 모르죠. 북에 있을 때는 개인보다는 국가와 수령을 위해서 싸우자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중앙당에 불려 가서 차출되면 영광인 줄 알았죠.”
―1987년 당시 남한에서 대통령 선거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까.
“88 서울올림픽 앞두고, 다른 나라들이 올림픽 참가 신청을 하기 전에 이런 걸(대한항공기 폭파) 하라는 지시가 위에서 있었나 봐요. 그렇게 되면 다들 겁을 먹고 올림픽 참가 신청을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거죠. 선거라는 말은 듣지도 못했어요. 저는 중국에 있다가 임시적으로 동원됐어요. 김승일 하고는 할아버지와 손녀로 위장하면 호흡이 잘 맞는 것으로 봤던 것 같아요. 김승일이 연구를 많이 했고 저는 보조역할이었죠. 김승일이 못하면 제가 해야 되는 그런 역할이었죠.”
―대부분 국민들은 김승일의 존재 자체를 잊었습니다. 김현희씨 단독범행인 줄 압니다.
“그런데다가 제가 가짜냐, 진짜냐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아휴, 정말….”
―김현희씨의 변호를 맡았던 安東壹(안동일) 변호사가 쓴 <나는 김현희의 실체를 보았다>라는 책에는 김현희씨의 손이 크다고 나왔던데요.
“작지는 않고, 뼈대는 있는 편이죠(웃음).”
―한국에 오기 전에 운동을 많이 했나요.
“아무래도 일반 사람보다는 조금 몸이 좋았죠.”
―특수훈련을 받아서 맨손으로 쇠를 깬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연습은 했는데 저희는 해외 파트니까 군살이 배지 않도록 그렇게 심하게 하지는 않아요. 남자들은 진짜 몇 년 동안 하면 손에 표시가 나요.”
남편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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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 김현희양이 여의도 침례교회에서 신도들과 함께 예배를 보고 있다. |
“TV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저에 대한 방송이 나온 다음에 제 주변 사람들도 그러더라고요. ‘솔직히 말해 봐라. 진짜냐 가짜냐’고요.”
―좌파들은 도대체 뭘 원해서 그런다고 생각합니까.
“제 입을 통해서 ‘KAL 858기 폭파사건은 김정일이 지시한 게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죠.”
―그런 말을 하도록 직접 압력을 받았습니까.
“차라리 방송에 나와서 그렇게 말하라고 하면 솔직한 거죠. 이건 계속 뒤에서 함정을 파 놓고는 괴롭히는 거예요. 방송을 보면 제가 진짜라고 하는 것이 10%나 됩니까. 그 방송을 보면 다 제가 가짜라고 그러지, 누가 진짜라고 합니까. 그렇게 수세에 몰리게 해서 제 스스로 가짜라고 그렇게 말하게끔 유도하는 거죠. 하지만 이 좌파 세력한테는 강하게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덤벼들지 않지, 약하게 보이면 막 덤벼들고 그럽니다.”
―험난한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험난한 여정이 계속되고 있는데 표정이 맑습니다. 道人(도인) 같습니다.
“(남편을 가리키며) 여기 도사 같은 분이 있잖아요. 정신적으로 많이 도움을 받습니다.”
―항간에는 특수훈련을 받은 김현희씨가 남편을 때린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일부러 우리 부부가 이혼할 거라는 등 그런 소문을 흘리는 것 같아요. 남편과 저를 갈라놔야 자기들이 원하는 일을 보다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어떤 스타일의 남자를 좋아하십니까.
“원하는 스타일은 나이에 따라 바뀌는 것 같아요. 젊어서는 외모를 많이 보거든요. 영화배우같이 잘 생긴 남자들이 눈에 확 들어오잖아요. 서른이 넘으니까, 외모가 안 들어와요. 이해해 주고, 마음 따뜻한 남자, 그런 사람이 마음에 끌리고 그러죠. 20대에 결혼했으면 외모 보고 결혼했을 거예요. 30대가 넘으니까, 외모가 안 들어와요. (남편이) 마음이 따뜻한 편이거든요.”
―남편의 어떤 점이 좋습니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죠. 제가 자유롭게 밖에 못 나가고, 갇혀 있는 생활을 하고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다 오면 막 자랑하고 싶어 하면서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 못하거든요. (남편은) 어디를 갔다 오면 土産品(토산품)이라도 하나 사 오든지, 말 한마디라도 혼자 갔다 와서 미안하다느니 그런 말을 해요. 평소에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런 게 참 고맙더라고요.”
―남편이 있어서 든든하죠?
“그럼요. 우리 가족의 방패인데요. 제가 친구를 사귈 수 없는 게 사람을 자유롭게 만날 수 없는 갇힌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누가 볼까봐 처음엔 마당에도 못 나가게 했어요. 집에서 통통 뛰고 그랬다니까요. 감옥생활이죠. 지금 사는 곳에 와서도 보호라고 하지만, 사실상은 감시죠. (남편은) 그 과정을 너무 잘 아는 사람이니까 다행이죠. 어디를 가도 항상 보고해야 되고, 경호원이 같이 따라다니고…. 다른 사람이라면 그 스트레스 때문에 1년도 못 돼서 이혼했을 거예요. 그런데 (남편은) 그걸 잘 아니까. 이해를 해 주죠.”
“살아야지, 살아야지”
―좌파정권에 시달릴 때 혹시 극단적인 생각은 안 들던가요.
“저를 얼마나 흔들었습니까. 정치적으로 괴롭히고, 힘들게 했죠. 지난 정부는 저를 비롯해 북한에 해롭게 했던 사람들은 다 괴롭혔어요. 자살로 죽든 결국 죽으라는 거였죠. 집에서 쫓겨 나와서 환경이 안 좋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애들도 많이 아팠어요. 사실, 저도 많이 아팠습니다. 병원도 못 다녔고요. 조그만 애들이 환경이 바뀌니까 1년 동안 내내 아프데요. 자는 애들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애들이 엄마 잘못 만나서 고생한다고.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어요.”
―그런 걸 노렸던 거겠죠.
“그렇죠. 그렇지만 제가 마음을 약하게 먹으면 지는 거잖아요. 제가 죽으면 진짜 좋아할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진짜가 가짜 되는 거죠. ‘살아야지, 살아야지’ 이렇게 다짐하며 견뎌 왔습니다.”
―허리 디스크는 치료를 했나요.
“병원엘 못 다녔죠. 지금도 앉으면 좀 아프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오십견도 오고 그러더라고요. 한동안 어깨를 못 썼어요.”
―집에서 나온 뒤로 살이 많이 빠진 거죠?
“네.”
―앞으로 공개적인 활동을 조금씩 넓혀 갈 생각입니까.
“예. 아무래도 이렇게 됐으니까요. 사실 결혼하면서 그냥 조용히 살려고 했어요. 유가족들도 저한테 ‘나오지 말라’고 했고 그 입장도 존중해 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나가고 싶어서 나가는 게 아니죠.”
―金大中(김대중) 정권보다는 盧武鉉(노무현) 정권에서 더 시달린 거죠?
“네. 김대중 정권은 제가 큰애 낳고 둘째도 갖고 하는 상황이니까 액션을 못했나 봐요. 노무현 때는 둘째 젖 떼자 마자 막 본격적으로 제가 가짜라는 소설도 나오고 하는 걸 보면서 진짜 본격적으로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노무현 정권 초부터 정권 차원에서 공작이 시작됐거든요.”
―테러위협 같은 건 느낀 적 없습니까.
“경찰이 신변을 보호한다고 하고, 국정원이 정보관리 하고, 사실 다 관리하거든요. 직접적인 테러위협보다는 노무현 정권 때 저한테 그런 식으로 하는 것에 더 위협을 느꼈죠.”
―일종의 테러를 당한 셈이네요.
“네.”
―李明博(이명박) 정부에서도 김현희씨의 대외활동에 참견을 합니까.
남편 정씨가 대신 대답했다.
“예. 왜냐하면 대외활동이란 게 정부를 끼지 않고는 하기 힘들어요. 신변위협이 상당히 높고, 보안활동을 해야 하니까요. 실제 경비는 경찰이 하고 있고, 큰 행사를 하면 국정원과 경찰이 같이 해야 되고 복잡해요. 지금 상황은 많이 호전됐고요, 국정원이나, 경찰이나 잘해 주고 있어요.”
노래방에서 좋아하는 노래는 <만남>
―술은 평소에 좀 하십니까.
“좋아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자주 하진 못하죠.”
―속상해서 담배 배워 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습니까.
“그런 적은 없고요. 누구는 술로 달랜다고 그러는데 그런다고 풀어지나요?”
―남편께서는 저희 사무실에 오면 자기는 심부름꾼이래요. “나는 모든 것을 김의 허락을 받아야 된다”고 그러는데 관계 요로에 편지를 쓰기로 한 것은 누가 결정한 겁니까.
“그냥 뭐, 합심해서 써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가수 ‘소녀시대’를 아십니까.
“요즘 연예인들은 잘 몰라요.”
―노래방에는 가 보셨습니까.
“네.”
―노래방에 가면 무슨 노래를 부릅니까.
“옛날 노래예요. <만남> 같은 노래를 부르는데 요즘 노래는 몰라요.”
―교회에는 안 나가십니까.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교회 나가기가 힘들죠. 집에서 기독교TV를 보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어요. 좋은 말씀 많이 나오더라고요.”
―대한민국을 위해서 일을 하셔야죠.
“제 존재 자체가 그 일을 하는 거죠. 제가 뭐 북한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투표는 한 적 있나요.
“주소가 서울로 돼 있어서 해 본 적이 없어요. 서울로 와야 하니까 하고 싶어도 못했어요.”
―탈북자들도 많이 들어오고. 탈북자 중에도 대표성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 된다고 보는데 혹시 시대가 요구하면 국회의원을 해 보실 마음이 있으십니까.
“저 말고도 똑똑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수기를 쓸 생각은 없습니까.
“그런 얘기를 하는 분들이 많아요. 일본에서도 책을 썼으면 하는데,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네요.”
―돈을 벌 목적을 가졌다면, 지금 엄청 많이 벌 수 있을 텐데요.
“우리가 돈 그런 것 보고 싸워 온 게 아닙니다. 정권에서 그동안 회유해 온 게 그런 겁니다. 신변도 보장해 주겠다고 그러는데 우리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뭐 능력이 없습니까. 잘 먹고 소박하게 살고 있는데요. 그런 걸로 우리를 자꾸 꼬시려고 합니다.”
애들 숙제 봐 줘야
―벡스코 행사 후에 꽤 오래 몸살을 앓았다면서요.
“예. 감기에 몸살이 와 가지고. 주부처럼 살다가 만 12년 만에 공개된 자리에 나가려니까 긴장이 많이 됐어요. 얼굴도 쪼글쪼글하지, 아 나가야 되나, 하는 고민도 했어요.”
―1990년 사면 후 가진 기자회견 때보다 더 떨렸습니까.
“그땐 뭘 모르고 나갔으니까요. 이번에는 일본말도 한참 안 하다가 하려니까 부담됐고요.”
―일본어는 그래도 어릴 때 배워서 쉽게 기억이 났나 봐요.
“예. 다행히 금방 기억이 났어요.”
―사는 곳이 농촌은 아닌 것 같아요.
“네. 애들 학교 다녀야 되니까요.”
―아이들은 학교에 버스 타고 다닙니까. 걸어 다닙니까.
“걸어 다녀요.”
―아이들이 친구는 잘 사귀나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애들 친구를 집으로 오라고 할 수도 없고. 제 처지에 제가 갈 수도 없고요.”
―오늘 내려가야 합니까.
“애들이 아직 어려서요. 숙제도 하나 하나 다 봐 줘야 하고요.”⊙